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 파티원 [전사] (2/11)

2. 파티원 [전사]

해가 갓 뜨기 시작한 새벽부터 당차게 마을을 나섰다. 여태 모은 돈으로 가장 좋은 장비를 풀로 맞춘 상태였다.

그래봤자, 초보자 마을에서 나는 장비다 보니 그렇게 훌륭하다고는 말 못 한다. 철로 된 튼튼한 갑옷이 아닌, 두툼한 가죽으로 된, 거지꼴 중 그나마 거지 우두머리 정도로 업그레이드됐을 뿐이다. 대충 생명의 위기에서 한 번 방어할 정도라고 할 수 있겠다.

얼른 다른 마을로 가서 갑옷이라고 할 만한 것을 갖추고, 칼도 초보자 단검이 아닌, 특정 직업이 없는 나도 쓸 수 있는 마력이 깃든 무기를 구하고 싶었다.

그래서 초보자 마을을 나온 뒤로, 이곳에서 가장 가까이에 있는 마법사 마을 ‘자니스’로 향했다.

지도에는 제법 가깝게 표시가 되어 있어서 해가 지기 전엔 도착할 수 있을 거라 여겼다.

그러나 새벽부터 출발했건만 노을이 지고 있는 지금까지도 여전히 마을이라고 할 만한 게 보이지 않았다.

“……미치겠네.”

나는 우거진 나뭇잎들 틈으로 빨간 빛을 내는 하늘을 보자 초조해졌다. 밤이 되면 몹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잔뜩 출현하기 때문에 이곳은 위험했다.

말했다시피, 초보자 마을에서 일정 거리를 벗어나면 원거리 공격을 하는 몬스터들이 출몰한다. 이 때문에 전직 전에는 초보자 마을을 벗어나는 걸 포기해야 했다.

하지만 지금, 전설의 무기로 발현까지 됐으니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초보자 마을을 나오고 싶었다.

“……대체 말이야.”

언제든 몬스터가 나타나면 튈 준비를 하며 긴장 상태로 걸어갔다. 원거리를 쓸 수 있는 마법 무기를 구할 때까지는 이왕이면 몬스터들을 피해야 했다. 그러나 초보자 마을에서 벗어난 지 한참이 지났음에도 이상하리만큼 몬스터와 단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다.

지금까지 전투 하나 없이 수월하게 숲을 헤쳐서 지도를 따라갔다. 전설의 무기라 행운의 여신이 내 편이 되어주고 있나 싶을 정도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잠시, 아무리 숲을 헤치고 걸어가도 마을이 보이지 않았다. 불안함이 진해지기 시작했다.

“어찌 된 게, 코빼기도 안 보이냐고.”

해는 점점 지고 있는데, 사방을 둘러보아도 온통 풀떼기뿐이다. 무슨 밀림에 온 것 같다. 마을 사람들의 흔적도 안 보이고, 지붕도 안 보이고, 바람 소리나 짐승 소리 외엔 사람 소리랄 것도 들리지 않았다.

“지도 만든 새끼 누구냐…….”

초보자 마을이랑 이렇게 가깝게 붙여서 표시하면, 누구나 하루 만에 갈 만한 거리라 여길 거라고…….

“제발, 나타나지 마라.”

해가 지면 지하에서부터 몬스터들이 치고 올라오기 시작할 것이다. 몬스터에게 발각된다면 죽자 살자 도망을 쳐야 하는데 그렇게 소리를 내면, 조용한 숲에서 너도나도 몬스터들이 모여들 것이다. 한마디로, 어그로를 심하게 끌게 된다.

슬슬 어디든 들어가서 몸을 숨겨야 했다. 그러나 주변을 온통 둘러보아도 무성한 수풀들뿐이었다.

나는 흙바닥을 내려다보며 발로 슥슥 몇 번 문질렀다. 지금이라도 땅굴을 파서 들어가는 편이 좋지 않을까.

……아니다. 매머드급 몬스터가 한 번 밟고 지나가면 그대로 찌부러질 것이다.

땅이 안 되면 나무 위라도 올라갈까…….

그것도 안 되겠다. 기린 같은 몬스터와 눈이라도 마주치면 그대로 잡아먹힐지도 모른다.

이러나저러나 여기는 아니었다. 온전히 몸을 숨길 만한 곳을 어떻게 해서든 찾는 게 가장 안전하다.

벌써 노을이 지고 있었다. 앞에 보이는 돌멩이와 나무들, 바위가 점점 아득해지고 있었다.

어두워지기 전까지 숨을 곳을 못 찾는다면 ……정말 목숨 걸고 싸우거나 마을 쪽으로 미친 듯이 뛰어야 한다.

“전설의 무기고 나발이고…… 이럴 땐 아무 쓸모가 없-.”

서러움을 토해내며 걷던 나는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눈을 한 번 깜빡였다. 그리고 또 한 번 깜빡였다. 이어서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스산한 바람만 한 번 불 뿐, 사람들의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나는 다시 정면을 쳐다봤다. 시야도 침침해지기 시작하니, 잘못 봤나 싶어 눈을 마구 비볐다. 그러나 여전히 수풀 속에 남자가 서 있었다.

‘뭐야……? 귀신인가?’

아무래도 귀신인가 보다.

누가 몬스터 나오는 숲에서 저런 방어 기능도 못 하는 얇은 천 쪼가리를 달랑 입고 오겠어. 그것도 무기도 없고, 동료도 없이 혼자 말이야.

‘자기가 전설의 무기쯤 되는 것도 아니고.’

……라며 귀신이라 단정 지었지만, 남자의 머리 위에 [다스쿠르타우로재드비]라는 존나 긴 이름이 둥둥 떠다니는 걸 보고 어라 싶었다. 마치 키보드를 마구잡이로 쳐서 생성한 닉네임 같았다.

그래, 게임에서 이름쯤이야 뭔들 싶다. 내가 지금 이상하게 여기는 건 바로 [Lv. ?]라는 표식이다.

‘대체 레벨이 물음표라는 건 몇이라는 거냐?’

……아, 차림새를 보아하니 레벨 1도 안 된 초보자라서 측정이 안 된……다고 말하기엔, 위에 [전사]라는 멋들어진 직업이 떠다니고 있었다.

‘뭐지……?’

듣도 보도 못한 레벨과 함께 거의 맨몸이라 해도 될 정도의 얇은 셔츠와 바지를 입고, 몬스터들이 출몰하는 곳에 서 있는 저 남자의 정체는 대체 뭘까.

나는 눈을 가늘게 뜬 채 남자를 쳐다봤다. 핏빛 머리에 얇은 옷을 입고 있는 남자는 튀는 행색이 아니었음에도 눈길을 사로잡았다. 침침한 시야에 멀리서 봐도 남자가 잘생긴 것만은 알겠다.

190은 되어 보이는 큰 키에 아주 튼튼하고 다부진 몸을 가진 남자였다. 하얀 셔츠와 검은 바지를 입고 있었지만 천 쪼가리가 두껍지 않아 튼튼한 몸의 굴곡이 얼핏 보이고 있었다. 이어서 작은 얼굴과 옆태가 완벽하리만큼 고왔다.

그 고운 남자는 아까부터 미동 없이 멀거니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앞에 있는 풀 때문에 남자가 뭘 내려다보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궁금증이 일어 조심스레 한 걸음씩 다가갔다. 다섯 걸음 정도 다가가자 수풀 사이로 남자의 발아래가 보였다.

“허-.”

남자의 발아래에는 산산조각이 나 버린 칼날들이 보였다. 그게 사실은 검이었다고 전혀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아주 와장창 깨져 있었다.

내가 그 처참한 날들이 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던 이유는 남자의 커다란 손안에 있는 짤막한 검 손잡이 덕이었다. 칼날이 남김없이 모두 잘려 나가 있어, 저걸로 토마토도 못 썰겠다 싶을 정도다.

나는 다시 남자의 머리 위를 쳐다봤다. [전사]. 그리고 다시 산산조각이 난 칼날들을 바라봤다. 다시 시선을 들어 올려 남자를 쳐다봤다.

가까이 보이는 남자는 멀리서도 느꼈지만 아주 훌륭한 외관을 갖고 있었다. 표정은 핏기가 없어 실연이라도 당한 것처럼 처연해 보였다.

캄캄해지고 있는 주변 때문일까, 귀신이 앞에 있는 것처럼 몸에 한기가 으스스하게 돌고 있었다. 나는 팔을 문지르며 남자를 바라봤다. 남자는 여전히 움직임도 없이 칼 조각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군.’

나는 귀신같은 남자가 움직임이 없는 이유를 빠르게 짐작했다.

‘무기가 저리 박살 났는데 태연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참으로 안타까운 광경이었다. 자고로 모험가에게, 특히 전사에게 무기란 자신의 동반자와도 같은 것이거늘. 저런, 저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나는 문득, 내가 태평하게 남이나 안타까워할 만한 상황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도 곧 죽게 생겼는데, 누가 누굴 불쌍해하냐…….’

눈앞이 어두워지기 시작하자 내 현실을 깨달았다. 이렇게 시간을 낭비할 때가 아니었다.

나는 미친 듯이 숲을 뒤져 숨을 만한 공간을 찾아야 할 처지에 놓여 있었다.

그렇게 현실을 자각하며 남자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곧장 뒤를 돌아 침침한 눈을 부릅뜨고 주변을 살피며 걸어갔다.

“-시발.”

아니, 걸어가려 했다. 나는 다섯 걸음 채 가지 못하고 다시 남자에게로 걸음을 돌렸다.

이제 곧 몬스터가 나타날 것임을 아는데- 또 저렇게 방어구도 빈약하고 무기마저 잃은 놈을 두고 가는 건 불의를 못 본 척하는 것만 같았다.

지금 저놈의 행동은 내가 보기엔 자살 행위와 다름없었다. 양심이 쿡쿡 쑤셔대 차마 저 남자를 못 본 척 두고 갈 수가 없었다.

“빌어먹을…….”

내 몸 하나 챙기기도 벅찬데 남까지 챙기는 게 말이 되냐……!

머릿수가 늘면 몬스터들에게 발각이 되기 더 쉬울 것이다. 그리고 난 위험을 감수할 만큼 단단히 준비된 상태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빌어먹을 정의감이 발목을 잡아 나는 다시 남자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다스쿠르타…… 썅. 이봐! 가만히 서서 뭐-.”

나는 남자의 머리 위에 뜬 존나 긴 이름을 부르다 말고 그냥 놈의 앞으로 가서 섰다.

남자를 코앞에서 보니 느낌이 달랐다. 떡 벌어진 어깨와 머리 하나 차이 나는 커다란 키, 무감한 얼굴이 눈앞에 보였다.

멍하니 무기만 바라보던 남자가 내 시선을 느끼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흡.’

나는 남자의 얼굴을 마주하자 숨이 들이켜졌다.

날카로운 눈 속에 담긴 붉은 눈동자는 서늘함을 띠고 있었다. 등허리부터 쭈뼛 서는 느낌이었다.

불러놓고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자, 놈은 나를 빤히 쳐다봤다. 나는 시선을 피하지도 못한 채 남자를 굳은 눈으로 마주했다.

곱상한 남자에게서 어쩐지 피 냄새가 났다. 살육을 일삼는 야생 동물을 마주친 듯한 압도적인 분위기에 침이 꿀꺽 삼켜졌다.

“…….”

잘못하다간 몬스터에게 죽는 게 아니라 이 남자에게 죽는 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다.

“위, 위험하니까 서 있지 말고 숨을 곳 찾으라고…….”

칼 손잡이를 고쳐 잡는 남자의 움직임을 보며 나는 불쑥 말을 뱉었다. 그러니까 남자가 더 움직이기 전, 뭔가 말을 해야 할 것 같다는 느낌이 강렬하게 들었다.

“-왜?”

남자가 왜 숨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이 느릿하게 물었다. 남자의 늪과 같이 깊은 목소리에 굳어 있다 나는 한 박자 늦게 벙쪘다.

“…….”

아무리 초보자라도 밤이 되면 몬스터가 나온다는 것 정도는 생존을 위한 기본 정보였다.

그걸 모르는 자는 이미 전직도 하기 전에 진작 뒈졌을 것이다.

하지만 저놈은 살아 있고, 진심으로 이해할 수 없는 눈초리로 나를 보고 있었다.

……대체 님은 어떻게 안 뒤지고 살아가고 있냐며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지금, 무시무시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 놈에게 입을 잘못 놀렸다간 조져질지도 모른다는 직감이 나를 강하게 말렸다.

“……그, 그야 이제 몬스터가 나올 테니-.”

나는 어색한 어조로 놈에게 생존 기본 정보를 순순히 알려주었다. 아니, 알려주려고 했다.

그러나 말을 하는 순간 놈의 뒤로 지나가는 고릴라 같은 거대한 몬스터와 눈이 마주쳤다.

새카만 눈이 정확히 나를 향했고, 나는 섬뜩함을 느꼈다.

‘왜, 버, 벌써…….’

라고 생각하는 것도 잠시, 어느새 캄캄해진 숲에서 들리는 몬스터들의 소리에 경악했다.

남자에게 정신 팔린 사이에 숲속 해는 빠르게 져버린 것이다. 몬스터들이 지하에서 나오기 시작한 모양이다.

다시 나는 고릴라를 쳐다봤다. 그놈 머리 위에는 [Lv. 43]이라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내 레벨보다는 훨씬 낮았다. 하지만, 저 레벨이라도 마력을 쓰면 마땅한 장비가 없는 나는 꽤나 큰 대미지를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게 원거리라면 나는 지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을 쳐야 했다.

내가 굳어 있자 남자가 내 시선 방향으로 몸을 돌리려고 했다. 그 순간 고릴라의 입이 벌어지더니 입에서 묵직한 볼링공 같은 것을 우다다 뿜어댔다.

방향은 정확히 내가 있는 쪽으로 발사가 되었다.

바닥을 굴러 주변에 있는 바위 뒤로 도망친다면 충분히 못 도망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앞에 있는 남자를 버리고 혼자 구른다면 숨을 곳을 포기하고 돌아온 의미가 없다.

“……망할!”

나는 신속하게 남자의 앞을 막아서며 내 전 재산을 올인해 샀던, 방패를 높게 들었다.

초보자 마을용인 만큼, 재료가 시원치 않아 내구도가 씹쓰레기다. 일회용이란 말이다.

그럼에도 산 이유는, 한 번의 목숨이라도 건지는 게 어딘가 싶어서 거금을 주고 구매를 했다. 그리고 지금, 나의 거금이 공중으로 산산조각이 나 흩어지고 있었다.

“-흐읍!”

나는 한 번의 공격에 와장창 깨지는 방패를 보고 조금 전, 남자의 기분을 어렴풋이 느낀 것 같다.

지난날의 노가다 급여가 공기 중으로 흩어지는 모습을 보니 가슴이 저릿했다. 그러나 슬픔을 느끼기도 전에, 고릴라가 다음 공격을 준비하는 게 보였다. 다시 볼링공들을 쏟아내기 전에 도망을 가야 했다.

“도, 도망쳐!”

다급하게 소리치며 뒤를 돌자 가만히 서서 나의 급박함을 구경하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몬스터가 앞에 있건만 한 치의 동요도 없이 태연한 눈동자였다.

‘……무기 하나 박살 났다고 진짜 자살하려는 거냐고!’

삐딱하게 서 있는 모양새가 척 보기에도 도망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뭐 해! 안 가고! 뒤지려고 작정했…… 썅!”

몬스터의 배가 빵빵해지는 것을 보고 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 상태로 무방비하게 서 있는 남자에게로 달려가 단단한 팔을 덥석 잡았다. 그러자 남자가 흘끗 시선을 내리며 팔을 잡은 손을 쳐다봤다.

나는 곧 쏟아질 공격을 대비해 남자를 데리고 바위 뒤편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남자는 내가 잡아당기자 다행히 끌려왔다. 진심으로 죽고 싶지는 않나 보다.

“하아…….”

나는 가까스로 남자를 데리고 바위 뒤편으로 몸을 숨겼고, 타이밍 좋게 바위 쪽으로 우다다다- 볼링공 같은 돌덩이가 쏟아졌다.

맹렬한 공격에 몸을 숨겨 주었던 바위가 금이 갔고 이내 와작- 깨져 버렸다. 공격이 멈춘 고릴라가 박살 난 바위로 드러난 우리의 모습을 향해 쿵쿵, 걸어오기 시작했다.

나는 다시 공격을 피할 만한 곳을 찾으려 급박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 멀리 곰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동굴 하나가 수풀 사이로 어렴풋이 보였다. 한 번 더 공격이 날라왔을 때만 어떻게 해서 피하면 저기 동굴에 몸을 숨길 수 있을 것 같다. 어차피 이곳 세상의 곰은 칼 한 방이면 죽는, 잡몹도 아닌 수준이니 곰이랑 붙는 게 훨씬 쉬웠다.

“이, 일단 저쪽 동굴로 피하자.”

“…….”

뒤에 있는 남자에게 말을 뱉자, 남자는 흘끗 고릴라를 쳐다봤다. 다시 남자의 붉은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무감한 표정이었지만 무슨 생각을 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 기색을 읽은 나는 이 자식이 고릴라에게 뛰어가서 자살하기라도 하면 어쩌나 싶어 마음이 덜컥했다.

그런 두려움이 치고 올라오자 남자가 생각을 마치기도 전에 팔을 붙들고 무작정 동굴로 잡아끌었다. 이번에도 놈은 순순히 끌려왔다.

남자를 잡고 뛰다가 고릴라의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 뒤를 돌아보았다. 거리가 점차 벌어지고 있었다.

