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전설의 무기
“상대의 액을 깊은 곳에 주입하면 마력의 특성에 맞춰 무기로 변신이 된다. 무기를 사용하는 상대와 끈끈한 연대감이 형성된다. 상대의 샘플이 많이 쌓일수록 더 익숙하게 레스탈로스의 힘을 사용할 수 있다-.”
신들린 사람처럼 책에 얼굴을 파묻고 중얼거렸다. 나는 한 글자도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로 눈을 부릅떴다. 그래서 눈알이 튀어나오기 직전이다.
“처음 변신 시 현기증이 일 수 있다. 마력에 집중하라. 다스리는 데 충분한 시간을 들여야 한다…….”
점점 맥 빠지는 목소리가 조용한 공간에 울렸다. 그도 그럴 게-.
‘빌어먹을, 이 책이 그렇게 중요했단 말이냐…….’
당시에는 변태 망상가가 쓴 책이라 생각해 대강 읽고 넘긴 빨간 책이다. 그러나 이 책을 제대로 읽지 않은 여파는 상당했다. ‘그런가……?’라며 무지하게 놈들에게 엄청 휩쓸렸으니까.
나는 레스탈로스에 대한 정보를 확실하게 알아 둘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네스키를 무찌른 이후, 다시 초보자 마을을 찾아 오두막집에 있던 빨간 책을 가져왔다.
그날 후로 한 글자도 빠짐없이, 성심성의껏 읽는 중이다. 읽다 보니 이 책은 한 톨의 거짓이 없이, 진실만을 담고 있는 책이란 걸 알 수 있었다. 몸으로 부딪쳐서 알아낸 정보들이 모두 적혀 있었으니까.
“의지만 있다면 변신 해제가 가능하다…….”
간과하고 던져둔 책을 한 줄 한 줄 다시 정독할 줄은 몰랐다. 더해서 정신 나갔다고 생각한 체위 자세마저 나는 열심히 봐야 했다.
“……두 개 넣고 입에도 넣는 자세는 없는데…….”
우울한 목소리가 입에서 흘러나왔다. 책에도 적혀 있지 않은, 별의별 자세를 다 겪은 나는 책을 쥔 손에 힘이 풀려왔다. 그러다 다시 정신을 다잡고 손에 힘을 주었다.
읽을수록 자꾸만 민망함이 올라왔지만, 더는 무지하게 휘둘릴 수 없다. 레스탈로스에 대해 제대로 알아야만 한다.
‘끝까지 읽자…….’
늦은 감이 있지만, 레스탈로스 책을 정독해야겠다는 결심을 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지하 세계에서 돌아와 눈을 떴던 날이다.
때마침 힐을 해 주던 루스와 마주했고, 각인한 뒤의 상황을 들을 수 있었다.
어리둥절해하는 내게 루스는 며칠 동안 내가 죽은 듯이 잠들어 있었다고 말했다.
‘마력이 폭주해, 몸이 회복을 진행하는 동안 잠들어 있었습니다.’
그렇게 루스에게 상황을 듣던 차에 다비가 들어왔다. 들이박을 듯한 기세에 얼어 있는데, 다가온 그가 일어나길 기다렸다며, 애틋한 눈을 하고서 개소리를 뱉어댔다.
‘기복……. 각인 후에는 수시로 마력을 공유해 줘야 해.’
……그리고 나는, 그 개소리가 맞는지 확인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초보자 마을로 돌아가는 수고를 감수하며 레스탈로스 책을 가져왔다.
‘그때보다 상황이 더 복잡해졌으니까…….’
세 놈과 각인을 해 버려 영영 함께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문제는 놈들은 미친놈들이고, 개소리를 뱉을 때마다 각인에 대해 모르는 나는 휩쓸리게 된다는 거다. 그러니, 레스탈로스에 대해 제대로 알아야만 했다. 정확히는 각인에 대해서 알 필요가 있었다.
“-각인은 상대와의 온전한 연결을 말한다.”
살구색 그림들이 지나가고, 뒤쪽에 있는 각인 파트부터 눈에 힘을 주며 읽어 갔다.
“상대는 레스탈로스 이외 무기를 사용할 수 없으며, 레스탈로스는 다른 사람의 무기로 변할 수 없다.”
그 밑에는 각인이 맺어지면 평생 서로에게 종속이 된다는 말이 적혀 있었다. 이어서 각인 방법에 대한 정보들이 보였다.
“절정의 순간 상대의 마력이 대량 주입되어야 한다. 그 방법은 정액과 피, 타액, 온갖 마력이 섞인 액을 주입하면 된다-.”
루스의 말대로 각인을 한 케이스가 별로 없던 탓인지, 각인 파트의 내용은 길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오랫동안 각인 파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왜냐, 거기 적혀져 있는 정보와 내 현실이 사뭇 다르기 때문이다.
“평생의 단 한 번, 한 사람과 각인이 가능하다…….”
단 한 번, 단 한 사람. 저 짧은 문장이 나를 심란하게 했다.
