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2화
황도에서 나온 군터 일행은 황도로부터 서쪽으로 나흘 거리 정도의 야산에 자리잡은 산채를 점거했다. 본래 그곳에 자리잡고 있던 산적들은 모두 쓸어버렸다. 천이 훌쩍 넘는, 적다고 할 수 없는 인원이었으나 막 피를 보고 온 군터 일행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상대였다.
“곧장 황도로 들어설 모양입니다.”
피비린내가 아직 다 가시지 않은 산채에서, 군터는 살라스의 보고를 들었다. 북쪽으로 움직인 탐마가 자콥 트라소프가 움직이기 시작했음을 알렸다. 그러나 황자의 동향 따위는 사실 알 바 아니었다. 군터의 관심사는 따로 있었고, 살라스도 그걸 잘 알았다.
“보리스 공자는 발을 뺄 생각인 것 같더군요.”
“훌륭한 판단입니다.”
같이 듣고 있던 모페이브가 추임새를 넣었다. 요 근래 빡빡한 일정으로 체력이 바닥나다시피 한 그는 눈에 띄게 초췌해졌다. 그나마 산채를 점거하고 이틀 정도 푹 쉰 후에야 그럭저럭 회복해서 이 정도였다. 만약 고된 일정이 더 이어졌다면 그는 정말 쓰러졌을지도 모른다.
“장군.”
주름진 눈이 답을 바라고 있다. 잘 알지만, 이번에도 군터는 시원하게 답해주지 못했다. 자신의 마음을 여전히 그 스스로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보리스에게 다 물려주고 솔롬을 떠나면서 모두 털어냈다 여겼다. 과정이 순탄치는 않았지만 어쨌든 위험한 변수가 될 수 있는 키리스트까지 해결했다. 할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해주었다. 이 이상으로 개입할 수는 없다. 그러니, 이제는 떠나야 한다. 하지만.
[조금 더 지켜보지.]
그렇게 말하고서, 군터는 굳이 한 마디를 덧붙였다.
[먼 길을 가야 할 테니 충분히 쉬어두도록.]
“먼 길이라 하심은?”
살라스가 물었다.
세워 둔 계획 같은 것은 없다. 막연하게 제국 밖으로 떠나야하지 않을까 생각만 했을 뿐.
남쪽은 안 된다. 한창 시끄러운 곳이기도 하고, 대협곡을 넘어가면 아바시스다. 그러니 제외.
북쪽은 익숙하지만 역시 제외다. 북쪽으로 국경을 넘어가봐야 심심한 초원, 거기서 더 올라가면 생명체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혹한의 땅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 서쪽, 아니면 동쪽인데.
[서쪽.]
연합왕국의 땅을 지나 그 너머로 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실비아 덕분에 조금이나마 들은 바가 있는 동쪽보다는 아무것도 모르는 서쪽 땅이 더 끌렸다. 더 많은 미지를 경험하고 싶은 마음. 자잘한 여흥일지라도, 조금이라도 더 무료함을 달랠 수 있다면 그걸로 좋지 않은가.
제국이 세상 최대, 최고, 최강의 국가라 하지만 그리 외치는 자들도 세상을 다 알지는 못한다. 어쩌면 이 세상에는 제국보다 더 넓고 강력한 국가가 있을지도 모른다. 세상에서 가장 현명하다 하는, 어쩌면 쿠엘단조차 알지 못하는 신비가 널려 있을지도 모른다.
흥분되지는 않는다. 그래도 약간의 기대는 있다. 아니면 희망이거나.
“서쪽이라. 얼핏 듣기로 그쪽은 죄 불모지뿐이라고 하던데.”
“미지의 땅이지요. 얻을 게 없다 생각했기에 황제의 군대도 곧장 말머리를 돌렸다 하지 않습니까.”
모페이브가 싱긋 웃었다. 결코 쉽지 않은 여정이 될 터인데도 허약한 술사는 전혀 걱정되지 않는 것 같았다.
* * *
자콥 트라소프는 활짝 열려 있는 리비암의 성문을 보며 상념에 잠겼다.
그 옛날, 그는 야음을 틈타 도망치듯 황도를 빠져나왔었다. 아니, 도망치듯이 아니다. 실제로 도망친 것이 맞다. 만약 황도에 계속 머물렀다면 그는 지금 이렇게 멀쩡히 숨을 쉬고 있지 못했을 것이다.
“주인 잃은 도시가 새 주인을 환영하는 듯합니다.”
자이드라 멕시스가 아첨 같지 않은 아첨을 날렸다. 그러나 그 말이 가벼운 농담에 불과함은 그들 모두가 알고 있었다.
