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터-1059화 (1,059/1,064)

1059화

쿵!

살과 피, 뼈로 이루어진 몸과 석재 벽이 부딪쳤는데 벽이 와르르 무너졌다. 군터는 통증 대신 시원한 느낌이 드는 오른쪽 가슴을 내려다보았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옆에는 인간의 형상을 완전히 집어던진 줄카가 선 채로 피를 쏟으며 비틀거리고 있었다.

어떻게 봐도 중상 이상, 빈사 미만이다. 몰골만 놓고 보면 빈사에 가깝지만, 아직 꺾이지 않은 기세가 그 정도는 아니라고 항변하는 듯했다. 하기야, 인간의 기준으로 초월자를 바라볼 수는 없겠지.

[이러다가는 정말 죽을지도 모르겠군.]

혈전의 와중에 뜬금없는 담화. 그러나 저 멀리 나가떨어진 상대도 위태롭게 숨을 고르고 있다. 이쯤 되면 서로 숨을 참고 몰아친다고 해서 결과가 바뀌지는 않는다. 지금 이 순간, 역설적이게도 그들은 여유로웠다.

[그래.]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건가.]

키리스트가 이미 한 번 똑같이 물었다. 지금 와서 똑같이 다시 묻는 것은, 이제는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지경까지 왔기 때문이었다. 저쪽도, 이쪽도.

한낱 비렁뱅이도 제 목숨을 끔찍이 여기기 마련이다. 아니, 생명이라면 모두 그렇다. 초월자라고 해도 목숨이 두 개인 것은 아니니, 줄카가 죽음을 각오하고 여기서 난적과 일전을 벌이고 있는 것은 따지고 보면 의아한 일이었다.

무엇을 위해 싸우는가. 무엇을 위해 목숨을 거는가. 이 싸움에 그만한 가치가 있나?

그리고 이 물음은, 사실 군터 자신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것이었다.

[아무것도 남기지 못했으니까.]

군터는 줄카의 과거를 알지 못했다. 듣지 못했고, 묻지도 않았다.

[삶에는 의미가 필요해.]

머릿속에 들어서는 짤막한 울림에 짙은 공허함이 느껴졌다.

[의미 없이 살아갈 뿐이라면 그게 무슨 가치가 있겠나.]

평범한 사람이 삶의 가치, 목적으로 두는 것들.

부귀영화? 명예? 사랑?

그런 것은 초월자들에게는 아무런 가치도 없다. 초월자와 초월자가 아닌 자들이 바라보는 세상은 전혀 다르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같은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렇기에 일찍이 쿠엘단은 자신을 비틀린 존재라고 자조했다던가. 그가 비웃은 것은 자기 자신이었으나, 다른 초월자들 역시 별다르지 않았다. 심지어 그 황제조차도.

끝내 쿠엘단은 이 세상에서 벗어났다. 줄카는 그를 이해한다고, 조금은 부럽다고도 했다. 그러나 자신은 그처럼 할 수 없다고도 했다.

그런 그는 이 세상에서 답을 찾고 있다. 삶의 의미를 찾으려 한다.

[마음에 차지 않아도 이것이 내가 남긴 마지막 하나다. 그것마저 사라진다면 그저 허망해질 뿐이야.]

그는 그 의미를 발자취에서 찾고자 했다. 키리스트는, 아간투스베록은 비웃었지만 군터는 그를 이해했다. 왜냐하면, 그 역시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차이가 있다면 줄카의 발자취는 이미 반쯤 무너지고 흐려졌지만 군터 자신의 것은 생생하게 맥동하고 있다는 것 정도일까.

[난 네가 여기까지 해주리라 기대하지는 않았다.]

[그런 것 같았다.]

줄카의 상태도 심각하지만, 군터 역시 별로 나을 것은 없었다. 그의 육신과 영혼은 이미 너덜너덜해진 상태였다. 섬뜩하기 그지없는 검은 그의 영육을 난도질해놓았고, 군터는 과거의 잊지 못할 경험을 다시 한번 하고 있었다.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보이지 않고, 보여서는 안 되는 그 강은 처음 생겨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늘 도도하게 흘러왔으리라.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강이 다가오는 것인지, 자신이 다가가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이 죽음에 다가가고 있다는 것.

[생각했던 것 이상이군.]

제국의 수호자니, 가장 오래된 군주니 어쩌니 해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강하지. 강했으니까 저 늙은이만 이곳에 묶어둔 거다.]

[내가 함께하지 않았다면 어쩌려고 했나.]

[결국 여기까지 함께하지 않았나.]

[죽을 생각이었군.]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힘의 차이는 확연하다. 이곳이 키리스트의 영지이며, 영지를 벗어난 탓에 이래저래 제약을 받는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줄카는 키리스트에 비하면 부족했다. 그것을 그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을 줄카가 여기까지 왔다는 건 그가 이곳에서 모두 마무리 지을 생각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식으로든.

발목을 잡혀 물속으로 함께 딸려 들어간 것 같긴 하지만 악감정은 들지 않았다. 여기까지 온 것은 자신의 선택이었으니까. 군터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휘청거리는 키리스트를 응시했다.

[당신도 마찬가지고.]

키리스트가 웃었다. 그렇게 느꼈다.

셋이 서로를 향해 뛰었다. 몸이 무거워진 줄카보다 군터가 조금 더 빠르게 나아갔다. 키리스트의 눈이 보였다. 반쯤 감은 것 같은 두 눈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피부가 따끔거렸다. 바람을 맞는 신체의 모든 부위가 그랬다. 익히 경험했듯, 키리스트의 검은 어디로든 날아올 수 있다. 급소를 찌를 수도 있고, 전혀 상관없는 곳에 날아들 수도 있다.

