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 파티원 [도적] (5/11)

5. 파티원 [도적]

머리에는 두건을 쓰고, 얼굴은 천으로 가린 수상한 남자 세 명이 보였다.

그들은 날렵해 보이는 몸과 딱 맞는 어두운 옷을 입고 있었고, 그 사이로 반짝이는 금목걸이를 차고 있었다.

-뭐, 뭔데.

나는 갑작스레 나타난 닌자 차림의 놈들을 굳은 채 쳐다봤다. 놈들은 무기로 변한 내가 아닌, 엎어진 다비 놈에게 일제히 시선이 가 있는 상태였다.

세 놈이 다비에게 다가가 허리를 숙였다. 그들은 커다란 다비의 몸을 잡고 짐짝처럼 들었다. 다비를 뒤집자 내려간 바지로 인해 흉측한 것이 햇살 아래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한 놈이 경련하듯 몸을 떨며 물러났다.

“으헉, 이 새끼, 바지가 내려가 있어!”

한 녀석이 기겁하며 소리치자, 천으로 눈가만 내놓고 있던 두 놈의 눈썹이 험상궂게 일그러졌다.

“시발, 말도 아니고 뭔 놈의- 몬스터 보고 딸이라도 쳤나.”

“사냥터에서 딸 치면 쓰나……. 방심하니까 이렇게 뒤통수나 처맞는 거지.”

낯설고 투박한 목소리로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 이야기를 듣다 보니, 세 사람은 다비 놈을 몬스터에게 발정하는 변태 정도로 취급하는 듯하다.

동감한다. 그놈은 변태가 맞다. 그 취급에 대해 깊이 공감하며 수상한 놈들을 살폈다.

한 놈은 보따리를, 한 놈은 몽둥이를 손에 들고 있었다.

저 몽둥이로 다비 놈의 뒤통수를 친 모양이다.

나는 조금 더 시선을 들어 놈들의 머리 위를 봤다. [도적]이라는 표식이 놈들의 머리 위에 떠 있었다. 옆으로 눈동자를 돌렸다. [Lv. 42], 나보다 낮은 레벨이었다. 하지만 번듯이 직업이 있는 놈들이다. 더군다나 세 놈은 파티가 맺어져 있었다.

-지금 변신 풀면 위험하겠지…….

저 수상한 자들 앞에 맨손으로 나타나는 건 무모했다.

무엇보다…… 다비 놈을 기절시킨 놈들이다. 마력이 없긴 해도 기본 능력치가 있는 다비를 단번에 기절시킨 걸 보니, 좋은 무기라도 갖고 있는 모양이다.

한마디로…… 이길 승산이 없었다.

그사이, 도적놈들은 다비 놈이 떡하니 내놓고 있는 흉기를 피해 몸을 더듬기 시작했다. 이내 마땅한 게 없는지 바지 안에 골드만 한 움큼 집어 보따리 안으로 넣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돈만 탈탈 털고 있을 뿐, 생명을 위협하는 짓은 하지 않았다.

-……안 풀어도 되겠네.

모양새를 보아하니 골드만 챙겨서 갈 것 같다. 그렇다면 무기로 있다가 놈들이 사라지면 변신을 푸는 편이 안전할 것이다.

그렇게 결론을 내린 나는 나무에 덜렁거리고 있는 밧줄 역시 이놈들의 짓이라는 것을 쉽게 짐작했다.

“방심 안 했어도, 보스의 마력이 담긴 몽둥인데 무조건 스턴 걸리지.”

“그것도 맞지. ……에라이, 챙길 게 골드뿐이냐. 이런 사냥터에 몸만 덜렁 온 놈은 생전 처음 본다.”

“딸 치는 놈도 처음이다. 씨발, 박탈감 느끼게- 더는 보고 싶지 않으니까 챙길 거 다 챙겼으면 가자.”

도적 하나가 다비 놈의 아래를 매우 불쾌하다는 듯이 흘기다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다른 놈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켰다.

다행히 다비 놈의 흉기 덕에 놈들이 빠르게 자리를 뜰 듯하다.

그렇게 안도를 하며 얼른 놈들이 가기를 기다렸다. 시야를 올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곧 발소리가 멀어지리라 생각했다.

-……!

그러나 멀어지기는커녕, 발소리가 가까워지더니 몸이 덜렁 올라갔다.

“어? 야야, 여기 딸 친 놈 무기가 떨어져 있는데?”

도적 중 하나가 나를 들고 나머지 놈들에게 다가가 보여주기 시작했다. 눈만 빼꼼히 내놓고 있는 세 놈의 얼굴이 일제히 나를 내려다봤다.

“오. 본새는 나네. 그런데 이렇게 생긴 무기도 있었냐?”

놈들의 쏟아지는 시선에 나는 심장이 오그라들었다.

‘망할, 망할…… 제발 그냥 가라고.’

부디 무시하고 가 줬으면 했지만 한 놈이 보따리 쥔 손을 들어 올렸다.

“몰라. 그냥 넣어.”

그러더니 보따리 입구를 쫙 벌렸다.

-어어…….

세 명이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과연 이 상황에서 변신을 푸는 게 맞을까, 하지만 풀지 않으면 보따리에 넣어질 것이다. 망설이고 있던 차에 몸이 보따리 안으로 쑤셔 넣어지기 시작했다.

한 손에 들릴 정도로 작아 보이던 보따리 안으로 커다랗고 길쭉한 칼이 쑥쑥 넣어지고 있었다. 동시에 점점 시야가 까맣게 변해 갔고 빛이 들어오던 보따리의 입구가 순식간에 닫혔다.

-…….

……우물쭈물하다 보따리 안으로 꼼짝없이 집어 넣어져 버렸다.

나는 망연한 눈으로 보따리 입구로 추정되는 곳을 쳐다봤다. 빛 하나 들어오지 않고 굳게 닫혀 있다. 이어서 보따리가 덜렁 움직이는 게 놈들이 이동을 하고 있는 듯하다.

……어디로 가는 걸까……. 생각하던 차에 밖에서 희미하게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장소를 알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귀를 기울였다.

“전사용 칼이라 아쉽네.”

“도적용이면 보스가 사용하면 되는데……. 보스에게 딱 맞는 무기는 언제 발견하려나.”

“없어도 보스는 강하잖아.”

“있으면 더 강하잖아. 아니면 이 칼을 녹여서 도적용으로 손질이나 해 볼까.”

“오오, 그거 좋다. 불에 달궈 보자.”

나를 불에 달궈 버린다는 말을 듣자 정신이 번쩍 드는 듯했다.

이 도적들이 어떤 놈들인지도 모르는데 뭔 생각으로 넋 놓고 있었나 싶다. 그래도 아까 그 장소는 사방이 뚫려 있으니 도망을 쳐서 살아남을 확률이라도 있지, 만약 어디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면 그거야말로 끝장이다.

-풀려라! 풀려! 변신 풀려!

나는 다급하게 변신을 풀기 위해 강한 의지를 내비쳤다. 그러나 ‘풀려라!’ 하면 풀리던 평소와 달리 몸은 여전히 무기 그대로다. 몸 안에 있는 마력도 잠잠했다.

다시 한번 변신을 풀려고 시도를 해 봤지만, 풀릴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어, 뭐, 뭐야. 어떻게 된 거지…….

이 방법이 아닌가……? 하지만 루스가 풀릴 의지만 있으면 풀린다고 했는데. 그리고 그렇게 해서 여태 변신이 풀렸다.

알 수 없는 상황에 멍하니 있던 나는 이대로 있다가 불에 달궈지면서 개죽음을 맞이하는 거 아닌가, 라는 무시무시한 생각이 스쳤다.

-……그, 그래도 전설의 무긴데…….

설마 불에 달궜다고 죽겠냐 생각하다 변형을 한다니 몸이 기형적으로 틀리는 건 아닐까 싶은 더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을 때다. 다시 밖에서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요즘 다른 도적단 놈들 움직임이 심상치 않던데.”

“보스의 강함을 모르는 멍청한 놈들이지.”

“와라 그래. 보스한테 개죽음이나 당할걸. 보스처럼 마력이 넘치는 사람은 어느 도적단에도 없을 테니까.”

“그렇지. 이 보따리만 해도 보스의 마력이 담겼단 이유로 제한 없이 아이템을 넣을 수 있게 됐잖냐.”

“이 보따리 말이야, 신선도 유지 기능도 있는 거 아냐?”

“알지. 예전에 죽은 몬스터를 한 마리 넣어 두고 한 달 뒤에 꺼냈는데, 꺼낼 때 이어서 피를 토해내고 죽더라. 난 처음에 시간 정지 기능인 줄 알았다니까.”

“느리게 가는 것일걸? 아예 안 움직이진 않던데.”

놈들의 대화를 듣자 나는 더욱 심각해졌다.

그럼 이놈들이 날 꺼내면 바로 사람으로 변할 수도 있다는 거잖아…….

-……차라리 풀지 말걸. 망할. 망할.

그럼 진작 풀어서 아까 도망을 갔지! 괜히 우물쭈물하다가 이도 저도 아닌 상황이 되어 버렸다. 아니, 최악의 상황이 되어 버렸다.

무기가 갑자기 사람으로 변한 것도 수상쩍은데, 사람으로 돌아간다면…… 아래를 내리고 있을 테지. ……좋은 반응은 안 나올 듯하다.

그 상태로 무기도 없는데 다짜고짜 이놈들이 날 죽이려 들면, 더군다나 사방이 막힌 곳이라면…… 나는 진짜 끝장이다.

-……빌어먹을.

일단은 나는 놈들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파악이라도 하려고 소리에 집중했다.

밖에서는 모래가 바람에 흩날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일단 아직 사막인가 보다.

하기야, 다비와 루스랑 파티가 맺어진 상태로는 일정 지역을 못 벗어나니, 아마 이놈들도 사막 지역 이상으로 못 움직일 것이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루스가 찾아주길 기도나 할까…….

그렇게 생각을 하던 차에 도적놈들의 걸음 소리가 울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시 소리에 집중하자 발을 끄는 걸음 소리가 깊게 울려왔다. 재잘재잘 떠드는 도적놈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조금 더 감각에 집중하자 후덥지근했던 아까와 달리 보따리의 안이 에어컨이라도 튼 것처럼 시원해졌다. 더해서 바람 소리가 깊은 곳으로 빨려 들어가듯 휑휑 들려왔다.

-동굴? 아닌가……?

