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7화
장엄하고 화려한 궁전이 색을 잃어간다.
비유적인 표현이 아닌, 말 그대로의 의미였다. 상아색 벽이 병자의 안색처럼 창백하게 변하고, 영험한 나무를 다듬어 만든 장식물들이 평범한 목재 장식물들처럼 썩어갔다.
“이, 이게…….”
허락받지 못한 궁인(宮人)들은 출입은커녕, 주변에 얼씬조차 하지 못하는 심처(深處)에서 일어난 죽음의 물결은 빠르게 황궁 전체를 뒤덮었다. 그 보이지 않는 물결에 휩쓸린 이들은 갑작스레 들이닥치는 탈력감에 몸을 떨었다가, 거뭇하게 물들어가는 손끝을 보고 경악했다.
“으아아악!”
“살려, 살려줘!”
처음에는 눈을 비볐고, 그 다음에는 비명을 질렀다. 휘청거리던 누군가가 기어이 쓰러지고, 그 몸이 순식간에 부패하여 썩은내를 풍기자 그것을 본 누군가는 신을 부르짖으며 달아났다.
공포가 드리웠다. 광기와 혼란이 그 뒤를 바싹 따랐다.
“이런 빌어먹을!”
하지만 그런 혼란 속에서 비교적 평정심을 유지하는 이들이 있었다. 지금 욕지거리를 뱉은 장년의 무관이 그중 하나였다.
빛바랜 적포를 걸친 그는 상석으로 시선을 던졌다.
“장군! 결국은 이렇게 되었습니다. 정녕 이대로 계실 겁니까?!”
그의 시선을 받은 상석의 사내는 대답하는 대신 눈을 감았다. 일그러진 얼굴에서 그의 고뇌가 엿보였지만, 말을 꺼낸 적포의 무관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두 분 전하. 거기에 정체 모를 작자까지! 그림자와 용아도 본격적으로 맞붙었습니다. 거기에 궐내에 참람한 저주까지 퍼지고 있다 합니다!”
궐내에서 칼부림을 벌이는 것도 용납할 수 없거늘 하물며 저주. 저주라니! 이것은 대놓고 그들의 얼굴에 침을 뱉는 것과 마찬가지다.
황제께서 승천하신 지금, 황도의 가장 큰 어른은 물론 제국의 수호자시다. 하지만 그분께서 황궁에 머물고 계신다 하여 그분이 황궁의 주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황궁을 지키는 것은 우리의 책무입니다! 아무리 그분들이라 해도 황궁 안에서 이리 구실 수는 없습니다!”
“…어찌 군주의 행사에 왈가왈부 할 수 있겠는가.”
어렵게 나온 대꾸에 녹포의 무관은 한층 언성을 높였다.
“그분들께는 그분들의 일이, 우리에게는 우리의 일이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의 책무는 폐하께서 직접 내려주신 것입니다! 아무리 군주라 해도 폐하의 말씀보다 위에 있을 수는 없습니다!”
“으음.”
이 말에는 조금의 틀림도 없다. 황궁을 수호한다는 그들의 책무는 황제로부터 직접 내려받은 것. 적어도 새로운 황제가 정해지기 전까지는 그 누구도 그들의 임무를 방해하거나 멈출 수 없다.
“장군. 부디 명을 내려주십시오!”
상석의 사내는 눈을 질끈 감은 채 침묵했다. 하지만 그 침묵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래. 자네의 말이 옳아. 우리는 우리의 책무를 다해야 한다.”
“장군!”
“지금 이 순간부터 황궁 내에서 벌어지는 그 어떤 소란도 용납할 수 없다. 명이다! 모든 병력을 대제단으로 집결시켜라!”
“옛!”
* * *
쾅!
군터는 격돌하는 순간까지도 상대의 기색을 살폈다.
특별한 변화는 없다. 입가에 맴돌던 옅은 미소는 사라졌으나 여전히 담담한 것 같다. 그렇다면 여유로운가? 글쎄. 그건 모르겠다.
아아아아-!
꽉 쥔 왼손을 슬쩍 벌리니 가느다란 실타래 같은 것들이 손가락 하나하나에 엉켜 들었다. 어딘가에서 떠돌다 끌려온 영혼들이다. 군터는 그 지저분하게 뒤엉킨 실타래를 우악스럽게 잡아끌었다. 영혼들의 처절한 비명이 들리는 것 같았다.
