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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하늘을 나는 배 (6/11)

6. 하늘을 나는 배

‘그래, 이거지. 전설의 무기 대우는 이래야지.’

고개를 주억거리며 든든한 놈 하나가 들어왔다고 생각하며 기분을 전환할 때다.

‘……하는 수 없네.’라는 소리와 함께 몸이 뒤로 휙 젖혀졌다.

딱딱한 몸이 등에 닿았다. 고개를 들자 힘이 들어간 턱과 굳은 입술이 보였다. 이내 그의 입에서 으름장 놓는 투가 흘러나왔다.

“기복이는 내 연인이야. 파티가 맺어 있는 동안, 머리에 확실히 새겨둬.”

“…….”

앞에 있는 남자가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연인이 있었나.”

“연인이겠냐!”

한 치의 의심 없는 투에 울컥하고 소리쳤다. 이어서 나를 붙들고 있는 다비의 손을 휙 쳐냈다. 놈에게서 몸을 떼어내고 돌아보자 다비가 너무하다는 식의 얼굴로 말을 뱉었다.

“아직 우리 사이를 부끄러워하는 거야?”

“부끄럽고 자시고가 아니잖아……!”

가련한 척하는 다비 놈의 얼굴을 부릅뜬 눈으로 쳐다봤다.

‘애초에 사귀는 사이가 아닌데 뭔 소리냐고!’

그쯤, 옆얼굴에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자 루스가 나를 복잡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내 루스가 시선을 돌리더니 옆에 있는 다비 녀석을 차갑게 흘기며 말했다.

“지금 그렇게 한가한 소리를 할 때가 아닐 텐데요. 그쪽의 무능함 때문에, 기복 님이 위험했잖습니까.”

루스의 말에 나를 향해 있던 다비의 얼굴빛이 단번에 차게 식었다.

그가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이며 루스를 쳐다봤다.

“불가항력이라니까.”

다비의 말에 루스의 목에 핏줄이 툭 불거졌다. 단정한 입술 사이로 기가 찬 듯한 숨이 터져 나오더니, 감정을 억누르는 얼굴로 말했다.

“하, 그 레벨을 갖고 기복 님을 놓치고 기절하는 꼴을 보이는 게 말이 됩니까.”

“기복이가 귀엽게 안겨 오는데 다른 걸 신경 쓸 수가 있나.”

“장난합니까? 분명 누군가가 다가오는 걸 감지했을 텐데요.”

“한창 좋을 때 멈출 순 없잖아. 거추장스러운 것들은 나중에 처리해도 늦지 않아. 단지 저놈 마력에 대비를 못 했을 뿐이지.”

“힘을 믿고 방심을 했단 소리군요. 그쪽은 긴장을 좀 하셔야겠습니다. 한 번 더 안일하게 굴면 제가 멱을 따도록 하죠.”

“날파리 따위로는 긴장이 안 된다니까.”

다비 놈이 잔뜩 비웃음을 지었다. 그러자 루스의 얼굴이 아까와 비교도 안 되게 가라앉았다. 날카롭게 뻗은 눈에는 시린 기운이 서려 있었다.

‘……또 시작이냐, 이놈들은.’

두 사람이 으르렁대는 모습에 골치가 아파져 오던 차다.

“-동료는 싸우면 안 된다.”

남자의 무뚝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두 사람이 일제히 내 뒤에 있는 남자를 쳐다봤다.

나는 눈을 껌뻑이다 한 박자 늦게 뒤에 있는 놈을 쳐다봤다. 남자는 쏟아지는 시선에도 덤덤한 얼굴을 했다.

“……기복 님과 파티를 맺었을 뿐입니다. 마력 분배도 못 하는 형편없는 자와 동료로 묶이니 불쾌하군요.”

루스가 남자의 말에 못마땅한 투로 말했다.

“연인을 지키는 데 마력을 아낄 순 없잖아. 뼈째 가루로 만들어도 부족할 판에.”

다비가 쌀쌀맞게 맞받아쳤다.

두 사람이 있는 편으로 냉기가 다시 흐를 즈음, 남자의 입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만.”

한결같이 목석같은 목소리가 넓은 방에 울려왔다.

“보스가 싫어한다.”

무표정한 남자의 말을 끝으로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

가장 살벌해 보이는 녀석이 두 사람을 제지하고 있었다. 보스 자리에서 통솔한 짬밥 덕인가. 쓸데없는 싸움에 끼어들지도 않고…… 나를 보스로 대우하는 위계질서가 있는 놈인 듯하다.

로봇처럼 감정도 내비치지 않는 놈이 의외로 가장 정상적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으르렁대던 두 사람이 멈칫한 채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굳어 있는 두 녀석의 얼굴을 한 번씩 봐주다 입을 열었다.

“그래……. 그만해.”

기세가 꺾인 채 나를 살피고 있는 놈들을 보자 어쩐지 맥이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

“……알겠습니다.”

얌전해진 놈들에게서 시선을 돌리자, 그들의 뒤로 피가 튀고 부서진 복도가 눈에 들어왔다. 허물어진 벽에서는 돌가루가 떨어지고 있었다.

다시 앞에 있는 두 놈을 쳐다봤다. 아까와 달리 루스의 안색이 차차 돌아오고 있었다. 그럼에도 하얗게 질려 핏기가 없어 보이긴 마찬가지였다. 단정하던 감색 제복은 구겨져 있었다.

다비 또한 평소와 달리 핏빛 머리칼이 헝클어져 눈가로 내려와 있었다. 옷차림은 모랫바닥을 뒹군 개처럼 모래투성이였다.

흐트러진 두 사람의 모습과 초토화된 광경을 잠시 보고 있으니 그렇게나 여유로워 보이던 놈들이 무지막지하게 나를 찾았구나 싶다.

그 사실을 인지하자 속에서 의외의 감정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내게 맹목적인 놈들에 대한 심란함과…… 뭉클한 감정 말이다.

‘……미친놈들이랑 함께 있으니까 나까지 머리가 회까닥한 걸까.’

통제 안 되는 놈들에게 익숙해지고 있다는 위험 신호를 느꼈다.

하지만…… 뭐 어떡하나 싶다. 이미 이 지경이 된 상태에서 무를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하아아…… 나도 이젠 모르겠다.’

* * *

끝없이 펼쳐진 계단을 오르다 보니 눈앞이 노래지고 있었다. 이제는 걸음마다 체력이 쭉쭉 떨어지는 게 느껴졌다. 그 때문에 회복 물약을 틈틈이 마시면서 사악한 계단을 올라가야 했다.

죽겠다 싶을 즈음, 양옆으로 커다란 원기둥이 박힌 곳에 도착했다.

“흐억-.”

나는 마지막 계단 위로 올라서자마자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가쁘게 쉬었다. 도저히 꼿꼿하게 서 있을 수가 없어 허리를 숙이며 무릎에 손을 짚었다.

그 상태로 터질 것 같은 폐를 진정시키기 시작했다.

흐헉흐헉, 가쁘게 호흡을 하고 있는데 앞에 그림자가 졌다.

무시하고 계속해서 호흡을 뱉어냈다.

“체력을 회복해 드리겠습니다.”

“괜찮은가. 얼굴이 시체 같다.”

먼저 훌쩍 올라가 있던 루스와 자이드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렸다.

나는 여전히 가쁜 숨을 몰아쉬며 손에 있는 물약을 흔들어 보였다.

“괜찮, 괜찮아. 물약 있으니까.”

그때, 바람이 휘잉 하고 불었다. 한낱 바람에도 다리가 중심을 못 잡고 휘청거렸다.

몸이 기울어질 때, 옆에서 허리를 덥석 잡아 오는 손길이 느껴졌다.

몸에 닿는 단단한 팔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동시에 손을 피하듯 후들거리는 다리로 물러섰다.

내 행동에 옆에 있던 다비가 천연덕스러운 투로 말했다.

“안아서 가 준다니까. 기복인 참 고집스러워.”

나는 곧장 뭐라 말하려다 호흡이 급급해 다시 숨을 몰아쉬었다.

조금 진정이 된 뒤, 다비 놈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폐가 터질 것 같은 나와 달리…… 힘든 기색 하나 없는 얼굴이다. 심지어 여유롭게 눈웃음을 치며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뭐라 타박하려던 나는 숨 때문에 결국 짧게 말을 뱉어야 했다.

“후우…… 됐다고.”

저놈은 물약도 마시지 않고 올라왔는데, 체력에 전혀 타격이 없어 보인다. 먼저 올라간 루스와 자이드 역시 마찬가지다.

모르진 않았지만…… 이렇게 비교가 되는 순간마다 놈들의 말도 안 되는 능력치에 경악감이 올라왔다.

‘괴물이냐고…….’

분명 내 반응이 아주 일반적인 반응이다. 정확히는 레벨 100을 달성한 사람으로서 우수한 축에 속하는 체력이다. 하지만 올라온 것만으로도 대단하다 할 수 있는 이 계단을 가뿐하게 올라오는 놈들과 있으니, 최약체가 따로 없어 보인다.

저놈들 틈에서, 그것도 계단 때문에 힐까지 받고 올라가는 건 왠지 쪽팔렸다. 그 때문에 나는 놈들 뒤를 따라 쉬지 않고 꾸역꾸역 올라왔다. 원래라면 몇 번이나 쉬었어야 했지만, 포션을 마신 덕에 큰 격차 없이 올라올 수 있었다.

더해서 옆에서 계속 ‘안아서 가 줄까?’라며 치덕거리는 놈 때문에 오기가 생겨 이 악물고 올라왔다.

“하아…….”

나는 손에 있는 물약 뚜껑을 땄다. 입 안으로 물약을 들이부었다. 꿀꺽꿀꺽, 반쯤 남은 물약을 단번에 비워냈다. 투명 통 안에 든 물약이 바닥을 보임과 함께 입술에서 떼어냈다. 그러자 통이 가루처럼 소멸했다.

다 죽어가던 비실비실한 몸에 체력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이제야 살 것 같네.’

한숨 돌리며, 시선을 들자 커다란 세 놈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놈들 앞에서 허겁지겁 물약을 마신 게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변명하듯 퉁명스러운 투로 말을 뱉었다.

“……물약 하나 마시지 않는 네놈들이 말도 안 되는 거라고…….”

“부끄러워하실 필요 없습니다. 하늘 계단을 올라오는 사람들의 보통 반응이니까요.”

“체력이 낮아도 그대는 내 보스다.”

“귀엽긴.”

세 놈은 평온한 얼굴로 제각각의 말을 쏟아냈다.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보통이 아니라 우수한 축이다. 체력이 낮은 편도 절대 아니다. 그리고 ……망할.

‘……됐다, 됐어. 물음표들이 내 심정을 어떻게 알겠냐…….’

나는 앞에 있는 세 놈과 입씨름하는 것을 관두기로 했다. 저놈들에게 내 능력치가 우수하다고 백날 말해 봤자 소용없는 짓이다.

시야를 환기하듯 고개를 돌리자, 피부에 닿을 정도로 가깝게 지나가는 구름이 보인다. 하늘 계단의 명성답게 구름을 뚫고 높이 올라온 상태다. 그래서 기온도 꽤 낮은 편이다. 하지만 나도 레벨이 낮지 않아 극악무도한 경우가 아닌 이상, 이 정도의 기온에는 끄떡없다.

‘……이제, 방어구가 좋기도 하고.’

놈들 너머로 눈동자를 돌렸다. 내가 서 있는 원기둥이 하늘 계단의 끝을 알리는 문과도 같았다. 문 너머로 회색 돌바닥이 라운드처럼 넓게 깔려 있었다. 바닥 중앙에는 동그란 원이 흰색으로 그려져 있었다. 바깥쪽으로는 원기둥이 사방으로 둘려 있었다.

그 넓은 곳에는 입구에 있는 우리를 제외하고는 사람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럴 만하다. 이런 극악무도한 계단이 있는 곳은, 더럽게 비싸다고 소문 난 하늘 배의 선착장이니까.

“배는…… 아직인가.”

고개를 올려 주변 하늘을 살펴보았다. 뭉게뭉게 가득 껴 있는 구름 때문에 배가 오고 있는지 당최 보이질 않았다.

“아직입니다. 해가 질 때 하루에 한 번 오는 배니까요.”

앞에 있는 루스에게서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선착장에 향해 있던 시선을 거두고 루스를 쳐다봤다. 탁 트인 눈매가 살짝 찡그려진 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구름에 가려졌지만 태양 쪽 방향을 보는 듯하다. 이내 내 시선을 느끼고 보라색 눈동자가 내려갔다.

“-적어도 이곳에서 한 시간은 기다려야겠군요.”

궁금해하는 내게 루스가 담담한 얼굴을 하고서 말을 뱉었다.

고개를 끄덕이려는 순간이다. 바람이 불어왔다. 하얀색 긴 머리카락이 루스의 정갈한 얼굴을 타고 비단처럼 날렸다. 동시에 그의 뒤편으로 구름이 흘러갔다.

몽환적인 배경 때문일까, 신비로운 눈동자와 아련한 분위기에 멈칫하고 그를 쳐다봤다. 그러자 그의 고개가 옆으로 기울어졌다. 그가 눈을 깜빡거리니 길쭉한 속눈썹이 그늘을 만들어 냈다.

“드, 들어가서 기다리자.”

나는 보라색 눈동자가 눈꺼풀 아래로 감춰질 즈음에야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알겠습니다.”

루스에게서 차분한 대답이 들려왔다.

내 목소리를 들었는지 주변을 훑어보고 있던 자이드의 시선이 내게 닿아왔다. 눈이 마주친 자이드가 대답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선착장 안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나도 발걸음을 뗐다. 괜히 귓가가 후끈거려 귓불에 손을 올리려던 차다.

옆에서 뚫어 버릴 듯한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올리던 손을 멈칫하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러자 다비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

그의 시선에 눈동자를 한 바퀴 돌리다 다시 그를 쳐다봤다. 그가 여전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주춤거리며 물었다.

“……왜?”

