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전사 마을
“…….”
몸과 의식이 둔한 감이 있어 눈만 끔뻑였다.
일어난 지는 좀 됐다. 하지만 움직이고 싶지 않은 상태다.
까만 천장 중앙에 달린 황금빛 샹들리에가 보였다. 가만히 보고 있으니 환한 빛이 눈 부시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선을 내려 손가락을 꿈틀거려 보았다. 그리고 팔을 들어 천장 쪽으로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아까보다 움직임이 수월했다.
고요 틈으로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코 안으로는 은은한 향초의 냄새가 들어왔다.
그쯤 꼼짝할 수 없을 정도로 축축 늘어지고 무뎠던 감각이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두어 번 눈을 깜빡이다, 까만 벨벳으로 된 푹신한 침대를 짚고 상체를 일으켰다.
“……여긴 어디야.”
어두운 톤으로 된 낯선 방 안에서 잠긴 목소리가 울렸다.
큼큼, 목을 가다듬으며 목울대로 손을 가져다 댔다. 그러다 문득 눈을 깜빡였다. 기절 전에 엉망이었던 목이 더는 아프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치유…… 한 건가.”
얼떨떨하게 시선을 내리던 나는 땀과 정액으로 범벅된 몸이 말끔해져 있을뿐더러, 욱신거리던 아래쪽도 멀쩡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심지어 몸에는 망토 같은 하얀 옷, 그러니까 내가 세팅했던 장비가 그대로 입혀 있었다.
‘……루스가 치유했나.’
씻은 듯이 말끔해진 몸을 보며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나는 다시 고개를 들어 낯선 방을 훑어봤다. 황금색과 검은색의 앤티크한 가구가 놓여 있었다. 마치 중세시대 귀족이라도 살 것 같은 방이다.
“배는 아닌데…….”
확실히 기절했던 객실은 아니었다. 커튼이 걷혀 있는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과 밖의 풍경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배와 달리 움직이지 않고 있었으며, 구름이 가득 낀 하늘도 아니었다.
낯선 공간에 의아함을 느끼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카펫이 깔린 바닥을 밟고 창가에 다다르자, 밖에 풍경이 보였다.
“이야-.”
산만 한 바위를 층층으로 깎아 그곳에 집들이 세워져 있었다. 제각각의 크기와 모양으로 만들어진 앤티크한 집과 투박한 바위 배경이 묘하게 조화로웠다.
나는 손을 뻗어 창문을 활짝 열었다. 그러자 아까부터 희미하던 물소리가 시원하게 들려왔다. 피부를 통해 덥지도, 춥지도 않은, 적당한 온도가 느껴졌다. 더해서 싱그러운 풀 향기와 축축한 물 내음이 맡아졌다.
“-어디 보자.”
나는 창문 밖으로 고개를 쭉 내밀었다. 여기가 어딘지, 주변을 통해 짐작하려 했다.
멀지 않은 곳에 큰 바위가 보인다. 그곳에서 폭포가 웅장하게 쏟아지고 있었다. 계속해서 들려오던 물소리의 정체가 저건가 보다. 방에서 폭포의 윗부분이 잘 보이는 걸로 보아, 꽤나 높은 곳에 이 집이 위치해 있는 듯하다.
시선을 내려 이 집의 아래쪽을 쳐다봤다. 집들 사이로 사람들이 지나가는 모습이 보인다.
“……으흠?”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사람들을 쳐다봤다. 아래쪽에 지나가는 사람들 머리 위에 표식이 통일돼 있었다. 더해서 사람들의 허리춤에는 칼을 한 자루씩 차고 있었다.
“……그새 도착한 거냐.”
멀거니 아래를 보던 나는 [전사] 표식을 달고 있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이곳이, 땅끝에 있는 전사 마을이란 것을 깨달았다.
‘하늘 배라 일찍 도착한 건가.’라고 생각하기엔,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빠른데- 이상함을 느끼며 기억을 더듬어 봤다. 그러나 기절을 한 상태로 기억이 날 리가 만무하다. 다만, 중간에 몸이 들썩거리던 게 누군가에게 업힌 느낌을 받긴 했다.
“……도착했으면 됐지.”
기절해서 도착했다만…… 뭐 아무튼, 왔으니 됐다.
나는 열어 둔 창문을 닫았다. 그러자 시원하게 쏟아지던 물소리가 희미해졌다. 뒤를 돌아보자 어두운 톤의 중세 시대 방이 눈에 들어왔다.
‘그래도…… 놈들이랑 있으니까 숙소 퀄리티는 좋아지네.’
호화스러운 숙소를 보며 우울한 마음을 위로했다.
‘비록 어딘가 회까닥해 감당 안 되는 놈들이긴 하지만…….’
……단단히 마음먹고 내가 적응해야지 뭐 어쩌겠나 싶다. 받아들이지 않으면 힘든 건, 저 낯짝 두꺼운 세 놈이 아닌 나였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잖냐……. 적응하겠지…….”
실제로 적응이 되고 있는 것 같다. 지금만 봐도, 자고 일어나니까 그 전보다 울분의 강도가 줄어들었다. 완전히는 아니지만, 전보다 괜찮았다. 이렇듯 아무리 험난한 일이 닥쳐도 점점 적응을 하는 게 인간이다.
심지어 나는 적응력이 좋은 편이라고 할 수 있다. 몬스터들이 출몰하는 게임 속 세계에서 제법 빨리 적응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런 나라도 미친놈들의 기행에 태연해질 만큼 적응하려면 좀 걸릴 듯하다.
“……놈들은 다른 방에 있나.”
‘너무 조용한데-’라고 생각하다 고풍스러운 방 안을 빤히 쳐다봤다.
‘이런 호화스러운 방을 각자 쓸 정도로 골드가 남아 있었나?’
하늘 배에서 다 쓴 거 아닌가……. 이런 의문을 느끼며 눈동자를 빙그르르 돌렸다.
“뭐- 있으니까 지금 머물고 있는 거겠지.”
나는 몸을 가볍게 움직였다. 그러자 몸이 상당히 뻐근하다는 것을 느꼈다. 마치 오래 움직이지 않은 것처럼 뻑뻑한 감이 있었다.
팔과 목, 허리, 몸 이곳저곳 근육을 가뿐하게 풀어 주면서 창밖을 쳐다봤다.
“으흠-.”
자고 일어나니까 컨디션도 괜찮고, 불편하거나 아픈 곳도 없었다. 그렇다면 마을이나 둘러보러 갈까 싶다. 그리고 네스키와 싸운 자에 대한 정보도 얻을 수 있으면 얻고, 겸사겸사 나가보는 게 좋을 듯하다.
“낯선 마을에 왔으면, 분위기를 살펴야지.”
그렇게 생각을 마친 뒤, 넓은 방을 휘적휘적 가로질러 갔다. 나가는 곳으로 추정되는 문과 가까워졌을 때다.
달칵-
대뜸 손잡이가 돌아가더니 까만색 방문이 열렸다.
갑자기 앞에 있는 문이 열리자 주춤하며 문을 쳐다봤다. 그러자 안으로 들어오려던 상대가 나를 발견하고 우뚝 멈춰 섰다. 이내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던 눈이 놀란 듯이 벌어졌다.
“…….”
입술을 달싹거리는 루스의 얼굴이 보였다. 투명한 피부는 평소와 달리 질려 있었고, 보랏빛 눈동자는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뭐, 뭐지……?’
나와 마찬가지로 루스가 당황한 나를 찬찬히 살피고 있었다. 그러더니 눈을 휘며 걱정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물어왔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어? 어, 괜찮긴 한데……. 네가 치료한 거야?”
“……아닙니다.”
“아, 아니라고? 그럼, 다비 녀석이 치료해 준 건가…….”