원거리 공격을 해 안심할 수는 없지만, 고릴라의 걸음 속도가 느려 발각됐음에도 가망이 있었다. 요리조리 줄행랑을 친다면 백 퍼센트 따돌릴 수 있을 정도다.

그러나 지금은 모르겠다. 밤이 되자 수풀 주변으로 3m는 되어 보이는 액체 몬스터들이 ‘우어어-’ 하는 이상한 소리를 내며 지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런 놈들 눈에 띄기라도 한다면, 저 시끄러운 놈이 어그로를 무진장 끌어 끝도 없이 몬스터들에게서 도망쳐야 할 것이다.

그리고 체력이 다 떨어지면 수많은 몬스터에게 둘러싸여 비참한 죽음 엔딩을 맞이할 확률이 높았다.

“망할…….”

또다시 고릴라가 기를 모으는 모습을 보자 절로 욕이 나왔다. 하지만 이번 공격만 잘 피하면 동굴 안으로 숨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럼 느려터진 저 고릴라의 어그로가 풀리는 것도 시간문제다.

그렇게 생각하며 뛰면서 주변을 빠르게 훑었다. 그러나 무거운 볼링공을 버틸 만한 바위가 더는 보이지 않았다.

속이 바짝 타들어 가 등에서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이렇게 허무하게 뒤질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 그때, 뒤에 있던 녀석이 내 팔을 떼어냈다. 꽉 잡고 있었는데 아주 쉽게 말이다.

“악!”

그리고 나는 강한 아귀의 힘에 손이 아작나는 고통을 맛보았다.

“고작, 도망이나 치는 꼴이라니.”

갑자기 뭐냐는 식으로 휙 돌아볼 즈음, 남자의 입에서는 한심해 죽겠다는 투의 말이 튀어나왔다.

“못 어울려 주겠네.”

남자의 목소리에 멈칫하며 시선을 올렸다. 남자 새끼가 고추 떼라는 듯한 업신여기는 눈빛이 나를 보고 있었다. 어벙하게 보던 나는 문득 울컥, 감정이 올라왔다.

안 그래도, 저런 쪼렙 몬스터한테 줄행랑치는 내 처지가 한심하다고 느끼던 차다. 눈을 희번덕 뜨며 남자에게 소리쳤다.

“뭐? 기껏 구해 줬더니-!”

“날 구해 줬다고?”

“그래! 네놈도 순순히 따라왔으면서 그 눈빛은 뭐냐고!”

그냥 저놈에게 신경 끌 걸 그랬다. 죽으려는 저놈한테는 괜한 오지랖을 부려서는…… 빌어먹을 양심. 괜히 나도 죽게 생겼다.

“연인의 죽음을 삭이던 중에 네가 멋대로 끌고 온 거지.”

“무슨-.”

놈의 어이없다는 투에 무슨 연인의 죽음인가 싶었는데, 그 순간 녀석의 머리 위에 있는 [전사]라는 표식이 보였다. 전사들은 칼을 동반자처럼 소중히 대한다는 정보도 동시에 머릿속에 상기되었다.

그래도 그렇지. 게임 세계에서 무기가 얼마나 중요한지 아는 바로 함부로 말을 할 순 없지만…… 그렇다고 자살은 아니지 않냐-.

라며 저놈에게 한마디 하려고 고개를 치켜드는 순간이다. 남자의 뒤편으로 고릴라의 배가 빵빵하게 불러오는 것이 보였다. 동시에 남자가 몸을 틀었다.

고릴라가 있는 방향으로 발을 돌리는 남자를 보자 눈이 크게 벌어졌다.

“야! 아, 암만 그래도 자살은-!”

내 목소리에 녀석이 거슬린다는 듯이 눈살을 찌푸리며 나를 돌아봤다. 그 순간 고릴라의 입이 쩌억 크게 벌어졌다. 그 광경에 말보다 행동이 먼저 나갔다.

앞에 있는 놈의 팔을 붙들고 때마침 가까이 지나가고 있는 액체 괴물을 향해 확 잡아당겼다. 손을 뻗어 가까스로 괴물을 건들자 몹이 우리를 향해 휘릭 돌아섰다.

괴물이 내 팔을 끈적한 액으로 집어삼켰다. 점점 빨려 들어갈수록 강한 압박에 팔이 짓눌렸다. 비명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으흑-!”

그때, 고릴라의 입에서 대포같이 볼링공들이 우다다 쏟아졌고 액체 몹의 커다란 등판에 볼링공이 울룩불룩하게 박혔다. 몹이 공격을 받자 압박의 강도가 더해졌다.

소리를 지르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고 죽자 살자 참았다. 뼈가 우드득 하며 금이 가는 순간 눈알이 돌아갈 뻔했다. 그러나 그전에 괴물이 괴이한 소리를 지르며 녹아내렸다.

“흐으…….”

압박에서 겨우 벗어났지만 팔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고, 힘을 주고 싶지도 않았다. 가만히 있어도 눈물 날 정도로 아파죽을 것 같았다.

그러나 아픔을 삼킬 새도 없이 개 같은 액체 괴물이 비명을 지르는 바람에 주변에 있는 수풀들이 심하게 흔들리는 게 보였다. 주변 몬스터들이 이쪽을 향해 오고 있단, 빌어먹을 징조였다.

저 앞에 볼링공을 쏟아낸 고릴라가 또 쿵쿵거리면서 끈질기게 걸어오는 모습도 보였다. 그러자 몰려오는 몬스터를 피해 숨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 찼다.

나는 멀쩡한 손으로 남자의 팔을 붙들고 동굴을 향해 앞만 보고 뛰었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였다.

수풀을 발로 팍팍 꺾으면서 온 힘을 다해 이 악물고 뛰었다. 뒤에 있는 남자는 업신여기던 조금 전 모습과 달리 이끄는 대로 따라오고 있었다.

“하아, 하아…….”

동굴 안으로 들어온 나는 어두운 곳까지 걸어갔다. 타박타박, 습하고 서늘한 동굴 안에 남자의 팔자 좋은 샌들 소리와 내 가죽 신발 소리만 턱턱 울려 퍼졌다. 짐승이 나타날까 싶어 경계했지만 짐승의 모습,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제야 나는 남자의 팔을 놓았다. 뒤따라오던 남자를 돌아보자 어두운 동굴에서는 남자의 흰색 셔츠만 희미하게 보일 뿐이다.

“-흐악.”

안도하며 긴장을 풀자 그제야 몹에게 꺾였던 팔에서 타는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얼굴을 오만상 일그러뜨리며 등에 멨던 봇짐을 바닥에 철퍼덕 내려놓았다. 마을에서 샀던 회복 물약을 찾기 위해 가방을 황급히 뒤적거렸다.

팔을 조금만 움직여도 아파져 왔다.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가방 안에서 HP 회복 물약을 꺼내 들었다.

팔이 맛 가버린 바람에 치아로 뚜껑을 따고서, 다친 팔에다가 빨간 물약을 온통 쏟아부었다. 그러자 물약이 닿은 부위가 보글보글 기포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치료가 되고 있다는 거다.

아예 신체가 잘려 나간 것처럼 거대한 치유가 필요한 게 아닌 이상, 뼈가 부러진 정도는 하루 안으로 회복이 될 것 같다.

이어서 봇짐 안에서 진통제 알약을 황급히 입안으로 털어 와그작 씹어 넘겼다. 꿀꺽, 물 없이 뻑뻑하게 넘기자 쓴맛이 올라왔다. 더럽게 맛없는 약이지만 타는 듯한 팔의 감각은 서서히 둔감해질 것이다.

“……하아.”

급한 조치를 취하고 나니, 이제야 내 처지가 보여 한숨이 터져 나왔다.

방어구는 부서지고, 물약은 방금 다 때려 부었다.

금방 다음 마을에 가서 사면 되리라 생각해, 무게를 줄이고자 조금만 챙겨온 물약이었다.

그걸 방금 올인 했으니 이제는 몬스터에게 걸리게 되면 가망이 없다. 몹들의 움직임이 둔해진 아침을 틈타 눈치껏 이곳을 빠져나가는 방법이 최선이다. 이 방법 역시 안전은 보장 못 한다.

이러나저러나 일단 오늘은 쥐 죽은 듯이 동굴에 있어야 했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차가운 바닥에 철퍼덕 앉았다. 몹으로부터 도망치다 보니 진이 쭉 빠졌다.

“……좀 앉지? 서 있으니까 정신 사나운데.”

나는 아까부터 시선이 느껴지는 곳을 쳐다보며 말했다.

저기 멀거니 서 있는 남자와도 아침 되면, 뒈지든지 말든지 서로 갈 길 가면 된다.

할 만큼 했다. 내가 없는 곳에서 낯선 남자가 어떻게 살든 내가 관여할 바가 아니다. 그거야말로 엄청난 오지랖이다.

“…….”

남자는 내 말에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러나 여전히 정수리가 따끔따끔한 게 나를 보고 있는 듯했다.

달빛이 동굴 틈새로 찔끔 들어와 남자의 커다란 형태만 보일 뿐 어떤 표정인지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어두컴컴한 곳을 목 아프게 올려다보는 것을 관뒀다. 알아서 하라는 듯이 가방에 팔을 뻗었다.

다친 팔을 고정할, 깁스 할 만한 걸 찾아야겠다고 생각하던 차다.

“-너 재밌네.”

머리 위에서 낮은 소리가 불쑥 들려왔다. 그 목소리가 동굴 안을 잔잔히 울렸고, 나는 손을 멈춘 채 다시 위를 올려다봤다. 녀석의 표정이 어둠으로 덮여 보이지 않았다. 그런 놈에게 나는 어이없다는 투로 말했다.

“……방금 다 뒈질 뻔했는데, 재밌냐?”

“다는 아니고, 너만이지.”

둘 다 생사의 고비를 간신히 넘겼구먼, 저 녀석은 시종일관 자신과 무관하다는 투로 말을 했다.

죽으려 했던 놈에게 구해 줬단 소리를 하는 건 소용없는 짓이라는 걸 모르진 않았다. 그래서 한마디 하려다 참았다. 고된 몸으로 더는 말다툼을 하고 싶지 않아, 놈에게 대강 말했다.

“……그래. 몬스터도 입맛 떨어지게 만드는 네놈은 안 먹을지도 모르겠다.”

“그러게. 너는 꽤 먹음직스럽게 생겼어.”

“……시발.”

소름 끼치는 소리에 절로 욕설이 튀어나왔다. 탐탁지 않은 기분에 놈을 디스 했다가, 되레 기분이 불쾌해졌다.

나는 놈에게 시선을 홱 거두며 봇짐을 마저 뒤적거렸다. 녀석이랑 말을 섞을수록 나만 찝찝해지는 것 같다. 정신 건강을 위해 놈에게 신경을 끊는 편이 좋을 듯하다.

‘붕대, 붕대가 어디 있더라…….’

가방 구석에 돌돌 말아 넣은 흰색 붕대가 손가락에 걸렸다. 푹신한 붕대를 덥석 잡아 꺼냈다. 말아진 붕대를 풀며 팔과 목에 둘둘 감았다. 한 팔로 끙끙대며 나름 깁스 같은 모양새를 만들려 애썼다.

“그거 알아?”

“으…… 도와줄 거 아니면, 말 시키지 마.”

“그러지.”

참나, 냅다 입 다무는 것 좀 봐라.

하긴…… 나도 저놈 도움받는 것보다 혼자 하는 게 속 편하다. 저놈이랑 말만 섞으면 배알 꼴리는 느낌이 자꾸만 들었으니까. 남은 아등바등하는데 혼자 여유로워 보이는 모습 때문일 수도 있겠다.

저놈은 나와 달리 삶의 미련이 없으니 여유로운 게 당연하지만서도, 어쩐지 저 태평한 놈을 보니 약이 올랐다.

나는 입을 다문 채 다치지 않은 팔과 이를 사용해 깁스라고 할 만한 것을 완성했다. 이로 붕대를 꽉 문 채 허리춤에 차고 있는 단도로 붕대를 끊어 땀을 뻘뻘 흘리며 매듭까지 만들었다.

일단 치료될 때까지는 이러고 있는 편이 통증도 덜하고, 회복 속도도 빨라질 것이다.

“…….”

그렇게 잠시 한시름 놓고 쉬던 중, 어딘가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고요한 동굴 밖에서 희미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 소리가 이어서 들리자 불길한 예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등허리가 절로 뻣뻣해졌다.

“어, 어이…… 밖에 소리 들리냐?”

“글쎄.”

“잘 들어봐……. 아, 아까 본 액체 몬스터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는 것 같지 않냐?”

“그렇겠지.”

“어, 어……?”

“액체 몬스터는 재생 능력이 있으니까.”

“그, 그건 나도 알지. 아까 그놈도 안 죽은 거 아는데……. 녹은 상태에서 도망쳤잖아. 내가 어디로 갔는지 알 리가 없다고. 근데 이쪽으로 오는 것 같단 말이지…….”

“그야, 네 등에 액체가 붙어 있으니까.”

“뭐?!”

나는 퍼뜩 고개를 돌려보았다. 그러자 망토에 파란색 덩어리가 슬쩍 보이는 듯했다. 깜짝 놀란 나는 몸을 다급히 일으켰고, 허둥지둥 망토를 벗어 바닥에 던졌다. 그러자 망토 뒤에는 액체 몬스터의 피부라고 할 수 있는 파란 덩어리가 망토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게 보였다.

“어, 언제- 왜, 왜! 이제 말해 줘! 진작 말했으면 버렸을 거라고!”

“말 시키지 말라며?”

“장난하냐?! 이런 건 알려줘야 할 것 아니냐! 이러면-.”

‘도망친 의미가 없잖아!’라며 울컥 놈을 향해 화를 내뱉으려던 차였다.

찐득한 물이 흐르는 소리가 더욱 크게 들리기 시작했다. 액체 몬스터가 다가오는 소리였다.

뒷덜미가 서늘해졌다. 냉큼 말을 멈추고서 눈앞에 있는 파란 덩어리가 붙은 망토를 내려다봤다.

‘……망했다. 망했다.’

머리를 감싸 안으며 주저앉았다. 저 몬스터는 신체 일부인 이 파란 덩어리를 찾으러 이곳으로 들어올 것이다.

인제 와서 밖에 망토를 던지고 오는 것도 늦었다. 밖에 액체 괴물이 괴상한 소리를 내며 오는 바람에 몬스터들이 이쪽 주변으로 모여 있을 게 분명했다.

그러니까, 진작에 망토를 밖에다가 버리고 왔으면 됐을 텐데 저 자식이…… 하, 됐다. 이미 저질러진 일인데 탓해 봤자 소용없다.

‘……어쩌지, 어쩌면 좋지.’

머리를 쥐어뜯으며 어떻게 방법이 없을까, 뇌를 마구잡이로 굴렸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한 가지 방법뿐이다.

이 상황에서는 정면 돌파밖에 없었다. 동굴 밖에는 몬스터들이 득실거리고, 들고 온 아이템은 다 떨어졌다. 가망이 없었지만 쳐들어오는 이상 정면 돌파뿐이었다.

까마득한 현실에 허망하게 고개를 아래로 떨궜다.

이런 죽음 엔딩이 기다리고 있었다면, 레벨 100이 되기 전에 그냥 마을을 나설 걸 그랬다. 뭔 노가다를 그렇게 했냔 말인가. 아아, 제대로 세상을 즐겨보지도 못하고 이렇게 가는구나.

그렇게 허탈함을 느끼며 고개를 서서히 들던 나는 문득 언 듯이 위를 쳐다봤다. 눈을 깜빡였다. 머리 위에 둥둥 떠 있는 [무기]라는 표식이 눈에 선명히 박혀 왔다.

“……!”

불현듯 머리가 번쩍 트이는 것 같았다. 몇 가지 사실이 머리를 파바박 관통했기 때문이다.

내가 전설의 무기라는 것을 잠시 잊고 있었다. 더해서 나와 같이 있는 저 남자는 전사라는 것도 말이다.

그리고…… 달갑지 않지만…… 내가 어젯밤에 읽었던 정신 나간 책의 합체 내용, 그러니까 내가 상대의 무기로 변하는, 개 같은 방법도 머리를 관통했다.

‘……아니야. 아니야. 그런 미친 소리가 사실일 리가 없잖아.’

절대 아닐 거라며, 어떤 변태 망상가가 적은 책일 것이라며, 집구석에 던져둔 채로 쳐다도 보지 않고 나왔다.

나는 그, 표지부터 음흉한 빨간 책의 내용을 절대, 절대로 믿고 싶지 않았다.

분명 다른 멋들어진 방법이 있을 거라 믿는다.

“이, 이봐.”

“음?”

“모, 몬스터가 오고 있잖아. ……지금 아주 위험한 상황이거든.”

“그래?”

나는 심드렁한 놈의 목소리에 목구멍에 울분이 치솟는 기분이 들었다.

몬스터가 오는데 당연히 위험하잖아! 내가 갑자기 왜 정의감이 치솟아서 네놈을 살렸는지, 지금 울고 싶어 죽겠다, 이놈아! 와락 하고 소리치고 싶은 것을 목 끝에서 겨우겨우 억눌렀다.

“……이, 있잖아.”

지금은 삶에 미련을 잃은, 태평한 놈을 달래는 것에 초점을 둬야 한다. 그리고 난 무기를 잃고 죽으려는 놈에게 충분히 활력을 주고도 남을 만한 존재였다.

“사실 내가 아주 어, 엄청난 무기를 갖고 있거든…….”

나는 지금…… 내 직업을 활용해야만 했다.

“……엄청난 무기?”

