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속에 빙의된 나는 무기입니다 1권
1. 무기 전직
이곳에 갇힌 지도 어언 1년이 넘어가고 있었다.
어떻게 이곳에 들어왔는지는 알 수 없다. 여느 때와 같이 저녁 알바를 가기 전까지 낮잠을 잤을 뿐이다.
너무 오랫동안 잔 것 같다는 느낌에 헐레벌떡 일어나 눈을 떴을 때, 나는 하늘을 훨훨 날고 있는…… 새라고 해야 할까, 먼 옛날에 있었을지도 모를 공룡이라고 해야 할까, 꼬리가 검은 용의 모습을 보았다.
여전히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해 하하, 웃으며 이마를 짚었다. 움직인 팔이 둔하다는 것을 느꼈다. 몽롱한 몸 상태에 다시 눈꺼풀이 감겼다. 조금만 더 자 볼까.
그러나 타그닥타그닥 지나가는 말발굽 소리, 마차 바퀴 소리, ‘용사님~ 새로운 장비가 나왔는데 구경이라도 해 보세요~.’ 식의 방문 판매원과 흡사한 목소리로 인해 더는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이어서 어린애들이 우다다 달려가며 장난치는 소리와 웅성웅성 시장통에 온 것 같은 소리들이 하나둘씩 들려왔다.
처음에는 이 모든 게 물먹은 듯이 멍멍하게 들려왔다.
그러다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생생하게 감각이 느껴졌다.
침이 절로 넘어가는 고기 냄새, 휘잉 부는 바람 소리, 컬컬한 남자 목소리, 이어서 등에 닿는 벽의 촉감이나, 땅바닥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한기에 결국 나는 다시 눈을 떴다.
여전히 몸이 노곤한 감은 있었다. 하지만 시끄러운 소리에 정신은 말끔해진 상태다.
‘…….’
눈동자를 움직여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까의 꼬리 검은 용은 온데간데없고, 지금 나는 좁고 허름한 골목 벽에 기대어 노숙자처럼 자고 있었다.
시선을 내리니 여러 번 꿰맨 흔적이 있는, 갈색 낡은 천 옷을 입고 있었다. 바지 역시 다를 바 없다.
이 허름한 옷을 가려 주고 있는 더 허름한 회색 망토를 이불 삼아 덮고 있는 내 모습을 보고 있으니……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어딘가…….’
나는 팔을 앞으로 내밀어 휙휙 망토를 걷어치우고 몸을 살펴보았다.
발가락이 훤히 보이는 낡은 샌들이 보였다. 허리춤에 달랑거리는 거추장스러운 단검 칼집도 보였다. 속에는 단검이 한 자루가 묵직하게 넣어져 있었다.
‘이런 차림을 어디서 봤더라…….’
거지꼴이 따로 없었다. 하지만 어딘가 눈에 익은 차림이었다.
나는 옷 밖으로 드러난, 밖에 한 번도 나간 적 없는 사람처럼 허여멀겋고 마른 팔다리와 몸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내 몸도 아닌 것 같은데…….
‘아무렴…… 꿈인데, 내 몸이든 남의 몸이든 뭔 상관이야.’
말로만 들었던 자각몽이라는 게 이런 건가, 생각하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툭툭 털었다.
자각몽, 그럼 즐겨야지.
어차피 이곳에서 잠자기는 글렀다. 정신도 또렷해졌다.
하늘을 날아보기도 하고 공중 부양을 해 보기도 하고 각종 요술을 부릴 참이다. 들뜬 마음을 갖고 공중 부양을 곧장 시도해 봤다. 그러나 어림도 없었다.
결국 난 앉아 있던, 케케묵은 골목 밖으로 어슬렁어슬렁 걸어 나와야 했다.
‘이야…… 진짜 같잖아?’
중세 시대라고 해야 할지, 중동에 왔다고 해야 할지 모를, 그 어느 중간쯤에 있을 법한 판타지 마을 풍경을 보고 감탄했다.
더해서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 맑은 공기, 딱 적당한 날씨, 그리고 저 멀리 흔들리고 있는 나무가 보였다.
통나무로 된 집들의 향연과 하늘 높이 날아다니는 용가리들, 사람들의 목소리와 표정 하나하나까지, 모두 생기 넘쳤다.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낡은 신발 아래에 먼지와 같이 세밀한 부분까지 너무나도 선명했다.
나는 현실감이 넘치는 꿈에 해외여행을 처음 하는 사람처럼 연신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다 이내 아무리 현실감 넘쳐도 꿈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바로, 사람들 머리 위에 게임처럼 떠다니는 이름과 칭호들이었다.
[잡상인], [방어구 상인], [대장장이] 등등 직업들이 적힌 글자가 둥둥 떠 있었다.
그렇게 신기하고 기묘한 꿈속 사람들 구경을 하며 시장통을 지나가다 누군가에게 부딪혔다.
앞을 보자 나를 위아래로 흘기는 무서운 덩치가 보였다.
부리부리한 눈을 마주하자 꿈이라는 사실을 망각했다.
‘죄, 죄송합니다.’라며 쫄아서 말하자 덩치가 비웃음을 짓더니 조심하라고 으름장을 놓고 갔다.
돌아선 덩치의 머리 위에 [초보자]라는 칭호가 달린 것을 보고 뒤늦게 깨달았다. 내가 병신이었음을.
이 꿈의 주인공은 나다.
떳떳하게 ‘웃냐?’라며 덩치를 한 손으로 제압했으면 정말 짜릿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중에 생각해 보면 이때 덩치와 한 판 붙지 않았던 게 천만다행이었다.
만약 이때 덩치랑 싸움이 붙었다면 제압은 개뿔, 곧바로 덩치의 이두박근에 꼼짝 못 하고 맨땅에 내리꽂혔을 게 분명하다.
왜 그렇게 생각하냐고?
‘……여기가 꿈이 아니라는 걸 알아 버렸으니까.’
더해서 이 옷차림과 판타지 세상에 어딘가 기묘한 느낌을 받은 이유도 알아 버렸다.
그건 바로, 이곳이 내가 초등학교 시절 깔짝거리다 때려치운 MMORPG 게임 속이기 때문이다.
