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8화
정예 중의 정예인 솔롬의 친위대 병사들에 용아들까지 더해졌다. 그런데 그에 맞서는 그림자 검사단은 조금도 밀리지 않았다. 아무리 이곳이 그들의 본거지라고 해도, 살라스로서는 자존심이 상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자존심이 상하는 것은 상하는 것이고, 상한 감정 때문에 싸움도 감정적으로 할 수는 없었다.
‘이놈들은 암살자다.’
탁 트인 곳에서 싸웠다면 모를까, 공간이 제한적인 이런 곳에서 암살자와 전투를 벌이는 것은 여러모로 애로사항이 많았다. 살라스는 머리 위에서 떨어져 내리는 적을 신경질적으로 밀쳐냈다.
밀리지는 않지만 밀어내지도 못하는 답답한 상황.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있던 방향에서 거센 함성이 들려온 것은 살라스의 몸이 후끈하게 달아오르던 순간이었다.
와아아아-!
살라스는 멀리서 다가오는 일단의 병력이 적도, 아군도 아님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뭐하는 놈들이지?”
살라스가 마침 등을 맞대고 있던 용아의 장교에게 물었다.
“글쎄. 궁을 지키는 놈들 아니겠나.”
“이제야?”
“생각이 많았던 모양이지.”
“흠.”
살라스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순간적으로 많은 것들을 떠올리고 지우느라 두통이 일 정도였다.
이곳으로 오면서 황궁 수비 병력을 생각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이곳은 제국의 심장이고, 가장 중요한 심장을 지키는 파수꾼들이 없을 리 없지 않은가.
하지만 줄카는 황궁 수비대가 그들의 싸움에 끼는 일은 없으리라 말했다. 아무리 키리스트가 황도를 장악했더라도 황궁 수비대까지 손에 넣지는 못했을 거라고 단언하면서.
그 믿음의 근거를 캐묻지는 않았다. 줄카는 초월자였고, 제국의 군주였다. 또한 군터의 동맹이기도 했다. 그가 그렇게 확신한다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리라 여겼다. 그리고 그 확신은, 적어도 지금까지는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이야기가 달라졌다. 멀리서 다가오고 있는 병력이 황궁 수비대가 맞다면, 이제 어찌해야 하는가.
“일단 물러나지.”
“물러나?”
반감이 느껴지는 대꾸에 살라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럼 어쩌자는 거냐. 둘을 모두 상대할까? 하나도 제대로 이겨내지 못하고 있는 판에?”
“우리가 물러났다가 놈들이 주군께 몰려간다면?”
“그때는 다시 놈들의 뒤를 잡으면 그만이다. 여기서 협공을 당하는 것보다는 훨씬 낫지.”
“으음.”
“그러니 물러난다. 당장.”
“…알겠다.”
살라스는 용아들이 하나같이 고참이라는 말로도 부족한 경험 많은 전사들임을 알고 있었다. 그들이 전사로서 보낸 세월은, 어쩌면 자신의 평생보다 길지도 모른다는 것도.
경험이 반드시 사람을 현명하게 해주는 것은 아니나, 현명함이란 꽃은 반드시 경험이라는 토양 위에서 자라나는 법. 하물며 평범한 용아도 아니고 장교씩이나 되는 자가 무식한 무부일 리 없다.
그러니 이 자 역시 알고 있으리라. 여기서 계속 버텨봐야 상황이 나아질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것을. 그는 그것을 알면서도 날을 세웠다. 함께 싸우고 있지만 소속은 다른 우군을 상대로 주도권 싸움을 건 것이다.
‘쓸데없는 짓이지.’
그러나 살라스는 그 유치한 다툼에 어울려줄 생각이 없었다.
‘어느 쪽이냐.’
생각이 많았던 모양이라고? 확실히 그렇다. 저들은 지금까지 침묵을 지켰다. 어느 쪽에 서야 할 깔끔한 이유가 없었던 거다. 그런데 여태 가만히 있었으면서 지금에 와서 개입하려 든다?
“어디까지 물러날 참인가.”
“길목이 좁고 길이 많지 않은 곳.”
황궁 수비대가 저 그림자 검사단 놈들 같은 암살자는 아닐 터. 다만 머릿수가 적지 않을 테니 싸운다면 반드시 좁은 길목에서 맞서 싸워야 한다.
‘놈들이 쫓아온다면 말이지.’
몰려오는 놈들과 맞서지 않고 물러났다. 이제 놈들이 취할 행동은 두 가지 중 하나일 것이다. 쫓아오던가, 쫓아오지 않던가.