“네가 여태 가진 어떤 것보다도 훌륭하다고 자, 장담할게.”

“네가 그런 무기를 갖고 있다고?”

“지, 진짜야. 아주아주 훌륭한 무기라고.”

“영 믿음이 안 가는데.”

“……일단 사용해 보든가. 손해 볼 건 없잖아?”

놈은 미심쩍다는 듯이 ‘으음-’ 소리를 냈다. 목이 바짝 타는 기분이 들었다.

나 혼자 저 밖에 있는 몬스터들을 ‘찌르기’ 스킬로 감당할 수는 없었다. 내 체력이 바닥나거나 원거리 공격에 허망한 죽음을 맞이할 확률이 매우 높았다.

그러니 전사 스킬을 쓸 수 있는 저놈을 설득해야만 한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놈이 있는 곳을 쳐다봤다.

“지, 진짜 엄청나다고…… 그저 그런 무기를 갖고 있는 게 아니거든…….”

“……그래?”

“내가 모습은 이래도…… 그, 그래. 표식 보이냐? 내가 무, 무기상이거든. 진짜 믿어 봐.”

나는 어두운 와중에도 검지 손가락으로 머리 위를 가리키며 놈을 계속 설득했다.

내 꼴이 비록 어마어마한 무기를 들고 다닐 것 같은 사람으로는 안 보일지라도 표식은 거짓말 안 한다며, 신용도를 올려줄 만한 표식을 들먹였다.

“무기상은 그런 표식이 아닐 텐데.”

“무기상들의 대장 격이라 그래.”

“……좋아. 그래서 그걸 사용하게 해 주는 조건으로, 원하는 건?”

“어-.”

눈치 빠른 놈이 내게 뭘 원하냐며 질문을 했다.

딱히 숨길 것도 없던지라 나는 거래 조건을 말하려 했다. 그러나 나야말로 놈의 물음표 레벨과 천 쪼가리 옷에 의문이 들었다.

“그, 너 저몹들 처리할 수 있냐……?”

“네 말대로, 무기가 좋다면.”

선선히 나온 놈의 대답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전설의 무기를 쥐여주면 뭔들 못 하겠냐.’

장비빨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그럼, 가까운 마을까지만, 파티를 맺어서 날 도와주는 조건. 괜찮냐?”

“그러지. 단, 어쭙잖은 것을 내밀었을 때, 거짓말을 한 대가는 각오해 둬.”

“……진짜 끝장난다니까.”

돼, 됐다……. 생각보다 놈은 허술한 내 거짓말을 믿으며 쉽게 넘어왔다.

“그래서. 무기는?”

……그럼 이제, 내가 변해야 할 차례다.

“기, 기다려 봐…….”

나는 놈에게서 등을 돌린 채 무릎을 꿇었다. 기도하듯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속으로 간절히 되뇌었다.

‘전설의 무기. 무기로 변해라! 변해라. 변해라……. 흡, 무기! 무기…….’

전설의 무기로 변하게 해 주십쇼. 각종 신들을 찾으며 속으로 끊임없이 변하라고 되뇌었지만…… 몸에는 아무런 반응이 일어나지 않았다.

내 몸이 무기로 변하는 게 아니라 어디서 나타나는가 싶어 주변을 더듬어봐도 여전히 차가운 동굴 바닥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역시 두 손으로 기도를 안 해서 그런가.

깁스한 팔에 깍지를 끼려 애를 썼다. 다친 팔을 잡자 아릿한 고통이 밀려와 갓 잡은 생선처럼 팔딱 튕겨 올랐다.

“흐허-.”

“멀었어?”

“자, 잠시만. 곧 무기 꺼낼 테니까- 흡!”

그 순간 동굴이 쿵 하고 울렸다. 나는 몸을 움찔하며 다급하게 뒤를 돌아보았다. 아까보다 음침한 비명이 가까이서 들리고 있었다.

한 번 더 동굴이 쿵 하고 울렸다. 계속해서 쿵, 쿵 울리는 소리에, 액체 괴물이 동굴 입구를 찾기 위해 여기저기를 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위에서부터 돌가루가 바사삭 떨어지며 동굴 전체가 흔들리는 광경이 보였다.

위급한 상황에 머리에서부터 스멀스멀 무언가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 무언가는 아주 선명해졌고 머릿속에 가득 들어차고 있었다.

어느새 머릿속은 온통 살구색 향연들로 채워졌다. 그 야시꾸리한 그림들과 함께 직감은 말을 하고 있었다.

살고 싶으면 그만 부정하라고.

‘……진짜냐고…….’

사실 정신 나간 합체 내용만 제외한다면 그 빨간 책에는 유용한 정보들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전직관 할아버지가 손을 휘저은 이유가 차마 말로 못 할 합체의 과정이라 내 손에 책을 쥐여줬다는 것 역시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 합체 과정이 사실일 확률이 높았다.

더는 외면할 수 없는 사실에 눈이 질끈 감겼다.

……남자로서의 체면을 지킨 채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 혹은 남자로서 체면은 박살 나더라도 살아서 모험할 것인가…….

결정의 순간이 온 것이다.

‘……시발…… 시발…….’

선택지가 하나같이 뭣 같아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진동하는 동굴에 속은 계속해서 바짝 타들어 갔다.

나는 입술을 꽉 깨물다 이내 체념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렇다. ……빌어먹게도 난 너무나도 살고 싶었다.

“……이봐.”

“아직이야?”

“그……무기를 꺼내기 위해서 저, 절차가 있거든…….”

“절차?”

“미, 믿기지 않겠지만, 사실이야.”

“……그래서?”

“그게-.”

우물쭈물하며 망설이고 있자, 앞에 있는 남자가 기다려 주는 듯하더니 이내 깊은 한숨을 쉬었다. 이어서 짜증이 섞인 투가 위에서 들려왔다.

“하아…… 그럼 그렇지.”

“…….”

“무기에 정신 나가서는 이런 하찮은 말에 휘둘릴 줄이야…….”

“아, 아니. 거짓말은 진짜 아니-.”

나는 불현듯 몸 안에 한기가 느껴져 말을 멈췄다.

“설친 거에 비해, 너무 오래 살려 둔 것 같네.”

느긋하던 남자의 말투가 얼음장처럼 차갑게 들려왔다.

어두운 공간에서 남자의 손 쪽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 순간 지진이 난 것처럼 동굴이 흔들렸다. 아까와 다른 흔들림의 강도였다.

어쩐지 동굴 전체가 방금 가루처럼 부서질 뻔한 것 같았다.

나는 흠칫하며 천장을 쳐다보다 다시 남자가 있는 방향을 쳐다봤다. 어두운 그곳에서부터 서늘한 한기가 솟아오르는 것 같았다.

동굴 안을 채우는 칼날 같은 공기에 몸이 움츠러들었다. 벌써 몬스터들이 입구를 찾았나 싶어 고개를 돌렸지만, 입구를 막는 몬스터는 보이지 않았다. 달빛만이 입구 쪽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남자 쪽에서 발을 떼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동굴은 더욱 심하게 흔들렸다.

나는 여태 느꼈던 것 중 가장 오싹한 살기를 느꼈다. 나는 숨을 들이켜며 다시 앞을 바라봤다.

이런 살기와 동굴의 흔들림으로 보아하니 곧 몬스터들이 들이닥칠 것 같았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은 나는 결국 눈 딱 감고 ‘에라 모르겠다!’ 식으로 외쳐버렸다.

“합체를 해야 돼!”

“뭐?”

“너랑 나랑 합체해야 하는데……. 그, 합체라는 게- 네 액을 받으면 내가 어, 엄청난 무기로 변하는 건데…….”

“…….”

“그, 그러니까……!”

친절하게 그림까지 그려놓았던 빨간 책의 내용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1번 자세와 2번 자세 3번 자세 등등 체위 모습들이 머릿속에 촤르르 떠올랐다. 정신이 혼미해지는 느낌이다.

책 속 난잡한 그림 아래에는 꽤나 정상적인 말들이 적혀져 있었다.

상대와 결합을 해, 액을 받게 되면 상대 특성에 맞는 무기로 변하게 된다는 정보였다.

[액을 받으면, 안쪽에 상대의 마력이 흡수되어 변신이 된다. 같은 기운을 공유한 두 사람은 굳건한 연대감이 형성된다(샘플이 많이 쌓일수록 정확하고 강력한 특성이 발현된다).]

라며 짧고 간결하게 적혀져 있었다. 더해서 강추 한다는 듯이 괄호 문구가 진한 색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샘플은 뭔 샘플이냐고…… 망할…….’

난잡한 빨간 책의 내용이 머릿속에 선명히 박혔다. 동시에 그 책 속 내용을 실행해야 하는 현실에 혀를 깨물고 싶은 심정이다.

다시 아까처럼 동굴이 흔들렸고 액체 소리가 더욱 가까이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죽음이냐, 체면이냐……. 아주 개 같은 양자택일이다. 그리고 무척이나 살고 싶은 나는 체면을 버린다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내가 너랑 섹스해야 한다고!”

“하, 별 같잖은-.”

“나, 나도 싫다고! 근데 진짠데 어떡하라고! 빌어먹을……!”

남자의 기가 찬 목소리를 듣자, 억울하고 분한 마음이 올라왔다.

나도 원하지 않는다고! 그런데 어떡하냐고……! 진짜 고함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 내 처절함이 담긴 목소리를 느꼈는지 남자가 입을 다물었다. 위에서 조용한 시선이 쏟아졌고 나는 돌덩이가 떨어지는 동굴 천장을 보며 어금니를 악물었다.

……시발. 눈 딱 감고 한번 하면 살 수 있다는데 대수냐…… 대수냐고. 빌어먹을…….

“이, 일단 사, 살아야 할 거 아니- 크억!”

남자가 있는 방향을 향해 복잡한 마음으로 말을 하던 나는 어둠 속에서 뻗어오는 손을 피하지 못했다. 커다란 손이 갑자기 목을 틀어잡음과 동시에 바닥으로 곧장 머리가 짓눌러졌다.

나도 레벨 100을 찍은 사람으로서 힘으로는 어디 가서 뒤지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바윗덩어리가 짓누르는 것 같아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무, 무슨 짓-!”

“네 안에 액을 싸질러 주면 대단한 무기가 된다?”

“윽-.”

등으로 느껴지는 녀석의 무게와 함께 몸이 차가운 동굴 바닥에 짓눌렸다. 동시에 다친 팔이 깔려 몸이 스프링처럼 펄떡거렸다.

가까스로 몸을 살짝 비틀어 팔을 빼냈지만, 어릿하게 아픈 건 마찬가지였다.

“하하. 그래, 넣어줄 테니 어디 한번 얼마나 대단한 무기가 되는지 볼까.”

“으흣! 노, 놔……!”

위에서 비웃는 듯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커다란 놈을 밀어내려 몸을 필사적으로 움직였다. 하지만 뒤에 있는 녀석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녀석의 손아귀의 힘에 뒤통수랑 팔이 짓눌려 얼굴이 절로 일그러졌다.

“-흐힉!”

녀석에게서 벗어나려 몸부림치던 나는 바지를 내리는 손길에 기겁하며 소리쳤다.

“뭐, 뭐 하는 거야!”

“바지 입은 채로 섹스할 순 없잖아.”

놈에게서 노골적인 말이 들리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아까는 녀석에게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저 단어를 썼을 뿐이지, 이건 엄연히 변신 과정일 뿐이다!

“……마, 말이 그렇다는 거고 이건, 변신이라고! 그리고 뒤, 뒤통수 좀 놔!”

놈은 한 손으로 나를 손쉽게 제압하고 있었다.

“네가 자꾸 발버둥 치니까 그렇지.”

등을 짓누르고 있던 놈이 상체를 들었다. 벗겨진 둔부에 차가운 공기가 내려앉았다. 놈이 뒤에서 다른 손으로 뭔갈 꿈지럭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 안 칠 테니까…… 흐흡-.”

나는 딱딱한 동굴 바닥에 뺨이 짓눌린 채로 불안하게 말을 뱉었다. 아니, 뱉으려 했다. 그 전에, 엉덩이에서 느껴지는 느낌에 숨을 들이켜야 했다.

온몸에 닭살이 오소소 돋았다. 모든 동작을 멈춘 채 뻣뻣하게 굳어 있자, 골 사이를 파고 안쪽으로 무언가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나는 머릿속에 빨간불이 울리는 듯했다. 동시에 빨간 책에 그려져 있던 그림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이다음 벌어질 행위가 강렬하게 와닿자 손끝부터 온몸이 차게 식어갔다.

“-자, 잠깐! 잠깐!”

“발버둥 안 친다며.”

“아니, 썅! 대체, 뭐, 뭘 넣으려는 거야!”

“뭐긴. 처음 해 봐?”

“……크, 크기가 말도 안 되잖아!”

나는 엉덩이 사이로 느껴지는 크기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을 것 같았다.

“다리잖아! 빌어먹을 자식아!”

“날 닮아 장대하긴 하지.”

“쌰앙…… 그딴 걸 집어넣다간 죽는다고! 놔! 놔!”

그곳에 닿는 거대한 감촉에 욕설을 쏟아부으며 미친 듯이 반항했다. 식은땀이 주르륵 흐를 정도로 위협적이었다.

진짜 말도 안 된다. 어떻게 저걸 사람 안에 넣을 생각을 하냐고!

서둘러 해치우고 잊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렇게 놈의 아래에서 온몸을 비틀며 반항을 하니, 살에 닿던 거대한 것이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변신일 뿐이라며, 왜 그래?”

“당연히! 방금 그 크기는 양심 없는 거 아니냐!”

“네가 지금 크기를 따질 처지는 아니지 않나.”

“그…….”

“그럼 관두든가. 나도 너 같은 뻣뻣한 놈 쑤시고 싶지 않으니까.”

뒤에서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를 짓누르던 녀석의 몸이 서서히 멀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 순간 우어어어, 따위의 소리가 동굴 입구 쪽에서 들려오기 시작했고, 나는 몸을 굳혔다.

……저놈 말이 맞다.

아직 살아서 하고 싶은 게 많은 나와 반대로 저놈은 삶에 큰 미련이 없었다. 살 생각도 없는 저놈에게 먼저 제의를 한 것도 나다.

그러니까, 이렇게 반항할 처지가 아닌 게 맞다. 하지만…… 하지만, 저건 시발 너무-.

‘……하아…… 그래. 뭘 재고 따지고 있냐, 일단 살아야 할 거 아니냐고……. 다리 하나 분질러진다 생각하고 견디란 말이야……. 나중에 치유하면 되잖아. 그래, 그러면 돼…….’

자꾸만 도망가고 싶어 날뛰는 마음을 겨우 다잡았다.

그리고 뒤에서 몸을 일으키려는 놈의 기척에 나는 몸을 틀어 멀어지는 놈의 팔을 황급히 붙들었다.

“미, 미안……. 가만히 있을게. 진짜로…….”

“…….”

“하, 하자.”

“진짜 번거롭게 하네.”

멀어지던 남자가 멈칫하더니 짜증 난다는 식으로 말을 뱉었다.

그 냉한 목소리에도 나는 잡은 팔을 놓을 수가 없었다. 대신 놈을 붙잡은 채로 시선을 바닥으로 내릴 뿐이다.

이랬다저랬다 하고 있으니 당연히 짜증이 날 만하다. 알고 있다. 그런데…… 어떻게 그 짓을 덥석 할 수가 있겠냐고……. 망할…….

나는 차마 놈을 보지 못하고 돌바닥에 시선을 고정한 채 우물우물 말을 뱉었다.

“가만히 있을게. 너, 너도 궁금하잖아. 얼마나 강한 무기일지…….”

“……마지막이야. 한 번 더 지랄 맞게 굴면 몬스터 입에 처넣어 버릴 줄 알아.”

“말이 너무 살벌한 거 아니- 윽!”

녀석을 돌아보며 뭐 그리 살벌하게 말하냐는 식으로 말하려 했으나, 놈이 곧장 등을 짓누르는 바람에 말을 끝맺을 수가 없었다. 바닥에 가슴팍이 콱 부딪혀 아려왔다. 하지만 아픔을 느낄 새도 없이 길쭉한 것이 엉덩이 사이를 파고들어 왔다.

“흡!”

느릿하게 들어왔던 아까와 달리 순식간에 입구에 다다른 두꺼운 그것에 눈이 절로 질끈 감겼다.

“힘 풀어.”

잔뜩 긴장하고 있자 놈이 성가시다는 투로 말을 뱉었다. 그저 무기로 변하는 과정일 뿐이라는 것을 상기해 주듯 말이다.

“아, 그, 그래. 스읍, 후우-.”

놈의 말에 최대한 협조를 해 주기 위해 몸에 힘을 풀려고 했다.

호흡을 깊게 들이켜며 쿵쾅쿵쾅 미친 듯이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했다. 그리고 두어 번 호흡을 뱉을 때, 갑작스럽게 뭉툭하고 두꺼운 것이 입구를 화악 벌리고 들어왔다. 그 순간 절로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악-!”

눈이 크게 홉떠졌다. 주먹으로 놈을 후려치며 빼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한편의 이성이 나를 붙들었다. 살이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꽉 쥐며 참아야 했다.

이런 내 노고와 별개로 놈은 멈추지 않았다. 꽉 차 있는 듯한 아래를 더욱 벌리며 들어오는 커다란 기둥에 입이 쩌억 벌어졌다.

살아야 한다는 강한 집념으로 이를 꽉 깨물며 빼라는 말을 삼켰다.

