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속에 빙의된 나는 무기입니다 2권
4. 파티원
애초 자니스에 온 목적은 장비를 맞추기 위해서다.
하지만 봇짐에 든 골드가 몽땅 가루가 된 바람에, 마력이 깃든 비싼 방어구는 그림의 떡이 되어버렸다.
다시 골드를 벌어야 한다. 강력한 파티원도 구했으니, 함께 몬스터를 사냥하면 금방 돈이 모일 것이다.
후에 주변에 있는 마을로 가서 네스키 사냥에 돌입하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갖추면 된다. 그러니 자니스에 계속 머물 필요가 없었다.
마법사의 마을인 자니스에서 원거리 무기를 사면 좋긴 한데, 다른 곳도 상관없다. 어차피 직업이 일치하지 않아서 몇 번 사용하면 부서지고 말테니까.
그렇게 생각을 마친 뒤 숙소로 들어왔다. 그러자 의외로 얌전히 있는 놈들의 모습이 보였다. 잘됐다 싶어 곧장 내 계획을 말했다. 마을을 떠날 거라고. 놈들은 순순히 동의했다.
날이 밝고, 어제 말한 대로 정오쯤에 루스가 돌아왔다.
그렇게 마을을 떠나려는데, 사람들이 힐러가 떠난다는 소식을 듣고 울고불고 붙잡아 댔다.
그 광경에 당황하는 것도 잠시, 얼른 입구 너머로 몸을 피신했다. 뒤를 돌아보자 유유히 걸어가는 루스를 사람들이 맹렬히 붙잡고 있었다.
루스는 자신이 따라야 할 분이라며 정중하고 단호하게 사람들에게 말을 하고 돌아섰다. 부드러운 듯 압도하는 아우라에 사람들이 결국 하나둘씩 손을 뗐다.
멀리서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힐러의 위치가 상당하구나 싶었다.
그리하여, 대단한 힐러와 파티를 맺은 채 자니스를 겨우 빠져나왔다.
“기복이 네가 무기잖아.”
“나도 원거리 무기는 있어야 몬스터랑 싸울 거 아니냐.”
나는 옆에 있는 다비 놈을 흘겨봤다. 살판 난 듯이 놈의 피부에는 번지르르한 윤기가 돌고 있다.
“내가 기복이 사용해서 다 처리해 줄게.”
컨디션이 좋은 녀석을 보니, 반대로 나는 힘이 쭉 빠졌다.
“……계속 변신하고 싶진 않다고.”
맥아리 없게 말을 뱉고서 터덜터덜 숲길을 걸어갔다.
‘대체, 이 자식은 변신 과정을 뭐로 생각하는 거냐고…….’
나는 한시라도 빨리 장비 세팅을 하고 싶었다. 이런 내 말에 루스는 비싸게 거래가 되는 몬스터 껍질이 있다며 길 안내를 해 주는 중이다.
앞서 걸어가는 루스의 하얀 뒤통수를 보며 숲길을 헤쳐갔다. 그러자 다비 놈이 또 내 옆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기복이가 무기로 변하는 편이 확실하게 처리될 텐데?”
이놈은 아까부터 자꾸만 무기를 산다는 내 뜻에 태클을 걸고 있었다.
“변신은 최후의 수단이야.”
나의 무뚝뚝한 대답에도 놈은 능청스럽게 말을 뱉었다.
“단번에 못 잡으면 몬스터를 피해 가면서 변신해야- 으음?”
다비 놈이 문득 진지한 얼굴을 하고서 ‘그거, 스릴 있고 좋겠는데.’라며 새로운 발견을 한 사람처럼 눈을 반짝 빛냈다.
그 생기 어린 목소리가 내 귓구멍 속으로 들어오자 속에서 울컥하는 게 올라왔다.
‘진정하자. 진정하자. 저놈이 하루 이틀 미친 소리를 내뱉는 것도 아니잖아.’
마음을 다스리며 입을 꾹 다문 채 앞으로 발을 뻗을 때다.
“레스탈로스의 마력을 못 버티고 꼴사납게 기절한 사람이 말은 잘하시는군요.”
앞서가던 루스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을 뱉었다.
묵묵히 걸어가던 루스는 여태 다비 놈과 내 대화를 듣고 있었나 보다.
“…….”
싱글싱글 웃어대던 다비 녀석이 루스의 목소리를 듣자 표정이 설핏 굳었다. 놈이 고개를 들고서 앞에 걸어가고 있는 루스를 탐탁지 않게 쳐다봤다.
“정체를 알았다면 실수 따윈 안 했지.”
“실수로 죽지 않아서 무척 아쉽습니다.”
옆과 앞에서 으르렁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침에 이어서 또 지랄하는 두 놈을 보니 골이 울렸다. 그나마 호전된 점은, 처음과 달리 서로를 죽이려 들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대신, 틈만 나면 아주 달갑지 않다는 듯이 서로를 헐뜯어 댔다.
지금처럼.
“그러고 보니, 네놈은 내가 죽을 거라 했었지. 약한 네놈과 달리, 나는 쉽게 죽지 않아.”
“며칠씩이나 기절한 약골은 거대한 마력을 못 견디고 죽을 거라 짐작한 겁니다.”
“짐작이 엉터리네. 힐러라는 자가 회복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도 눈치를 못 채서야 원.”
다비의 말에 앞서가던 루스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몸을 반쯤 틀었다. 싸늘한 얼굴로 다비를 쳐다보던 루스가 입을 열려 할 때다.
그 옆에 작작 하라는 듯이 쳐다보던 나와 눈이 마주쳤다.
루스의 보랏빛 눈동자가 잠깐 흔들리더니 열었던 입술이 달싹거렸다. 그러다 입을 꾹 다물었다. 다비를 살벌하게 흘기며 다시 몸을 앞으로 돌렸다.
……그래도 저놈은 옆에 놈과 달리 비교적 내 눈치를 보는 놈이라 다행이다.
그렇게 생각할 즈음, 옆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자 다비 놈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짧게 혀를 차더니 싸늘한 기색을 거두며 걷기 시작했다.
“…….”
목에 잔뜩 힘을 주고 있던 나는 서서히 힘을 풀었다. 그만하라고 오만상을 지으며 쌍욕을 박아 버리려던 참이었는데 놈들이 직전에 그쳤다.
쓸데없는 곳에 에너지를 쓰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좀 지친 상태였다. 정확히는 심적으로 말이다.
‘그럴 수밖에…….’
빌어먹을 어젯밤 때문에 나는 심란했으니까.
어제, 루스가 성당으로 향하고 다비와 둘이 숙소에 남았을 때다.
짐도 없고, 체력이나 비축할 겸 일찍이 잠자리에 들려고 했다.
창가 옆에 있는 낡은 침대에 풀썩 누웠다. 자려고 눈을 감는데 내 위로 그림자가 진하게 졌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달빛을 받은 다비의 얼굴이 보였다. 놈은 태연하게 내 위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상황 파악도 못 하고 얼어서 놈을 쳐다봤다. 굳은 목소리로 뭐 하는 거냐고 묻자 다비 놈은 사뭇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오늘. 다른 놈이랑 했으니까 나랑은 두 배로 해.’
무슨 개소리인가 싶어 나는 입을 벌리며 놈을 쳐다봤다. 붉은 눈동자가 가라앉아 있는 게 보였다. 지금 이놈은 진심으로 하는 소리였다.
