제7화
밀턴이 캐르버를 구한 것은 어디까지나 우연이었다.
참모부에서 명령을 받고 배속지인 까마귀 요새로 이동하던 중에 전투를 벌이고 있는 아군을 발견한 것이다.
“지금 당장 포위망의 외부를 공격해야 합니다.”
제롬은 지금 당장이라도 뛰어들어서 적을 물리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밀턴은 일단 신중하게 생각했다.
‘적의 규모는 많지 않아. 우리가 외부를 치면 포위망은 구할 수 있다. 위쪽의 고지대에서 쏘는 석궁병은 좀 거슬리지만 숫자는 많지 않군. 만약 적이 쓰러진다면 퇴로는….’
밀턴은 머릿속으로 승산이 있다고 결론이 나자 바로 지시를 내렸다.
“제롬, 용병들을 이끌고 전투 지역을 우회해서 퇴로를 막고 있도록. 신호를 하면 적을 공격한다. 토미, 릭. 너희들은 나와 직접 포위망의 취약한 부분을 공격한다. 서둘러!”
“옛!”
“옛!”
“옛!”
과거 아카데미에서 배웠던 전술 교육 담당의 교사는 엄청 깐깐한 인간이었기 때문에 학점을 이수하려면 무조건 수준 이상의 점수를 따야 했다.
입으로는 엄청 투덜거리면서도 열심히 과제를 수행해야 했다.
배워봤자 쓸모없다고 생각했던 그때의 교육이 실전 경험도 없는 밀턴에게 최소한의 지휘 능력을 발휘하게 한 것이다.
그리고 전투가 벌어지자 시작부터 끝까지가 밀턴의 생각대로 흘러갔다.
사실 상황 자체가 너무나 유리한 전투였다.
밀턴의 존재 자체가 이 자리에 우연히 나타났기 때문에 적들은 전혀 대응을 하지 못했고, 포위망은 순식간에 무너졌다.
포위망 안에 있던 아군의 적절한 호응 덕분에 적들의 혼란은 더 커졌다.
덕분에 손쉬운 승리를 거두었고 적들의 퇴로에 배치한 제롬은 전과를 극대화시켰다.
무력 85의 제롬은 누구보다 앞장서서 용맹하게 검을 휘둘렀다.
거기다 밀턴은 멀리 떨어져서 보는 와중에 제롬의 머리 위에 한 가지 표시가 떠오르는 것을 봤다.
[용맹 발동. 아군의 사기가 50% 이상 올라간다.]
그러자 제롬과 함께 행동하고 있던 용병들의 기세가 확 뛰어올랐다.
“도망가지 말고 덤벼라!”
“다 죽어라!! X새끼들아!”
원래 용병들의 전투 스타일은 거칠었지만 사기가 오르자 한층 더 호전적이었다.
적들도 나름 필사적이었지만 이미 기세에서 밀린 상태였고 무엇보다 폭풍처럼 적진을 유린하는 제롬을 막을 수 있는 자가 없었다.
덕분에 적들은 거의 궤멸했고, 밀턴은 첫 전투부터 공을 세울 수 있었다.
***
“정말 포레스트 경 덕분에 살았습니다. 이 은혜는 꼭 갚도록 하겠습니다.”
“아닙니다. 아군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죠.”
“그래도 빚은 빚이죠. 앞으로 전선에서 활동하다가 제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부담 없이 말해 주십시오.”
캐르버라는 남자는 의리가 꽤 높은 남자였다.
밀턴에게 깊은 은혜를 느끼고 거기에 반드시 보답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요새에 거의 도착해 가는군요. 저기가 우리의 근거지인 까마귀 요새입니다.”
“제법 크군요.”
“예. 일단은 최대 인원 1,000명까지는 수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요새입니다. 수비에 용이하고 식량도 충분히 비축해 두고 있죠.”
목책으로 둘러싸인 까마귀 요새는 지형을 절묘하게 살려서 지어져 있었다.
국경 지대가 산맥이다 보니 여기서 적을 효율적으로 상대하기 위해서는 거점이 되는 요새가 필수였다.
서부 전선 2사령부의 관리하에 있는 요새의 숫자는 총 열 개.
이 열 개의 요새를 기점으로 정찰대를 활용해서 적의 동태를 감시하고 조우하는 적을 물리치는 것이 정찰대의 임무였다.
요새에 도착하자 캐르버는 밀턴에게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그리고 밀턴은 우선 이 요새의 책임자를 만나서 자신이 여기에 배속되었다고 신고를 했다.
“까마귀 요새에 배속을 명령받은 밀턴 포레스트입니다.”
“환영한다. 밀턴 포레스트. 내가 이 요새의 책임자인 넬슨 카디널이다.”
이름을 밝힌 남자는 척 봐도 경험이 무척 많아 보이는 노장이었다.
귀족답지 않게 강인한 얼굴과 옷 위로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선명하게 부풀어 오른 근육.
그리고 얼굴의 한쪽에 나 있는 흉터는 얼굴만 놓고 보면 귀족이 아니라 용병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넬슨 카디널이라는 남자가 전쟁터에서 살아온 시간은 무려 40년이다.