저 성문은 어제까지 닫혀 있다가 오늘 열린 것이 아니다. 저 문은 닷새 전에도, 보름 전에도, 한달 전에도 지금처럼 활짝 열려 있었다. 누가 드나들든 개의치 않겠다는 듯이.
말 그래도 주인 잃은 도시다. 주인 없는 도시다. 제국 제일의, 세계 제일의 도시는 이렇듯 무방비하게, 제법 오랫동안 방치되었다.
그러나 그것도 오늘로 끝이다.
“드시지요.”
한참 전부터 몸을 들썩이던 이들이 앞장서서 길을 열었다. 그래도 그들은 활짝 열린 성문을 먼저 넘지는 않았다. 그럴 수도 없었다. 성문 앞까지 나와 그들을, 황도의 새로운 주인을 맞이하는 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전하.”
“어서 오십시오.”
“줄곧 기다리고 있었습니다.”한쪽은 교단의 인사들. 그리고 다른 한 쪽은 이 지경에 이르기까지 황도에 남아있던, 혹은 이전에 떠났다가 뒤늦게 소식을 듣고 돌아온 귀족들이었다.
황도의 귀족들은 바보가 아니었다. 바보도 있긴 했지만, 그런 자들은 진작 다 죽어 나갔다. 그들은 자신들이 휩쓸린 난리가, 실은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일으킨 것임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들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가지고 논 자가 제국의 수호자였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은 떠났다. 떠나지 않은 자들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죽은 듯이 납작 엎드렸다. 그렇게 이 거센 폭풍이 다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이제야 그 기다림이 끝났다. 제국의 수호자, 군주 키리스트는 종적을 감췄다. 물론 말이 종적을 감춘 것이지, 그들 모두 얼추 상황은 짐작했다. 그들도 눈이 있고 귀가 있었으니까.
얼마전 군주 줄카와 정체 모를 초월자 하나가 황도에 입성했고, 황궁 깊숙한 곳에서 한바탕 혈전이 벌어졌다. 그 후에 키리스트가 종적을 감췄으니, 그들 모두의 머릿속에 자연히 어떤 참람한 상상이 떠올랐다.
“그간 모두 고생이 많으셨소.”
고개 숙인 모든 이들을 말 위에서 내려다보며, 자콥 트라소프는 자연스럽게 앞으로 나아갔다. 그는 제 집에 돌아온 것처럼 태연하게, 멈추지 않고 훤히 뚫린 대로를 따라 황궁으로 향했다.
“전하.”
황궁 입구. 이번에는 대열을 맞추어 늘어선 군인들이 그를 맞았다.
“장군.”
이번에는 자콥 트라소프도 말에서 내렸다. 그것이 법도였다. 이 도시가, 이 궁궐이 주인을 잃기 전에 지켜지던 법도.
그가 스스로 말에서 내리자, 황궁 수비대장은 그제야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것은 인정이었고, 황궁의 새로운 주인에게 취하는 마땅한 예의였다.
“길었습니다. 이제야 옥좌가 정당한 새 주인을 맞이하게 되었으니, 오랫동안 지속된 제국의 환란이 끝을 맞이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당연히 그리 될 것이오. 자, 갑시다.”
자콥 트라소프는 그의 새로운 신하와 함께 당당히 황궁에 들어섰다.
그리고 그날. 제국에 새로운 황제가 탄생했다.
* * *
“결국 늦고 말았군.”
힐난하는 투의 말에 맹금의 그것을 닮은 눈매가 더욱 매섭게 변했다.
“서둘렀더라도 달라지는 건 없었을 거요. 아니, 오히려 낭패를 봤겠지. 우리가 먼저 도착했더라면 놈들은 성문을 닫아걸고 결사항전 했을 테니까.”
“지금이라고 뭐가 다른가? 놈들이 새 주인을 세웠으니, 한껏 사기가 오른 채로 우릴 맞이할 것 아니오.”
“어리석은 말이로군.”
“뭐요?”
면전에서 대놓고 모욕을 받은 거한이 몸을 일으켰다. 과할 정도로 큰, 그래서 입술 밖으로 튀어나온 두 개의 송곳니가 으르렁거리는 숨소리에 맞춰 들썩였다. 그러자 맞은편에 앉아있던 사내도 허리를 폈다. 그의 몸보다도 큰 두 쌍의 날개가 양옆으로 반쯤 펼쳐졌다.
“사기가 오른 적은 피하면 그만이오. 우리의 목적을 잊었소? 우리는 카라누르를 점령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오. 그건 불가능하오. 이룰 수 없는 달콤한 꿈일 뿐이지.”