“기복 님 스스로 치유한 겁니다.”
“뭐? 내가?”
루스가 흔들리는 눈으로 나를 보더니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러더니 물기 어린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어쩐지 애틋함을 담고 있는 루스의 눈빛을 마주하니 얼빠진 기분이 들었다.
“나는 그런 능력이 없는데……?”
잠시 침묵을 하던 루스가 입술을 달싹였다.
“……그렇지 않으면 말이 안 되니까요.”
당최 알 수 없는 소리에 어리둥절하게 루스를 쳐다봤다. 루스는 착잡한 얼굴로 나를 보더니 입술을 머뭇거리듯 움직였다. 그러다 눈썹을 일그러뜨리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기복 님을 치유하려 했지만, 통하질 않더군요…….”
“가, 갑자기 뭔 소리야?”
“기복님은…… 일주일 동안 의식이 없었습니다.”
“어? 뭐, 자, 잠깐만…….”
“지난 일주일간 최선을 다했지만, 저로서는 기복 님의 방대한 마력을 채우기엔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아니, 아니, 그…… 내가 일주일이나 기절했다고……?!”
“예……. 아마, 인간 상태로 방대한 마력이 뽑혀 나가 의식을 잃은 것 같습니다.”
말을 마침과 동시에 루스의 입매가 움찔거렸다. 잔뜩 망설이는 듯한 입술이 열리더니 그 틈으로 먹먹함을 담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지쳐 있는 기복 님 앞에서 쓴, 제 마력의 영향도 받은 걸로 보입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루스는 허리를 숙여왔다. 푹 숙인 고개와 함께 머리카락이 앞으로 사르륵 넘어갔다. 앞에 있는 하얀 정수리를 멍하니 보던 나는 화들짝 팔을 휘저었다.
“괘, 괜찮, 아니 뭐, 죽는 줄 알았긴 했는데……. 이, 이렇게 고개를 숙일 필요는 없다고……!”
나는 허둥지둥 팔을 들어 루스의 어깨를 잡았다. 그의 고개를 들게 하자, 눈앞에 루스의 얼굴이 아주 가깝게 보였다.
루스가 단정한 입술을 꾹 깨물더니 눈가를 일그러뜨렸다. 차가워 보이던 루스의 얼굴이 안쓰러울 정도로 수척한 빛이 돌고 있었다. 가슴 안쪽이 살짝 쿡쿡 찌르는 느낌이 들었다.
그의 어깨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갈 즈음, 하얗게 질린 루스의 입술이 열리더니 가련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제가 감히 기복 님을 치유할 수 있을 거란, 오만함을 갖고 마력을 사용했나 봅니다…….”
청순가련한 루스의 얼굴이 가까이서 보였다. 나는 애처로운 눈동자를 보자 마음이 아려왔다. 괜찮다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괜-.”
말을 뱉으려던 차에, 어디선가 강렬한 시선이 느껴졌다. 동시에 공기 흐름이 무거워지는 듯했다.
나는 벌렸던 입을 닫으며 시선이 느껴지는 곳, 루스 뒤편으로 눈동자를 돌렸다. 그러자 그곳에는 커다란 놈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나를 쳐다봤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말이다.
“흡-.”
그의 어깨에 메인 죽은 들짐승을 발견한 나는 놀라서 숨을 들이켰다. 그러자 앞에 있는 루스가 허리를 곧추세우며 자세를 바로 했다.
“-왜, 왜.”
동시에 자이드가 돌진하듯 방 안으로 들어왔다. 루스를 지나쳐 내 앞으로 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그 맹렬한 기세에 절로 뒷걸음질이 쳐졌다. 그러나 내 걸음보다 자이드가 더 빨랐다. 녀석이 내 앞에 빠르게 섰다.
“…….”
나는 우뚝 굳은 채 앞을 바라봤다. 탄탄한 구릿빛 가슴팍이 시야에 보였다. 더해서 어깨에 둘러멘 죽은 짐승이 가까이서 보였다.
얼른 고개를 들어 올리자 무표정한 자이드의 얼굴이 보였다. 그의 호박색 눈동자는 문 앞에서부터 시종일관 내게 고정되어 있었다. 중압감을 주는 기세에 시선이 점점 아래로 깔렸다.
이유 없이 눈치를 보던 차에, 자이드가 불쑥 말을 뱉었다.
“-일어나지 않아서 걱정했다.”
동굴과 같이 깊은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어색하게 우물거리던 입술을 멈추었다. 눈을 두어 번 깜빡이다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자이드의 목에 핏줄이 불거져 있는 게 보였다. 더해서 그의 깔끔한 턱에도 힘이 들어가 있었다.
가만히 그를 보고 있자 평소처럼 메말라 보이던 표정이 인제 보니, 사뭇 굳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잠시 시선을 마주하고 있자 굳건하게 닫혀 있던 그의 입술이 한 번 더 열렸다.
“지켜주지 못했다. 내 잘못이다.”
말을 마친 자이드가 입매를 살짝 찌푸렸다. 사막과 닮은 눈동자는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눈을 크게 뜬 채 그 모습을 쳐다봤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그가, 미안한 기색을 띠고 있으니 당황스러웠다.
“…….”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나는 붕어처럼 입만 뻐끔거렸다. 예상치 못한 반응을 마주하니 머리가 고장 난 것 같았다.
“-그런 걸로는 기복 님이 회복이 안 된다고 말했을 텐데요.”
그때, 탐탁지 않아 하는 목소리가 자이드의 뒤편에서 들려왔다. 주춤 시선을 돌리자 자이드 어깨 너머로 루스가 보였다. 성가시다는 듯한 얼굴로 팔짱을 낀 채, 자이드의 뒤통수를 냉랭히 보고 있었다.
앞에 있는 자이드가 천천히 몸을 틀었다. 루스를 보던 자이드가 무감한 투로 말했다.
“일어났지 않은가.”
“그쪽이 잡아 온 몬스터를 먹인 덕이 아닙니다. 기복 님 스스로 치유를 한 겁니다.”
“그렇군…….”
나는 놈들의 대화에서 상당히 거슬리는 부분이 있어 뻐끔거리던 입을 멈추며 자이드를 쳐다봤다.
“…….”
무감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자이드의 얼굴이 앞에서 보였다. 어쩐지 조금 아쉬워 보이기도 했다.
나는 그의 얼굴에서 시선을 내려 어깨에 걸려 있는 죽은 들짐승을 쳐다봤다.
아까는 자세히 안 봐서 몰랐는데……. 평범한 들짐승이라 생각한 그것에는 눈깔이 세 개 달려 있었다. 더해서 자이드가 몸을 틀자, 물집처럼 울룩불룩한 피부와 혀를 길게 쭉 빼고 있는 얼굴이 보였다. 되게 역겨운 생김새의 몬스터가 드러난 순간이다.
“우욱-.”
속에서 무언가가 올라오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입을 틀어막으며 메스꺼움을 억눌러야 했다.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돌렸다.
잠깐 동안 호흡을 하고 있으니 앞에 있는 자이드가 내 어깨를 잡아 돌리며 걱정스러운 투로 물어왔다.
“왜 그런가.”
“……몰라서 묻냐?! 대체 나한테 뭘 먹인- 으욱.”
새삼 몬스터에게서 비릿한 향이 맡아졌다.
나는 울렁거리는 속을 느끼며 어깨를 붙든 놈의 팔을 쳐냈다.
자이드에게서 후다닥 물러나 입을 틀어막았다. 가까이 있다간 진짜 토할 것만 같았다.
‘빌어먹을- 기절한 사람한테 저딴 걸 먹이는 사람이 어디 있냐고!’
