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터-1061화 (1,061/1,064)

1061화

황도의 공기가 변했다.

리비암으로 보냈던 첩자가 가져온 급보에 자콥 트라소프는 생각에 잠겼다.

늘 있던 정기적인 보고가 아니다. 주변의 눈치를 볼 여유가 없다는 듯 예고 없이 날아든 급보다. 현장의 정보원은 그만큼 이 정보를 전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판단했다는 뜻. 그런 것치고는 보고서의 내용이 부실하지만, 정보원은 그만큼 이 사안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했다는 거다.

황도의 공기가 변했다? 이건 즉, 그 늙은 괴물에게 어떤 일이 생겼다는 의미다. 그리고 그 원인은 어렵지 않게 짐작이 됐다.

‘그 둘이 노괴와 접촉한 거다.’

줄카에게 언질을 들은 바가 있다. 그는 누구에게든 빈말을 할 자가 아니니, 분명 말했던 대로 키리스트에게 향했을 터. 두 군주에, 새로운 초월자 하나까지 더해 셋. 만약 환야가 정말 키리스트와 함께 하고 있었다면 무려 초월자가 넷이나 얽힌 대사건이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다.

“어찌 생각하는가.”

자콥 트라소프가 입을 꾹 닫고 있는 사내에게 물었다.

이제는 기억 속 이전의 모습이 어색하게 느껴지는, 청년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은 외관의 사내. 자이드라 멕시스.

그의 회춘은 많은 이들에게, 특히 노회한 권력자들에게 충격을 안겨주었다. 질시, 두려움, 혐오. 온갖 감정을 담은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면서도 그는 더없이 당당했다.

하지만 지금. 그는 깊이 생각에 잠긴 듯 보였다. 사안이 사안이기는 하다만, 그가 여태 이토록 진중한 모습을 보인 적이 있던가?

“신중해야 합니다.”

“기다리자는 말인가?”

“아닙니다. 이 이상 시간을 끌었다가는 아바시스 놈들이 황도까지 들이닥칠 겁니다. 움직이기는 해야지요. 다만…황도의 상황이 어찌 돌아가고 있는지는 모르지 않습니까.”

황도의 중요성은 말할 필요도 없다. 아바시스 놈들의 지저분한 군홧발이 그곳에 자국을 남기게 둘 수는 없다. 제국인으로서의 자존심이나 명분 때문만은 아니다.

황도 리비암은 세계 제일의 도시이며, 세계 제일의 보물창고다. 도시 심층부에 자리한 황궁의 존재 때문이다. 황궁에는 그곳에서 나고 자란 황족들조차 다 알지 못하는 온갖 신비로운 힘과 보물들이 널려 있다. 그것을 손에 넣을 수 있다면 제국의 주인을 자처하는 데 있어 큰 도움이 되리라.

하지만 그 탐스러운 보물창고에는 파수꾼이 존재한다. 세상에서 가장 강력하고 위험한 파수꾼이. 심지어 그 파수꾼은 음흉한 속내를 지닌 뱀이기도 하다.

“…….”

자콥 트라소프가 생각에 잠긴 사이, 자이드라 멕시스는 그를 괴롭히는 기묘한 감각에 다시 집중했다.

‘이건…….’

답답하게 목을 조이던 목줄이 한순간에 사라진 느낌.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의 시원함이었지만, 동시에 두려움이 밀려왔다. 부모의 등만을 바라보며 조심스레 걸음을 옮기던 아이가 마찬가지로 한순간에 앞서가던 부모를 잃은 것 같은 막막함.

‘틀림없다.’

비록 용아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그였지만, 그래도 본능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이 있었다. 그는 그에게 힘과 생명을 안겨주었던 주인이 더는 존재하지 않음을 확신했다.

‘결국 패했는가.’

주인이 키리스트를 찾아갈 것은 알고 있었다. 충돌이 일어날 것도 예측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감히 짐작하지 못했다. 그래도 승패가 갈려야 한다면 주인이 승리하기를 바랐다. 주인이 패하여 죽기라도 할 경우, 자신에게까지 불똥이 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기껏 젊음을 손에 넣었는데 얼마 누리지도 못하고 다시 잃는다면 너무 허무할 테니까.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주인의 죽음을 확신한 지금까지 몸에는 어떠한 이상도 없었다. 매끈한 얼굴에 주름이 생기지도, 머리카락이 도로 희게 변하지도 않았다. 여기까지만 놓고 보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자유를 되찾은 것 아닌가.

