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3화
제국과 아바시스의 전쟁은 누구도 우세를 점하지 못하고 장기화됐다.
사실 이는 예견된 것이었다. 아바시스는 이 다시없을지 모를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고, 황제의승천에 이어 내란까지 겪으며 국력을 소진한 제국은 단단히 벼르고 쳐들어온 강적을 단번에 몰아낼 힘이 없었다.
한편, 제국의 새로운 황제 자콥 트라소프는 적극적으로 아바시스를 몰아낼 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는 코앞까지 치고 들어온 강대한 적에 맞서 제국 내부를 결속시키는 데 몰두했다. 어떤 이들은 새 황제의 머릿속에는 아바시스를 이용할 생각만 가득하지, 그들을 물리칠 생각은 전혀 없다고 조용히 비꼬기도 했다.
하지만 사실이야 어떻든, 새 황제의 영도아래 제국은 그들 스스로를 좀먹던 분열을 극복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듯했다.
그러나 그런 황제의 노력을 비웃듯, 제국 각지에서 불온한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선대 황제의 성전 이후로 자취를 감췄던 위험한 신비들. 제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온갖 신비롭고, 두려운 것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거대한 괴물의 그림자가 하늘을 뒤덮는가 하면, 강물에서 난데없이 매캐한 연기가 피어오르기도 했고, 메마른 자갈밭에서 수백 그루의 나무가 솟아나기도 했다.
전선의 보고들을 듣기에도 바쁜 조정에 각지에서 올라오는 이러한 기현상들에 대한 보고들까지 더해지자 조정의 업무가 반쯤 마비되다시피 했다.
“폐하. 이건…….”
한 노신(老臣)이 신음하니, 황제는 눈을 감고 관자놀이를 주물렀다.
* * *
“남쪽에서는 재미있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듯하군.”
“예. 그런 모양입니다.”
황도를 포함한 제국의 남쪽이 여러모로 시끌시끌한 반면, 제국 북방의 판니른은 비교적 평온했다.
이제 갓 2대에 이른 크렘보르 가문은 신생 귀족가문 답지 않게 노련한 수완을 발휘하며 판니른을 순조롭게 그들의 영향력 아래 손에 넣어가고 있었다.
판니른에 이미 그들의 경쟁자는 없다시피 했다. 물론 판니른에도 이름있고 힘있는 권세가가 없지 않았지만, 그들의 위세는 이미 한참 전에 꺾인 상태였다. 보리스 크렘보르는 제법 훌륭한 후계자였다. 그는 황자, 이제는 황제가 된 자콥 트라소프가 대귀족들을 여럿 거느리고 황도로 떠나자 본격적으로 세를 확장하기 시작했다. 유력자들이 거의 남쪽으로 떠난 터라 크렘보르 가문의 세력 확장을 제지할 수 있는 이들은 없었다.
“어떨 것 같으냐.”
“이름만 남은 자들을 꽤나 불러 모았다지요. 명족(名族)의 저력이라는 것을 무시할 수는 없다지만, 그들이 실질적으로 황제에게 도움이 되려면 힘을 회복할 시간이 필요할 겁니다. 당장은 쓸모가 없다 봐야겠지요. 황제에게는 당장 힘이 모자랍니다.”
“그렇다면.”
“예. 조만간일 겁니다.”
로우렌은 단언했다.
그리고 그의 말처럼, 그로부터 보름이 채 지나기도 전에 황제의 전령이 솔롬에 당도했다. 황제의 전령답지 않게 단출한 규모였다.
“폐하께서는 크렘보르의 헌신을 기대하고 계십니다.”
“물론 크렘보르는 언제까지나 폐하와 황실에 충성할 것이오. 하지만 공께서도 알다시피, 지난 전쟁에서 가문의 전력을 총동원한 후로 더 이상은 여력이 없소이다. 바로 그 때문에 폐하를 따라 황도로 가는 대신 이 땅에 남아 피폐해진 가문을 추슬러야 했지.”
전령으로 온 귀족의 얼굴 근육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듯했다. 이곳으로 오며 보았던 솔롬의 번영한 거리와 도시를 철통같이 지키던 강성한 병사들 등, 눈에 밟힌 것 이상으로 쏟아내고 싶은 말이 한가득인 듯했지만 그렇게 기분대로 입을 놀리는 자였다면 황제가 전령으로 보냈을 리 없다.
“후우. 허나 장군. 폐하께서는 크렘보르의 힘을 필요로 하십니다. 당장 아바시스 놈들이 황도로 진격해올 수도 있는 상황이란 말입니다.”
그럴 일은 없다는 것은 그들 모두가 안다. 아바시스가 황도를 치려고 했다면 이미 한참 전에 칠 수 있었다. 물론 치는 것과 손에 넣는 것은 전혀 별개의 일이란 것을 그들도 알기에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을 뿐.