‘……왜 나는-’
나는 책에서 시선을 떨어뜨렸다. 그러자 푹신한 침대 시트가 보였다. 시트를 살짝 걷어내자 허연 몸뚱이가 보였다. 옷자락 하나 걸치고 있지 않은 내 몸을 보니, 착잡한 마음이 깊어졌다.
“왜, 다 각인이 된 건데…….”
정신이 혼미하던 그때는 세 사람, 모두와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각인 파트를 읽다 보니 심란함이 올라왔다. 암만 찾아봐도, 셋 다 동시에 달려들어 각인을 찍어도 된다는 말은 없었다…….
나는 손을 들어 문신처럼 새겨진 문양을 문질러 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박박 문질러도 피부만 빨갛게 될 뿐이었다. 선명하게 새겨진 각인을 보니 심란하기 그지없다.
“……이게 뭐냐.”
놈들이 물어뜯은 곳에 각각 십자가, 칼, 수리검 문양이 문신처럼 덕지덕지 찍혀 있었다. 확실히 정상 루트는 아닌 것 같다. 한숨을 쉬며 문양에서 시선을 돌렸다.
“하아…….”
이제는 허연 몸에 불긋불긋한 흔적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저께 다비 놈이 개소리를 하며 덮친 이후, 온통 물리고 빨려 몸이 이 지경이 되고 말았다.
흔적들을 보고 있다간 계속 심란해질 것 같아, 나는 얼른 눈을 들어 올렸다. 손에 쥔 빨간 책에 다시 집중했다. 아니, 집중을 하려 했다.
“각인한 상대와는 주기적으로 마력을 공유해야 한……다……. 시발…….”
그러나 바로 다음 문장을 읽자마자 욕이 튀어나왔다.
……정신을 차린 그날, 다비 놈이 뱉은 소리가 개소리라고 믿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 다비 놈이 ‘수시로’라고 교묘하게 바꿔 말했을 뿐, 개소리가 아님을 확인하게 된 상황이다.
“그럴 리가 없잖아…….”
나는 거짓말이길 바라는 마음으로 다음 장을 넘겼다. 그러나 다음 장은 마지막 장이었고, 마지막 장은 하얀 백지로 끝나 있었다.
나는 집게손가락으로 잡은 끝장을 차마 놓지 못했다.
“…….”
멍한 눈으로 하얀 백지를 쳐다봤다. 오래된 책임에도 누리끼리한 흔적 없이 종이가 깔끔했다. 내용 역시도 깔끔하게 팩트만 적힌, 길지 않은 책이었다.
눈앞에 있는 종이가 달달 떨리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종이를 쥔 내 손이 점점 떨려왔다. 아무것도 적혀져 있지 않은, 책의 마지막 장을 뻔히 보고 있으니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마음이 올라왔다.
나는 억울함을 못 참고 허공에다 따졌다.
“이런 게 어딨어! 한번 각인됐으면 더는 공유할 필요 없는 거 아니냐고!”
서로에게 평생 종속이 되었으면, 거추장스러운 변신 행위 따위 스킵하고 간편하게 변신이 되어야 하는 거 아니냐?! 어째서 각인을 한 뒤에도 주기적으로 마력을 공유해 줘야 하는 건데!
“더 번거로워지는 게 말이 되냐!”
나는 들고 있는 빨간 책을 나무 바닥으로 퍽 집어 던졌다. 그러자 빨간 책이 바닥에 부딪히며 살구색 파트가 차락 펼쳐졌다.
그 난잡한 체위 그림들이 바닥 아래에 착 펼쳐지자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이게 네 운명이니 받아들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망할-.”
나는 눈을 부라리며 살구색 그림들을 쳐다봤다.
한참을 그러다 의미 없는 눈싸움이라는 걸 자각했다. 나만 힘 빠지고 있을 뿐, 현실은 변하는 게 없었다.
“하아…….”
힘없이 한숨을 뱉으며 몸에 얹혀 있던 하얀색 이불을 내려다봤다. 그러다 이불을 완전히 걷어냈다. 덕지덕지 온갖 흔적이 있는 몸을 보니 또 한 번 한숨이 쉬어졌다.
“진짜…… 지독한 운명이잖아…….”
기구한 상황이 하루 이틀이냐, 새삼 못 받아들일 게 뭐 있냐, 뭐든 각오한 거 아니냐고, 스스로를 달랬다.
차차 흥분했던 마음이 가라앉을 즈음, 상체를 숙여 바닥 아래로 손을 뻗었다.
민망한 자세들이 가득한 책을 잡아 드는 순간이다.
달칵-.
방 한편에 있는 나무 문이 열렸다. 단정한 걸음 소리가 망설임 없이 침대 쪽으로 다가왔다. 고개를 들자 흰 머리카락이 보였다. 이어서 남색 제복을 멋들어지게 갖춰 입은 루스의 모습이 보였다.
“몸은 이제 괜찮으십니까.”
“어, 어…….”
나는 평소보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 루스의 얼굴을 어색하게 쳐다봤다. 그도 그럴 게, 마주친 그의 보라색 눈동자에 반짝거리는 생기가 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쩐지 찝찝한 기분이 올라올 즈음이다.
