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터-1055화 (1,055/1,064)

1055화

[다시 말하지. 그만 멈추시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노예로 산 세월이 너무 길어서 정말 노예가 되어버리기라도 한 건가?]

줄카도 키리스트를 설득하려는 생각으로 온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군터는 처음 그가 황도로 가겠다고 했을 때, 그의 본심이 전의로 차 있는 것을 느꼈었다. 지금 역시 마찬가지. 그는 틀림없이 일전을 불사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 영양가 없는 대화를 계속해서 이어가고 있다. 상대가 설득될 리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을 터인데도.

[어찌 생각하나.]

돌연 키리스트가 군터에게 물었다.

군터와 그의 시선이 마주쳤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고, 그저 잔잔하고 담담하기만 할 뿐인 눈을 보고 있으니 마치 거울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당신들의 문제고 당신의 문제지.]

덤덤하다 못해 뚱하게까지 느껴지는 답에 키리스트가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그렇다면 넌 왜 이곳에 온 거냐? 무엇을 바라고?]

[내 자식의 평안.]

[자식?]

[내가 이룬 것들을 내 자식에게 물려주었지. 난 녀석의 평안이 당신의 불장난에 휩쓸리기를 바라지 않아.]

키리스트의 눈이 크게 뜨였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었다는 듯이. 그는 두어 번 눈을 깜빡이더니 침묵하며 볼을 긁었다.

[솔직히 놀랍군. 아직 간직하고 있단 말인가? 그게 가능하다는 것이 놀랍군.]

가장 오래된 군주는 진심으로 놀라웠다. 그가 어딘가 흐리고 비틀어지지 않은 순수한 감정을 느끼는 것은 정말 흔치 않은 일이었다.

그가 보기에 이 어린 녀석은 온전한 초월자였다. 그것도 스스로 일어선 초월자. 어쩌면 그래서일지도 모른다. 이 녀석과 자신들은 다르니까. 그래서 저렇게 순수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세상에, 자식의 평안이라고? 자식을 가져본 적이 없는 그였지만, 다른 녀석들 가운데는 자식을 본 경우가 몇 있었다.

[특이하군. 특이해.]

그러나 그랬던 녀석들도 특별히 자식을 챙기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자식으로 여기지도 않았던 것 같다.

누구도 녀석들을 탓하지 않았다. 물론, 키리스트 역시 마찬가지였다. 초월자의 피를 이어받았다고 해도 결국은 반쪽짜리가 아닌가. 혈통은 존중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모든 존재는 스스로 자신을 증명해야 한다. 그러지 못한다면 존중도 없는 것이다. 그리고 초월자의 존중은 아래로 향하는 경우가 매우 드물다.

[불은 이미 바람을 맞았다. 내게 투정이라도 부리고 싶은가?]

[아니. 난 단지 당신과 싸워야 하는지 아닌지를 알고 싶을 뿐이오.]

[도전적이군. 패기가 있어.]

키리스트의 기세가, 태도가 바뀌었다. 한순간에 전혀 다른 존재가 된 것 같은 급변이었으나 군터는 그 변화를 태연하게 받아들였다.

들은 바에 따르면 이자는 가장 오래된 군주이기 전에 무인이었고 전사였다. 이제는 그때의 기억마저 흐릿하겠지만, 군터는 사람의 본성은 변하지 않는다고 믿었다. 사람이 아닌 초월자라고 해도 마찬가지.

이 노괴의 과거는 제법 흥미로웠지만 그래도 시시콜콜한 이야기는 이쯤에서 끝났으면 했다.

물론 여기서 이자를 도발해서 좋을 게 없다는 것은 안다. 이곳은 상대의 본거지. 여기서 싸움이 일어난다면 당연히 상대가 유리하다. 하지만, 애초에 이곳에 온 것은 군터의 뜻이 아니었다.

[뭘 믿고 있는 것인지는 안다.]

키리스트의 눈길이 줄카에게 향했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부족해.]

[그렇겠지.]

제국의 모든 군주는 자신만의 영지가 있다. 그들은 좀처럼 자신들의 영지를 벗어나는 경우가 없었다. 더 정확히는, 황제의 명령이 떨어진 것이 아닌 이상 그들은 영지를 벗어나지 않았다. 그것은 그들이 자신들의 땅에 애착을 따위를 가져서가 아니었다. 단지 그들의 영혼이 그 땅에 묶여있어서일 뿐.

최초의 군주인 키리스트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는 영지가 없었다. 그의 영혼은 바로 이곳, 황도 리비암에 묶여있었기에.

이곳에서 그는 자유로웠지만, 동시에 구속받았다. 이 땅의 주인은 결국 황제였기 때문이다. 제국의 다른 어느 땅인들 그렇지 않겠냐마는, 황제가 머무는 도시는 특별한 법. 게다가, 황제는 잔혹한 계약으로 목줄을 채웠으면서도 키리스트를 믿지 않았다. 아니, 그는 누구도 믿지 않았다. 어쩌면 자기 자신마저도.