전령으로 온 귀족은 황도의 위험 운운하며 보리스의 있지도 않은 충성심을 자극하려 했으나 헛수고였다. 그것을 그도 곧 깨달았는지, 가라앉은 목소리로 진짜 제안을 꺼냈다.
“이번에 크렘보르가 힘껏 움직여준다면 폐하께서 그 공을 잊지 않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것은 영광스러운 말씀이오. 다만 말씀드렸다시피.”
“크렘보르 가문은 비록 역사는 오래 되지 않았으나 그 충성심과 실력만큼은 여느 유서 깊은 명문가와 비교해도 모자람이 없지요. 폐하께서는 크렘보르 가문이라면 판니른을 맡아 다스릴 충분한 역량이 있다 보고 계십니다.”
“으음.”
“허나 이 이야기가 새어 나간다면 불만을 드러낼 자들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장군께서도 알고 계시겠지요. 생각보다 고루한 사고방식에 스스로를 가둔 자들, 질투에 눈과 귀가 먼 자들이 많습니다.”
“…….”
“하지만 크렘보르가 그들은 엄두도 내지 못할 헌신을 보여준다면, 그들이 어찌 저열한 속내를 드러낼 수 있겠습니까. 설령 그렇게 염치없이 나선다 해도, 그때는 폐하께서 그들을 일깨워주실 겁니다.”
“무슨 말씀인지 이해했소.”
“좋습니다. 그렇다면 긍정적인 답을 기대해도 되겠습니까?”
보리스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진이 빠진다는 듯 이마에 손을 가져간 그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시간을 조금만 주시오. 이런 큰 일을 이리 빠르게 결정할 수는 없는 것 아니겠소.”“물론 이해합니다. 그러나 폐하를 오래 기다리시게 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 내로 답을 드리겠소.”
“알겠습니다.”
잠시 후. 보리스는 로우렌과 그라모트를 비롯한 그의 측근 몇과 회동했다.
“생각보다 일렀다.”
“황제의 인내심이 생각했던 만큼 강하지는 않았던 모양입니다.”
“글쎄. 현명한 것일 수도 있지.”
모두의 시선이 모였다. 보리스는 일전에 몇 번 본 황제를 떠올렸다. 당시에는 황제가 아니라 황자였지만, 자콥 트라소프라는 자의 색은 그때도 뚜렷했다.
“결국 판니른은 내 손에 들어올 수밖에 없다. 설령 나를 견제하겠답시고 다른 놈을 총독 자리에 데려다 앉힌다 해도 놈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것이야. 황제도 당연히 그것을 안다. 그러니 쓸데없이 기싸움을 벌이는 대신 원하는 먹이를 빨리 던져주고 대가를 받으려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아니, 그게 맞는 것 같군요.”
지금의 황제는 자신이 선대처럼 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터무니없이 넓은 제국 전역을 한 손에 쥐고 흔들겠다는 망상을 할 정도로 어리석은 자도 아니다. 그는 결국 타협해야 하고,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타협의 대상을 정하는 것 정도다.
“어찌 되었든, 드디어 판니른을 손에 넣으시게 됐습니다. 감축드립니다.”
“감축드립니다.”
보리스가 옅게 웃으며 간만의 성취감을 즐겼다.
황제의 전령을 맞이하고 황제의 전언을 듣고서야 비로소 뭔가 해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작해야이제 갓 2대에 이른 크렘보르 가문이 총독 가문이 된다? 충분히 자랑스러워 해도 될 만한 대업이다.
“무리 없이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이 어느 정도나 되지?”
“2천 정도입니다.”
그라모트가 즉답하자 로우렌이 딴지를 걸었다.
“아니지. 형님. 그렇게 셈하면 되겠소?”
“무슨 말이냐?”“황제가 공자님께 총독 자리를 약속한다지 않소. 그렇다면 일개 성주로서가 아니라 판니른의 총독으로서 군대를 꾸려야 맞는 것 아니겠소?”
“아직 내게는 그럴 권한이 없다.”
보리스가 고개를 젓자 로우렌이 싱글거리며 재차 목소리를 높였다.
“그렇긴 하지만, 황제도 그걸 원할 겁니다. 당장 발등에 불똥이 떨어졌으니까요. 생각해보십시오. 현 총독이 동원령을 내려봐야 긁어 모을 수 있는 병력은 한줌 밖에 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공자님께서 나서신다면? 제법 든든할 만큼 모이지 않겠습니까? 황제도 그걸 알 테니, 공자님께서 넌지시 말만 꺼내도 기다렸다는 듯이 허락할 겁니다. 그리 되면 총독 자리는 받은 것이나 다름없게 되겠지요. 이미 권한부터 넘긴 셈이니 말입니다.”
