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터-1054화 (1,054/1,064)

1054화

사제 무리의 가장 앞에 서 있던 자. 나이 지긋한 추기경이 공손히 고개 숙였다. 그의 시선이 뼈밖에 남지 않은 시체마에 슬쩍 닿았지만, 그는 이 불경한 탈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키리스트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는 줄카와 말을 나란히 하고 있는 군터에 대해서도 전혀 궁금하지 않은 듯했다. 속내까지 그런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그랬다.

“그분께서는 가을 정원에 계십니다.”

그를 비롯한 사제들은 줄카와 그의 일행이 그들을 지나쳐, 멀찍이 사라질 때까지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 공손함에서는 두려움마저 느껴졌다. 마치 고개를 들었을 때 여전히 줄카가 그 자리에 있다면 신벌이라도 받으리라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그렇게 얼마 후. 나이 지긋한 추기경이 제일 먼저 고개를 들었다. 그의 낡고 굳은 몸은 이런 작은 노동조차 견디지 못했다. 잠깐 몸을 좀 숙이고 있었다고 여기저기가 삐걱거렸다.

“후우.”

깊은 한숨에 짙은 노곤함과 여러 감정이 담겼다. 그는 이미 멀리 사라져 보이지도 않는 줄카 일행의 자취를 바라보며 하늘을 올려 보았다.

* * *

[가을 정원?]

어둠 속에 교묘히 숨어서 제국을 통째로 전란의 구렁텅이에 몰아넣은, 아직도 몰아넣고 있는 음습한 초월자의 보금자리로는 어울리지 않는 고상한 명칭이다. 물론 그 음침한 음모가가 제국의 수호자로 불리는 것부터가 우습지만, 하여간 정원이라고 하니 뭔가 잘 상상이 되지 않았다.

[황궁 안에 있는 정원이지. 특별한 구석 하나 없는. 그 노괴는 예전부터 그곳을 보금자리로 삼았다. 노괴의 허락 없이는 누구도 그곳을 드나들지 못했지.]

[황제도?]

[황제는 그곳을 찾지 않았다. 필요한 일이 있으면 부르면 그만이었지.]

그들은 대로를 평야처럼 내달렸다. 추기경의 말처럼 길은 열려 있었다. 한번 말을 달리기 시작한 후, 그들은 단 한 번도 멈추거나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그를 통해 군터는 키리스트가 황도를 완전히 통제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저것이 황궁인가.”

얼마나 달렸을까. 번듯하고 깔끔한 건물들 너머로, 이전까지의 도심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거대한 문이 눈에 들어왔다.

그야말로 화려함과 웅장함의 극치. 시각적인 부분에 반응하는 경우가 드문 살라스조차 그 압도적인 외관에는 그저 입을 벌리고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어지간한 성벽보다 더 높은 외벽. 벽면에 그려진, 아니 새겨진 기이하면서도 고풍스러운 문양. 게다가 성벽은 재질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잘 닦은 칼날처럼 반들거렸다.

성문은 열려 있었고, 지키는 병사는 아무도 없었다. 황궁을 지키는 병사가 하나도 없는 것이 일견 이상한 듯하지만 생각해보면 이 훌륭한 궁에는 현재 주인이 없었다. 주인이 없으니 지키는 자들이 없다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리라. 게다가, 주인은 없지만 비어있는 것은 또 아니지 않은가. 제국의 수호자가 머무는 궁궐에 잠입할 간 큰 도둑은 세상에 없으리라.

활짝 열린 문을 통해 황궁에 들어서자 안쪽에 칙칙한 찰갑으로 무장한 검사 무리가 그들을 맞이했다.

“기다리고 계십니다.”

줄카와 군터의 시선이 그들에게 향하자, 그들 중 가장 앞에 서 있던 검사가 고개를 숙였다.

군터는 그들이 누구인지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림자 검사단. 바로 얼마 전에 크라바 성에서 잠입해 있던 그들을 베지 않았던가. 그런데 지금 그들의 가벼운 인사에서는 정중함이 묻어났다.

“그분께서 기다리시는 것은 두 분뿐입니다.”

“그 말을 믿으라는 건가?”

살라스가 싸늘한 목소리로 받아쳤다. 그러자 말을 하던 자가 언제 정중한 태도를 보였냐는 듯 낯빛을 굳혔다.

“저 안에 수백의 암살자가 숨어 있을 줄 어떻게 알지?”

“그런 식으로 손을 쓸 거였다면 기회는 많았다. 리비암 안에서도, 밖에서도.”

거기까지 말한 그가 다시 정중하게 줄카와 군터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 점은 두 분께서도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좋아. 너희는 여기서 기다려라. 괜찮겠지?]

군터가 무언으로 동의했다.

* * *

그들을 맞이한 그림자 검사들은 그 자리에 살라스 등과 함께 남았다.

가을 정원까지 가는 데 안내자는 필요 없었다. 줄카가 황궁의 지리를 잘 알고 있었던 덕이다. 그는 마지막으로 황궁에 와 본 것이 거의 십 년 전이라고 했으나 여전히 황궁 내부를 자기 집처럼 훤히 꿰고 있었다.