창과 검. 창이 먼저 닿아야 당연하지만, 이 순간에는 그렇지 않다. 키리스트의 검은 물리적인 법칙을 송두리째 무시했다. 그의 손에 들린 것이 검이 아니라 짤막하고 앙상한 나뭇가지였더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한계이지 않나.’

키리스트를 둘러싸고 있는 농밀한 죽음이 보였다. 그의 영혼은 이미 빛을 잃은 지 오래. 그러나 그는 여전히 움직이고 있다.

‘심장.’

예측은 무의미하다. 따라서 어디로든 날아들 수 있는 검은 무시한다. 그 대신 어디를 노릴지를 정했다.

긴장감은 없다. 내뻗는 창에 망설임은 없다.

챙-!

먼저 뻗는 창에 마중을 나오듯 검이 움직였다. 검과 창이 맞부딪치나 싶은 순간 검날이 창두부터 미끄러지듯 창대를 긁었다. 몇 번이고 반복된 일이지만 이번에도 역시 유려하기 그지없었다.

[아쉽지만 여기까지다.]

살짝 비틀린 창끝이 키리스트의 어깨를 긁었다. 군터는 반격을 대비했으나 고통은 없었다. 키리스트는 그를 그대로 지나쳤다. 처음부터 그는 이럴 작정이었으리라.

[우리의 싸움이지. 안 그런가?]

[그래. 그 말이 맞아.]

피를 뿌리며 다가오는 키리스트를 줄카가 기다렸다는 듯 맞이했다. 뱀의 비늘 같이 변한 피부가, 피를 뒤집어쓴 탓에 붉게 변한 전신이 열기를 내뿜었다.

그아아아아-!

쩌렁쩌렁한 포효가 울려 퍼졌다. 키리스트가 휘청거리며 검을 쭉 뻗었다. 동시에 줄카의 거검이 뚝 떨어져 내렸다.

콰직-!

용의 뼈로 만들어진 거대한 검이 단박에 부러졌다. 키리스트의 검이 빛살처럼 줄카의 심장을 향해 다가갔다.

* * *

키리스트의 검은 줄카의 몸속을 헤집었다. 그러나 검끝이 닿은 곳은 노렸던 심장에서 한참이나 벗어난 명치 부근이었다. 마지막 순간, 그의 육신이 그의 통제에서 벗어난 탓이었다.

[이렇게 될 줄이야.]

빗나갔지만, 그래도 치명적인 것은 변함이 없었다. 용의 힘을 품은 강대한 육신에서 생명의 불꽃이 사그라져갔다. 그리고 그건 키리스트 역시 마찬가지.

[지독한 늙은이.]

검은 부러졌다. 때문에 줄카는 부러진 검을 내던지고 갈고리처럼 만든 손으로 키리스트의 상처를 후벼팠다. 용의 앞발처럼 변한 그의 손은 그 자체로 흉기였기에, 죽어가는 육신을 잡아 뜯는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만약 그의 기력이 온전했다면 무리 없이 심장까지 움켜쥐었을 터.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그 역시 이미 한참 전에 한계에 다다랐기에.

[아쉽군.]

[내가 할 말이오.]

그들은 서로를 놓아주고 천천히 물러났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그렇게 서너 걸음쯤 물러난 그들은 흐릿하게 웃으며 쓰러졌다.

[아쉬움이 남는다. 그래서 더 좋은 것인가?]

[이것도 나쁘지 않지.]

먼저 숨을 멈춘 것은 키리스트였다. 그가 마지막 한 모금 숨을 뱉은 순간, 기다렸다는 듯 죽음이 그를 뒤덮었다. 하지만 그러기 무섭게 터져 나온 날카로운 바람이 승냥이처럼 달려든 죽음을 갈라놓았다. 그것이야말로 초월자의 영혼이 남긴 마지막 숨결이었다.

“…….”

그 마지막을 지켜본 군터가 걸음을 떼었다. 멀지 않은 거리였음에도 다가가기가 쉽지 않았다. 몸이 망가졌다는 것이 새삼 실감이 났다.

[거기에 있나?]

아직 십여 걸음 정도가 남았을 때. 줄카가 물었다.

[캄캄하군. 보이지 않아. 들리지도 않고.]

오래된 힘이 넘실거리던 공간이 위태롭게 일렁였다. 이 공간, 이 낯선 세상을 유지하던 줄카의 힘이 흩어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내가 마무리 짓고 싶었지만 결국 이렇게 되는군.]

쓰러진 줄카를 중심으로 생긴 붉은 웅덩이가 점점 덩치를 키웠다. 그 속에 죽어가는 용의 존재감이 느껴졌다.

[아바시스 녀석들도 쉽지 않은 게야.]

[내 알 바 아니오.]

줄카의 몸이 들썩였다. 웃고 싶은 듯했다.

[볼일은 끝났다는 건가?]

[황자는 인간의 세상을 바랐지. 그에게 그럴 자격이 있는지 증명할 수 있는 기회가 아니겠소.]

[그것도 그렇군.]

들썩임이 멈췄다. 흘러나오는 숨결이 가늘어졌다.

[이제 나는 어디로 가는가. 자네가 말한 그 강인가?]

[글쎄.]

평범한 생명이었다면 그럴 거라 말하겠지만, 줄카는 평범한 생명이 아니었다. 이제 그가 어디로 가게 될지는 알 수 없었다.

[마지막까지 외톨이 신세로군.]

균열이 닫히고, 일그러졌던 세상이 제 모습을 되찾았다. 용의 흔적은 이제 식어가는 살점과 그 밑에 퍼진 붉은 웅덩이뿐.

[역시 우리는 이곳과 어울리지 않아.]

짤막한 넋두리. 그것이 마지막 용이 남긴 한마디였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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