밀턴이 평생 살아온 세월보다 더 많은 시간을 전쟁터에서 보낸 백전의 노장이었다.
이 나이에 변방의 요새 관리자로 있다는 말은 출세 가도에서 멀어졌다는 말이지만 그것과 별개로 군인으로서의 능력은 충분한 사람이었다.
‘어디… 한번 볼까?’
밀턴은 슬쩍 넬슨의 상태창을 살폈다.
[넬슨 카디널]
기사 LV.9 MAX
무력 - 69 통솔 - 89
지력 - 75 정치 - 25
충성 - 0
특성 - 단결, 야습, 행군, 수성.
단결 LV.7 : 위기 상황에도 부하들을 흐트러짐 없이 통솔할 수 있다. 매복이나 야습 같은 상황에 잘 대처할 수 있다.
야습 LV.5 : 야간 공격 시 아군의 혼돈을 억제하고 적의 혼란을 극대화시켜서 전과를 올린다.
행군 LV.7 : 강인한 통솔력과 신망으로 부하들의 행군 속도를 빠르게 한다.
수성 LV.8 : 수성전에서 아군의 사기를 상승시키고 본인의 지휘력이 상승한다.
‘대단한데?’
기사로서의 레벨이 끝에 달한 사람은 처음 봤다.
능력치와 별개로 레벨이 MAX에 달했다는 것은 본인의 발전 가능성을 바닥까지 끌어냈다는 증거였다.
게다가 특성도 네 개나 있었고 본인의 능력치도 상당했다.
‘저 나이에 무력이 69라니? 거의 익스퍼트 직전의 경지인 거잖아?’
밀턴은 눈앞에 있는 노장이 그냥 출세에서 밀려난 변장의 관리직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아무리 기사라고 해도 경지에 이르지 못하면 노쇠로 인한 약화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실제로 밀턴의 고향에 있는 노기사인 샌슨 부르노도 끊임없이 자기 단련을 하지만 무력은 52였다.
그런데 동년배로 보이는 넬슨이 69라니?
‘대단한 영감님이군. 자기 관리가 저 정도면 부하들한테도 한 성깔 하겠어.’
밀턴은 새삼 자세를 바로 하고 정신을 긴장시켰다.
그런 밀턴을 향해서 넬슨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너무 긴장하지 말게. 편하게 얘기하지.”
“예. 알겠습니다.”
그는 밀턴과 마주앉아서 본격적으로 대화를 나눴다.
“레스터 왕국에 자작위를 가지고 있더군.”
“예. 그렇습니다.”
“작위를 계승한 지도 얼마 되지 않았는데 어째서 이 전쟁에 지원했나?”
넬슨의 말에 밀턴은 순간 솔직하게 대답할지 아니면 입에 발린 말을 할지 계산했다.
입에 발린 말을 하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지어낼 수 있다.
간악한 공화주의자들의 침략을 막기 위해서 어쩌고 저쩌고라고 하면 된다.
하지만….
“가문을 이어 받고 나니 집안에 막대한 빚이 있더군요.”
“저런….”
“당장 파산을 면하고 빚을 갚을 돈을 만들기 위해서는 이 방법밖에 없었습니다.”
밀턴은 솔직하게 자기 속마음을 밝혔다.
눈앞에 있는 남자의 느긋한 눈빛을 보고 있으니 속일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그래서 그냥 진실을 말해 버린 것이다.
그리고….
“솔직하게 말해줘서 고맙군. 거짓말을 하는 젊은 놈들은 질색이라서 말이야.”
밀턴의 선택은 옳았다.
넬슨은 기본적으로 알랑거리며 아부를 하는 인간을 좋아하지 않았다.
본인도 그래서 위에서 찍히고 출세를 못 하게 되어 버렸지만 말이다.
밀턴이 마음에 들었는지 넬슨은 한결 편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가문의 빚이 얼마인가?”
“8,500… 아니 10,000골드가 좀 넘습니다.”
순간 넬슨의 표정이 어이없게 변했다.
“혹시 선친께서는 도박 중독이라도 있으셨나?”
“…….”
“크흠, 실례했군. 그런데 10,000골드라….”
넬슨은 머리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했다.
“자네가 이 전선에 있으면서 녹봉으로 그 빚을 다 갚으려면… 나처럼 전선에 뼈를 묻어야겠군.”
‘이 아저씨가 남의 인생에 군말뚝을 박으려고 하네.’
밀턴은 절대 군대에 말뚝 박을 생각은 없었다.
“제가 듣기로 이 전선에서 거둔 공적에 따라서 포상이 주어진다고 들었습니다만?”
“그렇지. 틀린 말은 아니네. 우리 스트라부스 왕국인의 경우 작위와 영토 등이 주어지고, 자네 같은 외국인의 경우 현물로 받지.”
넬슨은 거기까지 말하고 싱긋 웃음을 띠고 밀턴에게 말했다.
“자네 그런 포상금을 가지고 빚을 갚겠다고 생각한 건가?”
