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파티원 [마법사]
“…….”
잠시 뒤, 신부님이 말을 뱉자 사람들이 눈을 떴다.
멍하니 있던 나는 옆 사람과 눈이 마주치고 나서야 깨달았다. 흰 천을 쓴 사람이 사라질 때까지 쳐다보느라, 나갈 타이밍을 놓쳤다는 것을.
나는 결국 사람들이 성당을 하나둘씩 빠져나갈 때까지 자리를 지켜야 했다.
“하아…….”
일어나는 사람들 틈에서 나도 몸을 일으켰다.
그때, 아까 흰 천을 덮어쓴 사람 옆에 있던 보조가 저 끝에서 몇몇 사람들을 조심스레 부르는 모습이 보였다.
마법사를 만날 궁리만 하고 있던 나는 그 모습을 유심히 쳐다봤다. 지목한 사람을 데리고 성당 안쪽에 있는 문으로 들어가는 게 보였다.
나는 주변에 있는 사람들 틈에 섞여 화장실을 가는 척하다가, 보조가 들어간 문으로 냅다 방향을 틀었다.
문으로 들어가자, 공간감 있는 높은 천장과 길게 뻗은 복도가 보였다.
저 앞에 걸어가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몰래 뒤를 쫓았다.
그들이 일제히 어느 방 안으로 우르르 들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아까 흰 천을 덮어쓴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다닥 닫힌 문 앞으로 걸어간 나는 턱을 매만졌다.
‘흐음. 들어가는 건…… 안 되겠지?’
굳건하게 닫혀 있는 문으로 손을 뻗어봤다. 그리고 별생각 없이 살짝 밀어보았다.
엄청 비밀스럽게 불러서 들어갔으니, 잠겨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문이 조용하게 밀리며 안의 풍경이 얼핏 보였다.
너무 쉽게 열리는 문에 손가락을 굳혔다.
‘열린다고……?’
다시 한번 문을 살짝 밀어보았다. 문이 좀 더 열렸다.
‘그, 그럼…… 안에 마법사가 있는지 확인만 해 볼까.’
잠깐 망설이다가 나는 문 틈새로 눈을 가져다 댔다. 그러자 기도할 때 봤던, 흰 천을 덮어쓴 사람이 보였다. 그것도 여러 명이나.
흰 천들이 지목된 마을 사람들 앞으로 다가서고 있었다. 척척 잘 걸어가는 모습을 보니, 틈 없이 가려진 겉과 달리 천 안에서는 앞이 보이나 보다.
흰 천에서 손이 불쑥 나와 마을 사람들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뭐라 뭐라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하얀 빛들이 앞에 있는 사람들을 감싸기 시작했다.
앞에 있는 사람들의 표정이 점점 밝아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빛이 사그라들었다. 손을 놓자, 마을 사람들이 감사하다는 말을 뱉어냈다.
그 뒤로도 불려간 사람들이 흰 천들에게 연신 감사를 전하며 문으로 걸어왔다.
“흡-.”
문틈으로 다가오는 사람들을 본 나는 퍼뜩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숨을 곳을 찾기 위해 고개를 휙휙 돌려보았다. 긴 복도에 세워진 기둥이 보였고, 나는 그곳으로 곧바로 뛰어가 몸을 숨겼다.
숨을 돌리고 있자 사람들이 문을 열고 나왔고, 그들을 안내한 보조도 함께 나왔다.
보조가 앞서 걸어가자 마을 사람들이 뒤를 따랐다. 그들은 다시 왔던 길로 돌아가며 팔과 목, 어깨, 곳곳에 감긴 붕대를 풀고 있었다.
가뿐한 걸음으로 반대편으로 멀어지는 사람들을 쳐다봤다. 그러다 저들이 특별히 부름을 받은 이유를 알아차렸다.
그들의 머리 위에는 일제히 [용병]이라는 표식을 달고 있었다.
‘……아하.’
힐을 받은 거군. 그렇다면-.
‘저 방에는 힐러가 모여 있다는 거잖아……?’
마법 중에서도 치유 쪽이 유독 복잡하고 마나가 많이 들어, 대부분 마법사 고유 속성인 얼음 마법으로 빠진다고 들었다.
한 마디로 저기 있는 사람들은 힐러, 상당한 엘리트라는 거다. 그리고 내가 이 마을에서 찾고 있던 마법사이기도 했다.
‘저 마법사를 회유해야 하는데…….’
나는 기둥 뒤에 숨어 최대한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차마 뭘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조금 전, 방 안 분위기가 상당히 정숙했으니까. 또 마을 상인들의 태도와 용병들의 표정으로 짐작하건대, 힐러에게 막무가내로 굴다간 마을 자체에서 쫓겨날 것 같았다.
저 힐러들은 마을에서 어지간히 추앙을 받고 있는 듯하다.
‘……어쩌지.’
그렇다고 다비 놈을 죽게 내버려 둘 수도 없는 노릇이다. 더군다나 몇 걸음 뒤에 있는 문 너머에는 힐러들이 있었다.
‘……여기서 고민만 한다고 되나.’
어쩔 수 없잖아. 그냥 부딪쳐 봐야지. 안 되면,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고 늘어져 보자.
나는 깊게 호흡을 뱉으며 주먹을 꽉 쥐었다. 고개를 쳐들고 마법사들이 있는 문 쪽으로 한 걸음 뗐을 때다.
“…….”
그 순간, 문이 조용히 열리더니 그 틈으로 하얀 천이 보였다.
나는 열리는 문을 보자마자 곧장 다시 기둥 뒤로 숨어 버렸다. 방금 행동으로 내 용기가 알량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망할…….’
나는 심호흡을 하며 벌렁대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기둥 밖으로 고개를 살짝 내밀어 보았다. 하얀 천을 덮은 마법사 하나가 복도 밖으로 나온 모습이 보였다. 그러더니 마법사가 이쪽을 향해 몸을 틀었다.
나는 빼꼼히 내민 얼굴을 화들짝 숨겼다. 다가오는 걸음 소리에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고요한 걸음 소리가 넓은 성당 복도에 울렸고,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쯤이면 내가 여기 숨은 걸 알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라…… 모르겠다!’
어차피 말을 하러 들어가려던 참에, 한 명만 나오니 오히려 말을 붙이기 쉬울지도 모를 일이다.
지척까지 다가온 걸음 소리를 듣고 눈을 질끈 감았다 번쩍 떴다. 기둥 밖으로 발을 뻗어 흰 천을 쓴 사람 앞에 모습을 벌컥 드러냈다.
“아, 안녕하세요. 그게-.”
‘제가 왜 여기 있냐면요…….’라며 황급하게 말을 쏟아내려 했다. 기둥 뒤에 숨어 있었으니, 내가 매우 수상한 사람 같을 것이다. 다짜고짜 공격을 할 수도 있으니 전혀 악의를 갖고 있지 않다고 해명을 하려 했다.
“저…….”
그러나 내 생각과 다르게 하얀 천을 덮어쓴 사람은 나를 지나쳐 걸어갔다. 마치 투명 인간이라도 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
흐릿한 내 목소리가 성당에 메아리치듯 울렸다.
나는 머쓱하고 당황스러운 기분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흰 천으로 모습을 온통 가린 마법사가 제 갈 길을 유유히 가고 있었다.
나는 눈을 끔뻑끔뻑하다 나를 내려다봤다. 혹시 내가 투명 망토라도 쓰고 있는가 싶었다. 그러나 나는 그런 고가의 아이템을 살 수 없는 처지였다.
그런 게 있었으면 개고생하면서 마을에 안 왔지.
‘그럼…… 무시한 거네.’
나는 다시 흰 천을 덮어쓴 마법사를 쳐다봤다. 마법사는 우두커니 서 있는 나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멀뚱멀뚱 그 모습을 바라보다 냅다 뒤를 따라 걸어갔다. 화다닥 걸어가는 내 발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대놓고 뒤를 밟고 있는데도 마법사는 뒤를 쳐다보지 않고 있었다.
“저기.”
“…….”
묵묵부답이다. 아까는 정말 정말 깊은 생각을 하느라 앞에 있는 나를 못 봤다 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정도면 그냥 개무시하는 게 확실했다.
나는 포기하지 않고 한 번 더 앞에 흰 천을 불렀다.
“마법사님?”
보통 이렇게 불러대면 궁금해서라도 왜 그러냐고 물어볼 만하지 않나. 어째 듣는 시늉도 안 하냐 싶다.
물론…… 내가 정상적인 루트로 오지는 않았지만…… 척 보기에도 선량한 차림새구먼.
‘표식도 [무기]잖아. 그저 무기.’
철저히 나를 무시하고 있는 마법사의 뒤통수를 정적 속에서 보고 있으니, 창백하게 누워 있는 다비 놈이 스멀스멀 떠올랐다.
시간 끌다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데 더는 손 놓고 있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나는 빠르게 마법사를 앞질러 가서는 대놓고 마법사의 앞에 우뚝 섰다.
“-잠깐만요! 잠깐만 멈춰 봐요! 실, 실례인 거 아는데 진짜 힐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 있어서 찾아왔거든요……!”
두 팔을 촥 벌리며 나를 지나치지 못하도록 통로를 최대한 막았다. 그러자 유유히 걸어가던 마법사가 드디어 걸음을 멈추었다.
드, 드디어! 대화를 시도할 수 있겠다는 희망도 잠시, 흰 천을 덮어쓴 마법사가 고개를 숙이는 듯했다. 이어서 천 안으로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하아-.”
그 한숨이 지긋지긋함과 짜증을 가득 담고 있어 몸이 절로 움칠거렸다.
“저, 저기…….”
“처음 보는 얼굴이군요.”
“모, 모험가입니다.”
“그렇군요. 힐을 받아야 할 사람이 있다고 말씀하셨지요.”
“어, 어, 예.”
나는 긴장된 마음에 뻣뻣하게 천을 덮어쓴 사람을 쳐다봤다. 생각보다 키가 있어서 얼굴로 추측되는 부분을 올려다봐야 했다.
“정말 힐이 필요한 사람이 있어서요…….”
짧은 침묵에 초조함을 못 참고 불쑥 말을 했다. 말을 뱉고 보니 혹시 분위기가 더 악화하는 건 아닐까 싶은 마음이 들긴 했다.
‘어쩔 수 없잖아.’
자니스 마을에는 상위 치유 스킬을 쓸 수 있는 훌륭한 마법사가 한 명 있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다. 그 마법사 덕에 이 마을이 힐러 마을로 유명해진 거니까.
앞에 있는 이 사람이 그 마법사면 좋겠지만, 지금 상황에는 어느 마법사라도 좋으니 누구든 다비 놈 진단이라도 해 줬으면 싶다.
“모험가님.”
주춤대는 내 앞에서 낮지만 곱고 울림을 주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누가 봐도 기분이 안 좋은 사람처럼 착 가라앉아 있었다.
흰 천으로 가려져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상당히 똥 씹은 표정이라 예상된다.
나를 명확히 부르는 마법사의 날카로운 기세에 쫄아서 대답했다.
“……예.”
“마을의 많은 이가 힐이라는 스킬에 의존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 치유력이 굉장하니까요…….”
“맞습니다. 그래서 작은 상처에도 사람들은 힐을 요구합니다.”
“……그게…….”
“많은 이 중 일부를 선정하는 까다로운 절차가 생긴 것도 그 때문이지요. 절차를 무시하고 찾아오는 자를 반겨 주길 기대하셨습니까.”
“…….”
“돌아가십시오.”
마법사의 입에서 쏟아지는 단호한 목소리에 나는 입을 합 다물었다.
흰 천 너머로 마법사가 나를 보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그 시선이 상당히 싸늘할 것이라는 건 안 봐도 알 수 있었다. 앞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몸에 한기가 으스스하게 돌고 있었으니까.
내가 벌린 팔을 툭 떨어뜨린 채 얼어 있자, 마법사는 곧바로 나를 지나쳐 걸어갔다.
“…….”
마법사의 입장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다. 그런데…… 파티원이 깨어나지 않는 상태에서, 치유 능력 쩌는 마법사가 마을에 있다는 걸 아는데 어떻게 안 찾아올 수가 있냐고…….
“자, 잠깐만요!”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고 싶은 심정으로 다시 마법사에게 뛰어갔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미동이 없다고…….’
미동 없는 다비 놈을 보니 하루하루 피가 말라가는 기분이 들었다. 이러다가 그놈 황천길 건너면 어쩌냔 말인가…….
“계속 방해하시면, 사람을 부르겠습니다.”
“그럼 진짜 딱 하나만 물어보고 나갈게요.”
“하아…….”
나는 마법사의 앞을 막아서며 두 손을 간절히 모아 보였다.
“무작정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파티원이 일주일째 깨지 않고 있어서…….”
표정을 알 수 없으니 나는 눈치를 보며 후다닥 말을 뱉었다.
앞에 서 있는 마법사가 사람을 부르면 어쩌나 싶은 마음이 들었다.
다른 마법사라도 붙들어야 하나……. 반응은 똑같지 않을까. 그럼 진짜 어떡하지.
“…….”
앞에서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화가 난 건가, 나는 막막함에 고개가 절로 떨궈졌다.
“……그래요.”
앞에서 마지못한 투가 들려오자 나는 고개를 퍼뜩 들었다.
“뭐가 그리 궁금하십니까.”
“어…… 그게…….”
짧게 말하라는 의도가 담긴 목소리였다. 더해서 천 너머 시선에서 압박감이 몰려왔다. 횡설수설 말이 길어지면 성당 밖으로 쫓겨날 게 분명했다.
다비 놈의 지금 상황이 단번에 이해가 될 정도의 짧은 질문을 해야 했다.
……아무래도 정체를 밝혀야 할 듯하다.
“레스탈로스의 무기라고…… 알아요……?”
빙빙 둘러 말하다가 괜히 다비 놈 상태가 별거 아닌 거로 치부되면 안 되잖아. 그깟 정체 밝히는 게 뭐라고.
그리고 대놓고 말해도 믿을지 의문이었다. 전직관 말로는 만년에 한 번 나온댔으니까.
“제가…… 그, 무긴데요.”
어쩐지 머쓱함에 목덜미를 문질렀다. ‘제가 무기입니다.’라고 말하는 꼴이 우스운 감이 있었다.
“…….”
“미, 믿기지 않으시겠지만, 제 머리 위에 표식 보여요? 무기라고 볼품없이 떠 있는데……. 이게, 전설의 무기 표식이거든요…….”
아무런 대답도, 움직임도 없는 흰 천을 우물쭈물하며 쳐다봤다.
역시 안 믿으려나……. 아니면…… 닥치고 질문이나 하라는 뜻일까.
“사, 사실 파티원이 절 이용해서 스킬을 썼는데……. 일주일째 깨지 않고 있거든요.”
“…….”
“영문을 몰라서 찾아왔는데요…….”
나는 길어지는 침묵에 입술을 꾹 깨물었다.
허언증이라고 쫓겨나는 거 아니냐, 망할……. 하지만 놈의 상태에 대해 뭐라도 알아야 나도 다른 걸 찾아보기라도 하지.