동굴처럼 습한 느낌은 안 드는데. 혹은 동굴과 비슷한 곳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소리로 보아 지붕이 있고 아주 넓은 곳일 거라 짐작한다.

그렇게 나는 야외가 아니란 것을 눈치챈 뒤 속이 바짝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보스 방에 들어갈 때마다 긴장돼 죽겠다.”

“다 그렇지. 보스가 그냥 강한 것도 아니고, 포스도 장난 아니잖아.”

“야야, 그만 떠들고 들어가자. 오늘 수확 보여드려야지.”

왁자하게 떠들던 아까와 달리 목소리가 한층 작아진 상태로 놈들이 속닥거렸다. 그리고 그들의 목소리는 공간감 있는 곳에 메아리치듯 울리고 있었다.

-도적 소굴…… 그런 건가.

세 사람이 도적이라는 점, 맺어진 파티, 그리고 보스, 보스 하는 대화를 듣고 어디 도적단의 소굴에 들어왔구나, 를 대강 짐작했다.

그리고 ……이놈들은 지금 강하디강한 자기네들 보스에게 가고 있는 것 같다.

“문 연다.”

덜그럭덜그럭, 보따리의 움직임이 일순 멈추더니 긴장된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 그리고 보따리가 작게 흔들렸고 뒤이어 덜컹, 소리가 났다.

무게감 있는 문이 열리듯 딱딱한 바닥과 묵직하게 마찰하는 소리가 났다.

“-다, 다녀왔어. 보스.”

놈들이 합창하듯 삐걱거리는 목소리와 함께 보따리가 또 덜그럭 흔들렸다. 이내 어디 딱딱한 곳에 툭, 놓이는 게 느껴졌다.

“오, 오늘 골드를 두둑이 챙겨왔어. 보스가 준 스턴 몽둥이 덕분에 요즘 수완이 조, 좋아.”

애써 태연하게 말하던 도적놈의 목소리가 끝으로 갈수록 잘게 떨려왔다.

“…….”

말을 끝마쳤음에도 상대 쪽에서 아무런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그러자 아까보다 더 바짝 긴장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차, 참! 시, 신기한 무기가 있길래 챙겨왔어. 전사 무긴데, 보스가 마음에 들면 불에 달궈서 변형하려고!”

또 정적이 흘렀다. 꼴깍 침 넘어가는 소리가 넓은 공간에 울렸다.

나는 저놈들이 뭔 원맨쇼를 하고 있나 생각했다.

“-왜.”

그때, 메마른 땅에서 들려오듯 아주 낮고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게 매번 확인을 받는 건가.”

의문을 제기하는 상대의 말에 당황한 듯한 도적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그야. 보, 보스니까! 단원들이 뭐 하고 돌아왔는지는 확인해야지!”

“그렇군.”

도적 한 놈이 더듬더듬 말을 했고, 앞에서 순순한 대답이 들려왔다. 이후 안도를 하는 듯 숨소리가 들려왔다.

도적놈이 바스락바스락 무언갈 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보따리가 흔들렸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던 까만 보따리 안에 빛이 점점 들어왔다.

위를 바라보자 빛 틈으로 손 하나가 불쑥 들어왔다.

-저, 저리 가……!

나는 놈의 손을 피하려고 몸을 이리저리 흔들었다. 그러나 작게 달싹거릴 뿐 무기로 변한 상태로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결국 손잡이 부분이 도적놈의 손에 덥석 잡혀 버렸다. 몸이 점점 공중으로 떠올려지더니 빛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나는 시야를 질끈 차단했다. 빛이 점점 몸을 덮칠 때마다 정신이 어딘가로 아득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아, 안 돼, 안 돼, 푸, 풀린다고-.

멀어지던 정신이 불현듯 선명해짐과 동시에 온몸의 오감이 살아났다. 그러자 바닥에 자빠지는 둔탁한 소리와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피부로 닿는 서늘한 공기에 질끈 감았던 눈을 서서히 떴다.

“으헉!”

“헉-.”

“사, 사람으로 변, 변-.”

아까 봤던 닌자 세 놈이 눈을 크게 뜬 채로 나를 보고 있었다. 한 놈은 바닥에 나자빠진 상태다.

나는 절망하며 닌자 놈들을 쳐다봤다. 놀란 놈들의 눈이 천천히 내려가더니 하나같이 눈썹이 와락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들의 시선이 향하는 곳을 따라 눈동자를 내렸다.

“-씹!”

나는 휑한 다리 아래, 발목까지 내려간 바지를 확인하고 황급히 허리춤으로 끌어 올렸다.

‘망할. 망할! 인간적으로 변신이 풀리면 바지는 입혀 주도록 설정을 해 줬어야지! 매번 이렇게 우스운 꼴을 남에게 보여야 하냔 말이야……!’

속으로 욕을 짓씹으며 후끈거리는 얼굴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기겁하던 놈들의 눈이 잔뜩 가늘어진 채 경계 어린 눈빛을 했다.

“변장술로 감쪽같이 우릴 속였어!”

“어느 도적단 놈이냐?!”

“순순히 정체를 밝히지 않으면 곱게 죽진 못할 거다!”

……저놈들은 나를 다른 도적단의 일원으로 보고 있는 듯하다.

천 밖으로 드러난 놈들의 눈에서 적대감을 확인한 나는 얼른 눈동자를 돌렸다. 도망칠 공간이 있는지 빠르게 살폈다.

주변은 로마에 온 것처럼 거대한 원기둥이 사방에 박혀 있었다. 더해서 높은 천장, 휑한 감이 있는 황토색의 넓디넓은 중동식 방 풍경이 보였다. 그러다 도적놈들이 밟고 있는 카펫 끝에, 두툼하고 거대한 돌 문을 발견했다. 놈들이 들어온 입구가 저 문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틈을 보고 저 문으로 미친 듯이 달려야겠다고 생각하며 다시 세 놈을 쳐다봤다.

“우리 본거지를 알아내려 했나 본데, 안타깝지만 살아서 못 나갈 거다.”

“네놈은 죽음을 자초한 거랑 다름없어.”

“지금 네놈이 있는 곳은 우리 보스 앞이라고.”

저 오합지졸 놈들을 잔뜩 경계하며 틈을 노리고 있던 차다. 마지막 녀석의 말에 나는 또 다른 한 사람이 방 안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내가 유일하게 살펴보지 않은 뒤통수 너머를 자각하자 섬뜩한 느낌을 받았다.

뒤에서 천이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몸을 일으킨 듯한 소리와 함께 느릿하고 여유로운 걸음이 뒤에서 터벅터벅 울려댔다.

마치 저승사자가 걸어오는 듯 뒤통수에서 강렬한 압도감이 느껴졌다.

“……!”

그 순간, 나는 머릿속에 아주 강렬한 적신호가 울렸고, 몸을 바닥 옆으로 무작정 굴렸다. 정말로 본능이었다.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들었을 때 내가 서 있던 바닥이 움푹 파여 있는 게 보였다. 뒤에 있던 도적놈들이 주춤 물러나는 소리가 들렸다.

바닥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쳐다봤다. 잠깐이라도 늦었으면 파인 바닥처럼, 흔적도 없이 녹아 버렸을지도 모르겠다. 그 사실을 눈치채자 머리끝까지 털이 쭈뼛 섰다.

“-감이 좋군.”

뒤에서 아주 낮고 살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벌렁거리는 심장으로 인해 호흡을 가쁘게 뱉을 때다. 눈앞에 그림자가 졌다.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내 발끝에 이집트 샌들과 비슷한 것이 보였다.

위에서 쏟아지는 강렬한 시선이 느껴졌다. 온몸이 바닥으로 짓눌리는 듯했다. 심장 소리가 머리까지 울려댔다. 고개를 뻣뻣하게 들자 앞에 있는 놈의 탄탄한 구릿빛 다리가 보였다.

“…….”

침을 꼴깍 삼키며 시선을 올렸다. 널널한 검은 반바지를 지나쳐 떡 벌어진 어깨에 가운처럼 걸쳐진 까만 상의가 보였다. 그 사이로 세밀하게 짜인 복근이 훤하게 보이고 있었다.

심상치 않은 체격에 긴장을 하며 단단한 목을 지나쳐 조금 더 고개를 들어 올렸다.

커다란 키 때문에 고개를 쭉 올린 후에야 놈의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의 눈을 보자 몸이 얼어 버렸다.

“흡.”

사막과 닮은 척박한 호박색 눈동자가 무감하게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눈은 야생의 본능과도 닮아 있었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엄청난 위압감이 느껴졌다. 숨을 곳 없는 초원 한복판에서 야생의 흑표범을 일대일로 마주한 사람의 심정이 이럴까 싶다.

다물려져 있는 굳은 입부터 얼굴 어디에도 전혀 표정이란 게 보이지 않았다. 사람인가 싶을 정도로 말이다.

침도 못 삼키고 그를 쳐다보고 있자, 그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나를- 해하려 온 건가.”

동굴처럼 낮고 조금 느릿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의 기운에 압도되어 그의 말이 한 박자 늦게 머리에 입력이 되었다.

야생의 기운을 풀풀 풍기는 남자가 고개를 살짝 기우는 모습에 황급히 대답했다.

“저, 전혀! 일방적으로 보따리에 넣어졌을 뿐이라고……!”

내 말에 남자의 눈동자가 스르륵 움직였다. 여전히 표정이 없었다. 저러다가 왁- 하고 달려들어서 목을 뜯어 버릴 것만 같았다.

그의 시선은 나의 얼굴을 타고 머리 위를 향했다. 남자가 내 표식을 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자 나 역시 그를 파악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날카로운 눈매 위쪽으로 내려온 그의 머리카락을 지나쳐 시선을 올렸다.

남자의 흑빛 머리 위에는 [도적]이라는 직업이 붙어 있었다. 그리고 옆에는 [Lv. ?]라는 아주 익숙한 레벨이 보였다.

……어쩐지 서늘한 예감이 가슴 안을 스쳤다.

‘에이…… 아닐 거야……. 내가 아는 두 놈이랑 다르게 [자이드]라는 평범한 이름을 갖고 있는걸.’

더해서 앞에 있는 남자는 이미 파티가 맺어진 상태였다. 아마 뒤에 있는 도적놈들과 맺은 것 같다.

그러니까…… 앞에 있는 남자는 그놈들이랑 좀 다르다고…….

