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터-1060화 (1,060/1,064)

1060화

군터는 반쯤 무너진 벽에 등을 대고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키리스트의 검은 그의 육신뿐 아니라 정신, 영혼에까지 깊은 상처를 남겼다. 그러니 전투가 끝나고 긴장이 풀리기 무섭게 군터의 영육이 무너지듯 허물어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까지 억지로 버티고 있던 반동까지 한번에 밀려오니, 군터로서도 도저히 견딜 재간이 없었다.

이런 종류의 고통은 절대 익숙해질 수가 없다. 단순한 육체의 상처라면 인내심으로 견디면 그만이나, 정신과 영혼에 남은 상처는 그저 시름하는 것 외에는 답이 없다.

“…….”

군터는 그도 모르는 사이 입을 비집고 나온 피 가래를 뱉어냈다. 그리고 두 초월자가 쓰러진 자리를 곁눈질했다.

그들이 쓰러진 곳. 정확히는 그들의 육신이 쓰러진 곳에서 강렬한 존재감이 감돌았다. 그들의 육신은 쓰러져 식어가고 있지만, 영혼은 여전히 건재했다. 그 영혼들 역시 적잖이 상처를 입은 탓에 위태로운 느낌이 있었으나 그럼에도 존재감만은 육신에 깃들어 있을 때 이상이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키리스트의 영혼이었다. 그의 사나운 영혼은 아직까지도 주변에 칼날의 바람을 일으키고 있었다. 땅이 패이고, 아직 다 무너지지 않은 건축물들이 무형의 칼날에 휩쓸려 힘없이 갈라지고 무너졌다.

반면, 줄카의 영혼은 잠잠했다. 곧 다가올 마지막을 가만히 기다리겠다는 듯이.

마지막. 마지막이라.

영생불멸할 것 같은 초월자들에게도 최후의 순간은 다가오는 것인가. 어쩌면 저들은 서로에게서 끝을 보았는지도 모른다.

이제와 보니 그들은 분명 지쳐 있었다. 사납게 사방을 휩쓰는 키리스트의 영혼에게서도 사나움 안에 희미하게 비치는 노곤함과 평온함이 존재했다.

하지만.

[난 아니다. 꺼져라.]

군터는 상처입은 그를 향해 전과 다르게 다가온 죽음을 밀쳐냈다. 완전히 쓰러져 안식을 취하고자 하는 몸뚱이를 억지로 일으켰다. 깊고 길게 호흡하고, 힘을 불어넣었다. 온몸에 난 상처에서 지독한 냄새를 풍기는 죽은 피가 새나왔다.

‘아직은 아니다.’

언젠가 저들처럼 지쳐서 스스로를 놓아버릴지도 모른다. 저들은 그의 선배였다. 자신이 걸어온 길을 저들은 이미 오래전에 걸었으리라. 그렇다면 인정하고 싶지 않더라도, 언젠가 저들의 모습이 자신의 모습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그건 미래의 일.

[바랐던 대로 잠드시오.]

아직은 이해가 되지 않는 선배들에게 심심한 인사를 건네고 돌아섰다. 어쩐지 부쩍 낡은 것 같은창을 지팡이처럼 짚고서 힘겹게 걸음을 옮겼다.

우우우-!

감각이 조금씩 회복되면서 방금까지는 들리지 않던 것들이 들리고,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울리는 통곡 같은 울음. 그것은 정령의 비명이자 세상의 울림이었다.

생명이 죽음을 맞이하면 육신은 썩어 흙이 되고, 영혼은 적막한 강에 스며들어 거대한 흐름의 일부가 된다. 그러나 초월자는 경우가 다른 듯했다. 그들의 영혼은 세상을 구성하는 절대적인 흐름에 휩쓸리지 않았다. 그들의 영혼이 너무나 거대하고 강대하기 때문일까. 적어도 아직까지, 저 두 영혼은 흩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영혼을 다루는 데 능숙한(이제는 그 스스로도 자신의 재주가 괜찮은 수준이라고 자평하는) 군터도 저들의 영혼에 손을 쓸 엄두가 나지 않았다.

군터는 저 영혼들, 특히 키리스트의 사나운 영혼에 어떻게든 조치를 취해야 하는지 잠시 고민했다.

키리스트는 죽었다. 엄밀히 말하면 육신이 죽은 것이다. 그러나 그 영혼은 아직까지 건재하다. 그렇다면 키리스트는 죽었다고 봐도 되는 것일까. 이곳까지 온 목적을 이뤘다고 봐도 되는 것일까.

군터는 똑같이 초월자였고, 죽음을 맞이한 아간투스베록을 떠올렸다. 아간투스베록의 죽음은 제법요란하긴 했지만 그 외에 특별히 신경이 쓰이는 부분은 없었다. 심지어 군터는 아간투스베록의 죽음이 남긴 잔재 중 일부를 직접 수습하기도 했다.