‘두고 봐야지.’

세상 일이 속 편한대로만 흘러가면 얼마나 좋겠는가. 안일함에 취해 있다가 나중에 가서 뒤통수를 맞느니, 할 수 있을 때 최대한 조심해두는 편이 좋다.

‘키리스트가 승리했다고 해도 멀쩡하지는 않을 것이야.’

물론 키리스트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다. 군주 환야가 그의 편에 섰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2대2인 셈인데, 황도가 키리스트의 본거지라는 점을 감안하면 최악의 경우 그가 무난히 승리했을 수도 있다. 설마하니 그의 주인이 그렇게 허술하겠냐마는, 모든 가능성을 고려해야 한다.

‘그렇다 해도…문제될 것은 없지.’

키리스트의 행적을 토대로 그의 속을 헤아려보면, 그가 원하는 것은 제국의 파멸이다. 자콥 트라소프의 파멸이 아니라. 그는 제국을 무너뜨리려 한다. 최대한 자연스럽고 세련된 방식으로.

때문에 그는 제국 내 혼란을 야기했고, 아바시스를 끌어들였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직접적으로 아바시스의 손을 들어주지는 않는다. 직접 나설 수 없는 이유가 있는 것인지, 아니면 또 다른 계산이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자가 정말 마음을 먹었다면 이런 상황은 오지도 않았다.’

황제의 피를 물려받은 이들은 진작 모두 땅에 묻히고, 제국 전역이 혼란의 불길에 휩싸였겠지. 하지만 지금, 제국의 북부는 황제의 피를 이은 자콥 트라소프의 손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는 황도를 포함하여 제국 중부까지 집어삼키려 드는 중이고. 이 모든 일은 키리스트의 용인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애석하구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은 불확실한 가능성일 뿐이다. 지금의 황도는 그야말로 괴물의 쩍 벌린 아가리나 마찬가지인 곳. 발을 들여봐야 좋을 일이 없을 것은 불 보듯 뻔하다. 빠질 수 있다면 당연히 빠지고 싶지만, 핑계거리가 궁하다. 이전이었다면 몸이 편치 않다며 드러누웠겠지만, 젊음을 되찾은 이 몸은 누가 보더라도 강건하기 그지없다.

‘별 수 없지.’

살다 보면 이런 순간이 몇 번이고 찾아오기 마련이다.

운을 시험해봐야 할 때였다.

운이 따라준다면 괴물의 뱃속에서 보물을 찾을 수 있을 것이고, 그게 아니라면…괴물의 이빨이 얼마나 날카로운지 몸으로 확인하게 되리라.

* * *

“빠지는 게 상책입니다.”

“안 되는 일에는 미련 갖지 말자고.”

“나서지 않는 게 중책이지요.”

보리스는 뻔한 말장난을 되풀이하는 로우렌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러자 로우렌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욕심에 눈이 돌아간 자들이야 차고 넘치지 않습니까. 그자들이 마음껏 날뛰도록 두시지요. 우리가 피를 봐야 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황도가 아니냐.”

“제아무리 값진 보물이라도 지킬 힘이 없으면 없느니만 못합니다. 잘 아시지 않습니까? 우리는 아직 판니른조차 완전히 장악하지도 못했습니다.”

“안다. 황도의 보물에는 관심 없다. 나는 황도를 도모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공적을 말하는 거다.”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잘 생각하셔야 합니다. 공을 세울 수 있는 기회일 뿐입니다. 이미 손에 쥔 것도 차고 넘치는데 굳이 불확실한 기회, 그것도 위험할 게 뻔한 것에 굳이 몸을 던져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그래. 내 욕심이 컸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공자님께서 증명하셔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미 공자님이 크렘보르이고, 크렘보르가 공자님이니까요.”

“글쎄. 당장 너만 해도 나를 여전히 공자님이라 부르지 않느냐.”

로우렌이 씩 웃었다.

“아, 이건 습관입니다. 자랑스러운 특권이기도 하고요.”

“퍽이나.”

둘의 웃음은 오래 가지 않았다. 곧 입가에 웃음기를 거둔 보리스가 담담히 물었다.

“아버지의 소식은 없나.”

“예. 아직.”