“보스! 무기로 변신해서 우리 본거지를 알아내려 잠입한 걸 거야!”

“알량한 혓바닥에 속아 넘어가선 안 돼! 요즘 적들의 낌새가 심상치 않다고!”

앞에 있는 남자가 가만히 있자, 뒤에 있는 졸개 놈들이 쫑알쫑알 한마디씩 소리치기 시작했다.

“저놈의 소속을 불게 만들어서 뿌리를 잘라야 해!”

졸개가 말을 한 번 더 뱉었다. 동시에 내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뻘뻘 흘러내렸다. 그들의 말에 내 뒤쪽으로 향했던 남자의 시선이 다시 나를 내려다봤기 때문이다.

“너는 적인가.”

저런 살육으로 가득 찬 눈빛으로 말하면 설령 적이라고 해도 누가 ‘예.’라고 말하겠나 싶다.

“표, 표식으로 보다시피…… 난 선량한 무기 상인인걸…….”

나는 최대한 선량하게 보이려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목이 삐쩍 말라와 마른침이 절로 꼴깍 삼켜졌다.

안 믿으면 어쩌지 싶었는데 남자는 내 말에 의외로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보, 보스! 믿으면 안 돼!”

“저 자식 레벨을 봐! 평범한 무기 상인이 레벨이 100일 리가 없잖아!”

“저놈은 바지까지 내려가 있었다고!”

……썅, 그게 뭔 상관인데!

뒤에서 시끄럽게 한마디씩 하는 놈들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니 속에서 욱하는 게 올라왔다. 좀 닥치라는 말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내 처지를 깨닫고 화를 삭여야만 했다.

그사이 앞에 있는 남자의 눈동자가 졸개들의 말에 반응하듯 스르륵 움직였다. 눈빛이 나를 어떻게 할지 가늠하는 것 같았다. 더해서 그 가늠은 뒤에 있는 놈들의 말에 따라 이리저리 바뀌고 있는 듯하다.

그 모습을 잠시 보다 보니, 아까 내 말에 남자가 순순히 끄덕였던 게 떠올랐다.

‘……어라……?’

표정이 없어서 몰랐는데…… 설마 이 보스라는 자는 의외로 아주 잘 선동이 되는 타입인 건가.

그렇다면- 뒤에 있는 졸개들 주둥이만 어떻게 하면……. 아니지, 아니지. 보스라는 이 남자한테 입만 잘 털면 아주 안전하게 빠져나갈 수 있지 않을까…….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놈들의 의심에서 벗어나기 위해 변명하듯 말을 뱉었다.

“다양한 무기들을 사용해 본다고 레벨이 높아진 거니까 오, 오해 마.”

뒤에 있는 놈들이 말도 안 된다는 투로 득달같이 소리쳤다.

“우리가 자주 가는 곳에 일부러 있었으면서!”

“가져가길 기다린 사람처럼 변장했던 주제에!”

“그것도 적군들이 움직이고 있는 이 시기에!”

뒤에 있는 졸개들의 목소리가 큰 공간에 쩌렁쩌렁 울렸다.

……저 초 치는 졸개 놈들만 없으면 앞에 있는 무서운 남자를 설득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어떻게 저 시끄러운 놈들을 보내냔 말이지…….

“보스, 저놈을 고문해서 진실을 토해내도록 만들어야-!”

졸개들이 계속해서 떠드는 소리에 잠자코 듣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시끄럽군.”

그의 입에서 나온 낮은 목소리에 졸개들이 숨을 ‘헙.’하고 들이켰다.

나는 앞에 있는 남자를 쳐다봤다. 여전히 무표정했다. 시종일관 표정이 없어 감정을 알 수가 없었다. 기분이 나쁜 건지는 알 수는 없지만, 일단 저놈들이 닥쳐서 다행이다.

잠시 입을 다물었던 졸개들이 아까보다 한층 쪼그라든 목소리로 조심스레 말을 뱉었다.

“시, 시끄러웠지? 미, 미안.”

“저, 저놈은 보스가 알아서 해, 해 줄 거라 믿어! 우리는 보스 뜻에 따를 테니까!”

“그, 그럼 우리는 나가 볼게.”

발발 떨고 있는 목소리에 나는 뒤를 흘끗 돌아보았다. 그러자 뒤에 있는 도적 세 놈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놈들의 드러난 피부가 잔뜩 파랗게 질려 있었다. 눈동자는 보스라는 남자의 눈치를 한껏 보고 있었다. 옹졸한 발걸음이 문가와 가까워지자 놈들은 냅다 문을 열고 밖으로 휑하니 나가 버렸다.

쿵.

커다란 문이 닫히자 그 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나는 그들의 날쌘 움직임을 보며, 한마디 했다고 뭐 저렇게 쫄아 버리나 싶은 마음이 들었다.

‘졸개들은 의외로 자기들 보스가 얄팍한 귀를 가졌다는 것을 파악 못 했나? 아니지, 그렇게 눈치 빠르게 떠들어 대는 걸 보면 모를 리가 없을 텐데…….’

얼결에 저놈들을 아주 쉽게 떼어냈다고 안심하며 앞을 돌아봤다.

“…….”

……그래, 척 보기에도 어마무시하게 위협적인 남자가 지척에서 시끄럽다고 하면 오금 저리긴 하겠네…….

피 냄새가 가득한 남자의 모습을 보니 방금 놈들의 심정을 단번에 이해했다.

나는 조심스레 남자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앞에 있는 남자는 내 뒤편에 졸개들이 나간, 닫힌 문을 쳐다보고 있었다.

남자는 잠시 생각하는 듯한 얼굴을 하더니, 이내 읊조리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문해서 진실을 듣는 게 내가 할 일인가.”

그 무뚝뚝한 목소리가 커다란 방 안에 울려왔다. 문가를 향했던 그의 시선이 고요히 나를 향했다.

“…….”

감정 없는 눈을 가까이서 마주하자 나는 등줄기부터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마주한 호박색 눈은 깊은 무료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불현듯 이리저리 휘둘렸던 이 남자는 사실 일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검은 옷자락 아래에 있던 남자의 커다란 손이 천천히 올라갔다. 그 느긋한 움직임에 아까와 같은 섬뜩한 직감을 느꼈다. 그러나 이번에는 너무 가까웠다. 피할 새도 없이 앞에 있는 남자의 손이 주저앉아 있는 내게로 뻗어졌다.

“컥-.”

쿵, 뒤통수가 카펫에 처박혀 찡하게 울려왔다. 죽일 듯이 목을 쥐는 아귀의 힘 때문에 숨이 막혔다.

커다란 손이 목을 파고들었다. 괴로움으로 일그러진 눈앞에 남자의 얼굴이 어른어른 보였다.

감정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호박색 눈동자와 마주하는 순간 시야가 아득하게 멀어지기 시작했다.

눈앞이 까맣게 변하기 직전이다. 손아귀의 힘이 살짝 풀렸다. 공기가 들어오자 나는 급하게 숨을 토해냈다.

“흐……윽-!”

하마터면 정신을 잃을 뻔했다고 생각했을 때 또다시 손에 힘이 가해졌다. 목을 터뜨릴 정도로 꽉 쥐어왔다. 강하게 짓누르는 고통에 정신이 까무룩 해질 즈음 또 힘이 풀렸다.

이렇게 몇 번 목을 조르는 게 반복이 되자 얼굴에 피가 잔뜩 몰려 괴로웠다.

나는 내 위에 있는 호박색 눈동자를 힘겹게 올려다봤다. 흐릿한 시야로 남자의 눈빛이 무엇을 가늠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내 눈을 들여다보고 있던 남자는 나와 눈에 마주치자 고저 없는 톤으로 물어왔다.

“이 정도가 고문인가.”

“윽, 흐…… 조, 조금 더 힘을 푸, 풀어-.”

놈이 나를 빤히 보더니 아귀에 힘을 조금씩 풀며 조절하기 시작했다.

“…….”

“하, 아…….”

숨이 들어갈 공간이 생기자 나는 힘겹게 호흡했다. 여전히 목에 힘이 가해지고 있는 상태지만, 괴로울 정도는 아니었다.

이 남자는 정말 딱 죽지 않을 정도의 고문이 목적인가 보다.

……그리고 이놈은 죽지 않을, 적당한 힘 조절을 모르는 듯하다. 그래서 처음에 목을 조를 때 공기가 순환되지 않아 뇌가 터지는 줄 알았다. 진짜 황천길 건널 뻔했다.

더해서 지금 놈은 내가 이제 호흡을 수월하게 하고 있는 걸 모르는 듯하다.

……평범한 놈이 아니라 천만다행이다.

“진실을 말해라.”

“……무, 무기상이라니까.”

“그게 진실인가.”

“그, 그럼. 표식이 말을 해 주고 있잖아. 무기 하나 없이 쳐들어오는 적이 어딨다고…….”

믿어 달라는 듯이 눈을 간절히 뜨자 놈이 가만히 나를 내려다봤다. 나는 거짓말 따위 모르는 사람처럼 메마른 호박색 눈을 최대한 말똥하게 쳐다봤다.

남자의 뒤편, 천장에 있는 환한 조명 때문에 구릿빛 피부에 음영이 져 있었다. 그런 위협적인 남자의 얼굴을 올려다보고 있으니 몸이 오싹해져 왔다. 야생 동물한테 습격당한 먹잇감이 된 기분이다.

“…….”

무슨 생각을 하는지 표정에 전혀 드러나지 않으니 속이 바짝 마른다. 놈은 예고 없이 공격을 해대니 한시도 방심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피 말리는 침묵이 지나고, 느슨하게 목을 쥐고 있던 손이 스르륵 풀리기 시작했다.

“그렇군.”

남자는 순순히 몸을 뒤로 물렸다. 죽일 듯이 공격한 것에 비해 쉽게 물러나는 놈을 보며 눈을 깜빡였다.

‘……쉬, 쉽잖아.’

얼떨떨하게 남자를 쳐다보다 이내 남자의 시시해하는 눈빛을 보고 알아차렸다. 이 남자는 나를 죽여도 되고, 안 죽여도 상관없는…… 흥미 없는 일을 하는 것처럼 쉽게 행동하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까딱 잘못하면 위험하긴 한데 벗어나기도 쉬운 듯하다.

“…….”

나는 팔을 뻗어 바닥을 짚었다. 힘을 주어 누워 있던 상체를 천천히 일으켜 자리에 앉았다. 아릿한 목가를 살짝 만져 보았다. 손이 닿으니 눈이 찌푸려질 정도로 얼얼했다.

