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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의 게임-6화 (6/257)

제6화

“익스퍼트 상급입니다.”

“상급이라고?”

밀턴은 겉으로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속으로는 침착했다.

‘무력 85면 익스퍼트 상급 정도인 거군. 그럼 86은 넘어야 최상급일 테고, 마스터는 어느 정도일까?’

밀턴은 미안한 목소리로 제롬에게 말했다.

“자네 실력을 알고 나니 내가 너무 박봉으로 고용한 듯하군.”

그러자 제롬은 손을 저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저는 보수에 만족하고 있습니다.”

“고맙네. 상황이 나아지면 언제든지 자네에게 추가 보수를 지불하겠네.”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밀턴과 제롬은 서로를 챙겨주는 대화를 하며 좋은 분위기를 이어 갔다.

그날부터 제롬이 밀턴을 지도하는 것에 불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릭과 토미도 제롬의 지도를 받기 위해서 자존심을 숙였다.

아무리 기사가 용병을 천시한다고 해도 익스퍼트 상급이라는 경지는 같은 무인(武人)으로서 존경심을 품을 경지였다.

더구나 시골에서 나고 자란 기사인 릭과 토미는 익스퍼트를 보는 것도 처음이었다.

두 사람이 제롬에게 느끼는 감정은 존경을 넘어서 경애에 가까웠다.

그렇게 해서 제롬은 졸지에 밀턴과 릭, 토미까지 세 명의 검술을 봐주게 된 것이다.

엄밀히 말해서 이건 무보수 노동이다.

세상 물정 모르는 시골 기사인 릭과 토미는 모르겠지만 밀턴의 기억으로 수도에서 익스퍼트의 개인 교습이라면 회당 10골드가 넘어갔다.

그러나 제롬은 무보수로 검술을 봐주면서도 아무런 불만이 없어 보였다.

오히려 릭과 토미가 보여주는 순수한 향상심이 마음에 들었는지 상당히 가까워졌다.

그걸 보며 밀턴은 제롬이 생각보다 곱게 자란 기사 출신이라고 추측했다.

돈에 부족함이 없고, 재능과 좋은 환경 속에서 열심히 수련할 수 있는 여건이 갖춰진 곳에서 순수 배양된 듯한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런 사람이 왜 용병으로 있으며 공화국에 맹렬한 적의를 보이고 있는지도 어느 정도는 짐작이 갔다.

‘그렇다고 그걸 무심하게 건드리면 역효과지. 충성 수치가 오를 때까지는 천천히 가도록 하자.’

밀턴의 상태창에 보이는 제롬의 충성 수치는 62였다.

다른 용병들의 경우도 충성심이 50에서 60 사이를 오가고 있었으니 이 정도는 아마 고용주에 대한 의무적인 충성심에 가까운 것일 것이다.

수련을 받으면서 괘 친해졌다고는 생각하지만 개인적인 친분이 충성심에 미치는 영향력은 크지 않아 보였다.

시간을 최대한 유용하게 활용한 밀턴은 전장에 도착하는 그날까지 하루도 쉬지 않고 열심히 수련했다.

덕분에 소드 유저 중급이었던 밀턴의 경지가 최근에는 상급으로 오르기도 했다.

제롬은 무척 빠른 성장이라며 감탄했지만 밀턴은 알고 있었다.

이건 한동안 게으름을 피우며 정체된 발전이 뒤늦게 조금 찾아온 것뿐이라는 것을 말이다.

자신이 아카데미에서 열심히 수련했다면 지금쯤 못해도 유저 최상급의 경지에는 올랐을 것이다.

‘진짜 얼마 전의 나한테 머리 좀 박으라고 하고 싶네.’

밀턴은 그렇게 한숨을 내쉬었지만 그냥 이제부터라도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지나서 밀턴은 드디어 자기 병력을 이끌고 전선에 도착했다.

그리고 나서 밀턴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레스터 왕국의 밀턴 포레스트 자작! 지금 이 시간부로 서부 전선에 착임을 명받았습니다.”

나 왔어요, 하고 사령부 소속 참모에게 신고하는 것이었다.

‘이 세계에서도 군대는 신고 우선이네.’

오랜만에 절도 있는 자세로 아랫배에 힘을 꽉 주고 신고를 하자 전생의 기억이 새록새록 샘솟는 밀턴이었다.

“잘 왔다. 포레스트 자작. 서부 전선 2사령부 참모 로니 크레이블 백작이다.”

로니 크레이블 백작은 밀턴에게 큰 관심이 없어 보였다.

데려온 병력이 많은 것도 아니고 본인이 대단한 기사인 것도 아니었다.

그냥 후방에서 지원한 많은 귀족 중에 하나 정도로만 인식하는 듯했다.

서류를 확인한 로니 크레이블 백작이 확인하듯이 말했다.

“인솔해 온 병력은 104명. 이 중에 기사가 두 명이군. 맞나?”

“예. 그렇습니다.”