‘하아, 표식이 [무기]가 뭐냐, 무기가……. [전설의]를 앞에 붙이는 게 그렇게 고되고 힘든 일이냐. 전설의 무기 정도면 어디 가서 무시 받지 않도록, 암행어사처럼 마패 같은 거라도 쥐여줘야 할 것 아니냐고……. 일일이 ‘나 좀 믿어주십쇼.’라며 말을 해야 하냐…….’
속으로 억울함을 호소하며, 피가 말리는 침묵의 시간을 버티던 차다.
“-레스탈로스의 무기…… 말입니까.”
조금 잠긴 듯한 목소리가 앞에서 들려왔다. 목소리의 끝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기가 찬 걸지도 모르겠다.
“……믿기지 않는군요.”
“그, 압니다. 그런데 지, 진짜거든요.”
“진짜라면…… 도와드리겠습니다.”
“정말요?!”
“그 전에. 모험가님의 말이 진실인지 증명해 주셨으면 합니다.”
“에? 증명이요?”
“예.”
가라앉아 있던 마법사의 목소리가 기대감을 보이고 있었다.
일단, 표식 덕분인지 뭔지, 어느 정도 내 말을 믿어 주는 듯하다. 그러나 여전히 미심쩍은 구석이 있는지 확실한 무언가를 요구하는 투다.
“증명할 게 표식뿐인데……. 마땅한 스킬도 없어서요.”
하지만 표식 이상으로 증명할 만한 게 없었다.
“그, 근데 제가 진짜 맞거든요. ……아씨, 어떻게 하면 믿을 건데요?”
“그럼. 제가 직접 확인해 보면 되겠군요.”
“확인요?”
“그렇습니다. 당신을 한번 사용해 봐도 될까요?”
“……네?!”
“증명할 방법이 이밖에 더 있습니까?”
“…….”
온몸을 천으로 꽁꽁 감싼 마법사에게서 상기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어서 천 안에서 하얗고 길쭉한 팔이 쭉 뻗어 나와 내 팔목을 덥석 잡았다.
몇 초 전만 해도 개무시하던 태도와 달리 상당히 너그러운 말투가 들려왔다.
“가실까요?”
마법사는 내 대답도 듣지 않고 어딘가로 나를 끌고 갔다.
적극적인 마법사의 태도에 당황하고 있던 차에 나는 커다란 문과 가까워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자, 잠깐만요!”
마법사가 문고리에 손을 뻗을 즈음, 다급하게 말을 뱉었다. 머릿속에서 뒤늦게 마법사가 뱉은 ‘당신을 한번 사용해 봐도 될까요?’라는 말의 뜻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왜 그러시죠?”
앞에 있는 흰 천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듯했다.
나는 먼저, 마법사가 강하게 잡아서 피가 안 통하고 있는 팔목을 떼어놓고 얘기하고 싶었다. 어찌나 단단히 잡고 끌고 가던지, 팔목이 얼얼할 지경이다.
“손목 좀…… 아, 아파서요.”
손목을 비틀자 더 단단하게 쥐어오는 아귀의 힘이 느껴졌다.
“그렇군요. 도망을 갈까 봐 저도 모르게 강하게 잡았네요. 미안합니다.”
“진짜라니까요……. 도망 안 칠게요. 소, 손 좀.”
마법사는 손을 놓아주기보다는 팔 힘을 느슨하게 풀었다.
‘……엄청 못 믿네…….’라고 생각하던 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사실을 되물었다.
“방금, 저를 사용하겠다고 했잖아요. 어, 어떻게 사용할 건데요?”
“당연히. 레스탈로스의 무기로 제 마력을 써 봐야겠죠.”
“아니. 그…… 혹시 레스탈로스의 무기에 대해 잘 알아요?”
“힐러가 되려면 상당수의 서적을 읽어야 합니다. 당연히 레스탈로스의 무기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습니다.”
“……잘 알고 있다고요?”
“그렇습니다. 그러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마법사가 다시 문 쪽으로 손을 뻗었다. 나는 눈을 크게 뜨며 황급히 두 발에 힘을 주고서 몸을 뒤로 기울여 버텼다.
마법사가 멈칫하더니 다시 나를 돌아보았다.
“알고 있는데! 사용한다고요?!”
“왜 그러십니까? ……설마, 인제 와서 거짓말이라고 할 겁니까.”
“그, 그게 아니라…….”
“혹여, 거짓말이라면 제 시간을 방해한 대가는 치러야 할 겁니다.”
한순간에 그의 목소리에서 냉기가 뿜어졌다. 싸늘해진 기운에 몸이 절로 움칠거렸다.
“지, 진짭니다…….”
“예. 단순히 그걸 증명하는 것뿐입니다.”
내가 변신 방법에 대해 망설이고 있는 걸 짐작했는지 마법사가 단순한 증명이라고 단호하게 못 박아 말했다.
나는 더는 말을 못 하고, 열리는 문을 보며 침만 꼴깍 삼켜야 했다.
‘그래……. 이건 단순히 변신 과정이야. 앞에 있는 녀석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잖아, 나, 나만 태연하면 돼…….’
그렇게 속을 되뇔 즈음, 앞에 있는 문이 활짝 열렸다. 향초 냄새가 은은하게 맡아졌다. 방 안으로 들어서자 깔끔하고 단출한 방 풍경이 보였다.
마법사가 손에 힘을 주며 나를 안쪽으로 이끌었다.
“마, 마법사님의 방입니까?”
“그렇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쓸데없는 질문을 막는 듯 곧장 방 중앙으로 나를 잡아끌었다.
나는 무릎이 굳어 삐걱삐걱 걸어가야 했다. 방 중앙과 가까워질 때마다 심장이 두렵다는 듯이 쿵쾅거렸다.
왜냐, 방 중앙에는 커다란 흰 침대가 놓여 있었고, 마법사가 대놓고 그쪽으로 끌고 가고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이, 이건 변신 과정이라고.’
나는 곧 다가올 상황에 흔들리고 있는 마음을 다잡아야 했다.
마법사가 나를 침대에 앉혔고 나는 엉덩이로 느껴지는 푹신함과 함께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선호하는 자세가 있습니까?”
“그런 게 있을 리가-! 없, 없잖아요…….”
“그럼. 평범하게 엎드리시는 편이 좋을 듯합니다. 저도 그 편이 편하고요.”
그의 덤덤한 목소리에 나는 쭈뼛쭈뼛하다 침대 위로 올라가 엎드렸다.
아까보다 더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빠짝 마르는 목에 침을 꼴깍 삼킬 즈음, 다리 쪽에서 침대가 푹 꺼지는 느낌이 들었다. 뒤를 살짝 보자, 마법사가 등 뒤에 자리를 잡고 있는 게 보였다.
……처음에도 느꼈지만 저 흰 천 마법사는 몸이 제법 듬직해서 위압감 있었다.
마법사의 손이 내 하체로 뻗어왔고 망설임 없이 바지를 내리기 시작했다. 그 손길에 어깨가 절로 흠칫거렸다.
‘방금 반응…… 너무 의식한 것 같은데.’
단순한 변신 과정이라 생각하는 사람 앞에서 혼자 긴장한 티를 잔뜩 낸 것 같아 괜히 말을 뱉었다.
“……이, 익숙해 보이십니다.”
“무엇이 말입니까.”
“이, 이런 행위 말입니다. 아, 변신이라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그, 그저-.”
“남자와는 처음입니다.”
“예……?”
“그러니 서툴더라도 이해 부탁드립니다.”
바지가 내려가자 둔부 위에는 서늘한 공기가 내려앉았다.
나는 ‘남자와는 처음입니다.’라는 이 말이 단순한 변신 행위로 인지하고 있는 사람의 입에서 나오니까 왠지 위화감이 들었다.
‘……왜 여자랑 하는 그 행위랑 같이 묶이는 느낌이지.’
내가 멍청하게 눈을 깜빡거리고 있던 차다.
“흣. 무, 무슨-.”
엉덩이 쪽에 얇고 길쭉한 것이 닿아왔다. 뒤를 돌아보니 그의 손가락이었다.
손가락이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나는 화들짝 놀라서 물었다.
“뭐, 뭐 하는 겁니까?”
내가 기겁하고 물어보자 흰 천의 마법사가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풀어야 하지 않습니까.”
“괘, 괜찮으니까. 그, 그냥 빨리하죠.”
“알겠습니다.”
뒤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냅다 대답이 들려왔다.
……나도 푸는 편이 덜 아프다는 걸 알고는 있다. 하지만-
‘그러면 진짜 섹스 같잖아…….’
고통으로 수치를 잊어야 했다. 저번처럼 나도 모르게 이상한 하이 톤 소리를 내는 변신은 사절이다.
“…….”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긴장된 몸을 이완하려 습하습하 호흡할 때다.
뒤에서 스르륵 천이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서 차가운 손이 허벅지 안쪽을 잡았다. 다리가 서서히 벌려졌고 그 사이로 남자의 체온이 느껴졌다.
잠시 동안 뒤에서 슥슥 어딘가를 만지는 소리가 났다. 곧이어 피부 마찰 소리와 마법사의 억눌린 숨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내 뒤에서 스스로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그래도 다비 놈처럼 말도 안 되는 크기는 아닐 거 아니냐. 잠깐이면 끝나겠지. 사람 하나 살리는데 이깟 섹스가 대수…… 아, 아니지. 이건 변신이지. 변신. 아주 경건한-.’
마음을 다잡고 있는데 뒤에 있는 남자에게서 아까보다 탁해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넣겠습니다.”
나는 숨을 들이켜며 주먹을 꽉 쥐었다.
“일일이 말하지 않아도…… 흡-.”
말이 끝나기도 전에, 뭉툭한 것이 입구에 닿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죠.”
법사의 고운 목소리가 형식적인 투로 들려왔다. 이어서 내부 안으로 뭉툭한 것이 조금씩 밀어 넣어졌다.
입구가 쭈욱 벌어지는 느낌에 나도 모르게 눈을 번쩍 떴다.
“……으학-!”
……시, 시발, ……뭐야?! 뭐 이렇게 커?!
“자, 잠, 깐…… 으흑, 너무……커, 윽!”
다비 놈과 다를 바 없이 커다란 성기가 입구를 찢을 듯이 벌리며 들어오고 있었다.
방심하고 있던 나는, 불에 덴 듯 뜨거운 입구에 몸이 바짝 경직됐다. 배에 힘이 잔뜩 들어가니, 등 뒤에서 힘겨운 숨소리가 들려왔다.
“하아…… 서둘러 끝, 내겠습니다.”
내게 참아 보라는 듯이 말을 뱉고서 뿌리 끝까지 안으로 콱 집어넣었다. 놈의 음낭이 입구를 때리며 철퍽, 마찰 소리를 냈다.
“흑! 으흣- 아……!”
놈이 내 허벅지를 꽉 붙잡았다. 동시에 내부를 꽉 채우던 성기가 뒤로 천천히 물러났다. 배에 힘이 들어갔다. 놈도 빠듯한지 힘겹게 뒤로 빠졌다.
내벽이 딸려 나가는 느낌에 소름이 끼쳐왔다. 발가락을 꽉 오므린 채 토할 것 같은 느낌을 견뎠다.
그때, 반쯤 나갔던 성기가 다시 안을 훅 치고 들어왔다. 아까보다 더 결합이 깊어진 느낌에 허리가 펄쩍거렸다.
“하읏, 너, 너무, 깊…… 윽!”
깊은 결합에 몸에 힘이 쭉 풀려 버렸다. 침대로 몸이 축 늘어지자 뒤에서는 또다시 성기가 물러났다. 아까와 다르게 빠르게 물러난 기둥이 입구 안으로 쑤욱 찔러졌다.
철퍽, 배 속이 울렁거렸다. 동시에 눈물이 왈칵 올라왔다. 입이 절로 뜨악하며 벌어졌다. 그 틈에 뒤의 놈이 허리 짓 하며 움직였다.
“아! 흐, 아! 아, 아아!”
철퍽, 철퍽 아래를 쳐올리자 벌어진 입으로 신음이 마구 터져 나왔다.
안으로 푹 들어올 때마다 결합이 더 깊어지는 것만 같았다. 내부가 뜨거워 몸이 움칫움칫 떨렸다. 크게 벌어진 입구를 들락날락하는 두툼한 기둥의 자극에 숨넘어갈 듯한 소리가 질러졌다.
“아! 아, 아- 아! 흐!”
수치스러움이 치솟아 얼굴이 화끈거렸다. 빌어먹을 소리를 내지 않으려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아래를 푹 찔리는 자극에 입이 자꾸만 벌어졌다.
결국 터져 나오는 소리를 막으려 시트에 얼굴을 파묻어야 했다.
“-으흡! 흡! 흡, 읏-.”
퍽퍽, 뒤에서 살이 마찰하는 소리가 연달아 들려왔다.
탁한 숨소리에 맞춰 몸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길고 뜨거운 게 내부를 마구잡이로 자극했다. 격한 추삽질에 아래가 온통 흐물흐물해지는 느낌이었다.
등허리를 기어오르는 쾌감이 찌릿하게 느껴졌다. 그때마다 안을 꽉 채우고 있던 게 뒤로 빠졌다. 허전한 느낌이 몰려와 나도 모르게 아래에 힘을 주었다.
“흣-.”
“아, 아!”
목덜미에 뜨거운 숨결이 닿음과 동시에 안쪽 깊은 곳으로 성기가 콱 하고 찔러 넣어졌다. 안쪽 어느 한 부분에 정확히 닿자 눈앞이 하얗게 변해 갔다.
배 안에서 액이 퍼지는 느낌과 함께 몸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세상이 점차 흐릿하게 보이더니 육체가 어딘가로 빨려 들어갔다.
-…….
나는 어느새 깜깜한 공간 안에 들어와 있었다.
정신없는 행위에 넋을 놓고 있던 나는, 현재 무기로 변한 상태라는 것을 자각했다. 강렬한 느낌과 함께 휩쓸리는 이 감각은 분명, 무기로 변신을 한 상태가 맞았다.
두 번의 변신 경험으로도 쉽게 알아차렸다. 충격적인 기억과 감각들을 하루아침에 잊을 리가 없으니까.
하지만 다비 놈과 변신했을 때와 달리, 바로 앞에 몬스터가 있는 위급한 상황이 아니었다. 그 때문에 나는 까만 공간에서 현타를 느껴야 했다.
‘……빌어먹을.’
차라리 딴생각할 수 없게 이리저리 몰아치는 상황이었다면 더 좋았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고요한 곳에 들어오니까, 조금 전에 펼쳐진 상황이 자동으로 곱씹어졌다. 명색의 전설의 무긴데 계속해서 자살 충동이 밀려오는 게 정상적인 건가 싶다.
‘익숙해지자……. 아니, 익숙해질 수 있는 게 맞나…….’
혼자 수치심에 허덕거리고 있을 즘, 앞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말이군요.”
목이 멘 듯 억눌린 목소리였다. 그러더니 몸이 붕 뜬 느낌이 들었다.
놈이 나를 잡아 든 모양이다.