“연인을 옆에 두고-.”

“뭐, 뭐가.”

“그런 얼굴로 다른 놈을 보는 건 너무하잖아.”

툴툴거리는 놈의 말투와 반대로 눈동자가 서늘한 빛을 띠고 있었다.

“무, 무슨…….”

방금 루스의 예쁜 외모에 넋 놓았다는 사실을 스스로도 알고 있었던지라, 속을 들킨 것 같은 민망함에 입을 어물거렸다.

그런 나를 다비가 지그시 바라봤다. 그러더니 그가 한층 낮아진 목소리로 말을 뱉었다.

“자꾸 질투 나게 하지 마.”

다비 녀석의 창백한 손이 내 얼굴 쪽으로 뻗어졌다. 눈앞으로 다가오는 커다란 손에 멈칫했다. 이내 얼굴에 닿는 감각에 시선을 내리자, 볼에 머물고 있는 길쭉한 손가락이 보였다.

어벙하게 있던 나는 볼을 톡톡 두드리는 손가락에 정신을 차렸다.

‘……이 자식이 보스한테-.’

그의 손을 옆으로 휙 치우자 얼굴에 닿았던 손이 순순히 떨어졌다.

고개를 드니, 평소와 같이 입꼬리가 올라간 그의 얼굴이 보였다. 하지만 붉은 눈동자엔 여전히 탁한 빛이 돌고 있었다. 가라앉은 그의 분위기에 눈을 끔뻑였다.

“-들어갈까.”

마주하고 있던 그가 선착장 안으로 몸을 돌리려 할 때, 입에서 불쑥 말이 튀어나왔다.

“루스가 워낙 여자처럼 예쁘잖아. ……감탄한 것뿐이야.”

내 말에 놈이 다시 몸을 틀었다.

위에서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시선에 나는 멋쩍게 덧붙여 말했다.

“……그냥. 그렇다고.”

내 말을 끝으로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안으로 발걸음을 옮기려던 차에 그가 의아하다는 투로 물어왔다.

“기복이는…… 여자가 좋아?”

앞에 있는 놈이 장난기 하나 없는 얼굴로 진지하게 물어왔다.

그 얼굴을 마주하자 나는 잠깐 뇌가 정지된 기분을 느꼈다.

“…….”

그가 대답을 기다리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그 시선에 나는 목이 메어 간신히 쥐어 짜내듯 대답했다.

“……난 원래 여자를 좋아한다고.”

내 대답에 다비가 사뭇 놀란 듯이 눈을 깜빡였다.

그 상태로 그는 아무 말이 없었다. 정적 속 붉은 눈동자를 마주하자 가슴 한구석이 쿡쿡 찌르는 듯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누군가를 좋아해 본 적은 없지만 여자에게 설렘을 느낀 적은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남자에게 가슴 떨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러니 여자를 좋아하는 게 맞을 것이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는 그랬다.

‘왜 나는 이 녀석들한테 얼굴을 붉히냔 말이야…….’

전직과 함께 어떤 것이 변형되기라도 한 걸까. 아니면…… 비현실적인 저 녀석들의 얼굴 때문인가.

여러모로 심란해지는 기분에 놈의 시선을 피하고 싶어지던 때다. 앞에서 진지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의왼데.”

다비가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이며 오묘한 눈을 했다. 동시에 그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고 다시 눈동자를 들어 올렸을 때는 ‘그런 몸으로 여자를 좋아한다고? 그럴 리가.’라며 우스갯소리라도 들은 얼굴을 했다.

“안긴 채로 잔뜩 흐느꼈으면서?”

그의 말과 함께 놈의 아래에서 헐떡대던 장면이 머릿속에서 재생되기 시작했다.

……망할.

“…….”

나는 그에게서 황급히 시선을 돌리며 선착장 안으로 성큼 들어섰다. 자꾸만 리플레이 되는 난잡한 장면들에 아까와 비교도 할 수 없이 몸에 열이 올랐다.

‘빌어먹을…… 분명 몸이 변한 거라고…….’

뒤통수에서 다비 놈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무시하고 걸어갔다. 그러자 주변을 살피고 있던 루스가 내가 다가오는 것을 알아채고 돌아보았다.

“-이곳이 대기 공간인 듯하니, 기다리시면 됩니다.”

앞에서 루스의 차분한 목소리가 불쑥 들리자 나는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 응.”

내 목소리에 자이드가 고개를 돌렸다.

호박색 눈이 내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눈이 점점 내려가더니 몸을 훑는 시선이 느껴졌다. 그러자 조금 전의 다비 놈이 훑던 시선이 떠올라 뒤로 한 걸음 주춤했다.

자이드의 눈이 다시 올라와 내 눈을 마주했다. 굳게 다물려 있던 그의 입술이 열리더니 고저 없는 톤이 뱉어졌다.

“장비는 마음에 드는가.”

“어, 어?”

놈의 목소리에 흠칫하던 나는 뒤늦게 물음을 파악했다.

“아.”

나는 내 몸뚱어리에 걸쳐진 장비를 내려다봤다. 갈색 초보자 장비가 아닌, 하얀색 옷이 눈에 들어왔다. 허리춤에는 내구도 좋은 단도가 칼집에 끼워져 있었다.

허름한 장비가 아닌, 때깔 고운 장비를 눈에 담고 있으니 기분이 점점 환기되는 듯했다.

나는 다시 고개를 들어 자이드를 향해 말했다.

“엄청.”

만족스러운 얼굴로 대답하자 자이드가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자이드가 몸을 틀어 대기 공간에 있는 가까운 기둥으로 걸어갔다.

나는 듬직한 놈의 뒷모습을 흡족한 마음으로 쳐다봤다.

‘보면 볼수록…… 파티원으로 잘 들인 것 같단 말이지.’

자이드라는 녀석은 나를 보스라 부르는 것부터 시작해서…… 아주 능력 있는 놈이라, 전설의 무기 파티원으로 손색없는 녀석이었다. 그도 그럴 게-

‘저 녀석 덕분에 장비 세팅도 마쳤으니, 말 다 했지.’

몇 시간 전, 쑥대밭이 되어 버린 자이드의 근거지에서 있었던 일이다.

살벌하던 놈들이 잠잠해지고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좌절했다.

왜냐, 다비와 루스가 파티 범위 안에 있는 일대를 모조리 초토화해 버려 주변이 황폐해졌기 때문이다.

……이게 왜 문제냐면, 전갈 몹들이 모조리 씨가 말라 버렸다는 것이 문제다.

놈들이 처리하고 온 전갈 껍데기들은 돈 냄새를 맡은 사람들이 모조리 수거해 버렸다. 그래서 나는 골드를 얻을 수단이 사라졌으며, 빌어먹을 초보자 장비를 또! 바꾸지 못하게 됐다.

나는 내가 걸치고 있는 장비들을 쥐어뜯으며 절망했다. 곧 장비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있었던지라 더 바닥에 처박히는 기분이었다.

내가 우울해하자 루스가 제 옷과 바꿔 입자는 말을 했다. 순간 솔깃했지만 관뒀다. 루스의 옷을 뺏어 입고 싶지도 않을뿐더러 애초에 저건 마법사 옷이었다. 직업이 동일하지 않으면 제 기능을 하지 못해 입으나 마나다. 무엇보다 저 멋들어진 제복은 루스와 아주 잘 어울렸다.

그러다 옆에 있는 다비 놈과 자연스레 눈이 마주쳤고, 나는 시선을 피했다……. 내 옷과 다를 바 없는 방어구며, 저 커다란 몸에 맞춰진 옷은 전혀 탐이 나지 않았다.

울적한 기분으로 고개를 돌리자 이번에는 자이드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자이드의 옷을 뻔히 쳐다봤다. 다비와 다름없이 방어 기능이 없어 보이는 옷이었다. 그러나 가운 가슴팍에 황색 자수로 새겨진 수리검 문양으로 보아, 확실히 도적 전용 옷이었다. 보기보다 능력치가 좋으리라 예상했다.

‘무슨 문제가 있는가.’

내가 옷을 한참을 보고 있자, 자이드가 무뚝뚝하게 물어왔다.

나는 영문을 몰라 하는 녀석에게 초보자 장비에 대한 서러움을 토로했다. 그러자 자이드가 가만히 쳐다보더니 따라오라는 말과 함께 어딘가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내가 자이드의 검은 뒤통수만 쳐다보고 있자 그가 뒤를 돌았다.

‘나의 창고로 가는 것이다. 안심하라.’

얼빠진 얼굴로 놈을 보던 나는 [도적] 표식을 보고 얼른 뒤를 쫓아갔다.

그렇네. 저놈 도적이었지!

나는 눈을 빛내며 놈을 따라갔고, 녀석은 다 허물어진 복도를 별말 없이 가로질러 갔다.

걷다 보니, 아직 이곳이 부서지지 않은 게 희한할 정도로 벽들이 마구잡이로 뚫려 있는 게 보였다. 그리고 기지를 이렇게 만든 장본인들은 태평한 걸음으로 내 뒤를 따라왔다.

그렇게 놈들과 함께 자이드의 창고에 도착했을 때다.

‘……뭐냐.’

나는 당연히 알라딘에 나오는 보물 창고처럼, 휘황찬란한 창고를 상상했다. 그래서 잔뜩 기대감을 갖고 걸어왔다.

그러나 눈앞에는 아주 처참한 창고가 있었다. 물건들이 모조리 박살이 나서 바닥에 뒹굴어 댔다. 벽면은 폭발이라도 한 듯 시커멓게 타 있어서 흡사 쓰레기 처리장인가 싶을 정도였다.

‘…….’

나와 마찬가지로 자이드도 말문이 막힌 듯 창고를 보고 있었다. 무감함을 띠고 있는 눈빛이지만 그가 난감해하고 있을 거라 예상했다. 그리고 그게 맞는지 자이드가 나를 보고 한참이나 아무 말 못 하고 있었다.

그때, 따라오던 다비 놈이 내 뒤에 서더니 태평한 어조로 말을 뱉었다.

‘아- 길이 복잡하길래 뚫어 버렸는데, 창고가 있었구나.’

그 말에 자이드의 얼굴이 굳더니 가만히 다비 놈을 쳐다봤다.

‘…….’

나는 놈들에게서 시선을 돌려 다시 창고라 불렸던 곳을 쳐다봤다. 척 보기에도 많은 양의 장비가 박살이 나 있었다. 그걸로 짐작해 보자면, 원래는 내가 기대했던 대로 이곳이 알라딘의 황금 보물 창고 뺨쳤지 않았을까 싶다.

왜 하필, 빌어먹게도 다비 놈이 이곳을 뚫어 버렸을까 생각했다.

부서지고 가루가 되어 버린 장비들을 망연하게 보던 나는 점점 자세를 바로 하기 시작했다. 창고 안을 유심히 보고 있으니, 용케 박살 나지 않은 장비들이 보였다. 금이 갔긴 해도, 꽤 좋아 보이는 장비가 드문드문 눈에 들어온 것이다.

‘……혹시 필요 없으면 가져가도 되냐?’

나는 자이드에게 허락을 구하고, 까맣게 타 있는 보물 창고에서 장비를 발굴하기 시작했다.

구더기 같은 낡은 갈색 천 옷을 버리기 위해, 장비 무덤 안에 파묻히듯 들어가 세세히 살펴보았다. 장비에는 옷처럼 태그가 붙어 있었고 거기에는 어떤 기능이 있는지 적혀 있었다.

특정 직업만 입을 수 있는 옷들을 제외하니 하얀색 망토처럼 생긴 옷밖에 입을 게 없었다. 태그를 보니, 꽤 괜찮다 싶어 갈아입었다.

그 뒤 쓸 만한 단검을 찾았다. 더해서 자이드의 옛 파티원, 도적놈들이 쓰던 것과 유사한 무기들이 보였고, 그것들 틈에서 스턴 기능이 있는 단검 크기의 지팡이를 발견했다. 내가 찾고 있던 원거리 마력이 담긴 지팡이였다. 횟수 제한이 있었지만 스킬이 없는 내겐 필요한 무기였다. 나는 단검과 함께 허리춤에 챙겨 넣었다.

그렇게 나는 다 무너져가는 보물 창고에서 구더기 옷을 버리고, 신나게 장비를 세팅했다.

제법 만족스러웠다.

보물 창고라 불리는 곳답게, 좋은 장비들이 많았다. 물론, 손상이 된 장비지만, 그럼에도 방어력과 공격력이 우수했다. 크리티컬 확률 증가 기능, HP 증가 기능, 이속 향상 기능들이 장비에 붙어 있으니, 몸의 기운부터 달라지고 있었다.

‘이거지, 이거지.’

이만하면 엄청 만족스러운 장비들이라 생각하며 놈들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빈손인 녀석들의 모습이 보였다.

네놈들은 뭐 안 챙기냐는 식으로 말을 하려다 관뒀다. 이놈들은 맨손으로도 주변을 초토화시키는 놈들일뿐더러, 그전에 마력을 못 버티고 무기가 박살이 날 테니까. 그 때문에 놈들도 번거롭게 무기를 들고 다니지 않는 것 같다.

나는 내 한 몸만 잘 지키면 된다는 마인드로 혼자 쇼핑을 끝냈다. 이어서 나를 기다린 놈들에게 가자고 말하며 복도를 나섰다.

장비를 맞춘, 기쁜 마음으로 앞서 걸어가던 나는 다섯 걸음 채 지나지 않아 멈춰야 했다.

‘음?’

다비가 뒤에서 의아하다는 소리를 낼 즈음, 나는 삐걱삐걱 놈들을 쳐다봤다. 따라오는 거대한 파티원 세 명을 보자 목구멍에서 말이 튀어나오지 않았다.

그들을 목석처럼 쳐다보고 있자 자이드가 내게 말했다.

‘안 가는가.’

‘……그게.’

내가 우물쭈물하자 루스 역시 이상하다는 듯이 빤히 쳐다봤다.

‘왜 그러십니까?’