“-흔적이 지워지지 않았군요.”
루스의 들떠 있던 얼굴이 한순간에 가라앉았다. 내 몸을 훑는 시선에 나는 움찔했다.
맨몸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을 자각했다. 당장 불긋한 흔적들이 있는 몸을 가리고 싶었으나 그 전에, 바닥 아래에 난잡한 그림부터 치우고 싶었다.
나는 곧바로 뻗은 손을 움직여 책을 집어 들었다. 침대 옆에 위치한 서랍 안에 넣어 두려던 차에 얇은 손가락이 책을 잡아 왔다.
“…….”
내가 멈칫하는 사이 루스가 집어 든 빨간 책의 윗부분을 살짝 내리눌렀다. 그러자 그의 시선 아래로 난잡한 그림들이 드러났다. 보랏빛 눈동자가 그림들을 훑더니 천천히 내 얼굴로 옮겨졌다.
“체위를 보고 있었습니까.”
“그걸 본 게 아니라-.”
“뜻이 맞아 다행이군요.”
“무, 무슨…….”
나는 영문 모를 말에 당황하다가 이내 느슨해진 루스의 손을 느끼고 책을 뺏어 들었다. 찔릴 게 없건만, 놈의 묘한 눈빛과 말에 왠지 야한 잡지를 보다 들킨 사람이 된 듯했다.
귓가가 후끈거리는 걸 느끼며 침대 옆에 있는 서랍 안에 냉큼 책을 집어넣었다. 이어서 이 책은 그런 책이 아니라고 확실하게 말해 두려 입을 열었다.
“이, 이건 레스탈로스에 대한 건전한 책-.”
고개를 드니 그림자가 시야 전체를 덮었다. 침대에 앉아 있는 내 위로 루스가 몸을 숙이고 있었다.
나는 어벙하게 그를 쳐다봤다. 그러자 그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진지하게 물어왔다.
“그럼, 선호하는 자세를 말해 주시겠습니까.”
“뭐, 뭔 소릴 하는 거야!”
나는 기겁하며 침대 시트로 손을 뻗었다. 뭔가 상당히 오해하고 있는 눈빛을 보니 나도 모르게 방어하듯이 시트로 몸을 가리게 된다.
침대 시트를 쥔 내 손위로 루스의 차가운 손이 덮어졌다. 움찔하는 틈에 루스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몸을 가린 시트가 한순간에 아래로 내려갔고, 찬 공기가 맨몸에 닿았다.
“…….”
어버버 대는 사이 루스의 몸이 본격적으로 내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그림자가 더욱 짙어지더니 특유의 라벤더 향기가 코로 훅 맡아졌다. 이어서 내 손 위에 덮어진 루스의 손이 떨어져 나갔다. 그러더니 상체 양쪽으로 그의 팔이 뻗어졌다.
피부에 루스의 하얀 머리카락이 간지럽게 닿았다.
“…… 잠깐. 왜, 왜 그러는 건데.”
내려다보는 시선을 마주하자 묘한 기류에 닭살이 돋아왔다. 그의 팔에 갇힌 자세에 위협을 느낀 나는 조금씩 상체를 뒤로 물리며 당황스레 놈을 쳐다봤다.
그가 가만히 나를 보더니 입을 열었다.
“오늘은 제 차례니까요.”
“뭐, 뭐?”
“마력을 공유할 차례 말입니다.”
알 수 없는 소리에 버벅대는 것도 잠시, 멍하니 그를 쳐다봤다.
그저께 다비 놈이 했던 개소리를 비슷하게 시전하고 있어 데자뷔를 느꼈다. 더해서 조금 전에 읽은 빨간 책의 내용들이 머릿속에 촤르륵 스쳐 가고 있었다. 그러니까-
‘각인한 상대와는 주기적으로 마력을 공유해야 한다.’
라고 검은 글자로 진하게 적혀져 있던 문장 말이다.
나만 빼고 온 세상이 저 문장이 진리라고 말하고 있었다.
“…….”
나는 앞에 있는 루스를 아득하게 쳐다봤다. 불과 몇 분 전만 해도 받아들이기로 한 사실이건만, 다짐하자마자 곧바로 빌어먹을 상황이 닥쳐왔다.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시험하는 것도 아니고…….’
그래. 이미 각인이 된 상황에서 돌이킬 수도 없으니, 공유해야 한다면 해야지 어쩌겠나 싶다. 하지만…… 하지만 말이다.
그저께 다비에게 마력을 쥐어짜이느라 말하기 민망한 부위가 아직도 아린 상태였다.
‘적어도 회복할 시간은 줘야지……!’
계속해서 뒤로 물러나고 있던 나는 침대 헤드에 머리가 툭 닿는 게 느껴졌다.
흠칫하며 눈동자를 들어 올리자, 여전히 내 위에 머물러 있는 루스가 보였다. 벗어나려 움직였건만, 아까와 다를 바 없이 갇힌 자세였다.
“그…….”