다 들어왔다 생각할 즈음이면 가차 없이 치고 올라왔다. 무서울 정도로 커다란 기둥이 끊임없이 파고들어 와 숨이 쉬어지질 않았다.

“……흣, 윽!”

아래를 불로 지지는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의지와 상관없이 눈물이 얼굴을 타고 후드득 떨어졌다. 길쭉한 프X글스 통을 쑤셔 넣는 것 같았다. 커도 너무 컸다. 몸이 댕강, 하고 갈라질 것만 같았다.

그 고통과 두려움에 미친 사람처럼 알 수 없는 중얼거림이 입에서 터져나갔다.

“너, 너무 커, 너무 커, 끅, 그, 그만, 그만 들어…… 허윽-!”

욱여넣듯 밀고 들어오는 두툼한 것에 의해 끅끅대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거대한 것은 멈추지 않고 안으로 훅 들어왔다. 꽉 들어차는 느낌에 입에서 비명도 안 나왔다. 온몸이 경련을 일으키듯 고통으로 파르르 떨렸다.

놈의 성기가 내장까지 뚫어 버리는 줄 알았다.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떨어졌다.

“하아…… 너무, 조여.”

뒤에서는 드디어 양심 없는 것을 다 넣었다는 식으로 한숨을 터뜨렸다.

움직임을 멈추자 그제야 아득해진 시야가 차차 트이는 것 같았다.

거대한 크기가 여린 살을 건드릴 때마다 자꾸만 몸에 잔경련이 일었다. 아래를 누가 난도질하는 것같이 아파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꿈틀거리는 이물감은 토할 것 같았다. 차라리 몬스터에게 팔 하나 부러지는 쪽이 나을 지경이었다.

고통스럽고, 수치스럽고 각종 좆같은 기분이 몰아쳐 절로 눈물이 줄줄 흘러나왔다.

“토할 것 같, 배, 아파, 흣…….”

넋 나간 사람처럼 입에서 자꾸만 제멋대로 말이 튀어나왔다.

추잡하게 눈물을 흘리며 호흡을 뱉는 순간 다리를 타고 액이 흘러내리는 느낌이 들었다. 끈적하고 뜨거운 그것은 안 봐도 피일 것이라 짐작한다. 그 거대한 걸 무작정 집어넣어 대는데 아래가 찢어지지 않을 리가 없었다.

“……으읏…….”

등에서부터 놈의 뜨거운 체온이 느껴졌다. 내부를 가득 채우는 크기가 꿈틀거릴 때마다 숨이 턱턱 막혀왔다. 더해서 내가 남자 아래 깔렸다는 것이 개같이 체감이 되었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차라리 빨리하고 끝내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가만히 있으니 지금 내 처지가 상기가 되어 매우 뭣 같은 기분이 올라왔다.

“그냥 빠…… 빨리 움, 움직이라고……!”

“힘을 풀어야, 움직이지.”

커다란 것이 조금만 움직여도 아래가 아파서 몸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나 이 행위를 빨리 끝내기 위해서는 협조를 해야 했다.

나는 긴장된 아래에 최대한 힘을 풀려고 노력했다. 다가올 고통을 예상하니 몸이 벌벌 떨렸다.

“아, 알았…… 악!”

몸을 늘어뜨리는 순간이다. 삽입되어 있던 커다란 게 뒤로 쭈욱 빠졌다. 내장 전체가 딸려 나가는 무서운 느낌에 기껏 풀었던 몸에 힘이 들어갔다.

발끝을 오므리며 참아내는데, 개 같은 느낌과 함께 다시 안쪽으로 훅 하고 들어왔다.

“흐학!”

입에서는 소리도 되지 못한, 고통으로 범벅된 숨이 터져나갔다. 동시에 철퍽, 물에 젖은 소리가 동굴에 울렸다. 끈적한 액이 다리를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나는 이를 악물며 당장 거래를 취소하고 싶은 욕구를 억눌러야 했다. 짓눌린 팔의 고통도 느껴지지 않을 만큼, 결합한 곳이 불에 타는 듯했다. 정신을 차리려고 숨을 뱉는 순간, 또 한 번 몸이 흔들렸다.

“아욱!”

안쪽을 치자 배가 아릿했다. 다시 거대한 것이 뒤로 물러났다 한 번에 안쪽까지 푹 찔러 넣었다.

“아흑…… 흣!”

놈의 허리 짓과 함께 입구에서 피로 젖은 소리가 들려왔다. 찌걱거리며 뒤로 물러나던 거대한 것이 안을 다시 철퍽 쳐올렸다. 그때마다 입에서는 괴상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학- 흑, 아, 아!”

점점 허리 짓이 빨라지기 시작함과 동시에 몸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호흡을 뱉을 만하면 움직여 대니 어지러웠다.

팔과 벗겨진 아랫도리는 딱딱한 바닥에 짓눌려 아팠다. 그러나 그 고통은 뒷구멍보다는 덜 아팠다. 그리고 뒷구멍도 비명을 지르고 싶을 만큼 아팠지만, 그것도 못 참을 건 없었다.

지금 내가 가장 못 참는 것은…… 다른 것이었다. 놈이 움직일 때마다 시도 때도 없이 움찔움찔 신음을 뱉어대는 내 반응이 너무나도 수치스러워 정신을 잃고 싶을 지경이었다.

“흐으, 윽, 윽! 빌어, 먹을…… 아!”

철퍽철퍽, 찐득한 소리가 동굴 안에 울려댔다. 뒤에서는 같은 남자의 뜨거운 숨결이 닿아왔다. 배 속에서 뜨거운 꼬챙이가 안을 푹푹, 찌를 때마다 눈앞이 번쩍거렸다.

고통뿐이었던 행위에서 번지는 정신 나간 감각에 마음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입에서는 자꾸만 내 목소리 같지 않은, 하이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주둥이를 당장 틀어막고 싶었지만, 뒤를 박아올 때마다 몸이 바닥에 부딪혀 손을 들어 올릴 겨를이 없었다. 그저 놈이 아래를 치고 들어올 때마다 연신 신음만 질러댈 수밖에 없다.

“아윽! 응-.”

“하아…….”

안쪽을 거칠게 푹푹 박아오는 기세에 몸이 부서질 것만 같았다. 뒤에서는 탁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몸이 계속해서 흔들렸고 눈앞이 핑핑 돌았다. 점점 다른 생각은 할 수 없을 정도로 머리가 백지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몸이 뜨거워진다 생각하는 그때, 안쪽을 어딘가가 철퍽 쳐올려졌다. 척추를 타고 전율이 흘렀다. 허리가 움칫 떨렸다. 아래가 아릿하게 아파 왔고 눈물이 투둑 떨어졌다.

“하윽! 아!”

머리 한편에 남아 있는 이성은 무너지고 있는 나의 정체성을 감지했다. 입에서는 울음 섞인 욕설이 신음과 섞여 터져 나왔다.

“시발……. 으흣, 시발…… 아! 흡, 끅.”

뒤에서 빠르게 박아왔고 찰팍, 찰팍 살이 마찰하는 소리가 연달아 울리기 시작했다. 깊은 어딘가가 자극을 당할 때마다 나도 모르게 허리가 흔들렸다.

“아앗! 으, 아, 아, 으흑!”

등 뒤에서 내리눌러지는 무게가 느껴졌다. 뜨거운 체온이 등에 닿았고 몸이 압박되어 왔다. 결합한 부분이 조금 더 깊이 맞물리자 배가 울룩불룩 아파졌다.

목덜미에서 뜨겁고 가쁜 숨이 훅훅 닿았다. 안에 들어왔던 길쭉한 게 안을 비비듯이 물러나더니 다시 무자비하게 푸욱 파고들었다.

“아으…… 하, 응, 으읏-!”

쑤욱, 쑤욱 피로 젖어 있는 안으로 단단한 기둥이 들어왔다. 두툼한 것이 닿을 때마다 내부가 움칫했다. 찌릿찌릿한 느낌에 입에서는 신음이 마구잡이로 터져나갔다.

“아! 앗, 아, 아, 아아!”

아래에 피가 잔뜩 몰려 빠듯해짐과 함께 몸이 온통 흐물흐물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멈추지 않는 추삽질과 자극에 눈앞이 핑핑 돌았다. 머리가 뜨겁게 달아올라 울음인지 신음인지 혼란스러운 소리를 뱉어내던 때다.

“큿……!”

“아아-!”

눈앞이 번개가 내려치듯 번쩍번쩍하던 감각이 뚝 끊은 듯 멈췄다. 눈앞이 까무룩 하게 점멸했다. 온몸이 블랙홀 같은 어딘가로 강렬히 빨려들어 가는 듯했다.

“…….”

누군가가 몸을 막대기로 휘휘 저어대는 기분이었다. 그것도 아주 강력해서 눈앞이 핑핑 돌고 속도 울렁거릴 정도로 말이다.

나는 소용돌이 한복판에서 빙빙 돌고 있는 것처럼 어지럽고 토할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하.”

그때, 가까운 곳에서 기가 찬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핑글핑글 도는 정신 틈으로도 그 소리를 들었다.

어두운 공간에서 유일한 소리를 따라 눈을 부릅떴다. 눈으로 정신을 집중하니, 까맣던 앞이 점차 색을 띠며 보이기 시작했다.

누군가의 형체가 보이기 시작할 즈음, 몸이 놀이기구를 탄 것처럼 덜렁 올라가는 느낌이 들었다.

“진짜잖아……?”

길쭉한 눈매에 붉은 눈동자를 가진 차가운 인상의 남자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뜬 모습이 보였다. 그것도 아주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말이다.

-으앗!

나는 얼굴을 들이밀고 있는 남자를 보며 기겁했다. 팔을 뻗어 앞에 있는 남자를 밀어내려 했다. 그러나 아무리 움직여도 달싹거릴 뿐 팔이 뻗어지지 않았다.

-왜, 왜 이러, 몸이…….

나는 덜컥 불길한 마음으로 아래를 내려다봤다. 그러나 몸통이라고 할 만한 건 없고 날카로운 칼이 보였다. 붉은색과 황금색이 뒤섞인 칼의 형태였다. 그 칼의 손잡이를 쥐고 있는 커다란 손이 보였다.

남자의 손이 움칠거리자 몸통이 만져지는 감각에 소름이 돋아왔다.

희뜩 놀란 나는 믿을 수 없다는 투의 말이 터져 나왔다.

-이, 이게 뭐야……!

문득 말을 뱉어도 동굴에 소리가 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더럭 고개를 들어 올렸다. 분명 동굴 안이 맞았다.

‘몸을 잃다 못해 목소리도 잃은 것일까.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라고 혼란스럽게 생각하던 나는 조금 전의 일이 불현듯 기억이 났다. 앞에 있는 남자와 빌어먹을 변신 행위를 벌였고 놈이 안에 싸지른 정액과 함께 나는…… 무기로 변한 것이었다.

“확실히. 심상치 않은 마력을 담고 있군.”

앞에 있는 남자가 놀랍다는 투로 혼잣말을 했다. 검집을 잡은 손이 살짝 들리자 시야가 흔들렸다.

나는 울렁거리는 속을 느끼며 더듬더듬 소리쳤다.

-미, 미친…… 지, 진짜 무기로 변한 거라고?

속에서 휘몰아치고 있는 정신없는 마력과 함께 나는 사람 팔만 한 이 칼이 변신한 내 몸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빨간 책의 내용은 진실만을 담고 있었다.

“대단한 무기라…….”

앞에 있는 남자가 작게 읊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고철 덩어리 몸뚱어리에서 시선을 들었다. 앞에 남자의 붉은 눈동자에는 흥미롭다 못해 생기 어린 빛이 돌고 있었다.

그 부담스러운 눈빛을 받고 있느니, 불길한 기분이 고개를 내밀었다.

-왜…… 왜, 그렇게 보는 건데.

“그렇게 호언장담한 무기니, 어디 한번 확인해 볼까.”

-자, 잠…… 으윽!

남자는 들뜬 목소리로 말을 뱉고서 곧장 앞으로 걸어갔다.

나는 녀석의 손에서 흔들리는 몸에 어지러움을 느껴야 했다. 그저 걸어간다고 생각한 남자는 기본 이동 속도가 굉장히 빨랐다. 무슨 축지법이라도 쓰는 것 같았다. 그 때문에 나는 청룡 열차를 탄 감각을 느끼고 있었다.

-마,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 좀-.

“벌써 입구 안으로 들어오려 하는데?”

-무슨… 흡!

남자의 말에 나는 시선을 뒤쪽으로 집중했다. 그러자 달빛만 들어오고 있던 입구에는 액체 괴물들이 득실득실하게 모여 있는 끔찍한 모습이 보였다.

좁은 입구에 서로 들어오기 위해 치대는 징그러운 광경에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계속해서 동굴을 사정없이 치면서 들어오려 했던 몬스터가 어느 순간 너무 잠잠하다는 것을 느끼지 못했다. 정신없는 행위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저렇게 입구에서 득실거리느라 못 들어오고 있었나 보다.

-자, 잠깐! 그럼. 굳이 싸울 필요가 없지 않냐?!

저렇게 입구에 꽉 들어찬 괴물을 보니 굳이 싸울 필요가 없어 보였다.

그럼 자기들끼리 부딪쳐서 대미지를 입게 두는 편이 안전하지 않을까. 그리고 한두 마리 남았을 때 아침 돼서 도망치는 편이 더 안전한 선택지로 보인다.

전설의 무기라고 하지만 처음 변신해 본 거기도 하고, 검증이 안 된 상대와 결합을 한 것이다. 한 마리도 아니고 저렇게 득실거리는 녀석들을 건드리는 건 무모해 보였다.

-이, 이봐! 머, 멈춰 봐! 너무 많다고……! 내 목소리 안 들리냐?! 멈춰! 멈추라고! 썅, 뒤질 거면 차라리 혼자 뒤져! 기껏 구해 줬더니 이 빌어먹을 놈이 은혜를 원수로 갚냐?! 이 개 같은 놈아!

나는 다급하게 다시 생각해 보라며, 놈을 말리려 정신없이 소리쳤다. 그러나 동굴에서도 소리가 안 울렸다시피, 놈에게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했다.

살아야 한다는 집념으로 발버둥을 쳤다. 하지만 단단한 놈의 손아귀에서 옴짝달싹 못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절규와 분노를 담아 놈에게 욕설을 계속해서 퍼부을 때다.

“-꽤 입이 험하네.”

-흡- 드, 들렸냐?

“그럼. 아주 잘 들려.”

놈이 잠깐 멈춘 채 나를 내려다봤다.

남자는 정확히 내 말에 대답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동굴에 남자의 목소리만 울리고 있었다. 내 목소리는 울리지 않았다. 아무래도 결합한 상대에게만 들리는 구조인가 보다.

……그러면 심한 욕은 안 했지.

그래도 놈에게 내 목소리가 들린다니, 더 좋은 방법이 있으니까 물러나자고 말을 할 수 있겠다.

-그…… 이, 이봐. 지금은 후퇴하고 다음을 기약하는 편이-.

“성능 확인하기 좋게 모여 있는데 그럴 필요는 없지.”

남자는 뭐 하러 번거롭게 그러냐는 투로 태연자약하게 말을 했다. 곧장 검집을 단단히 고쳐 잡더니, 몬스터를 향해 신난 얼굴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남자가 입구로 빠르게 달려감과 함께 입구에 부딪히고 있던 몬스터들이 일제히 우릴 향해 입을 쩌억 하고 벌리기 시작했다. 먹이가 절로 입으로 걸어가는 듯한 꼴이었다.

나는 그 공포스러운 광경이 가까워짐에도 놈의 손아귀에 벗어날 수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처절하게 비명을 지르는 것뿐이었다.

-미, 미친 자식아아악-!

몬스터의 입 안의 용암 같은 뜨거운 침을 보며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렇게 죽는구나 생각할 때 검을 높게 치켜든 것처럼 몸이 올라갔다. 속을 휘저어 대던 마력이 커다란 파도가 치듯 꿀렁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거대한 마력에 휩쓸리던 차에 놈의 손이 있던 위치로 내 마력이 쭈욱 끌어당겨졌다. 내부에 있던 마력이 밖으로 뿜어져 나가는 기분을 느꼈다.

온몸이 흔들려 왔다. 모든 감각이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는 듯했고, 그 순간 정신이 아득히 멀어져 갔다.

“-찾았다.”

의식이 끊어지기 전, 환희에 찬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린 듯했다.

* * *

시원한 풀과 흙냄새,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바람이 피부를 스쳤고 나뭇잎이 사라락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그늘에 가려지기를 반복하듯 햇살이 얼굴로 느껴졌다.

몽롱한 감각 틈으로 미묘하게 몸이 들썩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음음.”

가까이서 즐겁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을 사람 중 누군가 좋은 일이 있구나 싶다. 초보자 마을에서 기뻐할 일이라면 불 보듯 뻔했다. 전직했기 때문일 것이다.

……부럽네. 에라- 잠이나 자자…….

기운이 없어 눈을 뜨기도 귀찮았다. 그런데 자꾸만 신경 쓰이는 감각이 느껴졌다. 둔부 쪽에서 말이다.

뭐야……. 뭔데, 잠 좀 자자, 잠 좀.

문질러 대는 감각이 매우 거슬렸다.

“불편해?”

엉덩이를 그렇게 떡처럼 주무르는데 안 불편하겠냐…….

나는 속으로 불평을 하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목소리조차 내기 버거울 정도로 기운이 없었다. 그저 축 늘어져 한동안 아무것도 안 하고 싶었다. 아무래도 체력이 떨어진 모양이다. 자고 일어나서 물약이나 마셔야겠다.

“……으…….”