내가 곤란하게 눈동자를 돌리고 있으니 다비가 의아한 눈빛을 보냈다.

나는 앞에서 쏟아지는 그들의 시선에 결국 솔직하게 말을 했다.

‘너희 혹시…… 네스키 어딨는지 아냐……?’

질문을 하면서도 민망한 기분이 들어, 기어가는 듯한 목소리가 입에서 나왔다.

그도 그럴 게…… 여태 모험을 떠난 시점부터 지금까지 네스키를 조지기 위해, 나를 활용할 수 있는 파티원을 구하는 걸 목표로 달려왔다. 그리고 이제 ‘네스키를 없애고 영웅이 되자!’를 이룰 차례였다.

‘그…… 내가 네스키 잡으려고 모험 중이었거든…….’

그런데 큰 목표만 잡고, 세세한 부분은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명분상 네스키를 조지러 가는 파티건만, 방금 몇 걸음 걷다가 네스키에 대한 정보가 하나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들은 것이 없다.’

포부를 밝히자 자이드의 덤덤한 목소리가 들려왔고, 이어서 당연하다는 식으로 루스가 말했다.

‘네스키를 만난 자는 모두 죽음에 이르니, 아는 자는 없을 겁니다. 서적 역시 존재하지 않는 걸로 압니다.’

나는 우뚝 멈춰 서서 루스를 바라봤다.

‘……어, 없다고?’

루스가 그러하다는 듯이 눈을 감았다 떴다. 그 모습에 나는 막막한 기분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장비도 맞추고, 파티원도 있는데 보스에 대한 정보가 일절 없다. 네스키를 잡으려면 어디로 가야 할지 감도 전혀 잡히질 않는 상태다. 이 광활한 세계를 다 뒤지다간 늙어 죽지 않을까 싶다.

나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과거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레전더리 어드벤처 게임을 했을 때의 과거 기억을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운영자가 보스를 만들지 않고 튀어 버렸다는 말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말 그대로 그저 보스 몹이 있다는 사실만 알 뿐,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다.

세계 일주를 해야 하는 걸까……. 그래, 세계 일주 자체는 싫지 않다. 문제는 영웅이 되고 싶은 내 열망이다.

‘…….’

그렇게 허망한 기분으로 있는데, 다비 녀석의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자 다비 녀석이 가만히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 듯하더니 이내 곧게 뻗은 입술을 열었다. 그 사이로 나른한 투가 흘러나왔다.

‘알고 있어.’

‘……어?’

잘못 들었나 했는데 놈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귓가에 꽂혔다.

‘정확히는 네스키한테서 도망쳐 온 자를 알아.’

막막하던 눈앞이 번쩍 트이는 소리였다.

나는 눈을 빛내며 다비 녀석에게 바짝 다가가 말했다.

‘지, 진짜?!’

놈의 옷자락을 잡고 진짠지 눈을 부릅뜨고 물었다. 다비가 내 얼굴을 내려다보더니 눈꼬리를 사르륵 접어 웃었다. 그의 사근사근한 분위기에 나는 눈을 깜빡거리다 흘끗 시선을 내렸다.

나도 모르게 놈을 잡고 있었다. 움찔하며 손을 빼려는데, 놈이 내 손을 꽉 마주 잡으며 다정하게 말했다.

‘응. 진짜.’

알고 있다는 듯이 확신에 찬 대답이 들려왔다.

나는 다시 놈을 쳐다봤다. 다시 손을 빼려고 하자 그놈은 ‘전사 마을’에 그 사람이 있다고 말하며 손을 잡아 왔다.

나는 놈의 말에 머리가 확 트이는 기분이 들었다. 그 전사 마을이란 곳으로 가 보자고 말을 했다. 다비 놈은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걸어갔다. 나는 놈의 손에 이끌려 자이드의 기지를 빠져나갔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난관에 부딪혔다. 사막 한복판에서 땅끝, 전사 마을을 걸어가는 건 엄청난 시간과 체력이 필요한 일이었다.

……그래도 유일한 정본데 가야지, 라며 걸음을 뗄 때다.

‘마을을 찾다가, 이곳과 멀지 않은 곳에 하늘 배의 선착장을 봤습니다.’

루스가 전사 마을까지 힘들게 가지 않아도 된다며 말을 했다.

그 말에 화색을 띤 것도 잠시, 하늘 배는 원하는 장소로 가 주지만, 타기 위해서는 막대한 금액이 필요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내가 어깨를 축 늘어뜨릴 때, 자이드가 말을 뱉었다.

‘골드는 충분하다.’

그 뒤로, 허물어진 기지로 들어간 자이드가 커다란 보따리에 골드를 채워서 들고나왔다. 놈은 도적의 우두머리답게 골드가 넘쳐나는 녀석이었다.

‘대박이잖아……?’

그렇게 의외로 일이 술술 풀린다 생각하며 들뜬 마음으로 하늘 배가 있는 선착장으로 온 것이다.

“텔레포트 뒀다 뭐 하냐……. 하늘 계단에나 만들 것이지.”

그렇게 선착장에서 배를 기다리며, 나는 빌어먹을 하늘 계단 구조에 불평하듯 중얼거렸다.

온갖 마법을 쓰는 세상에서 엘리베이터 만들 생각은 안 하냔 말이야. 올라오다 승객들 다 뒤지겠네. 그렇게 생각하던 차다.

“계단 정도에 복잡한 텔레포트를 만드는 건 사치스럽기에 만들지 않습니다.”

루스가 내 중얼거림을 들었는지 나를 내려다보며 친절히 대답해 주었다.

이 정도 악랄한 계단은 충분히 만들 만하지 않나, 싶어 루스를 향해 고개를 휙 들었다. 그러자 같은 시야에 세 놈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벌렸던 입이 차차 다물어졌다.

“…….”

하늘 계단의 문에서부터 길쭉한 다리를 뻗어 느긋하게 다가오는 다비가 보였다. 핏빛 머리가 살랑살랑 움직였다. 그 아래 붉은 눈동자와 조각 같은 얼굴이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같은 시야에 있는 루스가 가벼이 날리는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날카로운 눈매 속 서늘한 보랏빛 눈동자가 구름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옆에, 커다란 기둥에 몸을 기댄 자이드가 탄탄한 팔을 엇간 채 하늘 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무감한 호박색 눈동자 역시 구름 사이를 향해 있었다. 시선을 내리자, 길게 뻗어 있는 다리 아래, 묵직한 금화 보따리가 바닥에 놓여 있었다.

“……그렇네.”

척 보기에도 위압감 있는 세 놈의 모습을 보자 루스의 말이 이해됐다.

비싼 하늘 배 비용을 덥석 낼 정도의 모험가들은 대개 골드가 넘치는 놈들, 그러니까 엄청 강한 놈들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놈들은 저런 계단쯤은 우습게 올라올 것이다…….

그럼 고작 하늘 계단을 올라오는데 텔레포트는 사치라고 느낄 수도 있겠다.

“오는군요.”

그렇게 생각할 즈음, 구름 사이를 보고 있던 루스가 말을 뱉었다.

나는 루스의 시선이 향한 곳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하늘을 덮고 있던 구름이 조금씩 흩어지고 있었다. 동시에 웅장한 뱃고동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더니 구름 사이로 뾰족한 배의 앞머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 뒤로 배의 황금색 몸통이 서서히 드러났고 넓게 펼쳐진 돛이 보였다. 이어서 배 뒷부분에 있는 프로펠러가 구름을 모조리 거둬냈다.

배의 모습이 온전히 드러나자 어마어마한 크기에 감탄이 터져 나왔다.

“이야-.”

거대한 위용을 자랑하는 배가 선착장 안으로 들어섰고, 그림자가 주변을 덮었다. 머리 위에 있는 배의 아랫부분은 빈틈없이 도금되어 있었다.

괜히 비싼 배가 아닌 듯하다.

입을 벌린 채 하늘 배를 보고 있을 때다. 뱃고동 소리 틈으로 날카로운 사슬 소리가 들리더니, 커다란 닻이 하늘에서 떨어졌다.

콰앙-

“……!”

선착장 바닥이 울릴 정도로 거세게 떨어지자 몸이 흠칫 떨렸다. 눈을 크게 뜨고 바닥을 내려다보니 닻이 돌바닥에 단단히 박혀 있는 게 보였다.

고급스럽고 우아한 자태를 뽐내던 것과 달리 과격한 정박 과정에 어이없는 숨이 터져 나왔다.

“허…… 선착장 박살 나겠네.”

그쯤, 자이드가 기둥에 기댔던 몸을 뗐다. 발치에 있는 금화 보따리를 가볍게 둘러메더니 닻이 내려진 곳으로 담담하게 걸어가기 시작했다.

“-가시죠.”

옆에 있던 루스도 말을 뱉고서 닻이 있는 곳으로 망설임 없이 걸어갔다.

나는 하얀 뒤통수를 보며 눈을 껌벅이다 바닥에 박힌 닻을 쳐다봤다.

“갈까.”

이어서 가까이 있던 다비가 내 어깨를 감싸더니 닻이 있는 곳으로 이끌었다. 나는 주춤 걸음을 떼며 다비가 이끄는 대로 걸어갔다.

나는 복잡 미묘한 표정으로 가까워지는 닻을 쳐다봤다. 머릿속에는 물음표가 가득한 상태다. 하늘에 둥둥 떠 있는 배를 보다 의문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근데…… 어떻게 들어가라는 거냐?”

암만 봐도 저 배가 내려올 생각을 안 하는데, 어떻게 타라는 건데?

내 물음에 다비가 비스듬하게 고개를 돌리더니, 아주 태연한 투로 말을 뱉었다.

“사슬로 올라가야지.”

“……사슬?”

……하늘 배는 정말로 승객들을 내쫓으려는 걸까.

나는 얼빠진 얼굴로 둥둥 떠 있는 배와 그 아래 길게 뻗어 있는 사슬을 쳐다봤다. 그러다 사슬 쪽에 서 있는 두 사람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들은 일제히 다비와 나를 보고 있었다.

사슬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놈들의 모습을 보자 서서히 당황스러움이 올라왔다.

“너, 너무 높은 거 아니냐……?”

극기 훈련 하는 것도 아니고, 건물 급 높이의 사슬을 타고 배까지 올라가라니……. 진짜 불친절하잖아.

기겁한 얼굴로 말을 뱉자 옆에 있는 다비가 아무렇지 않은 투로 말했다.

“금방 올라가니까 괜찮아.”

……그야 네놈은 그렇겠지.

나는 입을 다문 채 돌바닥에 박힌 닻을 다시 쳐다봤다. 이어서 위로 이어진 차가운 사슬을 까마득하게 올려다봤다.

“……너무하잖아.”

중얼거리던 나는 어쩔 수 없이 울며 겨자 먹는 심정으로 어디를 잡고 올라가야 할지를 가늠했다. 계단과 달리 두 손으로 사슬을 잡고 올라가야 하니까 포션을 중간에 마시는 건 무리다. 아무래도 도착하고 포션을 들이부어야 할 듯하다.

그렇게 나름 계획을 하며 사슬에 가까이 다가갔다. 앞에 있는 루스와 자이드가 다 죽어가는 내 표정을 의아하다는 식으로 쳐다봤다.

“표정이 안 좋다.”

“당연…… 하아…… 아니다.”

나는 자이드의 무감한 눈동자를 보다 말을 관뒀다.

……이놈들이 내 심정을 알겠냐.

나는 다비와 함께 놈들 앞에 멈춰 섰다. 아마 배에 올라설 즈음, 스태미나가 상당히 깎여 있을 것이다. 그래도 힘들지언정 죽진 않을 것이다. 그럼 됐다…….

나는 마음을 다잡으며 결연한 투로 놈들에게 말했다.

“……올라가자.”

루스와 자이드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고 시선을 돌렸다.

옆에서 싱글벙글 웃고 있는 다비 녀석의 낯짝을 쳐다봤다. 사슬을 타고 올라가는데 어깨에 손 안 떼냐는 식으로 눈짓했다. 놈이 이해를 못 했는지 여전히 손을 뗄 생각이 없어 보인다.

나는 눈을 찌푸리며 거추장스러운 놈을 떼어내려 팔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놈이 순순히 손을 떼었고 곧장 사슬 쪽으로 몸을 틀었다.

“-으앗!”

그때 몸이 갑자기 둥실, 허공에 떠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눈을 커다랗게 뜨며 아래를 내려다봤다. 동그랗게 표시가 된 선착장 바닥에서 불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눈을 끔뻑이며 앞을 바라봤다. 놈들 역시 발이 허공에 떠 있는 상태였다.

“어…… 으억!”

멍청한 소리를 내며 사슬을 돌아보는 순간, 몸이 위로 쑤우욱 끌어 올려졌다. 어딘가 흡착되는 듯한 느낌과 빠른 속도감에 입에서 외마디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러다 한순간에 피부로부터 닿는 공기 저항감이 뚝 그쳤다. 허공에 떠 있던 몸이 딱딱한 바닥에 안착했다.

심장이 벌렁벌렁 뛰어댔다. 바닥과 닿은 다리가 후들거렸다.

나는 놀란 숨을 진정시키려 호흡했다.

“후아-.”

자이로드롭을 반대로 타면 이런 느낌이 아닐까. 내장이 거꾸로 쏟아지는 줄 알았다.

심장께를 문지르고 있자 발밑에 번들번들한 바닥이 보였다. 천천히 시선을 들자 길쭉한 황금빛 복도가 네 갈래로 갈라져 있는 내부 구조가 보였다. 중간중간 하얀색 밝은 조명이 길을 비추고 있었다. 벽면에는 세련된 그림이 걸려 있었다.

“…….”

호화로운 인테리어를 보고 있으니, 여기가 배의 내부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밖에 모습과 비슷하게 안도 황금색으로 빛나고 있었으니까.

나는 시선을 돌려 앞에 있는 다비 놈을 흘겨봤다.

“……왜 거짓말했냐?”

“뭐가?”

“사슬로 올라간다며.”