쫓아온다면 적이다. 어느 한쪽이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싸워야 하리라.
쫓아오지 않는다면? 그때는 다시 한번 생각을 해야 한다.
“퇴각하라!”
살라스는 미련 없이 퇴각을 명했다. 그림자 검사단은 물러나는 그들을 보며 자리를 지켰다. 쫓을 생각은 없어 보였다.
“할렌. 어떤가.”
한껏 신경을 곤두세우고 물러나던 중. 살라스가 할렌을 찾았다.
새롭게 태어난 할렌의 감각은 살라스조차 따를 수 없을 정도로 예민했다. 특히 적을 감지하는 능력은 야생의 짐승이 천적의 기척을 감지하는 것만큼, 어쩌면 그 이상으로 뛰어났다.
“따라붙는 놈들이 있지만 몇 되지 않습니다.”
“나머지는?”
“암살자 놈들과 같은 곳에 머물러 있습니다.”
살라스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무래도 다시 한번 머리를 굴려야 할 것 같았다.
* * *
황궁 수비대장 히폰 라자미르는 그의 앞에 늘어서 있는 음험한 전사들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본래 이들에게는 여러 이름이 있었다. 본래 지닌 이름 외에, 다른 자들일 부르는 이름이.
그러나 작금에 이르러 이들에게 적절한 이름은 어둠일 것이다. 제국의 어둠.
그동안 이 도시에서 일어났던 온갖 참극. 그중 일부, 어쩌면 대다수의 배후에는 이들이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개입되어 있었으리라.
그것을 짐작했으면서도, 알면서도 방임했다. 개입할 명분이 없다는 것이 표면상의 이유였지만, 돌이켜보면 두려웠기 때문이다. 이들의 주인과 맞서는 것이. 음습한 구렁텅이에 발을 들이는 것이.
하지만.
“이곳은 황궁이다.”
더는 아니다. 눈을 감고, 귀를 막은 대가로 더는 타협할 수도 물러날 수도 없는 순간까지 내몰리고 말았다.
“네놈들이 함부로 소란을 피워서는 안 되는 곳이란 말이다.”
돌아오는 답이 없다. 대신 몇 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들었다는 듯이.
그 태연함이, 그 무도함이 히폰 라자마르에게는 더없는 모욕으로 다가왔다.
자연히 그의 목소리와 기세에 날이 섰다.
“무장을 해제하고 대기하라. 내 직접 너희의 주인께 이 무도한 소란에 대해 여쭐 것이니.”
“…….”
이번에도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손에서 칼을 내려놓지도 않았다. 예상했지만, 그렇다고 분노가 덜 끓어오르지는 않았다.
“그간 숨죽이고 있었으면서 이제 와 큰소리를 치는가? 승냥이들이 대신 이를 드러내주니 이제 할 만하다고 생각한 모양이지?”
히폰 라자마르는 입을 꾹 다물고 검을 뽑았다.
“마음대로 떠들어라. 우리는 우리의 책무를 다할 것이니.”
황제에게 하사받은 명검이 조용히 칼집을 빠져 나왔다. 처음 하사받은 이래, 단 한 번도 피를 적신 적이 없는 검.
오랫동안 잠들어있던 이 검이, 마침내 오늘 처음으로 해야 할 일을 하게 되리라.
* * *
서로 쥔 패를 모두 보였으니, 이제 남은 것은 본격적으로 겨루는 것뿐.
푹!
칼끝이 살점을 베었다. 화살을 받아내고 창칼을 흘려내는 갑옷도 무심하게 그어진 한 번의 검격에는 무의미했다. 군터는 어깨에서 번지는 아릿한 통증을 뒤로하고 창을 내질렀다. 검끝이 그의 어깨를 깊게 베었듯, 그의 창끝 역시 키리스트의 옆구리를 갈랐다.
가늠은 끝났다. 지루한 견제 역시 더는 없다. 이제는 오직 피를 보기 위한 몸부림만이 전부였다.
콰득!
검을 연달아 휘두르려던 키리스트의 몸이 멈췄다. 그의 허리가 뒤로 꺾이기도 전에 그의 명치 언저리에서 솟구친 뼈의 가시가 그의 가슴 한복판을 후볐다. 그러나 날카로운 뼈는 키리스트의 가슴을 꿰뚫는 대신 둔탁한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뾰족한 용의 뼈가 가슴을 꿰뚫기 전, 그 짧은 순간에 무형의 칼날이 용의 뼈를 난도질한 탓이었다.
