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6화
하늘은 맑았다. 푸른 바탕에 점점이 떠다니는 구름. 따스하게 땅을 적시는 햇살.
콰릉!
그런데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그야말로 마른하늘에 천둥소리가 났다. 그것도 연달아.
스릉!
그러나 누구 하나 당황하는 이는 없었다. 살라스는 기다렸다는 듯 검을 뽑아 들었고, 그의 곁에 있던 이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움직이지 마라.”
본래 앞을 막아서고 있던 이들 외에, 족히 수백은 되어 보이는 형체가 여기저기서 유령처럼 모습을 드러냈다. 하나같이 조용하고 날카로운 기세를 지닌 이들. 살라스는 천천히 검을 뽑으면서 그들을 모조리 눈으로 훑었다.
“신인(神人)들의 일이다. 누구도 끼어들 수 없다.”
그림자 검사단. 그림자라, 역시 전사 집단의 이름에는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다. 음침하기 짝이 없지 않은가.
“나는 생각이 다른데.”
날카로운 시선이 먼저 부딪치고, 연달아 날아든 검이 직후 충돌했다.
* * *
그들이 움직일 때면 폭풍이 몰아쳤다. 땅이 뒤집히고, 건물이 무너졌다. 조용했던 정원은 이미 제 모습을 잃은 지 오래. 건물은 갈라지고 무너졌고, 잘 관리되었던 초목은 뿌리까지 뽑혀 바람에 나뒹굴었다.
콰득!
몇 번이고 뒤집혀 물러진 땅에 다시 한번 균열이 일었다. 군터는 정강이 언저리까지 땅에 잠긴 두 다리에 잔뜩 힘을 주었다. 그러고도 순간적으로 자세가 무너졌다. 머리 위로 떨어진 일격은 그만큼 무거웠다.
계속 맞붙고 있으나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저 가느다란 검 한 자루로 어찌 이런 힘을 낼 수 있는 것인가.
“크읍!”
땅끝까지 처박으려는 듯 거세게 내리누르는 검을 전력으로 밀어냈다. 그러자 키리스트는 미련 없다는 듯 훌쩍 몸을 날리며 등 뒤에서 날아드는 줄카를 기다렸다는 듯 맞이했다.
여유롭다. 그렇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다. 그 오만한 여유가 맞부딪치는 칼날에서부터 전해진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전투는 그의 의도대로, 그의 흐름대로 이어지고 있다.
“…….”
이대로 계속 가도 괜찮을지도 모른다. 상대에게 여력이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건 이쪽도 그렇다. 하지만…역시 이런 흐름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남의 손바닥 위에서 노는 것 같은 느낌.
군터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 열기를 머금은 그의 숨결에는 농밀한 죽음이 담겨 있었다.
그의 숨결이 닿는 곳마다 싸늘하게 식어갔다. 초월자들의 전투로 난장판이 되었을지라도 생기만은 넘쳐나던 이 공간이 순식간에 죽음으로 뒤덮였다.
생기가 가득한 세상을 사기로 물들이는 것은 아주 간단한 일이다. 그것은 마치 새하얀 종이 위에 잉크 한 방울을 떨어뜨리는 것과 비슷하다. 미미한 사기로도 그보다 훨씬 큰 생기를 물들일 수 있다.
지금도 마찬가지. 막대한 생기로 가득 차 있던 이 공간이 군터에게서 흘러나온 사기에 본래의 성질을 잃어갔다. 그리고 그것은 이 공간을 지배하고 있던 키리스트에게 곧장 영향을 끼쳤다.
쾅!
줄카의 괴력에 키리스트가 멀찍이 밀려났다. 이번에도 역시 힘에서 밀린 것이 아니라 스스로 물러난 것이었으나, 전과 달리 이번에는 그의 얼굴에 여유가 없었다.
그 이유를 짐작한다는 듯, 줄카가 이죽거렸다.
[대단하지?]
[그렇군.]
줄카가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여기까지 와서도 저렇게 담담하단 말인가. 저것이 허세가 아닌 진짜 여유인 것 같았기에 더욱 마음에 들지 않았다.