그 순간 변신 목적이 상기되었다. 지금은 전설의 무기임을 증명하는 것에 초점을 둬야 했다.
저번처럼 오감에 집중하니 서서히 내가 누워 있던…… 하얀 침대와 방의 풍경이 보였다. 조금 전 흔적을 보여 주는 것처럼 시트가 이리저리 흐트러져 있었다. 이어서 향초 향이 가득했던 방에는…… 비릿한 냄새가 나고 있었다.
시야를 내리자 내 몸이 딱딱한 지팡이로 변해 있는 게 보였다. 다비 놈의 무기와 비슷한 길이긴 했지만, 마법사의 무기는 얇은 봉 형식으로 되어 있었다. 맨 위에는 태양과 같은 모양으로 되어 황금색으로 반짝였다.
……제법 전설의 무기답게 폼이 났다.
-…….
어쩐지 마법사를 마주 볼 준비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놈 대신 내 몸뚱이를 보고 있었다. 그런데 놈이 내 쪽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이제 좀 믿겠-.
나는 어쩔 수 없이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나를 감상하고 있는 마법사의 얼굴이 보였다.
앞에 하얀색으로 아른거리길래 천을 덮어쓰고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마법사는 천을 벗어 던진 상태였다.
-어…….
나는 코앞에 있는 사람의 얼굴을 보고 멍청한 소리를 흘렸다. 눈앞에는 넋 놓을 정도로 예쁜 여인이 내게 얼굴을 들이밀고 있었으니까.
“레스탈로스의 무기…… 정말 아름답군요.”
-……그쪽도요.
경탄 어린 말이 들리자, 나도 모르게 입에 침이라도 흐를 듯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도 그럴 게…… 보호 본능을 자극하는 투명한 피부에 신비로운 보라색 눈동자, 차갑고 단정해 보이는 그녀의 얼굴은 아름답다는 말로도 부족할 정도였으니까.
비단 같은 하얀색 긴 머리카락이 갸름한 얼굴선을 타고 부드럽게 흘러내리며 좋은 향기가 맡아졌다.
심장이 두근두근 뛰는 것이 느껴졌다. 아름다운 사람이 반짝이는 눈으로 보는데 어느 누가 가슴이 안 떨리겠나 싶다.
그러다…… 문득 다비 놈의 얼굴이 떠올랐다.
‘……왜 떠오르는 거냐?’
……뭐, 그놈도 아름다운 외관을 갖긴 했다. ……그래서 떠올랐나 보다.
그러나 앞에 있는 아름다운 여자와 달리 그는 너무나도 몸이 탄탄한 남자였다. 동시에 반감이 잔뜩 드는 커다란 프X……까지 생각하자 점점 넋 나갔던 정신이 차차 돌아오기 시작했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당신의 아름다움과는 비교할 수 없죠.”
앞에 있는 단정한 여인의 입술이 열리더니 미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여자라고 하기에는 많이 낮은 목소리였다.
나는 눈을 깜빡이며 시선을 내렸다. 그러자 쭉 뻗은 하얀 목에는 목젖이 툭 튀어나와 있었다.
‘어라…….’
그 순간 내 몸을 쓰다듬는 커다란 손길에 흠칫했다.
그녀의 얼굴에서 시선을 내리자, 하얀색 긴 머리카락이 닿아 있는 떡 벌어진 어깨가 보였다. 사제들이 입는 옷이라 망토같이 품이 넓은 하얀 옷이었지만, 그럼에도 단단한 어깨의 윤곽이 보였다.
점점 조금 전의 기억들이 다시 머릿속에 재생되기 시작했다.
……어쩐지 더는 확인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내려가는 시선은 멈출 수가 없었다. 옷 사이로 보이는 길고 튼튼한 다리와…… 그 틈으로 보이는 흉기를 눈에 담아야 했다.
-시발.
시야를 확 차단해 버렸다.
그래……. 분명 커다란 게 안에 들어왔는데 여자일 리가 없지.
‘……이 게임 속 남자들 거기는 다 무식하게 커다랗게 만드냔……! 아니! 잠깐, 그러면 내 고추는 왜 이런 건데! 디자인을 할 거면 통일해 주든가!’
혼란에 휩싸여 있는데 갑자기 위에서 곱고 단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그러- 아, 제가 너무 만졌군요. 경이로운 마나가 흘러서 저도 모르게…… 죄송합니다.”
-끕, 아, 아닙니다.
뜬금없는 사과를 듣자 내가 욕설을 내뱉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 이 사람이 뭔 죄냐. 빌어먹을 변신 방법이 문제지.’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다시 시야에 집중했고, 앞에 있는 아름다운 여……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즈, 증명은 다 된 거죠? 그럼 도와주는-.
나는 앞에 있는 사람에게 말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나는 시야를 조금 더 집중해서 보았다. 그러자 남자의 머리에는 여태 보이지 않았던 것이 보이고 있었다.
[마법사]라는 표식과 함께 [루비페크세나미타스]라는 존나 긴 이름과 [Lv. ?]라는 알 수 없는 레벨이 떠 있었다.
“당연히 도와드려야지요.”
친절하게 말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앞에서 들려왔다.
나는 앞에 있는 남자의 머리 위에서 시선을 내렸다. 그러자 한껏 다정함을 품은 보랏빛 눈동자가 나를 보고 있었다.
‘어…… 비슷한 상황을 최근에 겪은 것 같은데.’
왠지 모를 데자뷔를 느낀 나는 문득 전직관의 말이 머릿속에 재생이 되었다.
‘정체를 함부로 밝힌다면 너도나도 자네에게 달려들 테니 조심하게.’라고 엄하게 말을 했었지……. 그리고 또 무슨 말을 했더라-.
“그 전에, 당신을 써 봐도 될까요?”
-에……?
앞에 있는 마법사가 흥분에 겨워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뱉었다.
“죄송합니다. 당신과 연결이 되니, 강력한 마력이 느껴져서…… 주체가 안 되네요.”
-……모, 몬스터가 없는데요?
“없어도 됩니다. 좋은 재료가 있으니까요.”
길쭉하게 트여 있는 눈이 흥미로움과 기대를 잔뜩 담고 있었다.
그가 상기된 얼굴로 내게 허락을 구하고 있었다. 나는 고민하던 중 그가 입고 있는 단정한 사제 옷을 쳐다봤다.
……뭐, 별일 있겠냐.
-그, 그러든가요.
“감사합니다.”
냅다 말을 뱉은 남자는 나를 들고 방 한편으로 이동했다.
나는 시야를 끔뻑이다 술렁거리는 마나를 잠재우기 위해 눈을 감았다.
마법사니 아무래도 마나를 좀 더 다스릴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저번에 마나를 개방하여 제법 안정을 찾긴 했지만, 다시 변신하니 속이 울렁거리고 있었다.
낯선 마법사의 마나가 섞여서 그런가 보다.
마나를 안정시키기 위해 내부로 감각을 집중했다. 저번과 같이 파도가 치는 듯했던 마나가 잠잠해지기 시작했다.
조금 더 집중을 하니까, 내부에 술렁거리는 마나가 착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마나의 안정을 느끼며 다시 외부 감각에 집중을 했다. 그러자 서서히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시야가 점점 보였고 눈앞에는 네모난 유리관이 보였다. 그리고 그 안에는 붉은색의-
-으왓! 이, 이게 뭐야?!
유리관 안에는 부풀었다가 축소되기를 반복하는 빨간 덩어리가 들어 있었다.
덩어리 겉에 울룩불룩한 혈관을 보며 나는 그게 심장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일반적인 심장보다 한 뼘 정도 더 큰 크기였다.
“몬스터의 심장입니다.”
생기 가득한 남자를 보자 어쩐지 간담이 서늘해지는 느낌이다.
‘이, 이걸 왜 갖고 있는 건데.’라는 생각을 하는 것도 잠시, 남자가 징그러운 몬스터의 심장 쪽으로 나를 들이밀려 하자 퍼뜩 소리쳤다.
-으앗! 뭐 하는 거야?!
“실험하기 위해 따로 빼놓은 재료입니다. 해가 가진 않을 테니 안심하세요.”
-무슨……뭐, 뭘 어쩌려고.
“살려야지요.”
-몬스터를? 그걸 왜 살리려는 건데…….
“저는 힐러니까요.”
-뭔- 몬스터까지 힐 해 주는 건 아니지!
“치유를 행하기 위해선, 공격해 주는 몬스터가 필요한 법이죠.”
-그, 그래서, 몬스터를 일부러 살리겠다고?!
“이 실험은 그저 제 마력을 시험해 보는 것뿐입니다. 피해는 없을 테니 안심하세요.”
-아니, 뭘 자꾸 안심하라는 건데……!
이런 미친 발상을 하고서 자꾸 안심하라고 하냐고……! 아니, 애초에 몬스터 심장을 왜 갖고 있는 거냐……!
그쯤, 놈의 손에 힘이 가해지자 몸 안에 마력이 어디론가 흘러가는 느낌이 들었다.
마법사가 중얼중얼하며 주문을 읊기 시작했다. 그러자 몸 안에서 강력한 마력이 증폭되더니 뻗어나가는 느낌을 받았다.
눈부신 하얀색 빛이 외부로 향했고, 유리관 안에 있는 몬스터의 심장에 빛이 닿았다. 심장이 울룩불룩 기괴하게 박동했다.
심장 주변으로 혈액이 응축되더니 장기가 생성되었다. 이어서 피부 껍질이 다 벗겨져 적나라한 근육들이 생성됐다. 길쭉한 손톱이 재생되고 눈알도 붙었다.
갈색 살점 같은 게 덕지덕지 붙기 시작하며 존나게 징그러운 몬스터의 형체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으, 으억!
순식간에 사람 몸통 크기의 몬스터가 완성됐다. 유리관 역시 비슷한 크기였다. 그 때문에 꽉 들어찬 몬스터가 살짝 짓눌려 있어 상당히 기괴한 모습을 띠었다.
욱, 속이 메스꺼운 느낌에 나는 시야를 차단했다.
“……성공적이군요.”
감탄과 경이로움이 담긴 목소리가 앞에서 들려왔다.
-뭐가! 대체 저게 뭐가 성공적이냐!
“원 상태로 돌려놓았으니 성공적입니다.”
……저게 원 상태라고?
태연하게 돌아오는 대답에 나는 다시 유리관으로 시야를 집중했다.
살구색으로 울룩불룩한 몬스터가 유리관 안에 꽉 채워져 있었다.
아무리 봐도 정상적인 몬스터의 상태는 아닌 것 같은데- 그러다 나는 유리관 위에 둥둥 떠 있는 [슬라임]이라는 몬스터의 이름에 역함이 몰려왔다.
썅- 저게 뭔 원 상태냐……. 슬라임은 원래 초록색 아니냐고!
-네 눈에는 저게 원상태로 보이냐?! 기형이잖아!
“오랜 시간 동안 각종 액을 주입해 박동을 유지시킨 심장이니, 당연합니다. 중요한 건, 몬스터가 제 표식을 달았다는 점이죠. 본 특성을 모두 지닌 상태로 살아났다는 의미입니다.”
-저딴 흉측한 모습이라도 살아만 있으면 된다는 거냐……? 위, 위험한 발상 아니냐고……!
“외관을 되찾는 건 또 다른 실험이 필요합니다. 이번 실험은 뛰고 있는 심장만으로 본 특성을 되찾을 수 있을지에 대한 실험일 뿐입니다.”
나는 슬라임이라 부를 수도 없는 지방 덩어리 같은 것을 보았다.
‘저런 좁은 유리관에 껴 있을 바엔 그냥 죽어 있는 편이 저 몹에게도 좋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다 [슬라임]이라는 표식 옆에 [Lv. 88]이라는 엄청난 숫자가 적힌 것을 보고 또 한 번 기겁해야 했다.
-스, 슬라임 주제에 레벨이 왜 이렇게 높아?!
“각종 몬스터 액을 주입해서 그렇습니다.”
-유리관 터지면 저, 저놈은 어떻게 처리할 건데?!
“평범한 유리관이 아닙니다. 마을에 해가 되지 않도록 몬스터는 사냥터에 풀어줄 생각이니 염려 마세요.”
-푸, 풀어준다고?! 저 징그러운 놈을? 그냥 죽이지 그러냐……!
“성공적인 실험 결과물을 제 손으로 죽일 수는 없습니다.”
-허, 이게 뭔 기괴한 실험이냐고…….
나를 이따위로 사용하는 게 어딨냐…….
나는 메스꺼운 속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기괴하다니요. 상당한 마력과 기술이 필요한, 복잡한 실험입니다. 역대 단 한 명의 마법사도 성공시키지 못한 경이로운 결과물이지요.”
대체 역대 마법사들은 무슨 미친 실험을 했던 건데…….
나는 앞에서 눈을 빛내고 있는 녀석을 쳐다보며, 어쩐지 소름이 돋는 것을 느껴야 했다.
-……그런 것치고는, 엄청 쉽게 한 것 같은데.
“제게는 단순한 마법이니까요. 실험을 시도해 볼 만큼 제 마력을 감당할 무기가 없었을 뿐이죠. 하지만…… 전설의 무기는 알던 것 이상으로 놀랍군요.”
마법사는 괴상한 실험을 끝낸 뒤 계속해서 내게 찬탄의 눈빛을 쏟아냈다.
나는 들떠서 살짝 붉어진 남자의 얼굴을 멍하니 쳐다봤다. 보랏빛 눈동자에 반짝거리는 빛이 도는 게 지금은 광기로 보인다…….
‘이 마법사는 대체…… 지력이 높아서 미치기라도 했냐고…….’
그 순간 비슷한 감정을 느낀 미친놈 한 명이 머릿속에 그려지기 시작했다.
……나는 기괴한 실험에 잠시 망각했던, 다비 놈의 상태가 떠올랐다.
-아, 아무튼 이, 이제 증명은 끝난 거지?
“그렇습니다.”
나긋나긋하게 대답하는 마법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천사같이 웃어 주는 친절한 얼굴과 그 뒤에 유리관에서 괴롭게 숨을 쉬고 있는 몬스터가 같은 시야에 들어왔다.
‘……이 괴리감은 뭐냐고.’
이런 성스러운 장소에서, 저런 단정한 얼굴로, 기괴한 행각을 벌이고 있다는 사실을…… 신부님은 알까.
‘그래……. 저 마법사 사정이야, 알 바 없잖아.’
마법사의 말대로라면 엄청난 실험을 성공시킨 거니까, 능력치가 상당하긴 한가 보다. 그럼 이제 다비 놈을 살리는 것도 시간문제겠다.
‘비록 레벨은 물음표지만…… 그러고 보니, 다비 놈도 꽤 멋들어진 스킬을 쓰던데……. 저 물음표는 뭘까. 아, 모르겠다. 일단은 돌아가자. ……그러니까, 어…… 돌아와! 돌아와라! 이 개 같은 고철 덩어리 자식아! ……역시 욕한다고 변신이 풀릴 리가-.’
어어- 그때였다. 몸이 다시 물살에 휩쓸리는 듯한 감각이 들었고, 동시에 시야가 점점 높아졌다.