그렇게 속으로 욕과 토기를 삼키며 고개를 들자 자이드와 눈이 마주쳤다. 팔이 내쳐진 상태로 움직이지 않고 나를 보고 있었다. 워낙 사나운 기세를 풍기는 놈이라 그런지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보고 있으니……. 간이 쪼그라드는 느낌이 들었다.
“그, 그런 역겨운 몬스터를 먹이면 싫은 게 당연하잖아……!”
“회복이 뛰어난 몬스터라고 해서 잡아 왔다.”
놈이 손이 천천히 내려갔다. 그리고 살짝 눈이 아래로 내려갔다. 큰 변화는 없지만 어쩐지 매우 시무룩해 보였다.
“……싫어할 줄 몰랐다.”
거대한 놈의 어깨가 살짝 처지자 어깨에 매달려 있던 몬스터가 살짝 흘러내렸다. 나는 흠칫하며 몬스터를 쳐다봤다. 그러자 몬스터의 머리 위에 [Lv. 115]라는 빨간색 숫자가 눈에 들어왔다.
“허-.”
입이 크게 벌어졌다. 빨간색 레벨은 상당히 위험한 몬스터였다. 거의 중 보스급 몬스터 뺨치는 놈이라 파티로 잡아야 하는, 찾기도 힘든 몬스터라고 알고 있다. 그런 몹을 잡아 온 놈에게 경악하는 것도 잠시, 시무룩한 놈을 보자…… 뜨끔거리는 마음이 들었다.
나를 회복 시키려고 꽤나 고생해서 잡아 온 놈에게 타박을 줬단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바짝 마른 입을 혀로 축여야 했다.
“사, 사실 그렇게까지 싫은 건 아니고…….”
“그럼 손질해 주겠다.”
“아니, 아니! 돼, 됐어. 지금 체력이 아주 넘친다고!”
“필요 없는가…….”
“어, 어디에 팔아넘기는 게 어때? 골드는 있어야 하니까.”
“골드는 충분하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잖아……!”
“…….”
자이드가 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나는 제발 저 징그러운 몬스터를 맨정신으로 먹어야 할 일은 없길 바라는 마음으로 간절히 쳐다봤다.
“……보스 뜻이 그렇다면 팔고 오겠다.”
잠깐의 침묵 끝에 놈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자이드가 평소와 같은 무감한 표정으로 뒤로 돌아섰다. 몬스터를 어깨에 이고 루스를 지나쳐 묵묵히 밖으로 나가는 뒷모습이 보였다.
“-후우.”
그의 모습이 사라지자 안도의 숨이 터져 나왔다.
……저놈은 생긴 것과 달리 어린아이 같은 구석이 있다. 그래서 지금처럼, 어린이의 순수함을 짓밟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마다 진땀을 빼야 했다.
한숨을 돌리자, 문 쪽을 쳐다보고 있는 루스가 눈에 들어왔다. 루스는 미간을 찡그린 채 자이드가 나간 방향을 보고 있었다. 팔짱 낀 오른쪽 손가락이 까딱이고 있었다.
“…….”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루스는 자이드를 달갑지 않다는 시선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자이드의 행동을 가만히 지켜볼 뿐이었다.
시선을 느낀 루스가 고개를 돌렸고, 눈이 마주치자 잔뜩 찌푸리고 있던 루스의 미간이 펴졌다.
‘흐음…….’
나는 골똘히 루스를 쳐다보다 문득 눈을 빙그르르 돌렸다. 검은색과 황금색이 섞인 어두운 톤의 방 안이 보였다. 다시 문 앞에 서 있는 루스를 쳐다봤다.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는 내 모습에 루스가 왜 그러냐는 듯이 쳐다봤다.
“……전사 마을에는 언제 도착한 거야?”
“나흘 전에 도착했습니다.”
“허, 땅끝 마을 아니냐……. 엄청 빠르네.”
“기복 님이 쓰러지신 후로, 배 선장을 찾아가 부탁드렸습니다. 후로 빠르게 속도를 내준 덕에 예정보다 빠르게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담담한 루스의 목소리에 나는 어쩐지 서늘한 느낌을 받았다.
“그, 그랬냐…….”
나는 어색하게 말을 뱉었다. 루스는 부탁이라고는 하지만, 저런 서늘한 기운을 풍겨대면 상대가 협박으로 느끼지 않았을까. 선장의 안위를 생각하며 입술을 어물거리던 나는 나흘 전에 도착했다는 말에 의문을 느꼈다.
“……그동안 너네는 뭐 했는데?”
“저는 기복 님의 치유에 전념했습니다. 큰 효과가 없더라도 두 손 놓고 있을 수 없으니까요…….”
단정한 루스의 얼굴에 다시 그늘이 지기 시작하자 나는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
“그, 여기! 숙소는 어떻게 구한 거냐? 엄청 비싸 보이는데!”
“이 저택은 무료로 머물고 있습니다.”
“뭐? 이렇게 큰 저택을 그냥?”
“예. 전사 마을 안에서, 분에 넘치는 대우를 받는 자가 있더군요. 그자의 저택에 머무는 중입니다.”
“어? ……그 사람이 누군데?”
루스가 입을 떼려던 차다. 그의 눈동자가 문가로 돌아가더니 한숨처럼 말을 뱉었다.
“……오는군요.”
루스의 말에 어리둥절한 기분으로 문을 쳐다봤다. 그러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던 복도에 발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열린 문으로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누군가가 연상이 될 정도로 느슨한 걸음 소리라고 생각할 즈음, 문 앞으로 팔자 좋아 보이는 샌들이 삐죽 보였다.
“…….”
나는 이 호화스러운 저택의 주인이라고 짐작할 수 없을 정도의 천 쪼가리 셔츠와 바지를 입은 다비를 쳐다봤다. 방 안으로 들어오던 다비는 루스를 보자 눈빛이 단번에 식었다. 물어뜯을 것같이 살벌한 눈빛을 보였지만 웬일인지 루스를 무시하고 안으로 들어온다. 그러다 루스의 앞에 서 있던 나를 보고 멈춰 섰다.
“…….”
가로로 뻗은 다비의 눈이 커지더니 놀란 듯이 굳었다. 뚫어지게 쳐다보는 붉은 눈동자를 마주하다 놈의 얼굴이 조금 해쓱해 보인다는 느낌을 받았다. 흐트러진 핏빛 머리카락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다비의 얼굴에서 시선을 내렸다. 그러자 그의 품에 각종 투명색 통이 보였다. 놈이 단단한 팔로 바리바리 감싸고 있는 통 안엔 각종 색의 액체가 있었고, 풀잎들이 둥둥 떠 있었다. 통 밖으로는 종일 풀을 쥐어짠 사람처럼 그의 얇은 손가락이 물들어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다시 시선을 들었다. 그러자 그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게 보였다. 이어서 그가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다시 눈동자가 드러났을 때 놈의 어깨가 뻣뻣하게 굳어갔다. 이내 놈의 팔에 힘이 툭 풀리더니 바닥으로 유리통들이 우당탕 쏟아졌다.
“……뭐, 뭔데.”
다비 녀석이 사나운 기세로 걸어오자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앞에 다가온 놈이 어깨를 덥석 잡아 와 나는 옴짝달싹 못 하고 앞에 있는 녀석을 쳐다봐야 했다. 초록색 풀들로 살짝 얼룩져 있는 놈의 셔츠에서 시선을 올렸다. 그러자 언뜻 화나 보이는 다비 얼굴이 보였다.
놈이 붉은 눈동자로 내 몸을 쭈욱 훑었다. 그 시선에 절로 목이 움츠러들었다.
“무, 무섭게 왜 그러-.”
놈이 표정 없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으니 심장이 쿵쿵 뛰어댔다. 그래서 말이 떠듬대며 뱉어졌다. 그러나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놈의 얼굴이 왈칵 일그러졌다.