흐름을 바꾸려 머리를 굴리는데, 코앞에 있는 보라색 눈동자가 뜨거운 열기로 일렁이고 있다는 걸 발견했다. 숨을 들이켜며 눈을 부릅떴다.
“루, 루스 잠……!”
더는 물러설 공간도 없는데, 내 몸 위로 거대한 몸이 숙여지기 시작했다.
당혹스러움에 몸을 굳히는 그때, 닫힌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가 방 안에 크게 들려왔다.
덜컹-
묵직한 걸음이 지체 없이 우리를 향해 다가왔다.
방 안에 울리는 발소리에 내 위에 있던 루스의 미간이 구겨졌다. 발소리는 계속해서 다가왔고 결국 루스는 상체를 들었다.
“…….”
루스의 품에서 벗어난 나는 황급히 눕혀진 상체를 일으켰다.
발소리는 어느새 침대 지척으로 다가와 멈춰 섰다. 정수리 위에서 뜨거운 시선이 쏟아졌다.
“-오늘. 보스는 나와 함께한다.”
고개를 드는 순간 호박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무감한 얼굴의 자이드가 나를 집요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자 앞에 있는 루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루스가 자이드를 쳐다보더니 차갑게 말을 뱉었다.
“방이나 만들러 가시죠.”
한기가 도는 루스의 목소리가 방안에 울리자 내게 머물던 자이드의 시선이 옮겨졌다.
그는 표정의 변화 하나 없이 루스를 내려다봤다. 이어서 자이드가 고저 없는 톤으로 말했다.
“끝났다.”
눈동자를 굴리고 있던 나는 눈을 크게 뜨며 자이드를 쳐다봤다.
“버, 벌써?”
자이드의 시선이 다시 내 쪽으로 돌려지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무감각한 자이드의 목소리와 달리 나는 입이 떠억 벌어졌다.
작은 오두막을 짓는 데도 많은 재료와 시간이 필요하다. 가구 하나당 상당한 재료를 모아야 했고, 복잡한 조합 레시피를 숙지해야 하니까.
그런데 놈들은 단 이틀 만에 지금 내가 있는 저택을 아니, 하나의 성이라고 불러도 좋을 거대한 건물을 완공했단 소릴 하고 있었다.
‘이틀 만에 끝내는 게 말이 되냐.’
나는 경악하며 새삼 넓은 내 방을 쳐다봤다. 높은 천장과 양옆에 박힌 거대한 기둥, 이미 몇 년은 산 것처럼 식탁과 카펫, 침대, 의자 필요한 가구들이 다 갖춰진 방이었다. 더해서 이 방 밖으로 나가면 쭉 뻗은 복도가 나온다. 놈들의 개인실이라 불릴 만한 커다란 방들이 있었고, 적당한 가구들이 모두 채워진 상태다. 복도 끝, 나선형 계단을 내려가면 1층 홀이 나온다. 홀이 있는 커다란 문밖으로 나가면, 산책을 하기 좋은 정원이 펼쳐져 있다.
그리고…… 이 거대한 성 주변으로는 황폐한 대지가 펼쳐진다.
‘어떻게, 성을 뚝딱 만들어 버리냐고…….’
나는 그저 쉴 곳이 필요했을 뿐이다. 왜냐, 세 놈과 평범한 마을에서 오래 머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틀 전 초보자 마을에 갔던 날, 빨간 책을 읽어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던 나는 도착하자마자 책을 펼쳤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을 사람들의 아우성에 밖으로 나가야 했다.
몸보신 차 먹을 것을 가져오겠다는 세 놈이 초보자 사냥터에 있는 몬스터들을 모조리 학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레전더리 어드벤처를 처음 접했던 초등학교 시절, 고인물들이 초보자 사냥터를 휩쓸던 파렴치한 짓이 떠오른 순간이었다.
나는 마을 사람들에게 냅다 사과하고, 세 놈을 데리고 마을을 빠져나왔다.
‘어디 조용한 곳 없나…….’
폭주한 마력의 여파로 몸이 성치 않았던 나는 편히 머무를 수 있는 곳이 필요했다. 지금은 어딜 가나 놈들 때문에 마을이 난리 법석이었고 마땅히 쉴 곳을 찾는 건 힘들었다.
사람 적은 마을을 찾으려고 심란하게 중얼거리는 내게 자이드가 옆에서 말했다.
‘필요하면 만들겠다.’
나는 그의 말에 어리둥절하게 쳐다봤다. 이해 못 한 나와 달리 자이드의 말에 두 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괜찮네.’라며 찬성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다 비범한 놈들끼리는 통하는 게 있나 보다 생각하며, 한적한 마을을 찾기 위해 발을 옮기려던 차다.
놈들이 마력을 모으기 시작하더니, 밀림과도 같던 숲을 한순간에 황무지로 만들어 버렸다. 이어서 바닥에 쌓인 재료로 이렇게…… 단 이틀 만에 성 하나를 뚝딱 만들어 버렸다.
“-그쪽 방은 없을 텐데요.”
“나는 보스와 함께 쓰면 된다.”