마을 이름, 캐릭터 옷, 초보자 마을 풍경, 마을 주변 몬스터 등 이런 것들로 특정 게임 속이란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게임의 이름은 ‘레전더리 어드벤처’.
어둠의 지배자라는 오그라드는 호칭을 단 ‘네스키’라는 최종 보스가 게임 세상에 몬스터를 풀어 혼돈을 야기한다는, 무시무시한 게임이다.
정리하자면, 악의 근원인 네스키를 찾아 쥐어패 세상의 평화를 되찾는 모험 게임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 게임은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최종 보스가 어딨는지, 어떻게 생겼는지고 나발이고 운영자가 게임을 운영하다 말고 잠수를 타 버리는 일이 벌어졌다.
업데이트가 되지 않으니 날이 갈수록 게임은 부패해져만 갔고, 유저들은 하나둘씩 떠나갔다.
결국 레전더리 어드벤처는 흐지부지하게 운영이 종료되고 말았다.
초등학생이었던 내가 이 게임을 접하게 된 이유는 별거 없다.
원래 하던 게임에 질려 있던 나는 여름방학에 출시된, 반응 좋은 신작 게임 ‘레전더리 어드벤처’를 호기심에 깔았다.
접속을 하자 반응이 좋은 이유를 깨달았다.
캐릭터 모습과 배경과 모션, 스킬 등 그래픽이 기깔나게 뽑혀 있었다. 세밀한 부분까지 신경을 쓴, 디테일이 살아 있는 게임이었다.
나는 게임을 빨리 시작하기 위해 대충 닉네임을 본명으로 설정했다. 예상대로 중복은 없었다.
그렇게 게임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컴퓨터에서 게임을 완전히 삭제해 버렸다.
왜냐, 초보자 사냥터에 고인물이 나타나 사냥을 계속 스틸 했기 때문이다.
또 기껏 깔짝거리며 얻은 아이템을 기존 유저가 그것보다 다른 게 좋다며, 바꿔준다고 선심 쓰길래 좋다구나, 바꿨는데 알고 보니 쓰레기와 교환을 하게 됐다는 것을 뒤늦게 알고 개빡쳐 버렸으니까.
이렇게 단 하루, 아니 몇 시간 채 되지 않고 몇 번이나 등쳐 먹히자 게임을 관둬 버렸다.
그리고 고딩 때 그 게임이 망했다는 소리를 들었다.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초장부터 부패한 모습을 보여 주는 ‘레전더리 어드벤처’에 운영자마저 튀어 버렸으니- 이미 앞날이 훤히 보이던 게임이었다.
그리고 그 앞날이 훤히 보이는 게임에 대해 예상 못 한 사실이 있다.
바로 내 앞날이다.
맛만 보려다 트라우마가 되어 버린 게임에, 그것도 대강 생성해 뒀던 캐릭터로 빙의될 줄은 전혀 몰랐다는 것이다…….
‘아니, 누가 게임 속에 들어오게 될 거라고 예상이나 했겠냐……!’
나는 게임 속에 갇힌 줄도 모르고, 꿈이라며 구름 위를 걷듯 한량처럼 돌아다니다, 마을 밖 사냥터에 있는 몬스터에게 뒤질 뻔했다.
위협을 당함과 동시에 이상함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몬스터의 할큄 한 번에 팔에 타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고 살이 길게 찢어져 피를 철철 흘릴 때 말이다.
눈이 번쩍 뜨일 만큼 아파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고통에 벌벌 떨며 흐르는 피와 함께 눈앞이 흐릿해졌다.
이쯤 되자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누군가 내게 ‘계속 설치다간 너 진짜 뒤지는 수가 있어.’라고 경고하는 것 같았다.
그 순간 앞에 있는 몬스터가 한 번 더 거대한 팔을 들어 올렸고, 내리치려는 기세에 나는 이번에는 맞으면 진짜 죽는다는 직감이 머리를 관통했다.
그 후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미친 듯이 마을로 달려야 했다.
정말 죽자 살자 폐가 터져나갈 듯이 뛰었다.
그렇게 악착같이 살려고 뛰어본 적은 생전 처음이다.
그날, 사람이 살려면 초인적인 힘이 나온다는 것을 느꼈다.
앞에 있는 덤불들을 속속 피해 가며 눈물 콧물 다 빼가며 마을까지 달려와 앞에 있는 기사들을 보자마자 출혈로 기절하는 절묘함을 보였으니까.
그렇게 죽을 고비를 넘기고 나서야 앞에 펼쳐진 세상을 진지하게 마주했다.
몇 시간 내내 머리통을 잡고 끙끙거린 결과, 그제야 나는 이 세계와 아주 흡사한 빌어먹을 게임이 떠올랐고, 내 옷차림이 게임 속 초보자 옷차림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동시에 머리 위에 떠다니는 [Lv. 3]을 보고 내가 키우다 만 캐릭터라는 것도 알아차렸다.
모든 의문에 대한 해답은 ‘레전더리 어드벤처’라는 게임에 맞춰져 있었다.
그러나 좀 이상했다.
몇몇 것을 제외하고 내가 했던 ‘레전더리 어드벤처’ 게임과 다른 점을 발견했다.
일단 게임이 아니라 진짜 현실 같았다.
위에 떠 있는 이름만 빼면 게임이라고 인지하지 못할 만큼 말이다.
상태 창이나 장비 창이나 스탯, 서버 종료, 퀘스트 창, HP 따위를 보려고 해도 게임처럼 뜨질 않는다. 그러다 누가 키보드로 눌러주는 것도 아니고, NPC도 각자 살아 숨 쉬고 있는데 뜨겠나 싶어 상태 창 확인은 포기했다.
대신 직감은 발달한 것 같다.
공격할 때 마나를 존나 잡아먹고 있다는 것, 지금 개피라는 것 정도의 느낌이 직감적으로 들었으니까.
이렇듯 이쪽 세상에서는 현실처럼, NPC의 퀘스트는 상대와의 약속, 장비 스탯은 방문 판매원 톤으로 말하는 상대의 설명으로 능력치를 확인해야 했다.