“응. 사슬 안에 있는 마력 덕에 금방 올라왔는걸.”

“…….”

결백한 다비 놈의 얼굴을 보니 할 말이 없었다. 정말 놈은 교묘하게도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어쩐지 놈이 싱글벙글 웃고 있더라니, 허옇게 질려가는 내 반응을 즐기고 있었나 보다.

다비 놈의 느긋한 얼굴에 약이 오르던 차다.

“가볍게 입을 놀리는 자와는 거리를 두는 게 좋습니다.”

뒤통수 쪽에서 루스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춤 몸을 틀자 루스의 냉랭한 얼굴이 보였다. 그가 다비 놈을 흘깃 쳐다보다 나를 바라봤다. 그 시선에 나는 우물거리며 말을 뱉었다.

“……쉽지 않아.”

정말로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있는 틈에 놈이 들러붙어 대니 쉽지 않았다. 심지어 이제는 그러려니 싶은 마음도 들기 시작했다. 놈에 대한 경계심이 허물어지고 있었다.

“제가 보호해 드리겠습니다. 같이 가시지요.”

루스가 치한에게서 보호해 준다는 투로 말했다. 이어서 팔을 붙드는 손길에 그를 올려다봤다.

루스는 다정한 눈빛을 보내더니 팔을 잡아끌며 복도 한편으로 걷기 시작했다.

나는 엉거주춤 발을 떼며 물었다.

“……어? 어, 어디 가는데?”

“객실입니다.”

“개, 객실도 잡았어?”

“골드가 넉넉하게 지불된 덕에 각자 객실이 지정된 것 같습니다. -그럼 갈까요.”

루스가 말을 하면서 알려주듯 시선을 위로 올렸다. 따라서 시선을 들자 표식이 있는 머리 위에 황금색 호수가 부가적으로 떠 있었다.

내 머리 위에도 황금색으로 호수가 떠 있는 게 보였다. ‘뭐야? 언제 생겼지.’라고 생각하다 루스와 다른 호수가 떠 있는 걸 보고 나는 다시 루스를 쳐다봤다.

“나랑 다른 방인데?”

“저와 함께 쓰시죠. 이 편이 지켜드리기 쉬울 겁니다.”

“아니, 괜찮-.”

굳이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아 거절하려는데 반대쪽 팔이 커다란 손에 붙잡혔다. 더해서 반대편에서 잡아끄는 힘 때문에 나를 끌던 루스도 걸음을 멈췄다.

“보스는 나와 함께 쓴다.”

고개 돌리니 호박색 눈동자가 고요히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뒤에서 쏟아지는 조명에 의해 까만 머리카락과 구릿빛 피부가 음영 져 흑표범 한 마리가 앞에 있는 것만 같았다. 그 위압감에 침을 꿀꺽 삼키며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렸다. 표식 옆에 황금색으로 다른 호수가 적혀 있는 것을 확인하고, 안심하며 입을 열었다.

“난 내 방…….”

그때, 몸이 갑자기 뒤로 젖혀 휘청거렸다. 넘어질 것 같아 팔을 휘저으려 했지만, 양쪽에서 단단히 잡고 있는 놈들 때문에 팔이 옴짝달싹도 하지 않았다. 뒤로 넘어가는 몸과 양쪽에서 당기는 힘에 의해 겨드랑이만 찡하게 아파져 왔다.

넘어가던 뒤통수는 이내 딱딱한 상체에 닿았다. 그러자 익숙한 풀잎 향이 코안으로 들어왔다. 시선을 내리자 가슴께를 감싼 탄탄한 팔이 보였다.

눈을 찡그리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눈꺼풀이 살짝 내려간 다비의 얼굴이 보였다.

서늘해 보이는 표정과 함께 그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기복. 다른 남자랑 자는 건 안 되지.”

내가 멈칫하며 다비를 올려다보고 있을 때다. 왼쪽 팔이 잡아당겨졌다.

“기복 님은 저와 함께 있는 편이 가장 안전합니다. 놓으시죠.”

몸이 주춤 옆으로 기울자 오른쪽 팔이 잽싸게 당겨졌다.

“보스는 내가 지킨다.”

자이드의 말과 동시에 뒤편에서 가슴팍을 압박하듯 끌어당겨졌다.

“기복이를 지키는 건 나로 충분해.”

가슴께를 누르는 돌덩이 같은 팔 근육에 숨쉬기가 힘들어지던 차다. 놈들이 계속해서 으르렁거리며 내 몸을 이리저리 잡아당겼다.

“두 번이나 기절을 한 사람이 그런 말을 하니 우습군요.”

“정작, 중요한 순간에 자리를 뜬 놈이 웃을 일은 아니지.”

“나는 실수 따위 하지 않는다.”

거열형처럼 양쪽 팔을 잡아당기니까 팔이 뜯어질 것만 같았다. 동시에 가슴팍이 꽉 눌려 신음이 흘러나왔다.

아릿함이 지속되자 눈물이 핑 돌았다. 시야가 흐려지니 문득 왜 또 이놈들이 싸우는데 내 등이 터지고 있냐,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아, 아파. 좀 놔.”라며 놈들에게 놓으라는 의사를 내비쳤다. 더해서 붙잡힌 몸을 빼내려고 버둥거렸건만 누구도 물러서는 놈이 없었다.

“호언장담은 누구나 하죠.”

머리 위에서 날 선 투가 이어서 들려왔다. 한 번 더 팔에서 찡한 아픔이 올라왔다.

계속해서 압박이 가해지자 결국 내 입에서는 고함이 터져나갔다.

“아파! 아프다고! 놔! 놔! 컥, 윽!”

미친 듯이 몸부림을 치자 나를 붙든 손들이 느슨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냅다 손들을 뿌리치고 다비 놈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미친놈들에게서 두어 걸음 벗어난 나는 고개를 쳐들었다. 아릿함에 차오른 눈물 때문에 놈들의 표정이 정확히 보이진 않았지만, 흐릿한 시야로 어정쩡하게 서 있는 놈들의 형체가 보였다.

‘대체, 지키긴 뭘 지키겠단 건데……!’

욱신거리는 몸이 느껴지니 화가 삭여지지 않았다. 입술을 꾹 깨문 채 놈들을 노려보았다.

“-방은 나 혼자 쓸 거라고!”

이내 굳어 있는 놈들에게 꽥 소리치고 곧장 몸을 틀었다. 그리고 놈들과 반대편에 있는 복도를 향해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뒤통수에서 시선이 느껴졌지만 쌩까고 걸어갔다.

고요한 복도에는 쿵쿵거리는 걸음 소리만이 울려댔다.

“……망할.”

얼굴이 뜨거웠다. 아프기도 아픈 건데 쪽팔렸다. 보스로서 통제는커녕, 커다란 세 놈 앞에서 그렁그렁 눈물을 매달고 소리쳤다는 게 꼴사나웠다.

‘이게 무슨 보스냐고…….’

……체면이 말이 아니다.

“아으-.”

팔을 올리다 말고 겨드랑이가 얼얼해 작게 신음했다. 눈살을 찌푸리며 삐걱삐걱 손을 올렸다. 물기가 맺힌 눈가를 휙휙 문지르며 발길 닿는 곳으로 아무렇게나 걸어갔다.

타박타박-

사람 하나 없는, 쭉 뻗어 있는 복도를 한동안 걸었다. 그러니까 울컥했던 마음이 차차 진정되는 듯했다.

고요한 복도의 공기가 피부에 닿았다. 이쯤이면 놈들과 거리가 충분히 벌어진 듯해 걸음을 멈추었다. 뒤를 돌아보자 예상대로 놈들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하아…….”

안심하고 숨을 내쉬었다. 태풍이 휘몰아치던 곳에서 벗어난 기분이었다.

그렇게 가슴을 쓸며 고개를 앞으로 돌렸을 때다.

“…….”

몇 걸음 앞에 손잡이가 보였다. 웬 손잡인가 싶어 눈을 깜빡였다. 그러다 눈동자를 돌려보았다. 복도 벽에 문들이 간간이 붙어 있었다. 그리고 문 중앙에는 방 호수가 적혀 있었다.

“……어?”

나는 몇 걸음 앞에 있는 방 숫자와 내 머리 위에 있는 방 호수를 번갈아 봤다. 멍청하게 고개를 왔다 갔다 하다 이내 앞에 있는 방이 내 방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냥 걸었을 뿐인데, 객실을 찾아온 모양이다. 이 엄청난 우연에 대해 생각을 하다 문득, 내가 입고 있는 흰옷을 기묘하게 내려다봤다.

“……행운이 이렇게 좋은 거라고……?”

이 옷에는 방어력과 민첩력뿐만 아니라 행운이 추가로 붙어 있었다. 큰 능력치라 생각 안 했는데, 편리한 우연을 만드는 듯하다.

그렇다면 행운만 높여도 삶의 질이 상당히 올라갈 듯하다. 그리고 나는 레벨 100 동안 행운 하나 없는 초보자 옷을 입었으니, 상당히 고달프게 산 것이다.

문득 다비 놈이 감으로 만든 만병통치약도 행운 능력치의 영향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건 너무 사긴데.

약간의 현타가 몰려와 나는 힘 없이 문고리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러자 빛이 짧게 나더니 호수를 인식한 문이 열렸다.

달칵-

시원하게 열리는 문 안으로 터덜터덜 들어섰다. 방 중앙으로 걸어가자 천장에 있는 하얀 조명이 방을 환하게 밝혔다.

“……이야.”

휘황찬란한 객실 내부가 드러나니 감탄이 흘러나왔다. 그러다 방 중앙과 가까운 곳에 놓여 있는 유리 식탁을 발견하고 다가갔다. 바닥을 덮은 황금 카펫이 신발 너머로 푹신하게 느껴졌다.

식탁 앞에 선 나는 허리춤에 있는 단검과 지팡이, 무게감 있는 물건들을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었다.

“……어디 석유 부자가 쓸 법한 방 아니냐.”

온갖 가구들과 벽지, 바닥에 금칠해 놓은 객실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러다 방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가장 시선을 잡아끌던 것에 눈을 고정했다.

바로, 방 한편에 꽉 들어차 있는 침대였다. 그도 그럴 게 침대 사이즈가 아주 컸고, 황금색의 이불로 부담스럽게 덮여 있었기 때문이다.

“……좀 과한데.”

시선을 끄는 황금빛 침대를 보던 차다. 뱃고동 소리가 길게 울려왔다.

진동하는 듯한 소리에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그러자 배가 살짝 덜컹거리더니 움직이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이제야 출항하는 건가.’

가만히 멈춰 있으니, 작게 웅웅대던 배가 다시 잠잠해지기 시작했다. 이내 방 안에는 작은 소리마저 들리지 않는 고요함이 찾아왔다. 안정적인 항로에 들어선 모양이다.

“…….”

잠시 동안 방 안에 멀거니 서 있다 보니, 이제야 나 혼자만의 시간이구나 싶었다. 그렇다면 침대에 뒹굴면서 휴식을 취해도 모자랄 판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우뚝 멈춰 서 있었다. 더해서 시선이 점점 바닥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왜냐, 머릿속이 시끄러웠으니까.

조금 전 출항하는 소리를 순간 세 놈이 싸우는 소리라 착각하고 식겁했다. 그러다 배가 박살 나지 않은 걸로 출항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정적이 찾아온 지금, 세 놈은 방에 들어갔으려나? 놈들 방은 다른 쪽인가? 등등 시끄러운 생각들이 머리를 가득 채웠다.

“……아까 너무 소리쳤나.”

내 목소리가 넓은 방 안에 울리는 것을 듣고 스스로 놀란 나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사지 찢길 뻔했는데 무슨-.”

뭐 그렇게 물러 터진 생각을 하고 있냐고. 근데…… 그놈들은 나를 지키고 싶은 마음에서-

“미쳤네.”

가만히 있으니 계속해서 세 놈에 대한 생각이 치고 올라왔다.

혼자만의 시간을 누려도 모자랄 판에, 골치 아픈 놈들에게서 벗어난 지금도 놈들을 생각하면 어쩌잔 건가 싶다. 그런 지독한 놈들에게 절여져선 안 된다. 아무래도 머리를 환기할 필요가 있겠다.

“샤워나 하자.”

찬물이나 맞으면서 정신 좀 차리자, 라는 마음으로 망토 같은 옷을 훌렁훌렁 벗었다. 앞에 있는 테이블에 아무렇게나 옷을 벗어둔 채 방 안에 딸린 샤워실로 걸어갔다.

열려 있는 문 안으로 들어가자 황금 욕실이 보였다. 부담스러움에 잠깐 주춤하다가 이내 문을 닫고 들어섰다. 그리고 욕실 한편에 있는 샤워 부스로 들어가 물을 틀었다. 시원한 물이 머리 위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쏴아아-

머리부터 쏟아지는 물줄기를 맞으며 달갑지 않은 생각을 씻어내려 했다. 그러나 물줄기와 함께 머릿속에 오늘 하루가 리플레이 되기 시작했다.

“…….”

생각해 보니까, 놈들은 내가 네스키를 잡으러 간다고 밝혔음에도 여전히 나를 따르고 있었다.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무려 이 세계에서 최강 보스 몹인데 말이다.

“……레스탈로스의 힘인가.”

그러고 보니 사냥하든, 네스키를 잡든, 뭘 하든 놈들은 나를 따르고 있었다. 심지어 각자의 자리에서 대우받던 놈들이 자리를 박차고 내 부하로 들어왔으니 말 다 했다. 서로 죽이려 드는 놈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는 것도 그렇고-.

“망할…… 더 생각나잖아.”

샤워를 하면서 놈들에 대한 생각을 떨치려 했다. 그러나 물 온도에 익숙해진 몸은 자연스레 놈들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모든 생각에 놈들이 끼어 있단 걸 깨달은 나는 심란하게 물을 껐다. 샤워 부스를 나와서 수건을 집어 들었다. 물기 가득한 회색 머리카락을 탈탈 털었다. 이어서 욕실 안에 걸려 있는 가운 하나를 몸에 대충 걸친 채 수증기로 가득 찬 욕실을 나섰다.