“기복 님은 혼자 방을 쓰고 싶다고 했습니다.”
“보스에게는 피해가 안 가도록 하겠다.”
“피해입니다. 나가서 방이나 더 만드십시오.”
나는 한 치의 양보도 없이 투덕대고 있는 두 사람을 어이없게 쳐다봤다. 그러다 그 뒤에, 활짝 열린 문으로 그림자가 생긴 걸 보았다. 이어서 복도를 울리는 여유로운 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가 가까워지자 두 사람이 말을 멈추고서 시선을 돌렸다.
나 역시 방 안으로 들어서고 있는 느긋한 다비를 쳐다봤다.
“……내 연인 방에서 뭐 하는 짓들일까.”
다비가 싸늘하게 식은 눈빛으로 자이드를 훑었다. 그 붉은 눈동자는 침대 위에 올라와 있는 루스에게 옮겨갔고 이내 앞에 있는 나한테까지 차례로 닿아왔다.
다비의 눈동자는 오랫동안 내 몸에 머물러 있었다.
오소소, 소름이 돋는 걸 느끼며 나는 황급히 시트를 잡고 가슴께까지 끌어올렸다.
그쯤, 앞에 있는 루스에게서 굳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쪽은 이미 공유했으니 나가시죠.”
“연인의 곁에 늑대들을 두고 어떻게 나가.”
“방해하겠다는 겁니까. 제가 공유받지 않으면, 그쪽도 위험할 텐데요. 각인된 모두의 마력이 연결됐다는 걸 인지하십시오.”
“그 점이 짜증 난단 말이지. 파티에서 나가는 순간 네 멱을 따려고 했는데 말이야.”
다비가 탐탁지 않음을 가득 담아 말했다.
나는 다비의 입에서 나온 ‘파티’라는 말에 놈들의 머리 위를 쳐다봤다. 여전히 보라색 파티가 맺어져 있었다. 내 머리 위의 [공기복] 역시 보라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다만, 이전과 달리 놈들의 레벨 표식이 사라졌다. 더 이상 물음표가 보이지 않았다. 측정 불가였던 마력이 각인으로 인해 서로 공유가 돼서일까.
새삼 결속력을 높여주는 보라색 파티가 더는 의미가 없어졌음을 깨달았다.
‘각인까지 한 마당에, 파티가 뭔 소용이냐…….’
그런데도 누구 하나 파티를 끊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성적으로 생각하시죠. 각인이 된 이상 일정 부분은 타협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은 제가 기복 님과 마력을 공유할 차례입니다.”
루스가 마찬가지로 성가시다는 듯이 말을 뱉었다. 그러자 옆에 있는 자이드가 묵묵히 그들의 대화를 듣다가 고개를 비스듬히 했다.
자이드는 무뚝뚝한 얼굴로 루스를 향해 말했다.
“내게 차례를 양보하라.”
자이드의 무미건조한 목소리에 뒤이어 다비에게서 빈정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죽기 직전에 말해, 그때는 타협해 주지.”
그들의 말에 루스의 미간에 주름이 잔뜩 깊어졌다. 이어서 다비가 침대 가까이 다가오자 내 위에 있던 루스가 몸을 일으켰다.
침대 앞에 선 루스가 싸늘하게 식은 눈으로 두 사람을 쳐다봤다.
“대화가 통하질 않는군요.”
커다란 세 놈이 침대 바로 옆에서 대치하며 서 있는 게 보였다.
‘……어디서 본 것 같은 그림인데.’
데자뷔를 느끼던 차에 몸에 소름이 돋았다. 고개를 들어 올리자 체격 좋은 세 사람이 서로를 살기 어린 눈빛으로 쳐다보는 게 보였다.
“연인을 타협할 수가 있나.”
“나의 보스기도 하다.”
“그렇다면 저도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세 사람 주변으로 각각의 색으로 이글거리는 마력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내 몸 안에 있는 마력도 일렁였다. 칼날같이 매서운 기운을 뿜어대는 놈들로 인해 피부가 따끔거렸다. 하지만 예전처럼 어지럽거나 압도되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들을 잠자코 보던 나는 문득 눈을 감았다.
‘될 것 같은데…….’
알 수 없는 확신이 들었고, 나는 감각에 집중했다. 그리고 세 갈래로 일렁이고 있는 마력을 다스렸다. 파도치는 듯한 느낌이 잠잠해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죽은 듯이 고요해졌다.
나는 감은 눈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그러자 세 놈이 당황한 얼굴로 자신들의 손을 쳐다보고 있었다.
조금 전만 해도 따끔거리던 공기는 평온하게 가라앉아 있었고, 놈들의 마력은 씻은 듯이 없어진 상태였다.
“진짜 되네.”
나도 모르게 놀란 목소리가 툭 흘러나왔다. 그러자 굳어 있던 놈들의 고개가 내 쪽으로 일제히 돌아갔다.
놈들의 흔들리는 눈빛과 함께 탄식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복 님이 하셨습니까.”
“…….”
“……마력이 나오지 않는다.”