“좋아. 스트라부스 왕국의 국왕 전하에게 위임받은 권한으로 그대를 백인장에 임명한다. 지금 이 순간부터 그대에게는 스트라부스 왕국의 군법이 적용된다. 동의하는가?”

“예. 그렇습니다.”

“그대에게는 산악 정찰 및 수비 임무를 맡기겠다. 소속은 회색 산맥의 까마귀 요새로 하겠다.”

“예. 알겠습니다.”

“앞으로 공화국의 개들을 상대로 분투를 기대하겠다. 자작.”

그렇게 최소한의 대화로 임명을 받은 밀턴은 졸지에 백인장이 되었다.

‘서부 전선 2사령부라? 타국의 군 체계를 잘 모르니 알 수가 없군. 일단 돌아가서 제롬에게 물어봐야겠어.’

원래 스트라부스 왕국 출신인 제롬이라면 이곳의 체계를 잘 알 것 같았다.

“서부 전선은 총 네 개로 나눠져 있습니다. 2사령부는 그중에 하나라는 말이죠.”

밀턴의 질문에 제롬은 간단하게 대답했다.

“그렇군. 그럼 서부 말고는 전선이 또 어디에 있나?”

“북부 전선과 동부 전선이 따로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북부 전선은 가장 치열한 전선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가 있는 서부는?”

“북부 보다는 아군의 사정이 낫다고 하지만 기본적으로 소규모 국지전은 계속 벌어집니다. 특히 자작님이 명령받은 산악 정찰 지역은 공화국의 레인저들과 가장 많은 전투가 벌어지는 곳입니다.”

“그런가?”

‘빡세게 부려 먹겠다는 거군.’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일이다.

귀족이라고 해도 밀턴은 타국의 귀족이다.

스트라부스 왕국의 지휘부 입장에서는 가능하면 위험한 일에 투입해서 자국의 손실을 줄이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건 내가 바라는 바이기도 하지.’

밀턴은 제롬에게 말했다.

“제롬, 이 전선에 있는 동안 그대가 임시로 나의 부관을 맡도록 하게.”

“저는 기사가 아니라 일개 용병일 뿐입니다.”

“하지만 이곳에서 가장 유능한 군사적 재능을 가지고 있지.”

“…….”

“자네 과거는 묻지 않겠네. 하지만 가진 능력을 다 활용하지 못하면 전쟁터에서 그것만큼 멍청한 짓은 없다고 생각하네.”

밀턴의 이 말에 제롬은 눈을 부릅뜨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밀턴에게 확인하듯이 말했다.

“진심이십니까?”

“물론.”

망설임 없는 밀턴의 대답과 그 옆에서 릭과 토미 역시 물론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해서 자작님을 보필하겠습니다.”

이 순간 밀턴은 제롬의 충성심이 62에서 69로 올라가는 것을 확인했다.

‘뭐지? 방금 대화에 제롬의 마음에 영향을 강하게 주는 말이라도 있었다는 건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밀턴은 제롬의 충성심이 70에 육박한 것 자체가 좋았다.

이 정도라면 부관을 맡겨도 성심성의껏 수행해 줄 것이라고 믿었다.

스트라부스 왕국의 서부 전선은 대규모 전투가 벌어지기 어려운 산악 지역이었다.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힐데스 공화국과의 국경선 중에서 80퍼센트 이상이 산악 지역으로 되어 있었다.

이 대륙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험난한 산맥인 회색 산맥이 자연스럽게 국경선의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다 보니 서부 전선에서 벌어지는 전투의 태반은 험난한 산악 지역에서 벌어지는 소규모 전투가 대다수였다.

서로 정찰하다가 조우하게 되면 바로 전투에 들어가는 것이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

“죽어라. 이 공화국의 개새끼들아!”

기사가 병사들을 독려하며 최선을 다해서 싸우고 있었다.

그의 발치에는 이미 쓰러트린 적들이 몇 명이고 쓰러져 있는 것을 봐서는 제법 실력이 있는 기사인 것 같다.

하지만 그 대가로 기사의 전신에는 여러 개의 화살이 박혀 있었고, 온몸에는 크고 작은 상처들이 나 있었다.

더구나 그가 이끌고 있던 정찰 부대는 이미 반 이상 쓰러졌다.

솔직히 말해서 지금의 상황은….

“최악이군.”

기사는 입에서 욕지기가 저절로 치밀어 올랐다.

상황이 최악이 된 것은 아군의 실수 때문이었다.

정해진 루트로 신중하게 정찰을 진행했고 다시 요새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런데 멍청한 신병 새끼가 어디서 토끼를 잡았는지 그걸 처먹겠다고 밤에 불침번을 서면서 불을 피웠다.

그걸 알았을 때 기겁을 했다.

정찰 임무를 캠핑이랑 착각한 신병의 목을 날려 버리고 싶었지만 지금 당장 중요한 것은 어서 자리를 벗어나는 것이었다.

“이동한다. 모두 서둘러!”