나중에 거울을 보면 시퍼런 손자국이 남아 있을 듯하다.

목에서 손을 떼고 흘끔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놈이 바로 앞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무방비하게 앉아 있던 몸을 얼른 일으켰다. 그러자 앉아 있을 때도 느꼈지만, 남자의 앞에 서 있으니 체격 차이가 장난 아니구나 싶다.

목 아프게 남자를 올려다보고 있으니 같은 시야에 표식이 눈에 들어왔다. [Lv. ?], 기묘한 레벨을 보자 심란한 기분이 속에서 피어올랐다.

‘……미친놈이 세 명씩이나 선택될 리가 없잖아……. 두 명으로도 벅차다고…….’

나는 외면하듯 표식에서 시선을 후딱 거두었다. 그러자 무뚝뚝하게 보고 있는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그, 그럼 난 가 볼게.”

“…….”

앞에 있는 남자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가도 좋다는 순순한 허락이었다.

나는 찝찝한 기분을 뒤로하고 남자의 끄덕임에 냅다 걸음을 돌렸다.

‘……난 오늘 저놈을 못 본 거야…….’

그렇게 되뇌며 커다랗고 두툼한, 로마 시대에서나 볼 법한 문으로 걸어갔다. 등 뒤로 남자의 시선이 느껴져 무릎이 삐걱삐걱거렸다.

서서히 문가와 가까워지던 차다.

덜커덩-

돌로 된 문이 예고도 없이 활짝 열렸다.

나는 흠칫, 발걸음을 멈췄다. 고개를 들자 아까 졸개들과 비슷한, 닌자 차림의 남자가 거칠게 호흡하며 방으로 뛰어 들어왔다. 그러더니 다짜고짜 내 뒤편에 있는 남자를 향해 소리쳤다.

“보, 보스! 적들이 쳐들어왔어!”

닌자는 말을 뱉고서 호흡이 힘든지 얼굴을 가린 천을 확 내렸다. 그러자 잔뜩 겁에 질린 얼굴이 드러났다.

피와 땀으로 옷이 흥건히 젖은 닌자가 얇은 입술을 달달 떨며 말을 이었다.

“저, 정문이 모두 뚫린 상태야……! 어떻게 본거지를 알아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들 습격에 단원들 절반이 죽었어……!”

“…….”

“아, 아무래도 다른 쪽이랑 연합을 맺었나 봐! 일단 피신해야 돼!”

앞에 있는 닌자가 말을 끝낸 뒤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다 얼빠진 채 서 있는 나와 눈이 마주쳤다. 닌자가 입을 차차 다물더니 경계 어린 눈빛을 했다. 이어서 허리춤에 있는 칼을 잡았다.

내가 주춤 물러날 때다. 닌자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닌자 놈의 시선은 내 머리 위, 그러니까 내 뒤편을 향하고 있었다.

“-거짓을 말했군.”

남자의 낮고 굵은 목소리가 뒤통수에서 들려왔다. 동시에 불길한 기운이 스멀스멀 온몸을 타고 올라왔다. 살갗으로 따가운 살기가 느껴졌다.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몸에 소름이 쫙 돋아왔다.

“아, 아니- 흡.”

찰나로 지독한 살기를 느낀 나는 직감적으로 몸을 우당탕 옆으로 날렸다. 옆에 세워져 있는 선반에 몸이 세게 부딪혔다. 신음이 절로 터져 나왔다.

“윽-.”

남자가 내 목을 뚫어 버릴 듯 탄탄한 팔을 확 뻗은 것이다. 귓가에 바람 소리가 날 정도로 강하게 뻗은 손으로 짐작했다. 방금 나를 죽이려 했다는 것을.

다행히 놈의 손을 간발의 차로 피한 듯하다.

부딪힌 몸의 아릿함을 느낄 새도 없이 고개를 다급하게 들었다.

남자는 펼친 손을 천천히 거둬들이더니 나를 향해 몸을 틀었다. 무게감이 있는 걸음으로 정면에서 다가왔다. 서두르지 않는 걸음은 압도적인 강함을 아는 듯하다.

그 위압감에 장기가 오그라드는 기분을 느꼈다. 마치 저승사자가 나한테 다가오는 것 같다. 아니, 다를 바 없다. 나를 저승으로 데려가려는 목적은 동일하니까.

“…….”

터벅터벅, 공간감 있는 곳에 발소리가 느릿하게 울릴 때마다 의지와 상관없이 몸이 떨려왔다.

……아무리 전설의 무기가 직감이 발달했다 하더라도, 저런 남자와 일대일로 대치해서 살아남는 건 불가능하다.

‘대체 까딱 잘못하면 죽는 게 무슨 전설의 무기- 전설의 무기……?’

입이 바짝 말라오던 차에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머리를 강하게 관통했다. 이후에 앞날이 험난해지지 않을까, 라는 심란함과 함께.

목구멍까지 차오른 그 방법을 망설이는 그 순간, 건물이 지진이 난 듯 흔들거렸다. 우르르, 천장이 무너져 내릴 듯한 무서운 소리가 문밖 너머에서 들려왔다.

“…….”

남자의 발걸음이 멈췄다. 무감하게 뻗은 눈이 천장을 향했다. 그곳에서는 돌가루가 투둑투둑 떨어지고 있었다. 잠시 동안 가루가 떨어지고 나서 진동이 죽는 듯이 멈췄다.

그러다 멀지 않은 곳에서 콰광- 폭발음이 크게 들려왔다. 세상이 종말할 것처럼 또 한 번 시야가 무섭게 흔들렸다.

“적들이 오고 있어! 보스. 서, 서둘러 피신을-!”

“도망가라.”

“보, 보스는?!”

“적들을 처리한다.”

“하지만! 적들의 수준이 여태껏 본 놈들과 달리 아주 강했-.”

“나보다 강한 자는 없다. 약한 자는 도망가라.”

“보, 보스를 버리고 어떻게 가!”

“그럼. 네가 보스를 하면 되겠군.”

보스라는 남자가 미련이 없다는 듯이 말을 뱉었다. 그깟 거 안 그래도 번거로웠는데 필요 없으니 가져가란 듯한 투와 유사해 보인다.

“……보, 보스?”

닌자 놈의 흐린 목소리가 맥아리 없이 방 안에 울렸다.

닌자를 흘낏 쳐다봤다. 그러자 닌자의 눈동자가 지진이 난 듯 흔들리고 있었다. 시선을 돌리려는데 두 사람의 머리 위에, 같은 색을 띠던 파란색 파티가 뚝 끊어졌다. 동시에 보스라는 남자가 무덤덤한 투로 말했다.

“거슬린다. 사라져라.”

남자의 말에 닌자 놈이 자신의 이름표를 올려다보더니 주먹을 꽉 쥐었다. 땀에 쩔은 얼굴이 잔뜩 울먹거리는 얼굴로 변했다. 움칫대던 입술이 열리더니 냅다 보스라는 남자에게 소리쳤다.

“보스가 아닌 척하지만 늘 단원들을 생각하는 거! 다 안다고!”

“나는 한 게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일절 감흥 없어 보이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말대로 저 남자는 한 게 없는데 자기들이 냅다 머리 조아리고 모여들어 도적단이 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죽고 싶지 않다면 가라.”

보스라는 남자는 더는 긴말 안 하겠다는 식으로 말했다. 더해서 닌자를 보는 눈빛에는 살기를 띠고 있었다.

“우리를 위해 도망칠 시간을 벌여주다니- 크흡! 보스, 보스의 위대한 희생은 영원히 가슴에 새길게!”

닌자 차림의 도적이 감동을 진하게 먹은 얼굴로 말을 뱉었다. 제멋대로 드라마를 쓰고 있는 닌자는 보스의 살벌한 눈빛을 눈치채지 못한 듯하다. 이어서 따흑, 울음소리를 내며 닌자가 뒤를 돌았다.

그리고 문 쪽으로 성큼 다가오는 닌자를 보고 당황했다. 나는 놈들이 대화하는 틈에 쥐 죽은 듯이 슬금슬금 문으로 가고 있던 참이었으니까…….

“…….”

다가온 닌자로 인해 엉금엉금 바닥을 기던 동작을 멈춰야 했다. 눈물을 쓱 훔친 닌자는 제 감정에 취한 모습이다.

앞에 있는 내가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닌자가 쌩 지나쳐 갔다. 그러고서 들어올 때처럼 돌문을 활짝 열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쿵.

묵직한 소리가 방 안에 웅장하게 울렸다.

나는 망연한 얼굴로 굳건히 닫혀버린 문을 쳐다봤다. 방 안에는 정적이 흘렀다. 더해서 뒤통수에서 강렬한 시선이 쏟아졌다.

더는 남자의 시선을 붙잡아 줄 사람이 이곳에 없었다.

‘망할.’

터벅터벅 다가오는 걸음 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나는 화들짝 남자를 쳐다봤다. 남자의 시선은 바닥을 기던 내게 정확하게 고정되어 있었다. 날카롭게 주시하는 눈빛이 사냥감을 노리는 맹수가 따로 없다.

한껏 경직된 채 놈을 바라보고 있으니 어른거리는 빛이 시야에 걸렸다. 눈동자를 내리자 남자의 커다란 손에 황색의 마력이 무섭게 모여드는 게 보였다.

그 뜨거운 열기를 본 나는 다급하게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기, 기다려! 나는 적이 아니라고! 나를 죽이면 땅 치고 후회할지도 몰라!”

“여태 나는 후회한 적이 없다.”

“자, 잠깐만! 마, 말 좀 들어 달라, 흡-!”

남자의 손이 내 쪽으로 향하자 나는 숨을 들이켰다. 남자는 내게서 두어 걸음 앞에 우뚝 멈춰선 상태였다. 눈앞에 위치한 손에서 당장이라도 뻗어 나올 것같이 이글대는 마나가 아주 가까이서 보이고 있었다.

나는 뻣뻣하게 굳은 채 남자를 올려다봤다. 한껏 무료함을 담은 호박색 눈동자가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말하라.”

앞에 있는 남자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마지막 유언이라도 들어주겠다는 투였다. 그 말에 잠깐 입을 뻐끔거렸다.

“…….”

무정하게 나를 냅다 죽일 것 같았던 놈은 나의 말을 순순히 기다리고 있었다. 더해서 무료한 눈을 보고 있으니 왠지 말만 잘하면 멀쩡하게 돌려 보내 줄 것 같기도 하다.