“기복이는 잠투정이 많구나.”

‘잠투정이 아니라 그만 만지…….’까지만 생각하던 나는 불현듯 께름칙한 감각이 스쳤다. 상대의 목소리가 어쩐지 들어본 적 있는 듯, 없는 듯 미묘한 목소리다.

‘어디서 들어봤더라……. 아, 어디 울리는 곳에서 들어본 목소리 같은데- 아, 그래. 나 전직했지. 그것도 전설의 무기. 흐흐. 그리고 혼자 모험을 떠났고……. 흐음? 그럼, 지금 나한테 말을 거는 사람은 누구야……. 아, 전사-.’

차차 기억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몽롱했던 정신도 점차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거대한 것이 몸을 찢어발기듯 들어오는 순간이 떠올랐고 눈이 절로 번쩍 떠졌다.

“흐억-!”

물에 빠졌다 건져진 사람처럼 숨을 크게 들이켰다. 양심 없는 놈이 거대한 걸 박아오기 전에 서둘러 몸을 움직이려 할 때였다.

“일어났어?”

다정하게 물어보는 목소리와 함께 코앞에 창백한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이번엔 귀신을 본 것처럼 숨을 들이켰다.

“흡-.”

나는 굳은 채 남자를 쳐다봤다.

남자는 그런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내 눈꼬리를 접어 사뭇 다정히 웃어 주었다. 남자의 핏빛 머리카락이 살랑거렸다.

나는 남자를 멍하니 바라보다 눈동자를 돌렸다. 남자의 뒤편으로 우거진 초록 수풀들이 보였다. 그리고 다시 남자를 쳐다보았다. 입꼬리마저 시원하게 말아 올린 상태로 여전히 날 보고 다정히 웃고 있었다.

“어-.”

얼빠진 소리가 입에서 터져 나왔다. 무슨 상황인지 가늠이 되질 않았다.

뭔가…… 혼란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남자의 머리 위에는 [다스쿠르타우로재드비]라는 긴 이름이 보였다.

‘……같이 있던 전사는 맞는데…….’

나는 남자의 얼굴을 멀거니 쳐다봤다. 햇살을 받은 깔끔한 피부와 쭉 뻗은 눈매와 콧날, 눈부시도록 잘빠진 남자의 얼굴이 코앞에서 보였다.

그리고 그 얼굴을 보자 나는 내 기억이 잘못된 건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날카로운 느낌의 남자가 자고 일어나니, 애정 어린 눈으로 웃어주고 있으니 말이다.

……기묘함에 속이 울렁거렸다.

“뭐, 뭐야…….”

……이놈, 뭘 잘못 먹은 걸까.

“응?”

“왜 자꾸 기분 나쁘게 웃는 건- 흐악!”

잔뜩 경계하던 나는 엉덩이 틈에서 올라오는 아찔한 고통에 몸을 펄떡거렸다.

“으…….”

입구에서 느껴지는 고통을 삼킬 즈음이다. 머리 위에서 툴툴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기분 나쁘다니…… 너무하네.”

어쩐지…… 애교가 섞여 있는 듯한 말투였다.

나는 아픔도 잊은 채로 몸을 딱딱하게 굳혔다. 뻣뻣하게 고개를 들자, 남자는 입술을 삐죽 내밀고 있었다.

나는 못 볼 걸 봤다는 듯이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떴다. 여전히 남자는 입술을 내밀고 있었다.

나는 이제 눈도 깜빡이지 못하고 놈을 쳐다봤다. 놈은 그런 나를 내려다보더니 이어서 말을 뱉었다. 그것도 정말 삐진 것 같은 말투로 말이다.

“친절하게 공주님처럼 안아서 마을로 가는 중인데…….”

그 말에 나는 시선을 빠르게 아래로 내렸다. 놈의 탄탄한 팔이 내 어깨와 엉덩이를 단단히 감싸고 있었다.

나는 무서운 걸 본 것처럼 몸을 퍼르르 떨었다.

“또 기복이 찢어진 곳에 정성 들여 약을 발라 주기까지 했는데.”

이어서 들려오는 놈의 말에 입을 벌리며 놈을 올려다봤다.

“뭐……?”

“여기. 치료했다고.”

놈이 내 엉덩이를 두드렸다. 그 손길에 조금 전 놈의 말이 머리에 제대로 입력이 됐다.

……시발.

“-내, 내려 줘! 내려 줘! 당장 내려 달, 으어헉-.”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몸을 펄떡거렸다. 하지만 얼마 못 가 입에서 요상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몸이 두 쪽으로 쪼개질 것 같은 고통이 아랫부분에서 몰려왔기 때문이다.

힘이 빠져 몸을 축 늘어뜨리자 위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효과가 안 도나 보네.”

“흐…….”

“꽤 좋은 약도 먹였으니까 조금만 참아 봐.”

어린아이를 달래주는 듯한 놈의 눈빛에 당장 내려달라는 말이 목구멍에 치솟고 있었다. 그러나 조금 전 펄떡거리는 바람에 빌어먹게도 힘이 풀리고 말았다. 지금 몸 상태로 두 발로 서 있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다.

물에 젖어 늘어난 빨래 같은 내 상태를 자각하고 말았다.

“망할…….”

더해서 몬스터들이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주변 숲 풍경이 보였다.

……지금 몸부림을 쳐 봤자 득 될 게 없었다.

오늘 해지기 전까지 자니스 마을에 도착해야 했다. 괜히 입씨름하다 시간을 끄는 건 위험을 자초하는 짓이었다. 밤에 몬스터들이 또 들끓을 테니까.

“…….”

숲에서 실랑이를 벌이고 있을 시간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망연하게 공주님 안기를 바라봤다.

우울한 마음이 더 치솟기 전에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놈의 머리에 있는 이름표와 내 머리 위에 있는 이름표가 보라색을 띠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이봐.”

“이봐, 라니, 나도 이름이 있는데…….”

“그게 중요-.”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고 말을 하려 하는데- 바로 앞에 보이는 놈이 아주 중요하다는 듯이 시무룩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비를 맞은 개 같은 표정이다.

어쩐지 첫인상과 다른 그의 모습에 자꾸만 혼란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기억이 조작된 기분이었다. 마치…… 딴 사람이 와 있는 것 같았다.

근데 적응이 안 될 뿐이지, 딱히 놈의 얼굴이랑 안 어울리진 않았다. ……잘생기면 뭘 하든 위화감이 없나 보다.

“……다비.”

잘생긴 놈이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으니, 내가 큰 잘못을 저지른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매번 저 긴 이름을 부르다가는 날 샐 것 같다. 무슨 발음 테스트도 아니고…….

그래서 축약하듯 앞뒤 글자를 따 대강 ‘다비’를 생각해 냈다.

“다비?”

“짧게, 앞뒤 글자 땄어.”

설마 멋대로 줄였다고 또 시무룩해하려나 싶은 마음이 올라왔다. 놈의 눈치를 흘끗 보며 물었다.

“벼, 별로냐?”

“좋아. 기복이가 그렇게 부르고 싶으면 그렇게 해.”

“…….”

나는 좋다는 놈의 말에 다행이라고 대강 말을 하려다가, 문득 놈의 입에서 나온 내 이름에 멈칫했다.

‘……아니, 저놈은 언제부터 내 이름을 저리 친근하게 불러대고 있었던 거냐……?’

하루 만에 달라진 놈의 태도를 이상하게 생각하다 문득, 처음 싸늘하게 나를 쳐다보던 붉은 눈동자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리고 사근사근해 보이는 붉은 눈동자가 지금 눈앞에 보였다.

‘……그래. 무섭게 구는 것보단 낫지……. 일단, 마을까지는 같이 가야 하는 사이니까…….’

이 점에 대해서는 넘어가기로 했다. 그것보다……지금 내가 물어보고 싶은 건 이거다.

“우리…… 언제 파티 맺었냐?”

“기복이가 기절했을 때.”

“뭐……? 워, 원래 상대 동의 없이 그냥 막 되는 거냐……?”

초보자 마을에서만 깔짝거리며 살던 나는 파티를 맺은 적이 없었다. 그래서 내가 알던 파티 이론과 실전은 다른가 싶어 물어봤다.

“원래는 안 되지.”

그러나 녀석의 대답으로 보아 내가 알고 있는 게 맞는 듯하다.

“…….”

나는 놈의 머리 위에 있는 이름과 내 머리 위에 있는 이름이 같은 색으로 빛나고 있는 것을 보다 다시 놈의 느긋한 얼굴을 쳐다봤다.

……안 되는데 왜 나랑 네놈은 파티가 맺어져 있냐?

“……근데?”

“기복이가 무기일 때는 되더라고.”

즐거움이 묻어 있는 말에 나는 멀거니 눈을 껌뻑거려야 했다. 가슴 한구석에서 께름칙한 기분이 피어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별것이 다 연결되는구나 싶다.

……뭐, 어차피 다음 마을까지 파티를 맺는 조건으로 놈과 거래를 했으니, 놈과 파티를 맺은 것에 대해서는 불만이 없다.

단지, 걸리는 부분이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보통 파티를 맺으면 이름표가 파란색으로 빛난다. 그런데 저놈과 나는 이름표가 보라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내가 아는 바로는 보라색 파티는…… 강력한 몬스터를 잡으러 갈 때 맺는 끈끈한 파티다.

한 명이라도 도주를 하게 되면 모두가 위험해지니까, 도망치지 못하도록 파티원들 전체가 동의를 해야 해제가 가능한 파티라고 알고 있다.

그리고 나는 지금…… 저놈이 왜 나랑 보라색 파티를 맺었는지 모르겠다. 다음 마을까지만 같이 가는 단순한 파티 정도인데 말이다.

‘……그래. 뭐가 중요하냐. 어차피 자니스 도착하면 서로 갈 길 갈 텐데.’

좀 찝찝한 기분이 들긴 했지만, 그때 상황이 워낙 정신없었다 보니 잘못 맺어졌나 생각하면 이상할 것도 없었다.

무엇보다 내가 맺자고 한 파틴데, 파티 색 갖고 따지고 드는 건 오버 하는 것 같아 뭐라 말을 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러자 놈의 팔에 안겨 있는 탐탁지 않은 내 몸뚱어리가 다시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몸을 살짝 움직여 봤다. 여전히 아래가 찌릿하게 아파져 와 인상이 찌푸려졌다.

‘……조, 좋은 약 발랐다면서 왜 빨리 치료가 안 되냐…….’

얼른 내 두 다리로 걷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여기가 숲이라서 이 낯짝 부끄러운 자세는 저놈이랑 나 외엔 보는 사람이 없다는 거다.

‘하아. 뭐, 어차피 더한 짓도 했는데 이깟 자세쯤…… 아, 아니지! 더한 짓이라니, 그건 엄연히 변신 과정일 뿐이라고!’

스스로와의 싸움에 휩싸여 있을 즈음이다.

다비 놈이 문득 발걸음을 멈추었다. 움직임이 없자 나는 고개를 들었다. 붉은 눈동자가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왜?”

“할 말이 많아 보이는 표정이길래.”

놈의 물음에 계속해서 이놈이 나를 살피고 있었구나, 를 깨달았다.

위에서 갸웃하며 주시하는 시선에 나는 입을 달싹거렸다. 스스로에게 퍼붓고 있던 욕은 많긴 했지만 놈에게 할 말이 많은 건 아니었다. 그래서 딱히, 라며 말을 하려다 문득 궁금한 점이 떠올랐다.

“……그, 동굴에서 어떻게 나온 거냐?”

“어디서부터 기억이 없는데?”

“……네가 액체 몬스터 주둥이로 달려들 때부터.”

“아아. 다 처리했어.”

“어, 어떻게?”

“휘두르니까 죽던데.”

“어, 엄청 많았잖아?”

“네 말대로. 무기가 아주 훌륭했거든.”

아주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뱉는 놈의 얼굴이 보였다. 더해서 놈의 눈동자에는 반짝이는 이채가 돌고 있었다.

가까운 거리에서 느껴지는 열렬한 시선에 머리털이 쭈뼛 서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스르륵 시선을 돌리자 다비 놈이 천천히 다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됐다. 됐어. 뭐든 살았으면 된 거지.’

우려했던 게 무색할 정도로 전설의 무기는 강한 듯하다.

나는 녀석의 멀쩡한 몸을 쳐다봤다. 그러다 샌들을 신고 있는 놈의 곧게 뻗은 발가락까지 내려다봤다.

저런 빈약한 장비를 가진 녀석이 그 많은 몹을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잡은 걸 보면 전설의 무기가 이름값 하나 보다.

나는 여유로운 걸음을 내려다보다 목이 아픈 걸 느끼며 시선을 들었다. 그러자 놈의 어깨에 달랑 매달려 있는 초보자용 봇짐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뚫어져라 내 봇짐을 바라봤다.

“이봐……. 아니, 다비.”

“응?”

“길은 알고 가냐?”

“음-.”

동서남북도 가늠이 안 가는 이런 울창한 숲에서 놈은 대체 어디로 걸어가고 있는 걸까. 아니, 가까운 마을로 가야 한다고 했으니 자니스 마을로 가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놈이 방향을 어떻게 알고 가는지 의문스러웠다.

초보자 마을에서 나온 뒤로 나는 봇짐 안에 있는 나침반과 지도를 수시로 들여다 보며 걸어갔었다.

그런 나와 달리 놈의 양손은 나를 붙들고 있었고, 그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고 앞만 보면서 걷고 있었다.

“아니.”

그리고 그에게서 태연한 대답이 들려왔다.

“……뭐?! 그럼 뭘 믿고 계속 앞으로 가는 거야?!”

“으음- 감으로?”

“허- 더 멀어지면 어쩌려고! 가, 가방 줘 봐!”

한가로운 놈의 얼굴에 어이가 없었다. 그러다 놈의 어깨에 있는 봇짐에 손을 뻗었다. 놈이 나를 보더니 순순히 어깨를 틀었다.

나는 깁스를 하지 않은 멀쩡한 팔을 움직여 봇짐 안을 뒤적였다. 손에 잡히는 둥그런 나침반과 지도를 잡아 꺼냈다. 그러자 놈이 자세를 바로 하며 다시 빌어먹을 감으로 걷기 시작했다.

“자, 잠깐. 멈춰 봐! 내가 방향을 볼 테니까!”

나의 다급함에 다비 놈이 걸음을 멈추었다. 물끄러미 나를 내려다보던 다비는 또 한 번 태평한 소리를 해 댔다.

“기복이는 철저하구나.”

“철저한 게 아니라 당연하잖아!”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정글 같은 곳이었다. 이런 곳에서 나침반이랑 지도 없이 누가 감만으로 걷냐고……! 그것도 밤 되면 몬스터들이 들끓는 사냥터에서!

나는 목까지 차오른 말을 삼키며 한쪽 팔로 빠르게 지도를 펼쳤다.

오늘은 무조건 해지기 전에 자니스에 도착을 해야만 한다. 어제까지만 해도 몬스터를 피하는 것이 급급했지만, 지금은…… 또 변신 과정을 거쳐야 할지도 모른다는 점이 매우 두려웠다.

……아무리 변신 과정이라며 마인드 컨트롤을 해도 커다란 남자 아래에 깔려 있는 수치는 사라지지 않았다.

잠깐이라도 머릿속에 어제의 장면이 스친다 싶으면, 혀를 깨물고 싶은 충동이 치솟는다.

“…….”

나는 부릅뜬 눈으로 지도를 쳐다봤다.

숲의 구간마다 피어나는 꽃이나 나무의 종류가 달랐다. 지도에 적혀 있는 풀 종류를 비교해 현재 위치를 확인해야 했다.

고개를 들고서 주변을 휙휙 둘러보자 초록 잎사귀에 노란 점이 박혀 있는 풀들이 보였다. 얼른 다시 지도를 보며 놈이 제대로 가고 있는지, 혹은 가까운 마을이 있는지 눈으로 빠르게 훑었다.

부디 마을과 동떨어진 곳은 아니기를, 간절한 마음을 담아 눈동자를 바쁘게 굴렸다.

“…….”

찾아보니 자니스와 가까이 있는 구간에 와 있었다. 걸어가고 있는 방향은 자니스 마을이 있는 방향과 정확히 일치했다.

……놀랍게도 놈의 감은 맞았다.

나는 얼떨떨한 눈으로 놈을 올려다봤다.

“응?”

다비 놈이 고개를 갸웃하며 눈을 맞춰왔다. 그 사근사근한 눈을 가만히 마주하고 있자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저런 허름한 차림으로 위험한 몹들이 튀어나오는 사냥터에 혼자 있었던 것도 그렇고, 물음표 레벨에 전직이 되어 있는 것도 그렇고…… 대체 이놈은 뭐지.

나는 다비 놈을 의미심장하게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야.”

“응.”

“그만.”

“음?”

“손 떼.”

놈의 쭉 뻗은 눈매가 순수한 어린아이처럼 크게 벌어졌다.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전혀 모르겠다는 아주, 가증스러운 얼굴이었다.

“썅, 엉덩이 좀 그만 만지라고!”

저 자식이 자니스로 제대로 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긴장을 놓자 그제야 알아차린 사실이 있다.

저놈이 아까부터 틈만 나면 엉덩이를 만지고 있어 감각이 둔해져 있다는 사실을.

“아, 싫어?”

“좋겠냐?!”

빌어먹을……! 안 그래도 자꾸만 어제 일이 떠올라 자괴감이 치솟고 있었다. 그런데 그 일을 상기해 주듯 처만져 대고 있으니 부아가 울컥 치밀었다.

“같은 남자 엉덩이를 만지고 싶냐?!”