그는 부하들을 독려하며 한시라도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려고 했다.

야간에 산속을 행군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힐데스 공화국의 산악 레인저들은 길도 없는 험한 지형을 평지처럼 이동할 정도로 기동력이 좋았고, 무엇보다 아주 작은 변화에도 놓치지 않고 민감하게 반응했다.

토끼를 굽기 위해서 피운 불의 연기를 적이 발견했다면 놈들이 그냥 두고 볼 리가 없었다.

그는 즉시 부하들을 이끌고 자리를 이탈했다.

아니 이탈하려고 했다.

하지만….

“적이다!”

“오른쪽에서 석궁… 크윽!”

결국 적들은 자신들을 발견했다.

어느새 포위망을 형성한 힐데스 공화국의 레인저들은 먹잇감을 발견한 늑대처럼 적들의 숨통을 끊어가고 있었다.

“빌어먹을… 이렇게 끝인가?”

돌아가면 죽기 직전까지 굴리려고 했던 신병은 이미 석궁에 맞아 죽었고 다른 부하들 역시 대부분 죽어가고 있었다.

기사 본인도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다.

그때….

“공격!”

경쾌한 외침과 함께 한쪽에서 한 무리의 부대가 포위망의 바깥을 공격했다.

‘아군?’

직감적으로 아군이 합류했다는 것을 깨달은 기사는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크게 소리쳤다.

“아군이 합류했다. 전원 다섯 시 방향을 뚫어라!”

기사는 남은 병력을 소란이 일어난 쪽으로 이끌었다.

이게 자신들이 살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것을 알고 있는 병사들은 죽을힘을 다해서 싸웠다.

이윽고 포위망 한쪽이 무너졌고 아군으로 보이는 자들 중에 한 명이 말했다.

“토미, 고지대의 석궁병이 거슬린다. 궁병과 함께 응사하라!”

“옛. 영주님.”

“릭, 경사로를 우회해서 석궁병을 공격하라. 쫓아내기만 하면 되니 너무 깊게 들어가지는 마라!”

“알겠습니다. 영주님.”

그는 정확한 지시로 병사들을 지휘하면서 공화국의 포위망을 정확하게 무너트리고 있었다.

결국….

“후퇴! 전열을 재정비한다!”

“전군 후퇴하라!”

공화국의 병력은 견디지 못하고 후퇴를 했다.

그리고 공화의 레인저들이 후퇴를 시작하자….

“제롬! 지금이다!”

“옛!”

큰 명령과 함께 한 명의 기사가 20인 정도의 병력을 대동하고 미리 기다렸다는 듯이 길목을 막아섰다.

“한 놈도 지나가지 못한다!”

선두의 기사 한 명이 큰 목소리로 외쳤다.

하지만 적들은 자신들보다 소수라는 것을 파악하자 빠르게 결단을 내렸다.

“뚫어라!”

힐데스 공화국의 레인저들은 자신이 있었다.

어지간한 기사라면 이길 수 있는 자들도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건 큰 실수였다.

그들의 눈앞에 있는 남자는 절대 ‘어지간한’ 기사가 아니다.

적이 다가오자 그의 검에 오러가 일렁거리며 피어나기 시작했다.

“익스퍼트?!”

“빌어먹을….”

레인저들은 그제야 상대가 소수라고 쉽게 처리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지만 이미 늦었다.

“한 놈도 놓치지 않는다!”

제롬은 거친 고함을 터트리며 앞으로 튀어나갔다.

그리고 자신의 앞에 있는 공화국의 레인저들을 일방적으로 몰아쳤다.

“크악!”

“막… 커억….”

힐데스 공화국의 레인저들의 수준이 아무리 높다고 해도 익스퍼트를 상대하기에는 무리였다.

결국 후퇴로에 있던 레인저들 태반이 쓰러졌고, 뒤늦게 흩어진 몇 명만이 도망갔을 뿐이었다.

그렇게 전투가 마무리되어 가자….

“하… 하하하하….”

죽음의 위기에 처했던 기사는 살아남았다는 안도감과 적들을 무찔렀다는 통쾌함에 정신 나간 것처럼 웃음을 터트렸다.

“어떠냐? 이 공화주의 새끼들아!”

“지옥으로 떨어져라!”

“도망치다 뒤져라!”

병사들 역시 죽기 직전에 되살아난 게 기뻤는지 도망치는 적들을 조롱했다.

그렇게 잠시 정신 줄 놓은 기사에게 아군의 지휘관으로 보이는 자가 접근했다.

“서부 전선 2사령부에서 까마귀 요새로 배속을 명령 받은 백인장 밀턴 포레스트라고 합니다.”

“아…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같은 소속의 백인장 캐르버 프랜시스라고 합니다.”

“프랜시스 경이군요. 부상은 괜찮습니까?”

“하하하… 뭐 치명상은 없습니다. 그래도 아프긴 지랄 맞게 아프군요.”

“병력의 손실이 크니 요새까지 저희가 함께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포레스트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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