복잡한 마음으로 욕실 문을 닫고, 침대가 있는 방향으로 돌아서던 차다. 방 공기가 차갑다는 느낌이 들었다. 닭살이 올라올 정도의 서늘함에 이상함을 느끼며 몸을 틀었다.

“-흐헉.”

은은한 조명 아래, 압도감이 느껴지는 생명체의 모습에 경련하듯 몸을 떨었다. 뒤로 주춤 물러나며 튀어나올 듯 벌렁거리는 심장께에 손을 올렸다.

뻣뻣하게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침대에 걸터앉아 있는 놈과 눈이 마주쳤다.

“다 씻었어?”

쭉 뻗은 눈매를 접어 웃는 다비의 얼굴이 보였다.

나는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아까와 같이 호실 문은 굳건하게 닫혀 있었다. 다른 게 있다면 호실 문 손잡이에 스파크가 튀고 있다는 점이다.

얼빠진 얼굴로 다시 앞을 바라보자, 나른해 보이는 다비의 모습이 보였다.

“……어, 언제 들어온 거냐.”

“얼마 안 됐어.”

태연한 대답에 말문이 막혔다.

……불과 몇 분 전, 너무했나, 란 생각을 잠깐이라도 한 게 무색할 정도로, 방 주인을 제치고 제 침대처럼 편하게 앉아 있는 놈의 모습이 보인다.

나는 저 낯짝 두꺼운 놈을 쫓아내야겠다는 생각에 걸음을 뗐다. 그러나 세 걸음 채 가지 못하고 멈춰 섰다.

“……그래. 뭐…… 잠깐 있든가. 때마침 궁금한 것도 있고.”

앞에 있으나 없으나, 어차피 세 놈 생각이 끊이질 않던 차다.

‘때마침 다비 놈에게 묻고 싶은 것도 있으니까 좀 있다가 가라고 하지 뭐.’

발걸음을 옮겨 침대에 걸터앉아 있는 그를 지나쳐 갔다. 옆에서 그의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침대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소파에 털썩 앉았다. 시선을 들자 집요함이 느껴지는 붉은 눈동자와 마주쳤다. 그러다 금세 놈이 빙글 웃으며 말했다.

“물어봐.”

뭐든 물어봐도 좋다는 투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나랑 파티 맺기 전에, 어디 가던 길이었냐?”

나는 질문하다 보니 머쓱한 기분에 볼을 긁적였다. 녀석에겐 뜬금없는 질문일 테니까.

아까 샤워를 하던 중, 어딘가에 정착해 있던 루스, 자이드와 달리 숲속에서 만난 다비 놈은 어딜 가고 있었던 걸까, 의문을 느꼈던 참이었다.

내가 궁금하단 듯이 쳐다보자 다비가 순순히 대답했다.

“목적지가 있던 건 아니었어.”

“아니라고? 그럼, 왜 몬스터가 득실대는 숲에 있었는데?”

굳이 위험한 곳에 왜 갔나 싶다. 의아함에 물어보자 다비가 지그시 쳐다봤다. 빙글 웃던 놈이 사뭇 진지하게 쳐다보자 나는 눈을 깜빡였다.

잠깐의 정적이 흘렀고 마주한 놈의 눈동자가 일렁였다. 왠지 불길한 기분을 느낄 즈음 다비 녀석이 천천히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며 대답했다.

“존재할지도 모를, 무언가를 정처 없이 찾던 중이었어.”

“……그, 근데 왜 갑자기 일어나는 거냐.”

“그리고 그날, 내 힘을 감당하는 무기를 찾았고.”

먹잇감을 향해 오는 맹수처럼, 느릿한 걸음으로 다비 녀석이 다가왔다. 실제로 놈의 눈빛에는 굶주림의 빛이 돌고 있었다. 놈에게서 흘러나오는 기운에 몸이 딱딱하게 굳는 느낌이다.

뻣뻣하게 시선을 들자 놈이 갈증이 난다는 듯이 아랫입술을 핥았다. 그리고 붉은 혀가 모습을 감췄을 때, 놈은 지척에 멈춰 서 있었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그의 붉은 눈동자에 탁한 빛이 돌았다. 위험한 분위기를 감지함과 동시에 허둥지둥 몸이 움직여졌다.

“가, 감당한다니, 상대 입장도 들어봐야…… 으앗!”

애써 맞받아치며 몸을 일으켰을 때, 앞에 있던 다비 놈이 내 어깨를 잡고 뒤로 밀었다.

살짝 민 것 같은데 몸이 휘청거리면서 소파 뒤로 벌러덩 넘어갔다.

나는 등에 닿는 소파의 촉감을 느낄 새도 없이 몸에 소름이 끼쳐왔다. 위에서 붉은 눈동자가 내 몸을 쭈욱 훑고 있었기 때문이다.

몸 안으로 뱀이 기어가는 듯한 오싹함에 나는 벌어진 가운을 본능적으로 감싸 쥐었다. 더해서 무방비하게 뒤로 넘어간 상체를 퍼뜩 일으켰다. 아니, 일으키려 했다.

“다른 놈이랑 하면, 나랑은 두 배로 하는 거. 잊었어?”

“그, 그딴 게 어딨-! 윽.”

가라앉은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동시에 명치께를 꾹 누르는 손이 느껴졌다.

힘이 가해지자 또다시 몸이 뒤로 넘어갔다. 놈이 가슴팍에 손을 떼지 않고 꾹 눌러대자 눈이 찌푸려졌다. 바르작거리며 놈의 팔을 떼어내려 했다. 단단한 팔을 손으로 그러쥐며 힘을 주려던 차다.

놈의 다른 쪽 손이 벌어진 가운 아래로 훌쩍 파고들어 왔다. 곧장 성기를 쥐는 커다란 손에 의해 사지가 퍼드득거렸다.

“아읏! 아, 아파!”

아래에는 창백한 손에 협박당하는 듯한 애처로운 성기가 보였다. 매우 민감한 곳인지라 조금만 힘이 가해져도 눈앞에 별이 보여 무섭기 그지없다.

그 괴악한 손은 아까와 달리 위아래로 부드럽게 기둥을 쓸어댔다. 이어서 귀두 부분을 검지로 둥글게 만져 오자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으…… 흐.”

흐느끼는 소리가 방에 울리자 귀에 열이 확 올랐다.

나는 가슴팍을 밀던 손을 밑으로 내렸다. 아래를 주무르는 손을 떼어내려 했다. 하지만 놈의 팔을 잡는 그 순간, 다시 한번 아래를 붙든 손에 힘이 들어갔고 나는 발작하듯 몸을 튕겼다.

“아흑! 망할…… 이거, 놔!”

“기복이는 나랑 할 때가 가장 좋지?”

“뭐가 좋- 아흐윽!”

아래를 터뜨릴 듯 쥐어오자 나는 눈앞이 순간적으로 하얗게 변했다. 입에서는 겁에 질린 숨만 터져 나왔다. 이어서 가늠을 하듯이 쥐락펴락하고 있는 손아귀가 느껴졌다.

입술을 깨물며 몸을 움츠리는데, 기둥을 쥔 손가락이 아래로 천천히 내려가는 게 느껴졌다.

“흣- 아, 알았, 조, 좋아.”

길쭉한 손이 불알을 쥐고 있다는 것을 깨닫자 나는 퍼뜩 좋다는 말이 튀어나왔다.

목소리가 볼품없이 덜덜 떨려왔다. 까딱 잘못하다간 고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이 상당했다. 그러나 말을 했음에도 불알을 만지작대는 움직임이 멈추지 않았다.

오금이 저리는 그 감각에 나는 한 번 더 벌컥 말을 뱉어야 했다.

“좋다고! 좋다고!”

“응. 그럴 줄 알았어.”

나직하게 웃는 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그러나 만족스러워하는 놈의 목소리와 별개로 불알을 위협적으로 만지는 손은 떼지지 않고 있었다. 식은땀이 등에서 삐질삐질 흘렀다.

“아, 알았으면, 소, 손 좀- 읏.”

힘겹게 말을 뱉던 때다. 놈의 손이 더 밑으로 내려가더니 손가락 하나가 입구 쪽에 툭 닿았다.

나는 ‘흡.’ 숨을 들이켰다. 잠깐 굳어 있던 차에 입구에 닿은 손가락이 불쑥 안으로 파고들어 왔다. 길쭉한 게 들어오는 감각에 허리가 흠칫 떨렸다.

나는 곧장 놈의 팔을 잡았다. 눈을 잔뜩 부릅뜨고 위의 놈을 쳐다봤다.

“뭐, 뭐 하는 거야.”

“기복이가 좋아하는 거 해야지.”

“내가 좋아하긴 뭘-! 으흑.”

내 취향을 단정 짓는 말에 울컥 소리치려 했다. 그러나 그 전에, 깔짝 들어왔던 손가락이 내부 안쪽으로 쭈욱 파고들어 왔다. 몸이 움찔 떨렸다. 이어서 손가락이 어느 한 부분을 지그시 누르자 힘이 쭉 빠지는 기분이 들었다.

놈을 잡고 있던 손이 느슨해지는 순간, 다른 손가락이 입구 안을 미끄러지듯 파고들어 왔다. 아까보다 구멍이 더 벌려지는 감각에 배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자 긴장을 풀라는 듯이 안에 있는 손가락이 부드럽게 내벽을 자극했다.

“읏! 빼, 빼라고…… 흐.”

“이렇게 좋아하는데 어떻게 빼.”

“대체 내가- 아흐읏!”

안쪽까지 들어간 손가락이 입구 뒤로 쭈욱 빠졌다. 내벽이 비벼지는 감각에 털이 쭈뼛 섰다. 이어서 길쭉한 손가락이 안쪽으로 다시 쑤셔졌다.

움직임이 반복되자 빠듯했던 입구가 손가락을 유연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아래가 늘어나는 감각에 몸을 비틀자 얇은 손가락이 정확히 전립선 부근을 꾸욱 눌렀다. 그러자 입에서 낯선 하이 톤이 터져 나왔다.

“하아응!”

스스로가 듣기에도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자지러지는 신음이었다. 얼굴 전체에 화르륵 열이 오르는 기분이었다. 그러자 위에서 기가 찬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러면서 아니라고?”

“읏…… 거, 거길 누르면…… 누, 누구나 이런다고!”

“네 몸이 야해서 그래. 안 누르고 있는 지금도 구멍이 벌름대잖아.”

“흐으……읏.”

놈의 손가락이 안을 쿨쩍쿨쩍 쑤셔댔다. 자극이 오는 족족 허리가 떨렸다. 위에서 쏟아지는 말을 부정할 수 없는 몸의 반응이었다.

수치심에 신음을 내지 않으려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러자 놈이 또 전립선 부근을 뭉근하게 문질러 왔다. 간질간질한 내부에 저도 모르게 흐느끼는 신음이 터져 나왔다.

“아응! 으…… 앗!”

안을 지그시 누르는 자극에 움찔할 때에, 녹진하게 풀린 입구로 손가락 하나가 더 파고들어 왔다. 아까보다 더욱 부피감 있게 입구가 쭉 벌어졌다. 파고들어 온 손가락은 내벽을 문지르며 깊숙하게 들어왔다. 안에 있던 손가락과 겹쳐 부피감을 더했다. 이어서 원을 그리듯 안을 휘저어 댔다. 그러다 손가락으로 피스톤질 하듯 쑤셔댔다.

쑤셔질 때마다 차갑고 길쭉한 손가락이 내벽 곳곳을 간지럽게 눌러댔다. 등줄기를 타고 올라오는 감각에 허리를 잔뜩 들어 올리던 차다. 손가락이 안을 비비더니 입구 밖으로 쑤욱 빠져나갔다. 아래를 마구 휘저어대던 손가락이 빠지자 입구가 수축하는 게 느껴졌다. 한창 채워졌던 곳이 텅 비니 눈이 질끈 감겼다.

몰아치던 자극이 멎자 진이 쭉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 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동시에 입구를 둥글게 덧그리는 손가락이 느껴졌다.

“…….”

감은 눈을 뜨며 천천히 아래를 내려다봤다. 가운 틈으로 보이는 성기 끝에 액이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더해서 가운과 소파 등받이에 하얀 액이 튀어 있는 게 보였다.

그것을 눈에 담고 있으니, 공허한 기분 틈으로도 드는 생각이 있었다. 절대 앞에 있는 놈을 쳐다보지 말자는 생각.

필사적으로 놈을 외면하고 있는데, 탄탄한 팔을 붙들고 있는 허여멀건 손이 시야에 들어왔다.

……놈의 말 때문일까, 마치 보채는 듯한 손짓으로 보여 나는 퍼뜩 손을 뗐다. 그리고 그 손을 곧장 얼굴로 가져다 댔다. 없는 쥐구멍을 손으로라도 만들어야 했으니까.

“기복이는 뒤만으로도 가능하구나.”

그때, 순진무구한 목소리가 위에서 들려왔다. 확인 사살과 같은 단어들이 머리를 파고들었다. 그러자 창문 밖으로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이 올라왔다.

“이런 몸은 타고난 거야?”

천진한 목소리가 연속으로 들리자 놈의 주둥이를 막으려 메인 목을 쥐어 짜냈다.

“……좀 닥쳐.”

겨우 말을 뱉은 나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두 손으로 얼굴을 덮고 있으니 손에서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내가 저 변태 손에 기어코 사정했다는 걸 믿고 싶지 않았다. 심지어 뒤만으로 이 지경이 되는 게 말이 되나 싶다…….

“……혼자 있고 싶으니까 나가.”

나는 시야를 차단한 상태로 위에 놈에게 웅얼웅얼 말을 뱉었다. 자살 충동을 일게 만드는 원흉을 내쫓을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놈에게서 움직임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살갗으로 시선만이 따끔따끔하게 닿아왔다.

“…….”