[탐색전은 집어치우자고.]
생기와 사기가 뒤섞이며 질서가 뒤흔들렸다. 그것은 곧 굳건하던 키리스트의 영지가, 그의 지배력이 흔들렸다는 뜻. 줄카는 어깨를 짓누르는 것 같던 무게감이 한결 가벼워진 것을 느끼며 거검을 휘둘렀다.
용의 뼈를 그의 의지로 벼려낸 검. 그것은 그 자체로 병기이며 법구, 아니 어떤 면에서는 법보라 할 수 있는 물건이었다.
원한다면 얼마든 귀중한 명검과 보검을 쥘 수 있는 그가 굳이 이 골검(骨劍)을 사용하는 이유가 있었다. 이 용의 뼈로 만든 거대한 검은 단단하고 날카롭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 원시적인 병기의 사소한 일면에 불과했다.
그극-!
이 검의 진정한 기능은, 세상의 그 어떤 검보다 그의 힘을 온전히 담아낼 수 있다는 것.
용의 힘.
이제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이 세상의 옛 지배자들이 남긴 힘. 그 힘은 실로 막강해서, 일개 생명이 다루기에는 너무나 위험했다. 그 위험성이 어느 정도냐 하면, 생물의 한계를 뛰어넘은 초월자인 줄카조차도 이 힘을 다룰 때마다 적잖은 부담을 느끼곤 했다.
그그극-!
검에 힘을 담아 세상을 할퀴었다. 검의 궤적을 따라 생긴 선은 균열이 되어 또 다른 세상의 문을 열었다.
균열 너머, 용의 무덤. 하나의 작은, 멸망한 세계.
그 세계는 영적인 눈을 뜬 이들만이 볼 수 있는 것. 당연히 키리스트도 볼 수 있었다. 당연히 처음 보는 것도 아니었다. 예전, 함께 전장을 누비던 시절. 그는 수도 없이 균열 너머의 세상을 목도 했었다. 그 세상에서 흘러들어오는 힘과 위험성까지도.
[넌 피를 이었을 뿐 용이 아니다. 한낱 문지기에 불과해.]
[그래. 그 말이 맞아.]
용살자 줄카.
최후의 용을 참살한 위대한 전사이자 사냥꾼.
이 세상의 마지막 용에게 안식을 선물한 그는 용의 숨통을 끊은 그 순간 저주를 받았다. 그 저주는 그 어떠한 술사도 해주(解呪)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하는 신비롭고도 강력한 것이었다.
그는 저주의 무게를 감당하기 위해 용의 피를 들이켰다. 초월자로 거듭난 뒤로는 그 강대하고 무거운 저주를 오히려 자신의 힘으로 삼았다.
그러나 그렇다 한들, 그는 용이 아니었다. 키리스트의 말처럼 그는 문지기이자 무덤지기에 불과했다.
하지만 괜찮다. 애초에 용이 되기를 바란 적도 없다.
우득! 우드득!
무덤에서 흘러나온 용의 기운이 영혼과 육신을 잠식했다. 그에 따라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던 그의 몸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근육이 뒤틀리고, 뼈가 피부와 갑옷을 뚫고 튀어나왔다. 호흡이 거칠어지고, 형형한 안광이 눈을 뒤덮었다.
키리스트가 그 모습을 보고 조롱했다.
[언제 봐도 추레한 몰골이군.]
그리고 그 조롱에 화답하듯, 줄카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 * *
쾅! 콰쾅!
황궁에 있는, 아니 황도에 있는 모두가 몸을 떨었다.
귓전을 때리는 굉음은 이제 익숙했다. 여전히 귀가 따갑지만, 단순히 시끄러운 것뿐이라면 귀를 막고 주저앉아있는 것만으로도 어떻게든 버틸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정신을 피폐하게 만드는 이 두려움. 이것만은 그 무엇으로도 이겨낼 수가 없었다. 때문에 그들은 그 어느 때보다 더 간절하게 두 눈을 꼭 감고 신을 찾았다. 감당하기 힘든 두려움의 끝에서, 언제나 그랬듯이.