내 생각이 맞는 거라면, 절체절명의 순간에 마지막 기회를 얻은 것이다. 그럼, 지금부터 입을 존나게 잘 털어야 한다는 소리다.

‘진짜 그 방법뿐이냐고…….’

그리고 내 머리에 떠오른 강력한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나는 입술을 꾹 깨물고서 남자의 손을 내려다봤다. 놈의 손에 있는 마력이 연기처럼 퍼지고 있었다. 그 열기가 넓은 공간을 채우더니 점점 몸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등에서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남자의 공격을 피하는 건 불가능하다.

이러나저러나 내겐 그 방법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먹먹한 가슴을 느끼며 숨을 깊이 쉬었다. 그렇게 나름의 결심을 한 나는 앞에 있는 남자를 향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 네 힘을 견딜 수 있는 무기를 내가 갖고 있어.”

“…….”

“진짜야……! 진짜 어, 엄청난 무기야.”

여전히 남자의 손에 마력이 이글거리는 것을 보자, 말이 더듬더듬 뱉어졌다.

꼴깍, 떨리는 눈으로 녀석의 얼굴을 향해 시선을 올렸다. 놈은 표정 변화 없이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빤히 훑는 시선을 피해 머리 위를 흘끗 쳐다봤다.

[Lv. ?]

‘그래……. 일단 내가 사는 게 중요하지.’

보따리 속에 있을 때, 도적놈들의 대화로 보스라는 자가 무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렇다면 전설의 무기를 마다할 리가 없다.

나는 버벅거리며 앞에 있는 남자한테 솔직하게 말했다.

“내, 내가 레스탈로스의 무기로 변할 수 있어.”

“또. 거짓을 말하는군.”

한결같이 무표정하던 남자가 입매를 살짝 찌푸렸다. 탐탁지 않아 하는 남자의 표정에 위기를 감지하고 왈칵 소리쳤다.

“저, 정말이라고!”

내 목숨을 계속해서 가늠하고 있는 남자를 절박한 눈으로 올려다봤다. 심장이 벌렁벌렁 뛰었다.

‘……전설의 무기란 걸 증명할 수 있는 마패라도 쥐여줘야 할 거 아니냐……!’

대놓고 말해도 못 믿는 게 말이 되냐고! 속으로 알 수 없는 누군가에게 억울함을 쏟아내고 있던 차다.

건물이 또 한 번 흔들렸다. 견고한 천장에서 아까와 같이 돌이 후드득 떨어졌다. 벽 너머에서는 폭발음이 연속으로 들려왔다. 사지가 덜덜 진동하다가 멈추었다. 퀴퀴한 탄 냄새와 까만 연기가 문밖에서부터 타고 들어왔다.

폭발음으로 볼 때, 아까보다 적이 더 가까워진 상태다.

“…….”

앞에서 뚫릴 듯한 시선이 닿아왔다. 뒤에서는 쿠쿠쿵, 폭발 소리와 사람의 비명이 계속해서 들렸다.

내게 고정되어 있던 남자의 시선이 소란스러운 소리에 문 쪽을 흘낏 쳐다보더니 다시 나를 내려다봤다. 나는 불안하게 앞에 있는 남자를 올려다봤다.

잠깐의 침묵 끝에 남자의 굳게 닫힌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레스탈로스라고 했나.”

“그, 마, 맞아.”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에 목소리가 염소처럼 떨려왔다.

날카로운 눈매 속 눈동자가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침도 못 삼키고 얼어 있는 그 순간, 시종일관 무료하던 호박색 눈동자에 이채가 설핏 스쳤다. 동시에 남자의 손에서 마력이 뚝 멎었다.

“왜, 왜-.”

가까이에 서 있던 남자가 불현듯 상체를 숙였다. 남자가 몸을 숙임과 동시에 어정쩡하게 기어가다 멈춘 내 몸이 바닥으로 처박혔다. 가슴께와 등에 아릿함이 몰려왔다.

“큿-.”

눈을 찡그리며 시선을 내렸다. 남자의 손이 가슴팍을 짓누르고 있었다. 남자는 나를 가두듯, 엎드린 자세로 내 위에 올라와 있었다. 꼼짝없이 사냥당한 먹잇감이라도 된 것 같은 자세다.

“그렇다면 사용하면 되겠군.”

불길함을 진하게 느낄 즈음, 위에서 남자의 무뚝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

나는 얼빠진 얼굴로 고개를 쳐들다 말고 바지춤을 잡는 남자의 손길에 몸을 펄떡거렸다. 가슴께가 짓눌리고 있어 힘겹게 팔다리를 휘저으며 말을 뱉었다.

“왜, 왜 거길-!”

“인간화를 풀어야 하지 않나.”

“이, 인간화라니! 나는 인간이라고! 엄연히 내가 무기화가 되는 거라고!”

“그렇군. 무기화를 시작하지.”

남자가 무신경한 목소리로 말을 하더니 내 바지에 다시 손을 가져다 댔다.

나는 흠칫 몸을 떨며 남자의 팔을 황급히 붙들었다. 남자가 동작을 멈추고 눈동자를 들어 올렸다.

“자, 잠깐-.”

나는 변신 과정 없이! 무사히 나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려 했다. 무기라는 말로 혹하게 해서 시간을 벌어놓은 뒤, 잔머리를 굴려 볼 생각이었단 말이다!

하지만…… 세상만사 무엇에도 관심이 없어 보이던 남자는 다짜고짜 합체를 시도할 만큼 레스탈로스에 관해서 잘 알고 있는 듯하다.

나는 예상밖의 상황에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아까와 달리 짓눌린 가슴께에 전해지는 힘에서 놓치지 않겠다는 집요함이 느껴지고 있었다.

“아, 아니, 진정해 봐……! 잘못하면 네놈은 죽는다고!”

“나는 죽지 않는다.”

“어, 어떻게 확신- 흐읍!”

또다시 문 너머에서 굉음이 콰광- 터져 나왔다. 동시에 건물 전체가 흔들려 왔다. 돌가루가 피부 위로 후드득 떨어졌다.

이러고 있다간 건물이 몽땅 부서져 돌무더기에 깔려 뒤지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의 울림이었다.

“협조하지 않는다면 너는 죽을 것이다.”

위에서 무감하게 뱉는 남자의 말에 나는 흠칫했다.

그 순간, 폭발음이 가까운 곳에서 터졌다. 밖에서 처절한 비명이 들려왔다. 우르르 뛰는 소리가 바닥을 타고 울려댔다. 소리로 보아 제법 많은 도적들이 밖에 있는 걸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나간다고 해도 밖에 있는 수많은 도적에게 개죽음당하는 거 아닌가 싶다. 그전에 내가 도망칠 낌새를 보이면 앞에 있는 놈이 죽이려 들 테지만…….

‘……뭘 망설이냐, 한 명 더 늘든 말든, 그건 살아서 하는 걱정이잖아. 사는 게 중요한 거 아니냐고…….’

이 지경이 된 상황에서…… 어쩔 수 없잖아. 이미 저 남자는 레스탈로스의 힘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듯이, 엄청 굶주린 얼굴을 하고 있는데.

나는 체념하듯 몸에 힘을 풀었다.

“……그래……. 해라, 해.”

그러자 기다렸단 듯이 남자의 손이 단숨에 바지를 벗겨 내렸다. 아랫도리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공기에 몸이 움칫했다. 가슴께를 압박하던 손이 느슨해지더니 아래로 내려갔다.

내 다리 사이로 자리를 잡던 남자가 상체를 들어 올렸다. 태연하게 본인 바지 안으로 손을 넣었다. 이내 커다란 손이 길쭉한 것을 꺼내 들었다. 눈앞에 나타난 흉기에 눈이 질끈 감겼다.

‘저 새끼도 프X글스냐고……!’

또 어마어마한 게 들어올 것을 예감하니 몸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그러자 위에서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힘을 풀어라.”

“너무 크, 크잖-.”

뭐라 말하기도 전에 입구에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지체하지 않고 쫘악 벌리며 들어오는 거대한 두께에 눈물이 핑 돌았다.

“으헉-!”

안으로 버거운 크기가 삽입되자 입이 떡 벌어졌다. 처맞기라도 한 사람처럼 입에서 막힌 소리가 터져 나왔다.

눈에 눈물이 가득 차 시야가 울렁거리고 머리가 멍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끝만 살짝 들어와 있는 것도 벅찬데 얕게 안을 치며 쑤셔 넣기 시작하니 죽을 맛이었다.

나는 숨을 쉬는 것도 잊고 잔뜩 벌어진 눈으로 앞을 봤다. 놈은 개의치 않는 표정으로 성기를 안으로 쑤셔 넣었다. 끊임없이 들어오는 그 크기에 배가 아릿하게 아파져 왔다.

“하-.”

귓가에서 남자의 탁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남자는 상체를 숙이며 깊숙한 곳까지 푸욱 찔러 넣었다. 뜨거운 온기가 몸 위로 느껴졌다. 내부를 무지막지하게 밀고 들어오던 성기의 움직임에 그렁그렁하게 맺혔던 눈물이 볼을 타고 뚝뚝 흘러내렸다.

남자는 깊은 곳에 닿고 나서야 삽입을 멈췄다. 그제야 삼켰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하으…….”

무식한 걸 가진 놈들은 왜 제 아래의 크기를 자각 못 하고 이렇게 막 집어넣냔 말이다…….

절로 주먹이 꽈악 쥐어졌다. 아프고 더부룩했다. 그러나 아까 다비와의 행위로 인해 제법 풀어져 어디가 찢어지거나 그런 건 아닌 것-

“흐으읏! 욱! 으…… 아!”

잠깐 호흡을 고르던 참에 하고 있던 생각이 몽땅 흩어졌다. 깊숙이 들어온 남자의 것이 내벽을 밀며 뒤로 물러났기 때문이다.

나는 아래가 텅 비는 느낌에 몸에 소름이 끼쳐왔다. 그러다 그가 다시 안쪽을 쑤욱 찔러 넣자 배가 불룩해졌다.

허리를 움찔 떨자 남자의 눈썹이 살짝 찡그려졌다. 남자는 다시 뒤로 물러났고 안을 콱 찔러 넣었다. 아찔한 감각에 눈물이 핑 돌았다. 목으로 남자의 것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응, 윽! 흐흑…… 아, 아프, 아흐-.”