가슴 한편에 불길함이 스칠 때다. 놈이 순식간에 내 바지를 끌어 내렸다. 그 손길에 기겁하며 바지를 끌어 올렸다. 놈이 다시 바지를 내리며 아래에 자리를 잡으려 하자 나는 한껏 발버둥을 쳤다.
몬스터도 없는 상황에서 변신할 필요가 뭐 있냐고 악을 쓰는데 놈이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해 댔다.
‘밖에다가 쌀 거니까 변신 안 해도 돼.’
그 개소리에 나는 제대로 얼어 버렸다.
……변신이 아니면 왜 하는 건데……?
그 의문에 멍해 있던 사이 놈이 내 팔목을 한 손으로 잡고 위로 올렸다.
넋 놓은 틈에 놈이 거침없이 파고들어 와 거칠게 휘저어 댔다.
내 위로 달뜬 숨을 뱉던 놈이 상체를 숙였다. 귓가에 입술을 가져다 대더니 내 이름을 나직이 불렀다.
‘기복. 지금 우리가 하는 건 변신이 아니라 섹스야.’
정신없는 와중에도 놈이 속삭인 말이 귓가에 때려 박혔다.
흐릿한 시선으로 놈을 올려다봤다. 놈이 잔뜩 굶주린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뒤로, 오랫동안 놈은 나를 붙들고 놔주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엉엉 울다 어느 순간 정신을 놓아 버렸다.
오늘 아침 눈을 떴을 때, 창가에 햇볕이 밝게 내리쬐고 있었다. 그리고 숙소 욕실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가 방 안으로 들려왔다.
몽롱한 정신이 차차 깨어나자 나는 심란해졌다. 행위 중에 놈이 뱉은 말이 머릿속에 강렬히 맴돌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어제 그 행위는 변신이 아니라 섹스라고.
나는 단순히 몬스터를 처치하기 위한, 이 세계 만의 방식이라고 변신 행위에 대해 나만의 정의를 내렸었다. 하지만 어제 행위의 목적은 오롯이 몸을 섞는 것뿐이라고 놈이 말했다.
……미친놈이 뱉은 겨우 한 문장으로 인해 겨우 다잡았던 마음이 흔들려 버렸다.
아주 착잡한 기분으로 침대에 앉아 있던 차다.
숙소의 방문이 열렸다. 문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루스가 멋들어진 남색 제복을 차려입은 상태로 들어오고 있었다.
루스가 멈칫하더니, 욕실 쪽을 찌푸리며 쳐다봤다.
‘배려 따위 없는 저런 놈이랑은 파티를 끊어 버리시죠.’
그럴 수 있으면 나도 그랬겠지…….
시무룩한 어조로 말을 뱉자 루스가 한숨을 쉬며 다가왔다. 그리고 녹진하게 풀려 버린 내 몸을 위에서 내려다봤다.
전날, 루스도 그렇고 몇 번이나 그 짓을 한 터라 몸이 액체처럼 흐물거려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이 꼴로 어떻게 마을을 떠나나 싶었다. 하지만 루스는 힐러였다. 내 상태를 보더니 곧장 힐을 해 주었다. 순식간에 몸에 활력이 돌기 시작하자 감탄이 터져 나왔다.
그렇게 몸이 차차 회복될 즈음, 욕실 문이 벌컥 열렸다.
다비가 알몸으로 루스와 내 앞으로 다가왔다. 아래에 덜렁거리는 흉기에 인상을 구기며 고개를 돌리는데, 다비가 누워 있는 내 몸을 확 잡았다.
침대 위로 엉거주춤하게 몸이 들렸다.
뭐 하는 짓이냐고 말을 하기도 전에 다비가 굳은 목소리로 루스를 향해 말했다.
‘기복이 구멍 치료는 내가 할 거니까, 네놈은 꺼져.’
다비의 이 말을 시작으로 놈들은 아침부터 서로를 헐뜯기 시작했다.
형편없네 뭐네, 고통 없이 채울 수 있으니 저놈을 내치라는 식의 말이 들려왔다.
더해서 두 사람의 입에서 말끝마다 구멍이란 단어가 들려왔다. 그리고 당사자인 나는 아래를 훤히 내놓은 상태였다.
나는 외설적인 싸움 소리를 듣다 결국 아침부터 놈들에게 지랄발광 소리쳤다. 얌전해진 다비 놈을 욕실로 밀어 넣고 나서야 루스에게 마저 힐을 받을 수 있었다.
이렇듯 아침부터 아랫부분 갖고 싸워대는 놈들과…… 어젯밤 일 때문에 현타가 밀려와 지금 좀 우울한 상태다.
‘하필 선택된 놈들이 저런 놈들이냐고…….’
옆에 태평하게 걸어가고 있는 다비 놈과 앞서 걸어가고 있는 루스를 쳐다봤다. 함께해야 하는 파티원들의 상태를 보니 감정이 가중됐다.
우울감을 떨치려 주변으로 시선을 돌렸다. 울창했던 숲길이 점점 듬성듬성해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축축했던 흙들도 바싹 말라 있었다. 건조한 공기가 피부로 느껴졌다.
주변 풍경이 바뀌고 있는 것을 보며 나는 앞에 있는 루스를 향해 물었다.
“……멀었어?”
복잡한 머리 좀 환기하게, 몬스터 사냥을 빨리 하고 싶었다. 이런 마음으로 앞에 걸어가는 루스에게 물었건만…… 내 심란함의 주원인인 옆의 놈에게서 대답이 들려왔다.
“힘들면 업어 줄까?”
마치 내가 입을 열기 기다렸다는 듯이 놈이 덥석 말했다.
나는 흘끗 옆을 쳐다봤다. 다비 놈이 고개를 기울이며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놈이 쭉 뻗은 눈매를 휘었다. 입꼬리 역시 자연스레 올라가고 있었다. 놈의 웃음과 함께 바람이 선선히 불어왔다. 핏빛 머리가 살랑거리며 그에게서 싱그러운 풀 향이 맡아졌다.
햇살처럼 눈 부신 미소를 지은 놈을 보니 마음이 묵직해져 왔다.
……이놈은 진짜로 나를 애인 취급하고 있었다.
“……필요 없어.”
내 속과 달리 환하게 빛나는 낯짝을 보다가 고개를 휙 돌렸다.
살짝 열 오른 귓불을 문지르다 앞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들었다.
앞서 걸어가던 루스가 몸을 반쯤 튼 채 나를 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루스는 나를 유심히 보더니 입을 열었다.
“더우십니까.”
“어? 아, 아니- 으음? 좀 더운 것 같기도 하고…….”
부정하던 나는 실제로 불과 몇 분 전보다 날씨가 후덥지근해진 느낌에 말을 얼버무렸다.
“제 곁으로 오시지요. 얼음 속성이니 곁이 시원할 겁니다.”
“이 정도는 괜찮아.”
“앞에 보이는 바위 너머부터 사막 사냥터입니다. 갈수록 더워질 겁니다. 더군다나 불 속성인 놈과 가까이 있으면 더욱 더울 테지요.”
“……어쩐지.”
나는 여전히 뜨거운 귓불을 문지르며 앞으로 걸어갔다.
그렇게 앞에 있는 루스와 가까워지려 할 즈음이다. 뒤에서 다비 놈이 내 팔을 붙들었다.
“기복. 속성의 양은 조절할 수 있어.”