원래 몸으로 서서히 형체를 되찾는 모습을 보며 나는 어리둥절한 기분을 느껴야 했다.
“……이, 이렇게 변신이 풀린다고?”
나는 멍하니 원상태로 돌아온 몸을 내려다봤다. 그러다 내려간 바지를 보며 기겁하며 끌어 올렸다.
‘변신이 풀리면 바로 전의 뭣 같은 상태로 돌려 주는 게 어딨냐고…….’
나는 허여멀건 다리에 바지를 올리고 나서야 앞에서의 시선을 느꼈다. 차림새가 멀쩡한 마법사가 보랏빛 눈동자로 나를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민망한 기분에 뺨을 문지르며 말했다.
“하하…… 욕하면 변신이 풀리다니 참 희한하네.”
“변신은 기복 님의 의지만 있으면 풀립니다.”
나는 자연스럽게 마법사의 입에서 나온 내 이름에 멈칫하며 쳐다봤다.
마법사는 내 머리 위에 있는 [공기복] [Lv. 100] [무기] 표식을 곰곰이 보고 있었다. 아까부터 떠 있던 표식이건만, 이제야 진지하게 마주하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큰 의미가 아닐 수도 있지만, 그가 내 이름을 부르는 순간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다 마법사와 눈이 마주쳤고, 저도 모르게 버벅대는 대답이 뱉어졌다.
“그, 그래?”
표정이 없으니 마법사의 인상은 상당히 쌀쌀맞아 보였다.
냉랭한 마법사의 얼굴에 하던 생각을 지우고 서둘러 본론을 꺼냈다.
“그…… 그러면 이제 내가 파티원을 부축해서 올 테니까-.”
“그럴 필요 없습니다.”
“어?”
“마을 어디든 갈 수 있는 텔레포트가 성당 안에 있습니다. 함께 타고 가시죠.”
“그렇게 좋은 게 있다고?”
“힐러들은 마을을 조용히 이동해야 하니까요.”
차분하게 말을 한 마법사가 뒤를 돌았다.
방문으로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이 보였다. 걸음마다 그의 비단 같은 흰 머리카락이 허리께에 살랑거리며 흔들렸다.
그의 뒤를 따라 한 발 걸어가다 문득 들어올 때와 달리 그가 흰 천을 덮어쓰지 않고 나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천은 안 덮고 가도 돼?”
“지금은 성당 안에 마법사뿐이니 괜찮습니다.”
“……나는 아닌데?”
“기복 님은 예외입니다. 애초에 모습을 가리는 이유도 사람들이 힐을 요구하니 마력이 깃든 천으로 표식을 가리기 위해서죠.”
“얼음 마법사라고 바꿔 말하면 되지 않나.”
“성당 안에 마법사는 힐러뿐입니다. 금방 들통이 날 테지요.”
“흰 천 쓰는 게 더 의심스러운데…….”
“용병 외에는 의심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모르…….”
……아, 그럴 수도 있겠네. 기도할 때 그 많은 사람 중에 나 혼자만 눈을 떴으니까.
그렇게 혼자 생각할 즈음, 마법사가 따라오라는 듯이 눈짓하며 앞으로 걸어갔다.
마법사 뒤를 따라 걷자 공간감 있는 복도에는 나와 마법사의 걸음 소리가 고요히 울려왔다.
조용한 정적에 나는 눈동자를 굴려 주변을 쳐다봤다. 마법진처럼 보이는 문양이 양옆의 유리 벽과 높은 천장에 그려져 있었다.
성스러운 분위기의 복도를 조용히 따라 걸어갔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법사가 회색빛이 도는 문 앞에 멈춰 섰다.
“먼저 들어가시지요.”
마법사가 앞에서 문을 잡아주며 나를 돌아봤다. 정중하고 나긋한 말투에 나는 눈을 깜빡였다.
나와 눈이 마주친 그의 얼굴을 잠깐 멀거니 쳐다봤다. 객관적으로 차가운 인상이다. 그러나 현재 그는 목소리와 행동에 친절함을 잔뜩 담고 있었다. 아까와 달리 궁금해하는 질문에도 척척 대답을 잘해 주고 말이다. 무기라는 걸 밝히기 전과는 딴판이었다.
‘……전설의 무기의 힘인가.’
나는 문을 잡아 주는 마법사에게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끄덕이며 안으로 들어갔다.
파란 불빛이 어두운 방 안을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불빛의 아래에는 방 전체를 덮는 하얀 문양의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뜻을 알 수 없는 문양을 내려다보다 앞에 있는 파란 불빛을 쳐다봤다.
저 파란 불빛에 몸이 닿아도 괜찮은 걸까……. 엄청 활활 타오르는데…….
“괜찮습니다. 텔레포트일 뿐이니 말입니다.”
타 죽는 거 아닌가, 라는 불신이 올라올 때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그래.”
생각보다 리얼한 텔레포트의 불꽃에 쫄아 있었다. 그 속마음이 들킨 것 같아 민망함에 버벅이며 다시 앞을 바라봤다.
마법사가 내 옆으로 다가와 섰다. 그를 흘끗 쳐다봤다. 파란 불빛으로 음영 진 마법사의 이목구비가 보였다.
처연해 보이기도 하고 차분해 보이기도 하는,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외모다.
나는 숨을 들이켜며 고개를 돌렸다.
……정신 차려. 저놈은 남자라고.
“위치가 어디죠?”
“……어? 아, 마, 마을 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숙소야.”
“그렇군요.”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마법사가 앞으로 걸어갔다.
파란 불빛이 있는 곳으로 천천히 다가갔고 그 불빛에 마법사와 닿았다.
불빛이 더욱 거세지자 나는 움찔했다. 마법사는 태연히 불빛의 중앙으로 걸어가더니 나를 돌아봤다.
오라는 듯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그 눈빛에 주춤주춤 불빛 중앙으로 걸어갔다.
옆에 서자 그는 짧은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이어서 앞에 있는 방 안이 뒤틀렸다. 몸이 짧은 순간 공중에 붕 뜨는 느낌이 들었다.
장기가 올라갔다가 내려앉는, 롤러코스터를 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러더니 바닥으로 몸이 훅 내려앉았다.
“으앗-.”
예상치 못한 공중 부양에 다리를 버둥거리다 바닥에 발을 헛디뎠다.
몸이 기우뚱 넘어가려 하는 걸 느끼고 곧장 다리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빨리, 허리를 단단히 끌어당기는 힘에 의해 나는 뒷다리에 힘을 준 게 무색할 정도로 앞으로 몸이 확 기울었다.
풀썩, 천으로 감싸진 단단한 몸에 부딪혔다.
나는 굳은 채 눈을 깜박였다. 눈앞에는 하얀색 바탕의 금색 자수가 새겨진 부드러운 천이 보였다. 동시에 라벤더와 비슷한 향초 향이 맡아졌다.
“괜찮으십니까?”
“……어? 어, 어! 괜찮아.”
정수리에서 들리는 담담한 목소리에 나는 화들짝 몸을 뒤로 물렸다.
내가 물러나자 허리를 붙들고 있는 마법사의 손이 떨어졌다.
마법사는 나를 한 뼘 정도 위에서 차분한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망할…… 무슨 순정만화 여주인공도 아니고…….’
중심을 못 잡아서 폼 안 나게 같은 남자의 가슴팍에 안겼다는 사실이 사뭇 쪽팔렸다.
“텔레포트가 처음인가 보군요.”
“처, 처음이야.”
“많이들 놀라곤 하니, 민망해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 그래?”
“예. 그럼- 여기서. 파티원분이 있는 곳은 어느 방이죠?”
마법사가 고개를 돌리며 말하자, 나 역시 그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제야 주변이 눈에 들어왔다. 허름한 나무로 된 짧은 복도가 펼쳐져 있었다. 복도 양옆으로 문이 3개가 보였고, 각각 손잡이가 볼품없게 달려 있었다.
내가 다비 놈과 머물고 있는 낡은 숙소의 복도였다.
‘……꽤 정확히 텔레포트 되네.’
기껏해야 숙소 주변일 줄 알았는데.
“-이쪽이야.”
멍하게 서 있을 때가 아닌 걸 깨닫고 나는 머물던 방을 향해 걸어갔다. 일주일째 머물고 있던지라 익숙하게 척척 걸어갈 수 있었다.
주머니에 있는 열쇠를 꺼내 허름한 문고리에 집어넣자 낡은 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열렸다. 내가 안으로 들어가자 마법사도 뒤따라 방 안으로 들어왔다.
좁은 방 안, 낡은 소파에는 다비가 여전히 미동 없이 잠들어 있었다. 키가 워낙 커 소파 밖으로 다비의 다리가 덜렁 튀어나온 상태였다.
나는 눈을 감고 있는 그를 보자 가슴 한구석이 뜨끔거렸다. 불안함이 다시 치솟기 시작했다.
“……저 녀석이야.”
마법사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소파에 널브러진 다비에게 걸어갔다.
“상태를 보겠습니다.”
마법사가 시체처럼 창백한 그에게 다가가 무릎을 꿇고 앉았다. 이어서 심장께에 손을 가져다 대고 눈을 감았다.
집중을 하듯 그 상태로 멈춰 있다. 공기의 흐름이 느려진 기분이다. 마법사의 손에서 하얀빛의 마력이 빛나고 있었다.
고요한 정적이 잠시 동안 흘렀고, 마법사의 미간이 설핏 찡그려졌다.
나는 초조한 마음에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마법사의 미간이 천천히 펴지더니, 감은 눈을 떴다. 몸을 일으키며 내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나와 눈이 마주친 마법사는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전혀 상태를 짐작할 수 없는 얼굴이다.
그가 말하기도 전에, 초조함에 먼저 입을 열었다.
“어때?”
“거대한 마나를 성급하게 사용하다, 과부하가 온 상태입니다.”
……심각한 건가?
별거 아니라는 투에 알쏭달쏭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침을 꼴깍 삼키며 물었다.
“시, 심각한 거야?”
“이런 식으로 마나가 육체를 잡아먹은 채로 둔다면 죽을지도 모를 일이죠.”
“뭐, 뭐?! 그럼, 빨리 힐을-!”
“힐만으로 폭주하고 있는 마나를 다스리기엔 무립니다.”
단호한 마법사의 목소리에 나는 심장이 철렁거렸다.
“그, 그럼…….”
차마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제발 죽는 것만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마법사를 쳐다봤다.
……이런 대가가 있다는 말은 없었잖아.
좌절감에 고개를 떨구자 앞에서 무덤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살릴 수 있습니다.”
“……어? 정말?”
“일반적인 마력으로는 무리지만, 기복 님이 옆에 계시니 살릴 수 있습니다. 제 마력을 온전히 담을 수 있는 무기가 있어야 하니까요.”
무감했던 마법사의 보라색 눈동자에 이채가 돌기 시작했다.
나는 그 눈빛에 몸이 절로 흠칫거렸다. 아까 실험할 때와 같이 미묘하게 광기와 들뜸을 담은 얼굴이었다.
“또 한 번 제 마력을 시험할 수 있는 기회군요. 다만, 기복 님 곁에 있는 사람을 살려야 하는 게 탐탁지 않긴 합니다.”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던 나는 내 쪽으로 다가오는 마법사를 보며 뒤로 주춤 물러났다.
“……아니, 자, 잠깐…….”
아까의 실험체, 몬스터의 심정이 이런 기분일까.
내가 뒤로 자꾸만 물러서자 마법사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가만히 나를 내려다보더니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싫으십니까?”
“……어?”
“싫으시면 안 하셔도 됩니다.”
“……그, 그게.”
“강제로 하실 필요 없습니다.”
“…….”
“말했다시피, 저도 기복 님 곁에 있는 사람을 살리는 건 탐탁지 않으니까요.”
마법사의 차분한 말투로 나에게 말했다. 내 뜻을 그대로 따를 것 같은, 미련 없는 모습이다.
마법사의 뒤편으로 창백하게 널브러진 다비 놈의 육체가 시야에 걸렸다.
‘……다 죽어가는 모습이 떡하니 보이는데, 어떻게 거부하냐.’
목이 메어 마른침을 꼴깍 삼키며, 억눌린 목소리로 말을 뱉었다.
“……해, 해도 돼.”
마법사가 나의 대답에도 여전히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나는 앞에 있는 마법사의 부담스러운 시선을 슬금슬금 피했다.
“억지로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 그냥. 해. 어차피 한두 번도 아닌데 뭐…….”
“정말입니까?”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마법사가 내 쪽으로 걸어왔다.
“기복 님의 뜻이 그렇다면…… 알겠습니다.”
멀어졌던 거리가 좁혀질수록 속이 바짝 타는 기분이 느껴졌다.
‘……그래. 사람 하나 살리는데 그깟 행위쯤이야……. 별거 아니잖아. 이, 익숙해져야지……. 전설의 무기로 살게 된 이상 받아들여야 할 것 아니냐. 공기복 이 새끼야…….’
그렇게 복잡한 마음을 달래고 있는데, 눈앞에 그늘이 드리웠다.
시선을 들자 앞에 하얀색 긴 머리카락이 보였다. 그리고 조금 더 시선을 드니, 마법사의 단정한 얼굴이 바로 앞에 보였다.
보라색 눈동자가 나를 지긋이 내려다보더니, 불쑥 내게 손을 뻗어왔다.
“으왓-.”
몸이 뒤로 젖혀지자 입에서 외마디 소리가 튀어나왔다. 시야가 한순간에 뒤바뀌었고 등에는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푹 꺼지는 매트가 닿았다.
나는 눈을 크게 뜨며 앞을 바라봤다. 내 몸 위로 올라오는 마법사의 담담한 얼굴이 보였다.
그가 뒤쪽에 있던 침대로 내 몸을 쓰러뜨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가, 갑자기- 흡.”
지체하지 않고 곧장 바지를 내려버리는 손길에 숨을 들이켰다.
“수줍음이 많으시니, 이렇게 리드 하는 편이 낫지 않습니까.”
“수줍기는 무슨-! 자, 잠깐. 마주 보고 하려고?”
“이것도 수줍으십니까?”
“수줍어하는 게 아니라고……!”
“그럼, 계속하지요.”
“흡…….”
내 위에 올라탄 그가 길쭉한 손으로 스스로의 바지를 내리더니 아래를 꺼내 들었다.
나는 예쁜 외모와 달리 흉악한 크기의 성기가 튀어나오는 것을 보고 아까의 행위가 떠올랐다.
……속이 더부룩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가 얇고 고운 손으로 흉악한 그것을 손으로 쓸었다. 그러자 힘을 받은 성기가 더욱 크기를 더해 가기 시작했다.
나는 아래에 깔린 채로 그가 스스로의 성기를 문지르는 광경을 적나라하게 보아야 했다.
그의 하얀 얼굴이 살짝 홍조가 돌며 눈이 게슴츠레하게 떠졌다. 내려다보는 보랏빛 눈동자가 집요했다. 피부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붉은빛 도는 입술에서 가쁜 숨이 터져 나왔다.
내 앞에서 자위를 해 대는 외설적인 남자의 모습에 얼굴이 확 더워졌다.