남자가 양손으로 내 허리를 콱 붙들었다. 그러자 결합이 더욱 깊어져 몸이 파르르 떨렸다.

남자의 손에 힘이 들어가니 허리가 아릿했다. 아픔에 몸을 살짝 비틀 즈음, 남자가 다시 허리를 쳐올렸다.

철퍽, 몸이 위로 올라갔다. 그러나 단단히 붙들고 있는 손아귀의 힘에 의해 몸이 다시 아래로 푹 내려앉았다. 아래가 꽉꽉 들어차는 감각에 숨이 턱턱 막혔다.

“읏, 아, 아, 핫-.”

퍽퍽, 음낭이 결합 부위에 강하게 부딪혔다. 아래를 치는 남자의 허리 짓이 점점 빨라지기 시작했고, 내 입에서는 비명처럼 신음이 터져 나왔다.

머리끝까지 치고 올라올 것 같은 매서운 기세에 아래가 얼얼했다. 사정없이 흔들리는 시야는 어지러웠다. 정신없는 그 틈으로 긴 꼬챙이가 안쪽 깊은 곳을 찌릿하게 자극했다.

깊은 곳에 닿을 때마다 몸이 일일이 움찔움찔 떨려왔다. 반복되는 감각에 몸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내부가 간질간질해 몸이 액체처럼 녹을 것만 같았다.

오싹한 쾌감으로 인해 저도 모르게 조금 더 기분 좋은 곳에 닿으려 허리를 들어 올렸다.

“응…… 아아! 아!”

콱콱 뜨겁고 길쭉한 것이 쑤셔지니 몸이 멋대로 흐느적거렸다.

아까 전만 해도 다비의 것을 담아냈던 안쪽은 잔뜩 예민해진 상태였다. 그래서 입에서는 낯선 하이 톤 소리가 앙앙대며 터져 나왔다.

물기 어린 커다란 신음은 마찰하는 소리와 함께 방에 울렸다.

“으, 응…… 아! 아응! 아, 아! 아!”

두껍고 단단한 게 입구를 빠듯하게 채우며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나가기를 반복했다.

속 안에 있는 곳을 사정없이 쑤욱 박아댈 때마다 달뜬 숨이 입에서 뱉어졌다. 척추를 따라 전류가 찌릿하게 흘렀다.

추삽질이 격해질수록 쾌감은 거대한 파도처럼 밀려왔다. 내벽 가득 맞물린 기둥으로 인해 온갖 곳이 자극되었다. 어떻게 해 줬으면 하는 안달 나는 감각에 허리가 흔들렸다. 이어서 기분 좋은 곳이 깊게 찔러지자 울음과도 같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시야가 핑핑 돌아 머리가 뒤죽박죽 엉망이었다. 정신없이 가쁜 호흡을 뱉어냈다. 퍽퍽 쑤셔질 때마다 맺힌 눈물이 볼을 타고 줄줄 흘러내렸다.

머리가 마비되는 감각에 긴 비명을 지를 즈음, 머리 위에서도 굵직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아, 아흐읏!”

“-크흣.”

내부 안에서 무언가 퍼지는 느낌이 들었다. 눈이 감겼고 다시 떠졌을 때다.

-…….

나는 까만 공간에 들어와 있었다. 나른한 사정감에 잠시 검은 공간을 넋 놓고 쳐다봤다.

잠시 뒤, 몸이 공중에 들려지는 감각이 느껴졌다. 정신이 차차 들기 시작했고 동시에 의문이 떠올랐다.

‘내가…… 이렇게 쾌락에 약했나.’

‘부서지고 있는 건물에서, 적들이 쳐들어오는 그 상황에, 주변을 망각할 정도로 이리도 본능에 충실한 놈이었던가…….’라는 생각을 하던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오감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어떻게 됐는지, 밖에 상황을 봐야 할 거 아니냐.’

시야가 점차 트이더니 상황이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남자와 대치했던 중동식 방의 모습이 보인다. 다행히 원기둥에 살짝 금이 가 있을 뿐, 건물이 부서지지는 않았다. 더해서 돌 문은 여전히 닫혀 있었다.

……행위를 하는 도중에 적들이 쳐들어오는, 그런 쪽팔리는 죽음을 겪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한시름 놓자, 몸통을 그러쥐는 커다란 손길과 뜨거운 눈길이 느껴졌다.

흡-.

문가에서 시선을 뒤쪽으로 돌리자 사막처럼 메마른 눈이 보였다. 가까이서 남자를 보자 절로 숨이 들이켜졌다.

눈이 날카롭고 무감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으니 오싹했다. 그 무서운 눈으로 내 몸통을 쥐고 빤히 쳐다보고 있으니, 시선만으로도 숨통이 조이는 느낌이 들었다.

“진짜군.”

-……거짓말 아니라니까.

아니, 다짜고짜 바지 내리고 쑤셔 넣던 놈이 여태 의심을 하고 있었던 거였냐고…….

보면 볼수록 비범한 사고회로를 가진 것부터- 비슷한 두 놈을 자꾸만 떠올리게 하는 놈이다.

그 순간, 나는 흠칫하며 놈의 머리 위를 쳐다봤다. 평범하게 [자이드]라는 검은 이름이 여전히 떠다니고 있었다.

……다행히 보라색 이름표가 떠 있지는 않았다.

안심하던 차에 남자는 나를 휙휙 뒤집기 시작했다. 무기를 가늠하는 듯했다.

그제야 나도 시선을 내려 몸통을 쳐다봤다. 도적 직업을 가진 놈의 마력이 주입되어 또 다른 무기의 형태로 몸이 변해 있었다. 팔뚝만 한 크기의 무기는 양쪽 끝이 매우 날카로운 칼날로 되어 있었고, 손잡이 부분은 두꺼운 모양이었다. 중앙 손잡이가 황색인 멋들어진 디자인이었다.

전설의 무기답게 도적 무기도 폼 난다고 생각할 때다.

쿠쿵- 문에서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무기를 살피던 남자의 눈동자가 문가로 향했다.

“…….”

당장이라도 적이 쳐들어올 것만 같이 흔들리는 돌문이 보였다. 그리고 그 문을 바라보는 남자는 상당히 여유로워 보였다.

……나만 긴장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스킬 쓰다가 다비 놈처럼 기절하는 건 아니겠지. 최악은…… 아닐 거다. 저놈 레벨을 보면, 그놈들이랑 다를 바 없잖아…….’

충분히 견딜 것이다. 상당한 정확도를 가진 내 직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막상 무기를 쓴다니까 조마조마한 마음이 안 들 수가 없었다.

부릅뜬 눈으로 문을 쳐다봤다. 문에서 몇 번씩이나 쿵쿵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처음에는 부수는 건가 했는데- 가만 보니 무거워서 문을 못 여는 듯했다.

어쩐지 김이 새는 느낌을 받을 즈음, 커다란 문이 양쪽으로 벌컥 열렸다. 그리고 땀에 절어 있는 산적 같은 놈들의 모습이 우르르 보이기 시작했다.

“대장! 찾았습니다!”

나는 앞에 있는 놈들부터 빠르게 훑었다. 그리고 머릿수만 많지, 볼품없어 보이는 적들의 모습에 아까 남자와의 변신 행위에도 느끼지 않았던 현타가 진하게 몰려왔다.

‘저 표식은 뭐냐고…….’

놈들은 도적도 아닌 [잡도적]이라는 표식을 갖고 있었다. 더해서 [Lv. 40] 언저리를 돌고 있는 놈들투성이였다. 무엇보다 외관 자체가 툭 치면 쓰러질 것같이 약하디약해 보였다.

‘……대체 아까 그 도적놈은 왜 그렇게 벌벌 떨면서 혼자 드라마 찍고 나간 건데.’

강한 놈들일 줄 알고 긴장했건만, 척 보기에도 그저 그런 도적단 놈들이 들어왔다.

-…….

작은 상처를 얼굴에 달고 있는 비실한 놈들을 허망하게 쳐다봤다. 그러던 중 모세의 기적처럼 중앙 길이 트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똘마니들 틈으로 누가 봐도 대장으로 보이는, 덩치 큰 놈이 중앙에서 걸어 나왔다.

덩치 놈의 덥수룩한 머리 위를 확인했다. [잡도적], [Lv. 62]. 놈들 중 가장 높은 레벨을 달고 있었다.

“크하! 여기 있었군! 자이-.”

대장 놈이 맥주 원샷 때린 사람처럼 호탕하게 소리쳤다. 존재감을 한껏 드러냈음에도 잡도적인지라 맥 빠지게 보고 있던 차다. 내부에 있던 마력이 소용돌이치듯 섞이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다시 마력이 잠잠해졌다.

“…….”

대장 놈이 대사를 끝마치지 못한 짧은 시간이었다. 그런데 방 안에는 더는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숨을 들이켜는 소리만 간간이 터져 나왔다. 기세등등하던 도적단들이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

나는 시야를 몇 번 끔뻑거렸다. 그러자 또 속에서 마력이 스르륵 올라오는 느낌이 들었다.

강하고 단단한 마력이 내부를 휘저었다. 안에서 울렁거리는 마력을 나도 모르게 조화를 시켰다.

융화시킨 그 순간, 양쪽 칼날이 빠르게 뻗어나갔다.

어벙하게 앞을 보던 나는 서서히 경악감이 올라왔다.

-무, 무슨…….

비릿한 피 냄새가 방 안에 진동하기 시작했다. 바닥에 깔린 황색 카펫이 점차 붉은색으로 물들었다.

나는 문 앞에 서 있던 수십 명의 놈들이 몸통만 남은 광경을 쳐다봤다. 이내 목이 잘린 육체가 경련을 일으키며 바닥에 툭툭, 쓰러지고 있었다.

눈이 잔뜩 벌어진 채 비명도 내지르지 못한 얼굴들이 바닥에 굴러다녔다.

-…….

쿵, 활짝 열려 있던 문이 두꺼운 소리를 내며 닫혔다.

나는 퍼뜩거리며 시선을 들었다. 아래에 널브러진 시체가 묵직한 돌 문에 깔려 몸이 우득, 하고 꺾이는 처참한 광경이 보였다.

“적을 처리했다.”

남자의 고저 없는 톤이 적막한 방 안에 울렸다. 그 말에 남자가 스킬을 사용해 순식간에 상황을 종결시켰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나는 천천히 남자가 있는 뒤쪽으로 시야를 돌렸다. 내려다보고 있는 남자의 두 눈을 마주한 순간 섬뜩함을 느꼈다.