그러나 키리스트는 아간투스베록과 달랐다. 같은 초월자라고 해도 격이 다른 것일까? 같은 사람이라고 해도 허약한 난쟁이와 강력한 거한이 여러모로 현격한 차이를 보이는 것처럼?

어쩌면 두려움이었을지도 모른다. 키리스트의 영혼을 저대로 두면 안 될 것 같다는 막연한 느낌. 그대로 돌아서서 키리스트의 영혼이 자연스레 흩어지기를 기대해도 되련만, 군터는 끝내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아직도 미련이 남았나.]

영혼은 한 존재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으나 그렇다 해도 결국은 일부에 불과하다.

보이지 않는 칼날의 폭풍이 더욱 거세게 몰아쳤다. 저 사나운 영혼에 이성은 몰라도 감정은 존재한다는 뜻이다.

군터는 그대로 키리스트의 영혼에 다가갔다. 영혼만 남은 키리스트는 그리 위협적이지 않았다. 이제는 무너뜨릴 구조물도 존재하지 않아 주변의 허공과 땅만을 할퀴고 있는 무형의 칼날은 군터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다. 그것은 날카롭기만 할 뿐, 위력적이지는 않았으니까.

사납게 날뛰지만, 그러면서도 알아서 빗겨가는 것 같은 무형의 칼날들 틈에서 군터는 키리스트의영혼에 난잡하게 떠도는 감정의 편린들을 느꼈다.

증오. 후련함. 애틋함 등등. 상이한 감정들이 한데 뒤엉켰다. 군터는 그 감정의 덩어리, 즉 미련을 향해 창을 내질렀다.

[가차없군. 그리고 훌륭해.]

흩어지는 영혼 속, 아니 그보다 더 깊고 먼 곳에서부터 한줄기 소리가 머릿속에 전해져 왔다. 심심한 인사 같은 그 말에, 군터는 대꾸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그리고 한 걸음을 떼었을 때, 짤막한 웃음소리가 환청처럼 희미하게 머릿속에 울렸다.

* * *

그림자 검사단은 줄카가 황도로 오기 전 신경 썼던 두 가지 중 하나였다. 다른 하나는 키리스트와 협력하고 있는 또 다른 군주 환야였지만, 그는 줄카와 군터가 황도에 도착하기도 전에 이곳을 떠났다. 그러니 남은 것은 그림자 검사단 뿐.

줄카는 그들을 제지하는 데는 용아와 군터의 휘하 병력이면 충분할 거라 했었다. 그러나 그것은그 정도면 그들이 볼 일을 마칠 때까지 그림자 검사단의 발을 묶을 수 있으리라는 뜻이지, 언제까지고 계속 버틸 수 있을 것이라거나 그림자 검사단을 패퇴시킬 수 있으리라는 뜻이 아니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그림자 검사단은 가장 오래된 군주를 섬겨온 가장 오래된 특별한 무력 집단이었다. 그들의 저력은 용의 피를 마시고 다시 태어난 전사들 이상이었다.

그렇기에 귓가에 들려오는 소란스러운 소리에 군터가 걸음을 빨리 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정작 그가 소란의 현장에 다다르자 그곳에 있던 모든 이는 언제 서로 혈전을 벌였냐는 듯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이건…….”

제일 먼저 입을 연 것은 꽤 나이가 있어 보이는 무장이었다. 그리고 그와 거의 동시에 붉게 몸을 물들인 살라스가 반갑게 그를 맞았다.

“장군. 다 끝난 겁니까?”

셋이 겨루었다. 그런데 하나만 돌아왔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결국 이렇게 되는군.”

용아 중 유독 붉은 안광이 형형한 전사가 탄식하듯 중얼거렸다. 사실 용아 중 그를 비롯한 몇몇은 이미 그들의 주인이 그들을 떠났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두려우면서도 의지가 되던 아득한 존재감이 어느 순간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것은 해방이었으며, 동시에 상실이었다. 이런 생경한 감정을 어찌 표현해야 할까. 굳이 비유하자면 부모를 잃은 아이의 심정과 그나마 비슷하지 않을까?

자유를 얻었고, 안정을 잃었다. 이제부터 그들의 운명은 그들 자신의 것이다.

“그분께서는 어찌 되셨습니까.”

그는 자신보다 한참이나 어리지만 한참이나 올려다봐야 하는 초월자에게 늦게나마 경의를 표했다. 그것은 아마도 주인의 마지막을 함께했을 동맹에 대한 예우이기도 했다.

[원하던 바를 이루었다.]

“…그렇군요.”

전투는 완전히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그림자 검사들도 검을 도로 집어넣지는 않았지만 적당히 거리를 벌린 채 군터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군터는 그들의 시선을 느끼면서도 그들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대신 처음 입을 열었던 나이 지긋한 무장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나는…….”