그래서 낯선 마을에 갈수록 이방인을 등쳐먹으니 경계를 해야 하는 것이다.
‘……부패한 게임 아니랄까 봐.’
더해서 외관은 실제의 나의 모습과 조금 닮아 있었다. 물론 실제보다 이 몸의 모습이 훨씬, 백만 배는 더 낫다는 건 두말할 필요 없이 인정한다.
원래도 멀끔하다는 소리 정도는 듣는 편이었지만, 이 캐릭터의 외관은 멀끔한 것 이상이었다.
캐릭터의 눈동자는 원래 내 눈동자와 같이 새카만 눈동자를 가졌다. 얄팍한 몸과 적당한 키도 원래와 다를 바 없었다.
다만, 이 캐릭터는 우유에 들어갔다 나온 사람처럼 허여멀건 피부와 미소년 같은 이목구비를 갖고 있다는 게 달랐다.
거지 같은 옷차림만 뺀다면 내가 보기엔 아이돌 비주얼에 견주어도 뒤떨어지지 않을 정도의 생김새다.
왜 아이돌이 떠올랐냐면, 염색을 딱히 즐기지 않았던 내게 이 몸이 가진 회색 머리카락이 상당히 튀어 보였으며, 내 딴엔 화려한 머리 색 하면 아이돌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렇듯 내 모습이 살짝 변형돼 더 잘생겨진 외관도 그렇고, NPC라 여겼던 사람들이 일정한 말만 하는 게 아니라 다양한 대화도 하고 진짜 사람처럼 생활을 하고 있는 것도 그렇고- 그 게임과는 거리가 있어 보였다.
이곳에 머물수록 나는 머리 위에 뜬 표식으로 게임 속이라는 자각을 잠깐 할 뿐이지, 정말 모든 것에서 실제와 같음을 느꼈다.
그리고 날이 갈수록 표식도 이질적인 느낌이 없어지고 있었다. 공기처럼 당연하게 느껴졌다.
그야말로…… 현지인이 되고 있었다.
‘이 정도면…… 다른 차원 세상에 온 걸지도.’
하루하루 시간이 흐르자 나는 깨지 않는 꿈, 혹은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지 않는 현실에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돌아갈 만한 마땅한 방법이 없었던 나는, 결국 이쪽 생활에 어영부영 참여하게 되었다.
지내다 보니 차차 이 세상에 적응이 됐다. 그뿐만 아니라 어느 순간부터 나는 이곳 생활을 즐기기 시작했다. 이곳 생활이 나쁘지 않았으니까.
솔직히 대학과 알바를 병행하는 현실은 따분했다. 심심함에 허덕이며 시간을 때우는 삶을 살았다.
그러던 중 게임 속에 떨어져 사냥도 하고 나날이 레벨 업 하는 성취감을 느끼며 다이내믹한 생활을 하다 보니 상당히 재미있었다.
복잡한 생각 없이 앞에 보이는 것들을 몸으로 때우고 처리하고 방어구, 무기, 장비 업그레이드하며 성장하는 즐거움도 있었다.
원래 세상과 달리 곳곳에 몬스터들이 있어 위험했지만, 그런 위험에도 내가 공격을 하면 대미지를 먹는 모습에 스릴을 느끼게 되었다. 후에는 강해져서 쫄았던 몹들을 한 방 거리로 만드는 쾌감도 있었다.
‘여기 생활도 괜찮겠는데?’
흥미진진함을 느끼며 나는 원래 현실로 돌아가지 않아도 괜찮겠단 생각을 했다.
어차피 우리 부모님은 ‘알아서 잘 살겠지.’라는 마인드를 갖고 계신 분들이니까. 가족에 대한 걱정은 없었다.
부모님이 말씀하시는 ‘알아서 잘 살겠지.’는 일종의 믿음과도 같았으며, 부모님은 아무리 가족이라도 각자의 행복을 찾아 자유롭게 살아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부모님은 그 말을 바로 실천했다.
내가 성인이 되기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부모님은 내게 초기 지원금이라고 할 만한 걸 안겨 준 채 해외여행을 하러 훌쩍 떠나버렸다.
내게 자유와 행복을 찾으라는 말과 함께 말이다.
아마 내가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 이상 나를 찾을 일은 없을 것 같다. 알아서 잘 살 거라는 단단한 믿음을 갖고 계신 분들이니까.
지금쯤 나를 키우느라 미뤄 두었던, 자유와 행복을 만끽하느라 바쁜 생활을 하고 있으리라 생각된다.
나도 부모님의 신념에 동의하는 바다. 잘 다녀오라며 손을 흔들어 준 이후로 나는 내 나름 앞에 보이는 일을 성실히 하며 하루하루 살아갔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무료함을 진하게 느꼈다.
현실 생활은 그렇게 자유롭지 못했고 반복되는 하루하루가 지루했다. 부모님의 신념과는 거리가 멀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마음을 달래기 위해 나는 자기 전, 한 치 앞도 예상이 안 되는 다이내믹한 게임 속 세상에서 흥미진진한 모험을 하는 상상을 하곤 했다.
그리고 이곳에 들어오기 직전, 낮잠을 자기 직전에도 그런 상상을 했던 것 같다.
……그게 원흉이었나 보다.
* * *
나는 돌바닥 위에 있는 내 신발을 내려다봤다. 너덜너덜한 샌들은 온데간데없고, 생각보다 단단함을 자랑하는 가죽 부츠가 발에 끼워져 있었다. 이어서 천을 덧대어 놓은 누리끼리한 옷에서도 벗어났다. 나름 갑옷이라 불릴 만한 두툼한 가죽을 가슴과 복부 부근에 장착해 방어구와 장비를 모험가답게 갖추었다.
……그렇게 바꿔댔으나 여전히 후지다는 느낌은 지울 수가 없다.
“…….”
내 머리 위에 둥둥 떠 있는 [공기복]이라는 성의 없이 지은 닉네임을 쳐다봤다. 그리고 그 옆에 같이 떠 있는 [Lv. 100]을 멍하니 쳐다봤다.