생명도 아닌 영혼으로서의 본능만 남은 이들. 그들의 고통과 원념은 그 자체로 좋은 무기가 된다.
군터는 따로 저주술을 연마한 적이 없었다.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탓이다. 그가 생각하기에 저주라는 것은 물이나 흙을 뿌리는 것과 같았다. 그저 한 움큼 쥔 후에 상대에게 뿌리기만 하면 된다. 상대를 더럽히는 것. 그것이 그가 생각하는 저주였다.
[이제 좀 치고받는 느낌이 나는군!]
줄카의 즐거움이 느껴졌다. 이제껏 여유롭고, 평온하기만 했던 키리스트가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그의 몸과 영혼에 수없이 엉켜 든 더러운 영혼들이 계속해서 그를 좀먹고 있었다. 형체 없는 것들의 공격에는 키리스트조차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물론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어떻게든 떨쳐낼 수 있겠지만, 줄카는 물론이고 군터도 그럴 틈을 주지 않았다.
거대한 뼈의 가시가 땅에서, 무너진 건물의 벽에서, 심지어 허공에서까지 한순간에 튀어나왔다. 키리스트는 그 전조 없는 공격에도 불가사의할 정도로 신속하게 반응했다. 그러나 그가 몸을 날리는 틈을 놓치지 않고 줄카와 군터가 동시에 달려드니, 그로서도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을 수는 없었다.
핏!
창끝이 피를 뿌렸다. 붉었다. 가장 오래된 초월자의 피는 겉보기에 평범한 인간의 것과 다르지 않았다.
‘얕아.’
피를 보았으나 살가죽을 간신히 베었을 뿐. 이번에도 빗나갔다고 봐야 하리라.
하지만 괜찮다. 이번에 놓쳤다면, 다시 시도하면 그만이다.
검은 창이 한 호흡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 동안 수십 번을 뻗어 나갔다. 잔상이 여럿 남을 정도의 쾌속한 연격. 빠르면서도 강하고, 그 이상으로 정확한 찌르기였지만 창끝에 피를 묻힌 것은 단 세 번뿐이었다.
“쯧!”
그러자 군터도 기어이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그는 목을 노리고 뻗어오는 검을 막아내고 쭉 뒤로 밀려났다.
불가사의할 정도로 유연하고 빠른 몸놀림이다. 홀로 다른 세상에서 노니고 있는 것 같은 느낌. 상대하면 상대할수록 그 차이가 크게 다가왔다.
쿵!
줄카가 키리스트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키리스트도 이번만큼은 그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거검을 피하거나 흘리지 못하고 정면에서 받아내야 했다.
힘 대 힘의 대결. 그러나 누구 하나 이득 보지 못하고 튕겨 나가는 것을 보며, 군터는 숨을 골랐다.
‘나쁘지 않아.’
어느새 그들의 전장은 뼈의 정원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기이하고 흉물스러운 꼴을 하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불쑥불쑥 튀어나오기 시작한 거대한 뼈들이 수백 개가 훌쩍 넘었다. 이곳은 이제 반쯤 줄카의 영역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가 열어젖힌 균열, 그 너머의 세상이 이 공간과 뒤섞인 탓이다.
이곳에서 줄카의 존재감은 점점 더 거대해졌다. 힘 역시 강해졌다. 키리스트 역시 그것을 느끼고 있을 테지만, 그는 별다른 대응을 하지 못했다. 아니, 정말 그런가?
“…….”
뭔가 숨겨놓은 한 수가 있을 수도 있다. 여기서 자리를 잡고 기다린 것은 키리스트다. 이런 상황을 예견하지 못했을 리 없다. 그러니 그럴듯한 한 수를 숨겨놓았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겠지.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군터가 땅을 박차고 화살처럼 튀어 나갔다. 이제 막 자세를 수습하고 있던 키리스트가 기다렸다는 듯 검을 휘둘렀다. 변함없이 깔끔하고 날카로운 궤적. 또한 깊게 가라앉은 눈에서는 그 어떤 동요도 느껴지지 않았다.
검과 창이 부딪쳤다.
[뭘 기다리지?]
[맞춰보지 그러나.]
아무것도 읽히지 않는다. 그래서 더욱, 입가에 걸린 저 작은 미소가 거슬린다.