황제 사후에도 키리스트는 스스로 움직이지 않았다. 어둠 속에 숨어서 부릴 수 있는 자들을 부렸을 뿐. 심지어 교단마저도 멀쩡히 두지 않았던가. 물론 나름의 방식으로 그들을 압박했을 수도 있지만, 어쨌거나 교단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그가 진정 황제가 이룬 모든 것을 뒤엎고 싶었다면 그를 신성시하는 교단부터 없애 버려야 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어째서?

답은 간단하다. 없애지 않은 것이 아니라 없애지 못한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모른다. 교단이 그를 견제할 수단을 가지고 있는 것일 수도, 아니면 어떤 계약에 묶여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굳이 그 이유를 알 필요는 없다. 궁금하지도 않고.

[그 음침한 놈은 왜 내보냈지? 놈이 필요했을 터인데.]

[약속했으니까.]

미치광이. 위대한 전사. 잔혹한 음모가.

사람에게는 여러 면모가 있다고 하지 않던가. 초월자 역시 마찬가지일지도 모른다. 머릿속에 울리는 말에서는 그 어떤 것도 알아낼 수 없었지만, 그래도 이 노괴가 꿍꿍이를 가지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끝을 보겠다면 피하지는 않아. 하지만 그런다고 해도 달라질 것은 없다.]

[그건 나도 알아.]

아바시스의 군대가 북상하고 있다. 그들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애당초 아바시스는 제국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뭉친 자들. 그들은 흔들리는 제국을 쓰러뜨릴 수 있는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비록 황제의 통치가 이어진 긴 세월 동안 제국에 억눌려 있었다고는 하나, 어쨌건 그들은 그 황제의 치세로부터 살아남은 자들이었다. 그들에게는 분명 저력이 있다. 평화에 젖어 안일해진 제국과 달리, 그들은 예기를 잃지 않았다.

게다가 가장 중요한 관문인 대협곡이 안쪽에서부터 열린 상황. 황도를 향해 거침없이 진군하고 있는 그들을 누가 막을 수 있을 것인가. 슬슬 야심을 드러내기 시작한 총독들? 각지의 유력자들? 한데 뭉쳐도 쉽지 않을 판에 뿔뿔이 흩어진 그들에게 과연 그럴 만한 힘이 있을까? [그렇다 한들 그게 뭐 어떻다는 거냐.]

키리스트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빈 옥좌에 앉고 싶은가? 원하는 게 그것이냐?]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지?]

[부정하는 건가? 그렇다면 아집이군.]

키리스트의 비아냥에 줄카는 그답지 않게 감정적인 모습을 보였다. 세상사에 어떤 가치도 느끼지 못하는 듯 무감정한 모습을 보이던 초월자가 평범한 사람 같은 반응을 보인다. 그것은 대화하는 상대가 동등한 초월자여서일 수도, 정곡을 찔려서일 수도 있다.

문득 군터는 지금쯤 북쪽 땅에서 군대를 집결시키고 있을 자콥 트라소프가 떠올랐다. 그는 그 자신부터가 황제의 피를 이어받은, 사람이라고 볼 수 없는 존재이면서도 사람이 아닌 것들을 극도로 경계했다. 군주들은 물론, 아비인 황제까지도.

솔직히 우습다고 생각했다. 지금의 제국을 이룩한 것은 황제다. 황제가 아니었다면 카라누르는 제국은커녕, 번듯한 나라의 모양새도 이루지 못했을지 모른다. 그러니 황제를 부정하는 것은 제국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황제를 부정하면서 제국은 부정하지 않는다. 이게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것과 뭐가 다른가. 사람의 본성이 다 그런 것이라지만, 우스운 것은 어쩔 수 없다.

줄카 역시 마찬가지. 그는 황제에게 굴종했던 세월을 부정적으로 여기면서도 그의 밑에서 이뤘던 것들은 지키고자 했다. 옥좌에 앉기를 바라지도 않으면서 제국을 굽어살피려 한다. 그것은 어쩌면, 키리스트가 말한 것처럼 아집일지도 모른다.

[이쯤 오면 남는 것은 그런 욕심뿐이지. 당신도 마찬가지 아닌가? 그런 것도 없다면 우리는 옛 신들과 다를 바가 없으니까.]

키리스트가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고개를 까딱였다.

[피차 물러날 생각은 없는 것 같군. 그렇지?]

키리스트가 몸을 일으켰다. 동시에 평온하고 적막하기만 하던 공기가 일변했다.

* * *

입, 혹은 칼.

예로부터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둘 중 하나였다. 혹자는 대화로 갈등을 해결하는 것이 야만으로부터의 탈피, 문명인의 자격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입 놀리기 좋아하는 자들의 말일 뿐.

칼로 해결할 수 있다면 그것이 제일이다. 칼로 해결하지 못할 것 같기에 구차하게 입을 놀리는 것이다. 힘이 있는 자는, 자신의 힘으로 상대를 누를 수 있으리라 확신하는 자는 굳이 입 아프게 떠들어대지 않는다.

하물며 초월자.