나는 멈칫한 채 놈을 쳐다봤다. 그의 곧게 뻗은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그 속에서 먹먹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미안해.”
놈의 입에서 의외의 말이 튀어나와 당황스러웠다.
“어, 어?”
그래서 멍청하게 되물으며 놈을 올려다봤다. 눈을 마주하자, 어깨를 쥔 손에 힘이 살짝 더 들어갔다. 이어서 놈이 울 것 같은 얼굴로 말했다.
“각종 약초를 먹여도, 전혀 효과가 없었어.”
“…….”
“이런 적 없었는데…….”
해쓱한 얼굴로 그가 힘없이 말을 뱉었다. 나는 그의 애처로운 얼굴을 멍하니 쳐다봤다. 심장이 울렁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다비 놈이 어깨를 쥔 손에 힘을 주어 나를 잡아당겼다.
나는 엉거주춤하게 놈의 넓은 품에 풀썩 안겼다. 다비 녀석에게서 낮게 읊조리는 투가 들려왔다.
“네가 깨어나지 않을까 봐…… 무서웠어.”
그의 목소리와 함께 누가 머리를 한 대 친 기분을 느꼈다. 굳은 상태로 놈에게 안겨 있자 앞쪽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눈동자를 들자 문 쪽에 서 있는 루스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아까와 같이 미간을 잔뜩 찡그리고 있었다. 마음에 들지 않은 듯 보였지만 참고 있는 듯했다.
“…….”
나는 그제야 이 녀석들이 전보다 얌전해진 게 기분 탓이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건 루스뿐만이 아닌 듯하다. 부딪쳤다 하면 싸우는 놈들이 서로를 보고 크게 투덕대지 않고 있었다.
놈들답지 않게 왜 이러나 생각해 봤다. 길게 생각할 것 없이 이유는 하나다. 내가 기절을 한 뒤로 절대 통제가 안 될 것 같은 놈들이 한풀이 꺾인 모습을 보이고 있었으니까-.
‘아마, 놈들은 내가 죽을까 봐 두려워한 게 아닐까.’
마력을 온통 쏟아부어 하얗게 질린 루스, 희귀 몬스터를 잡아 온 자이드, 그리고 풀떼기가 묻어 있는 다비의 모습을 보면 잠깐 기절한 새에 놈들은 온갖 방법을 써서 나를 회복시키려 했다.
무진장 헌신적인 모습이다. 보스를 대하는 아주 훌륭한 모습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놈들끼리 으르렁대는 것만 빼면 훨씬 좋은 파티가 될 것이다. 그리고- 지금, 놈들은 서로를 물어뜯지 않고 있었다.
‘……이거, 괜찮은데?’
이쪽 세계엔 포션이 있으니까, 육체가 힘들고 아픈 건 견딜 수 있다. 그러나 정신적으로 힘든 건 어쩔 도리가 없다.
놈들이 지금 정도로 얌전하게 군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그러니 아무리 잘난 얼굴로 처연한 눈빛을 보내도 절대 ‘괜찮다.’라는 용서의 말은 뱉지 않는 게 좋을 듯하다.
“그…….”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마음을 굳게 다잡으며 다비 놈의 가슴팍을 살짝 밀어냈다. 다비가 입을 꾹 다문 채 나를 바라봤다. 몸을 떼어내자 문가에 있는 루스 뒤로, 때마침 자이드가 들어서는 모습이 보인다. 어깨가 빈 걸 보니 징그러운 몬스터를 그새 무사히 팔고 온 모양이다.
나는 세 놈의 얼굴을 한 번씩 보다가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그러다 고개를 쳐들고 일러두는 투로 말했다.
“……다음에는 내가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주의해.”
말하고 보니 놈들을 통제할 수단이 내 목숨인가 싶어 현타를 느꼈지만…… 있는 게 어딘가 싶다.
“……알겠습니다.”
“명심하겠다.”
“……응.”
감격스럽게도 놈들에게서 순종적인 대답이 들려왔다. 그 모습에 나는 이제야 파티가 제대로 굴러가겠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그래.”
꽤 괜찮은 기분이 올라오는 것을 느끼며 몸을 틀었다. 이제 원래 목적이었던 문으로 걸어가려 했다. 그러자 놈들의 시선과 함께 루스에게서 의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가실 겁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누워만 있어 답답하다며, 전사 마을을 둘러보고 오겠다고 말했다. 혼자 자유롭게 둘러보고 싶은 것을 캐치한 루스가 알겠다고 말했고, 자이드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몇 걸음 걸어가다 보니 뒤에서 따라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왜?”
돌아보니 다비 녀석이 뒤따라오고 있었다. 놈은 시무룩하게 말을 뱉었다.
“같이 가.”
분명 혼자 갈 거라고 했음에도 놈은 두고 나온 개처럼 쫄쫄 따라왔다. 귀가 축 처진 놈을 뿌리치지 못한 나는 결국 함께 저택을 나서야 했다.
그렇게 놈이랑 전사 마을을 걷다 보니…… 기가 찼다.
“다스쿠르타우로재드비 님! 받아주십시오!”
철갑옷을 입고 있는 [전사] 표식의 사내가 앞에서 튀어나왔다.
나는 고백이라도 하는 듯 발그레한 사내의 얼굴을 쳐다보다 흘끗 옆을 봤다. 다비가 바로 앞에 내밀어진 망토를 고민하듯 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음- 좋아.”
그러자 얼굴에 땀이 맺힐 정도로 긴장하고 있던 사내의 얼굴이 화색을 띠었다.
“감사합니다! 호, 혹시 악수 아, 아니 포옹 한 번-.”
“그건 싫은데. 넌 기복이처럼 귀엽지 않은걸.”
“죄, 죄송합니다!”
다비의 헛소리에 죄송하다고 냅다 머리를 박아 버리는 사내가 보였다. 오버스러운 사내의 뒤로 마을 사람들이 제각기 손에 뭘 쥐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하나같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다비 녀석을 말이다.
이 광경을 보고 있으니 내 입에서는 어이없는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참나.”
마을 상인들이 죄다 물건을 들고 나와 있었다. 다비 놈은 그것 중 내키는 것만 받았고, 상점을 지나갈수록 다비 놈의 차림새가 점점 바뀌고 있었다. 마치 다비 놈의 열렬한 팬 미팅 현장에 매니저로 동행하는 기분이었다.
“너-.”
나는 엄청난 환대를 받고 있는 다비 녀석을 의미심장하게 쳐다보았다. 놈이 고개를 갸웃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놈의 때깔을 훑었다. 아까 풀떼기가 묻어 있던 옷은 어디 가고 꽤나 멋들어진 옷을 입고 있었다.
나는 탐이 난다는 듯이 놈의 어깨에 걸린 검은 재킷을 쳐다봤다. 방금 받은, 망토 역할을 해 주는 방어구 재킷이었다. 그 안에는 고급스러운 와인색 셔츠가 보였다. 대충 입고 있던 바지는 검은 정장 바지로, 거기에 벨트까지, 각각 느슨했던 장비구가 채워진 모습이다. 이렇게 좋은 장비를 공짜로 받으면서, 왜 여태 천 쪼가리나 입고 있었나 싶다.
장비를 갈아 끼운 모습을 바로 지척에서 바라본 나는 부러움을 숨김없이 드러내며 말했다.
“마을을 구한 영웅이라도 되냐?”
“그럴 리가.”
“그럼…… 사람들이 왜 이렇게까지 하는데?”
“그야, 전사들은 강한 것에 미치니까. 그리고 난 강하거든.”
의기양양한 다비의 말에 나는 멍청하게 눈을 끔뻑이다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렇군. 나사 하나 빠진 듯이 편하게 행동하니까 자꾸 망각하게 된다. 저놈이 아주 강하다는 것을.
