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직접 찾아간 토마스의 집은 평민들의 집보다는 좋았지만 그렇게 호화롭지는 않았다.
적어도 뒷돈을 챙기며 살았다면 좀 더 생활이 화려했으리라.
“그래, 무능하고 소심한 게 죄는 아니지.”
토마스가 좀 쓰레기 같은 인물이었다면 주저 없이 목을 쳐 버리고 엄중하게 벌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벌하기에는 토마스는 나름 오랜 시간 성실하게 이 영지의 행정관으로 일하며 공헌했다.
지금 영지에 위기를 초래한 빚은 엄밀하게 말하면 그보다는 전대 영주의 책임이 더 컸고 말이다.
그러니 밀턴은 일단 토마스를 용서해 주기로 마음먹고 여기에 찾아온 것이다.
솔직히 행정관이 없다 보니 영지의 업무가 잔뜩 밀려 있기도 했다.
집안으로 들어가자 거기에는 토마스가 한 명의 청년과 식사를 하고 있었다.
“헉? 영… 영주님.”
토마스는 밥을 먹다 말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영주의 앞에서 허리를 숙였다.
“영… 영주님을… 뵙습니다.”
그러자 같이 식사를 하고 있던 청년도 토마스의 옆에 와서 인사를 올렸다.
“영주님을 뵙습니다.”
“고개를 들어라.”
밀턴이 명령하자 두 사람은 고개를 들었다.
밀턴은 토마스 옆에 있는 청년을 흘깃 보며 말했다.
“누구지?”
“예. 이 아이는 제 아들입니다.”
“맥스라고 합니다.”
토마스의 말에 아들 맥스는 정중하게 자기소개를 올렸다.
약간 검게 탄 얼굴과 떡 벌어진 어깨가 누가 봐도 전형적인 시골 청년이었다.
다만, 영주를 눈앞에 두고도 의연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높이 살 만했다.
그런 아들에 비해서 토마스는 밀턴의 시선을 살피며 안절부절하다가 말했다.
“영주님. 어찌 누추한 저희 집으로….”
“집으로 뭐?”
“예? 아… 오셨습니까?”
‘진짜 소심하군.’
밀턴은 한숨을 내쉬었다.
소심한 사람의 특성 중에 하나는 말을 확실하게 맺지 않고 은근하게 흘리는 경향이 있다는 거다.
자기 말이 틀렸을 때를 대비하는 습관이 있어서 항상 말을 결정짓지 않고 애매모호하게 흘리는 습관이 있었다.
‘회사에서도 신입들이 자신감을 잃으면 이런 모습을 많이 보였지.’
이래서는 곤란하다.
소심한 사람들이 자신감을 잃으면 과하게 신중해져서 오히려 실수를 연발하는 경우가 많다.
가뜩이나 토마스 행정관은 원래 능력치도 썩 좋지 않았다.
어떤가 하면….
[토마스]
행정관 LV.6
무력 - 08 통솔 - 30
지력 - 55 정치 - 59
충성 - 82
특성 - 신중.
신중 LV5 :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실수를 줄인다. 익숙한 일을 안정적으로 처리할 수 있지만 새로운 일에 적응하는 속도가 느리다.
‘망캐다.’
만약 이게 게임 캐릭터라면 육성에 투자하는 시간이 아까울 정도의 망캐가 토마스였다.
이제까지 포레스트 영지의 행정 업무를 별 무리 없이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업무 자체가 그렇게 거창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밀턴으로서는 일단 토마스를 행정관으로 복귀시켜서 다시 일을 시킬 생각으로 찾아왔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토마스의 능력을 생각하니 과연 복귀시키는 것이 바람직한지 다시 망설임이 생겼다.
‘그래도 영지의 행정 업무를 볼 수 있는 사람이 한 명밖에 없으니 선택의 여지가… 어쩌면?’
밀턴은 혹시나 하는 생각에 토마스의 옆에 있는 맥스라는 청년을 바라봤다.
이 세계에서 직업이라는 것은 대부분이 부모의 것을 물려받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저 청년도 어느 정도는 행정관으로서의 교육을 받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밀턴은 바로 맥스라는 청년의 능력치부터 확인했다.
[맥스]
행정관 LV.2
무력 - 17 통솔 - 28
지력 - 71 정치 - 75
충성 - 52
특성 - 임기응변, 농경.
임기응변 LV.4 : 예정에 없던 상황이 닥쳐도 가능한 최선의 대처 능력을 보인다.
농경 LV.6 : 농사에 대한 이해도가 깊다. 농경지의 소출을 증대시킨다. 가뭄과 홍수의 피해를 최소화한다.
‘좋다. 인재야.’
맥스의 능력치를 확인한 밀턴은 가뭄의 단비를 만난 기분이었다.
예상대로 토마스는 아들에게 행정관으로서의 교육을 시켰던 것이다.
그리고 예상 이상으로 토마스의 아들은 유능했다.
밀턴은 읽고 쓰기만 가능해도 이 청년을 토마스의 업무 보조를 맡길 생각이었다.