좀 나가라. 이 새끼야. 그렇게 속으로 되뇔 즈음, 그제야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가슴께와 아래에 닿아 있는 손도 몸에서 떼어졌다.

잠깐의 침묵 끝에 옷자락을 주섬주섬 만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내 지익, 하며 지퍼가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뭔가 움직임이 이상하다는 것을 감지했다.

서늘한 예감에 나는 결국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을 서서히 내렸다. 그러자 은은한 조명 아래에 꺼덕거리는 무시무시한 것을 본 것 같다.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뻣뻣하게 고개를 들던 그 순간, 위에서 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렇게 두고 어떻게 나가.”

지척에 서 있던 놈이 커다란 소파 위로, 아니 정확히 내 몸 위로 와락 올라왔다. 그 모습에 기겁한 나는 곧장 내 위에 있는 놈에게 소리쳤다.

“왜, 왜 올라오는데!”

“아직 안쪽까지 못 채워 줬는걸.”

“필요 없-.”

허둥지둥 손을 올리며 위에 있는 놈을 밀치려 했다. 그러자 놈이 가볍게 내 팔목을 감싸 쥐고서 머리 위로 확 들어 올렸다.

“읏-!”

상체가 확 움츠려졌다. 아까 루스와 자이드가 양팔을 뽑을 듯 당긴 나머지, 겨드랑이가 찌릿하게 아팠다.

아픔을 삼키고 있는 틈에 놈이 내 다리 사이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그가 널찍한 상체를 세우며 아래에 깔린 나를 내려다봤다.

“기복이는 내 걸 가장 좋아하잖아.”

“그, 그건 아까 네놈이 불알을 터뜨릴 듯이 쥐니까 한 말……!”

분통 터지는 소리에 와락 말을 뱉던 나는 멈칫했다. 입구에 뜨거운 열기가 닿았기 때문이다.

경직된 얼굴로 시선을 내렸다. 놈의 내려간 바지로 인해 흉흉한 성기가 적나라하게 보였다. 잔뜩 풀어진 가운 사이로, 당장이라도 파고들어 올 듯 입구에 맞물려 있는 위협적인 자세였다.

“흡-.”

한껏 부풀어 올라 꺼덕대는 검붉은 것을 보니 숨이 절로 들이켜졌다. 장기가 쪼그라드는 기분에 말이 더듬더듬 뱉어졌다.

“자, 잠깐…… 나, 방금 갔다고…….”

몸이 액체처럼 흐물거리는 느낌이다. 힘이 없었다. 한 마디로, 조금 전에 뽑아낸 진득한 사정감에 허우적대는 상태였다.

“그러게 왜 혼자 갔어.”

“아니, 네놈이 멋대로-! 읏.”

‘내가 했냐, 네놈이 멋대로 커져 놓고!’라며 억울함을 토해내려던 나는 입구 쪽에 닿는 거대한 크기에 흠칫했다.

시선을 올리자 뒤에서 쏟아지는 은은한 조명으로 인해 낯설어 보이는 그의 얼굴이 보였다. 마주한 붉은 눈동자가 뜨겁게 일렁이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키는데, 문득 다비 녀석이 눈을 살짝 찡그렸다. 빠듯해 보이는 그의 얼굴을 보다 다시 시선을 내렸다. 잔뜩 부풀어 오른 채 맥박하고 있는 놈의 흉흉한 성기가 보였다. 입구에 닿아 있는 그것은 너무나도 크고 굵직한 모양새를 자랑하고 있었다.

“…….”

입술을 꾹 깨문 채 흉흉한 크기를 쳐다봤다. 그러다 다시 시선을 들어 올린 나는 한숨처럼 말을 뱉었다.

“하아……그래, 해라, 해…….”

아플 정도로 잔뜩 부풀어 올라 눈을 찡그리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한번 해 주고 말자 싶었다. 저 정도면 금방 끝날 것 같기도 하고, 이미 뭐, 몇 번 했고…… 무엇보다 오늘 하늘 배를 타기 전, 놈의 가라앉아 있던 표정이 제법 신경 쓰이고 있었다.

‘……그래, 운동 한 판 한다고 생각하자…….’

포기하며 몸에 힘을 풀자 다비는 내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거대한 것을 삽입을 하기 시작했다. 결합과 동시에 아까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입구가 쫘악 벌려지는 감각이 느껴졌다.

“아흑- 흐, 윽…… 으읏!”

억눌린 소리가 입에서 흘러나왔다. 굵직한 기둥은 지체하지 않고 안쪽으로 밀고 들어왔다. 커다란 기둥이 예민해진 내벽을 빠짐없이 문지르며 들어오자 눈물이 왈칵 차올랐다.

“막, 흣, 넣으면, 허윽!”

힘겹게 말을 뱉던 때 철퍽, 깊숙한 안까지 단숨에 삽입이 되었다.

머리를 뚫고 올라올 것 같은 기세에 배에 힘이 들어갔다. 턱 막힌 숨을 겨우 뱉으며 호흡했다. 그러자 내부 안에 꽉 들어찬 게 꿈틀대는 감각이 느껴졌다. 거대한 그의 크기로 인해 속이 더부룩했다.

“하아.”

놈이 위에서 탁한 숨을 쉬더니 상체를 숙여 왔다. 흐릿한 시야로 커다란 그림자가 몸을 덮는 게 보였다.

“……기분 좋게 해 줄게.”

위로 덮어지는 딴딴한 몸과 함께 귓가에 목소리가 속삭여졌다. 동시에 뜨거운 입김이 피부에 닿았다. 얼굴 가에 숨이 머물더니 부드러운 것이 볼에 닿았다.

귓가에는 쪽, 하는 이해할 수 없는 소리가 들려왔다. 울룩불룩한 배에 적응하기 위해 호흡하고 있던 나는 그 소리에 눈을 몇 번 깜박였다. 그러자 그렁그렁했던 눈물이 눈가에서 떨어졌다.

그때 또 쪽,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낯간지러운 소리를 인지하는 순간 나는 그대로 얼어 버렸다.

“……흐…….”

넋 놓고 입술을 빨리고 있던 나는 질척거리는 소리에 현실 감각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초점을 찾자 코앞에서 나를 응시하고 있는 붉은 눈동자가 보였다. 그의 눈에는 욕정과도 같은 것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오싹한 기분에 숨을 들이켤 때, 놈의 입술과 맞물려 숨이 들어오지 않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놈이 내 입술을 온통 덮고 있었다. 찐득한 침 소리가 귓가에 선명하게 들려왔다. 입구 부분에서는 결합된 것의 열기가 느껴지고 있었다. 놈과 틈 없이 맞물려 있는 이 상황을 인지하니 머리가 고장 난 기분이 들었다.

“으, 웁-.”

벌어진 입 틈으로 물컹거리는 게 파고들어 왔다. 입 안쪽으로 유연하게 들어옴과 동시에 놈의 고개가 옆으로 기울어졌다. 질척한 그것은 치아와 잇몸 구석구석을 집요하게 핥았다. 혀가 움직일 때마다 닿은 입술에서 침이 섞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안을 마구 핥던 물컹한 게 내 혀와 엉켜 들었다. 능숙한 움직임에 정신이 흐물흐물 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키스가 깊어질수록 몸이 뜨거워졌다.

그런 흥분도 잠시, 놈이 내 혀를 뽑을 듯 빨아대기 시작하자 숨이 막혀 왔다. 눈앞이 어지러울 정도로 과하게 빨아댔다.

나는 물에 빠진 사람처럼 허우적허우적 손을 움직였다. 겨우 놈의 어깨를 잡았을 때야, 놈이 내 혀를 놔주었다. 떨어지는 입술과 함께 쪼옥, 하는 소리가 방 안에 울려왔다.

“하아, 하아…….”

가쁜 숨을 내쉬며 시선을 휙 들었다. 뭐라 소리치려고 했는데, 놈의 입술과 내 입술에 타액이 길게 늘어진 걸 보니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타액으로 젖어 번지르르한 입술을 멍청하게 쳐다봤다. 그러자 다비가 제 입술을 핥았다. 그가 타액을 아무렇지 않게 핥는 걸 보고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이어서 몸이 달싹거렸고 아래에 빠듯한 것이 인지됐다.

나는 차마 놈의 얼굴을 쳐다보지 못하고 더듬더듬 말을 뱉었다.

“……그, 그냥 빠, 빨리 우, 움직- 흐읏!”

그 순간 내 팔목을 붙들고 있던 놈의 손이 떼어졌다. 놈이 상체를 들더니 내 허벅지를 단단하게 잡아 왔다. 다리가 조금 더 벌려지는 감각과 함께 안 그래도 빠듯한 결합이 더욱 깊어졌다. 동시에 배 안쪽까지 들어찬 그의 것이 아까보다 더 커진 느낌이 들었다.

“그러려고. 나도 한계야.”

사뭇 사나운 목소리가 위에서 들려왔다. 동시에 결합된 기둥이 뒤로 빠지더니 깊숙한 곳을 찔렀다. 번쩍거리는 자극에 눈시울이 시큰해졌다.

“흑! 아, 아으…… 윽, 아앗, 아!”

굵직한 것이 틈 없이 맞물려 조금만 움직여도 아래가 빠질 듯한 감각이 느껴졌다. 배에 힘을 주자 위에서 억눌린 숨소리가 들려왔다. 이어서 뜨거운 것이 안으로 들어오더니 멈추지 않고 움직여 댔다.

거대한 것이 뒤로 빠지자 내벽이 딸려 나가는 느낌에 소름이 돋아왔다. 뿌리 끝까지 빠지던 커다란 것이 다시 안쪽으로 푸욱 파고들어 왔다. 깊이 들어오는 길쭉한 기둥으로 인해 들려 올라간 다리가 파르르 떨렸다.

“으…… 흐윽…… 아! 아, 응, 아, 읏, 아, 아!”

놈이 허리를 쳐올릴 때마다 시야가 온통 흔들려 어지러웠다. 기둥이 입구까지 빠져나갈 때는 내부가 텅 비는 감각에 두려움이 왈칵 올라왔다.

허둥지둥 손을 들어 위에 있는 놈을 잡았다. 그러자 안쪽을 치는 속도가 점차 올라가더니 결합한 부분에서 철퍽철퍽 마찰 소리가 방 안을 채우기 시작했다.

빠듯하게 벌어진 입구로 끊임없이 굵직한 성기가 들어갔다 나오기를 반복했고, 안쪽이 찔릴 때마다 몸이 움찔움찔 떨렸다.

“흐으흑, 아, 아으! 아, 아, 아, 아아아!”

두툼한 것이 전립선 부근을 찌르자 우는 듯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아래가 수축하자 허벅지를 붙든 손에 힘이 가해졌다. 이어서 놈이 무자비하게 콱콱 안쪽을 쑤셔댔다. 강렬한 자극에 허리가 튕겨 올라갔다.

흐릿한 시야로 보이는 커다란 남자의 형체와 야릇한 냄새, 가쁜 호흡, 찐득한 소리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예민해진 안쪽은 굵은 것이 조금만 움직여도 일일이 힘이 들어갔다. 쾌감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와 놈의 복근 부근에 아랫도리를 비비며 사정을 재촉했다.

놈을 붙든 손에 힘을 주었다. 고양감에 정신없이 허리를 흔들었다. 길쭉한 것이 안쪽을 찔렀고, 번쩍이는 자극에 눈앞이 핑그르르 도는 순간이다.

“하으……!”

“큿-.”

뒤에 맞물려 있던 것이 한순간에 텅 비었다. 밑 빠지는 느낌에 몸이 움츠러들었다. 동시에 위에 있던 녀석의 입에서도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투둑, 아랫도리에서 무언가가 배출되었다. 몸에 서서히 힘이 풀렸다. 동시에 나른한 사정감이 몸을 에워쌌다.

손을 툭 소파에 내려놓은 채 멍하니 앞을 바라봤다. 천천히 눈을 깜빡이자 시야를 가리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선명해진 시야로 숨을 토해내는 다비의 얼굴이 보였다. 야릇한 그의 얼굴을 마주하다 나는 멈칫했다. 그리고 눈을 아래로 내렸다.

“…….”

헐렁한 가운이 양쪽으로 온통 풀어 헤쳐져 허여멀건 몸이 온전히 드러나 있었다. 그리고 판판한 배에는 하얀 액이 잔뜩 묻어 있었다. 아래쪽에는 축 처진 아랫도리가 보였다. 끝부분에는 묽은 액이 묻어 있었다.

나는 그 액을 망연하게 쳐다보다 눈동자를 올렸다. 내 몸 위에 자리한 탄탄한 복부에도 같은 액이 묻어 있었다. 이어서 함께 절정을 맞이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흉흉한 기둥이 보였다.

나는 그 흉측한 것에서 눈을 휙 들어 올렸다. 그러자 다비 놈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정확히는 그의 갸름한 턱과 창백한 볼, 도톰한 입술, 얼굴 곳곳에 튀긴 묽은 액이 말이다…….

나는 그 액의 출처가 식어 버린 내 아랫도리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절정에 다다랐을 때 그가 갑자기 몸을 일으켜, 놈의 얼굴에 정액이 튀어 버렸으니 말이다.

그런 그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말이 나오질 않았다.

나는 언어를 잊은 사람처럼 입을 빠끔거렸다.

“…….”

눈앞에 있는 그의 이목구비가 너무나도 잘나서, 조각품에 이물질을 쏟아 버린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아래가 헤집어진 건 난데, 미안하다고 해야 하나 싶은 어처구니없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할 즈음, 놈이 내 다리를 잡고 있던 손을 떼더니 제 얼굴로 가져갔다. 볼과 턱에 있는 정액을 손으로 쓸듯이 닦았다. 이어서 놈의 곧은 입술이 벌려졌다. 그 틈으로 붉은 혀가 나오더니 입술에 튀긴 정액을 느릿하게 핥았다. 손에 묻은 액도 입술로 가져가 혀로 핥아대는 정신 나간 모습이 보였다.