“으음.”
얼굴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추기경은 황궁에서 멀찍이 떨어진 시내의 언덕에 올라 있었다. 그의 곁에는 그의 동료와, 그를 따르는 사제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정말이지…비극이로군요.”
누군가가 탄식했다.
비극.
맞는 말이다. 제국의 기둥인 군주들이 다른 곳도 아닌 제국의 심장에서 서로 다투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이는 예견된 일이었다. 저마다 개성 강한 군주들을 한데 모으고 다스릴 수 있었던 것은 모두 황제의 능력 덕이었으니.
“큰일입니다. 밖에는 도적들이 넘쳐나고, 남쪽에서는 침략자들이 몰려오고 있는데…….”
“이제 우리는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교단의 지배자는 황제였다. 그는 신의 사도이며 대리자였기에 그의 말이 곧 법이고 복음이었다. 그의 치세 아래서, 교단의 성직자들은 그저 황제의 말을 읊으며 순종하기만 하면 됐다.
그러나 이제 황제는 없다. 주인을 잃은 것은 제국만이 아니었다.
“우리는 선택을 해야 합니다.”
“선택이라면.”
“두 황자 전하 중 한 분께 힘을 실어드리던지, 아니면…자립을 하던지.”
“으음.”
이미 몇 번이고 같은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었음에도 여전히 나오는 것은 침음 뿐. 그것은 그들이 우유부단해서가 아니라, 그만큼 이 사안이 중대하기 때문이었다.
한 번 선택하면 돌이킬 수 없다. 어느 것이건 위태로운 선택지인 것은 매한가지지만…….
“교단은 제국과 함께 일어섰습니다. 이제 와 길을 달리할 수는 없어요.”
두 황자 중 누가 승리하건, 황실의 통제에서 벗어난 교단을 가만둘 리 없다. 얼핏 생각하면 자립한다는 선택지는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것과 다르지 않은 듯했다.
“여러분은…두 황자 전하가 온전히 제국을 통치할 수 있으리라 보십니까?”
“예? 그게 무슨…….”
가장 앞에서 황궁을 바라보던 추기경은 다시 입을 열지 않았다.
* * *
콰지직!
길쭉한 뼈가 단단한 석벽을 종이 자르듯 갈랐다. 허공으로 몸을 띄운 키리스트를 향해 몇 개의 가시 같은 뼈가 뻗어 나갔으나, 보이지 않는 칼날이 그것들이 접근하기도 전에 잘게 토막냈다.
무형의 칼날. 아니, 검기.
아슬아슬하게 반응의 영역에 걸쳤으나, 반응하고 움직이려 하면 늦다. 그러니 예측해야 한다.
군터는 이번에도 그를 향해 날아드는 무형의 검기를 예측하며 창을 내질렀다. 뻗어 나가는 창이 죽음을 머금은 거센 바람을 일으켰고, 보이지 않는 파장이 보이지 않는 검기와 맞닿으며 거친 진동을 일으켰다.
힘과 힘. 아니, 권능과 권능의 충돌.
쾅!
팔과 하나가 된 것 같은 거검이 땅을 찍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검 끝에 너덜너덜한 천 조각이 걸렸다.
“후우.”
몰아 뱉는 호흡.
희미하다면 희미한 소리였지만, 군터에게는 그 소리가 다른 무엇보다 또렷하게 들렸다.
그래. 저자 역시 결국은 육신을 지닌 생명에 불과하다. 그 영혼과 의지는 하늘에 닿았을지 모르지만, 어쨌거나 두 발을 땅에 딛고 살아가는 고깃덩어리인 것이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그 사실이 우습고 즐거웠다. 뭔가 대단한 약점이라도 찾은 것처럼 자신감이 차올랐다.
쿵!
땅을 내리찍고 몸을 일으켰다. 몸을 덮었던 돌가루며 먼지가 부스스 떨어져 내렸다.
넘실거리는 죽음의 촉수가 어느새 저 강대한 초월자의 살갗에 가까워져 있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