“호오.”
“양쪽 모두 행복해지는 겁니다. 망설일 필요가 있겠습니까?”
회의를 마친 보리스는 즉시 전령을 불러 자신의 뜻을 전했다.
“그건…….”
전령으로 온 귀족은 보리스의 제안 아닌 제안에 난색을 표했지만, 보리스는 그의 반응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그는 말을 전할 뿐이다. 결정은 황제가 내린다. 그리고 황제는 로우렌의 말처럼, 양쪽 모두 행복해질 수 있는 이 제안을 거부하지 않으리라.
“부지런하군요.”
낮에 당도한 전령이 해가 지기도 전에 떠나가는 것을 보며, 로우렌이 그 근면함을 칭찬했다.
“이름만 남은 자 아니더냐. 부지런히 발품이라도 팔아서 제 가치를 증명해야겠지.”
“그도 그렇습니다.”
전령으로 왔던 자는 이름만 있는 귀족이 아니었다. 그의 가문은 나름 역사가 길고 한때는 황도에서 그럴듯한 관직까지 역임한 적이 있는, 나름 명문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어찌 알았으랴. 그 자랑스러운 역사가, 과거가 현재에 이르러 부끄러움의 원인이 될 줄이야.
그래도 마냥 좌절하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에 매진한다는 데서, 전령이 된 귀족은 그래도 칭찬할 만하다.
“현 황제는 신념과 뚝심이 있는 자입니다. 그러면서 현실감각도 부족하지 않지요. 우리가 그에게 도움이 되는 한, 그 역시 우리에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 시대를 잘 헤쳐 나간다면 크렘보르 가문은 앞으로 수 대 동안 든든히 깔고 앉을 수 있는 반석에 오를 것입니다.”
아부 같지만 아부가 아니다. 아니, 아부인가? 아무려면 어떠랴.
로우렌은 현 황제가 균형을 잃지 않는 한 크렘보르의 성세는 계속 이어지리라 단언했다. 그에 너털웃음을 지은 보리스는 이제 보이지도 않는 전령의 자취를 눈으로 좇았다.
‘황제폐하. 만수무강 하소서.’
* * *
세상은 무대요, 그 무대 위에 펼쳐진 인생들은 저마다 한편의 극이라.
그러나 그 무수한 극들은 사람이 짜낸 것처럼 뻔하지 않다. 그래서 더 재미있는지도 모른다. 비극인 줄 알았던 것이 희극이 되고, 희극인 줄 알았던 것이 비극이 되는 경우가 흔하니까. 또한 비장하고 장엄한 서사시인 줄 알았던 것이 끄트머리에 가서 황당한 결말을 맞이하여 대작인지 졸작인지 헷갈리게 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그야말로 예측불허. 그렇기에 단언할 수 없다. 제아무리 감탄이 절로 나오는 전개라도 결말까지 나오고 나서야 그것이 어떠했노라 평할 수 있으리라.
그런 면에서 자이드라 멕시스라는, 무수한 이들에게 영향을 미쳤던 거인의 일생은 한 마디로 표현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다.
아바시스의 군대를 맞아 남동 전선에서 3년 간 종군하다가 황제의 배려를 받아 타라냐드로 돌아간 자이드라 멕시스가 그의 땅에 돌아간 지 한달도 되지 않아 석연찮은 죽음을 맞이하리라고, 세상 그 누가 예상했겠는가.
“아들인가?”
“아니요. 손자입니다.”
로우렌의 목소리에는 강한 확신이 담겨 있었다. 보리스는 근거를 묻지 않았다. 그냥 힘없이 웃었다.
땅에 묻힐 날만 기다리던 권력자가 젊음을 되찾은 일은, 당사자와 그를 따르는 몇몇 이들에게는 축복이었을지 몰라도 그의 죽음 이후를 기대하던 이들에게는 저주 그 자체였다. 하지만 과연 그 노회한 권력자가 그것을 몰랐을까? 아니. 그럴 리가. 그는 알고 있었다. 단지 능력 없는 자식들이 아니라, 야심만만한 손주가 일을 저지르리라 예상하지 못했을 뿐.
“허망하군. 못해도 수십 년을 내다보았을 자가 오 년도 버티지 못하다니.”
“자만했겠지요. 어린 멕시스가 영특했을 수도 있고요. 아니, 둘 다겠군요.”
“황제가 연루되었을 것 같나?”
“모르겠습니다. 다만 얽혔다고 직접적으로 관여하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만.”
보리스는 정치적인 계산은 로우렌에게 맡기고 허망하게 가버린 거인을 속으로나마 추모했다.
생전에 기대에 못 미치는 자식들 때문인지 영특한 손자를 그리도 아꼈다던가. 젊음을 되찾고서 끝없이 야심을 지피던 그의 모습을 떠올리니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