“으음.”
“놈들의 사기가 올랐다? 피하면 그만이오. 굳이 놈들과 맞서 싸울 필요는 없소. 전장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우리 발 딛는 곳 어디든 전장이 아닌가.”
“그쯤 했으면 됐소. 펠모리 공도 이해했을 거요.”
“우리끼리 언쟁해서 얻을 게 뭐요?”
“그래요. 거 왜들 언성을 높이고 그러십니까.”
지켜보고 있던 이들이 한마디씩 끼어들며 냉랭한 분위기를 환가시켰다. 펠모리라 불린 큼지막한 송곳니의 사내도 콧방귀를 끼며 도로 자리에 앉았다.
“변한 것은 없고, 변할 것도 없소. 우리는 당초의 전략대로 움직여야 하오. 까놓고 말해서 지금까지 손에 넣은 영역을 그대로 굳히기만 해도 이 전쟁은 우리의 승리라 할 수 있소.”
“맞는 말이오. 하지만 쉽지 않을 거요.”
“그래요. 그러니…….”
아바시스의 한 군영에서 열린 지휘관 회의는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다음 날. 셋으로 나뉜 아바시스의 대병력이 각기 다른 방향으로 진군을 개시했다.
* * *
황도를 수복한 제국의 새 황제, 자콥 트라소프는 아바시스의 침략군에 맞서 군을 일으켰다. 그것은 일종의 선언이었다. 각자도생하고 있던 제국 중부의 각 총독, 성주들에 새 황제의 깃발 아래 모일 것을 명하는.
반응은 다양했다. 새 황제의 선언에 적극 호응하며 군을 일으킨 자들도 있었고, 무시한 자들도 있었으며, 새 황제 자체를 인정하지 못하겠다 반발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어찌 됐건, 새 황제의 이번 선언은 제국이 본격적으로 아바시스의 침략에 맞서기 시작했다는 데 의의가 있었다. 좌절하고 있던 제국의 신민들은 그들의 새로운 황제를 보며 희망을 얻었다. 침략군의 칼날을 피해 도망치기 바빴던 이들이 자발적으로 무기를 들고 모여들었고, 순조롭게 이어지던 아바시스의 진군에도 제동이 걸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처음으로 제대로 된 저항에 맞닥뜨리자, 아바시스군은 즉각 태도를 바꿨다. 정복자로서가 약탈자로서, 그들은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짓밟기 시작했다. 논밭을 태우고, 점령 대신 약탈을 거듭했다.
“긴 싸움이 되겠군요.”
그즈음, 군터 일행은 그들이 머물던 산채를 떠나 한참 서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딱히 탐마를 풀지 않았음에도, 이동 중에 온갖 소식이 자연스레 들려왔다. 그만큼 제국 전역은 한바탕 몸살을 앓고 있었다. 지금껏 그래왔던 것 이상으로.
군터 일행은 일부러 도시나 성은 피해서 움직였다. 물자 보급을 위해 몇몇 마을에 들르기만 했다. 그런데도 전쟁의 양상을 얼추 파악할 수 있었다.
살라스를 비롯한 몇몇은 몸이 근질거리는 듯했다. 그들은 이따금 건너들은 전황을 이야기하며 이럴 것이다, 저럴 것이다 저들끼리 토론하기도 했다.
의미 없는 행동이었다. 그들은 지금도 전장으로부터 멀어지고 있었으니.
“정말 황량하군요.”
간만에 멈춰 선 말 위에서 모페이브가 중얼거렸다.
그 말마따나, 탁 트인 전경은 후련하기보다는 쓸쓸했다. 보이는 것은 온통 누런 황무지뿐이었다. 생명의 기척이라고는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는.
“역시 믿기지 않는군요. 여길 건너오는 자들이 있다니. 정말일까요?”
얼마전 들른 마을에서 들은 이야기였다. 아주 간혹, 거지꼴을 한 이방인들이 이 죽은 땅 너머에서부터 넘어오곤 한다는 것이다. 언어도 통하지 않는 그들은 스스로를 상인이라 밝혔지만, 팔 만한 물건을 지닌 이들은 없었다고 했다. 본래는 상품을 잔뜩 가지고 있었는데, 저 황량한 땅을 건너오며 모두 잃어버렸다나?
그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분명 이 황무지 너머에도 사람의 땅이 존재한다. 제국은 알지 못하는 미지의 세상이 펼쳐져 있는 것이다.
[가지.]
“예. 가시지요.”
살라스가 시원하게 웃으며 팔을 벌렸다. 때마침 불어온 바람이 그의 전신을 쓸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