“기복이는 예외인걸. 살결도 부드럽고. 그곳도 예민해서-.”

“악! 아악! 그만! 그만! 이 변태 새끼야! 내려줘! 내려 달라고!”

미친 듯이 놈의 손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을 쳤다.

나도 그렇고 저놈도 그렇고 단순히 변신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더는 정신 승리를 할 수 없는 게 당연하잖아!’

펄떡펄떡 생선처럼 날뛰자 놈이 나를 조심스레 바닥으로 내려다 줬다.

나는 아래에서 피가 흐르더라도 저 엉덩이를 떡처럼 주무르는 변태 놈에게 다시는 안기지 않을 거라 다짐했다.

“걸을 수 있겠어?”

“걸을 수 있고 자시고-! 어, 어라?”

놈의 말에 소리를 치던 나는 문득 아무런 고통이 느껴지지 않아 어벙하게 아래를 내려다봤다.

다리가 땅에 닿음에도 아프지 않았다. 다리를 올렸다가 내려도 봤지만 아까와 달리 고통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괜찮은가 보네.”

앞에 있는 놈도 나를 보더니 고개를 선선히 끄덕였다.

“마나는?”

“……어어?”

“회복됐어?”

태연하게 질문하는 놈을 보고 나는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붉은 눈동자가 나를 빤히 바라봤다. 뒤늦게 놈의 질문을 파악하고 몸에 집중을 했다. 그러자 손가락도 까딱하기 힘들었던 아까와 달리 평소와 같이 몸에 기운이 돌았다.

뿐만 아니라 아작 났던 한쪽 팔을 살짝 움직여 보니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황급히 깁스처럼 묶어둔 붕대를 둘둘 벗겨내며 팔을 접었다가 폈다.

“다 나았어……?”

“효과가 도나 보네.”

“……뭐, 뭐 어떻게 한 거야?”

“만병통치약을 먹였지.”

“허……그렇게 개쩌는 물약이 있다고? 그건 또 언제 먹인 건데?”

“네가 기절했을 때.”

나는 듣도 보도 못한 물약의 존재에 얼빠진 숨을 쉬다, 흥분해서 물었다.

“그 약, 어디서 구할 수 있어?!”

한 번에 몸을 다 낫게 해 주는 약이라면, 돈을 탈탈 털어서라도 살 가치가 있는 약이었다.

나의 기대감에 가득 찬 물음에 놈은 간단하게 대답했다.

“못 구해.”

“……어? 왜?”

“하나밖에 없거든.”

“하, 하나?”

“응. 내가 감으로 만들어 본 거니까.”

“무슨 감으로-.”

무슨 감으로 만병통치약 같은 개쩌는 걸 만드냐며 어이없게 말을 뱉으려 했다.

그 순간 나는 조금 전 놈이 이런 우거진 숲에서 내비게이션처럼 자니스를 향해 정확히 가고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러자 놈의 말이 그렇게 말이 안 되진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지금 내가 놈이 말한 그 약을 먹고 다 나았기도 했고.

……놈은 기가 막힌 감이라도 갖고 있는 것일까.

“……여러 개 만들어서 장사나 하지 그러냐.”

“시시하잖아. 그리고 만드는 방법도 잊어버렸는걸.”

“허…… 잊었다고……? 그렇게 귀한 걸 나한테 먹여도 되냐.”

“얼마든지.”

고개를 끄덕이며 기복이라면, 식으로 말하는 놈의 얼굴이 보였다. 이어서 나를 보고 햇살처럼 웃어주는 얼굴을 가까이에서 보자 팔에 닭살이 돋았다…….

“근데…… 아까부터 왜 자꾸 친한 척이야.”

“친한 척이라니……. 우리 꽤나 깊은 결합을 한-.”

“악! 악! 그만! 그만! 알았으니까 닥쳐!”

“왜 그렇게 부끄러워해.”

“이게 부끄러워하는 걸로 보-!”

“처음 섹스해 보는 것도 아니고.”

“거, 거길 그런 식으로 사용해 봤을 리가 있냐!”

“그래? 그럼, 삽입은 해 봤다는 거네?”

“…….”

“그것도 아니야?”

나는 빌어먹게도, 녀석의 능글대는 투에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녀석의 말이 맞았으니까.

이 세계에 왔을 때도 그렇고 그 전에 삶도 그렇고, 나는 연애 한 번 해 본 적 없는, 일명 모태 솔로였다.

그렇다고 고백을 못 받아 본 것은 아니었다. 단지, 이성을 사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친구들이랑 축구, 혹은 피시방 가서 게임 하는 것이 더 재미있었을 뿐이다.

그래서 놈이 말한 섹스는커녕 연애 한 번 못 해 보긴 했다만……. 사는 데 지장은 없었다.

그거면 된 거 아니냐고…….

“기복이의 처음은 나구나?”

사실 내 처음이 남자라는 점이 자괴감에 한몫하고 있었던지라, 놈이 화색을 띠는 것을 보자 마음속에 착잡함과 우울감이 진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기쁜데.”

남 속도 모르고 앞에서 싱글벙글 웃으며 한마디 더 거드는 놈을 보니 진해지고 있던 울분이 왈칵 치솟았다.

“기쁘긴 뭐가 기쁘냐고!”

“기복이의 첫 반응을 본 거니까.”

“처, 첫…… 망할! 안 그래도 심란해 죽겠는데 놀리냐?!”

“놀리다니. 기복이에겐 이제 진심인걸.”

놈의 붉은 눈동자가 사뭇 진지한 빛을 띠며 나를 보자, 소리치던 나는 절로 어깨가 움칫했다. 빌어먹을…….

“진심은 뭔 진심이냐고……!”

나는 고개를 훽 돌리며 마을 방향으로 서둘러 걸음을 돌렸다.

자꾸만 어제 일이 상기시키는 저놈을 무시하고 성큼 앞으로 걸어가자, 뒤따라오는 느긋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더욱 빠르게 앞서 걸어갔건만, 놈이 어느새 내 옆에서 따라 걷고 있었다. 아주 나란히 말이다.

눈치 없는 이놈의 기본 이동 속도가 꽤 빠르다는 것이 상기됐다.

“…….”

저놈과 말을 섞을 때마다 놈에게 휘말리고 있어 입을 꾹 다물고 앞만 보고 걸어갔다. 제법 걸어온 것 같은데도 여전히 초록 숲만 보였다.

‘어찌 된 게 마을이 코빼기도 안 보이냐……!’

얼른 마을에 도착해서 저놈과 파티를 끊어야 전날의 악몽이 잊히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중 빌어먹을 사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모험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전설의 무기를 감당할 만한 부하 녀석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빨간 책에 적혀 있던 변신 과정이 진실이라는 것도. 더해서 치욕적인 변신 과정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내 처지도…….

……그래. 이렇게 된 거 한 번 했는데 두 번은 못 하겠냐는 마음이 얼핏 들긴 했다.

눈 딱 감고 전설의 무기의 엄청난 변신일 뿐이라고 되뇌면 그 과정을 못 참을 것도 없었다.

……하지만 저놈은 아니다.

정말 솔직히 말하자면, 다비 놈의 훌륭한 얼굴 덕에 큰 거부감은 들지 않았다.

……그래. 딱 얼굴만 말이다.

저놈의 아래는 거북하기 그지없었다. 매번 저런 길쭉한 프X글스 통을 감당하는 건 몬스터보다 더 무서운 일이었다.

그러니까, 저 전사 놈과는 거래한 다음 마을까지만 같이 가고 빠이빠이다 이 말이다.

마음을 다잡고 나침반이 향하는 곳을 향해 성큼 걸어갈 때다.

“기복.”

옆에서 놈이 불현듯 나를 부르더니 어깨를 잡아 왔다.

“어, 읍-.”

심상치 않은 손아귀의 힘에 어벙하게 고개를 돌리자 놈의 다른 쪽 손이 얼굴로 확 다가왔다.

그 큰 손은 내 입을 곧장 틀어막았다. 갑작스러운 놈의 행동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이어서 놈이 나를 잡아끌었다.

갑자기 무슨 짓인가 싶은 그때, 놈의 딱딱한 몸이 내 등에 닿았다. 그러자 동굴 바닥에서 놈의 몸이 내 몸과 부딪쳤던 그 순간이 머리를 스쳤다.

나는 퍼뜩거리며 입을 막은 손을 떼어내려 했다.

“뭅웁-.”

“쉿.”

바둥거리는 내 귓가로 놈의 숨결 소리가 들려왔다. 영문을 알 수 없는 놈의 행동에 나는 다시 놓으라고 목소리를 내려 했다.

그 순간, 앞에 있는 수풀들이 심상치 않게 흔들리는 모습이 보였다. 몇 걸음 앞에 있는 나무 뒤, 수풀 말이다.

나는 과하게 흔들리는 풀을 보며 이상함을 느꼈다. 흡- 하고 숨을 들이켠 채 조용히 앞을 바라봤다. 수풀 속에는 크르릉, 짐승의 소리가 들려왔다.

‘짐승……?’

그러나 수풀 틈으로 튀어나오는 커다란 갈색 다리를 보고 앞에 있는 것이 짐승이 아니란 걸 깨달았다.

“…….”

몇 걸음 채 되지 않는 저 수풀 속에 몬스터가 있다는 것을 눈치챈 나는 눈을 이리저리 돌리며 도망칠 곳을 황급히 찾았다.

그러나 주변은 온통 풀떼기뿐이었고, 안전하게 몸을 숨길 만한 곳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앞에 있는 수풀이 조금 더 과격하게 흔들렸다. 나는 숨을 멈춘 채 그곳을 쳐다봤다. 이내 짧게 파팍 흔들리더니 박쥐를 닮은 커다란 얼굴이 수풀에서 튀어나왔다.

눈앞에 징그러운 몬스터 얼굴이 자세히 보였다. 누가 파놓은 것처럼 눈알이 까맣게 뚫려 있는 걸 보고 비명이 터져 나올 뻔했지만 다비 놈의 손에 가로막혔다.

“흐업-.”

몬스터가 억눌린 소리를 들었는지 고개를 기울였다. 동시에 수풀에서 팔이 쑤욱 튀어나왔다. 길쭉한 팔을 내 쪽으로 화악 휘둘러졌다.

나는 다짜고짜 날아오는 공격에 돌처럼 굳어 버렸다.

몬스터의 팔이 몸에 스치기 직전이다. 뒤에 있던 다비가 나를 붙들어 몸이 확 당겼다.

앞에 바람이 일 정도로 빠르게 몬스터의 팔이 지나갔다. 그 속도감에 넋을 놓았다가 이내 다비가 재빠르게 내 몸을 뒤로 물렸다는 걸 깨달았다.

고개를 돌리자 식겁한 나와 달리 다비 놈은 무감한 표정이었다. 언뜻 나른해 보이기도 했다.

……저놈은 몹 앞에서도 한결같이 여유로워 보인다. 그러나 어제와 달리 죽을 마음은 없어 보였다. 얼굴에 생기가 잔뜩 돌고 있었으니까.

그럼, 몹 앞에서도 왜 저렇게 태연한 걸까.

‘아. 저놈은 죽음을 개의치 않아 하는 미친놈이구나.’

정도로 대강 다비에 대한 결론을 내렸다.

지금은 저놈에 대한 탐구보다 앞에 있는 몬스터에 집중을 해야만 했다.

여섯 걸음 채 되지 않는 짧은 거리에 한 마리 정도면, 몬스터랑 싸워도 승산은 있었다.

그러나 뒤에 있는 다비 놈이 아무런 무기도 들고 있지 않았고, 나는 이놈을 지켜 주면서 싸워야 하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말이 달라진다. 지금 싸우면 둘 다 위험해지는 꼴이다. 저 몬스터의 얼굴 위에는 [Lv. 67]이라는 꽤 높은 숫자가 적혀 있었으니까.

‘빌어먹을…….’

아침이 되면 몬스터들이 밤보다는 잠잠해지긴 하지만,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이런 식으로 햇빛에 영향받지 않고 돌아다니는 몹이 있긴 했다.

다행히 아까부터 저 몹은 이렇게 가까이 있음에도, 우리를 발견하지 못하고 있었다. 눈 뚫린 모양새만 봐도 소리로 파악해 공격하는 몹으로 추정된다.

머릿속에 두 가지 선택지가 떠올랐다. 저 몹이 멀어지길 기다리거나, 혹은 몹이 방심한 사이에 도망을 치는 것이다.

둘 다 안전하게, 싸우지 않고 몹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다.

“…….”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뒤에 있는 다비를 부릅뜬 눈으로 쳐다봤다.

나도 상황 파악했으니, 주둥이를 막은 손을 놓으라는 눈빛을 보냈다.

다비 녀석이 내 눈빛을 읽었는지 순순히 손을 뗐다. 다시 앞을 보자 박쥐 몹의 커다란 귀가 일정하게 접혔다가 펴지고 있는 것이 보였다.

눈이 안 보이는 만큼 소리에 아주 민감하게 반응하는 모양이다.

나는 몹이 자리를 뜨길 기다리려고 했다. 그러나 이곳에서 우리 소리를 들어 버린 몹은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다음 방법으로 넘어가야 했다. 저 귀가 접혔을 때 타이밍 맞게 도망을 가는 방법 말이다.

“…….”

……문제는 이것을 다비 놈도 눈치를 챘는가다. 이걸 말로 전할 수도 없고…….

나는 뒤에 있는 다비 놈을 쳐다봤다. 그리고 조심스레 손을 들어 귓가에 가져다 댔다. 검지로 귀를 가리키며 눈을 깜빡깜빡했다.

‘귀가 접히는 거 눈치챘냐? 그러니까, 저 귀가 접히면 뒤로 물러나서 도망치는 거야. 오케이?’

내 눈짓, 손짓에도 놈은 가만히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당최 이 새끼가 알아먹은 건지 알 수 없는 눈빛이었다.

그래서 한 번 더 답답하다는 듯이 귀를 가리켰다. 그러자 놈이 팔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나는 뭘 전달하려는가 싶어 빤히 쳐다봤다.

놈의 길쭉한 손이 내 얼굴로 뻗어졌다. 그러더니 내 볼따구에 손을 댔다. 손등이 내 볼을 슥슥 문질렀다.

사뭇 진지하게 보고 있던 나는, 잠시 뇌 정지가 왔다.

굳은 눈으로 뒤늦게 놈의 얼굴을 쳐다보자 다비 놈의 시원하게 뻗어 있는 입술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실컷 집중하고 있는데 이놈은 입술로 ‘귀여워.’라는 개 같은 단어를 만들고 있었다.

“씹- 윽!”

소름 끼치는 입 모양이 읽히자 나도 모르게 욕이 튀어나왔다.

그 순간, 위험을 직감하고 등 줄기가 싸늘해져 왔다.

섬찟한 직감을 느끼던 차에 몸이 한 번 더 뒤로 화악 당겨졌다. 부웅- 빠르게 갈색 무언가가 앞으로 지나갔다. 바람이 크게 일어 회색 머리카락에 살짝 스쳤다. 정신없는 그 시야 틈으로 거대한 팔을 본 듯하다.

뒤늦게 내가 있는 방향으로 몬스터가 팔을 휘둘렀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다비 놈이 기가 막힌 속도로 피해 나를 안고 바닥을 구르고 있단 사실도 깨달았다.

“…….”

순식간에 시야가 이리저리 뒤바뀌었다. 하필이면 경사진 바닥에다가 돌까지 박혀 있어 구를 때마다 등이 아렸다.

딱딱한 흙바닥에 등이 퍽 부딪히며 몸이 나동그라졌다. 짧게 신음이 터져 나오려는 걸 겨우 참았다. 대신 얼굴이 오만상 찌푸려졌다.

아릿함을 삼키고, 고개를 돌리자 멀지 않은 곳에 몹이 보였다. 풀숲에 몸을 가리고 있던 몹은 다비 놈과 내가 있던 그 자리에 팔을 휘둘러 대고 있었다.

나는 흠칫하며 몬스터를 주시했다. 사정없이 휘두르고 있는 팔 때문에 주변에 있는 나무들이 쓰러지며 풀잎들이 흩날리고 있었다.

마늘 다지듯이 마구 내려찍는 걸로 보아 나를 쳐 다지려고 했나 보다. 다비가 경사진 바닥으로 굴러줘서 천만다행이었다.

그러나 멀지 않은 거리에 있는 이곳도 안전하지 않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다시 시선을 내려 흙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내 몸뚱어리를 쳐다봤다. 그리고 시선을 올렸다. 내 위에 올라와 있는 다비 놈이 보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골똘히 하는 듯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놈의 쭉 뻗은 눈을 마주하다 시선을 돌려 고개를 살짝 까딱거렸다.

“…….”

나와. 팔자 좋게 누워 있을 때가 아니잖아. 이번에야말로 도망가야 해. 알겠-.

열심히 무언의 눈짓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놈의 눈꼬리가 나른하게 휘어졌다. 그 눈매 속에 붉은 눈동자가 즐거움을 담고 있었다.

“…….”

불길한 예감이 올라옴과 동시에 몸에 닭살이 오소소 돋았다.

나는 놈의 가슴팍을 밀치려고 팔을 들어 올렸다.

‘……뭐 하냐?’

나는 눈을 팍 찡그리며 놈을 쳐다봤다. 놈이 움직이려는 내 팔목을 잡았기 때문이다.

놓으라는 식으로 눈을 부라리자 놈의 눈이 옆으로 향했다.

나는 놈이 눈짓하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고, 거기에는 몬스터가 주변을 여전히 휘젓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놈의 시선이 다시 나를 향했다.

알고 있다고. 그러니까 도망가야 하니까 비키라고.