놈들이 잔뜩 당황하고 있는 얼굴이 보였다.
그런 그들을 물끄러미 보고 있으니 묘한 쾌감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각인이라는 거 괜찮은데?’
어렴풋이 될 거라 직감했지만…… 진짜 가능한가 보다. 그러니까, 각인된 놈들의 마력을 다스릴 수 있는 행위가 말이다.
그렇다면, 더는 놈들의 마력에 압도되지 않아도 된다는 소리기도 하다. 놈들의 마력, 힘의 키를 내가 쥐게 된 거나 다름없으니까.
‘이거지……. 이런 게 전설의 무기지……!’
저놈들만 영웅 대접을 받는 현재 처지에 대한 서러움이 싹 씻기는 기분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게, 엄연히 나로 인해 네스키가 죽었음에도 그토록 바랐던 영웅 대접을 못 받고 있었으니까…….
네스키를 처리한 뒤, 세 놈이 지하 세계에서 멀쩡히 나왔다는 소문이 일파만파 퍼졌다. 이후로 기절해서 업혀 나온 나는 구출당한 행인 취급을 받았고, 세 놈은 네스키를 처리한 영웅으로 열렬하게 떠받들어졌다.
‘어째서 내가 아닌 이놈들이 영웅이 된 거냐고…….’
네스키가 죽었음에도, 게임 세상은 계속 흘러갔다. 이 세상에 뿌려진 수많은 몬스터들이 자기들끼리 증식하고 있었고, 사람들 사이에서는 소환진이 은밀하게 거래되고 있어 세상이 여전히 혼란스러웠기 때문이다.
평화를 찾지 못했음에도, 수많은 희생자를 만든 네스키에게 복수를 해 줬다며 세 놈을 위해 어느 마을이든 축제를 열어 주면서까지 열렬히 환영해 주는 상황이다.
‘이게 뭐냐…….’
나만 쏙 빼고 세 놈만 영웅 취급을 받자 서러웠다. 내 덕도 있다고, 내가 레스탈로스라서 그렇다고 직업을 밝히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그러나 전설의 무기의 존재를 알게 되면 사람들이 득달같이 달려들 게 분명했다. 그렇게 되면 안 그래도 험난한 인생이 더 험난해질 것 같기도 하고……. 네스키급 희생자가 생길 것 같다는 예감에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제야 진가를 발휘하는구나!’
그래서 며칠 내내 이게 무슨 전설의 무기냐며 속앓이를 해야 했다.
하지만 지금! 영웅이 된 물음표 놈들의 힘을 조절할 수 있다는 엄청난 진실을 알게 됐다. 그렇다면 영웅들의 진정한 보스가 된 격이니 말이 달라진다.
‘드디어 내가 놈들에게 휘둘리는 무기가 아닌, 주인다운 주인이 된 건가……!’
나는 의기양양하게 놈들을 쳐다봤다.
“함부로, 내 앞에서 싸우지 말라고.”
웬만해서 당황하지 않는 놈들이 당황한 티를 역력하게 내비치고 있었다.
아마 저 세 놈은 날 때부터 넘치는 마력을 공기처럼 사용했을 것이다. 그런데 원하는 대로 마력이 나오지 않으니 곤혹스러울 게 당연하다.
그런 놈들과 달리 나는 이제야 저 압도적인 놈들의 보스다운 보스가 된 것 같아 흡족한 마음이 올라오고 있었다.
‘흐흐, 내가 바로 전설의 무기라고.’
그렇게 잔뜩 가슴이 부풀고 있던 차다.
앞에 있는 다비 놈의 표정이 점차 진정되는 게 보였다. 그러더니 찡하게 감동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이어서 그의 입에서 감격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복…….”
한껏 어깨를 올리고 있던 나는 그의 눈을 마주한 순간 멈칫했다.
눈을 깜빡이는데, 주변 녀석들의 표정도 심상치 않게 들뜨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올라간 어깨가 점점 내려가기 시작했다. 불길함이 스치는 순간, 놈들의 입에서 상기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기복이랑 하나가 된 걸 느끼니까 흥분돼…….”
“꽤나…… 깊은 곳까지 연결이 되었군요.”
“보스와 결합한 것 같다.”
만족감이 담긴 목소리가 놈들의 입에서 차례대로 나올 때마다 나는 흠칫 몸을 떨어야 했다.
“무, 무슨…….”
홍조가 돌고 있는 놈들의 얼굴을 보니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마나가 속박됐는데…… 왜 흥분을 하냐고…….’
예상치 못한 놈들의 반응이 당황스러웠다.
“기복이는 강하구나……. 역시 연인은 부족해. 우리 결혼할까? 기복이를 닮은 애를 낳아도 좋을 것 같아.”
얼빠져 있던 나는 어느 때보다 진지한 다비의 눈동자에 놈이 진심으로 하는 소리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나는 몸까지 펄쩍이며 기겁하여 소리쳤다.
“미, 미친 소리 좀 하지-!”
그러나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루스의 냉철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기복 님은 제 아이를 낳을 겁니다.”