당겨지는 팔에 뒤를 돌아보자 놈이 가지 말라는 듯이 붙잡고 있었다.
눈을 아주 시무룩하게 뜨며 울적하게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너무나도 ‘척’이라는 게 보였다. 그러나 배우 얼굴이 기깔나니 한순간에 내가 개를 버리고 가는 배은망덕한 새끼라도 된 것 같다. 놈의 붉은 머리 위에 가상의 귀가 축 처진 듯 보이기도 했다.
“……알겠으니까 팔 놔.”
내 말에 냉큼 표정을 싱글벙글하게 바꾸는 놈의 낯짝이 보인다.
……자꾸 이놈들에게 휘말리고 있었다.
나는 심란한 얼굴로 앞을 바라봤다. 그러자 루스의 보랏빛 눈동자와 마주쳤다.
루스는 혀를 살짝 차더니 차분한 투로 말을 뱉었다.
“곧 도착하니 준비하시지요.”
“……그래.”
루스가 다시 앞을 돌아보며 바위가 있는 방향으로 걸어갔다.
나와 다비 놈도 루스의 뒤를 쫓아 걸었다.
걸으면서 허리춤에 차고 있는 단검을 확인하듯 만졌다. 제대로 들어 있었다.
일단 옆에 강력한 두 놈이 있으니 사냥터에서는 놈들에게 신경 끄고, 내 한 몸만 잘 지키면 될 듯하다.
루스 말로는 이 사냥터 몹들은 원거리 공격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대신 힘이 강하니 조심하라는 말을 덧붙였다.
원거리만 아니면 나도 꽤나 적지 않은 레벨에다가 갈고닦은 실력이 있으니 크게 걱정할 건 없었다.
“…….”
앞에 바위가 보인다. 여길 지나면 사냥터인가 보다.
나는 커다란 바위를 돌아가기 위해 옆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앞에 있던 루스가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러더니 바위에 손을 가져다 댔다.
안 가고 뭐 하나 싶어 쳐다보는데-
루스의 손에서 하얀 마력이 뿜어졌다. 곧장 바위가 차게 얼려졌다. 그러더니 그 커다란 게 파삭, 깨져 버렸다. 눈앞에 반짝거리는 가루들이 떨어졌다.
“허-.”
기가 막혀 절로 숨이 터져 나왔다. 무슨 과자를 부수는 것도 아니고 손 하나 댔다고 커다란 바위가 박살이 나느냔 말인가.
나는 입을 벌린 채 고개를 내렸다. 바닥으로 투둑 떨어지는 바위의 잔재들이 보인다. 잔재들은 파사삭, 얼음 가루가 되어 바닥에 녹아들고 있었다.
“…….”
고개를 다시 들자, 앞을 막고 있던 바위가 휑하니 사라져 있었다. 대신, 드넓은 황토색 사막이 펼쳐지고 있었다.
걸어온 길은 초록 숲길이었다. 지금 서 있는 곳에서 불과 몇 걸음 앞에는 풀떼기 하나 없는 사막을 보니 이질감이 느껴졌다.
아마 바위가 이 두 지역의 경계였나 보다.
‘……어떻게 길 하나를 뚫어버리냐.’
눈앞에는 그늘 하나 없이, 태양이 내리쬐고 있는 모래들이 보인다.
멈춘 채 앞을 보고 있으니, 사막의 바닥이 울룩불룩 비정상적으로 움직였다. 그러자 아까 루스가 사막 사냥터라고 한 게 떠올랐다. 하지만 모래 위에는 몬스터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모래 안을 기어 다니는 몬스터인가 보다.
“가시죠.”
루스가 담담하게 말을 뱉었다. 나는 정신을 바짝 차리며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루스가 한 발 걸어갔고 나도 루스를 따라 발을 뻗었다. 그러자 옆에서 무감하게 서 있던 다비가 내 팔을 잡았다.
잔뜩 용맹하게 발을 뻗고 있던 참에 왜 잡냐는 식으로 놈을 쳐다봤다.
“몬스터 나오기 전에 변신할까?”
다비 놈이 아주 태평한 얼굴로 능글거렸다.
나는 놈의 비어 있는 손을 흘끔 내려다봤다. 그러고 다시 놈의 눈을 쳐다봤다.
“그러게, 무기를 하나 사지 그랬냐.”
놈의 손을 툭툭 털어내며 단호하게 말하고 앞으로 걸어갔다.
‘무기가 없으면 구경이나 해야지, 뭐 어쩌겠냐.’
마을까지 들렀음에도 무기를 안 산 네놈 탓이지.
그렇게 다비를 지나쳐 사막으로 걸어 들어갔다. 갈수록 후덥지근한 열기에 팔을 걷어 올렸다.
아예 옷을 시원하게 벗으면 좋겠지만…… 초보자 방어구이긴 해도, 없는 것보단 있는 게 능력치에 도움이 되니 벗을 수가 없었다.
“…….”
그때, 울룩불룩한 바닥이 저 멀리서 빠른 속도로 내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나는 허리춤에 있는 단검을 재빠르게 꺼내 들고 준비를 했다. 어디 덤벼 보라는 식으로 한 발을 뒤로 물리며 공격 태세를 갖추었다. 이내 지척까지 불룩거리는 모래가 다가왔고 바닥이 움푹 파였다.
사방으로 모래가 흩어짐과 동시에 바닥을 뚫고 몬스터가 벌컥 튀어나왔다. 눈앞에 나타난 몬스터는 3m 정도 크기의 검은색 전갈이었다.
나는 빠르게 눈을 올려 놈의 레벨을 파악했다. [Lv. 62]. 비싼 껍데기를 줘선지, 생긴 것과 달리 꽤 높긴 했다. 그러나 원거리 공격만 하지 않는다면 1:1로 무리 없는 레벨이다.
몬스터를 가늠하던 중, 전갈 몹이 집게발을 내 쪽으로 조준하며 공격을 시도했다.
“대놓고 공격하면 맞겠냐-.”
나도 나름 능력치가 높은 편이라고.
나는 자신만만하게 전갈의 공격을 점프해서 피했다. 내려꽂히는 집게발에 사방으로 모래가 팍 튀었다.
모래 깊숙이 들어간 집게발이 들어 올려졌다. 다시 공격하려는 움직임을 보고 한 번 더 피했다. 그러자 독침이 발라진 꼬리가 휘둘러졌다.
나는 빠르게 뒤쪽으로 굴렀다. 잠시 전갈 몹의 패턴을 파악하기 위해 공격을 미뤄두고 회피만 했다. 그러다 상당히 단순한 패턴을 가진 몹이란 것을 깨달았다.
“뭐야- 쉽잖아.”
나는 곧장 집게발을 드는 몹의 움직임을 보며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몹의 집게발을 피해 눈깔에 단검을 휘둘렀다.
잔뜩 공격력을 실어서 찌르니 몹에게서 피가 팍 튀어나왔다. 제법 피가 깎인 걸로 보인다.
그 순간, 꼬리가 내 쪽으로 사정없이 휘둘러졌다.
나는 다시 뒤로 피했다. 곧장 독침이 발라진 뾰족한 꼬리가 공격해 왔다. 냅다 점프를 했다. 빠르게 몹에게 가까이 붙었고 독침은 몹의 제 몸통에 꽂혔다. 굳은 채로 퍼덕퍼덕하는 소리를 내더니 옆으로 쓰러졌다.