일찌감치 망해 버린 이 게임에서는 그래도 제법 높은 레벨이었다. 그래서일까, 축하해 주듯 숫자가 밝은 빛으로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그와 반대로 내 얼굴은 시간이 지날수록 거무죽죽해져만 갔다.
놀리는 건가……. 하나도 안 기뻤다.
“도대체 말이야…….”
나는 현재, 숨만 쉬고 사냥만 매일 해서 레벨 100을 달성한 상태다.
동시에 넋이 나간 상태다.
높아지는 레벨과 함께 정신줄도 자꾸만 놓게 된다. 매일 습관적으로 사냥터에 나가서 초보자 마을 주변에 있는, 이제는 한 방 거리인 잡몹들만 매일, 매시간 주야장천 사냥하기를 반복하니 당연하지 않은가.
이건 급여 없는 노가다이며, 희망 고문과도 비슷한 막연함을 갖고 매일 사냥에 임해야 할 광기 어린 짓이었다.
“……뭐가 문제냐고…….”
나는 닉네임과 레벨의 조금 더 위에 떠 있는 칭호라는 것을 올려다봤다.
거기에는 지긋지긋한 [초보자]라는 이름이 두둥실 떠 있었다. 나는 다시 시선을 내려 그 밑에 숫자를 쳐다봤다. [Lv. 100].
“시발.”
가끔 나를 처음 본 사람들이 묻는다. 왜 그 레벨이 되도록 직업이 없냐고.
“알면 이러고 있겠냐.”
전직을 안 하고 싶어서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해서 그런 거다. 직업 하나 없이, 초보자로 레벨 100까지 달성하는 게 정녕 내 의지라 생각하는지 되묻고 싶다.
“나도 전직하고 싶다고…….”
초보자의 스킬은 ‘찌르기’ 하나다. 매일 같은 사냥터에서 한 방 거리인 잡몹들을 찌르기만으로 주야장천 사냥해서 그 힘들다던 레벨 100을 달성하는 변태 새끼가 있겠냐.
내가 이곳이 즐겁다고 했던가? 그 말 이미 진작에 주워 담았다.
“……하아.”
막막한 처지에 깊은 한숨이 절로 터져 나왔다.
남들은 레벨 10 정도만 돼도 각자 직업을 찾아 초보자의 마을을 벗어난다.
나도 직업을 가지려 레벨을 올렸지만, 아무리 레벨을 올려도 직업이 발현되지 않는 기이한 일이 발생했다. 그리하여 나는 초보자 마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답답함에 몇 번 벗어날 시도를 해 봤다. 하지만 초보자 마을에서 일정 거리 이상 벗어나면 각종 마법을 쓰는 몬스터들이 나타났다.
나는 초보자 스킬 ‘찌르기’라는 근접 스킬뿐이었으므로 당연히 원거리 마법을 쓰는 몬스터 공격에는 속수무책이었다.
그렇게 또 한 번 몬스터들에게 둘러싸여 생명의 위기를 느낀 이후로, 초보자 마을을 떠나지 못하고 직업이 발현되기만을 간절히 바라며 기약 없는 사냥을 해야 했다.
내겐 [초보자]라는 칭호는 감옥과도 같았다.
게임 속에 갇힌 지 어언 1년이 다 되어가건만, 높아지는 레벨과 무관하게 ‘초보자’라는 칭호가 나를 따라다녔다. 더해서 나날이 내 안색은 초췌해져 갔다.
다른 이들은 모두 초보자 마을을 떠나 화려한 스킬을 쓰면서 쭉쭉 레벨 업을 하고 돈도 벌고 모험을 시작하는데, 나 혼자만 초보자 마을에 쭉 덩그러니 머물러 있는 중이다.
“철창만 없지 이게 감옥이 아니면 뭐냐.”
높아지는 레벨과 함께 안면을 트다 못해 친근해진 마을 사람들은 나를 취직 안 한 날백수라도 보는 눈으로 보기 시작했다.
그러다 레벨 100이 가까워질수록 마을 사람들은 나를 미친놈, 간혹가다 경이로움의 눈으로 보기도 했다. 내 사정을 알고 있는 몇몇 주변인들만이 안타까운 시선을 보낼 뿐이다.
하여간 나는 마을에서 돌연변이와도 같은 시선을 1년 동안 받는 중이다. 더해서 직업이 없는 나는, 초보자 마을에서 나오는 초보자 옷만 입어야 했다.
나도 얼른 직업을 찾고 싶다. 지긋지긋한 초보자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다.
멋들어지는 갑옷을 입고 화려한 스킬을 쓰면서 예전과 같은 성취감을 느끼고 싶다 이 말이다…… 그리고-.
“네스키 그놈, 잡아야 한다고…….”
이 세상에 온갖 몬스터들을 뿌린 장본인인 그 보스 몹도 처리하고 싶었다.
이런 다이내믹한 게임 세상에 기적적으로 들어와서 살게 됐는데, 보스 몹까지 무찌르는 낭만과 쾌감을 누리고 싶은 마음이 들끓었다.
세상을 구한 멋들어진 히어로, 지상 최대의 악을 쓰러트린 울트라 초강력 용사…… 아아- 생각만 해도 가슴에 불을 지펴주는 호칭이다.
“그러니까…… 이런 초보자 표식 따위만 주야장천 달고 싶지 않다고!”
화내는 것도 지쳐 있던 지난날들과 달리 울분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이만하면 됐잖아……. 왜 그러는 건데.”
도끼눈을 뜨고 ‘초보자’ 표식을 노려보던 나는 미친 사람처럼 표식에 말을 걸었다.
‘그래, 이봐, 초보자야. 말 좀 하자. 너는 내 머리 위가 그렇게 안정적이고 좋냐? 나는 죽을 맛이다. 제발 내 머리에서 꺼져 주라. 이만하면 됐잖아……. 방 좀 빼라고.’
귀신에 씐 사람처럼 혼자 중얼거리며 걸어가자, 주변에 있던 마을 사람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넋 놓고 소리치고 중얼거리고 난리 블루스 떤 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 사람들도 이제는 동네 모지리 하나가 지나간다는 정도로 여기고 있었다.