남자인 내게 개 미친 소리를 하는 말이 들리자 괴성이 와락, 터져 나왔다.
“미쳤냐? 내가 애를 어떻게 낳냐고!”
제멋대로 결론을 내리고 있는 놈을 향해 소리치던 중, 불현듯 깨달았다.
‘이 미친놈들은 생각보다 더 미친놈들이구나.’
“썅…….”
나는 입을 꾹 깨물었다. 이런 미친놈들을 상대하다간 내 속만 뒤집힐 것임을 상기했다.
놈들을 시선을 피해 눈을 돌리는 순간 호박색 눈동자와 마주쳤다. 그의 눈동자가 아주아주 반짝이는 이채가 돌고 있어 심장 한편이 서늘해졌다. 이어서 자이드의 굳게 다문 입술이 열리는 것이 보였다.
나는 순간적으로 그가 아주 뭣 같은 말을 쏟아낼 것임을 직감했다. 그리고 그 직감은 오늘도 아주 정확했다.
“넷이 함께하면 되겠군.”
자이드의 무감한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나는 그 소리에 등줄기부터 소름이 쫘악 돋아왔다. 왜냐, 각인할 때 세 놈에게 무자비하게 박혔던 기억이 강렬하게 재생됐기 때문이다.
‘시발…….’
그때는 잠식 때문에 정신도 혼미했고, 위급한 상황이니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그런 미친 행위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더는 위급한 상황도 아닐뿐더러, 세계관 최강 보스인 네스키도 죽은 마당에 그딴 미친 행위를 또 할 필요는 전혀 없다.
“음. 그럴까.”
사색이 된 나와 달리 다비는 좋은 생각이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어.”
“…….”
다비의 입에서 나오는 미친 소리와 함께 루스는 입을 다물었다. 마치, 무언의 긍정이라도 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이어서 자이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떤가.”
그들의 시선이 일제히 내게로 쏟아졌다. 눈만 마주치면 으르렁대던 놈들이 지금 이 순간, 정신 나간 뜻을 모아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내게 어떠냐고 태연하게 물어보고 있는 뻔뻔한 세 낯짝을 침묵 속에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어떠냐고? 질식당해 뒤질 일 있냐, 이 망할 자식들아……! 네놈들 무식한 크기를 생각하라고!”
나는 양심 없는 낯짝들을 보며 말을 뱉다 울컥해 버렸다. 그러자 자이드가 아쉽다는 표정으로 시선을 내렸다.
‘대체 뭐가 아쉬운 건데……!’
나는 분통이 터져 시선을 확 돌렸다. 그러자 앞에 있는 루스가 뜨끔한 듯이 시선을 스르륵 피하는 게 보였다.
……이놈도 자이드랑 비슷한 생각을 한 모양이다.
기가 차던 차에, 다비 놈의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그때 기복이 모습……. 진짜 야했지.”
정면에 있는 다비 놈이 입맛을 다시듯 아랫입술을 핥고 있는 게 보였다. 이어서 그때를 상기하듯 눈을 가늘게 접었다. 붉은 눈동자가 나를 향했고, 그 속에서 능청을 읽은 나는 못 참고 울컥 소리쳤다.
“안 해! 안 한다고! 싫다고!”
내가 꽥 소리치자 놈들이 멈칫했다. 쏟아지는 시선에도 나는 씩씩대며 다시는 안 할 거라고, 싫다고, 재차 소리쳤다. 온갖 구멍에 무식한 것이 처넣어져서 숨 쉬는 것도 고역인 짓을 왜 하냔 말인가.
그렇게 소리를 치고 있자 놈들이 입을 다물고 나를 쳐다봤다. 잠깐의 침묵이 흘렀고, 자이드의 목소리가 돌연 들려왔다.
“-보스는 우리와 있는 게 싫은가.”
덤덤한 그의 목소리에 나는 ‘놀리냐?’라고 소리치려 했다. 그 소리가 아니잖아, 라고 한껏 입을 열다 말고 심상치 않은 자이드의 얼굴에 멈칫했다.
왠지 조용해진 방 분위기를 자각하자 입에서는 버벅대는 말이 튀어나왔다.
“뭐, 뭔-.”
자이드가 가라앉은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더해서 자이드의 질문과 함께 두 놈이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내 대답을 진심으로 기다리는 눈빛이다.
복잡해 보이는 그들의 표정을 마주하고 있으니 서서히 얼빠지는 기분이 들었다. 어느 핀트에서 놈들이 한껏 진지해졌는지 모르겠지만 심히 당혹스럽다.
“…….”
나는 화를 내는 것도 잊고 입을 뻐끔거렸다. 내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던 놈들이 뭘 진지하게 물어보나 싶어 말문이 막힌다. 각인을 해서 다른 때와 달리 진지하게 내 반응을 마주한 것일까, 아니면-
‘……설마…… 여태 타격받고 있었던 거냐.’