풀썩, 모래가 사방으로 휘날렸다.
쓰러진 몹이 여전히 꿈틀거리자 마무리로 단검을 찔러 넣었다. 그러자 몹의 움직임이 완전히 그쳤다.
나는 몹의 앞에 쭈그려 앉아 몹의 껍데기를 슥슥 갈라서 벗겨냈다.
“완전 쉽네.”
신나게 혼잣말을 뱉으며 비싸게 거래가 된다던 껍데기를 주섬주섬 모았다. 그러자 가까운 거리에서 루스의 단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쉬운 몬스터는 아닙니다. 기복 님의 실력이 좋은 덕이지요.”
“흐흐. 그렇지. 나도 한 실력 하긴 해.”
나는 우쭐거리는 마음에 손으로 코를 한 번 쓱 훑었다.
그래, 그래. 몹의 레벨이 낮지 않은데 쉬울 리가. 나도 레벨 100을 겨우 만들었는데.
이어서 몇 걸음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복이 방금 멋졌어.”
“뭐 이 정도 갖고.”
다비도 대단하다는 듯 감탄하는 조로 말을 뱉었다.
나는 나름 실력에 자부심이 있었다. 그것을 알아봐 주고 있자 어깨가 하늘 높이 치솟았다.
이거지 이거. 나도 이 세계에선 나름 대단한 축이라고.
앞에 있는 분리된 껍데기를 들었다. 한껏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가볍게 몸을 일으켰다.
“다음- 어…….”
내가 고개를 들었을 때, 입에서 멍청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
나는 얼빠진 얼굴로 주변을 삐걱삐걱 둘러보았다. 그러자 내가 전갈과 대치했던 곳을 제외하고, 주변에 전갈들의 사체가 잔뜩 깔려 있었다.
나는 눈을 끔뻑거렸다. 그리고 나와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서 있는 두 사람을 쳐다봤다.
두 사람의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았다. 그런데 그들의 발아래에는 전갈 몹들이 떼거리로 죽어 있었다.
……잠깐 사이에 왜 몬스터 학살이 일어난 걸까.
“껍질은 어느 정도 필요하십니까?”
입을 뻐끔거리는 나와 눈이 마주친 루스가 아까와 같이 상냥한 투로 물어왔다.
나는 그의 질문에 착잡하게 주변을 살폈다.
나는 한 마리를 사냥했을 뿐인데, 더는 사냥하지 않아도 될 만큼 껍데기들이 널려 있었다.
“……이 정도면 충분-.”
말을 뱉던 나는 루스의 뒤편에 있던 모래가 울퉁불퉁한 것을 보며 눈을 크게 떴다.
“루-!”
‘루스! 피해!’
다급하게 말을 뱉으려 할 때다.
루스가 알고 있었다는 듯이 덤덤하게 고개를 돌리더니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손에 흰색 마력이 모이더니 아까 바위처럼 몬스터가 한순간에 얼었다. 이어서 몬스터가 가루처럼 바스러졌다. 안에 있는 알맹이는 사라지고 껍데기만 툭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주 깔끔하고 압도적인 사냥이었다.
나는 그 장면에 말문이 막혀 버렸다.
“충분하시다면 몬스터가 몰려오니, 껍질을 챙겨서 자리를 뜨도록 하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말하는 루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새삼 놈의 머리 위에 있는 [Lv. ?]가 눈에 들어왔다. 동시에 허탈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한 놈에 정신이 팔린 동안 루스는 계속해서 이쪽으로 몰려오는 몬스터들을 처리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것도 아주 손쉽게, 손가락 까딱하면서 말이다.
그런 줄 모르고 자랑하듯 앞에서 우쭐댔던 거냐고…….
‘……빌어먹을.’
의기양양하게 부풀어 있던 가슴이 맥없이 쪼그라드는 순간이었다.
“왜. 아쉬워?”
다비 놈이 내 표정을 물끄러미 보더니 물어왔다.
나는 조금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런 것도 있고.”
놈들의 칭찬에 들떴던 것도 맞지만, 오랜만에 하는 사냥이라 들떠 있었다.
그런데 한 마리를 죽이니 사냥터가 황폐해졌다.
“그러시다면 조금 더 편하게 사냥할 수 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기도록 하죠.”
“근데…… 넌 어떻게 장소를 다 알고 있냐?”
“힐을 해 주던 용병들의 대화로 위치를 파악하는 중입니다.”
“…….”
“저쪽 편이 몬스터의 수가 적은 듯하니, 서둘러 이동하죠.”
주변에 있는 몹들의 껍질을 가득 챙긴 루스가 이동하자는 눈짓을 보냈다.
‘이 황량한 곳에서 대화만으로 위치 파악이 가능한 거냐…….’
놈의 능력치에 현타를 느끼던 나는 서둘러 아래에 널려 있는 비싼 껍질들을 챙겼다.
루스를 따라 발걸음을 옮기자 다비가 또 찰거머리처럼 달라붙었다.
나는 옆을 올려다봤다. 다비가 전갈 껍질을 어깨에 잔뜩 메고 있었다.
내 시선에 놈이 나를 내려다봤다. 빤히 보던 놈이 한 손을 들어 올려 내 볼을 손등으로 부드럽게 문질렀다.
뜬금없는 행동에 멀거니 쳐다보니 놈이 눈꼬리를 휘며 나긋나긋한 투로 말했다.
“기복이는 편하게 사냥해. 주변은 내가 치워줄 테니까.”
……그래. 이놈도 맨손으로 때려잡는구나.
“……내 몸 정도는 스스로 지킬 수 있다고.”
놈에게 됐다고 말을 하고서 당차게 걸어가자 뒤통수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이내 옆으로 다가온 놈이 “진짜 귀엽단 말이야.”라고 읊조렸다.
머리털이 쭈뼛 서는 미친 소리를 애써 무시하고 루스를 따라 걸어갔다.
앞에 가는 루스를 보자 놈은 사정거리 안에 들어온 몹들을 온통 손가락으로 휩쓸고 있었다. 그 때문에 놈을 따라가고 있는 난 헨젤과 그레텔처럼 몹의 시체들을 밟으며 가야 했다.
몹들이 살살 녹아내리는 모습을 보다 보니 문득, 나와 달리 이놈들은 이 사냥터가 시시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빨리 템을 세팅하든가 해야지.’
한시라도 빨리 골드를 모아, 완전 무장을 해야 할 듯하다. 템빨이라도 받아서 같은 파티원인 놈들에게 뒤지지 않을 정도로 올라서야 했다.
“여기부터 몬스터 수가 줄어드는 것 같습니다.”
앞에서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자 앞에 가던 루스가 나를 돌아보고 있었다.
루스의 말에 주변을 둘러보다 눈을 끔뻑였다. 아까와 달리 여전히 사막이긴 했으나 나무가 한두 그루씩 자라나고 있었다. 주변에 오아시스라도 있는 건가 싶다.
“……그렇네.”
바닥을 보자 아까와 달리 모래들이 울룩불룩해지는 빈도가 적었다. 확실히 몬스터의 수가 현저하게 줄어든 것 같다.
“만족하실 만큼 사냥을 하고 마을로 이동하죠.”
“그, 너네는 뭐 하게?”
내가 신나게 몹들을 잡을 동안 이놈들은 심심하지 않을까 싶었다. 솔직히 두 놈은 전갈 몹을 잡을 필요가 없으니까. 놈들은 템 세팅으로 능력치를 끌어올려야 하는 것도 아니고, 전갈 몹을 사냥하는 쾌감도 없었다.