나는 눈도 깜빡이지 못한 채 그 상태로 얼어 버렸다. 곧이어 야릇하게 움직이던 붉은 혀가 모습을 감추더니 놈이 내 눈을 쳐다봤다. 눈가로 내려온 붉은 머리카락과 함께 눈꼬리가 살짝 접혔다. 그리고 조금의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그의 입에서 들려왔다.

“비리네.”

궁금해서 쳐다본 게 아니다. 그럼에도 굳이 맛을 알려주는 놈의 목소리에 손가락이 움칠거렸다. 이어서 놈의 달뜬 숨이 살에 닿을 즈음, 경악스러운 소리가 터져 나왔다.

“미, 미친놈아! 그걸 왜 핥아!”

“아깝잖아.”

“그딴 게 뭐가 아까운데!”

정액을 눈앞에서 핥아먹는 놈의 변태적인 행동에 온몸이 터질 듯이 달아올랐다. 버벅대는 내 말에 앞에 있는 녀석이 태연하게 상체를 일으켰다. 이어서 손바닥을 느긋하게 뒤집으며 스스로의 몸을 훑었다. 그러더니 다시 눈을 내려 입술을 꾹 깨물고 있는 내게 나른한 투로 말했다.

“네 정액에는 강한 마력이 담겨 있으니까.”

“뭐, 뭐……?”

“이 정도 양에도, 일정 시간 동안 능력치 상승 효과를 주거든.”

놈의 진지한 표정에 나는 입을 떠억 벌리며 놈을 쳐다봤다. 어처구니없는 소리라고 치부하고 싶지만, 여태 경험으로 보아 상당히 일리가 있는 말 같았다.

‘변신이 섹스이다 못해 정액으로 버프를 주는 빌어먹을 기능도 있냔 말이냐…….’

그렇게 생각하던 차에 새삼 섹스가 변신인 이 세계에서 뭘 또 놀라나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 여긴 이런 세계잖아…….’

체념하듯이 생각한 나는 눈동자만 돌려 놈을 쳐다봤다.

놈은 시시각각 변하는 내 얼굴에서 시선을 내려 제 셔츠에 묻은 정액을 흘끔 내려다봤다. 그러더니 셔츠 단추 부분을 툭툭 풀며 몸을 일으켰다.

천근만근 몸이 무거워 움직이고 싶지 않은 나와 반대로 놈은 소파 너머, 찬장으로 걸어갔다.

나는 그의 널찍한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봤다. 처음에는 ‘이제, 방으로 돌아가는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놈이 찬장을 뒤적거리며 손바닥보다 작은 유리컵 하나를 손에 쥔 채로 내게 다가오는 걸 보고 눈을 끔뻑였다.

‘저건 왜 들고 오는 거지?’라는 생각을 하며 녹진하게 풀린 얼굴로 놈을 쳐다봤다. 놈이 소파 앞에 있는 테이블 위로 컵을 내려놓았다.

나는 가까운 거리에 서 있는 놈을 올려다봤다. 셔츠를 풀어 헤친 바람에 눈앞에는 선명하게 갈라져 있는 복근이 숨김없이 드러났다.

복근에 머물러 있던 내 시선이 올라갈 즈음, 놈이 셔츠를 벗더니 테이블 위에 던져놓았다. 이어서 얼굴색도 변하지 않고 앞에서 바지를 휙휙 벗어댔다. 탄탄한 두 다리와 흉측한 제3의 다리가 덜렁거리자 나는 눈을 부릅뜨고 놈을 쳐다봤다.

“왜, 왜 또 벗는데?!”

다 끝난 마당에 방으로 돌아갈 것이지, 왜 허물을 벗어놓냐……! 나는 항의하는 눈으로 쳐다봤다. 그러자 놈의 붉은 눈동자가 스르륵 움직였다. 널브러져 누운 내 몸을 훑는 시선에 가슴 안쪽으로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기복이가 내 도움을 필요 없어 하니까 걱정이야. ……끝까지 혼자 계단을 올라가고 말이야.”

놈이 갑자기 고민이라는 듯한 투로 시무룩하게 말을 뱉었다. 나는 뜬금없는 놈의 목소리에 불길함이 가중됐다.

“아, 아니 뭔- 그 정도는 나도 할 수…….”

“그래서 좋은 방법이 떠올랐어.”

“무, 무슨-.”

“여기에 기복이 정액을 잔뜩 담아놓는 거야. 그리고 기복이가 손에서 놓지 않던 포션처럼, 필요할 때 마시면 되잖아.”

놈이 긴 손가락으로 유리컵을 두드리면서 천진한 목소리로 말을 뱉었다. 그와 반대로 움직일 때마다 드러나는 근육은 위협적이었다.

“그치?”

그가 내 눈을 맞춰오며 빙긋 웃었다. 동시에 심장이 두려움으로 쿵쿵 뛰었다. 상냥한 투로 말을 한 것과 달리 눈빛엔 탁한 빛이 돌고 있었다. 서늘한 직감이 머리를 관통했다.

“뭐, 뭐가 그치냐! 그딴 걸 왜 마시냐고!”

녹진하게 풀려 버린, 무거운 몸을 퍼뜩 일으켰다. 허겁지겁 소파 아래로 발을 뻗으며 흘러내리는 가운을 끌어 올릴 즈음이다.

가까이 서 있는 놈에게서 능글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디 가. 유리컵 채워야지. 누워.”

“미, 미쳤냐?! 말려 죽일 일 있냐고!”

나는 후들거리는 다리로 놈을 확 지나쳐 걸어갔다. 물먹은 솜처럼 몸이 무거웠다. 그럼에도 두 다리에 힘을 주고 호실 문으로 아득바득 걸어갔다.

저 미친놈 눈깔을 보니까 계단 올라갈 때, 내가 놈을 뿌리치고 올라온 점에 앙금이 남은 것 같았다. 그래서 저 미친놈이 손바닥만 한 유리컵에 정액을 채우려 하는 것이다. 마치 포션처럼 말이다. 아무래도 내 씨를 말려 버리려고 작정한 듯하다.

다른 건 몰라도 이건 내 미래가 달린 문제다. 도망가야만 한다.

나는 한 발 한 발에 힘을 주며 이 악물고 걸어갔다. ……최대한 저놈에게서 벗어나야만 했다. ‘놈이 진정이 될 때까지는 마주치지 말자.’ 다짐하며 걸어가다 보니 마침내 문 앞에 다다랐다. 얼른 변태에게서 벗어나려 손잡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아니, 뻗으려 했다.

“안 되지.”

단단한 팔이 허리를 확 낚아챘다. 동시에 몸이 뒤로 끌어당겨졌다. 후들거리는 다리가 중심을 못 잡고 기우뚱 넘어갔다. 몸이 뒤로 넘어가자 비명이 터져 나왔다.

“-으앗!”

눈을 질끈 감는 그 순간, 딱딱한 가슴팍이 몸에 닿았다.

나는 슬그머니 눈을 뜨며 시선을 내렸다. 근육으로 다져진 팔이 내 허리를 포박하듯 감싸고 있었다. 심장이 쿵쾅쿵쾅 무섭게 뛰어댔다.

나는 흐물거리는 팔을 들어 놈을 밀어내려 했다.

“놓-.”

몸을 움직이는 그 순간, 뒤에 있는 놈과 밀착된 몸으로 인해 불룩한 아랫도리가 엉덩이에 툭 닿아 왔다.

나는 흠칫하며 몸을 굳혔다. 심장께가 서늘해지는 그때, 놈이 고개를 숙여왔다. 붉은빛 머리칼이 시야에 아른거렸다. 동시에 목덜미에 뜨거운 입김이 훅하고 닿아왔다. 축축하고 말캉한 혀가 목덜미를 쪽 빨았다. 몸이 바르르 떨려왔다. 그러자 허리를 붙든 손에 힘이 더 들어가더니 놈이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딱딱한 혀가 여린 살을 깨물고, 지체하지 않고 애무하듯 핥기 시작했다.

“흣……!”

농염한 키스처럼 목덜미를 자극하자 입에서 억눌린 신음이 터져 나왔다. 사정을 한 지 얼마 안 되어 몸이 잔뜩 예민해진 차다. 간지러운 자극에 다리가 자꾸만 휘어졌다.

허우적거리는 내 다리를 느꼈는지 놈이 내 가랑이 사이로 탄탄한 다리를 비집어 넣었다. 동시에 목덜미를 찐득하게 빨아올리는 입술에 떨리는 숨이 뱉어졌다. 목덜미를 지분거리는 찐득한 소리가 귓가에 선명하게 박혀왔다.

“하읏…… 그, 그만…… 아응. 흐-.”

입술이 떼어질 때마다 추릅, 침 소리와 함께 목가가 뜨거웠다. 잔뜩 풀려 있는 몸은 의지와 상관없이 또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유리컵을 상기하며 몸을 힘겹게 비틀었다. 저항하는 몸짓을 읽은 놈이 목덜미에서 입술을 떼어냈다. 뒤로 물러나는 놈을 느끼며 밭은 숨을 내쉬었다.

“하아…… 읏-.”

멀어진다 생각했던 놈이 다시 몸을 가깝게 붙여오기 시작했다. 등 뒤로 뜨거운 체온이 느껴졌다. 더해서 둔부 부근에 묵직한 것이 맞물리는 감각이 들었다. 머리 위에서는 탁한 목소리가 나직하게 들려왔다.

“……아직. 두 배 안 끝났어.”

“이, 이제 됐, 아으, 읏-.”

골 사이에 묵직한 것이 느릿하게 문질러졌다. 맥박이 뛰는 거대한 크기가 적나라하게 닿아왔다. 허리가 흠칫 떨렸다. 내가 뭐라 말을 할 틈도 없이, 놈이 거대한 기둥을 골에 마구잡이로 비벼댔다. 그리고 그 기둥은 서서히 안으로 파고들어 오기 시작했다.

나는 곧 닥쳐올 행위를 예감하며 다급하게 말을 뱉었다.

“기, 기다……! 아흐윽!”

“하아, 늦었어.”

두툼한 것이 잔뜩 풀어진 입구에 닿음과 동시에 가차 없이 입구를 벌리고 들어왔다. 다시 안쪽이 쭈욱 벌어지는 느낌에 몸이 경련하듯 떨려왔다. 아무리 풀려 있다고 해도, 저 크기를 단번에 삽입하는 건 무리였다.

아릿한 감각에 시야가 흐려졌다. 무지막지한 그것은 쉴 틈 없이 깊숙한 곳으로 쑤셔 넣어졌다. 눈물이 볼을 타고 툭툭 흘렀다. 이제는 눈가가 따끔거리기까지 했다. 입을 벌린 채 겨우 막힌 숨을 내쉬려던 차다. 내벽이 밖으로 딸려 나갔다.

“하으- 윽! 거기, 끅! 하, 아!”

빠르게 나갔던 성기가 안쪽을 콱 찔러왔다. 깊은 곳이 채워지자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동시에 등허리를 타고 오르는 감각에 신음이 터져 나왔다. 다리에 힘이 풀리기 시작했다. 안쪽 기둥이 철퍽철퍽 안을 쳐올리자 아랫배에 힘이 들어갔다. 눕던 자세와 달리 여태 닿지 않는 부분까지도 콱콱 자극되고 있었다. 민감해진 내부는 놈의 추삽질에 맞춰 수축되었다. 그러자 뒤에 있는 놈의 허리 짓이 더 격렬해지기 시작했다.

“아, 으, 윽, 으욱…….”

놈의 움직임에, 잔뜩 흐트러졌던 가운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흐물거리는 몸 또한 가누지 못하고 아래로 내려갔다. 그러자 몸통을 붙잡고 있던 녀석이 나를 벽 쪽으로 몰아붙였다. 잔뜩 풀려 있는 몸은 놈의 움직임에 따라 결합한 채로 끌려갔다. 옮겨지는 걸음마다 배 안쪽이 추삽질이 되듯 울렁거렸다. 이어서 코앞에 황금색 벽지가 보였다.

“으…… 응.”

허리를 붙들고 있던 단단한 손이 내려갔다. 커다란 손이 방치되어 있던 아랫도리를 뭉근하게 잡아 왔다. 위아래로 기둥을 쓸어 주는 감각에 아래로 열이 확 몰렸다.

“흣……! 히, 힘들, 으흑, 아! 아! 아!”

결합한 뒷부분에서도 다시 추삽질이 시작됐다. 동시에 귀두 부근이 돌리듯이 만져졌다. 그 자극을 느낄 새도 없이 뜨거운 꼬챙이가 뒤에서 쳐올려졌다. 앞뒤로 느껴지는 강렬한 자극에 울음과 같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찌덕찌덕, 액이 섞이는 자극적인 소리와 목덜미에 닿는 탁한 숨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휘몰아치는 자극에 힘없이 벽을 붙들었다. 뒤에서 거대한 놈이 박아오는 대로 몸이 벽에 부딪히듯 흔들렸다.

“아! 아! 아! 으! 흑! 허엉, 으! 끅! 아!”

뿌옇게 흐려진 시야로 쉴 틈 없이 허리가 쳐올려졌다. 끊임없는 자극이 이어지자 고통인지 쾌감인지 모를 아찔한 전율에 사지가 덜덜 떨렸다. 움직임에 맞춰 자지러지는 신음이 마구잡이로 터져 나왔다.

몇 번이나 쥐어짜진 아래에는 정액 같지도 않은 물이 줄줄 흘러나오고 있었다. 머리가 계속해서 번쩍거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목이 따가웠고 흐르는 눈물로 인해 눈가가 쓰렸다.

“하아.”

위에서 흥분으로 가득 찬 숨소리가 들려왔다. 살이 부딪치고 액이 섞여 찌걱대는 소리가 반복적으로 귓가에 들렸다.

“-아, 아! 아! 흑!”

등에 푹신한 것이 닿을 때마다 삐걱삐걱, 움직였다.

언제 침대로 옮겨왔는지도 모르겠다. 중간에 몸이 들려 올라감과 동시에 깊어진 결합에 정신 놓았을 때인가.