하지만 능력치를 확인해보니 오히려 토마스가 맥스의 보조를 맡아야 할 정도였다.
특히 놀라운 것은 토마스의 행정관 레벨이 6이고 맥스의 행정관 레벨은 2라는 것이었다.
레벨은 맥스가 더 낮음에도 현재 능력치는 맥스가 훨씬 더 높았다.
이건 맥스에게 앞으로 훨씬 더 큰 성장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었다.
‘레벨 2 정도에 이 능력이라면 무조건 잡아야지.’
생각을 마친 밀턴은 토마스에게 엄한 표정을 하고 말했다.
“토마스 행정관, 자네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정말 알고 있는가?”
“예. 그게…. 영주님에게 일찍 알려야 할 보고를 미루고 있었습니다.”
“맞아. 가문의 빚은 나의 선친이 만드신 것이니 어쩔 수 없지만 그 빚을 알면서도 영지를 이어받을 나에게 보고를 하지 않은 것은 그대의 잘못이네. 덕분에 우리 영지는 미증유의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지.”
“죄송합니다. 정말 제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토마스가 고개를 숙이며 간절하게 사과했다.
그리고 그 옆에서 토마스의 아들인 맥스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자기 아버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맥스가 생각하기에도 영주가 자신의 아버지에게 벌을 내린다면 거부할 명분이 없어 보였다.
그때….
“하지만, 선대부터 수십 년 동안 우리 영지의 행정관으로 노력해온 그대의 공을 생각해서 이번 한 번은 용서하겠네.”
“가… 감사합니다. 영주님.”
사람은 한 번 나락으로 떨어트렸다가 다시 건져 올려주면 상대적으로 커다란 은혜를 느끼게 된다.
그게 토마스처럼 소심한 사람이라면 더하다.
실제 이 순간 토마스의 충성 수치는 82에서 88로 올라갔다.
밀턴은 그런 토마스를 보며 생각했다.
‘은혜를 베풀면 충성심이 올라가는 타입인가? 그렇다면 여기서….’
“생각해 보면 지금까지 자네 혼자서 우리 영주의 행정 업무를 도맡았던 것은 다소 가혹했을지도 모르겠군.”
“아닙니다. 영주님. 소신은 조금도 힘들지 않습니다.”
토마스는 고개를 저으며 그렇지 않다고 말했지만 밀턴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야. 사람인 이상 혼자서 하는 일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지. 자네의 행정 보좌를 맡을 젊은이를 한 명 구해야겠어.”
밀턴의 말을 들은 토마스는 반색을 했다.
자신의 보좌를 맡을 사람을 구해준다는 것은 자신에게 직속 부하가 생긴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그걸 누가 싫어하겠는가?
하지만 밀턴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다만 지금 영지의 재정 상태를 봐서는 돈을 써서 인재를 모집하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군. 으음… 어떻게 한다?”
밀턴은 그렇게 말하면서 은근히 토마스를 바라봤다.
“…….”
그러나 토마스는 그냥 눈을 멀뚱멀뚱 뜨고 밀턴에게 왜 그러냐는 듯이 바라볼 뿐이었다.
‘진짜 둔하기는.’
결국 밀턴은 조금 더 직설적으로 말했다.
“혹시 자네가 추천할 만한 인물은 없나? 읽고 쓰기와 간단한 회계 업무가 가능하며 우리 영지의 사정에 관해서도 잘 아는 그런 젊은이 말일세.”
“그런 젊은이는… 저희 영지에 없는 것 같습니다.”
울컥!
토마스의 말에 밀턴은 순간 울컥하는 느낌을 받았다.
‘아니 낙하산을 태워주려고 해도 쿵짝이 맞아야지. 손발이 이렇게 안 맞을 수가 있나?’
결국 밀턴은 다소 노골적으로 나가기로 했다.
“자네 아들은 어떤가? 문자를 읽고 쓸 줄만 알아도 도움은 될 텐데?”
“아… 예. 제 아들인 맥스는 글을 읽고 쓸 수 있습니다. 그리고 평소에 제 업무를 도와주기도 했습니다.”
“그렇군. 그렇다면 맥스라고 했나?”
“예. 영주님.”
“너를 우리 영지의 행정보좌관으로 임명하겠다. 네 아버지의 업무를 도와서 일을 처리하도록 하여라. 받아들이겠나?”
“명을 수행하겠습니다. 영주님.”
맥스라는 청년은 밀턴의 말에 다소 흥분된 목소리로 대답했다.
사양하지 않고 기꺼이 임무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자기 능력을 펼쳐보고 싶은 욕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재능과 의욕을 겸비한 인재라면 더욱더 좋지.’
밀턴이 다시 한 번 맥스의 상태창을 확인해 보니 52였던 충성심이 65로 올랐다.
밀턴은 고민에 빠졌다.
토마스의 무능함을 메울 수 있는 인재를 찾았다고 해도 지금 당장 8,500골드의 빚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빚을 갚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한데….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당장 빚을 갚을 구석은 보이지가 않았다.