더는 마을 사람들의 시선이 억울하지 않았다. 사실, 꿈이라고 여길 적, 동네방네 헤벌레 뛰어다닌 전적이 있어 이미지랄 것도 없었다.
“이번에 전직 못 하면 사람이 아니라 짐승이다. 짐승.”
나는 분함과 비장함을 잔뜩 담아 말을 뱉었다.
동굴에서 쑥과 마늘을 100일 동안 먹으면서 버티면, 동물도 사람이 된다는 신화가 있듯이, 나는 레벨 100 달성과 함께 단단히 결심한 상태다. 이번에 안 되면 나는 짐승 하련다.
걸음 속도를 올려 전직관이 살고 있는 집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마을 구석에 통나무로 지어진 전직관의 집의 지붕이 보이자, 심장이 떨려왔다.
다른 때와 달리 긴장과 두려움, 설렘 같은 기분이 치솟고 있었다.
레벨 10을 달성했음에도 전직을 못 하자, 그다음에는 레벨 업을 하는 족족 전직관을 찾아갔다가 계속해서 퇴짜를 맞았다.
그 후에는 두려움과 설레는 마음으로 레벨 10이 오를 때마다 가던 나는, 오늘은 점차 무뎌지기 시작했던 평소 때와 다른 기분이 들었다.
100이라는 숫자가 주는 특별한 느낌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타닥, 타닥-.
조급한 발소리가 멈추었다.
나는 시선을 들었다. 앞에는 곳곳이 풀로 둘러싸여 있는 거대한 통나무집의 진갈색 나무 문이 보였다.
오늘따라 굳게 닫혀 있는 문이 왕실 근위병 같은 근엄함을 풍기는 듯해, 심장이 아까보다 더 빠르게 뛰었다.
“……스읍- 후우.”
긴장되는 마음에 깊게 호흡을 들이켰다 내쉬었다. 그러니 1초 전보다 손톱만 하게 진정이 되는 듯했다. 한마디로, 긴장감 맥스인 내겐 별 효과가 없었다.
“진정하자. 진정해…….”
스스로의 어깨를 한 번 토닥토닥해 준 뒤, 비장한 표정으로 팔을 뻗었다.
맨들맨들한 나무 문손잡이를 쥘 즈음, 침이 꼴깍 삼켜졌다. 천천히 손에 힘을 주어 안으로 밀듯이 열자, 굳건해 보이는 나무 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끼익-
커다란 나무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안에서는 마른 나무 향이 확 풍겨왔다.
전체적으로 깔끔하고 신비로움이 느껴지는 내부가 보임과 동시에 안을 휙휙 둘러보았다.
통나무로 된 넓은 집 안은 일반 가정집과는 다른 구조를 갖고 있어 숨은 그림 찾듯 눈동자를 움직여야 한다.
신기한 재료들이 진열되어 복잡한 연구 공간을 훑어보다, 그 옆에 책들이 가득 꽂혀 있는 책장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정확히는 흔들의자에 앉아 있는 머리 희끗한 노인을 말이다.
나는 성큼성큼 그쪽으로 다가갔다. 내 발소리에 할아버지가 감은 눈을 뜨고서 다가오는 나를 마주 봤다. 눈동자가 흘끗 올라가더니 내 머리 위를 쳐다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도 찾아오니 레벨을 보고 온 이유를 짐작한 듯하다.
의자에 기댔던 몸을 일으키며 할아버지가 방 중앙에 있는 곳으로 손짓했다.
“저쪽에 가서 서 있게나.”
나는 전직을 주관하는, 전직관의 위엄 있는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손짓을 하는 방향을 보지도 않고, 익숙하게 방 중앙에 그려진 마법진으로 향했다.
요상하게 그려진 마법진 중앙에 서서 전직관을 쳐다봤다. 그러자 전직관은 의자 옆에 놔둔, 고대 마법사나 들 것 같은 지팡이를 손에 들고 천천히 이쪽을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전직관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올 때마다 심장이 두근두근 시끄럽게 뛰어댔다.
아까처럼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 ‘습습, 후후.’ 호흡하며 앞을 바라봤다.
마법진의 끝에는 사람 몸통만 한 커다란 책이 단단한 받침대 위에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오묘한 빛을 내는 수정 구슬이 커다란 단상 위에 놓여 있었다.
‘이번에는 잘 좀 부탁한다.’
수정 구슬을 간절하게 쳐다보며 속으로 부탁을 할 즈음, 전직관이 수정 구슬 앞으로 자리를 잡고 섰다.
전직관의 손이 수정 구슬에 닿으니, 구슬이 보랏빛을 내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나는 주먹을 꽈악 쥐었다.
전직관은 긴장된 숨을 뱉고 있는 나를 보고서 중후한 목소리로 물었다.
“준비됐는가?”
“후우…… 네. 시작하죠.”
“……좋네. 그럼, 이번에야말로 행운을 빌겠네.”
전직관이 말을 끝내고서 주름진 손으로 지팡이를 잡았다. 이후 두 손으로 지팡이를 높게 들었다. 전직관의 입에서 알 수 없는 말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영문 모를 주문과 함께 구슬은 점점 여러 가지 색깔로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주문에 창문도 열지 않았건만, 앞에 있는 두꺼운 책의 페이지가 휘리릭 넘어가기 시작했다.
“어어-.”
나는 눈을 크게 뜨고 앞에 있는 구슬을 쳐다봤다. 싱겁게 빛을 내다가 푸욱 꺼져버리는 다른 때와 달리 꽤 오랫동안 빛을 내고 있었으며, 오두막 안에 바람이 불다 못해 지진이 난 듯 흔들렸기 때문이다.
옆에 있는 물건들이 온통 달그락달그락 소리를 냈다. 심상치 않은 광경에 두려운 마음과 기대하는 마음이 함께 올라왔다.
나는 숨도 쉬지 못하고 구슬을 쳐다봤다. 이내, 바람이 세게 한 번 불었고, 번쩍번쩍하며 바뀌던 구슬 색깔이 하나의 색을 띠었다.
생전 처음 보는 색깔이었다. 온갖 색들이 다 섞인 색이라, 뭐라 정의하기 어려운 색이었다.