“…….”

내 뜻을 알아듣지 못하는 다비에게 나는 ‘알아.’라며 최대한 간결한 입 모양을 보였다. 그러자 앞에 있는 놈이 고개를 끄덕이며 상체를 들었다.

다행히 놈과 나는 같은 뜻을 가지고 있나 보-.

“……!!!”

이, 미친 새끼가-! 뭐 하는 거야?! 나, 나와!

나는 놈의 아래에 깔려 몸을 바둥바둥 움직였다. 그러자 놈이 내 팔을 붙든 채로 다시 몬스터에게 시선을 줬다.

‘시발, 안다고! 근데 지금 네 새끼가 내 바지를 왜 내리는 건데?!’

나는 욕이 튀어나오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은 채 목에 핏대를 세우며 놈에게 무언의 항의를 아주 강력하게 했다.

그러자 놈이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했다. 마치, 왜 그래? 알겠다며? 라는 순수한 의문을 담은 표정이었다.

‘썅, 네놈은 대체 뭘 어떻게 알아들은 건-!’까지 생각했을 때다.

문득 저 몬스터랑 싸우자는 뜻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무기가 없는 이놈이 나를 무기로 사용해서 말이다.

“…….”

잠시 말문이 막혀 놈을 올려다봤다. 그러자 놈은 진지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보니 제법 전투를 앞둔 전사처럼 비장해 보이기도 했다.

……아니, 일단 표정은 그렇게 보이고 있었다. 단지, 눈동자가 왜 이렇게 반짝거리냐는 의문이 살짝 들긴 했다.

나는 놈의 표정을 보다 다시 고개를 돌렸다.

주변을 박살 내던 몬스터가 조금씩 사방으로 움직이면서 팔을 휘둘렀다. 나름의 지성까지 발휘하는 모습이다.

그리고…… 저렇게 휘두르는 기세를 보니 이쪽으로도 올 것 같은 불길함이 덜컥 들었다.

나는 입술을 꾹 깨문 채 다시 앞을 바라봤다. 커다란 다비 놈은 내 위에서 비킬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 자식은 몬스터를 처치하는 방법만 생각하고 있나 보다. 도망을 친다는 안전한 선택지를 전혀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다.

“…….”

손바닥에 식은땀이 흥건해져 왔다.

말을 할 수 있다면 이놈에게 귀가 접힐 때 달아나자며 저 몬스터를 피하는 방법을 알려줄 터였다. 그러나 짧은 입 모양 이상은 알아듣질 못하니,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망할, 네놈은 그게 정말 최선이냐고!’

악에 받친 사람처럼 입술을 꽉 깨물며 놈을 쳐다봤다. 놈은 눈을 깜빡거렸다. 아주 순진무구하게 말이다.

그 순간 주변에 있는 나무 하나가 반대편으로 쿵 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등으로부터 전해지는 커다란 진동에 나는 눈을 감았다.

‘……그래. 시발. 하자. 이 새끼야. 하자고.’

체념하는 마음으로 몸에 힘을 풀었다. 그러자 팔을 붙들고 있던 놈의 손이 기가 막히게 알아먹고 떨어져 나갔다. 이어서 그 손은 살짝 내려간 바지를 지체 없이 휙 하고 내렸다.

나는 감은 눈을 더욱 질끈 감았다.

……다시 마인드 컨트롤이 필요한 순간이다. 이건 그저, 멋들어진 전설의 무기로 변하는 과정일 뿐이다. 전혀, 이상한 게 아니다. 아주 정상적이고 경이로운 의식이다. 나의 찬란한 미래가 보장된 직업 스킬의 발현 과정이며 이 짓거리도 익숙해지면 별것 아닐-.

“…….”

커다란 손이 허벅지를 잡아 벌리는 감각에 나의 의지가 연기처럼 흩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다시금 마음을 붙잡으려 노력했다.

어, 엄청난 스킬을 쓰기 전에는 대개는 거대한 대가가 따르는 법이잖아. 이, 이 정도 대가는 벼, 별것 아니-.

“끕-.”

입구에 툭 닿는 뜨거운 살갗에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당장이라도 욕설이 튀어나올 것 같아 이를 악물었다.

뭉툭한 게 입구를 찾듯 비벼지더니 끝이 살짝 안으로 들어왔다. 그 거대한 게 지체하지 않고 쑤욱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물었던 입구가 쫙 벌어지는 고통에 감았던 눈이 절로 번뜩 떠졌다. 그러자 역광을 받아 어둡게 그늘진 다비 놈의 얼굴이 보였다.

눈가를 살짝 찌푸리고 있는 다비 놈의 표정이 정면에서 자세히 보이자 혀를 깨물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누구와 무슨 행위를 하고 있는지, 너무나도 잘 인지가 되는 자세였다.

‘망할, 별거 아니긴-! 아파! 끅, 아프다고!’

정욕에 일렁거리는 붉은 눈동자를 마주한 나는 순간 눈물이 왈칵 올라왔다. 항의 어린 내 눈을 마주한 놈이 입술을 살짝 벌리더니 뜨거운 숨을 내쉬었다.

숨결이 얼굴에 닿음과 동시에 파고든 살덩이가 안쪽으로 더 찔러 넣어졌다.

콱, 몸이 두 쪼가리로 갈라지는 고통에 비명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눈물로 인해 시야가 뿌옇게 변했다. 차라리 앞에 누가 있는지 안 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나는 눈을 다시 질끈 감았다. 그러자 눈가에 차가운 손이 닿았다. 얼굴에 흐르는 눈물을 쓸듯이 닦더니 힘을 풀라는 듯 볼을 톡톡 두드렸다.

“…….”

나는 그 뭣같이 다정한 손길에 이를 깨물고 다시 눈을 떴다.

놈이 어제처럼 막무가내로 밀어 넣지 않고 적응을 하란 듯이 기다려 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 뭣 같은 배려에 나는 자괴감이 일었다.

‘이건 진짜 섹스를 하는 것 같잖아……!’

놈에게 제발 그냥 하라는 식의 뜻을 담아 눈을 크게 떴다. 그러자 눈에 고여 있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놈의 얼굴이 설핏 굳었다. 갑자기 안에 들어 있던 것이 더욱 커지는 느낌이 들었다. 배 안은 더욱 더부룩해지고 입구는 또 화끈거려왔다.

놈이 상체를 내 위로 덮듯이 숙였다. 안 그래도 빌어먹을 프X글스 때문에 뒤질 것 같은데, 놈의 무게로 인해 더 숨쉬기가 버거워졌다. 하지만 나는 놈을 밀어내지 못했다. 놈의 얼굴을 마주 보고 하는 건 진짜 자괴감이 들었으니까…….

‘기껏 다 치료됐는데-.’

또 아래가 찢어지게 생겼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나는 속으로 욕을 되뇌었다.

그러던 중, 놈의 뜨거운 숨이 목덜미에 내려앉았다. 동시에 깊은 곳으로 커다란 성기가 콱하고 박아 넣어졌다.

“읍-!”

순간적으로 신음이 터져 나올 뻔했다. 그러나 삶에 대한 강렬한 열망으로 본능적으로 입술을 꾹 깨물며 참아냈다.

겨우 숨을 내쉴 즘, 즈즈즛- 내벽이 뒤로 딸려 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다 다시 안쪽 깊은 곳을 꼬챙이가 푸욱 하고 찔러 넣었다.

입에서 소리가 나올 것 같아 황급히 손을 들어 입을 틀어막았다.

“흡-.”

방금 내가 소리를 낼 뻔했는데도 앞에 있는 놈은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안에 있던 꼬챙이가 또다시 쭈욱 뒤로 물러났다. 그 간지러운 느낌에 시야가 뿌옇게 변할 즈음 한 번 더 안이 콱 하고 찔러 넣어졌다. 허리가 파르르 떨렸고 배에 힘이 들어갔다.

놈의 따뜻한 숨결이 한숨처럼 피부에 닿아왔다. 어른거리는 시야로 붉은빛의 머리카락이 움직였다. 그러더니 목덜미에 물컹한 게 닿았다.

“…….”

나는 숨을 들이켜며 눈을 내렸다. 목덜미에는 붉은색 뒤통수가 보였고, 그 아래에는 놈의 잘빠진 얼굴이 보였다. 그가 입술 사이로 붉은 혀를 빼며 목덜미를 할짝거렸다.

‘……이, 이건 대체 변신이랑 무슨 상관인데!’

농염하게 혀를 움직이던 그가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고서 살갗을 쪽쪽 빨기 시작했다. 습한 자극에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몸이 점점 더워져 달뜬 숨이 뱉어졌다. 질척한 소리가 귓가에 선명하게 박혔다.

“으……흐-.”

나는 억눌린 숨을 뱉으며, 목덜미에 닿는 입술을 피하려고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목덜미를 끈덕지게 빨아올리던 축축한 것이 떨어져 나갔다. 동시에 내 위에 있던 놈이 상체를 들어 올렸다.

시선을 들자 나를 내려다보는 그의 얼굴이 보였다. 빚은 듯한 이목구비에 그늘이 져 위압감이 느껴졌다. 어쩐지 포식자에게 깔린 한 마리의 먹이가 된 것 같은 기분이다.

피하듯 시선을 내리다 놈의 입술이 눈에 들어왔다. 그의 입술이 타액으로 젖어 번들거리고 있었다.

외면하듯 눈을 돌리려는 그때, 놈이 붉은 혀가 입술 틈에서 나왔다. 곧이어 놈이 스스로의 아랫입술을 느릿하게 핥아 올렸다. 시선을 훽 들어 올리자 그의 눈꼬리가 살짝 접혀 있는 게 보였다.

……저 새끼 방금, 일부러 속 뒤집으려고 한 행동 같은데.

나는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놈을 흰 눈으로 노려봤다.

‘……변신이랑 상관없는 짓 좀 하지 말라고……!’

내 뜻을 못 알아먹었는지 놈이 즐거운 듯이 미소 지었다.

썅…… 저놈 얼굴만 아니었어도 이 행위는 그저 좆같았을 게 분명하다.

“…….”

무언의 욕을 퍼붓던 중, 주변에 있는 나무 하나가 또 쿵 하고 쓰러졌다.

바닥으로 전해지는 울림에 몸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자 위에서 억눌린 숨이 작게 뱉어졌다.

나는 멈칫했다. 잠깐 몬스터에 정신 팔려 내가 지금 저놈과 결합되어 있단 걸 망각하고 있었다. 만병통치약이라는 게 지금도 효과를 내고 있는 건지, 놈이 기다려 주며 삽입을 해서인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놈과의 결합은 어제보다는 덜 고통스러웠기 때문이다.

내가 굳어 있는 틈에 놈이 내 허벅지를 큼지막한 손으로 잡았다. 조금 더 다리가 벌려졌다.

자리를 잡는 놈의 움직임에 나는 곧 이어질 행위를 예감했다. 긴장감에 주먹을 꽉 쥐는 그 순간, 즈즈즛- 안에 들어 있는 묵직한 것이 뒤로 물러났다. 이어서 깊숙한 곳을 향해 놈이 허리를 쳐올렸다.

살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결합 부분에서 작게 철퍽 하고 들려왔다.

놈이 다시 뒤로 물리더니 안쪽을 향해 콱 찔러 넣었다. 내벽 어딘가가 자극되자 몸이 경련하듯 떨렸다.

“읍-.”

놈이 허리를 쳐올릴 때마다 등도 흙바닥에 부딪혀 아릿했다. 그러나 놈은 쉬지 않고 허리를 쳐올리기 시작했다.

“흡, 흡, 흐, 흐읍-.”

점점 빨라지는 추삽질에 내려갔던 손을 다시 올려 입을 꽉 막았다.

입구에서 두툼하고 뜨거운 게 길게 들어갔다 나올 때마다 허리가 움직여졌다. 내 반응을 눈치챈 놈은 집중적으로 그곳을 쳐대기 시작했고 안이 뜨겁고 간질간질한 느낌에 눈앞이 서서히 흐릿해졌다.

등이 부딪히는 고통이 무뎌지고 있었다. 찌릿한 감각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아래가 녹을 것같이 뜨거워 입에서 달뜬 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아…….”

흐릿한 정신 틈으로 머리 위에서 탁해진 신음이 들려왔다. 내부를 꽉 채우는 기둥이 안쪽에서 비비듯 뒤로 물러나더니 다시 안을 퍽, 퍽 박아댔다. 깊은 곳까지 찌르는 추삽질로 인해 발기된 아랫도리가 아파져 왔다.

놈의 복부 부근에 성기가 살짝살짝 닿아, 감질맛 나는 자극에 미칠 것 같았다. 허리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단단한 몸에 아랫도리를 조금씩 문질렀다.

“아…… 윽, 윽, 아!”

놈의 강렬한 추삽질에 맞춰 허리를 움직였다. 몸을 태울 듯한 쾌감에 신음이 터져 나왔다.

아래가 빠듯해져 눈앞이 아찔해질 즈음, 결합해 있는 커다란 것이 깊은 곳까지 콱 찔러 넣어졌다. 거대한 것이 배 안에서 꿈틀거렸다. 깊숙한 곳에서 액이 퍼지는 느낌이 들었다.

동시에 바닥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쿵쿵, 울리는 소리가 온몸으로 느껴졌다.

“흣-.”

그 순간, 몸이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핑글핑글 도는 시야가 어지러웠다. 이 메스껍고 강렬한 느낌의 정체를 어제도 느꼈던지라, 내가 지금 무기로 변신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눈치챘다.

‘하아…… 빌어먹을.’

몸이 번쩍 들리는 감각에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어제처럼 오감에 집중을 했다. 그러자 숲의 광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방금 있었던 자리가 커다랗게 파여 있는 게 보였다.

-어, 어라……?

그리고 칼로 변한 나를 단단히 쥐고 있는 다비 놈도 보였다. 놈은 방금 합체를 한 자리에서 몇 걸음 떨어진 나무 뒤편에 서 있었다.

그 짧은 새에 이놈은 왜 여기 있고, 저기는 왜 저렇게 파인 걸까.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된 나는 어리둥절하게 눈을 끔뻑였다.

-뭐, 뭐냐?

“음. 관음하러 왔나 봐.”

-미, 미친 소리 좀 하지- 으악!

다비 놈이 미친 소리를 태연하게 뱉음과 동시에 몬스터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소리에 예민한 몬스터 앞에서 다비 놈이 목소리를 뱉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몬스터가 곧장 이쪽을 향해 커다란 팔을 휘둘렀다. 그러자 다비 놈이 내 몸통인 손잡이를 단단히 쥐고 빠른 속도로 뒤로 물러났다.

아직 무기에 적응이 안 된 나는 놀이기구를 탄 듯이 시야가 휙휙 바뀌자 어지러움을 느꼈다.

-흐으.

다비 놈이 움직임을 멈췄고 나는 겨우 시야를 되찾았다.

방금 다비 놈이 서 있던 곳에는 커다란 구덩이가 또 파여 있는 게 보였다.

-허.

그제야 나는 절정의 순간에 터져 나온 소리로 인해 몬스터가 달려왔고, 방금 전처럼 다비 놈이 기가 막히게 공격을 피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놈을 얼떨떨하게 쳐다볼 즈음, 한 번 더 몬스터가 팔을 휘둘렀다. 제법 지능을 쓰는 몬스터라 멀리 가지 못했다는 것을 아는 듯하다.

몬스터가 팔을 휘둘러 대며 가까이 다가왔고, 다비 놈은 거대한 몬스터의 팔을 빠르게 피했다.

놈의 말도 안 되는 이동 속도, 회피력에 나는 얼이 빠졌다.

‘이, 이놈 능력치가 대체 어떻게 된 거냐…….’

넋 놓고 놈의 움직임을 보다 보니, 놈이 공격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안 싸우냐?

“휘두르면 기복이가 또 기절할 것 같은데.”

-그, 그럼? 도망가게? 그럼 변신한 의미가 없잖아……!

“마력을 개방해.”

-마력?

“응. 억제된 거 같은데. 이 상태로는 스킬도 못 써.”

-어제는 그럼 스킬을 안 쓴 거냐……?

“휘두르니 죽었다니까.”

-허, 그 많은 몹이 휘두르는 걸로 죽었다고? 네놈은 대체-.

정체가 뭐야? 라며 뜨악스럽게 물어볼 즘, 쾅! 거대한 소리가 났다. 동시에 앞에 있는 바위가 두 쪽으로 쩌저적 갈라졌다.

몬스터가 다비 놈의 목소리를 듣고, 이쪽을 향해 커다란 다리를 쾅 내려찍은 것이다.

하지만 기가 막힌 회피력을 가진 다비 놈이 이번에도 피했다.

……이 자식 사실 보기보다 엄청난 놈인 것 같다.

‘이 정도 이속이면 굳이 변신하지 않아도 충분히 도망을 갔어도 됐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치솟을 즘, 다비가 재촉하듯 말을 내뱉었다.

“얼른.”

-아, 알겠어.

일단, 다급한 놈의 말에 나도 모르게 알았다고 말이 튀어나왔다.

놈 말대로 어딘가 억눌러져 있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계속 메스껍고 불쾌한 기분이 드는 건가 싶다.

그런데…… 어떻게 마력을 개방하는지 모르겠다.

빨간 책을 끝까지 안 읽고 놔두고 온 게 화근이었다.

계속 시간을 질질 끌 수는 없었다. 다비의 체력에 한계가 올 것 같아 불안했다.

조마조마하게 머리를 쥐어 짜내니, 변신했을 때 시야를 보기 위해 감각에 집중했던 게 떠올랐다.