내가 머쓱함에 머리를 긁적거리고 있자, 루스가 차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저는 높은 곳을 찾아 가까운 마을 방향을 파악하고 오려고 합니다.”
“마을…… 그거 좋은 생각이다.”
똑소리 나는 루스의 말에 긁적거리던 손을 멈춘 채 고개를 주억거렸다.
가까운 마을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면, 해지기 전에 마을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럼, 겸사겸사 전갈 껍질도 팔고 장비도 맞추면 일이 일사천리로 돌아간다.
이제야 파티가 순조롭게 진행이 되는 것 같다.
‘그럼 그럼, 누구의 파틴데.’
자고로 전설의 무기가 있는 파티에는 이렇게 똑소리가 나는 파티원이 있어 줘야지.
“갔다 오겠습니다.”
“그래 그래.”
그렇게 멀어지는 루스의 하얀 뒤통수를 자랑스레 보다 문득, 옆을 쳐다봤다.
루스를 성가시게 쳐다보던 다비 놈이 내 시선을 느끼고 나를 내려다봤다.
눈을 깜빡거리며 순진무구한 척 보는 놈에게 ‘넌 뭐 안 하냐?’ 식으로 쳐다봤다. 그러자 놈이 아주 당연하다는 투로 말했다.
“나는 기복이 지켜줘야지.”
“내 몸은 내가 지킨다니까.”
“응. 기복이는 사냥해.”
이놈은 내 말을 귓등으로 듣질 않고 있다. 그래서 네놈도 똑소리 나는 뭔갈 해 보라는 식으로 말을 하려다…… 관뒀다.
같은 파티로 묶인 이상 가만히 두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다. 이놈은 예측불허라 어떤 돌발행동을 할지 알 수 없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멋대로 하란 투로 말했다.
“그러든가. 대신 저 멀리 가 있어.”
단호한 내 말에 다비가 주변을 훑더니 나를 가만히 쳐다봤다.
나는 이번에는 양보 못 한다는 의사를 담아 눈을 부릅떴다.
‘네놈들이 괴물이라 그렇지 나도 꽤 강하다고.’
사냥터가 제법 한적하기도 하고, 이 정도 몹들은 지켜주지 않아도 알아서 사냥할 수 있다. 그러니 놈이 가까이서 지켜주겠다고 있는 건 상당히 거슬리는 짓이다.
“알겠어.”
나의 완고한 의사를 읽었는지 다비는 순순히 대답을 하며 멀어졌다.
그의 핏빛 뒤통수를 잠깐 쳐다보다 다시 앞을 바라봤다. 후덥지근한 사막의 열기로 인해 모래가 이글거리고 있었다.
나는 조금 더 민첩력을 높이기 위해 망토를 벗어 바닥에다 던졌다. 그러자 한결 몸이 가볍고 또 시원했다. 허리춤에 있는 단검을 꺼내 들며 울룩불룩해진 모래를 향해 걸어갔다.
내 발소리를 감지했는지 불룩한 모래가 빠른 속도로 내 쪽으로 다가왔다.
나는 자세를 잡으며 놈이 튀어 오르길 기다렸다. 움푹 파이더니 예상대로 전갈 몹이 땅속에서 튀어 올랐다. 집게가 내 쪽으로 강하게 날아왔다.
패턴 파악을 진작 끝낸 터라 나는 쉽게 피했다. 몹의 공격이 빠르긴 했다만 내 민첩력이 더 높았다. 근접전만 주야장천 레벨 100이 될 때까지 했다. 나름 자부심이 있는 상태다.
“이 정도는 껌이지.”
나는 전갈의 목, 혹은 눈과 같이 허술한 쪽을 파고들어 단숨에 베었다. 그러자 전갈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이어서 다른 전갈 몹들이 바닥 아래에서 한둘씩 푹푹 튀어나왔다. 몇 놈 더 늘었다고 해도 무리는 없다.
“나도 내 한 몸은 지킨다고.”
이 몹들 정도면 열 마리가 와도 처리가 가능하다. 공격력은 높지만 패턴이 단순해서 공격하는 족족 피할 자신이 있었으니까.
그렇게 또다시 몹들의 공격이 쏟아졌고 나는 아주 날쌔게 틈을 파고들어 처리했다.
사냥에 집중할수록 아드레날린이 솟구쳐, 가슴 안으로 시원한 공기가 들어와 막힌 기분이 뚫리는 듯했다. 더해서 경험치도 쭉쭉 오르고, 민첩력도 상승하는 게 느껴졌다.
무엇보다 잡생각이 들지 않았다. 공격이 오면 피하고 빈틈을 노려서 단검을 찔러 넣는 것에 집중했다. 이렇게 몹들을 사냥을 하다 보니 우울함이 녹아내리고 기분이 점점 좋아지기 시작했다.
“이거지. 이거지.”
자고로 모험가라면 이렇게 사냥도 해 줘야지.
온통 사냥하는 것에 집중했던 나는 어느 순간 이상함을 느꼈다. 몹들이 주변에 나타나지 않고 있음을 깨달았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한두 개씩 풀떼기가 찔끔 있던 처음 장소와 달리, 나무들이 제법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여기가 어디냐……?”
고개를 조금 더 돌렸다. 그러자 초록 나뭇잎들 틈으로 사막 풍경이 보였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위치를 파악해 보려 했다. 그러나 내가 루스도 아니고 모래만 보고 위치를 아는 건 무리였다. 풍경이 다 거기서 거기다. 방향도 모르겠다.
아무래도 사냥에 취한 나머지 처음 장소와 멀어져 버린 것 같다.
“비슷비슷한 풀 있는 거 보니까…… 찾을 수 있겠지.”
이만하면 충분히 스트레스도 풀었고, 떨어진 껍질을 챙겨서 돌아가면 될 듯하다.
그렇게 멀리 온 건 아닌 것 같다. 뙤약볕 사막에서 왔으니까 풀들이 줄어드는 쪽으로 가면 되지 않을까 싶다.
나는 나무들이 듬성듬성 심겨 있는 곳을 지나갔다. 습도가 낮아 그늘진 곳은 적잖이 서늘했다.
혹시 마주치게 될지도 모르는 전갈을 대비해 단검을 손에 쥔 채로 당차게 걸어갔다.
조금 걷다 보니 다시 모래가 스스슷,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여기 있는 전갈 몹들은 이제 눈감고도 처리할 수 있는 수준이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나올 테면 나오라는 식으로 갈 길을 갔다. 그러자 저 앞에 모랫바닥에서 전갈이 팍하고 튀어 올랐다.
“뭐, 뭐야……?”
앞에 보이는 전갈의 모습에 눈이 크게 벌어졌다. 왜냐, 여태 잡았던 놈들과 사뭇 다른, [Lv. 80]의 붉은 전갈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레벨이 높긴 했지만, 아까 놈들과 비슷하다면 상대 못 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쿠액, 소리와 함께 입에서 독침을 쏟아내는, 원거리 식의 공격을 하고 다시 모래 안으로 파고들어 가는 모습을 내가 지금 포착해 버렸다.
나는 직감했다. 저 몹과 마주치면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한다는 것을.
“시발…….”
욕이 절로 뱉어졌다.
‘가볍게 사냥 즐기러 왔는데 목숨을 왜 거냐고…….’