구슬이 색을 정하자, 모든 바람과 흔들림이 가라앉았다. 그리고 앞에 있는 커다란 책의 페이지는 맨 마지막 장으로 펼쳐졌다.
전직관은 상당히 놀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수많은 사람을 전직시켜 줬으니 자신과 달리 이런 일에 익숙할 텐데 왜 저리 놀랐을까 싶은 의문이 잠깐 스쳤다.
전직관은 어안이 벙벙하다는 듯이 숨을 내쉬더니 고개를 앞으로 내밀어 책을 쳐다봤다.
글을 읽어나가던 전직관의 주름진 눈이 몇 번이나 깜빡여지는 것이 보였다. 그러더니 나를 한 번 쳐다보고 다시 글을 읽어 갔다. 그리고 또 나를 쳐다보고, 글을 읽고 잠시 천장을 바라봤다가 매직아이를 하듯 나를 보기도 했다.
이 행동을 몇 번이나 반복하자 나는 불안하고 꺼림칙한 마음이 들었다.
“왜, 왜요? 또 퇴짜예요?”
“……나오긴 했네.”
잠깐의 침묵 끝에 나온 전직관의 대답에 나는 몸을 펄쩍거렸다.
“지, 진짜요?!”
나의 되물음에 전직관이 기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드디어…… 나도, 나도 직업이……!’
나는 감격스러움에 눈을 질끈 감았다.
이날을 얼마나 기다려 왔는가. 산송장처럼 살았던 지난날의 서러움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코끝이 시큰거려 왔다. 멋없이 울지 않기 위해 한 번 더 호흡을 내쉬었다. 눈을 뜨고서 앞에 있는 기묘한 표정의 전직관을 쳐다봤다.
긴장되고 설레고 서럽고 복잡한 마음에 주먹을 꽉 쥔 채 물었다.
“그, 그럼. 전…… 어떤 직업이죠?”
“허어-.”
전직관이 기가 막힌다는 듯 숨을 쉬더니 다시 고개를 기울였다. 책을 빠르게 훑던 전직관은 맨 밑 부분에서 눈동자가 오랫동안 머물렀다.
‘……또, 또 뭔데.’
나는 대체 뭔데 저리 뜸을 들이는가 싶어서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다른 때와 달리 비장한 얼굴을 한 전직관은 쉽사리 말을 뱉지 못했다.
나는 이제 간절하게 두 손을 모으며 제발 아무 직업이라도 말해 달라는 듯이 쳐다봤다. 그러자 전직관의 주름진 입가가 벌어지더니 드디어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네는 직업이 아니네.”
“……?”
“무기일세.”
“……에?”
나는 얼빠진 얼굴로 되물었다. 그러자 전직관이 침을 한 번 삼키더니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뱉었다.
“자네는 만년에 한 번 나오는 전설의 무기, 레스탈로스의 무기일세.”
“그게 무슨…….”
잔뜩 기대를 하고 있는 내게 전직관은 뜬금없는 소리를 하고 있었다. 나는 얼빠진 얼굴로 전직관을 쳐다봤다. 그러나 전직관의 중후한 얼굴에는 변함이 없었다.
“죽기 전에 전설의 무기를 보게 되는 날이 올 줄은 몰랐군……. 전설의 무기는 인간화가 된다는 말이 진짜였단 말인가.”
아무리 이곳에 자주 와서 안면을 텄다고 한들, 내가 얼마나 애타게 직업을 찾으려 했는지 아는 전직관은 이런 거로 장난을 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저 말은 장난이 아니라는 거다.
“자네를 갖게 될 자가 무척이나 부럽구먼.”
머리를 때려 맞은 듯한 나와 반대로 감탄을 하는 전직관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세히 보니 전직관의 눈에는 경이로움과 같은 이채가 돌고 있었다.
“……이, 이해가 안 가는데요…….”
“그럴 만하네. 한마디로 자네는 일반적인 직업으로 전직을 한 게 아닐세. 무기로 전직이 되었네.”
전직관의 말에 나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머리 위에는 [초보자]로 둥둥 떠 있던 표식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무기]라는 표식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나는 그 간결하고 볼품없는 표식을 3초간 넋 놓고 쳐다본 것 같다. 마치 무기 상인으로 전직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직업이 발현이 안 돼서 희한하다 싶었건만…… 다 이유가 있었군.”
시선을 내리자 감격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전직관의 얼굴이 보였다.
“……저는 네스키를 처리해야 한다고요……!”
나는 속에서 울컥하는 감정에 목소리가 떨려왔다.
대체…… 대체, 뭐가 감격스럽다는 건데……!
그러거나 말거나, 전직관은 연신 나를 보며 경탄 어린 시선을 보낼 뿐이었다.
나는 결국 기대하고 기대했던 직업이 이따위로 발현되자 서러움이 왈칵 터졌다.
“영웅이 되어야 한다고요! 무기가 뭐냔 말이에요! 직업, 직업을 달라고요!”
“그게 자네 꿈이라면 자네같이 강력한 무기를 손에 쥘 만한 강한 주인을 만나면 되네.”
“제가 짐승입니까?! 주인은 무슨! 대체, 무기가 말이 됩니까, 무기가! 제 몸이 검으로 변하기라도 한단 말이에요?!”
“그렇네.”
나와 달리 담담하게 고개를 주억거리는 전직관의 모습에 울분이 터져 나갈 것만 같았다. 변하긴 뭘 변하냐고! ……그거 진짜 볼품없잖아!
“허! 제발 장난치지 마요……!”
“내가 자네에게 장난을 칠 사람이 아니란 걸 알지 않은가.”
전직관의 중후한 눈빛으로 차분하게 말을 뱉었다. 완고하게 부정하며 소리치던 나는 전직관의 얼굴에 입을 다물고 말았다.
……알고 있다. 지금 농담하고 있는 게 아니란 걸, 그래서 더 분통이 터졌다.
‘이건 진짜 말이 안 되잖아……!’
애초에 게임 속 세상에 들어온 것부터 말이 안 되는 일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게임 속 세상에 들어왔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이후의 일들은 말 안 될 건 없었다.