……그래, 그렇지. 전사 직업 특성상 강한 것에 환장한다는 점을 게임 초기 설정에서 본 것 같다.
“또. 내가 기복이에게 미치는 이유기도 하지.”
능청스럽게 어깨를 잡아 오는 놈의 행동에 멈칫하며 올려다봤다. 눈을 마주한 놈이 고개를 기울이며 사르륵 웃었다.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울 것 같은 얼굴로 ‘미안해.’ 소리를 한 놈이 맞나 싶을 정도로 상큼한 웃음이었다.
‘저놈은 왜 금세 기분이 전환됐냔 말이냐…….’
그렇게 생각하던 중, 놈 머리 위로 어둑해진 하늘이 보였다. 그러자 꽤 시간이 흘렀다는 것을 깨달았다. 걷는 족족 마을 사람들이 달려와 얼마 못 걸었는데 말이다. 아무래도 놈이랑 마을을 돌아다니는 건 무리인 듯하다.
……내가 왜 다비 놈이랑 같이 나왔는가에 대한 회의를 느끼며 놈의 손을 쳐냈다. 그리고 저택으로 걸음을 돌릴 때다.
“돌아가게?”
“가야지.”
다비가 불쑥 물어오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놈 팬 미팅 현장은 더는 사양이다.
“그전에 마을 장로를 만나는 건 어때.”
“마을 장로? 왜?”
“도망쳐 온 자를 만나려면 장로 허락이 필요하거든.”
“허…… 그걸 왜 이제 말하냐? 여태 아무 생각 없이 걸었는데.”
“기복이 산책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으니까.”
……내가 개냐, 그리고 네놈이 엄청 방해했다고, 라는 말이 차올랐지만 말싸움을 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어두운 저녁 하늘을 보며 서둘러야 한다는 것을 자각했다.
“……앞장서.”
그렇게 다비를 재촉해 빠르게 마을 한편에 있는 집에 도착했다.
중후한 노인이 집에서 나왔고, 늦은 시간임에도 다비 녀석의 존재 덕에 다행히 환대를 받았다. 장로는 내가 찾던 자가 자신의 아들이라 소개했다. 내일 오후에 만나러 가 보라고 씁쓸한 미소와 함께 주소를 건네주었다.
‘내일 오후라-.’
주소가 적힌 종이를 챙기며 다비 녀석과 장로의 집을 빠져나왔다. 그래도 다비 놈과 동행한 수확은 있구나, 생각했다.
그 후, 저택에 도착하고 방 안으로 따라 들어오려는 다비를 가차 없이 쫓아냈다. 루스와 자이드에게는 내일, 남의 집에 우르르 가는 건 실례니 혼자 가겠다며 일정을 말해 주었다. 따라오려던 그들은 나의 완고함에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 * *
오후, 네스키의 정보를 갖고 있는 유일한 자의 집을 찾아갔다.
변두리에 있는 집이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사람이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내부에 온기가 없고, 암울함에 숨이 막혔다.
내가 우뚝 멈춰 있자, 휠체어를 탄 남자가 방 안쪽에서 나타났다. 나는 그자에게 인사를 건네다 말고 말을 잃었다. 피부가 벗겨진 얼굴이 보였다. 옷 밖으로 드러난 몸은 온통 붕대가 감겨 있었다. 붕대 곳곳에는 노란 진물이 배어 있었고, 남자가 다가올수록 시쿰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끼릭끼릭, 낡은 휠체어를 타고 오고 있는 남자는 두 다리마저 잃은 상태였다. 눈빛에는 생기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 내게 남자가 안쪽으로 자리를 안내했다.
“……이쪽으로 오세요.”
청년으로 보이는 그의 목소리는 다 쉬어 버린 노인과도 같았다.
남자를 따라 자리에 앉자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 바닥만 보고 있으니, 앞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스키를 잡으러 가신다고, 아버지께 전해 들었어요. ……정말 가실 건가요.”
남자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도 네스키를 잡으러 갈 것인지에 대해 묻고 있었다. 알량한 마음으로 왔다면 돌아가라는 말과도 같았다.
여태 모험을 한 이유가 네스키를 잡기 위해서다. 남자의 모습에 겁을 먹고 도망갈 정도로, 가벼운 마음으로 온 것이 아니다. 그랬다면 진작 초보자 마을로 돌아갔을 것이다.
나는 암울함으로 찬 남자의 눈을 보며 확답을 내놓았다.
“네, 저는 네스키를 잡을 거예요.”
내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가 놀란 듯 눈을 깜빡였다. 그러다 목이 멘 듯한 목소리로 말을 했다.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최대한…… 최대한 도와 드릴게요.”
아는 정보를 모두 알려주겠다며 남자는 덧붙여 말했다. 죽어 있던 그의 눈에 희망이 얼핏 스치는 것을 보았다. 이어서 남자는 네스키에 관한 정보를 말하기 시작했다.
“네스키는…… 암흑 속성을 가진 불완전한 존재예요. 몸속에 있는 지독한 마력을 배출하고 죽은 존재들의 마력을 흡입함으로써 강한 힘을 얻고 있죠.”
남자는 쉰 목소리로 말을 뱉다가 목소리를 내는 게 힘든지 잠깐 말을 멈추었다. 숨을 고르는 그를 잠깐 기다렸다. 그리고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고, 나는 이어지는 남자의 말에 집중했다.
“공격을 할 때, 소환술을 쓰는 걸 봤어요. 위험한 몬스터를 끊임없이 소환해서…… 저와 제 동료들은 순식간에 몬스터에게 둘러싸였어요…….”
조용히 말을 뱉던 남자는 당시 상황을 떠올렸는지 목소리를 떨기 시작했다. 몸에 감고 있던 붕대들은 식은땀으로 젖어 갔고, 남자의 눈은 점점 공포로 질려갔다.
“……제 동료들은 네스키에 대한 정보가 없어, 대비하지 못했어요. 쏟아지는 공격에 동료들의 마력이 순식간에 바닥나고 말았죠. 사지가 찢겨 죽은 동료들을 뒤로 한 채, 비명이 난무하는 어둠 속에서 저는 빛 하나만 보고, 말 그대로 기어서 도망쳐 와야 했죠.”
진정하듯 해 보이던 남자는 말을 할수록 목소리가 쩍쩍 갈라졌다. 뒤로 갈수록 남자는 호흡하는 게 벅찬지 숨을 가쁘게 뱉었다.
주체할 수 없이 몸을 떨기 시작하는 남자의 모습에 나는 몸을 일으켰다.
“히, 힘드시면 그만…….”
그만 말해도 된다며, 나는 남자를 진정시키기 위해 휠체어로 다가갔다. 남자는 초점 없는 눈으로 홀린 듯이 중얼중얼 말을 뱉었다.
“동료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저는 그곳에서 처참하게 죽었을 거예요.”
숨이 넘어갈 듯한 남자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그 순간, 남자가 고개를 번쩍 들더니 내 손을 움켜잡았다. 벗겨진 피부와 찐득한 진물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와 눈이 마주쳤을 때, 그의 입에서는 찢어지는 듯한 목소리가 비명처럼 터져 나왔다.
“부디 네스키를 죽여 주세요……!”
잔뜩 벌어진 눈은 아득한 절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온몸에 털이 쭈뼛 설 정도로 소름끼치는 절규에 몸이 우뚝 굳어 버렸다.
그 절망스러운 눈빛을 마주한 뒤로, 그 집을 나온 후에도 머릿속에 남자의 모습이 맴돌고 있었다.