시야를 차단하기 위해 눈을 질끈 감았다.
‘마, 망할…… 망할. 같은 남자라고! 그 흉악한 걸 문지르는데 왜 얼굴을 붉히는 건데!’
그때, 허벅지를 감싸는 커다란 손이 느껴졌다. 동시에 갑자기 두 다리가 위로 확 올라가, 눈이 번쩍 떠졌다.
“읏.”
허여멀건한 양쪽 다리가 남자의 넓은 어깨에 덜렁 걸렸다. 그러자 내 다리 사이로 남자의 달뜬 얼굴이 보였다.
남자가 상체를 조금 숙였고, 다리는 점점 몸 안쪽으로 접히기 시작했다.
허벅지에 저릿함을 느끼는 것도 잠시, 입구에 닿는 두툼한 귀두의 감각에 눈을 크게 떴다.
“넣겠습니다.”
“아으, 자, 자세가 윽…… 흣!”
진한 숨소리가 섞인 그의 목소리와 함께 내벽이 쭈욱 벌려졌다. 아까의 여파로 흐물흐물해진 입구가 성기를 수월하게 받아들였다. 길쭉하고 뜨거운 것이 들어올 때마다 다리가 점점 가슴께까지 접혀갔다. 성기의 남은 부분이 불현듯 훅 치고 들어왔고, 숨이 턱 막혀 괴로운 소리가 입술 틈으로 흘러나왔다.
“읏……! 으, 읏.”
몸 위로 하얀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그가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기 위해 움직였고, 그 움직임에 결합된 안이 꾹꾹 자극돼서 움찔움찔 떨려왔다.
“하아…… 안이 예민하네요.”
“그딴, 거 말, 흣, 해 주지 않…… 윽!”
놈이 제 말만 뱉고, 성기를 뒤로 물리더니 안으로 콱 찔러 넣었다. 퍼뜩이는 쾌감에 눈물이 핑 돌았다. 숨을 들이켜던 차에 또 한 번 허리를 쳐올렸다. 예민해진 안은 그의 작은 움직임에도 일일이 반응하고 있었다.
눈앞에는 허여멀건 다리가 허공에서 파르르 떨고 있는 게 보였다. 다리 사이에 있는 그의 얼굴이 시야에 걸렸다. 그의 눈동자는 욕정하듯 뜨겁게 일렁이고 있었다. 눈을 마주하자 그가 허리를 강하게 퍽, 퍽, 퍽 추어올리기 시작했다.
“잠, 깐, 아! 아! 아, 아흑……!”
흐려진 시야로 허리 짓에 맞춰 그의 어깨 위에 올려진 다리가 힘없이 흔들리는 모습이 보였다. 채 다물지 못한 입에서는 신음이 한껏 터져 나왔다.
“아, 흐, 으응…… 아!”
귓가에는 그의 뜨거운 숨소리와 신음, 그리고 결합 부위에서 살이 찰팍,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깊은 곳을 찔러주는 성기가 느릿하게 뒤로 빠져나가고 안으로 파고들기를 반복했다. 안이 간질간질한 느낌에 입에서 울음 섞인 소리가 터져 나왔다.
“흑, 아, 아아! 아!”
안달 나는 기분에 허리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그가 잠깐 숨을 멈추더니, 더 격렬한 추삽질을 하기 시작했다.
음낭이 둔부에 철썩 닿는 소리가 사정없이 들려왔다. 허리 짓에 따라 눈이 번쩍번쩍했다. 그의 기세에 상체가 점점 위로 올라가더니, 헤드가 없는 침대 아래로 머리가 젖혀지기 시작했다.
“응, 떠, 떨어질…… 흐윽-!”
“하아.”
아래에서 내부를 멈추지 않고 퍽퍽, 쑤셔대 이대로 몸이 바닥으로 추락할 것만 같았다.
흐느끼듯 허둥지둥 팔을 뻗자 그가 내 팔을 잡고 아래로 잡아당겼다. 그러자 안쪽 깊이 성기가 콱 하고 찔러 넣어졌다.
배가 아릿해 올 정도로 깊이 박히자, 경련하듯이 몸이 떨렸다.
“윽, 아, 아앗, 아흑, 아, 아, 아아……! 아! 앗! 아!”
그의 움직임과 함께 낡은 침대가 삐걱거려 왔다. 입에서는 비명 같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가 팔을 잡고 단단히 몸을 고정한 채 아래에서 박아왔다. 더는 몸이 위로 올라가지 않았다. 대신 깊은 곳까지 콱콱 자극되었다. 숨 막히는 감각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의 숨결이 위에서 계속해서 쏟아졌다. 몸이 너무 뜨거워 뇌까지 녹을 것 같았다.
“흐! 으흣-!”
“흣…….”
추삽질이 점점 빨라지더니 이내 안쪽 깊은 곳으로 콱, 강렬하게 파고들어 왔다.
그와 함께 위에서 탁한 신음이 터져 나왔다. 몸 안에서 액이 퍼지는 느낌과 함께 나 역시 찌릿한 사정감에 휩쓸릴 때다.
몸이 회오리의 중심부에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시야가 이리저리 뒤틀리더니, 까맣고 고요한 공간에 도착했다.
갑작스러운 전환에 어벙하게 있던 나는 이곳이 어딘지 깨달았다.
‘……망할.’
제법 마인드 컨트롤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보다.
자괴감이 거대한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도 그럴 게…… 꼴에 좀 익숙해졌다고 사정없이 느껴 버렸기 때문이다. 아니면 상당히 아름다운 그녀, 아니…… 그의 얼굴을 보고 흥분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당연히 그가 남자라는 걸 분명히 인지하고 있다. 딴딴한 근육으로 된 몸이 제대로 느껴졌으니까. 그리고 길쭉한 프X글스로 박아대고 있는데 여자라고 착각할 리가 없다.
하지만…… 표정이 엄청 야했다. 그렇게 청순한 얼굴로 잔뜩 흐트러져서 쳐다보는데 누가 태연할 수 있겠냐고…….
……라고 변명을 하기에는 내가 다비 놈에게도 느꼈다는 사실이 번뜩 상기됐다.
‘빌어먹…… 아! 다비!’
현타에서 벗어나 퍼뜩 오감에 집중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점점 시야가 선명해지기 시작했고, 낡은 침대 위에는…… 마법사가 숨을 고르며 훤칠한 몸을 일으키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더니 길쭉하게 뻗은 다리에 바지를 끌어 올리며 정면에 보이던 흉측한 것을 무사히 가렸다.
나는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있는 놈을 향해 주춤 말을 뱉었다.
-……이제, 저놈 좀 치료해 줘.
“알겠습니다.”
단정한 목소리가 그의 볼륨 있는 입술에서 들려왔다. 이어서 침대 위에 올려져 있는 나를 향해 몸을 틀었다.
그가 팔을 뻗어 나를, 아니 지팡이가 된 나를 길쭉하고 하얀 손으로 감싸 쥐었다.
큰 손이 몸을 감싸는 느낌에 시선을 내렸다. 그러자 기둥을 손에 쥔 고운 손이 보였다. 동시에 조금 전 마법사가 스스로의 것을 만지던 모습이 머리를 스쳤다.
무기로 변한 내 몸이 흉측한 것으로 보이자 화들짝 시야를 차단했다.
‘……시발.’
시각 대신, 청각에 정신을 집중했다. 걸음 소리로 그가 다비 쪽으로 걸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발걸음이 멈췄다. 몸이 흔들리더니 주문을 읊는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도 모르는 복잡하고 어려운 외계어를 듣는 것을 관두고 몸 안에서 일렁거리는 마력에 집중했다.
점점 몸 안에 안정되어 있던 마력이 흔들리기 시작했고 점점 부풀어 오르는 게 느껴졌다. 강력한 마력과 생명력이 마법사의 마력과 조화롭게 섞였다. 이내 내부가 번쩍하는 느낌이 들었고 다시 잠잠해지기 시작했다.
“-끝났습니다.”
나는 마법사의 목소리에 마력을 시야에 집중했다. 그러나 눈앞에 다비가 아까와 다름없이 소파에 누워 있었다.
덤덤하게 다비를 바라보고 있는 마법사를 향해 물었다.
-자, 잘된 거야?
“물론입니다. 조금씩 마력이 정돈되고 있으니, 일주일이면 깨어날 겁니다.”
-그, 그렇구나.
그의 흔쾌한 대답에 조마조마했던 속이 확 뚫리는 기분이었다.
-……다행이다.
안도감을 느끼며 다비 놈을 바라봤다. 만약 다비 놈이 못 깨어났으면 나는 평생 죄책감에 시달렸을지도 모르겠다.
‘일반적인 사람이 멋대로 무기를 쓰게 되면 큰일 나는구나.’
빨간 책을 끝까지 읽었다면 이런 위험천만한 상황까지 오지 않았을 텐데…….
‘하아…… 원래로 돌아가자.’
돌아가야겠다 생각하니 몸이 또다시 어딘가로 휩쓸리는 느낌이 들었다. 시야가 점점 높아지더니 놈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변신하기 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빌어먹을 바지를 황급히 올리며 고개를 들었다. 마법사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
다비 놈을 살려준 마법사에게 고맙다고 말을 하며, 수고비라도 챙겨줘야 하나 생각할 때다. 문득, 사제의 옷을 입은 단정한 남자의 얼굴을 보고 말문이 막혔다.
급한 불을 끄자 이성이 돌아오고 있었다.
‘……내가 언제부터 말을 놓고 있었지?’
그 생각과 함께 목이 바짝 타는 기분이 들었다. 이 마을에서 추앙받고 있는 자한테 아까부터 상당히 막말했다는 것을 자각했다.
……이미 할 짓, 못 할 짓 다 했는데, 뭘 새삼스럽…… 아니지, 그건 변신 과정일 뿐이라고 했는 걸…… 그러니까 사, 사과해야겠지…….
“그…… 마법사님.”
“말씀하세요.”
“……저도 모르게 바, 방금까지 막말을 한 것 같은데, 그게…….”
차분한 보랏빛 눈동자를 보고 있으니 엄청 실례를 저지른 것 같아 말이 더듬더듬 나왔다.
횡설수설하는 스스로의 목소리가 귓가로 들어오자, 다른 말 집어치우고 퍼뜩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사과할 필요 없습니다. 기복 님은 편하신 대로 저를 대해 주시면 되니까요.”
“아, 아닙니다.”
“괜찮겠습니까? 모험하면서 일일이 존댓말 쓰는 건 기복 님이 불편하지 않을까요.”
“……에?”
나는 손사래를 치다 말고 뚱딴지같은 말에 동작을 멈췄다.
그가 나를 보고 싱긋 웃더니 친절한 어조로 말했다.
“말리진 않겠지만…… 기복 님은 저를 함부로 대해도 괜찮습니다.”
나는 아주 자연스럽게 말을 이어가는 마법사의 눈을 쳐다봤다. 보랏빛 눈동자가 따스함을 한껏 담고 있었다.
“……어, 아니…… 그게 아니라…….”
머리가 고장 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버버 거리던 나는 마법사의 머리 위에 반짝거리는 표식이 선명하게 눈에 박히기 시작했다.
[루비페크세나미타스], [Lv. ?], [마법사]. 아까와 똑같았다. 이름과 레벨, 직업 모두 동일했다. ……다만 다른 게 있다면 이름이 보라 색깔로 빛나고 있다는 점이었다.
나는 얼빠진 얼굴로 내 머리 위를 쳐다봤다.
[공기복], 같은 보라색이었다.
‘……언제부터 저 마법사랑 내 이름표가 같은 색을 띠고 있었던 걸까.’
나는 멍한 얼굴로 환하게 웃고 있는 마법사의 얼굴을 마주 봤다.
“저기, 언제-.”
멍청한 톤으로 입에서 떠듬떠듬 말이 나올 때다.
“-일부러 신경 긁는 것 같단 말이지.”
그 순간, 얼음이 뚝뚝 떨어질 듯 차가운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넋 놓고 있던 나는 몸 안으로 스며드는 한기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목소리의 정체를 파악하기도 전에 순식간에, 뒤에서 뭔가가 아주 빠른 속도로 앞으로 튀어 나갔다.
“내가 듣고 있단 걸 아는 것처럼.”
사냥터에서 처음 만났을 때의 낮고 서늘한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려왔다.
나는 숨을 들이켠 채 멍청하게 정면을 쳐다봤다. 재차 확인하듯 눈을 빠르게 깜빡이다 멀거니 앞을 바라봤다.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굳은 목을 돌려 뒤를 돌아봤다. 다비 놈이 누워 있어야 할 소파가 텅 비어 있는 게 보였다.
‘……분명 일주일 뒤에 깨어난다고 하지 않았냐……?’
나는 경악스러운 기분으로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그러자 마법사의 멱살을 틀어쥔 다비의 핏빛 뒤통수가 보였다.
정면 앞에 보이는 마법사는 칼날같이 싸늘한 표정으로 다비의 눈을 피하지 않고 마주하고 있었다.
“과한 의식입니다.”
마법사가 눈을 살짝 치켜뜨더니 가소롭다는 식으로 차갑게 말을 뱉었다. 그러더니 가느다란 손으로 멱살을 쥔 손을 붙들었다.
그들의 작은 움직임에 피부를 쪼아대는 살벌한 공기가 요동치는 듯했다.
“과한 의식이라- 눈이 마주쳤음에도 말이지.”
두 사람의 손에 핏줄이 툭 불거졌다.
심상치 않은 기세에 나는 다비 놈을 말리려 앞으로 걸어갔다. 치료해 준 사람한테 뭐 하는 짓이냐고 말을 하려 했다. 그러나 다비 녀석의 옆얼굴을 보자 목구멍에서 목소리가 튀어나오질 못했다.
붉은 눈동자가 살기를 띤 채 차갑게 마법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비릿한 웃음을 짓는 놈의 표정에 소름이 돋아왔다.
“우연입니다.”
“발뺌한다고 없던 일이 되진 않아.”
날이 서 있는 목소리와 함께 공기가 더욱 무거워지고 있었다.
다비가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차갑게 가라앉은 투로 마법사에게 말했다.
“내 것을 함부로 건든 대가는 치러야지.”
마법사는 다비의 살벌한 모습에도 시종일관 무미건조하게 쳐다봤다.
“마력도 제대로 회복되지 않은 상태로 입은 살아 있군요.”
“한낱 날파리를 짓밟아 죽이기에는 충분해.”
마법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다비의 손에서 붉은빛 마력이 소용돌이치듯 올라오기 시작했다. 동시에 다비의 손을 붙든 마법사의 손에서도 흰색 마력이 빠르게 모여들었다.
“그쪽도 제게 무례하게 군 대가를 치르게 해 주죠.”
두 사람의 살벌한 기세에 숨을 들이켤 때다.
돌연 방 안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렸다. 강도가 점점 세지더니 창문 하나 열지 않은 곳에서 바람이 일었다. 동시에 공기가 몸을 압착하듯 내리누르기 시작했다.