“아프, 끄윽-.”

아랫도리를 만지는 손길이 따가웠다. 더는 짜질 것도 없는데 자꾸 문질러 대고 있었다. 여전히 배 안쪽까지 들어찬 것을 빼지 않고, 간간이 안을 치면서 말이다.

끝나지 않는 자극에 손가락도 움직일 수 없을 만큼 지쳐 버렸다. 겨우 바르작거리며 다 쉰 목으로 꺽꺽대는 게 다다.

깊숙한 곳이 한 번 더 철퍽 쳐올려졌다. 몸과 함께 시야가 어지럽게 흔들렸다.

그때, 위에서 허리 짓을 하던 놈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제야 할딱거리는 숨을 뱉었다.

“하으…….”

나는 화끈거리는 눈가를 힘겹게 들어 올렸다. 그러자 위에 있는 놈이 옆으로 손을 뻗더니 선반 위에 있는 유리컵을 잡았다. 유리컵 안에는 묽은 정액이 입구 부분을 타고 바닥까지 찐득하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쥐어짜질 만큼 짜졌는데도 여전히 유리컵 안에 액은 바닥 언저리를 돌고 있었다.

놈은 유리컵을 잡고 대수롭지 않게 내 귀두 부근에 가져다 댔다. 차가운 유리의 감촉에 나는 왈칵 눈물이 차올랐다.

“이, 이제, 끅, 그, 그만해…….”

내가 제대로 말을 뱉었는지도 모를 정도로 말이 떠듬떠듬 나왔다.

놈이 귀두 부근을 손가락으로 쓸며 유리컵 안에 찔끔찔끔 액을 넣었다. 몇 방울을 안에 넣더니, 묽은 액이 담긴 유리컵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그제야 놈은 나를 내려다봤다.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엉망인 내 얼굴로 방금 귀두 부근을 문질렀던 손이 다가왔다. 놈의 포악한 행동과 다르게 다정함을 한껏 담은 손길로 눈물을 닦아댔다.

“하지만 포션 역할 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양인걸.”

다정한 껍질을 쓴 악랄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였다.

자비 없는 사탄의 목소리에 버티고 있던 정신이 점점 아득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그쯤, 내부에 들어 있는 거대한 것이 다시 뒤로 빠지기 시작했다. 살짝씩 쳐올리며 가볍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의 허리 짓에 끈 떨어진 인형처럼 몸이 흔들렸다.

“흐으…….”

나는 힘겹게 시선을 내렸다. 판판한 배에는 놈의 정액이 잔뜩 싸질러져 있었다. 놈은 내가 무기로 변하면 안 된다며 배에다가 족족 싸고 있었다. 말라붙은 정액을 망연하게 보다 흔들리는 천장을 올려다봤다.

‘……아아, 이놈을 진작 방에서 내쫓아야 했는데.’라는 생각을 끝으로 정신이 점차 혼미해져 갔다.

쾅-!

시야가 차차 감길 때다. 현관문에서 커다란 소리가 들려왔다. 차가운 바람이 복도 밖에서부터 들어와 피부에 닿았다. 동시에 거침없이 침대 쪽으로 다가오는 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설마 해서 들렀더니…….”

다비 놈이 우뚝 움직임을 멈추었다. 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것이 빠지기 시작했다. 한동안 채워져 있던 게 텅 비는 감각에 몸이 절로 움츠러들었다. 이어서 놈의 것이 완전히 빠져나갔다.

“-기복 님을 죽이려 작정했습니까?”

“그럴 리가. 마저 해야 하니까 꺼져.”

“……지금 상태를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옵니까.”

화를 억누르는 듯한 루스의 얼굴이 침대와 가까운 곳에서 보였다.

나는 눈을 돌려 그 옆에, 맨몸으로 뻔뻔하게 몸을 일으키는 다비 놈을 쳐다봤다.

“신경 꺼. 네놈 따위 필요 없을 정도의 약으로 치료해 줄 거니까.”

“……장난합니까? 혹여, 기복 님을 망가뜨리기라도 한다면 그쪽은 제 손에 죽습니다.”

커다란 두 놈이 당장이라도 서로의 목을 물어뜯을 듯한 기세로 대치하고 있었다.

“그 전에 네 목숨이 끊길 테지.”

“시험해 보죠. 파티에서 당장 나가십시오.”

“말했다시피, 파티는 우리 사이에 낀 불청객이 나가야지.”

낮게 깔린 그들의 목소리가 방 안을 채웠다. 그와 동시에 걸음 소리 하나가 저 멀리서 들려왔다. 소리를 따라가자 열린 문과 함께 아까보다도 스파크가 강하게 튀는 손잡이가 보였다. 루스가 들어올 때 기어코 망가뜨린 모양이다.

스파크 튀는 문 너머, 복도 바닥에 그림자가 지고 있었다. 터벅터벅, 묵직한 걸음 소리가 멈추더니 호실 문만 한 커다란 녀석이 문 앞에 보였다.

놈은 훤히 보이는 방 안을 빠르게 훑었다. 그러다 무표정하게 이쪽을 쳐다봤다. 짧은 사이 상황 파악을 끝낸 것처럼 방 안으로 발을 들였다.

느릿하게 방 안으로 들어서는 또 한 마리의 맹수를 보니 안 그래도 피곤하다 느낀 공간이 이젠 숨이 막히기까지 했다.

“…….”

앞에 있는 다비와 루스는 말을 멈춘 채 내게 다가오는 자이드를 시선으로 좇았다.

자이드는 두 놈의 칼날 같은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걸어와, 침대에서 멀지 않은 곳에 멈춰 섰다. 이어서 집요한 호박색 눈동자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자이드의 시선과 동시에 두 사람의 시선도 내게 쏟아졌다. 세 사람의 시선에 몸이 더워지기 시작했다.

‘……망할…….’

……전라 상태로 태연하게 말싸움을 하고 있는, 철판 두꺼운 다비 놈과 나는 달랐다.

심지어 전라 이상으로 엉망이 된 내 상태를 알고 있어, 차마 태연한 기분이 들지 않았다. 침대에 맥없이 널브러진 허연 몸 곳곳에 액이 묻어 있을 것이다. 또, 다비 놈이 꽉 쥐는 바람에 허벅지에는 손자국이 진하게 남았을 것이며, 힘없이 벌려진 양 다리, 그 사이로 늘어진 그것 등…… 조금 전에 어떤 행위를 벌였는지 누구라도 추측이 가능한 모양새였다.

그리고 눈을 들 때마다, 자꾸만 유리컵이 시야에 걸리고 있었다. 밀려오는 수치심에 혀를 깨물고 싶었다. 바닥으로 떨어진 황금색 이불로 몸이라도 가리고 싶건만, 팔이 침대에 붙은 것처럼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

쏟아지는 시선과 정적에 내장이 오그라들 것만 같았다. 그래서 눈이라도 감으려던 차다. 가까이 있던 자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동참하겠다.”

고저 없는 담담한 목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나는 멍하니 자이드를 쳐다봤다. 뜬금없는 소리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다 이어서 들려오는 다비의 목소리로 빌어먹을 말의 뜻을 이해해 버렸다.

“이건 나와 기복이, 둘만의 섹스야.”

“함께하겠다.”

“흥미롭지만- 안 돼. 기복이는 온전히 내게 집중해야 하거든.”

……시발. 뭘 함께하겠다는 건데! 정신 나간 대화에 욕을 퍼붓고 싶었다.

“……흐으.”

그러나 수분 하나 없이 비쩍 말라 버린 목에서는 바람 빠지는 소리만 터져 나왔다. 더해서 목구멍 안쪽이 찌르듯 아파져 왔다. 그럴 만했다. 마구잡이로 소리를 질러댔으니 목 상태가 말이 아닐 것이다.

따가운 목에 눈가를 찌푸릴 때, 루스의 서릿발 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만의 기복 님이 아닐 텐데요.”

“너의 기복이는 더욱 아니지.”

“함께하지 않을 거면 그대도 안 된다.”

놈들의 날 선 목소리에 다시 침대 위를 쳐다봤다. 침대와 가까운 곳에서 커다란 세 놈이 서 있었다. 내 눈에는 도긴개긴인 놈들이건만, 세 놈은 서로에게 으름장을 놓고 있었다.

그 질리는 광경을 보고 있으니 머리마저 지끈 아파져 왔다.

“거슬리네.”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끊임없이 공격을 가하면 제 마나가 소진될지, 파티가 깨질지, 시험해 볼까요.”

“위협이 된다면 적으로 인식하겠다.”

나는 세 사람의 몸에서 스멀스멀 마력이 피어오르는 것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또, 또 왜 이렇게 되는 건데……!’

놈들을 제지하려고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러나 바람 소리만 목을 통해서 나올 뿐이었다.

놈들이 서서히 마력의 부피를 키우는 게 보였다. 몸이 압박되는 느낌이 들었다. 동시에 방이 진동하듯 떨려왔다. 바닥이 휘청, 기울자 안에 있는 물건들이 한쪽으로 쏠렸다. 각 가지 마력의 영향으로 방, 아니 배 전체가 심하게 흔들렸다.

미친놈들 때문에 배가 추락할까 봐 몸이 굳던 차다.

쨍그랑-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숨을 들이켰다. 뭐가 깨진 듯한 소리를 듣자 무서운 예감이 스쳤기 때문이다.

‘서, 설마…….’

제발 그 소리는 아니길. 잔뜩 굳은 얼굴로 삐걱삐걱 옆을 쳐다봤다. 심장이 두렵다는 듯이 쿵쾅거렸다.

“…….”

무언가가 올려져 있던 탁자가 비어 있었다. 나는 탁자의 형태를 따라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마침내 바닥 아래에 산산조각이 난 유리컵을 발견했다. 날카로운 파편들이 대리석에 깨져 있었다. 더해서 그 안에 담겨 있던 찐득한 액들이 바닥에 튀어 있었다.

그 엉망이 된 장면을 눈에 담자 시야가 아득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한편으로, 저 포션이 정말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것 같다. 그래서 젖소처럼 액이 쥐어짜지는 순간을 원망 없이 견뎌냈다.

그렇게 놈의 말이 일리가 있다며, 언젠간 쓰일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며, 나도 모르게 제법 수긍을 한 듯하다. 그러니까 현재, 바닥에 쏟아진 정액을 보고 심장이 추락하는 기분을 느끼는 거겠지…….

“…….”

더는 놈들이 뭐라 뭐라 지껄이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저 속에서 큰 덩어리가 울컥하고 올라오는 감각만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시발.’

……만신창이가 된 보스한테 함께하자는 소리를 지껄이는 놈도 그렇고, 말라 죽어가는 사람 붙잡고 욕구를 표출하는 놈도 그렇고, 너덜거리는 사람 앞에서 마력을 사정없이 뿜어대고 싸우려는 놈도 그렇고…… 다 똑같다.

힘들어 죽겠는 사람 앞에서 싸워대는 놈들을 보고 있으니, 속이 끓다 못해 머리에서 무언가가 뚝 끊기는 기분이 들었다. 빌어먹을 놈들이 신랄하게 마력을 퍼부어대 숨 쉬는 것조차 힘겨워지는 걸 느낀 순간이다.

“-나가! 나가! 다 나가라고! 끅-.”

나는 목이 찢어지든 말든 놈들에게 바락바락 소리를 질러댔다. 꺽꺽, 혹사당한 목에서 제대로 된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비릿한 피 맛이 입 안에 맴돌았다.

“…….”

“…….”

“…….”

내 고함에 놈들이 움직임을 멈췄다. 그러더니 일제히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바위 같은 세 놈의 시선을 마주하자, 지랄발광하는 한낱 달걀이 된 기분이 들었다.

“……시발…… 내가, 내가 나간다…….”

목소리가 갈라질 정도로 목이 엉망이었지만 걷잡을 수 없는 빡침에 욕이 계속 나왔다.

“흐윽, 개 같은…….”

절대 힘이 들어가지 않을 것 같은 몸이, 화가 머리끝까지 나니까 초인적으로 움직여졌다.

나는 엉금엉금 침대 밖으로 발을 내렸다. 그러자 앞에 있는 놈의 손가락이 움찔거렸다. 이어서 몸을 확 일으키자 세 녀석이 눈을 크게 뜬 채 나를 보고 있었다.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놈들의 놀란 낯짝을 가까이서 보니 더욱 감정이 북받쳐 왔다.

‘……시발…… 내가 별난 것 같잖아…….’

나는 눈가를 벅벅 문지르며 문가를 향해 비척비척 걸어갔다. 다리가 경련하듯 떨려 왔지만 지금은 다리가 부러져도 저놈들과 한 공간에 있고 싶지 않았다.

“-나체로 나간다는 건가.”

문으로 걸어가던 그때, 뒤에서 자이드의 무감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경 꺼……!”

멈칫하던 나는 울음 섞인 쉰 목소리로 떠듬떠듬 말을 뱉었다. 그러고서 입구 쪽 바닥에 널브러진 가운을 향해 걸어갔다.

‘망할, 망할…….’

한껏 화를 내다 보니 내가 지금 알몸이라는 사실을 망각해 버렸다. 그리고 한 놈이 태연하게 그 사실을 알려 주었다.

‘저 정신 나간 새끼들은 암만 지랄해도 타격을 안 받는 거냐고…….’

속 터지는 기분을 느끼며 절뚝절뚝 문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바닥에 방치되어 있는 가운 앞에 멈춰 섰다. 뒤에서 진득하게 달라붙는 시선들이 느껴졌다. 입맛을 다시는 소리가 들리자 턱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어금니를 깨물며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냉큼 손을 뻗던 때다.

“…….”

몸속에 있는 마력이 고무줄로 팽팽하게 잡아당기듯 띠잉- 울렸다. 그러더니 몸이 어딘가에 부딪히는 감각을 느꼈다. 동시에 푹신한 카펫이 눈앞에 보였다.

빠르게 다가오는 걸음 소리를 끝으로 정신은 까만 곳을 향해 빨려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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