넬슨의 표정은 마치 꿈만 가지고 도시에 올라와서 세상 물정 모르는 시골뜨기를 보는 듯했다.
사실 넬슨은 밀턴과 같은 사정을 가지고 있는 귀족을 꽤 많이 봤다.
주로 몰락 귀족들이 이런 경우가 많았다.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워서 한몫을 잡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그런 젊은이들 말이다.
하지만 실제 목표를 이루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전쟁은 그렇게 만만한 게 아니며, 공을 탐내다가 목숨을 잃는 젊은이들은 잔뜩 봤다.
넬슨은 쓰게 웃으면서 밀턴에게 말했다.
“공을 세우고자 왔다니 그걸 말릴 수는 없지. 하지만 한 가지만 명심하게.”
“말씀하십시오.”
“전쟁의 최우선 사항은 이기는 게 아니야.”
“…….”
“살아남는 거지.”
일선 지휘관이 했다고 하기에는 다소 엇나간 말이었지만 밀턴은 이 말이 꽤 가슴 깊숙하게 와닿았다.
“명심하겠습니다.”
“임무는 일주일 후부터 주어질 거야. 그때까지 푹 쉬도록 하게.”
“예. 알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밀턴의 까마귀 요새 생활이 시작되었다.
까마귀 요새에는 예비대까지 포함해서 총 800명의 병력이 있었고, 정식 직책으로는 넬슨 카디널이 천인장의 직위를 지니고 있었으며, 그 밑에 다섯 명의 백인장이 있었다.
백인장들은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 주기적으로 일대의 정찰을 해야 했다.
정찰에 백인대가 통째로 동원되는 것은 그만큼 이 정찰이 위험하기 때문이었다.
힐데스 공화국의 산악 레인저들은 산악전에 도가 튼 놈들이었고 소수의 부대로 움직이다가 놈들과 만나게 되면 도저히 살아남을 수가 없었다.
“가장 중요한건 놈들에게 위치가 발각되지 않는 겁니다. 산악전에서 적이 우리 위치를 알고 우리가 적의 위치를 모르면 그야말로 최악이죠.”
“그렇군요. 많은 참고가 됩니다.”
까마귀 요새의 백인장 다섯 명 중에서 캐르버는 밀턴에게 호의적이었다.
까마귀 요새에서 활동하면서 알아야 할 것들과 주의해야 할 것들을 하나씩 알려 주면서 밀턴과 무척 친해졌다.
다만….
“시골뜨기하고 얼간이가 사이좋게 지내는 모습이 썩 보기 좋군.”
그 이외에 세 명의 백인장은 밀턴을 싫어했지만 말이다.
루이스 워커, 버틀랜드 리가, 마레즈 카르디아.
이들 세 명은 까마귀 요새의 남은 백인장들이었다.
이들은 외부인인 밀턴을 노골적으로 싫어했다.
“워커 경.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캐르버가 일어나서 말하자 루이스는 심드렁한 표정을 하고 말했다.
“별로 지나칠 것도 없지. 엄연한 사실 아니야. 한 놈은 멀리 시골에서 참전한 시골뜨기고 다른 한 놈은 정찰 나갔다가 자기 병력의 반 이상을 말아먹은 얼간이지. 내 말이 틀렸나?”
루이스의 말에 캐르버는 얼굴을 붉혔다.
다른 건 몰라도 자신이 최근 정찰임무에서 병력을 말아먹고 간신히 살아 돌아온 것은 사실이었으니 말이다.
그때 밀턴이 자리에서 마주 일어나며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당신은 임무 중에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나 보지?”
“흥, 적어도 이 얼간이처럼 반 이상 말아먹고 온 적은 없다.”
“결국 실패한 적은 있다는 말이군.”
“…….”
“그럼 너도 충분히 얼간이잖아? 응?”
“이놈이!!”
순간 화기가 치밀어 오른 루이스가 밀턴에게 달려들려고 했다.
그러나….
“그만둡시다. 워커 경.”
“시골뜨기하고 드잡이해 봤자 아닙니까?”
루이스의 옆에 있던 다른 백인장들이 루이스를 말렸다.
군율을 강하게 적용하는 넬슨의 성격상 장교들끼리 싸움을 벌였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그냥 두지는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소란이 진정된 후에 캐르버는 걱정된다는 듯이 말했다.
“괜찮겠습니까? 포레스트 경.”
“뭐가 말입니까?”
“저 셋은 여기서 끝내지 않을 겁니다. 계속해서 시비를 걸겠죠. 어쩌면 그 이상의 행동을 취할 가능성도 충분합니다.”
캐르버의 말에 밀턴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거야 제가 어쩔 수 있는 게 아니죠. 그보다 저 셋은 왜 저를 적대하는 겁니까? 그냥 신참한테 텃세 부리는 정도가 아닌 것 같은데?”
밀턴의 말에 캐르버는 쓰게 웃으면서 말했다.
“저 셋은 자원해서 전선으로 온 것이 아니라 죄를 사면 받는 대가로 전선에 온 것이니까요.”
“응? 그게 무슨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