그들이 쏟아붓는 마력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점차 숨을 쉬는 것도 힘겨워질 때, 바닥에서 쨍그랑- 날카로운 소리가 귀를 찌르듯이 들어왔다.
아득해졌던 정신이 드는 듯했다. 그러자 잠깐 정신을 놓은 사이 내 몸이 바닥에 주저앉아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가까스로 정신을 잡고서 시선을 들었다. 마구잡이로 흔들리던 방 안으로 인해 탁자 위에 있던 유리병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몇 걸음 앞에 있는 두 사람 주변으로 붉은색과 흰색의 마력이 꽈리를 틀듯 뒤섞여 있었다. 그 마력들은 계속해서 덩치를 불렸다.
“기대되네.”
비웃음이 잔뜩 담긴, 차가운 투의 목소리가 다비 쪽에서 들려왔다.
방 안에 휘몰아치는 거대한 마력에 남아 있던 물건들이 바닥으로 우르르 떨어졌다. 금방이라도 건물 전체가 무너질 듯 흔들리고 있었다.
그 혼란스러운 공간을 마주한 나는 입을 뻐끔거렸다.
‘가, 갑자기 무슨…….’
머릿속 한편으로는 다비 놈과 마법사를 떼어놔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것도 벅찰 정도로 내리누르는 압력 때문에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힘겨운 숨을 몰아쉬며, 또다시 흐려지고 있는 시야를 통해 앞을 바라봤다. 그들 주변으로 모여든 거센 마력 때문에 시야가 마구잡이로 흔들리고 있었다.
정신이 점점 멀어지기 시작할 때다.
팽팽하게 모여지던 마력이 피슝, 맥 빠지는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흩어졌다.
폭풍우가 치듯 했던 방 안의 흔들림도 일순 멈췄다.
“……흐으…….”
짓누르는 압력이 탁 풀리듯 했다. 코안으로 공기가 자유롭게 들이켜졌다.
심장께를 붙들며 숨을 내쉬었다. 몇 번 호흡을 반복하자 점점 시야가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가쁘게 숨을 내쉬다 보니 이성이 점점 돌아오는 듯했다.
‘……주, 죽는 줄 알았네.’
정상적으로 돌아온 방 안의 기운이 피부에 와닿았다. 안도의 한숨을 쉬며 앞에 있는 그들을 쳐다봤다.
두 사람은 여전히 대치하듯 서 있었다. 그러나 아까와 달리 그들은 서로에게서 떨어져 있었다.
다비는 어디가 못마땅한 듯 손을 어정쩡하게 든 채 눈가를 찌푸리고 있었다. 앞에 있는 마법사 역시 설핏 미간을 찡그리고 있는 상태였다.
다비가 손을 다시 쳐다보자 붉은 기운이 살짝 모여들었다. 그러다 금세 마력이 파식, 물을 부은 듯 꺼져 버렸다.
“하.”
기가 찬다는 듯 다비가 고개를 비스듬하게 들었다. 그러더니 앞에 있는 마법사에게 손을 뻗었다. 그러나 투명한 막이라도 있는 것처럼 일정 거리 이상 더는 닿지 않았다.
“관두죠.”
마법사의 냉담한 듯 차분한 목소리가 고요하게 들려왔다. 그러자 앞에 있는 다비가 손을 내리더니 쯧, 혀를 쳤다.
마법사 역시 어딘가 마음에 안 들어 보이긴 마찬가지였다.
“같은 파티로 묶인 이상, 서로에게 피해를 입히지 못하는 것 같으니까.”
“하아…… 성가시네.”
어리둥절한 기분을 느끼던 나는 앞에 있는 마법사의 입에서 ‘파티’라는 말이 나오자 정신이 퍼뜩 들었다. 이어서 물건들이 온통 박살 나 버린 주변이 눈에 들어왔다. 몇 걸음 앞에는 내가 안중에도 없다는 듯 여전히 적개심을 드러내고 있는 두 사람이 보인다.
‘……이게 뭐냐……. 다짜고짜 싸우려 들질 않나, 방을 풍비박산을 내질 않나. 멋대로 파티를 맺질 않나, 대체 뭐 하는 짓인데…….’
나는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두 사람이 동시에 나를 돌아보았다. 두 사람의 상태는 아주 멀쩡해 보였다.
나 혼자 이놈들이 마구잡이로 휘두른 마나에 만신창이가 된 듯하다.
……씨발.
“대체- 이게 뭐 하는 짓이냐고.”
나는 다비 놈을 흰 눈으로 홱 쳐다보았다. 내 꼴을 보고도 미안한 기색이 하나 없는 뻔뻔한 놈의 낯짝이 앞에 보인다.
그 태연한 눈을 마주하자 울컥하는 마음이 속에서 올라왔다.
“가뜩이나 덤터기 쓰고 머물고 있는데 방을 이 지경으로 만들면 어쩌냐고. 골드도 한 푼 없는 상탠데!”
“내가 있으니 걱정 마. 그것보다 기복이는 그새 저런 날파리를 데려오면 어떡해.”
“쌔빠지게 데려와서 기껏 살려줬더니-! 장난하냐?!”
“날 걱정했던 건 알아. 하지만 회복 중인 애인 앞에서 섹스하는 건 너무하잖아.”
“……뭐, 뭐?”
“저놈의 멱을 따지도 못하게, 파티까지 맺어 버리면 어떡해. 이렇게 가볍게 굴 거야?”
염치없이 툴툴대는 놈에게 울컥 소리치다, 놈의 입에서 ‘애인’이라는 말이 들리자 누가 망치로 머리를 후두려 팬 기분이 들었다.
“…….”
나는 화를 내고 있단 사실도 잊고, 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리며 멍청하게 놈을 쳐다봤다.
놈이 곧은 입술을 툭 내밀며 마치 연인에게 삐진 듯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저 새끼는 언제부터 날 애인 취급하고 있었던 건데……?’
그를 쳐다보다 문득 그의 붉은 머리카락 위에 [전사]라는 표식이 눈에 들어왔다. 동시에 전사는 무기를 동반자 취급한다는 사실이 머리를 번쩍 스쳤다.
나는 다비 놈이 서운하다는 식으로 쳐다보는 눈빛을 뻣뻣하게 마주했다.
삐죽대는 입술을 보니 닭살이 피어올랐다. 아까 살벌하게 으르렁거리던 그놈과 동일 인물이 맞나 싶을 정도다.
“기복이는 나로 충분하잖아. 보잘것없는 놈이랑 맺은 파티는 끊어 버려.”
다비 놈이 말을 뱉으며 내게 한 걸음씩 다가오려 할 때다. 언짢은 듯 팔짱을 끼고 있던 마법사가 다비 놈의 말에 어이없다는 식으로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보잘것없는 건 제가 아닐 텐데요. 무식하게 공격만 하는 그쪽과 다르게 저는 기복 님이 원하는 대로 마음껏 사냥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죠. 그쪽이 몰상식하게 찢어놓은 아랫부분 역시 부드럽게 힐을 해 주는 게 가능하단 말-.”
“아악! 악! 썅- 대체 뭔 소리를 하는 거야!”
나는 정신이 아찔해지는 말소리와 함께 변신 행위가 머릿속에 떠올라 소리를 꽥 질렀다. 그러자 두 놈이 눈을 깜빡이며 나를 돌아보았다. 왜 그러냐는 눈빛이었다.
빌어먹을…… 아까부터 저 미친놈들 사이에 있으니까 내가 비정상이 되는 느낌이다.
저 마법사 놈도 다비 놈이랑 다를 바가 없는 놈이 확실했다. 그도 그럴 게-.
“네놈도 똑같다고! 왜 파티를 멋대로 맺어 버리냔 말이야!”
마법사를 희번덕 쳐다보며 따져 물었다. 그러자 마법사가 멈칫하더니 침착한 목소리로 말을 뱉었다.
“기복 님의 마력이 몸 안으로 들어왔을 때 느꼈습니다. 당신과 함께하고 싶다고.”
“아니! 나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왜 네놈 혼자 함께를 결정하냐고!”
“어차피, 기복 님도 제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허, 내가?”
“레스탈로스의 개방된 마력을 견딜 수 있는 자, 그게 당신과 함께할 수 있는 선택 받은 자니까요.”
“……뭐?”
“기복 님도 느꼈겠지만, 당신을 사용한 대가는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만들어 냅니다. 그리고 이 세계의 힘을 능가한 자인 제가, 당신과 조화로울 수 있지요.”
마법사의 담담한 목소리가 머리를 때리듯 파고들었다. 그와 동시에 마음속에서 커다란 파문이 서서히 일기 시작했다. 마법사 놈이 뱉은 방금 말들은 상당히 충격적인 정보로 다가왔으니까.
나는 분명…… 부하를 찾고 있긴 했다. 그리고 네스키를 잡으려면 내 능력을 100% 발휘 가능한 부하를 선택해서 데리고 다녀야 했고, 그럴 생각이었다.
그리고 이번 일을 통해 함부로 무기를 쓰면 위험할 수 있다는 걸 인지한 상태다.
마법사의 말대로, 그는 나를 사용하고도 끄떡없었다.
문득, 전직관이 엄한 얼굴로 뱉었던 말이 떠올랐다.
‘자네를 활용할 수 있는 자들은 아주 강해. 그런 체력 좋은 이들을 여러 명 두게 된다면…… 아주 힘들 테지……. 자네가 그들의 무기로 변하기 위해서는 상대와 합체해야 하니 말일세.’
남세스럽다는 듯 손을 휘저은 전직관의 손짓도 함께 떠올랐다.
“…….”
나는 목이 타는 기분으로 앞에 있는 마법사를 쳐다봤다. 그리고 마법사의 머리 위에서 빛나고 있는 보라색 이름표가 눈에 선명하게 박히듯 들어왔다.
부르기도 숨찬 이름이 머리 위에 둥둥 떠 있었다. 이어서 마법사의 이름 옆으로 [Lv. ?]라는 표시가 눈에 들어왔다.
‘……초보자면 진작 죽었겠지. 그러니까…… 저 물음표는 레벨이 적다는 뜻이 아니라는 소리잖아…….’
그렇다면…… 그 반대였다.
나는 그 옆에 있는 다비 놈을 쳐다봤다. 이놈 역시 레벨에 [Lv. ?]라는 괴상한 표시가 되어 있었다.
“…….”
몬스터에게서 그를 구하려 했던 나의 필사적임이 개그가 되는 순간이었다.
나는 경직된 고개를 살짝 내렸다. 그러자 눈앞에 두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두 사람은 새삼 위협적이다 느껴질 정도의 체격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 두 사람을 처음 볼 때, 몸이 짓눌리는 기운을 느꼈었다. 그리고 그게 그들의 압도적인 힘에 의한 것이라는 것을 깨닫자 억울함이 몰려왔다.
‘망할…… 저게 무슨 부하냐고…….’
나는 마음껏 부려 먹을 수 있는 부하를 찾고 있었다.
그러나 저놈들이 어딜 봐서 부하란 말인가…….
‘저들을 부려 먹다가 아래가 다 헐어 죽어버릴…….’까지 생각하던 나는 앞에 있는 마법사가 광기 어린 힐러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멋대로 죽었다간 흉측한 슬라임 꼴 나지 않을까, 라는 끔찍한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이런 미치광이 두 놈이 하필이면 전설의 무기를 견디는, 선택받은 자라는 것을 인지하자, 기운이 쭉 빠졌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냔 말이야…….’
사실 그 정보는 잘못된 정보인 게 아닐까.
……강력하게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그러나 괜한 짓이라는 걸 안다.
진실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방증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또 괜히 부정한다고 다른 부하를 구하다, 상대가 죽기라도 하면 그거야말로 진짜 큰일이다.
그리고 굳건하게 맺어진 보라색 파티는 어쩌고…….
‘실수로 맺은 게 아니었냐고…….’
파티원들끼리 일정 장소 이상 도망칠 수 없도록 끈끈한 결속력을 자랑하는 철저한 파티다. 실수로 맺을 리가 없었다.
조금만 더 생각해 봤으면 알았을 텐데…… 아니, 그래도 달라질 건 없을 것 같다.
고심 끝에 맺어야 하는 파티를 멋대로 맺은 놈이다. 해제하자고 한들 해 줄까 싶다.
……그럼 애초에 보라색 파티를 걸지 않았겠지.
‘찾을 수 있을걸세. 상대방은 본능적으로 자네에게 끌릴 테니.’
당시 간과했던 전직관의 말이 머릿속에 순간순간 재생되었다.
……저 미친놈들은 결속력을 높여주는 파티를, 족쇄처럼 사용한 게 아닐까, 란 합리적인 의심도 들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이어지자 어쩐지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기분이 들었다.
……살면서 이렇게 막막해지는 기분을 느끼는 건 처음이다.
“거대한 마력을 지닌 기복 님은 그 어떤 것보다 파괴적이고 위협적입니다. 힐러인 제가 가장 저다울 수 있도록 해 주는 존재가 기복 님이죠.”
내가 허탈하게 서 있든 말든 마법사는 진지한 얼굴을 하고서 앞에서 제 할 말을 뱉고 있었다.
“기복 님. 당신과 함께하고 싶습니다.”
마치 고백이라도 하는 것처럼 마법사가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 대답을 기다리는 듯한 그의 모습에 멀거니 그의 얼굴을 쳐다봤다. 유리알같이 투명한 피부와 차갑고 단정한 얼굴이 상당히 청순가련해 보였다.
내가 침묵을 지키자 탁 트여 있는 눈매 속에 보랏빛이 도는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봤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얼결에 고개를 끄덕여 버렸다.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의 끄덕임에 기쁜 듯 눈을 접어 웃었다.
고운 얼굴이 내게 천사 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의 주변으로 등불 백 개를 켠 듯 환해지는 듯하다.
“이제 저를 마법사님이 아닌, 이름으로 불러 주실 수 있나요?”
“……루스.”
“네. 기복 님.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그래.”
나는 꽃향기가 날 것처럼 나긋나긋하고 싱그러운 루스를 마주했다. 그의 얼굴을 몽롱하게 바라보니 입꼬리가 움칫거렸다.
그를 따라서 미소를 짓자 루스가 손이라도 마주 잡을 듯 팔을 뻗어왔다.
나보다 한 뼘 정도 큰 루스가 내 앞에 서서 기쁜 듯 손을 마주 잡았다. 차가운 손이 느껴졌다. 시선을 내리자 손에 툭 불거진 핏줄이 보였다. 내 손을 단번에 감추는 큼지막한 손의 크기도 보였다.
다시 눈을 들자 청순가련한 여인의 튼튼한 목울대가 보였다. 널찍하게 벌어진 어깨 역시 눈길을 사로잡았다.
……이쯤 되자 슬슬 앞에 있는 녀석이 위압감 넘치는 사내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 순간, 보랏빛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침대 위에서 잡아먹을 듯 내려다보던 집요한 눈빛이 겹쳐 보였다.
“흡-.”
절로 한 발짝 뒷걸음질이 쳐졌다. 이성이 돌아온 나는 방금 전까지만 해도 기구한 운명에 심란해하다가, 놈의 얼굴에 홀려 금세 병신처럼 웃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성에 큰 관심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이렇게 이성을 좋아했던가……. 아니, 엄연히 말하면 저놈들은 이성이 아니라-.’