바깥으로 집중을 하니 시야가 보였고, 소리에 집중을 하니 소리가 들렸다. 하나씩 집중하면 감각이 살아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비가 가벼운 몸놀림으로 앞에 있는 몬스터의 공격을 피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 장면을 마지막으로 시야를 차단했다. 그리고 모든 감각을 몸 안의 마력에 집중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휘몰아치는 기운이 점점 잠잠해지기 시작했다.

‘이 방법이 맞나 보다.’

속에 있는 마력이 깊고 진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기운은 서서히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연결된 놈의 마력이 내 몸 안으로 들어왔다.

더 이상 메스꺼움과 울렁거림도 느껴지지 않았다. 충돌하던 마력들이 조금씩 조화를 이루는 듯하다. 혈관처럼 자연스레 마력이 흐르는 느낌이 들었다.

다시 시야에 집중하니, 아까보다 오감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또렷해진 눈앞에는 다비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가만히 나를 보던 놈은 이내 경탄의 투로 말을 했다.

“……하, 엄청나잖아.”

놈이 한층 더 반짝이는 눈으로 부담스럽게 내려보던 차다.

-어, 야, 야-!

다비의 목소리에 몬스터가 쿵쿵쿵, 걸어오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다가온 몬스터가 정확히 다비의 머리 위로 주먹을 치켜들었다.

나는 머리 위로 지는 커다란 그림자에 숨을 들이켰다. 피하라고 말을 뱉을 틈도 없이 주먹이 내려오고 있었다. 다비가 뒤늦게 고개를 들었고 그 순간 주먹이 바닥으로 내리꽂혔다.

아니, 내리꽂혀 흔적도 없이 땅에 묻히는 줄 알았다.

-……!

다비의 머리 위에 바위만 한 주먹이 닿으려는 찰나에 놈이 칼날을 땅으로 내리꽂았다. 몸속에 있는 마력이 꿀렁거렸고, 땅으로 무언가가 증폭되는 느낌을 받았다.

느낌을 받은 그 순간, 몬스터의 머리 중앙에서 피 분수가 터져 나오더니 피부가 팽창돼 갈가리 사방으로 찢겨 나갔다.

내장이 바닥으로 투두둑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주변에 있는 나무와 바위들이 몬스터의 최후처럼 산산조각이 나 흩뿌려지는 광경이 펼쳐졌다.

울창한 숲의 주변도 탁 트여, 멀지 않은 곳에 피 폭탄처럼 터져 있는 또 다른 몬스터들의 시체도 보였다.

짧은 순간에 공격을 퍼붓던 몬스터가 폭발하고 밀림이 황무지로 바뀐 순간이다.

그 광경에 멍청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어…….

……땅을 쳤는데 왜 앞에 있는 몬스터가 죽냐?

바보처럼 앞만 멀거니 보고 있던 나는 문득 갑자기 뇌가 흔들리는 느낌이 들었다.

툭- 어딘가에 부딪혔다.

눈앞에 흙바닥이 보였다. 피가 흩뿌려진 황폐한 흙바닥을 끔뻑끔뻑 바라봤다.

잠시 뒤, 나는 엄청난 스킬을 쓴 장본인이 나를 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는 걸 깨달았다.

-……이 새끼야……. 다 사용했다 이거냐?! 왜 집어 던-.

‘전설의 무기를 이따위로 취급하는 게 어딨냐고!’라며 나를 집어 던져 버리는 놈에게 따지려고 했다. 하지만 놈을 보자 말이 나오지 않았다.

……다비 놈이 땅바닥에 쓰러져 있었으니까.

-어, 어이.

나는 바닥에 나뒹굴어진 채로 ‘어이, 이봐. 다비. 다비.’ 이름을 몇 번이고 불러보았다. 하지만 놈은 말이 없었다. 심지어 어떠한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

-아, 아니지……?

나는 고요히 눈을 감고 있는 놈의 모습에 심장이 덜컹거렸다.

놈이 나를 바닥에 내리꽂아 스킬을 쓸 때, 몸 안에서 어마어마한 게 증폭되는 느낌을 받았다. 그 커다란 마나의 힘을 느낀 나는 무서운 마음이 들었다.

놈을 흔들어 깨워야 한다. 그러나 이 빌어먹을 고철 덩어리는 혼자서 움직이질 못했다.

무엇보다 내가 변신을 푸는 방법을 모른다는 점이 나를 막막하게 만들었다.

-어, 어떡하지.

나는 쓰러진 놈의 팔 언저리에서 주야장천 놈만 애타게 불렀다.

다비, 다비. 제발 죽지 말라고. 이런 대가가 있는 건 들어본 적이 없다고.

그러다 마지막에는 거의 울 듯이 소리친 것 같다.

-제발, 일어나. 일어나라고 ……이 개 같은 전설의 무기 새끼야! 빌어먹을…… 끄윽, 변신 풀어! 풀어 달라고!

그렇게 고래고래 소리치는데, 갑자기 시야가 멀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누가 영혼의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겼다가 어디 집어넣은 것같이 어지러웠다.

핑핑 도는 시야를 되찾았을 때는 나는 다시 사람으로 돌아와 있었다.

열 손가락과 두꺼운 가죽옷을 입은 내 마른 몸을 보는 것도 잠시, 쓰러진 놈 앞으로 후다닥 달려가 무릎을 꿇고 앉았다.

“제발, 제발…….”

나는 울 것 같은 기분으로 쓰러진 다비의 심장께에 귀를 가져다 댔다.

제발, 살아 있어라, 제발, 살아 있어라.

다행히도 정상적으로 뛰고 있는 심장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너무 조용히 눈을 감고 있는 다비의 모습에 불안감이 지워지질 않았다. 코에 손을 가져다 대고 온통 놈의 몸에 귀를 기울여 생존을 몇 차례 확인했다. 새근새근 숨을 잘 쉬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그제야 안도했다.

“하아. 다행이다…….”

나는 한숨을 돌리다 내려간 바지를 보고 황급히 끌어 올렸다.

망할, 어쩐지 아래가 휑한 느낌이 들더라니…….

진이 쭉 빠지는 느낌이 들어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

허허벌판 같은 곳에 앉아 있던 나는 문득, 어떻게 무기에서 돌아왔는지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나 내가 한 거라곤 전설의 무기를 욕한 게 다였다.

“……모르겠다.”

다음에 또 욕하면 되겠지 뭐. 어쨌든 스스로 변신을 풀 수 있어서 천만다행이었다.

그렇게 한시름 놓던 나는 황폐해진 주변의 핏자국을 쳐다봤다.

몬스터들 시체로 보아, 이곳은 꽤나 많은 몬스터가 출몰하는 지역으로 추정된다. 해가 지면 몬스터들이 다시 나타날 듯하다.

고개를 들자 탁 트인 하늘은 점점 푸르스름해지고 있는 게 보였다. 아무래도 이곳에서 다비가 깰 때까지 무작정 기다릴 수는 없겠다.

나는 흙이 묻은 몸을 툭툭 털고 일어나 바닥에 기절해 있는 다비 놈을 내려다봤다.

“……내가 이 덩치를 업을 수 있을까.”

얇은 내 몸뚱어리와 달리 이놈은 전사답게 꽤 다부진 몸을 소유했을뿐더러, 머리 하나 차이가 날 정도로 키가 큰 놈이었다.

……지도상 거리를 믿을 순 없지만, 이만큼 걸어왔으면 거의 다 왔지 않을까에 희망을 걸어야 한다.

지금은 어떻게 해서든 놈을 들춰 매고 마을로 질질 끌고 가야만 하니까.

나는 자니스 마을 방향을 찾기 위해 내 봇짐을 던졌던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움푹 파인 구덩이만 있을 뿐 아무것도 없었다.

“…….”

다만, 봇짐과 상당히 흡사한 재질의 천 조각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긴 했다.

아까 몬스터가 마구 휘두르고 내려친 공격으로 인해 봇짐이 개박살 난 걸로 추정된다.

“썅…… 뭐 하나 쉬운 게 없냐고.”

나는 한탄하듯 말을 뱉으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아까보다 해가 기울어 있었다.

……꾸물거릴 시간이 없었다. 일단은 출발해야 한다.

아무래도 아까 나침반과 지도를 봤던 기억에 의지해서 가야 할 듯하다.

나 역시 놈과의 ……합체와 마력의 조화에 집중을 하느라 컨디션이 그리 좋지 않았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도착하고 쓰러지든가 해야지.”

몬스터가 득실대는 곳에서 기절한 놈이랑 우두커니 있을 순 없는 일이니까.

나는 허리를 굽혀 쓰러진 놈의 팔을 내 어깨에 걸쳤다. 그리고 천천히 놈의 몸을 부축하며 일으켰다.

“존나 무겁네…….”

축 늘어진 놈이 자꾸 바닥으로 가라앉으려 했다. 단단히 놈의 팔을 어깨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놈의 튼실한 허리를 손으로 붙들고 천천히 앞으로 한 발을 내디뎠다.

걸음걸음마다 놈의 딴딴한 몸과 부딪쳤다.

……근육만 빼더라도 훨씬 가벼울 텐데, 빌어먹을.

겉보기에 슬림해 보이는 놈은 몸 전체가 온통 근육 덩어리였다. 그 때문에 놈의 몸이 내 몸과 부딪쳐서 점점 아려왔다.

망할 놈의 근육에 대해 씹어 주며, 나는 힘겹게 마을이 있는 방향으로 걸어갔다.

* * *

과장 보태서 내 몸의 2배 정도 되는 놈을, 그것도 기절한 놈을 부축해서 걷다가 요단강 건너는 줄 알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땀으로 흠뻑 젖었다. 그만큼 죽을 맛이었다.

거대한 곰에게 걸음마다 압착당하는 것 같았다. 살려 달라는 말도 안 나올 만큼 숨을 뱉어내느라 바빴다.

중간에는 놈을 버릴까, 라는 생존 욕구가 치솟았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놈 살리려고 지랄발광을 한 게 아까워서라도 버리고 갈 수 없었다. 무엇보다 놈도 기절한 나를 안 버리기도 했고……. 놈과 파티가 맺어져 있기도 했으니 데려가야만 했다.

무조건 오늘 안으로 자니스에 도착해야 한다는 집념 하나로 악착같이 걸었다.

울창한 나무 사이로 우뚝 솟은 건물 하나를 발견한 뒤부터, 주술이라도 외우듯 ‘다 왔다, 다 왔다, 다 왔다.’ 미친놈처럼 중얼대며 걸었다.

그렇게 정신 나갈 정도로 걸은 덕에, 해가 지기 직전에 자니스에 도착할 수 있었다. 더해서 마을 입구를 지키고 있는 용병의 도움으로 나는 거대한 몸뚱어리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그러나 내 의지와 상관없이 사시나무 떨리듯 벌벌거리는 다리를 느꼈다. 땀을 쫙 빼 현기증마저 일고 있었다.

나는 다 죽어가는 얼굴로 용병에게 말했다.

‘최, 최대한 가까운 숙소 좀 알려주세요.’

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숙소로 도착한 나는 봇짐이 모두 망가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절박한 마음으로 다비 놈의 바지를 뒤졌다.

그의 품속에는 상당한 골드가 있었고, 모험가들에게 덤터기를 씌우는 비싼 숙소 값을 충분히 낼 수 있었다.

수고한 용병이 나를 멀뚱히 쳐다보고 있자 놈의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팁을 쥐여주었다.

그렇게 첫날과 둘째 날은 거의 시체처럼 잠만 자며 체력 회복을 했다.

셋째 날부터는 개 같은 근육통만 빼면 몸이 나쁘지 않았다. 그래서 아침에 숙소 밖에 나와서 마을을 둘러보았다.

자니스의 마을의 분위기는, 날것의 분위기인 초보자 마을과 달리 랜드 마크처럼 커다란 성당을 중심으로 예술적인 집들이 지어져 있었다.

마치 영국 빅토리아 시대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마을 중앙에 깔린 철길, 천사 조각상이 있는 분수대, 매시간 댕댕 울리는 성당 꼭대기의 종, 퍼드득 날아다니는 하얀 새들, 전체적으로 평화롭고 잔잔한 마을이었다.

‘……하긴. 여기는 마법사의 마을이니까.’

통나무로 지어진 대부분의 마을들에 비해 발전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더해서 마법사 마을은 내가 찾던 마을에 적합하기도 했다.

초보자 마을과 가까워서 오긴 했다만, 마력이 담긴 무기를 사기에는 이곳이 딱이라 생각한다.

직업과 무기가 일치하지 않아 횟수 제한이 있을 테지만, 일회용이든 뭐든 모험을 하려면 원거리 능력이 있는 무기를 사야만 했다.

나도 꽤 레벨이 높다. 장비만 어느 정도 맞추면 웬만한 몬스터와 당당히 맞서 싸울 정도는 된다.

‘빌어먹을…….’

하지만 나는 단 하나의 장비도 사지 못한 채 손가락만 쪽쪽 빨다가 다시 숙소로 돌아와야 했다.

왜냐……봇짐이 개박살 나서 돈을 모두 잃었기 때문이다.

나는 다비 놈에게 돈을 빌려야겠다고 생각하며 방 안으로 다시 들어왔다. 그러나 놈은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어라?’

이때부터 나는 이상함을 느꼈다.

새벽부터 일찍 나간 터라 나갈 때는 단순히 자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해가 지고 있는 지금까지 잘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해서 놈은 첫날에 용병이 눕혀둔 자세에서 변화가 없었다.

‘다비, 야, 야, 임마, 일어나 봐.’

나는 놈을 흔들어 봤지만, 첫날과 같이 숨만 쉬고 있을 뿐 미동 없이 잠들어 있었다.

섬뜩한 기분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분명…… 숨은 쉬고 있다. 죽은 건 아니다. 그럼 왜 이러는 거지.

혼란스러운 하루를 보내고, 다음 날이 되었다.

다비는 이날도 미동이 없었다.

나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무기를 쓴 이후에 놈이 기절했으니, 내 책임인 것 같았다.

‘…….’

나는 문득 기절한 놈의 머리 위를 쳐다봤다. 그리고 내 머리 위를 쳐다봤다.

보라색 이름표가 내 속도 모르고 밝게 빛나고 있었다.

……놈이 이 상태로 깨지 않으면 파티는 영영 못 끊게 된다는 것이 상기됐다.

뭐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곧장 마을로 뛰쳐나가 이곳에 있는 마법사를 만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었다.

마법사는 마나에 대해 잘 알고, 지력도 뛰어날뿐더러…… 무엇보다 이곳은 힐러가 있는 마을로 유명했으니까 다비를 치료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내 질문에 표정을 굳히며 함부로 힐러를 만날 수 없다는 말만 했다.

그럼에도 나는 포기할 수 없었다. 나는 마법사를 꼭 만나야만 했다…….

‘이건 내 인생이 달린 일이라고……!’

주변에 있는 온갖 상인들에게 물어보고 대차게 까이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다비가 깨어나지 못한 지 일주일이 될 때다.

어느 상인이 질린 얼굴로 정보를 알려주었다. 상인의 말로는 성당에서 힐러를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내일 마을 사람들이 미사를 드리러 간다는 정보도 함께 알려주었다.

나는 화색을 띠며 냅다 감사하다며 머리 숙여 인사를 했다.

그렇게 한 줄기의 희망을 갖고 하루가 지났다.

* * *

꼴깍-

침 넘어가는 소리가 크게 들려 눈치 보듯 옆 사람을 쳐다봤다. 옆 사람은 나를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경건한 얼굴로 앞을 보고 있었다.

“…….”

화장실 가는 것도 조심스러울 정도로 아주 고요한 분위기가 감도는 커다란 성당이다.

사람들 틈에 섞여, 성당 안으로 어찌어찌 들어왔지만, 분위기에 압도돼 마법사 찾기는커녕 옴짝달싹 못 하는 중이다.

제단 앞에 서 있는 신부님이 기도를 드린다는 말에 주변 눈치를 살피다 고개를 숙였다.

‘……다비 놈이 깨어나게 해 주십쇼.’

그렇게 속으로 되뇌다 문득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걸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감은 눈을 다시 떴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사람들 머리 위로 눈동자를 올렸다.

[무기 상인], [방어구 상인], [물약 상인] 그리고 제단 앞에 서 있는 [신부님]이라는 표식을 멍하니 쳐다봤다.

여기가 게임 속 세상이라는 사실이 상기되는 순간이다.

내게는 눈 앞에 펼쳐진 현실이긴 했지만…… 아무튼 이 세계는 스킬도 쓸 수 있고 물약으로 체력을 회복할 수도 있는 곳이었다.

기도고 뭐고 스스로의 힘으로 마법사나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도 아무런 진전 없이 돌아갈 순 없으니까.

‘어떻게든 만나야 한다고…….’

벌써 일주일째 깨지 않고 있었다. 미동 없는 다비 놈을 보니, 날이 갈수록 죄책감과 불안감이 진해졌다.

나는 눈동자를 돌려 주변을 살폈다. 다들 눈을 감고 있는 상태였다. 맨 뒷자리에 앉아 있던 나는 조심스레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려 했다.

그때, 제단 앞으로 흰 천을 덮어쓴 누군가가 조용히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망할.’

다시 착석하고 얼른 눈을 감았다. 잠시 뒤 눈을 슬쩍 뜨자, 흰 천을 덮어쓴 사람이 몇몇 사람을 손가락으로 지목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옆에 서 있는 보조에게 뭐라 속삭이더니 다시 들어온 문으로 나갔다.

나는 눈, 코, 입 어느 것 하나 보이지 않는 흰 천의 존재에게 기묘한 느낌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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