남자는 아까와 다를 바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적에게 일절 감흥이 없어 보였다. 그저 적이라는 인식을 한 뒤 일말의 망설임 없이 죽인 듯하다.

남자의 무심한 모습에 말문이 막 혀버렸다.

-…….

이 세계의 시간으로 치자면 꽤 오래 머물렀다. 그럼에도 초보자 마을에서만 있어서일까, 몬스터가 아닌 사람이 죽는 걸 보는 건 처음이었다. 그래서 토할 것 같은 기분이 심각하게 올라왔다.

-……너무 잔인한데.

중얼거리듯 말을 뱉자, 남자가 물끄러미 나를 내려다봤다.

“적에게 쓸데없는 감정을 느끼는군.”

남자는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말을 뱉었다. 그리고 그는 문득 입을 다물었다.

……연결돼서 내 감정을 느끼기라도 했나 보다.

나는 무감각한 남자의 얼굴을 흘끗 올려다봤다. 그러자 아까 섬뜩하다고 느낀 눈동자가 나를 못마땅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감정적으로 적을 대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심각해지려는 내게 놈이 한결같이 무뚝뚝한 투로 말을 뱉었다.

나와 마찬가지로 놈 역시 나를 이해할 수 없단 눈빛으로 보고 있었다.

일말의 동정심도 보이지 않는 얼굴을 가만히 보다 보니 문득, 적들이 쳐들어왔다고 소리치던 졸개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렇네.’

남자의 입장에서는 적을 죽이는 데 무디게 군다면 동료와 본인, 모두가 위험해질 것이다.

……무엇보다 적이 대놓고 죽일 목적으로 쳐들어온 상황이었다. 까딱하다간 본인이 죽을지도 모를 일이다.

남자가 왜 쓸데없는 감정이라며, 가차 없이 스킬을 썼는지에 대해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찝찝함이 점점 옅어지는 것을 느끼며 남자에게 말했다.

-그, 그럼…… 이제 끝났지? 변신 푸, 푼다?

“아직이다.”

-어?

“온다.”

……남김없이 다 죽어 버렸는데 뭐가 온다는 걸까.

어벙하게 남자를 보는 그때, 건물이 허물어지듯 와르르르- 하는 소리가 났다.

콰광! 무언가가 거대하게 부서지고 깨지고 박살이 나는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아까보다 비교도 할 수 없는 심한 진동이 느껴졌다.

‘……그래, 진동에 비해…… 긴장감이 없긴 했지.’

방금은 긴장한 게 무색하다 못해 적이 안쓰러웠다. 압도적인 힘 차이 때문에 적에게 감정 이입했을 정도다.

‘지금이 진짜인가.’

똘마니들 사이에서 나오길래 덥수룩한 덩치가 대장인 줄 알았는데 아닌가 보다. 지금 다가오는 진동으로 봐서는 진짜 보스가 있는 듯하다.

꼴깍-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하고 마른침을 삼켰다. 여유로웠던 아까와 달리 남자 또한 무기를 고쳐 잡으며 전투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천둥이 치는 듯한 굉음이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왔다. 건물 전체가 폭삭 주저앉을 듯이 흔들렸다. 앞에 있는 거대하고 커다란 문이 덜그럭덜그럭 댔다.

……뭔가 아주 거대한 것이 오고 있다는 직감이 들고 있었다.

심장이 두방망이질하듯 거세게 뛰었다. 문가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숨 막히는 긴장감이 감도는 그때, 돌 문이 번쩍거렸다. 눈 부신 빛과 함께 커다란 문은 한순간에 흔적도 없이 가루처럼 파삭 녹아내렸다.

-…….

방 전체가 달달 흔들렸다. 굳건한 문이 방금 통째로 사라졌다. 쭉 뻗은 황토색 복도가 훤하게 보였다. 이어서 문이 있어야 할, 뚫린 공간으로부터 고요하고 정적인 걸음 소리가 복도를 타고 울려왔다.

그 걸음은 방과 아주 가까워졌고, 이내 허물어진 문 옆의 벽에서부터 한 사람의 모습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상당히 당황스러운 감정으로 방 안으로 들어오는 그를 쳐다봐야 했다.

“…….”

바닥에 깔린 시체를 태연하게 밟고 오던 그와 눈이 마주쳤다. 투명한 피부에 맺힌 송골송골한 땀방울과 함께 얼굴이 처연하게 질려 있었다.

나를 본 그가 안도하듯 한숨을 쉬며 말했다.

“……무사하셨군요. 다행입니다.”

그가 갸름한 얼굴을 타고 내려온 긴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넘길 때다. 걱정으로 휘어져 있던 그의 눈매가 차갑게 변하더니 옆을 흘끗 쳐다봤다.

문 옆에 있던 벽에서 붉은빛이 번쩍 돌았다. 그러더니 조금 전처럼 벽이 한순간에 와르르 허물어졌다.

쿠쿵, 벽돌들이 바닥으로 무게감 있게 떨어졌고 동시에 먼지가 사방으로 흩날렸다.

문도 아닌, 그저 벽이었던 곳이다. 엉망으로 뚫린 공간을 얼빠진 채 쳐다봤다. 회색 가루가 뿌옇게 날리는 틈에서 사람 형태가 흐릿하게 보였다.

무너진 돌들의 잔해들을 밟고 오는, 느릿하지만 힘이 들어간 걸음 소리가 공간에 울려 퍼졌다. 그 틈으로 핏빛 머리카락을 얼핏 본 듯하다.

검은 형체가 점점 커다랗게 다가왔고 가루들이 흩어짐과 동시에 붉은 눈동자와 마주쳤다.

-…….

나는 언 상태로 다가오는 놈을 쳐다봐야 했다. 핏빛 머리카락이 눈가를 가려서인지, 알던 모습과 달리 살벌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심장이 잔뜩 쪼그라드는 느낌이다.

그의 턱이 딱딱하게 힘이 들어가 있었다. 쭉 뻗은 눈매 속 붉은 눈동자는 식어 있었다.

그가 비릿하게 입꼬리를 비틀더니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너구나? 내 연인을 데려간 놈이.”

살의가 가득 담긴 목소리가 커다란 방 안에 울렸다.

투둑, 그의 발치에 치인 돌이 바닥을 구르다 시체에 부딪혔다.

흠칫, 바닥에서 시선을 들자 두 사람이 보였다.

그들의 뒤편, 뚫린 벽 너머에 사람들이 한 무더기 쓰러져 있었다. 쓰러진 놈들 중에는 [잡도적]도 보이고, 그냥 [도적]도 보였다.

그제야 허겁지겁 뛰어 들어온 졸개가 파랗게 질린 얼굴로 소리치던 이유를 깨달았다.

‘……아주 강한 적이, 저 두 놈이구나.’

두 놈이 마구잡이로, 미친 듯이 쓸어 버리니까 적군의 연합으로 오해했나 보다.

-…….

나는 뒤편에 있는 시체 무더기에서 다시 앞에 있는 놈을 쳐다봤다. 그러자 무기로 변한 나와 눈이 마주칠 리가 없는데도, 정확히 내 눈을 보고 있는 듯한 붉은 눈동자가 보였다.

그 순간, 다비의 쭉 뻗은 눈이 살짝 찡그려졌다. 이내 그의 곧은 입술이 못마땅하다는 듯이 열렸다.

“……그새 또 날파리가 꼬이면 어떡해.”

잔뜩 가라앉아 있는 낮은 목소리에 나는 흠칫했다. 마주한 붉은 눈은 어쩐지 나한테 각오하라는 눈빛을 보내고 있는 것 같았다. 이내 그의 눈이 뱀처럼 고요히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싸늘한 빛이 도는 붉은 눈동자는 나를 쥔 남자를 보고 있었다.

나는 섬뜩한 예감이 들었다. 가까이 걸어오는 다비는 누가 봐도 살의를 담고 있었으니까. 더해서 다비의 시선과 함께 무기를 꽉 잡아 오는 남자의 손이 느껴졌다.

“-적이군.”

위에서 굵은 목소리가 무감하게 들려왔다. 동시에 몸 안으로 휘몰아치는 마력이 느껴졌다.

남자는 적이라고 인식한 존재를 가차 없이 죽인다는 것을 불과 몇 분 전의 일로 체감한 상태다. 그리고 남자는 지금 저 살벌한 두 놈을 적으로 인식한 듯하다.

-…….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나를 쥐고 있는 남자가 마력을 무기에다가 끌어모으고 있었기 때문이다.

속에 있는 마력이 거대하게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앞에 있는 두 놈 손에도 붉고 하얀 마력이 소용돌이치듯 커다랗게 모여들고 있었다.

놈들의 표정이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알던 놈들이 맞나 싶을 정도로 흉흉한 기세를 뿜고 있어 잔뜩 얼어 있던 차다.

건물 전체가 심각하게 흔들렸다. 옆에 있는 벽이 후드득 허물어지고 거대한 돌이 바닥으로 쿵 쓰러졌다.

방 전체를 울리는 커다란 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나를 쥔 남자의 손에 힘이 가득 들어간 걸 느끼며 황급히 남자에게 말을 뱉었다.

-자, 잠깐, 이봐! 쟤들은 내가 아는-!

그러나 남자는 이미 놈들을 향해 빠른 속도로 달려들고 있었다. 동시에 다비와 루스도 지체하지 않고 남자에게 달려들었다. 서로를 진심으로 죽일 듯이 달려드는 그들의 눈빛에 두려움이 왈칵 몸을 덮쳤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냅다 외쳤다.

-푸, 풀려!

의지를 한껏 내비치자 잔뜩 주입되던 거대한 마력이 축소되는 느낌을 받았다. 속에서 파도가 치던 마력이 잠잠해졌고, 바닥에서 시야가 쑤욱 멀어졌다.

몸이 커지는 느낌과 함께 집중해야만 느껴지던 오감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더해서 피부 위로 따가운 살기가 강렬하게 닿아 왔다.

“-머, 멈춰!”

겨우 쥐어 짜낸 목소리가 달달 떨려와, 볼품없는 톤이 방 안에 울렸다.

그 순간, 아주 빠른 바람 소리가 휙 하고 귓가에 들려왔다. 뜨겁고 어지러운 열기에 머리가 찡하게 울렸다.

“…….”

내 목소리가 작게 메아리치는 것을 끝으로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흡-.”