깊어지는 생각은 이내 무서운 판도라의 상자를 건드려 버릴 것만 같았다.
나는 고개를 확 올려 루스를 쳐다봤다.
“구, 굳이…… 내 허락이 뭐가 필요하냐…….”
루스의 얼굴을 보자 미인계에 홀랑 넘어갔다는 사실이 곱씹어져 기운 없게 말이 뱉어졌다.
내가 이렇게 얼굴에 환장하는 놈이었던가. 아니면-
나는 고개를 휙휙 저었다. 여러모로 암담하고 복잡한 마음에 우울하게 말을 뱉었다.
“어차피 선택받아야 사용할 수 있다며……. 이미 정해진 거 아니냐고…….”
“일단, 기복 님의 의사도 중요하니까요.”
‘멋대로 파티를 걸어놓고 잘도…….’
누구 놀리냐 싶지만, 말을 길게 할수록 또 놈의 페이스에 말릴 것 같아 그냥 입을 다물었다. ‘이 지경까지 몰렸는데 어째.’ 싶은 자포자기 마음도 들고 있었다.
말싸움을 할, 전투 의욕이 들지 않아 허망하게 서 있었다.
이런 나를 루스가 따스함이 담긴 얼굴로 내려다봤다. 그의 눈에는 생기가 돌고 있었으며, 마주 잡은 손을 수시로 엄지로 쓰다듬어 대고 있었다.
나는 큼지막한 루스의 손을 내려다봤다. 절대 작은 편이 아니건만, 앙증맞아 보이는 내 손이 보였다. 더해서 고운 손과 비교가 돼, 괜히 내 손이 볼품없게 느껴졌다.
“기복 님과 함께할 수 있어서 영광입-.”
루스의 입에서 들뜬 목소리가 터져 나왔을 때다. 내 손을 쓰다듬던 루스의 손이 떼어졌다. 정확히는 루스가 내 손을 놓쳤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돌연 내 몸이 뒤로 휙 돌아갔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다리가 기우뚱거렸다. 그러나 어깨를 단단히 잡은 손에 의해 오뚝이처럼 다시 몸이 섰다.
시야가 갑자기 돌아가 잠깐의 어지러움을 느끼던 나는, 앞에 있는 널찍한 상체를 보고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단단한 몸을 감싼 하얀 셔츠가 보였다. 자연과 닮은 풀잎 향도 맡아졌다.
“네가-.”
잔뜩 잠겨 버린 목소리가 앞에서 들려왔다.
삐걱삐걱 고개를 들자 루스 놈보다 키가 조금 더 큰 다비 놈의 얼굴이 보였다.
이글거리는 그의 붉은 눈동자를 마주하자 몸이 흠칫 떨려왔다. 눈앞에 있는 그의 눈동자는 나를 뚫어버릴 듯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왜, 왜…….”
“레스탈로스라고?”
감정을 억누르는 투가 들려왔다.
능구렁이 같은 눈빛을 하던 그가 사뭇 심각한 빛을 띠고 있어 침이 절로 꼴깍 삼켜졌다.
가까이서 맹렬히 쏟아지는 시선에 나는 눈을 피하다 결국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파티까지 맺어진 마당에 뭘 비밀로 하냐.’
눈치를 보듯 흘끗 시선을 맞추자, 탄성과도 같은 것이 그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하.”
나는 부담스러운 그의 시선에서 벗어나려 몸을 틀었다. 그러자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이 더 가해졌다.
나는 입술을 합 다물며 다시 그를 올려다봤다. 아까보다 그의 눈빛이 조금 더 이글거리는 듯해 진땀이 나고 있었다.
그가 천천히 입술을 열며 혼잣말하듯이 나직이 말했다.
“그럼 그렇지……. 시시한 무기로 정신을 잃을 리가 없지.”
“네, 네가 개방하라 해서 개방한 거야.”
“널 탓하는 게 아니야.”
“그, 그럼 어깨 좀 놔 줄래…….”
점점 가해지는 아귀의 힘에 어깨가 아릿하게 아파져 왔다. 인상을 찡그리던 나는 코앞에서 지독하게 쳐다보는 그의 강렬한 눈빛을 올려다봤다.
문득 가슴 한구석에 불안감이 올라왔다.
‘왜, 왜 그렇게 열렬하게 쳐다보는 건데.’
……뭔진 모르겠지만, 일단 놈에게서 안전거리를 확보하는 편이 좋을 듯하다.
나는 팔을 들어 올려 어깨에 있는 놈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더 꽉 잡아 오는 놈의 손아귀의 힘에 눈이 찌푸려졌다.
“그래, 그래……. 이상하다 싶었어. 허구한 날 부서지는 쓸모없는 것들과 달리 기복이는 튼튼했으니까.”
한껏 상기가 된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의외의 목소리 톤에 고개를 들었다. 당연히 무섭게 쳐다봤으니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화가 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놈의 눈동자에는 반짝이는 이채가 돌고 있었다.
“다음 애인이 아닌, 평생 함께할 연인을 찾은 거였어.”
그는 뒤늦게 실감을 한 사람처럼 감탄을 뱉기 시작했다.
어깨에 있는 손에서부터 떨림이 전해졌다.
놈과 눈이 마주친 나는 이놈이 내 정체에 대해 상당히 놀라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니 놀란 놈이 그렇게 무섭게 쳐다보냐고. 그리고-
“어깨는 좀-.”
‘놓으라고.’ 말을 뱉으려던 나는 갑작스럽게 상체가 뒤로 젖혀져 말을 끝맺지 못했다.
“-으앗!”
몸이 뒤로 넘어간다 생각해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상체가 좀 젖혀지다 뒤통수와 등에 딴딴한 게 닿아 넘어지지 않았다.
나는 벌렁거리는 심장을 느끼며 숨을 토해냈다. 그러나 가슴팍 부분을 감싼 무언가로 숨 쉬는 데 방해가 됐다.
그 압박감에 시선을 내리자 널널한 천으로 감싸진 팔이 내 가슴께를 붙들고 있었다.
“뇌가 근육으로 되어 있으니, 전설의 무기를 눈앞에 두고도 못 알아보는군요.”
뒤통수에서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에는 빈정거림과 차가움이 담겨있었다.
나는 가슴팍을 끌어안은 천이 사제의 옷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동시에 낮게 깔린 목소리를 듣고, 등 뒤에 루스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눈을 깜빡이다 가슴팍을 조여오는 힘에 놓으라고 고개를 돌리려 할 때다.
“기껏 쏟아부은 게 지력인가 봐. 크게 차이 나진 않을 텐데.”
앞에서 우습다는 투와 함께 싸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더해서 어깨를 잡고 있던 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읏…….”
앞으로 당기는 힘에 고개를 들었다. 들떠 보였던 다비 놈의 붉은 눈동자가 어느새 차갑게 식어 있었다. 그 쭉 뻗은 눈은 내 뒤에 있는 녀석을 쳐다보고 있었다.
“차이가 없을 리가요. 타고나길 높게 타고 나, 그쪽이 지력을 올릴 때 저는 능력을 고루 높일 수 있었지요.”
칼날같이 시린 투가 뒤에서 흘러나왔다. 가슴팍이 다시 뒤로 당겨지자 눈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강하게 붙든 가슴께가 얼얼했다. 뒤에 있는 딱딱한 몸에 등이 닿을 때다. 다시 어깨가 앞으로 잡아 당겨졌다.
눈앞에 탄탄한 가슴팍을 감싼 셔츠가 멀어지다가 다시 가까워졌다.
“이도 저도 아닌 쓸모없는 상태군.”
“모든 스탯이 월등히 높다는 건, 완벽에 가까운 상태를 말합니다.”
“네 수준의 완벽함이 고작 그 정돈가. 공격력이 한참 낮아 보이는데.”
“결코 낮은 편이 아닐 텐데요. 그쪽은 뇌가 근육으로 변할 만큼 쏟아부으셨나 보군요.”
나는 머리 위로 쏟아지는 살벌한 목소리들과 함께 몸이 뒤로 넘어간다 싶으면 다시 앞으로 기울어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결코 내 의지가 아니었다.
몸이 기울어질 때마다 내 입에서는 악악, 앓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놈들이 말을 더해 갈 때마다 나를 붙든 손에 힘이 가해졌기 때문이다.
“읏! 이것, 좀 놓고-.”
상체에서 느껴지는 아릿함에 신음을 삼키며 꾸역꾸역 말을 뱉었다.
양쪽이 단단한 벽에 갇힌 것처럼 옴짝달싹 못 하고 놈들의 손에 휘청거릴 즈음이다. 문득 머리가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을 뻔한 나는 피부에 닿는 열기에 퍼뜩 눈을 들었다. 그러자 앞에 있는 다비 놈의 몸에서 붉은 마력이 이글이글 올라오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등 뒤도 곧장 얼어버릴 듯한 차가움이 느껴졌다.
“아, 아프다고…….”
앞뒤로 느껴지는 강렬한 마력이 몸을 압박해 목소리가 덜덜 떨려왔다. 커다란 바위가 몸을 짓누르는 느낌이 들었다. 이어서 앞뒤로 퍼져 나오는 마력의 빛이 강해질수록 시야가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방 안이 흔들리는 건지 내 몸이 진동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다만 토할 것 같고 곧장 혼절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등줄기부터 식은땀이 뻘뻘 흐르기 시작했다. 숨이 막혀와 힘겹게 호흡을 토해냈다. 시야가 핑핑 돌자, 이렇게 허무하게 뒈지는 건가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그때, 아까와 같이 바람 빠지는 소리가 귓가에 희미하게 들려왔다.
앞에서 흩날리던 거대한 마력이 어느 순간 물이라도 끼얹은 듯 사그라들었다.
“……하아. 어쩔 수 없군요.”
어질어질했던 시야가 차차 돌아오기 시작할 즈음, 뒤에서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뒷덜미에서 숨결이 닿아왔다. 이어서 매우 아쉽다는 투의 목소리가 위에서 들려왔다.
“파티에서 나가는 순간 그쪽의 심장을 도려내 실험체로 써 드리죠.”
“건방진 날파리를 계속 살려두는 건 영 안 내키는데.”
겨우 울렁거리는 속이 진정되려 하는데 또 머리 위에서 날 선 말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조소를 머금고 있는 다비 놈의 얼굴이 앞에서 보였다.
“그럼 그쪽이 파티에서 나가면 되겠군요.”
“우리 사이에 눈치 없게 낀 놈이 나가야지.”
어느 정도 마비된 듯한 감각이 돌아오자, 놈들의 손이 닿은 곳에서부터 욱신거리는 고통이 밀려왔다. 더해서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살기 어린 목소리가 귀를 쑤시듯 했다.
두 사람의 사이에는 냉기가 맴돌았다.
그리고 그 사이에 낀 나는…… 속에서 부글거리는 것이 끓어오르고 있었다.
“싸울 거면 나는 좀 놓으-!”
치솟는 화를 못 참고 나는 거세게 발버둥을 쳤다. 몸을 홱 비틂과 동시에 나는 몸이 굳어 버렸다. 목젖에서 1cm도 안 되는 거리에 송곳같이 뾰족한 물체가 있었기 때문이다.
조금씩 시선을 내리자 창백한 손에 하얀 무언가가 들려 있는 게 보였다. 그리고 그게 몬스터의 송곳니라는 것을 모양으로 짐작할 수 있었다.
커다란 손안에 알맞게 들어오는 송곳니는 내 목을 단숨에 뚫어버릴 듯 아주 날카로웠다.
나는 숨도 쉬지 못하고 굳어 버렸다. 목가에 있는 창백한 손이 조금 움찔거리는 것을 보며 천천히 눈동자를 올렸다. 아른아른 시야에 걸리는 무언가를 불길하게 쳐다봤다. 거기에는 조금만 움직여도 살이 찢어질 듯 아주 매서운 칼날이 있었다. 그리고 볼을 쑤실 듯 위협적인 위치에 있었다.
“흡-!”
심장이 덜컹거렸다. 눈이 절로 홉떠졌다.
천천히 상황이 인식되자 몸이 경련하듯 흠칫 떨려왔다. 그리고 몸이 움직이는 순간 아차 싶었다. 지금 이 상태로 조금만 움직여도 몸 어딘가에 구멍이 날 테니까.
그 순간 바람 소리가 날 정도로 빠르게 놈들이 손을 움직였다.
시선을 내리자 다행히 몸에 닿아 있던 날카로운 것들이 거둬져 있었다.
파르르 눈꺼풀이 떨렸다. 안도의 마음보다는 계속해서 심장이 튀어나올 듯 벌렁벌렁 뛰어댔다.
상체를 붙들고 있던 손이 움찔하며 떼어졌다. 시선을 들자 다비 놈의 붉은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아…….”
뒤에서 주춤 물러나는 소리와 함께 탄식 소리가 들려왔다. 가슴을 압박하던 손이 거둬졌다.
그제야 나는 멈췄던 숨을 내뱉었다.
조금 진정이 되니 하나의 사실이 인지됐다. 앞에 있는 놈의 표정만 봐도 방금 내가 저세상에 갈 뻔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속에서 뒈질 뻔한 내 꼴이 곱씹어졌다. 그러자 붉은 덩어리가 속에서부터 치고 올라왔다. 그 뜨거운 덩어리는 이내, 앞 놈이 들고 있는 날카로운 물체를 보는 순간 머리끝까지 펑 하고 올라왔다.
“이- 이 미친 새끼들아! 말을 하면 좀 처들으라고! 놓으라고 했냐, 안 했냐?! 빌어먹을- 사람 죽이려고 작정했냐고!”
참았던 울분이 폭발해 길길이 고함 소리가 터져나갔다.
옆으로 몸을 확 옮기자, 양쪽으로 놀란 듯 눈을 깜빡이고 있는 두 얼굴이 보였다.
이 새끼들은 사람을 중간에 끼워서 개무시하면서 좆대로 싸워대는데 내가 전혀 화낼 줄 몰랐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빌어먹을 두 놈의 면상을 거세게 노려보며 뒤를 팍 돌았다.
“씨발- 니네끼리 싸우든지 뒈지든지 멋대로 해!”
엉망이 된 바닥에 내 처지처럼 널브러져 있던 테이블보를 콱 밟았다. 그리고 성큼성큼 문으로 걸어갔다.
“기복 님-.”
“기복이 어디-.”
낡은 바닥이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뻔뻔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나는 울컥 화가 치솟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빽 소리쳤다.
“따라오면 니네랑은 끝인 줄 알아!”
“음. 그러기엔 우리 파티가 맺어-.”
사람이 이렇게 화내고 있건만, 눈치 따위 개나 줘버린 놈 하나가 말을 뱉었다. 듣기 싫다는 듯이 문을 쾅- 부서져라 닫고서 곧장 숙소를 나왔다. 그리고 앞에 보이는 길을 따라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숙소에서 저놈들끼리 죽어라 패고 싸우든 시발, 나는 알 바 없다. 저놈들 틈에 있다가 내가 죽을 판이다.