스스로에 대한 믿음은 신앙과 같다. 게다가 서로에 대한 응어리진 감정 역시 충만하니, 힘의 대화를 마다할 이유가 있겠는가.

게다가 군터는 진작부터 지금 이 순간을 예견하고 있었다.

황도를, 키리스트를 말하는 동안 느껴졌던 줄카의 감정. 악의 이상으로 강하게 다가왔던 그 투쟁의 열기.

* * *

쾅-!

충돌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한 번 부딪칠 때마다 초목을 뒤흔드는 굉음이 터져 나왔다.

저 검들이 바위에 닿았다면 바위가 쪼개졌을 것이고, 땅에 닿았다면 땅이 갈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힘을 자랑하지 않았다. 둘의 겨룸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기세와 기교였다.

기교. 즉, 무술.

양쪽 다 수백 년을 살아온 최고의 무인들. 그런 그들에게 있어 기술은 별 의미가 없다. 그들의 호흡, 걸음, 자그마한 움직임조차 극한의 기교 그 자체나 다름없다. 그렇기에 이 고요한 가운데 이따금 시끄러워지는 겨룸은 본격적인 충돌이 아니라 그 전의 가늠이었다.

챙!

세워 놓으면 사람 하나를 가릴 것 같은 육중한 대검을 평범해 보이는 검 한 자루가 가볍게 튕겨냈다. 물러나는 것 역시 대검을 든 줄카였다. 믿기지 않게도, 호리호리해 보이는 키리스트의 힘이 줄카보다 우위였다.

쿵!

땅이 꺼졌다. 순간적으로 그렇게 느껴졌다. 호리호리한 사내가 땅을 박찬 순간, 밟힌 땅이 비명을 지르며 무너져 내리는 듯했다.

화살보다 빠르게 쏘아진 몸이 어느새 줄카의 코앞에 다다랐다. 한 손에 들린 검은 그의 몸이 우뚝 서는 것보다 빠르게 떨어져 내렸다. 줄카가 차분히 검을 들어 그것을 막았다. 그리고.

콰득!

검이 깨졌다. 용의 뼈로 이루어진 거대한 검에 균열이 생겼다. 군터는 정체 모를, 원념을 닮은 기운이 응집된 검에 파고드는 날카로운 무언가를 보았다.

키리스트. 제국의 수호자. 가장 오래된, 최초의 군주.

그가 다루는 힘이 무엇인지 눈으로 보면서도 알 수가 없었다. 그의 몸짓은 가벼웠으나 그 안에는 기이할 정도로 강력한 힘이 깃들어 있었다.

저것이 초월자로서 쌓아온 경력일까? 아니, 단순히 오래 살았다고 저런 힘을 얻을 수 있을 리 없다. 그러고 보면 저자는 가장 먼저 황제가 선택한 전사가 아니던가.

크아아아-!

육성. 그러나 사람의 말이 아닌, 흉포한 짐승이 울부짖는 것 같은 괴성. 줄카는 금이 간 검을 집어 던지고, 균열에서 새로운 검을 뽑아 들었다.

거친 휘두르기. 이전까지의 조용하고, 우아하게까지 했던 칼질과는 궤를 달리하는 난폭함. 키리스트는 그 억센 힘에 어울리는 대신 훌쩍 몸을 날렸다. 얼핏 보면 그가 줄카의 괴력에 속절없이 밀려난 것 같지만.

‘안 되겠군.’

군터는 직감했다.

줄카는 키리스트를 당해내지 못한다. 힘의 차이는 명확하다. 굳어 있는 것 같은 줄카에 비해 키리스트는 여유가 있었다. 그가 이곳에 묶여있는 존재이기 때문일까? 황제는 사라졌지만, 그럼에도 어깨를 짓누르는 것 같은 억압이 있다. 정령이 아니다. 형용하기 힘든 무언가다.

이곳은 적지. 줄카는 불리함을 알면서도 감수하고 싸운다. 어째서?

콰앙-!

치고받던 둘 사이로 벼락이 내리꽂혔다. 피어오르는 먼지구름 사이로 군터가 몸을 일으켰다. 넘실거리는 죽음의 기운이 바짝 달아오른 공기 사이로 퍼져나간다.

기다렸다는 듯 난입에 대한 환영 인사가 날아들었다. 감각을 최고조로 끌어올리지 않았다면 느끼지 못할 빠르고 희미한 접근. 군터는 보지도 않고 창을 내질렀다.

챙!

창끝과 검 끝이 맞닿았다. 기껏해야 손가락 끝보다도 작은 점 하나이건만, 그 안에 실린 힘은 상상을 한참이나 뛰어넘었다. 온 힘을 다 실었건만 밀려나지 않는 것이 고작이었다.

[기대하고 있다.]

실망시키지는 않겠지? 하고 뒷말이 들리는 듯해, 군터는 맞닿은 검을 뿌리치고 몸을 날렸다. 그러자 흐릿하게 웃고 있는 호리호리한 사내가 유령처럼 흐릿해졌다. 동시에 군터의 눈도 더욱 깊게 가라앉았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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