나는 등에서 식은땀이 주룩 흐르는 걸 느끼며 뒷걸음질 쳤다. 아직 저 몹의 사정거리 안에 내가 들어가지 않아, 다행히 나를 감지하지 못한 듯하다.
나는 무작정 몸을 틀어 몹의 반대편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최대한 저 몹과 멀어지는 게 우선이다.
여전히 멀지 않은 곳에서 몬스터의 소리가 들려왔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멈추지 않고 걸었다. 저 몹을 피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 찼다.
그래서 바닥 아래를 보지 못한 게 화근이었다.
앞에 있는 두툼한 나무 하나를 지나칠 때다. 발목이 갑자기 꽉 조여오더니 몸이 단숨에 공중으로 들어 올려졌다.
“흐악!”
깜짝 놀란 나머지 사지를 푸드덕 흔들었다. 그러자 몸이 양쪽으로 흔들렸다. 동시에 앞에 있는 나무들과 풀, 그 너머에 쨍한 사막, 선인장,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눈 부신 태양 등 모든 풍경이 거꾸로 보였다.
나는 뒤집힌 세상을 쳐다보며 눈을 멍청하게 끔뻑였다. 그러다 힘겹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한쪽 발목에 칭칭 감겨 있는, 단단한 황색 밧줄이 보였다. 이어서 밧줄과 단단하게 연결된 두툼한 나무가 보였다.
“……망할, 이게 뭔 꼴이냐…….”
대체 누가 사냥터에 이딴 함정을 설치해 놓은 거냐고…….
나는 댕강 매달린 우스운 꼴에서 벗어나기 위해 윗몸을 일으켰다. 몹들이 언제 공격할지 몰라 단검을 꽉 쥐고 있었던 것이 천만다행이다. 이런 한심한 모양새에서 빨리 탈출을 할 수 있을 듯하다.
나는 단검을 손에 바로 쥐며 발목에 칭칭 감겨 있는 밧줄을 싹싹 썰기 시작했다.
“……그냥 밧줄은 아니네.”
일반 밧줄이면 단숨에 잘려야 했다. 하지만 밧줄 모양이 단단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그럼 그렇지……. 사냥터에 평범한 함정을 설치할 리가 없지.’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조금 더 힘을 가해서 밧줄을 강하게 썰었다. 그러자 조금이지만 밧줄이 살짝 끊어지는 게 보였다.
탄력을 받아 열심히 팔을 움직일 때다.
“……어-.”
손에 쥐고 있던 단검이 쨍- 하는 소리와 함께 부서졌다.
나는 넋 놓은 얼굴로 손을 바라봤다. 칼날이 없는 휑한 검 손잡이가 보였다.
시선을 올리자 바닥에는 칼날이 가루처럼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나는 다시 빈 검의 손잡이 부분을 바라봤다.
“아……아, 안 돼. 안 돼. 안 된다고!”
나는 검의 손잡이 부분을 눈가에 가져다 대며 확인했다. 그러나 날카로운 칼날 부분은 남김없이 산산조각이 난 상태였다.
‘말도 안 돼! 하필이면 왜 지금 부서지는 건데!’
이런 뭉텅한 칼집으로 마력이 담긴 밧줄을 끊어내는 건 무리였다.
“뭐 이러냐고!”
손잡이 부분을 바닥으로 신경질적으로 팍 던졌다. 장비가 썩은 탓에 능력치가 제대로 발휘되지 않아 속이 터질 것 같다.
‘빌어먹을 내구도 따위는 왜 있는 거야! 여기서 탈출하면, 이딴 구질구질한 장비들 다 불태워 버리든가 해야지-.’
개 같은 내구도를 가진 초보자 장비에 대해 한탄을 쏟아냈다. 그러다 문득, 루스와 다비가 전설의 무기인 내게 환장하는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이렇게 뭐 좀 해 보려 하는데 장비가 부서져 버린다면, 빡치다 못해 머리가 훼까닥 해 버리지 않을까…….
아, 그래서 놈들이 제정신이 아니구나. 나보다 강한 놈들이니까 오죽하겠나 싶다.
“……태평하게 놈들을 생각할 때가 아니지.”
나는 다시 상체를 올려 손으로 밧줄을 잡아 뜯어 보았다. 그러나 잔뜩 힘을 준 칼로 겨우 한 가닥씩 끊어지던 밧줄이 아귀의 힘으로 풀릴 리가 없었다.
나는 힘겨운 숨을 토해 내며 몸에 힘을 뺐다. 그러자 몸이 달랑달랑 양옆으로 흔들렸다.
누가 나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꼼짝없이 매달려 있어야 했다.
절망적인 상황에 눈을 질끈 감았다.
“진짜 볼품없어…….”
힘없이 목소리를 뱉으며 눈을 떴을 때다.
눈앞에 길쭉한 다리가 보여 눈을 깜빡였다. 훤칠한 다리를 감싼 검은색 바지와 사냥터와 어울리지 않는, 발가락 보이는 샌들이 누군가를 연상시켰다.
그렇게 앞에 있는 놈의 차림새에 익숙함을 느끼던 차에 위에서 느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복이는 한시도 눈을 뗄 수가 없네.”
다비 놈의 여유로운 목소리가 다리 쪽에서 들려왔다.
그 목소리에 몸이 절로 뻣뻣해졌다. 놈의 얼굴이 있는 곳까지 차마 눈을 들지 못한 채 입술을 깨물었다. 시야에는 놈의 훤칠한 다리를 감싼 검은 바지만 보였다.
“이런 허술한 함정에 걸려들면서, 제 몸을 지키겠다니.”
안 그래도 자신만만하게 내 몸은 내가 지키겠다고 말한, 내 목소리가 머릿속에 끊임없이 재생되던 중이었다.
그 점을 콕 집어 대놓고 말하는 놈 때문에 서늘한 그늘임에도 얼굴이 후끈 더워졌다.
……쪽팔림에 쥐구멍에 머리를 들이밀고 싶었다.
“참 귀엽단 말이지.”
“가, 가만히 보고만 있지 말고 어떻게 좀-!”
놈의 말에 수치심을 못 견디고 울컥 소리치던 차다. 멀지 않은 곳에서 쿠액, 독침을 뱉는 소리가 들려왔다.
흡, 나는 숨을 들이켰다. 나무들 틈 사이로 붉은 가재가 모래를 파고 다시 기어들어 가는 모습이 보였다.
언제 이렇게 가까이 왔지, 생각하다 ‘내 목소리를 들은 걸까?’라는 불안감이 왈칵 들었다.
“빠, 빨리 풀어 줘.”
“음.”
다급하게 놈에게 말을 뱉자 위에서 느긋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내 길쭉한 손가락이 발목에 닿는 게 느껴졌다.
놈이 몇 번 발목을 만지작거리더니 손을 뗐다. 여전히 발목에는 단단한 밧줄이 묶인 상태였다.
“아, 안 푸냐?”
“문제가 생겼어.”
“무, 문제라고……?”
나는 목이 바짝 마르는 기분을 느끼며 고개에 힘을 주고 겨우 놈의 얼굴을 쳐다봤다. 놈의 붉은 눈동자가 물끄러미 내 발목을 보고 있었다.
내가 고개를 힘겹게 들고 있으니 놈이 나를 내려다봤다. 놈은 아주 순진무구하고 태평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더니 대수롭지 않은 투로 내게 말했다.