그리고 이 빌어먹을 운영자 새끼는 게임을 뭐 이따위로 만드냔 말이야! 무기는 파티원 취급도 안 해 주냐? 왜 저놈들만 보호해 주냐고! 그럴 거면 아예 독자적으로 파티를 끊을 수 있게라도 만들어 주든가! 뭐 이렇게 선택적이냐고! 이러니 좆망겜 소리나 듣지. 개고생이란 개고생은 다 했는데, 한순간에, 죽을 뻔한 게 말이 되냐!
‘시발, 유저 대우가 뭐 이따구야!’
팍팍 발을 굴리며 미친놈들이 있는 숙소에서 멀어졌다.
꽤나 숙소에서 멀어졌다고 생각했을 즈음, 뒤에서 타닥타닥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썅, 귓구멍-.”
귓구멍이 막혔나, 그렇게 따라오지 말라고 했는데-! 눈을 희번덕 뜨며 신경질적으로 뒤를 확 돌아보았다. 그러나 뒤에는 마을 어린아이가 해맑게 지나가고 있었다.
“…….”
한껏 힘을 준 눈에 힘을 풀었다. 눈치 더럽게 없는 놈이 뒤쫓아 올 것만 같아 빠른 속도로 걸었는데 다행히 따라올 정도로 눈치가 없진 않나 보다.
“하아…….”
들이켰던 숨을 한숨처럼 내쉬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평화로운 자니스의 마을 풍경과 멀어지는 어린아이의 갈색 뒤통수를 쳐다봤다.
그렇게 잠시 동안 고즈넉한 풍경을 보다가 다시 앞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터덜터덜 맥없는 걸음으로 정처 없이 아무렇게나 걷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루스 그놈이 뱉은 말 때문에 머리가 복잡했다. 심란해 죽겠다는 사람 앞에서 지랄 난 두 놈을 보니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 버렸다. 그래서 홧김에 숙소를 나오긴 했는데, 일단 잘 나온 것 같다. 지금 나한테는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으니까.
나는 머리 좀 환기할 겸, 하늘을 올려다보려다 머리 위에 둥둥 떠 있는 보라색 이름표를 보고 말았다. ……기분이 더 축 처졌다.
“……이게 뭐냐고.”
나는 우울하게 중얼거리며 이름표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그저 스쳐 지나갈 사람이라고 여겼던 놈들과 쭉 함께하게 된 상황이 되었다. 내가 다비 놈에게 파티를 제안했으니, 결속력 높은 보라색 파티를 맺은 것에 대해서 대수롭지 않게 넘겼었다. 그리고 그 당시 가슴 한편이 싸한 느낌을 받았던 것 같다.
아마 본능적으로 좆됐음을 감지한 듯하다…….
‘그래……. 어차피 내 힘을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부하를 찾는 중이었잖아.’
순조로운 상황에 뭐가 문제냐는 생각으로도 위로가 안 되는 사실이 떠올랐다.
저놈들은 겉만 멀쩡하지, 머리가 어딘가 회까닥했을뿐더러-
“너무 크다고…….”
거기가 너무 컸다. 커도 너무 컸다. 변신 방법이 아주 지랄 맞아 놈들의 크기를 절대 무시할 수 없었다.
‘왜 하필…… 저놈들이 선택받은 자들이냐고.’
하지만 기구한 운명이 한탄스러운 이 상황에도 아이러니하게, 다시 초보자 마을로 가고 싶다는 마음이 들지 않았다. 이 세계에 온 혜택을 누리고 다이내믹하게 살고 싶다는 나의 욕망이 무시 못 할 정도로 컸으니까.
무려 눈이 즐거울 정도로 퀄리티 쩌는 게임 속에 들어와 사는 황금 같은 기회였다. 더해서 남들이 껌뻑 죽는다는 특별한 직업을 가진 상태다.
‘인생 한번 신명 나게 살아 보라고 이렇게 판을 깔아 주잖아.’
그리고 그 판을 활용하기 위해서는 의지와 상관없이 맺은 파티긴 하지만, 저놈들을 동료로 들이는 게 전략상 맞았다.
‘특정하게 선택받은 자가 있다는데 어쩔 수 없잖아…….’
내 개인적 사정을 뒤로한다면, 놈들은 동료로 맞이하기 훌륭한 놈들이었다. 몬스터를 사냥할 때의 다비 놈과 아까 다비 놈을 단번에 치료한 루스 놈은 능력치가 상당한 걸로 보인다. 그리고 뒤늦게 알긴 했지만, 레벨이 높아 물음표로 표시된 놈들이다. 무려 세계관 최강 보스 몹을 처리하러 가는 파틴데, 저놈들만 한 파티원이 있긴 할까 싶다.
‘……상대가 남자라는 자괴감만 극복하면 큰 문제 없잖아.’
……그나마 다행인 점은 놈들의 외모가 월등히 수려하다는 점이다. 행위를 하다가도 가까이서 보면 감탄이 튀어나올 정도니까.
이렇듯 거부감이 제법 극복될 정도로 놈들의 외모는 훌륭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하다 보면 기분도 좋…….’까지 생각하자 발걸음이 절로 멈춰졌다.
……머리끝까지 온몸에 털이 쭈뼛 섰다. 속으로라도 재차 확인하듯 되뇔 필요는 없을 듯하다. 익숙해지자는 마음만 먹었을 뿐이지 아직 행위에 대해 면역이 갖춰지지는 않았다.
“하아…….”
답답한 가슴에 한숨이 튀어나왔다.
돌이 빼곡히 깔린 바닥에서 시야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산 너머로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가고 있는 풍경이 저 멀리 보였다.
한적한 마을 길가에서 멍하니 서서 해가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는 것을 바라봤다. 잔잔한 바람이 피부에 닿아 왔다. 옆에 있는 나무가 산들산들 흔들렸다. 풀잎 냄새가 코로 시원하게 들어왔다.
“…….”
그렇게 잠시 생각을 멈춘 채 앞을 보고 있으니 주홍빛이 도는 하늘에 용 하나가 날갯짓하며 유유히 날아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걸 가만히 보고 있으니, 불현듯 ‘뭐 어때.’라는 마음이 들었다. 뒤죽박죽 어지러운 마음속이 서서히 정리되는 것 같았다.
‘그래. 여기서 나는 대학생 공기복이 아니잖아.’
내가 전 삶과 같은 이름이긴 하지만, 상당히 업그레이드된 몸을 갖고 새로운 세상에서 새 인생을 살고 있는걸. 전 세상에서 배워 온 가치관에 심각해하는 건 부질 없잖아. 이 세계의 가치관은 성이라는 것을 신성하게 여기니까 전설의 무기의 결합 방법이 된 거 아니겠냐 이 말이야.
또, 각종 몬스터들이 판치고 사람이 무기로 변하는 세상에서 동성이든 이성이든 성별이 뭐가 중요하냔 말이지.
“아무렴.”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을 전환하고 받아들이는 쪽으로 마음을 먹자, 꽉 막혔던 마음이 점차 뚫리는 느낌이 들었다.
눈을 감고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자 시원한 공기가 폐 안으로 들어왔다.
다시 천천히 눈을 뜨자 해가 산 아래로 모습을 감춘 상태였다. 어둑해진 하늘을 보며 그제야 내가 다리가 아프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늘 너무 고되긴 했어.’
이만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하며 왔던 길을 향해 몸을 뒤로 틀었다.
‘남자랑 합체하든, 하늘을 날든, 마법을 쓰든, 뭐가 문제냐.’
나는 다시 숙소가 있는 방향을 향해 걸어갔다.
몸은 전보다 지친 상태였지만, 마음만은 한결 가뿐해졌다. ……라고 생각한 그날 밤, 나는 겨우 다잡았던 마음이 흔들리고 말았다.
* * *
“따라오면 니네랑은 끝인 줄 알아!”
공기복이 잔뜩 으름장을 놓으며 소리쳤건만, 다비는 태평한 어조로 말을 했다.
“음. 그러기엔 우리 파티가 맺어-.”
기복이가 문을 확 열어젖히더니 다비의 말을 쌩하니 씹고 부서져라 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쾅-
다비와 루스는 우뚝 선 채 굳게 닫힌 문을 바라봤다. 복도 너머로 쿵쿵 발을 굴리는 세찬 소리가 들려왔고 그 발소리는 차차 멀어졌다.
희미해지는 소리를 들은 이들은 생명의 위기를 느낀 기복이와 달리 빠르게 평정을 되찾은 표정이다. 그도 그럴 게, 이 두 사람은 기복이를 털끝조차 다치게 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으니까.
두 사람은 예기치 못한 기복이의 움직임에도 직감적으로 감지를 하고 멈출 만큼 민첩력이 뛰어났다. 이들이 기복이를 원하는 이상 기복이는 결코 죽을 일이 없을 것이다.
“…….”
두 사람은 기복이를 따라나서려 했다. 하지만 발을 뻗다 말고 멈췄다. 닫힌 문을 보고 짧게 눈을 깜빡였다. 아무래도 기복이가 나름의 위협을 했으니 들어주는 편이 좋겠다는 판단을 한 듯하다.
파티가 맺어진 상태로 일정 장소 이상 기복이가 자신들에게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내려진 판단이었다.
“아아- 네놈이 기복이 얼굴에 무서운 걸 갖다 대니까 나가 버렸잖아.”
다비가 성가시다는 듯이 빈정대며 말을 뱉었다.
“그쪽이 기복 님의 목을 찌르려 한 건 생각 안 합-.”
몇 발자국 옆에 떨어져 있던 루스가 싸늘하게 돌아보며 맞받아쳤다. 아니, 치려 했다. 그러나 루스는 의미 없는 말싸움이라는 것을 인지했다. 더군다나 기복이가 자신들의 싸움에 위협을 느낀 상황이다. 루스는 이성적으로 그만두는 편이 맞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하아.”
루스는 한숨과 함께 머리를 뒤로 쓸어 넘겼다. 흰색 긴 머리칼이 얇은 손가락 사이로 부드럽게 지나갔다.
약간의 짜증이 담긴 그 손짓과 동시에 루스의 입에서 냉기가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휴전하죠.”
루스는 일단 한발 물러서며 휴전을 제안했다. 그러나 말과 달리 전혀 휴전하고 싶어 하는 얼굴은 아니었다. 여전히 달갑지 않은 기분에 미간에는 주름이 져 있었다.
그 제안에 다비가 고개를 비스듬하게 기울이며 루스를 쳐다봤다.
“음.”
루스는 다비의 붉은 눈을 피하지 않고 마주 봤다. 그리고 무미건조한 투로 말했다.
“적어도 기복 님 앞에서는 말입니다.”
말을 뱉은 루스의 입매가 탐탁지 않다는 듯이 찡그려져 있었다.
“그쪽도 레스탈로스가 망가지는 건 싫을 테죠.”
다비가 루스의 얼굴을 보다 머리 위에 있는 보라색 이름표를 흘끗 쳐다봤다. 그러더니 다시 눈동자를 내려 루스의 냉기 어린 얼굴을 마주했다.
“…….”
다비 역시 루스가 매우 탐탁지 않았다. 둘은 공기복을 같은 눈으로 보고 있었으니까.
둘은 자신들의 마력을 온전히 품는 공기복이라는 존재를 지독히도 갈망하고 있었다. 그것을 파악한 두 사람은 서로가 눈엣가시처럼 거슬렸다.
“-그러지.”
다비는 조금 굳은 투긴 하지만, 잠깐의 고민 끝에 쉽게 루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어차피 같은 파티로 묶인 상태고, 루스의 말대로 그토록 바랐던 존재가 스스로를 망가뜨리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까.
자신들이 기복이를 보호한다고 한들, 기복이가 스스로 위험을 자처하면 이들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 점을 기복이가 잘만 이용하면 두 사람은 꼼짝 못 할 것이다. 하지만 기복이는 이들의 약점이 본인이라는 것을 모르는 듯하다.
그렇게 절대 타협하지 않을 것 같은 살벌한 두 사람은 적어도 기복이 앞에서는 서로를 죽이려 드는 것을 자제하기로 했다.
그쯤, 창가로 보이던 햇빛이 저물고 방 안은 어둑해졌다.
제법 시간이 지났음에도 기복이가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두 사람은 기복이를 찾아볼 생각으로 문가로 다가섰다. 그러자 서로가 동시에 문으로 가고 있음을 알고 기분 나쁘다는 듯이 눈을 찌푸렸다.
누구랄 것 없이 한 발 더 앞으로 걸어갔을 때, 복도 끝부터 타박타박 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두 사람이 멈춰 섰다. 이내 앞에 있던 방문이 벌컥 열렸다. 걸음부터 예상했던 대로 공기복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두 사람은 빤한 시선으로 기복이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상태를 쭉 살폈다. 아까 길길이 날뛰고 나갔을 때와 달리 꽤나 기분이 안정돼 보였다.
“…….”
기복은 두 사람이 싸우고 있으리라 예상한 것과 달리, 평화로운 방 안을 보며 눈을 깜빡거렸다. 그러다 다행이라는 듯이 긴장한 어깨에 힘을 풀었다. 그리고 들어올 때처럼 다시 눈을 또랑또랑하게 떴다.
두 사람은 무언가를 결심한 듯한 기복이의 표정을 보고서 말을 기다렸다.
“자니스에 머물 만큼 머물렀어. 내일 떠나자.”
기복이가 결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고서 새까만 눈동자를 들어 다비와 루스를 한 번씩 마주했다. 마치 이견 있으면 말하라는 듯이 말이다.
기복이는 자신과 파티가 된 이들의 의견을 물어보는 중이었다.
“좋아.”
아까, 울 것 같은 얼굴로 나간 기복이가 생기를 띠고 있었다. 그 얼굴을 마주한 다비는 덩달아 산뜻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루스 역시 사뭇 단정한 톤으로 대답을 했다.
그들의 대답에 기복이가 고개를 끄덕이다 새삼 루스가 입고 있는 사제의 옷을 빤히 쳐다봤다. 그러다 다시 시선을 들어 루스의 단정한 얼굴을 마주 봤다.
“성당 사람들한테 떠난다고 말해야 하는 거 아니냐?”
기복이가 커다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의문스레 물었다.
“기복 님이 돌아오시는 걸 보고, 인사를 하러 갈 참이었습니다.”
“흐음- 그래. 인사도 하고 챙길 거 챙겨야지.”
기복이가 턱 가에 손을 짚고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크게 바쁜 것도 없으니 굳이 내일 떠나지 않아도 괜찮았다. 루스가 마을 사람들과 작별 인사를 할 동안 천천히 기다려도 충분하다.
넉넉한 기간을 불러도 그러려니 할 참으로 기복이가 주억거리던 고개를 멈추며 물었다.
“그럼 며칠이면 돼?”
“내일. 정오에 떠나는 건 어떻습니까.”
“그, 그렇게나 빨리? 나야 상관없긴 한데…….”
“예. 문제없습니다.”
기복이가 동그란 눈을 깜빡이며 루스를 쳐다봤다. 미련 없어 보이는 차분한 루스의 얼굴을 보자 기복이는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