의아함을 느끼며 질끈 감았던 눈을 떴을 때, 온몸이 잔뜩 움츠러들었다.

털이 쭈뼛 설 정도로 으스스한 느낌을 받았다. 앞, 뒤, 옆으로 무서운 기운을 풀풀 풍기는 커다란 놈들이 보였다. 그리고 그들이 뻗은 손의 끝, 1cm도 안 되는 간격으로 지글지글 대는 마력이 내 몸과 닿기 직전의 거리에 위치해 있었다.

“-윽.”

너무 가까웠다. 머리를 뒤흔드는 숨 막히는 마력에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바늘로 피부를 쑤셔대는 따가운 감각이 들었다. 거대한 마력에 장기들이 쪼그라들고 뒤틀리는 느낌이다.

마력의 압력을 못 견디고 몸이 휘청거릴 때다. 놈들의 손에서 뿜어지던 마력이 거둬졌다. 그러자 멀미가 날 것같이 울렁대던 시야가 돌아왔다.

눈동자를 천천히 돌렸다. 놈들은 시간이 멈춘 것처럼 우뚝 손을 뻗은 채 굳어 있었다. 그들의 당황스러운 시선은 일제히 내게 향해 있었다.

살의가 거둬진 공기가 느껴졌다. 그제야 호흡을 뱉으며 하마터면 저세상 갈 뻔했다는 사실을 체감했다.

‘……주, 죽는 줄 알았네…….’

나도 모르게 놈들을 죽여선 안 된다는 마음 하나로 변신을 풀었다. 하지만…… 정신 나간 짓이었다. 맨손으로 몹들을 싹 다 녹여 버리는 미친놈들이 죽자 살자 달려들고 있는 상황에서 변신을 푼 건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그야말로 자살 행위였다.

스스로 미쳤냐고 생각할 즈음, 마력을 거둔 놈들의 시선이 점점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들의 시선을 따라 무심코 아래를 내렸다.

잔뜩 겁에 질려 쪼그라든 볼품없는 아랫도리가 훤하게 보이고 있었다.

목덜미가 화끈, 더워지는 것을 느끼며 황급히 허리를 숙였다.

‘빌어먹을…… 변신 뒤처리가 이따구냐!’

무릎에 걸려 있는 바지를 허겁지겁 잡고 올릴 즈음, 앞에 있는 거대한 놈이 삐딱하게 몸을 기울이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어서 머리 위로 내려앉는 한숨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기복. 갑자기 풀면 위험하잖아.”

다비 녀석이 눈을 찡그리며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치 타박하듯 말이다.

다비의 말에 옆에 있던 루스의 놀란 눈이 조금씩 원래의 차분함을 되찾았다. 그러나 그의 미간에는 옅은 주름이 져 있었다.

“……무모하셨습니다.”

“그 상황에서 어떻게 가만히 있냐…….”

“가장 중요한 건 기복 님의 안전입니다.”

‘파티원이 공격당하는 걸 두 손 놓고 보고만 있을 순 없잖아-’라는 멋진 말을 하고 싶지만…… 방금 이 세 놈의 마력에 치여 죽을 뻔해서일까, 놈의 말대로 앞으로 나는 내 안전을 우선시하는 게 좋을 듯하다.

‘그리고…… 누가 누굴 지켜.’

놈들의 압도적인 마력을 피부로 느낀 바로, 나는 방패도 안 될, 얄팍한 나뭇가지 신세와 다름없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그렇게 루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려던 차에 뒤통수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동료인가.”

동굴에서 들려오는 듯한 깊은 목소리에 목이 움츠러들었다.

천천히 뒤를 돌아보자 남자가 두 손을 내린 채 나를 무표정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

질문인가 싶을 정도로 무감한 톤에 멍청한 소리를 내뱉다, 이내 질문임을 파악하고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그, 그렇지.”

남자는 내 대답에 여전히 감정을 알 수 없는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가까운 거리에, 머리 하나 차이 나는 큰 체격과 무뚝뚝한 얼굴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으니 마른침이 절로 삼켜졌다.

그때, 뒤에서 어깨를 잡아 오는 커다란 손이 느껴졌다.

“기복. 떨어져 있어. 저놈 죽여야 하니까.”

목 안으로 으르렁거리는 살벌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뒤에 있는 다비 녀석을 쳐다봤다. 다비 놈은 내가 자리를 뜨면 곧장 앞에 있는 남자에게 공격을 퍼부을 듯 흉흉한 기세를 뿜고 있었다.

나는 다시 앞에 있는 남자를 쳐다봤다. 남자의 손은 아까 전과 달리, 편안하게 내려가 있었다. 살벌한 다비 녀석과 별개로 이 남자는 공격할 마음이 싹 사라진 듯하다.

……그렇다면 굳이 싸울 필요가 없지 않나.

“아니, 잠깐만. 이, 이 녀석은 싸울 생각이-.”

나는 어깨를 잡고 있는 다비 녀석에게 몸을 틀며 말했다. 아니, 말을 하려 했다.

“……이 자도 우리와 같은 파티가 맺어져 있는데, 어떻게 죽이겠다는 겁니까.”

그 순간, 옆에 있던 루스가 탄식하는 듯한 투로 말을 뱉었다.

한숨 같은 목소리를 끝으로 넓은 방에는 정적이 흘렀다.

“…….”

나는 눈을 깜빡이며 루스를 쳐다봤다. 루스는 골치가 아픈 듯이 미간을 문질렀고 다비는 우뚝 굳은 상태였다.

그 둘의 반응을 보고 있으니, 손가락 끝부터 피가 싸하게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멈칫한 채 있던 나는 고개를 뻣뻣이 돌려 남자를 쳐다보았다.

남자의 한결같은 무표정한 얼굴이 보였다. 나는 그의 얼굴에서 시선을 찔끔씩 들어 올렸고, 마침내 그의 머리 위에 [자이드]라는 이름을 보았다.

그의 표식은…… 보라색으로 화려히 빛나고 있었다.

“…….”

사실을 확인하자 머리가 아득해지는 기분이다.

그렇게 찬란하게 빛나는 보라색 이름표를 보고 있으니 입에서 어이없는 숨이 터져 나왔다.

“허-.”

나는 시선을 내려 검은 머리카락 아래에 무감한 빛을 띠고 있는 호박색 눈깔을 쳐다봤다.

한결같이 무덤덤한 그의 눈을 보자 속에서 울컥하는 감정이 치솟았다.

“네놈은 언제 파티 걸었냐고……!”

“그대가 적에게 쓸데없는 감정을 느끼고 있을 때다.”

“허…… 내 의견은 안중에도 없냐?”

“그렇군. 그대의 의견은 어떤가.”

“……지금 물어봤자 뭔 소용이냐고!”

“싫은가.”

한결같이 담담하게 말하던 그가 진지한 눈으로 내게 물어왔다.

차분한 느낌의 호박색 눈동자를 마주 보자 흥분해서 따지던 나는 멈칫했다. 입술을 달싹 벌렸다가 이내 꾹 다물었다.

“…….”

싫냐고 물으면 할 말이 없었다. 딱히 싫다는 감정이 들지 않았으니까. 단지 억울한 마음이 들 뿐이다.

그리고 애초에 이건 싫고 자시고의 문제가 아니다. 이 남자는 처음부터 예감했지만…… 전설의 무기를 사용하고도 끄떡없는 선택받은 자였다. 그리고 전설의 무기로 발현된 나는, 나를 활용할 수 있는 자가 필요했다.

“……싫은 게 아니라…….”

“그럼. 동료로 받아 주는 건가.”

“…….”

하지만 두 놈도 벅찬데 세 놈씩이나 굳이 파티원으로 받아야 할까. 선택받은 자라고 해도 굳이 함께할 필요가 없지 않나. 이게 맞는 건가, 라며 내 앞날에 대한 걱정이 몰려와 망설이듯 입술을 우물거려야 했다.

“힘을 억누르지 않은 건 처음이다.”

“…….”

“그대와 함께하고 싶다.”

머뭇거리는 나에게 남자 나름대로 진심을 담은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그시 내려다보는 눈빛을 마주하지 못하고 그의 눈동자를 피하듯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초토화된 방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다비와 루스가 나를 찾아오면서, 이곳의 구조물을 온통 박살을 내고 벽을 허물어 놓은 상태였다. 더해서 바닥에는 남자의 단원들이 모조리 쓰러져 있었다.

“…….”

그 처참한 풍경을 눈에 담고 있으니 ……가슴 안에 묵직한 책임감이 심어지는 느낌이다.

뜻하지 않았지만, 남자의 주변을 온통 황량하게 만들어 놓은 상태다. 이렇게 박살 내놓고 남자 혼자 덩그러니 놓고 가는 건-.

‘너무 파렴치한 악당 아니냐…….’

고개를 들어 앞에 있는 남자를 쳐다봤다. 그러자 무섭다고 생각한 커다란 남자가 내 대답을 얌전히 기다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오매불망 주인을 기다리는 개와 닮아 보였다.

“……그러든가.”

나는 놈의 호박색 눈동자를 보다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이미 이 지경으로 다 부수고 박살 내고 초토화시키다 못해 이 남자 혼자 남아서 내 선택을 기다리는 상황인데……같이 가야지 어쩌겠나 싶다…….

“좋다. 그대는 이제부터 나의 보스다.”

심란한 마음을 느끼던 중, 남자 특유의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의 굳건한 입에서 ‘보스’라고 부르겠다는 말에 귀가 쫑긋했다.

우울하게 떨군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눈앞에는 누구도 쉽사리 대하기 힘든, 강하디강한 남자가 나를 보고 있었다.

“그거-.”

조금 상기된 투가 입에서 흘러나왔다.

위압감을 풀풀 풍기는 최종 보스 같은 놈이 내게 ‘보스’라는 말을 하자 눈앞에 있는 남자가 점차 듬직한 부하로 보였다.

서서히 가슴이 부풀어 오르는 느낌과 함께 입술이 움칫움칫했다.

“좋은데.”

흡족한 미소가 얼굴에 번졌다.

앞에 있는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충성스러운 모습에 억울했던 기분이 서서히 풀리는 듯했다.

가장 통제 불가일 것 같은 놈이 의외로 내게 보스라며 깍듯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드디어…… 전설의 무기인 내게 부하다운 부하가 생긴 건가.’

흐흐, 입술 끝이 주체할 수 없이 쭉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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