“안 끊겨.”
“뭐, 뭐?”
“아무래도, 마력을 다 쓴 것 같아.”
“노, 농담이지?”
“으음.”
다비 놈이 자신의 손을 얼굴 쪽으로 가져다 대며 마력을 모으는 듯 가만히 쳐다봤다. 그러자 붉은 마력이 손에 희미하게 이글거리다가 파스스- 물이라도 부은 듯 꺼졌다.
태평하던 놈의 얼굴에 순간적으로 곤란함이 스쳤다.
그의 얼굴을 잠자코 보고 있던 나는 심장이 내려앉는 느낌을 받았다. 거짓말하지 말라는 눈으로 더듬더듬 말했다.
“나, 나도 아직 남아 있는데, 네놈이 고갈 날 리가 없잖아!”
“어제랑 오늘, 함부로 쓰다가 바닥 나 버렸어.”
“그게 무슨-.”
“마력이 아직 회복되지 않은 상태였거든.”
아무리 그래도 나보다 강한 놈이 고갈 날 리가 없을 거라며 애써 부정하며 말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문득 스치는 기억에 입이 다물어졌다.
루스가 힐을 해 주고 난 뒤에 일주일의 회복 기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말이 무색하게 놈은 곧장 눈을 뜨고 루스와 살벌하게 마력을 뿜어댔다. 더해서 놈은 전갈 몹들을 맨손으로 처리한 상태다. 무기 없이, 맨손으로 공격하는 건 상당한 마력이 필요한 일이라 웬만한 사람은 못 하는 짓이었다.
……여기까지 생각을 하자 나는 놈이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님을 실감했다.
등허리를 타고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가, 가서 루, 루스 좀 데려와.”
“기복이를 두고 어떻게 가. 위험하게.”
“그, 그럼 어떡하냐! 계속 이러고 있게?!”
나는 몬스터가 올까 봐 수시로 눈동자를 돌려 주변을 살폈다.
“걱정하지 마. 내가 있잖아.”
그러다 위쪽에서 놈의 들떠 보이는 목소리에 멈칫했다.
나는 눈동자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바지와 하얀 셔츠를 타고 놈의 얼굴이 보였다. 놈의 붉은 눈동자에는 반짝거리는 이채가 돌고 있었다. 무엇보다 놈의 입꼬리가 대놓고 신나게 올라가 있었다.
나는 아주아주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마력 없다며.”
“응. 근데 기복이가 변신하면 무기 안의 마력을 사용할 수 있어.”
“…….”
“그럼 기복이는 밧줄에서 나올 수도 있고, 저기 있는 전갈도 처리할 수 있어. 어때.”
놈이 아주 천진난만한 어린아이처럼 말을 뱉었다. 그러다 얼른 몬스터가 오기 전에 결정하라는 듯이 재촉의 눈길을 내게 보냈다.
……몬스터를 잡으면서 심란함을 겨우 떨쳤건만, 놈의 말에 다시 심란해졌다. 어젯밤 놈과 변신이 목적이 아닌 행위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정말 변신을 위해서다…….
전설의 무기라는 직업으로 발현이 됐는데, 언제까지고 운명을 거부할 순 없다. 받아들일 필요가 있었다. 더해서 두더지처럼 튀어 오르는 붉은 전갈이 있는 이곳에서 루스가 우리를 찾을 때까지 막연하게 기다리는 것도 위험하다.
……그래, 변신이고 뭐고 알겠다고. 그런데-.
“이, 이 상태로 어떻게 하냐.”
“허락한 거야?”
“언제부터 허락받고…… 흣!”
허리춤에 닿은 손이 바지를 거침없이 내려 버리자 몸이 흠칫 떨렸다. 놈의 손길에 매달린 몸이 양옆으로 살짝씩 흔들렸다. 시야가 뒤집힌 상태로 움직이자 어지러웠다.
종아리를 잡아 오는 손이 느껴졌다. 덜렁거리는 내 다리가 딱딱하고 넓은 어깨에 올려졌다.
놈의 다리가 내 얼굴 쪽으로 좀 더 밀착이 되었다. 까만색 바짓단을 쳐다보던 나는 불편한 자세에 이맛살을 찌푸리며 시선을 들었다.
울렁거리는 시야를 드는 순간 나는 숨을 들이켰다.
“흡-.”
같은 남자의 것이 햇살 아래 아주 가깝고 선명하게 보였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시발. 여태 저딴 걸 넣었던 거냐고……!’
몸 안에 저만큼 무식한 크기가 들어왔었다는 사실과 이제 또 들어오리라는 사실에 장기가 오그라드는 기분이다.
그때, 입구를 쓰다듬는 놈의 길쭉한 손가락이 느껴졌고, 나는 눈을 번쩍 떴다.
“뭐, 뭐 하는 거야!”
“기복이 구멍을 이렇게 자세히 보는 건 처음이야. 구멍, 핑크색이네. 아. 방금 움찔거렸어.”
놈의 난잡한 말 때문에 내가 아래를 아주 훤히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 상기가 되어 얼굴에 열이 확 몰렸다.
“그냥- 읏!”
말을 하려던 차에 놈의 손가락이 입구에 닿았다. 쓰다듬듯이 만지더니 살짝 벌렸다. 그러다 안쪽으로 손가락을 살짝 집어넣고 가까운 내벽을 꾹 눌렀다. 조금 더 안쪽으로 길쭉한 것이 닿더니 원을 그리듯 휘저었다. 이어서 피스톤질을 하듯 손가락을 느릿하게 쑤시다 빼는 걸 반복했다.
안쪽을 희롱하는 손길에 나는 몸을 비틀어 발버둥을 쳤다.
“아으…… 흐, 그, 그냥 넣어!”
신음을 겨우 참으며 변신과 무관한 짓을 하는 놈에게 소리쳤다. 그러자 입구를 쓰다듬던 손길이 떼어지더니 위에서 살짝 탁해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 그래도 빠듯해진 참이야.”
놈의 목소리와 함께 다리가 눈앞으로 다가왔다. 곧이어 다리가 살짝 움직이더니 위에 입구가 쭈욱 벌어지기 시작했다. 두툼하고 뜨거운 게 내부 안으로 벌컥 들어오자 절로 뜨악하며 눈이 벌어졌다.
“하으윽-!”
종아리를 잡은 손에 힘이 가해짐과 함께 푸욱 안쪽 깊은 곳까지 기둥이 파고들어 왔다. 거꾸로 매달린 채로 삽입이 되니까 목까지 성기가 튀어나오는 줄 알았다.
“하아.”
위에서 빠듯한 숨소리와 함께 놈이 잠시 멈췄다.
“막, 들어오면- 흐, 윽…….”
나는 숨이 턱턱 막히는 크기에 힘겹게 숨을 쉬며 말을 뱉었다. 눈물이 왈칵 차오를 정도로 무지막지한 크기였다. 더군다나 너무, 너무 깊게 들어오고 있었다. 다른 때보다 깊숙한 곳까지 들어오자 장기가 찌부러질 것 같아 무서운 마음이 들었다.
“너무 깊, 아!”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내부를 가득 채우던 거대한 것이 뒤로 쭈욱 빠졌다. 내벽이 온통 딸려 나갈 것 같아 온몸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평소보다 살짝만 움직여도 여파가 아주 컸다. 놈이 기둥을 빼더니 다시 안으로 푹 쑤셔 넣었다.