몬스터가 있고 마법을 부린다? 머리 위에 표식이 떠다니고 레벨 업을 한다? 게임이 그렇지, 라며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그런데 이건 정말, 게임 속 세상에서도 말도 안 되는 일이잖아!
“사람이 무기가 되는 게 말이 되냐고요……! 저도 전사, 마법사 같은 멋들어진 직업을 갖고 싶다고요…….”
“자네는 만년에 한 번 나오는 전설의 무기지 않나. 그보다 더 멋진 직업이 어딨겠는가.”
“제가 싸울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그냥 고철 덩어리라고요…….”
나는 시무룩하게 중얼거렸다. 기껏 노가다를 뛰어 전직했더니 쓰는 스킬이라곤 고철 덩어리로 변해서 바닥에 툭 떨어지는 거다. 정말이지 하나도 폼이 안 난다…….
혼자 있을 때는 쓸모 없다는 거잖아. 그럼 어떡하라고.
우울했다. 너무나도 우울했다. 더는 화도 나지 않고, 서글펐다. 언젠간 전직을 해서 멋진 스킬을 쓰고 용맹하게 싸울 수 있다는 희망으로 살아왔건만, 모든 게 무너진 기분이었다.
“어허, 왜 그런 표정인가. 그렇지 않네. 자네는 일반 무기와는 달라. 강력한 마력을 담고 있지. 누구보다 경이로운 삶을 살 수 있네.”
“대체 뭐가요…….”
“자네는 레스탈로스의 무기에 대해 몰라도 한참 모르는구먼.”
“전설의 무기니까……. 엄청난 고철 덩어리겠죠.”
“엄청나네. 어마어마한 무기일세, 아주 어마어마해서 이 세계에 자네가 나타났다면, 그 누구도 자네 없이는 최고라고 논할 수 없지. 자네는 아주 특별하지. 자네 없이는 이 세계의 강력한 지배자, ‘네스키’를 잡을 수 없을 만큼 말이네. 모든 이가 전설적인 자네의 존재에 안달할걸세. 자네가 마음만 먹으면 황금 왕국을 지을 수 있을 만큼 모두 자네를 원할걸세.”
“……제, 제가 네스키를 잡을 수 있다고요? 지, 진짜예요?”
“난 거짓말을 하지 않네. 위대한 무기를 하찮게 보지 말았으면 좋겠구먼.”
전직관의 말에 시선을 내렸다. 새삼스레 허여멀건 팔과 손바닥 따위를 뒤집어 봤다. 전직관의 말이 머릿속에 다시 울리는 듯했다. 무감했던 마음이 차차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입꼬리가 움칫거려 왔다. 나는 내 몸을 사뭇 감탄스러운 눈으로 내려다봤다.
이런 비실비실한 초보자의 몸이 마음만 먹으면 네스키를 잡고, 황금 왕국까지 지을 수 있는 엄청난 존재라고……?
잠깐만…… 이건- 말로만 듣던, 일명 ‘힘숨찐’ 루트?
그렇군. 그렇군! 나는 전직 하나 못 하는 마을 모지리가 아니라, 별 볼 일 없던 인간이 뒤늦게 정체가 발현되어 게임 속의 최강자가 되는 그런, 소년 만화의 주인공 루트를 타고 있었단 말인가!
“내, 내가 그렇게 대단한 존재라고요?!”
“이제야 알겠는가. 자넨 아주 대단한 존재일세. 하지만, 자네의 대단한 능력을 100% 발휘하기 위해선 자네의 힘을 감당할 수 있는 주인, 한 사람을 제대로 찾는 게 중요하네.”
“에? 주, 주인이요? ……모, 못 찾으면요?”
“찾을 수 있을걸세. 상대방은 본능적으로 자네에게 끌릴 테니. 서로를 알아볼걸세.”
“그, 그래요? ……근데…… 주인이라는 게 꼭 있어야 해요? 그냥, 제가 여러 명을 아래에 두면 되잖아요.”
누구를 모시라는 듯한 ‘주인’이라는 말이 상당히 별로였다. 한마디로 주인은 나여야 했다. 그리고 내가 사용할 놈들을 발아래에 두고 싶었다.
“주인이라는 말이 마음에 안 드나 보구먼.”
“당연하죠……! 무슨 주인이에요, 부하겠죠! 주인은 제가 할 겁니다.”
“허어. 자네가 원한다면 여럿 두는 게 가능은 하다만…… 자네가 힘들걸세.”
“에? 왜요?”
“자네를 활용할 수 있는 자들은 아주 강해. 그런 체력 좋은 이들을 여러 명 두게 된다면…… 아주 힘들 테지…….”
“힘들 일이 뭐 있어요. 부하들인데.”
“자네가 그들의 무기로 변하기 위해서는 상대와 합체해야 하니 말일세.”
“하, 합체요? 그건 어떻게 하는데요?”
전직관이 내 물음에 뜸 들이듯 말을 잇지 못하더니, 악귀를 내쫓듯 손을 휘저었다.
“……레스탈로스의 무기에 관한 책을 한 권 주겠네. 거기에 합체와 자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정보들이 많이 있을 것이니 읽어두게나.”
지팡이를 들고 전직관이 뒤를 돌았다. 그리고 뒤편에 있는 서재로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으흠? 말로는 설명하기 복잡한 과정인가.’
그렇다면 말로 후루룩 설명하기보다 돌아가서 책을 천천히 읽는 편이 더 기억에 남을 것 같았다.
나는 물어보는 것을 관두고 책을 받기 위해 전직관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전직관은 책장을 살펴보더니 모서리 부분에 있는 빨간 책 한 권을 꺼냈다. 뒤에 서 있는 나를 돌아보며 책을 내밀었다. 나는 선뜻 받기가 민망한 기분이 들어 물어보았다.
“받아도 돼요?”
“그 책의 내용은 자네에게만 유용한 내용일세. 가져가게.”
“그럼, 감사히 받겠-.”
내가 또 얼마나 위대한 사람인지에 대해 적혀져 있을지를 기대하며 설레는 마음으로 책을 받아 들려고 했다. 그때, 전직관이 내 팔을 잡아 왔다.