[네가 뿌린 것들이 계속해서 나를 좀먹는구나. 무척이나 낯설고 불쾌해.]
그들 정도 경지에 오르면 손에 무엇을 쥐었는지는 그리 중요치 않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창과 검. 분명 창이 검보다 배 이상으로 긴데도, 선공권 및 주도권은 키리스트가 쥐고 있었다. 군터는 그 흐름을 깨려고 했으나 매번 그의 시도는 무위로 돌아갔다. 마치 물을 베는 것 같았다. 베어도 벤 게 아니고, 찔러도 찌른 게 아니다. 이것은 무술인가? 이런 것을 무술이라 할 수 있을까?
챙!
지저분하게 뒤엉키는 흐름에, 군터는 결국 이번에도 힘으로 상대를 떨쳐내고 거리를 벌렸다.
이런 식이다. 몇 번이고 몇십 번이고 이런 상황이 반복된다. 답답함만 쌓여간다. 쌓이고 쌓인 답답함이 조급함으로 이르기 직전에 다시 한번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런 부분은 능숙하군. 훌륭해.]
비웃음 같은 칭찬. 군터가 눈살을 찌푸리며 다시 몸을 날렸다. 그러나 먼저 닿은 것은 그의 창이 아니라, 느닷없이 땅에서 솟구친 거대한 뼈 가시였다.
쾅!
키리스트가 그의 몸뚱이보다 더 거대한 뼈를 검면으로 흘려 막았다. 그러나 그 때문에 그는, 그의 등 뒤에서 다가오는 줄카를 놓치고 말았다.
콰직!
피했다. 하지만 조금 늦었다. 지금까지 흩날린 것과 비교할 수 없이 많은 피가 허공에 뿌려졌다. 줄카의 거검이 키리스트의 왼쪽 어깨를 잡아 뜯다시피 베었다.
비명은 없었다.
흐트러짐도 없었다.
줄카는 살은 물론 뼈까지 갈리다시피 한 상처에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차분하게 거리를 벌렸다.
줄카가 피 묻은 검을 털었다.
[정녕 여기서 끝을 볼 생각인가?]
[그래야 한다면.]
키리스트의 몸은 어느새 상처투성이였다. 방금 입은 어깨의 상처는 말할 것도 없고, 얕게나마 피를 본 상처도 열이 넘었다. 그러나 그 얕은 상처 중에는 군터의 창이 낸 상처도 여럿이었고, 그 상처들에는 죽음이 맺혀 있었다. 그 상처들은 초월자의 영육을 느리지만 착실히 갉아먹었다. 분명 키리스트도 그것을 느끼고 있을 터였다.
승기는 기울었다. 제아무리 가장 오래되고 강력한 초월자라고 해도, 동격의 초월자 둘을 동시에 이겨낼 수는 없는 것이다.
[음침한 놈이 함께였다면 모를까. 당신 혼자서는 무리다.]
[글쎄.]
키리스트가 처음으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후우.”
소리가 들릴 정도로 깊은 한숨. 동시에 여인처럼 긴 그의 머리카락이 색을 잃었다.
[한번 보지.]
촤악-!
무언가 번뜩였고.
베였다.
발 디딜 곳을 의식해서 골라야 할 정도로 빼곡하게 솟아 있던 무수한 뼈의 가시들이 일제히 갈라졌다. 그뿐 아니라, 현실과 겹쳐있던 줄카의 공간까지도 불안하게 일렁였다.
[긴장해라.]
말하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었지만, 군터는 긴장보다는 즐거움을 느꼈다.
고개를 든 키리스트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해 있고, 그의 호흡이 거칠어져 있음을 확인한 탓이다.
알 수 있었다.
드디어.
이제 여력은 없다.
서로의 패를 다 보았으니, 이제 어느 쪽이 승리할지 결론을 내리기만 하면 된다.
아아아아아-!
조용한 폭풍이 몰아쳤다. 사방에서 끌려온 영혼들이 그의 영육 앞에 절규했다. 군터는 그것을 모조리 키리스트를 향해 내던졌다. 그리고 동시에 번개처럼 창을 던졌다.
쾅!
키리스트가 받아쳤고, 그의 몸이 뒤로 쭉 밀려났다. 군터는 허공에 튕겨 나온 그의 창을 낚아채고 그대로 떨어져 내렸다.
콰아앙-!
재차, 창과 검이 부딪쳤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