“아, 학, 윽!”
깊숙한 곳에 들어온 성기가 다시 뒤로 빠져나갔고 안으로 콱 넣어졌다. 허리가 절로 펄떡 움직여졌다.
철퍽철퍽, 다비가 위에서 찍어 내리는 추삽질을 할 때마다 머리가 땅에 박을 것만 같았다. 놈의 성기가 머리를 뚫고 나오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다.
“윽, 욱, 으읏-.”
입에서는 억눌린 신음이 터져 나왔다. 흐릿해진 시야와 반대로 뒤집힌 세상이 어지러웠다. 피가 점점 머리로 몰렸다. 밧줄에 묶인 한쪽 발이 아래로 당겨져 저릿하게 아팠다.
“잠, 깐. 아! 머, 머리. 읏, 히, 힘들어. 으흑.”
안쪽 깊숙한 곳을 자극하자 정신이 아찔했다. 눈앞이 핑핑 돌아 나는 팔을 휘저으며 놈을 붙잡으려 했다. 그러나 자꾸만 안을 찔러와 손이 미끄러졌다.
안쪽이 찌릿찌릿한 느낌에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릴 때다. 몸이 위아래로 흔들리는 게 멈췄다. 동시에 눈앞이 번쩍였다.
“하으-!”
“하아. 어쩔, 수 없네.”
놈이 배 속 안쪽까지 콱 찔러 넣고서 한숨을 쉬었다. 추삽질은 멈췄지만 놈의 것이 여전히 배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턱 막힌 숨을 내쉬는데 종아리를 붙들고 있는 손이 떼어졌다.
놈의 어깨에 걸려 있던 다리가 스르륵 내려갔다. 매달린 다리 사이가 힘없이 벌어지고 있었다. 다행히 발목에 걸린 바지로 인해 다리가 찢어지는 건 면했다.
하지만 허벅지가 아릿했다. 다리에 힘을 주려는 순간 놈이 내 허리를 덥석 붙들었다. 그러더니 순식간에 시야가 뒤바뀌었다.
어지러움에 정신 못 차리는데 등에 딱딱한 것이 퍽 하고 닿았다. 동시에 안에 들어 있던 거대한 것이 울룩불룩 움직이는 느낌이 들었다.
“윽!”
얼굴을 찌푸리며 앞을 바라보자, 바로 앞에 다비 놈의 얼굴이 보였다. 놈의 붉은 눈동자가 정욕으로 탁하게 일렁거리고 있었다.
평소와 달리 위협적이다 느낄 정도로 살벌한 얼굴에 나는 움찔했다. 그러자 놈이 눈가를 살짝 찡그리며 작게 신음했다.
왜…… 놈의 얼굴이 앞에 있는 건지 생각하는 것도 잠시, 안에 들어가 있는 게 조금 더 크기가 부풀어 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등허리가 오싹해져 왔다.
“흣, 가, 갑자기 무, 무슨-.”
“자세, 바꿨어.”
놈의 어깨에 걸려 있는 허여멀건 다리를 바라봤다. 발목까지 내려간 바지와 속옷이 보였다. 등에는 빳빳한 나무가 느껴졌다.
그제야 나는 놈이 무시무시한 힘으로 내 상체를 들어 올렸다는 걸 알아차렸다.
내 몸은 놈과 나무 사이에 엉거주춤, 폴더처럼 반쯤 접힌 상태였다.
“잘 느껴서 좋았지만, 기복이가 힘들어하니까. 그럼, 계속할까?”
“……아흐. 핫! 아흣! 흑, 천, 천천히 좀, 앗.”
안을 빠듯하게 채우던 게 뒤로 빠졌다. 놈은 내 대답을 듣지 않고 끈적하게 비비듯 안으로 들어왔다. 발가락이 오그라들 정도로 간질간질한 자극에 흐느끼는 신음이 흘러나왔다.
놈의 것이 배 안쪽에서 꿈틀거렸다. 뿌리 끝까지 성기가 빠지더니 안으로 가차 없이 푸욱 쑤셔 넣었다.
결합 부위에서 마찰 소리가 철퍽 들려왔다. 동시에 등이 딱딱한 나무에 부딪혔다.
나는 버둥버둥하며 놈의 단단한 팔뚝을 붙들었다. 두 발이 떠 있으니, 허공에서 아래를 박아오는 것만 같았다. 몸이 바닥으로 추락할 것 같아 아슬아슬함에 불안했다.
놈이 나를 붙들고 있긴 했지만, 이 자세도 아까와 다를 바 없이 힘들었다. 그러나 이러한 불평을 토해내기 전에 놈이 질척하게 허리를 쳐올리기 시작했다.
“앗- 응…… 하윽, 윽, 윽! 아아-.”
등줄기를 찌르르하게 울리는 감각에 신음이 터져 나왔다. 아래가 녹을 것만 같았다. 찌걱거리는 소리와 야릇한 냄새, 그의 탁한 숨소리, 뜨거운 열기가 피부에 닿아왔다.
아래를 쳐올릴 때마다 배는 불룩불룩해졌다. 깊숙한 곳까지 닿아오는 두툼한 것이 점차 빠르게 입구를 들락날락 박아댔다. 추삽질에 맞춰 아래에 힘이 들어갔다.
찰박찰박, 처음의 빠듯하게 벌려지던 고통은 어디 가고, 느물느물해진 입구가 커다란 것을 수월하게 받아들였다. 계속해서 안이 쑤셔지자 쾌감이 몸을 쭈욱 타고 올라왔다. 아래가 뜨겁게 달아올랐고 머리가 점점 마비되는 느낌이 들었다.
“아으, 아-!”
“크흣.”
숨넘어갈 듯 할딱거리는 신음이 질러졌다. 찌릿함에 허리를 비틀자, 그의 입에서 거친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러더니 내부에 든 것이 꿀떡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배가 울렁거리는 그 순간 눈앞이 아득해졌다. 몸이 저편으로 끌어당겨지는 듯했다.
-…….
그렇게 찾아온 검은 공간에서 또다시 현자 타임을 마주해야 했다.
……하. 이번에도 거지 같은 하이톤 소리를 내버렸다.
그래, 뭐……. 어차피 해야 하는 거, 기분 나쁜 것보다 좋은 게 낫지……. 마음 다잡았잖냐……. 죄짓는 것도 아니고 내 역할을 하는 것뿐인데. 이미 이 지경까지 온 거 시원하게 받아들이자고, 공기복아…….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이며 현타를 나름대로 극복했을 때다. 이쯤 되면 몸이 들려지고 놈이 나를 잡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야 하는데……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고 있었다.
의아함을 느끼며, 검은 공간에서 오감에 집중했다. 그러자 차차 시야가 트이기 시작했다.
눈앞이 선명해지는 순간, 나는 뇌가 굳어 버린 느낌을 받았다.
-……어, 어?
입에서는 얼빠진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도 그럴 게…… 조금 전까지 아래를 무지막지하게 쑤셔대던 놈이 바닥에 쓰러져 있었으니까.
-야, 야…… 다, 다비……?
놈의 이름을 불러보았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심장이 불안하게 울렁거렸다.
……저번에는 마력 때문이라지만 이번에는 단순히 변신만 했는데 왜?
-아무것도 안 했는데…….
영문을 알 수 없어서 더욱 불안했다. 놈의 이름을 한 번 더 부르려는 순간 앞에 그림자가 내려앉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