쏴아아아-
시원하게 쏟아지는 물소리가 가까워졌다. 앞에 있는 바위를 지나가니, 절벽 끝에서부터 웅장한 폭포가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가까운 바위로 걸어가 몸을 기댔다. 축축한 물 냄새와 차가운 바람이 느껴졌다. 팔을 엇낀 채 고개를 들었다. 달빛을 받은 물줄기가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나는 가까운 곳에서 떨어지는 폭포를 멍하니 쳐다봤다.
“……하아…….”
기분을 환기할 겸 저택을 나와 폭포를 따라 걸어왔다. 마음이 자꾸 술렁거렸으니까.
오늘 불구가 된 남자를 보니 네스키의 힘이 확실히 실감 되고 있었다. 아니, 보스 몹이니까 당연히 무시무시한 놈이리라 생각했다. 충분히 각오했다고 여겼는데…… 처절한 남자의 눈빛을 보니 심란한 기분이 들었다.
“…….”
혹시 남자를 치유할 수 있을까 싶어, 저녁에 루스와 함께 남자를 다시 찾아갔었다. 그러나 이미 네스키의 마력에 잠식돼 치유 불능 상태라고 말했다.
“루스가 손을 못 댈 정도란 말이지…….”
나는 폭포를 보던 시선을 내려 발치를 내려다봤다. 돌바닥을 밟고 있는, 운동화와 닮은 신발이 보였다. 그 위에는 망토 같은 하얀 옷이 보였다. 패기 좋게 네스키를 잡겠다고 장비를 맞췄다. 정보도 얻고 강한 파티원들과 파티도 맺었다. 준비를 끝마친 상태다. 이제 정말 네스키를 찾아갈 차례였다.
“……후우.”
가슴께에 손을 대며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오늘 남자가 알려준 정보에 의하면 네스키는 지하 세계에 있다고 했다. 지하 문을 열기 위해선, 검은 꼬리를 가진 용을 찾아야 한다. 남자는 서쪽 숲에서 용을 만났다고 말했다. 남자가 넘겨준 지도를 따라 내일, 서쪽으로 가 볼 생각이다.
‘내가 아니면 누가 잡아. 전설의 무기는 잡을 수 있다잖아.’
나는 캄캄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술렁거리던 마음을 다잡았다.
그러다 보니 제법 시간이 늦었음을 깨달았다. 밤이 더 깊어지기 전에 슬슬 저택으로 돌아가야겠다 싶어 고개를 내렸다. 그러자 두어 걸음 앞에 인기척도 없이 서 있는 검은 형체가 보였다.
“…….”
나는 흠칫 몸을 떨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눈도 깜빡이지 않고 커다란 형체를 쳐다봤다. 달을 가리던 구름이 걷어지자 남색 제복이 눈앞에 드러났다. 흰 머리카락이 바람에 살랑거리는 게 보였다. 이어서 달빛에 얼굴이 드러났고 날카로운 눈매 속에 보라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제가.”
그의 입술이 열리더니 감미로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놀라게 했나 보군요. 죄송합니다.”
바위 끝에 쏟아지는 밤 폭포를 배경으로 보름달 아래 루스의 모습이 비쳤다. 현실감 없는 장면에 넋 놓던 나는 그가 걸음을 뗄 즈음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어, 언제부터 거기 있었냐.”
“기복 님이 바위에 기댈 때부터입니다.”
“계속 거기 있었다고?”
“그렇습니다.”
차분하게 대답하는 루스의 목소리에 나는 입술을 뻐끔거렸다. 저 존재감 넘치는 녀석이 한참이나 앞에 있어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정신을 빼놓고 있었나 보다.
“이, 인기척 좀 내지 그랬냐.”
“생각에 잠겨 있는 듯해, 방해하지 않았습니다.”
루스가 말을 뱉으며 내게 다가왔다. 그러자 제복 어깨에 달린 금장이 가까이서 보였다. 눈을 끔뻑이며 문양을 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루스의 보랏빛 눈동자가 나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앞으로 다가온 루스를 쭈뼛대며 올려다봤다. 그도 그럴 게 엄청난 미인이 빤히 쳐다보고 있으니까. 튼튼한 몸을 가진 사내에다가 약한 녀석이 아니란 걸 안다. ……그래도 긴장이 된다.
긴 속눈썹에 그늘진 그윽한 눈을 피하며 어색하게 말을 뱉었다.
“하, 할 말이라도 있냐?”
“……그자의 집을 찾아간 뒤로 기복 님의 표정이 좋지 않아 보입니다.”
시선을 피하던 나는 염려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오자 멈칫했다. 흘끗 시선을 들었다.
“뭐가 그리 걱정되십니까.”
일렁거리는 루스의 눈동자를 마주했다. 그러다 종일 그가 나를 신경 쓰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아무래도 남자의 집에 함께 갔던 루스는 내가 심란해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나 보다.
……기세 좋게 네스키를 잡으러 갈 거라고 말해 놓고, 긴장한 게 들켜 민망했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 그냥, 네스키 잡으러 가는 게 실감 나서.”
별거 아니라는 내 말에도 루스의 눈은 여전히 걱정을 담고 있었다. 오늘따라 창백해 보이는 루스의 얼굴이 상당히 보호 본능을 자극하고 있었다. 그래서 걱정하지 말라는 듯이 뒷말을 이었다.
“원래 큰 전투 앞에선 긴장하는 법이잖아. 이제 괜찮아. 내가 전설의 무기기도 하고…….”
“기복 님.”
나직한 루스의 목소리에 나는 말을 멈췄다. 고요한 밤바람이 서늘하게 불어왔다. 내려앉은 공기가 피부에 닿았다. 시선을 들자 그가 지그시 보고 있었다. 나에게서 움찔하는 듯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어?”
차분한 얼굴로 침묵하던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틈으로 달빛과 닮은 고요한 속삭임이 흘러나왔다.
“제게 기복 님은 특별합니다.”
눈앞에 보랏빛 눈동자가 아주 가까이서 보였다. 깊은 눈을 마주하고 있으니 주변의 모든 게 점차 아득해지고 앞에 있는 루스만이 또렷이 보였다.
“지켜드리겠습니다.”
커다란 폭포 소리가 묻힐 만큼 그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나는 불어오는 바람과 함께 숨을 멈췄다.
“…….”
굳어 있는 내 앞으로 그가 손을 뻗어왔다. 차가운 손이 후끈해진 볼에 닿았다. 그가 부드러운 손길로 볼을 쓰다듬었다. 하얀 손이 시야에 아른거렸다.
“그러니, 걱정하지 마세요.”
다정함이 깃든 목소리가 한 번 더 귓가에 녹아들었다. 그의 길고 차가운 손가락이 벌어진 내 입술 주변을 천천히 덧그렸다. 은근한 손길에 침이 꿀꺽 삼켜졌다. 심장이 시끄럽게 쿵쾅댔다.
왠지 고백을 들은 기분이다. 심장 안쪽이 뜨거워졌다. 그의 길쭉한 손가락이 턱을 타고 내려와 목가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피부로 느껴지는 그의 체온에 몸이 뻣뻣해졌다.
“흣.”
그 순간 커다란 손이 허리를 끌어안았다. 넋 놓고 있던 나는 그의 품으로 몸이 밀착됐다. 눈을 크게 뜬 채 그를 올려다보자, 청순한 루스의 얼굴이 코앞에서 보였다.
얼굴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의 숨결이 볼에 닿는 거리다. 계속해서 허리께를 지분거리는 커다란 손이 느껴졌다. 척추 쪽이 간질간질해 입에서 이상한 소리가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루, 루스. 소, 손 좀.”
요상한 공기 흐름이 몸을 에워쌌다. 동시에 그의 손길에 일일이 반응하는 몸이 당황스러워 그를 밀어내려 했다. 그러나 어두운 달빛을 받아서일까, 불면 날아갈 것 같은 루스의 가련한 얼굴을 보니 차마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읏……! 자, 잠깐.”