“진짜 이렇게 된 이상 한 재산 챙긴 후에 야반도주라도 할까?”
박문수의 자아는 그렇게 하라고 했지만 밀턴으로서의 자아는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영지를 자기 대에서 말아먹을 수 없다고 거부했다.
결국 빚을 갚아야 한다는 건데 지금 당장 갚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딱 하나.
지금 당장 빚을 갚을 수는 없어도 잠깐 버티는 방법은 있었다.
“역시 그 방법밖에 없는 건가? 빌어먹을.”
밀턴의 입에서 욕이 나왔다.
사실 이 방법은 진작 떠올렸다.
하지만 절대 사용하고 싶지 않았기에 최후의 방법으로 남겨뒀었다.
그런데 역시 다른 대안이 없는 이상 그 방법을 쓰는 수밖에 없어 보였다.
“어쩔 수 없지.”
밀턴은 깊은 한숨을 내쉬고 종이를 꺼내서 한 장의 서류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그 서류의 가장 위에는 이렇게 써져 있었다.
- 입대 지원서
이게 밀턴이 생각한 유일한 방법이었다.
잠깐 이 대륙의 정세를 설명하자면 왕을 중심으로 귀족들이 세상을 다스리는 봉건주의가 오랫동안 정착해 있었다.
하지만 너무나 긴 시간 동안 귀족들에 대한 특혜가 계속되자 평민들의 불만이 쌓여 갔고, 마침내 북부의 작은 나라에서 혁명의 불씨가 시작되었다.
그들은 신분 제도의 철폐를 주장하며 모든 인간은 평등한 기회를 지녀야 한다는 주장을 하면서 봉기했다.
처음 시작된 반란은 크게 번졌고 놀랍게도 하나의 나라를 무너트렸다.
대륙 최초의 공화국이 탄생한 것이다.
‘신분의 고하가 없는 평등한 세계.’라는 사상을 앞세운 그들은 스스로 공화주의자라고 불렀다.
당연하지만 주변 왕국에서는 공화국을 인정하지 않았다.
국가를 다스리는 구심점은 왕.
국가를 운영하는 지배 계층인 귀족.
그것이 이 세계에서는 보편적이고 올바른 사고방식이었다.
주변의 왕국들은 공화국을 국가가 아닌 이단으로 취급하며 공격했다.
막 태어난 공화국에 있어서 그것은 너무 가혹한 공격이었다.
3개월도 되지 않아 공화국은 무너졌고, 왕국들은 그렇게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틀린 생각이었다.
공화국이 무너졌다고 해도 소속되었던 공화주의자들마저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살아남은 그들은 주변 국가로 뿔뿔이 흩어졌고 오랜 시간에 걸쳐서 치열한 투쟁을 시작했다.
자신들의 정의를 가슴에 품고 있는 사람들은 강하다.
모진 박해와 처벌이 가해졌지만 그들의 수는 점점 늘어났다.
신분 제도의 바닥에 있는 평민과 노예들에게 있어 ‘평등한 세계’라는 단어는 눈이 부실 정도로 황홀하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결국 반란이 다시 일어났다.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이 반란은 당시 북부의 제국이었던 카르셀로나 제국을 무너트리기까지 했다.
이윽고 북부에는 세 개의 공화국이 생겼다.
힐데스 공화국, 하노버슈 공화국, 코브르크 공화국.
이 세 개의 공화국은 대륙의 북부를 완전히 정복하고 이제 전 대륙에 공화주의를 설파하고 신분 제도를 철폐하겠다는 이상을 주장했다.
당연히 전 대륙에 심각한 경계를 불러왔으며, 모든 왕국은 공식적으로 공화국을 적국으로 규정했다.
또한 공화주의자들이 자국에 스며드는 것을 철저하게 경계했고 혹시라도 공화주의자가 발견되면 마녀 재판을 방불케 할 정도로 잔인하게 처벌했다.
북부의 공화국 세력이 남쪽으로 내려오지 못하게 중부의 국가들은 공화국과 끊임없는 전쟁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렇게 공화국의 남하를 막아내고 있는 가장 대표적인 국가가 바로 중부의 강대국 스트라부스 왕국이었다.
순수하게 군사력만 따지면 2위로 대륙의 유일한 제국인 앤드루스 제국을 제외하면 사실상 대륙 최강의 군사력을 자랑한다.
보통 이렇게 군사력이 강하면 주변 국가에게 견제를 받기 마련이지만 스트라부스 왕국은 상황이 좀 특수하다.
스트라부스 왕국이 북부의 공화국들을 견제하고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대륙의 다른 국가들은 안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스트라부스 왕국이 공화국에 밀려난다면 남부의 왕국들은 직접 공화국을 상대해야 한다.
그러니 이 대륙의 다른 왕국들은 군사 강국인 스트라부스 왕국을 견제하기는커녕 공화국을 견제하기 위해서 오히려 군사적인 지원을 해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