모든 것을 물려주고 떠난 부친. 보리스는 부친을 돌아오도록 설득할 자신도, 마음도 없었으나 그 행방만은 파악해두고자 했다. 딱히 어떤 의도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미련이라고 해야 할까. 어떻게든 그 종적만이라도 알아 두지 않으면, 영영 부친을 다시 볼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솔직히, 약간의 약은 계산도 있었고.

‘초월자라.’

이전에는 그 의미에 대해 어렴풋이 짐작만 했었다. 제국의 군주들이 모두 초월자라 하지 않던가. 그렇다면 그의 부친 역시 그들과 같거나 비슷한 선상에 섰다는 뜻.

단순히 대단하다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황위를 눈앞에 둔 황자의 반응을 살피니 그렇게 가볍게 넘어갈 주제가 아닌 듯했다.

특히, 젊음을 되찾은 자이드라 멕시스에 대한 반응을 보며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용혈을 얻었음을 숨기지 않았다. 군주 줄카의 은혜를 입어 꺼져가던 삶에 불을 지필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 후, 그의 회춘에 대해 어떻게든 알아보려던 온갖 수작질이 거의 사라지다시피 했다던가.

힘이 있고, 눈치는 더 있는 자들이니 더 파고들어봐야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아차린 거다. 그리고 어쩌면, 위대한 존재의 노여움을 살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거고.

초월자란 그런 존재였다. 세상을 쉽게 보는 권력자들조차 알아서 눈치를 살피게 만드는.

물론 그것은 초월자이면서 동시에 제국의 성립시기부터 맹위를 떨쳐온 군주의 이름값이기도 하겠지만, 어쨌든 초월자라는 존재는 단순히 강력하기만 한 전력 이상의 의미였다.

고작해야 피 몇 방울을 얻고 종이 된 자이드라 멕시스만 해도 저 정도였다. 그렇다면 초월자의 피를 이은 후손은 어떻겠나.

후광에 의존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있는 무기를 굳이 쓰지 않는 것도 미련한 것 아닌가.

“쯧.”

입맛이 쓰다. 어느새 속물이 되어버린 자신이 썩 달갑지 않았다. 그러나 받아들여야 한다. 속물이 되어야 한다. 크렘보르 가문은 이제 막 일어섰다. 권력이란 것은 한정되어 있고, 누구도 나누고자 하지 않으니, 기존의 권력자들은 새로이 일어나려는 권세가를 반기지 않는다. 기회만 생긴다면 어떻게든 물어뜯고, 발목을 잡고 늘어지겠지.

‘그래. 지금 같은 시기에 욕심은 곧 독이다.’

어찌 보면 황도 수복은 환상이다. 제국의 심장이니 축복받은 도시니 하지만, 설령 황도를 수복한다고 해도 당장은 큰 의미가 없을 것이다.

지금 황자에게 가담한 세력들은 거의 모두가 북부에 근거지를 두고 있다. 본래 황도에서 행세하던 귀족들은 대부분 죽었거나, 떠돌이 도망자 신세가 되어 떠나갔을 터. 즉, 황도는 텅 빈 것이나 다름없다. 즉, 깃발을 꽂는 자가 주인이 되는 셈.

모두가 같은 생각일 것이다. 자연히 다툼이 생기겠지. 황자가 그들을 중재할까? 당면한 대적, 아바시스가 있으니 일단 시늉은 하겠지. 하지만 그 다음에는?

아바시스를 물리치지 못한다면 황도고 뭐고 아무런 의미도 없다. 물리친다면? 그때는 어떨까?

황자는 많은 이들의 도움을 받았다. 그가 황위를 잇고 황제가 된다면 그 조력자들, 공신들에게 마땅한 대가를 돌려줘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남는 게 무엇이겠는가. 그는 최대한 적게 주려 할 것이고, 그러려면 공신의 머릿수를 줄이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방법이다.

‘황도는 다시 한 번 피바다가 될 확률이 높다.’

벽지의 귀족들은 중앙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다. 그들이 아직 현지 사황을 제대로 파악도 못한 황도에 침을 질질 흘려 대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불구덩이에서는 멀리 떨어지는 것이 상책인 게지.’

욕심을 내려놓고 한 걸음만 떨어지니 시야가 달라진다. 보리스는 마침내 마음 편히 차를 들 수 있었다. 하품을 찍찍 해대는 로우렌의 얼굴이 이제 더는 밉상스럽게 보이지 않았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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