매번 벽에다가 소리치는 기분이었는데, 사실은 내 말에 신경 쓰고 있었던 것일까. 그렇다면 아주 반가운 소리긴 했다만…… 여태 소리치든 말든 크게 타격받지 않던 놈들이라 더 꽥꽥 소리치고 있었는데, 갑자기 진지한 얼굴을 하니 상당히 당황스럽다.
“…….”
침묵이 길어지자 어쩐지 귀가 축 처진 듯한 놈들의 모습이 보였다.
세 놈의 혼란스러운 얼굴을 보고 있으니, 놈들의 잘난 얼굴 때문일까…… 화내던 내가 괜히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뭔가 바늘로 잘게 쑤시는 기분 같기도 하고……. 아무튼 좋은 기분이 들지 않았다.
‘뭘 진지하게 물어보는 거냐고…….’
당연히, 싫은 놈이랑 각인할 리가 없잖아.
물론 어쩔 수 없는 상황이긴 했지만 싫지 않으니까 감수한 것이다. 그러니 같은 상황이 오더라도 각인을 할 게 분명하다. 지금도 후회는 하지 않으니 말이다.
단지 ‘이렇게 비범한 놈들과 평생 함께해도 괜찮은 걸까.’라는 미래에 대한 걱정이 순간순간 올라올 뿐이다. 골치 아픈 놈들이니 이 정도 걱정은 함께하게 된 이상 당연하지 않나 싶다.
‘……애초에 싫은 놈들이랑 모험을 누가 하냐.’
네스키를 잡겠다는 한마디에 따라와 주고, 몇 번이나 날 구해 준 놈들을 싫어할 리가.
나는 놈들을 쳐다보며 말했다.
“……네놈들이 싫었으면 진작 도망갔어.”
“…….”
“그게 아니라…… 아프고 힘든 게 싫은 거라고.”
아직도 말하기 뭣한 부위가 쓰라렸다. 나는 민망함에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인간적으로 회복할 시간은 줘야 나도…… 좀, 즈, 즐기고 뭐 그런 게 있을 거 아니냐…….”
화끈거리는 목덜미를 문질렀다. 정적이 흘렀고 뒤늦게 시선을 흘끔 들었다.
진지한 그들이 낯설어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는데 앞에서 단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군요. 그럼, 오늘은 힐만 해 드리고 가겠습니다.”
루스의 말에 멈칫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몸이 시원찮은 상탠데, 힐만 해 준다는 것을 마다할 이유는 없다. 한발 물러선 루스를 보며 안도하다가 가까이 있는 자이드를 쳐다봤다. 눈이 마주친 놈은 내가 뭔 말을 꺼내기도 전에 불쑥 말을 뱉었다.
“회복된 것을 보고 가겠다.”
그러자 옆에 있는 다비가 말을 뱉었다.
“기복이 얼굴만 보다 갈게.”
놈들 나름대로 타협을 한 대답이었다. 그러나 또 으르렁댈지도 모르는 놈들을 같은 공간에 둬도 괜찮을까 싶다. 하지만 누구 하나 나갈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꿈쩍도 하지 않는 그들을 보니, 새삼 레스탈로스와 선택받은 자의 관계의 결속이 상당히 깊다는 생각이 들었다. 곁에 있겠다는 놈들을 내칠 마음이 들지 않았으니까…….
“……그러든가.”
나는 멋대로 하란 듯이 몸에 힘을 풀었다.
이들이 내게 맹목적으로 끌리는 것처럼, 나 역시 이들을 거부할 수가 없나 보다. 내가 온전해지려면 놈들이 필요하고, 놈들이 온전해지려면 내가 필요했다. ……나는 놈들에게 물러터질 수밖에 없었다.
‘내가 전설의 무긴데 어쩌겠냐…….’
이 정도까지 지독하게 묶였다면 이젠 정말로 받아들여야지.
“-힐을 하겠습니다.”
루스가 침대에 앉아 이마에 손을 올리자 눈이 감겼다.
잠시 뒤, 한쪽 팔이 슬며시 당겨졌다. 시선을 들자 다비 놈이 내 손을 꼭 잡으며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같은 시야에는 벽에 기댄 채 곁에 서 있는 자이드의 모습이 보였다.
‘……누가 보면 임종 직전인 줄 알겠네.’
힐 하나 받는데 우르르 뭐 하는 짓인가 싶은 마음이 올라왔다. 그러다 이내 루스의 손이 닿아 있는 곳에서 시원한 기운이 들어왔고, 동시에 생각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눈이 절로 감겼다. 그렇게 가만히 힐을 받고 있으니, 그들의 숨소리가 조용히 귓가에 들려왔다. 평화로운 공기가 맴돌았고 마음이 차분해졌다.
그 어느 때보다 몸이 편안해지는 걸 느끼며 생각했다.
‘……뭐, 괜찮을지도.’
놈들과 함께하는 게 고되고 힘들지언정…… 재밌고 좋은 날도 많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놈들이 곁에 있는 지금 이 순간에 나는 안정감을 느끼고 있으니 말이다.
나는 아마도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다이내믹한 게임 속 세상에서 세 놈들과 생활하는 게 꽤 좋은 듯하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