[네가 누구인지 궁금하지 않다.]

말이 끊긴 무장의 얼굴이 더욱 딱딱하게 굳었다. 그는 잔뜩 가라앉은 눈으로 군터를 조심스레 살폈다.

여기저기 상처입은 몰골. 그야말로 처참하다는 표현이 더없이 적절한 외관이었으나 그 존재감은 이 작은 전장을 뒤덮고도 남았다.

‘틀림없다. 저자는 그들과 같은…….’

초월자.

그는 이 정체불명의 초월자에게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할지 잠깐 고민했다.

‘아니. 무엇을 망설이는가.’

그리고 곧 결론을 내렸다.

초월자를 두려워했다면 애당초 검을 뽑아 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의, 그들의 각오는 초월자와의 일전을 불사하고서라도 책무를 다하겠다는 강철 같은 의지의 발현이었다.

상대가 달라졌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이곳은 황궁. 제국의 중추다. 무뢰배들이 제 뜻대로 활개칠 수 없는, 그래서는 안 되는 곳이란 말이다.

“그렇군. 나 역시 마찬가지요. 이미 한 말이지만 다시 말하지. 이곳은 황궁이외다! 자격 없는 자들이 무장한 채 들어설 수 없고, 하물며 무도하게 행패를 부릴 수는 더더욱 없는 성지(聖地)지. 황궁의 안위를 책임지고 있는 몸으로서 경고하겠소. 그대들 전부, 지금 당장 물러가시오. 이미 벌인 일에 대해서는 책임을 묻지 않겠소. 허나 지금 이 순간 이후로도 계속해서 소란을 일으킨다면…우리의 모든 것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그대들을 단죄하겠소이다.”

필사의 각오를 담은 흉흉한 눈빛이 군터를 향했다. 그러자 살라스가 그를 비웃었다.

“웃기는 소리로군.”

“뭐라고 했나?”

군터를 향할 때는 도전적이면서도 조심스러웠던 눈빛이 살라스를 볼 때는 불처럼 뜨겁게 달아올랐다.

“네놈은 분명 소란을 원치 않는다 했다. 그저 주인이 돌아올 때까지 저들이 움직이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라 했지. 그런데 이제 와서 말을 바꿀 셈인가?”

“아니. 말을 바꿀 생각은 없다. 다만 우스운 소리라 우습다 했을 뿐이오.”

살라스가 눈을 가늘게 좁혔다.

“그대는 책무를 다하겠다고 했지. 말은 좋다만, 사실 한참 늦지 않았소? 저 검은 것들의 주인이 이곳에 틀어 앉아 이제껏 무슨 일을 벌였는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가?”

“…….”

“솔직해집시다. 내 주인, 그리고 이들의 주인께서 오지 않으셨다면 그대는 계속해서 눈과 귀를 가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척 숨죽이고 있지 않았겠소? 따지고 보면 우리가 그대의 기회가 되어준 것 아니오? 그런데 고맙다고 고개 숙이지는 못할망정 주인 행세를 하면서 우리를 무뢰배 취급하니, 그게 참 웃기단 말이오.”

여기저기서 이 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정곡을 찔렸든, 당치도 않은 모욕이라고 받아들였든, 살라스의 비웃음은 여럿의 마음에 불편한 자극을 가한 것 같았다.

[됐다.]

군터가 나서자 살라스는 언제 그랬냐는 듯 입을 다물었다.

[나 역시 원하는 바를 이루었으니 이제 여기서 더 있을 이유가 없다. 하지만 하나 묻지.]

“말씀하시오.”

[아바시스의 군대가 올라오고 있다.]

“…알고 있소.”

[어찌할 것인가.]

“말했듯, 우리의 책무는 황궁을 지키는 것이오. 상대가 누구든, 상황이 어떻든,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할 뿐.”

군터는 거기까지 듣고서 몸을 돌렸다.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는 그의 뒤를 살라스를 비롯한 수하들과, 이제는 주인을 잃고 자유가 된 붉은 눈의 전사들이 차례로 따랐다.

* * *

“우리는 이만 떠나겠습니다.”

황도를 나온 후. 용아 중 가장 붉은 눈을 지닌 전사가 대표로 나서 말했다. 군터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자유로워진 이 전사들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든, 그가 알 바는 아니었다. 세를 이루는 데 몰두하는 야심가였다면 무슨 짓을 해서든지 이들을 붙잡았겠지만, 군터는 아니었다.

“장군. 이제 어찌할 요량이십니까.”

멀어지는 용아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살라스가 군터에게 물었다. 할렌도, 모페이브도 같은 답을 기다리는 눈치였다.

[글쎄.]

군터의 눈이 남쪽을 향했다가 북쪽으로 옮겨갔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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