나는 말을 멈추고 전직관을 쳐다봤다. 전직관은 아주 엄숙한 눈빛을 한 채 나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일급 비밀을 말하듯 은밀한 어조로 입을 뗐다.
“자네가 유의할 게 있네.”
“뭐, 뭔데요?”
“정체를 함부로 밝힌다면 너도나도 자네와 합체하려 들 테니 숨기는 게 좋을걸세.”
“에? 그러기엔…… 전직관님은 예, 예외인가요?”
“다 늙은 노인은 전직 이외의 일에 관여할 마음이 없네. 내 자네의 정체는 단단히 함구해 줄 테니, 자네는 섣불리 정체를 드러내지 말게나.”
“……알겠습니다.”
전직관이 무서운 이야기라도 하는 듯한 얼굴로 말을 하자, 나도 모르게 같은 톤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전설의 무기라 밝히면 다 넙죽 엎드릴 텐데, 왜 숨겨야 하지?’라는 의문도 들었지만 일단 단단히 각오하라는 비장한 얼굴에 그러겠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전직관이 붙잡았던 팔을 놓아주었고, 나는 책을 한 팔로 안아 들었다. 전직도 했겠다, 이만 가야겠다 싶어 나는 앞에 있는 전직관을 보며 납죽 인사를 했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여태까지 감사했습니다.”
“더는 안 올 것처럼 말을 하는구먼.”
“여긴 초보자 마을이잖아요. 전직도 했으니 내일 해가 뜨면, 네스키 잡으러 떠나게요.”
“……네스키를 잡겠단 말인가.”
“잡을 수 있다면 잡아야죠. 더해서 부하도 찾아야 하고요.”
“자넨 참 용감하군.”
“전설의 무기가 담긴 그릇이라 그런가 봐요.”
“허허, 알겠네. 그럼 몸조심하게.”
“가 보겠습니다.”
정말 가 보겠다고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한 뒤 돌아섰다. 그러다 두어 번 다시 뒤를 돌아보며 인사를 꾸벅했다. 레벨 100을 올릴 동안 주야장천 전직을 하러 들렀더니 정이라도 들었나 보다.
그럴 만했다. 이곳에서의 1년은 꽤 긴 시간이었으니까.
하지만 허전하다고 여기에 계속 머물 수는 없었다.
내가 그렇게나 위대한 무기라면 초보자 마을에서 묵혀지는 건 세계적 손실이었다. 그리고 나도 이렇게 안정적이지만 무료한 삶보다 위험하지만 모험을 하고 싶단 욕구가 더 컸다.
‘더군다나, 게임 세계에 왔는데 한 자리에 머물 수가 있나.’
그런 내가 무려 레벨 100까지 전직을 못 해 초보자 마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으니, 전직을 한 지금, 얼마나 모험심이 들끓고 있는지 모른다.
물론 내가 생각한 직업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었다. 하지만 전직관의 말대로라면, 오히려 네스키를 조질 수 있는 영웅적인 직업에다가, 마음만 먹으면 왕국을 지어 왕이 될 수도 있는 엄청난 직업이다.
‘나를 빼놓고 최강을 논할 수 없는, 최강자 위의 최강자 직업이 무기 아니겠냐!’
모두가 안달 내는 전설의 무기다. 어떤 강자가 나타나도 내 발아래 둘 수 있다는 말이다.
비록 스스로 화려한 스킬을 쓰지는 못하더라도, 결론적으로 내가 되고 싶은 엄청난 영웅은 될 수 있을 듯하다. 좋을 대로 세상을 휘젓고 다녀도 될 만한 직업이다. 더불어 이건 끊임없이 부하를 둘 수 있는, 노후까지 보장된 사기 직업이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내 능력을 썩히는 건 큰 손해다. 일단 뭐가 됐든 무기를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 자를 찾아야 한다.
네스키를 조지러 가는 길에 나를 감당할 부하 녀석도 찾고, 게임 세상 모험도 하고, 영웅도 되고, 겸사겸사 떠나는 게 옳았다.
그런 뒤 영웅의 명성을 얻어 누릴 것 다 누리고 사는 행복한 미래를 그려도 좋을 것 같다.
“좋아, 좋아.”
나는 기쁘게 고개를 주억거리며 손수 만든 나의 집, 작은 오두막으로 들어왔다.
중앙에 있는 통나무 테이블 위에 장비들을 주르륵 내려놓았다. 오는 길에 마을 사람들에게 작별 인사를 건네고 모험을 떠나기 전, 장비들을 맞추고 들어왔다.
맨몸으로 이 땅에 떨어져, 집에서 챙길 건 없다. 테이블 위에 어지러이 올려진 물품들은 내일 갖고 갈 짐이라 할 수 있겠다.
내일 아침에 장비만 잘 차려입고 대충 봇짐 꾸려서 나가면 준비 끝이다.
“그럼 이제…….”
통나무 위에 올려둔 짐들 틈으로 빨간 책 한 권을 잡아 들었다. 가까이 있는 딱딱한 나무 의자에 기대앉으며 나는 첫 페이지를 펼쳤다.
“레스탈로슨지 뭔지 책이나 한번 읽어 볼까.”
심상치 않은 빨간 표지를 보고 난해한 글자들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마음의 준비를 하고 열었으나 예상과는 달리, 의외로 널널하고 읽기 쉬운 글자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이 정도면 오늘 안으로 완독 가능할 것 같다.
짐을 줄이려면 얼른 읽고 놔두고 가는 편이 좋을 것이다. 눈을 부릅뜨며 첫 줄부터 쭉 읽어 내려갔다.
책 초반에는 마력이 담긴 전설적인 무기라며, 부하 녀석이 강할수록 나 역시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는 정보들이 적혀 있었다. 기세 좋게 나에 대한 찬양을 읽어 내려갔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들떠 있던 마음은 짜게 식어가기 시작했고, 눈은 점점 찌푸려졌다.
결국 마지막 장에 이르러서야, 머릿속이 혼미해지는 걸 느끼며 책을 덮어야 했다.
……별 미친, 쌉소리가 가득 적혀져 있는, 정신 나간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