허리에서 지분거리던 손이 아래로 내려가더니 둔부에 닿았다.
나는 흠칫하며 루스의 팔을 붙들었다. 그러자 루스가 움직임을 멈췄다. 딱딱하게 굳은 그의 어깨를 보며 시선을 들었다.
그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내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더니 내게 조심스러운 투로 물어왔다.
“싫으십니까……?”
……반칙, 반칙이다…….
‘그렇게 애달픈 얼굴로 물으면 어떻게 싫다고 하냐고…….’
나는 분명, 루스가 건장한 사내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 넓은 어깨와 한 뼘 높은 위치에 있는 그의 키가 떡하니 보이는데, 심지어…… 아무튼 온몸으로 그를 체감했으니 잊을 리 없다. 아니…… 이제 남자고 뭐고 그딴 건 부질없다. 지금 문제는…… 이 농밀한 흐름이다!
상당한 정확도를 가진 나의 감으로 예상하건대……. 지금 놈을 밀어내지 않으면, 이 뒤에 매우 곤란한 상황에 직면할 것 같다는 거다……!
그럼 밀어내면 될 일이지만…… 거절당한 그가 혹여 상처받은 눈빛을 한다면! 나는 온종일 가슴 한구석이 께름칙할 것 같단 예감도 동시에 들고 있다는 점이다…….
‘더군다나 저 얼굴을 어떻게 거절하냐고…… 빌어먹을-’
마구잡이로 충돌하고 있는 마음에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는 나의 대답을 기다리는 듯 쳐다보고 있었다. 달빛을 받은 그의 단정한 얼굴은 눈부시리만큼 예뻤다. 순간 뭔가에 홀린 기분이 들었다.
“아니. 싫은 건 아니고…….”
나는 불쑥 말을 뱉다 아차 하는 마음에 뒷말을 웅얼거렸다. 내 대답과 동시에 루스의 길쭉한 눈이 휘어졌다. 기쁘다는 듯이 웃어 보이는 루스의 얼굴을 보자, 자정도 안 넘은 시간이건만 벌써 해가 뜬 줄 알았다.
“다행입니다.”
그가 안도한 듯 나긋하게 말을 뱉었다. 초승달 같은 그의 눈웃음을 멍하니 쳐다봤다. 그러자 조금씩 그의 얼굴이 클로즈업되기 시작했다.
그러다 나는 눈을 깜박였다. 내가 그의 얼굴에 홀려서가 아닌, 실제로 루스가 내게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 다가오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코앞까지 다가온 그의 얼굴에 눈이 크게 벌어졌다.
“……!”
뭐지, 어버버거리던 차에 그의 보드라운 입술이 내 입술에 살며시 닿았다. 곧이어 아랫입술이 빨리는 느낌에 나는 주춤했다. 그러자 루스의 큼지막한 손이 뒤통수와 허리를 단단히 잡아 왔다.
그에게 한껏 밀착이 되자 몸이 뻣뻣해졌다. 내 다리에 불룩한 무언가가 닿았기 때문이다. 손가락이 절로 움찔거렸다. 그의 다리가 살짝 움직이더니 내 하체에 큼지막한 것을 비벼댔다.
나는 흠칫하며 뒤로 몸을 뺐다. 아니, 빼려 했다. 그러나 뒤통수와 허리를 잡은 손에 힘이 가해져 옴짝달싹 못 했다.
“…….”
나는 눈을 부릅뜬 채 루스의 눈을 쳐다봤다. 가까이서 보는 루스의 눈은 풀려 있었고 눈가 주변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야릇함을 가득 담고 있는 청순한 얼굴에 숨이 들이켜졌다.
“웁-.”
그 순간 입술을 빨아올리던 루스가 벌어진 입술 틈으로 혀를 불쑥 넣어왔다. 입 안으로 들어오는 물컹거리는 것에 몸이 굳었다.
앞에 보이는 루스의 눈동자가 살짝 아래로 내려갔다. 그의 눈꺼풀이 내려가자 길쭉한 속눈썹이 그늘을 만들어 냈다. 청초한 그의 얼굴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으……흐-.”
뭉근하게 다리 사이를 비벼대는 아래의 감각에 허리가 움찔거렸다.
루스가 고개를 조금 더 기울였고 그의 입술과 더 깊이 맞물렸다. 입 안을 휘저어 대는 농밀한 혀로 인해 몸이 달아올랐다. 그의 물컹한 혀가 내 혀를 옭아매기 시작했다.
혀가 질척하게 움직일수록 침이 섞이는 소리가 귓가에 노골적으로 들려왔다. 깊어지는 키스와 함께 머릿속이 점점 마비되는 듯했다.
추르릅, 루스가 내 혀를 쪽쪽 빨았다. 입 안으로 더 깊이 들어와 뿌리를 뽑을 듯 빨아댔다. 입을 온통 삼켜 먹을 듯한 기세에 숨이 막혀왔다. 그가 부족하단 듯이 몸을 잡고 놔주질 않았다. 계속해서 입 안을 끈적하게 탐해 오는 맹렬함에 눈앞이 핑핑 돌 지경이었다.
“흐…… 우웁-!”
달아오르던 몸도 잊을 만큼, 질식의 위협을 느꼈다. 나는 놈을 밀어내려 정신없이 버둥댔다.
‘이놈이 나를 죽이려 하는구나.’ 생각하며 정신이 혼미해질 즈음에서야 맞물린 입술이 떼어졌다.
“-하아, 하아…… 악…… 흐…….”
루스의 품에서 벗어난 나는 곧장 가쁜 숨을 토했다.
잠시 동안 거칠게 호흡을 뱉자 공기가 몸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자 서서히 마비됐던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하으…… 빌어먹을-.”
살았다는 생각이 듦과 동시에 울컥하는 마음이 올라왔다. 상체를 살짝 숙이며 숨을 토해 내던 나는 곧장 루스를 향해 고개를 쳐들었다.
“질식시켜 죽일 작정이냐……!”
누가 시발, 이따위로 키스를 하냐고! 눈을 치켜뜨며 쳐다보자, 앞에 있는 루스가 숨을 내뱉더니, 조금 난처한 눈빛을 보였다. 이어서 전혀 그럴 의도가 없었다는 듯이 결백한 투로 말을 뱉었다.
“타액으로 느껴지는 기복 님의 마력에…… 주체할 수가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방금까지 미친 듯이 입술을 빨아들인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단정한 얼굴로 사과를 해 왔다.
“뭔…….”
뭔 개소린가 싶던 차에, 다비 녀석이 주야장천 액을 뽑아대 씨가 말라버릴 뻔한 기억이 머리를 스쳤다.
‘……이 몸뚱이는 액이란 액은 모두 마력이냐고.’
나는 허여멀건 내 몸을 허탈하게 쳐다봤다.
……물론 내 몸 전체가 강한 마력으로 이뤄졌다는 점에 대해서는 아주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멋들어진 직업에 계속해서 회의감이 드는 이유는-
“그럼, 계속할까요.”
선택된 자들이 하나같이 미친놈들이기 때문이다. 이놈들은 전설의 무기의 액, 아니 마력에 아주 환장하는 놈들이었다. 과연 전설의 무기가 선택받은 자들의 반응을 두려워하는 게 정상인 건가 싶다.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는데, 루스가 다시 내 앞에 섰다.
“아, 아니. 잠깐.”
두 손을 내밀어 진정하라는 듯이 그의 앞을 막았다. 그러자 루스가 걸음을 멈추더니 나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방금까지만 해도 처연하고 가냘파 보이던 루스는 번들거리는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이놈 역시 비범한 놈이라는 사실이 상기됐다.