“쿨럭!”
그 광경을 똑똑히 지켜보며, 군터는 뒷걸음질 쳤다. 억누른 고통이 뒤늦게 더 크게 엄습했다. 그의 사기(死氣)가 상대의 영육을 좀먹듯, 키리스트의 검기 역시 그의 본질에 상당한 타격을 주었다. 얕게 스치기만 했는데도 그 예기에 몸이 굳었다. 이쯤 되면 키리스트의 검기 하나하나가 술법이요 저주라고 봐도 될 정도였다.
‘아니. 아니야.’
군터는 굳은 몸을 풀어내며 생각했다.
이 무형의 검기에서는 그 어떤 술법적인 요소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소름 돋을 정도로 날카로울 뿐이다. 너무 날카로워서 단순한 검기가 아니라 다른 무언가가 아닐까 의심이 되는 것일 뿐.
이 검기는 키리스트의 그가 품은 검이며, 그의 의지 그 자체였다.
‘이제야 알겠어.’
줄카에게는 용의 피에서 비롯된 힘이 있고, 다른 군주들 역시 특별한 이능이 한 가지 씩은 있었던 듯했지만 키리스트는 그렇지 않았다.
그가 가진 것은 오직 검 한 자루뿐이었다. 그 검은 그의 손이 아닌 그의 마음에, 영혼에 있었다. 그는 그 한 자루 검을 끝없이 갈고 닦았을 것이다. 그가 뿌리는 검기는 그 한 자루 검의 그림자에 불과하다.
콰드득!
줄카가 피를 뿌리며 나가떨어졌다. 키리스트 역시 붉어진 가슴을 부여잡고 연신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흐트러진 자세에도 불구하고 예기는 여전했다.
‘지독하군.’
저 날카로움은 기세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설령 생명의 불꽃이 위태롭게 흔들리는 지경이 된다 해도 예기는 꺾이지 않을 터였다. 왜냐하면, 그것은 키리스트의 본질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의 영혼이 사그라지기 전까지, 저 날카로운 검은 절대 부러지지도 무뎌지지도 않으리라.
그아아아-!
나가떨어졌던 줄카가 벌떡 일어나 다시금 달려들었다. 흉포한 괴성을 내지르는 그의 두 눈은 이제 타오르는 불꽃 그 자체였다. 균열 너머에서 희미하게 느껴지던 농밀한 기운이 이제 그에게서도 느껴졌다.
콰앙-!
맞붙는 둘을 보며, 군터도 몸을 폈다.
갈라지고 부서진 갑옷에서 자잘한 조각들이 떨어져 나갔다. 이제 갑옷이 아니라 누더기라고 해도 좋을 지경이었다.
“하아.”
길게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앞으로 달려나갔다.
한 번 발을 구르니 이미 그의 몸은 두 초월자의 근처까지 다다랐다.
챙!
창을 내질렀으나 곧바로 막혔다. 검에 막힌 것도 아니었다. 보이지 않고, 형체도 없는 검이 창의 궤적을 틀었다. 군터는 억지로 힘을 주고 버텼다. 그 대가로 팔뚝과 어깨에 얕지 않은 자상이 났으나 아랑곳하지 않았다.
푹-!
흔들리지 않은 창끝이 기어이 키리스트의 갈라진 옆구리를 헤집었다. 그제야 키리스트의 시선이 움직였다. 여기까지 와서도 변함없이 가라앉아있는 두 눈이 군터를 담았다.
[지독하구나.]
검이 움직였다. 형체가 없는 검. 그러나 그 크기와 날카로움은 이전에 날아든 것들과 비할 바가 아니었다.
크아아아-!
입에서 불을 토하는 듯한 줄카가 더욱 힘을 쏟으며 키리스트를 들이받았다. 그의 손에 들린 거검은 세 토막이 난 상태였기에, 그는 검을 휘두르는 대신 온 몸을 던졌다. 평소보다 반 배는 부풀어 오른 듯한 몸이 그대로 들이닥쳤으나, 무형의 검은 멈추지 않았다.
군터는 다가오는 검기를, 어쩌면 자신의 죽음일지 모를 그것을 생생하게 느꼈다.
하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오기도, 만용도 아니었다. 직감이었다. 여기서 물러서서는 안 된다는 직감.
콰득!
그래서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물러서는 대신 상대의 옆구리를 찌른 창을 힘껏 뒤틀었다. 상처를 헤집고, 농밀한 죽음을 밀어넣었다. 그리고.
푸욱!
무형의 검을 쇄골과 목으로 받았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