‘그렇지…… 저놈은 성당에 몬스터를 가둬놓고 실험을 하던 놈이었지…….’
분명 전직관이 준 빨간 책에는, 레스탈로스의 무기는 고귀한 대우를 받는다고 적혀 있었다.
이렇게 선택된 자들에게 멈춰 보라고 뒷걸음질 치는 게 아니라- 부하들에게 떠받들어져 손가락을 휙휙 휘두르며 명령을 내리는 멋들어진 역할이라고 했단 말이다…….
“머, 멈춰 봐.”
근데 나는 이게 뭐냐……. 레스탈로스의 대우는커녕, 미친놈들이 선택되는 바람에 마력이 쥐어짜이는 수난을 겪어야 했다.
……이 와중에 더 최악은 놈들의 외모가 아주 훌륭하다는 점이다. 겪어 본 바로 외관이 주는 힘은 생각보다 대단하다. 그래서 넋 놓고 있다 보면 눈앞에 큰 파도가 닥치고 있었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야외긴 하지만 보는 이가 없으니 괜찮습니다.”
“뭐, 뭐가-!”
뭐, 뭐가 괜찮다는 건데……! 네놈이 날 질식시키려 했을 때부터 하나도 안 괜찮아졌다고! 라고 말을 뱉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눈을 크게 뜬 채 숨을 들이켜야 했다. 생명을 위협받아 흥분이 짜게 식은 나와 달리, 놈의 앞섶이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 하나도 안 괜, 흣-.”
루스가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왔고 나는 화들짝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 그러자 등에 딱딱하고 차가운 바위가 느껴졌다. 루스가 길쭉한 다리를 뻗어 거리를 좁혔고 더는 뒤로 갈 수가 없는 상태가 됐다.
나는 고장 난 것처럼 삐걱삐걱 고개를 올렸다. 불과 몇 분 전만 해도 보호 본능을 자극했던 루스의 얼굴이 이제는 달빛 아래 섬뜩한 늑대로 보였다. 그것도 아주 굶주린 늑대로 말이다.
“읏.”
앞에 있는 그가 손을 뻗어 내 팔을 잡아당겼다. 살짝 당긴 것 같은데 몸이 휘청거리며 루스의 판판한 가슴팍으로 기울여졌다. 라벤더와 닮은 향기가 확 풍겨왔다.
어벙하게 있던 나는 바지 안으로 파고들어 오는 차가운 손에 정신이 들었다. 몸을 팔딱거리며 루스의 팔을 다급하게 잡았다.
“그만! 뭐, 뭐 하는 거야!”
루스의 굶주린 눈빛을 마주한 나는 식은땀이 흘렀다. 여긴 마을과 멀지 않은 곳이다. 이렇게 사방이 다 트인 곳에서 바지에 손을 넣고 있는 남세스러운 꼴을 누가 보기라도 하면 어쩌냐고……!
“아까. 좋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언제 좋다고 했냐……!”
싫지 않다고 했지, 좋다고 말한 적은 없다고! 내 항의 섞인 눈빛에 루스 놈은 고개를 갸웃했다. 마치 허락해 놓고 갑자기 왜 그러냐는 듯 의아한 기색이었다.
“키스해 달라고 입을 벌리며 조르셨잖습니까.”
“대, 대체 내가 언제!”
이상하다는 투로 말하는 루스의 외설스러운 말에 귓가에 열이 올랐다. 나는 결단코 놈을 조른 적이 없었다! 저놈이 내 표정을 멋대로 해석했을 뿐이다……!
“아닙니까?”
“당연히 아니지!”
“야한 얼굴로 보길래 원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루스가 어떤 녀석인지 망각할 정도로 가녀린 얼굴에 넋 놓긴 했다. 하지만 어떻게 그게 그 짓을 원하는 걸로 해석이 되는 거냐……!
나는 루스의 말에 단호하게 부정하지 못하고 고개를 내려야 했다. 그러자 여전히 내 바지 안에 들어가 있는 하얀 손이 보였다.
나는 그 손을 흰 눈으로 쳐다봤다. 이어서 루스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엉덩이에 닿아 있는 놈의 손을 바지 안에서 빼내려 할 때다. 루스의 손이 알아서 옷 밖으로 빠져나갔다. 동시에 몸이 갑작스레 뒤로 밀렸고, 방심하고 있던 나는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팔을 허우적허우적 움직이며 가까스로 손을 뻗어 땅을 짚었다.
“으앗!”
엉덩이가 딱딱한 돌바닥에 부딪혔다. 지잉- 하고 뼈가 울리는 고통에 외마디 비명이 터져 나왔다. 어릿함에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얼얼함을 느낄 즈음, 거절하자 냅다 내동댕이쳐 버리는 놈을 향해 고개를 훽 쳐들었다.
“썅, 내팽개칠 것까진 없-!”
뭣 같은 놈의 행동에 욕이라도 할 기세로 목소릴 높였지만……. 앞에 서 있어야 할 루스의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나는 말을 멈춘 채 눈을 깜빡였다. 앞에는 바위와 밤 폭포가 보이고 있었다. 서늘한 밤공기가 피부에 닿아왔다. 루스를 제외하고 모든 것이 여전한 장면이었다.
“어-.”
연기처럼 사라진 루스의 모습에 얼빠진 소리가 입에서 흘러나왔다. 신기루라도 본 것 같은 기분에 멍하니 있던 중, 폭포 소리 틈으로 끈적한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그리고 어디선가 사람의 숨소리도 틈에 섞여 작게 들려왔다.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나는 소리가 들리는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
고개를 돌리던 나는 굳은 눈으로 한 곳을 쳐다봤다. 열 걸음 정도 되는 거리, 그늘에 가려진 나무 틈을 말이다. 그 사이로 하얀 머리카락이 얼핏 보였기 때문이다.
‘……언제 저쪽으로 간 거지? 앞에 있었는데? 왜 저기 있지?’
머리가 물음표로 가득 차던 중 하얀 머리카락 옆으로 [Lv. 72]라는 표식이 눈에 들어왔다. 가만히 레벨을 쳐다보던 나는 그게 몬스터의 표식임을 깨달았다. 얼빠진 채 주변에 나무들을 보다 보니 서서히 경악스러운 기분이 올라왔다.
‘저만큼 높은 레벨의 몬스터가 왜 마을 안에 있는 건데……?’
의문 하나가 크게 떠오르던 차에 숨을 참는 듯한 소리가 어두운 나무 틈 사이로 들려왔다. 소리와 함께 하얀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루, 루스!”
넋 놓고 있던 나는 허겁지겁 몸을 일으켰다. 척추를 타고 찡한 고통이 올라왔다. 신음을 참고서 루스가 있는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루스의 숨소리가 심상치 않아 얼른 걸음을 떼려 했다.
“-오지 마십시오.”
그러자 루스 쪽에서 단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두어 걸음 가다 말고 루스의 목소리에 문득 발을 멈췄다. 가야 한다는 생각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도 그럴 게, 내게 한 가지 사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저 몬스터 앞에 있는 자는 무려 루스다. 맨손으로 더한 놈도 때려잡는 녀석이니 걱정할 게 뭐 있나 싶다. 마을에 왜 나타났는진 모르겠지만 저 정체 모를 몬스터는 곧 루스에게 가루가 될 것이다. 그러니 루스의 안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될 듯하다.
“피하세요-.”
라고 마음을 놓던 그때, 루스의 목소리가 벼락처럼 들려왔다. 동시에 내 앞으로 길쭉한 무언가가 쭈욱 뻗어 나왔다.
나는 본능적으로 옆으로 몸을 날렸다. 간발의 차로 피한 나는 쿵- 바닥을 찍고 다시 어두운 숲으로 뱀처럼 스르륵 들어가는 형체를 쳐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