[이 도시가 그렇듯, 이 궁도 몇 번이나 증축했지. 처음에 녀석은 나가 싸우기도 바쁜데 궁 따위에 신경 쓸 이유가 없다고 했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신경 쓰기 시작하더군. 아마도 전장에 나가지 않기 시작했을 무렵이었던 것 같다.]

줄카가 말하는 ‘녀석’이 황제를 뜻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전부터 생각했지만 그를 그리 싫어하는 것 같지 않군.]

[글쎄. 싫어하느냐 좋아하느냐 묻는다면 싫어한다고 답하겠지. 하지만 나는 녀석을 증오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인정한다. 녀석이 이뤄낸 것들은 다른 누구도 이룰 수 없었던 것이었으니까.]

황제가 이뤄낸 것들. 세상 유일한 대제국의 건설. 무수한 승리와 학살. 그리고 번영.

[녀석은 많은 것을 하나로 묶었다. 땅, 사람, 문화, 그 밖의 많은 것들을. 녀석이 해내기 전까지는 누구도 그게 가능하리라 생각지 않았다.]

[힘으로 눌렀을 뿐이지. 결국 그 끝은 이 꼴이지 않소.]

[그럴지도.]

짤막한 대화를 나누는 사이 그들은 어느새 초목의 냄새가 나는 구역까지 접어들었다. 줄카는 말하지 않았지만, 군터는 가을 정원이라는 곳에 가까워졌음을 알 수 있었다.

[도착이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적막한 정원의 입구에 다다랐다. 말에서 훌쩍 뛰어내리고 입구를 지나자 은은하게 느껴지던 풀 내음이 진하게 코를 간질였다. 생명의 향기였다.

자그마한 문 하나를 지났을 뿐인데, 주변에 느껴지는 생기의 농도가 확연히 차이가 났다. 그 때문일까, 곳곳에 보이는 꽃과 나무들은 하나 같이 윤기가 흘렀다.

녹음(綠陰) 아래 자그마한 길을 따라 얼마간 걸으니 탁 트인 공간이 나타났다. 연병장으로 써도 충분한 크기의 터에는 번듯한 건물 한 채가 자리하고 있었다.

[왔군.]

그때, 머릿속을 울리는 부드러운 목소리가 그들의 걸음을 세웠다.

그것은 분명 의성(意聲)이었으나 줄카의 그것과는 달랐다. 줄카의 그것이 마음 대 마음으로 부딪치는 진솔한 충돌이라고 한다면, 이 소리는 그저 머릿속에 때려 박는 목소리 같았다. 군터는 이 목소리에서 그 어떠한 감정도 느낄 수 없었다.

[기다리고 있었네.]

그 말인즉, 기다리고 있었다는 이 말이 참인지 거짓인지도 분간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이 편리하고 유용한 소통 수단에 빠르게 익숙해졌던 군터는 머릿속에 안개가 낀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당황하지 마라.]

그런 군터의 마음을 읽었는지, 줄카의 말이 곧장 머릿속에 울렸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함은 당연하다.]

[어째서지?]

[저자는 우리와 달라. 누구와도 다르지. 저 노괴는 자신의 마음이 어떤지 모른다. 그의 마음은 혼란으로 가득하지.]

그때, 한 사내가 건물의 문을 열고 나타났다.

[날 앞에 두고 내 험담을 하는 건가?]

호리호리한 체구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고, 여인처럼 긴 머리와 아름답다는 말이 절로 나오는 수려한 외모가 인상적이었다.

그에게서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특유의 분위기라던가, 기세 같은 것이 전혀 없었다. 직접 눈으로 보고 있지 않으면 그가 앞에 서 있다는 것조차 잊을 만큼.

[당신은 미치광이야. 당신 스스로도 그 점은 인정하지 않나.]

[건방진 애송이 놈.]

그, 키리스트가 웃었다. 자연스러운 웃음. 미치광이라는 소리를 듣고도 즐거운 듯했지만, 그 반응이 진심에서 나온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가지. 자리를 준비해놨으니.]

[한담이나 나누려고 온 것 같은가.]

[급할 것 없지 않나. 어차피 자네들이 뭘 원하건 내 뜻에 따라야 할 거야.]

줄카가 고개를 까딱였다.

[음침한 놈은 어디 갔나?]

[자유를 얻고 떠났지.]

키리스트가 뒤돌아 걸음을 옮겼다.

무방비한 자세. 심지어 비무장 상태. 만약 저 등에 칼을 꽂는다면 저자는 어떻게 반응할까? 절로 그런 생각이 들었으나 이상하게도 행동에 옮기고 싶지는 않았다. 그것은 정말 기이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군터는 초월자로 거듭난 이후로 줄곧, 마음이건 행동이건 거침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생각이 일었는데 마음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자연히 몸도 움직이지 않았다. 어째서일까.

[궁금한가?]

군터는 그보다 한참을 더 산 초월자들을 앞에 두고 있는 상황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져도 놀랄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의 능력은 초월자로서 애송이에 불과한 그보다 더 뛰어나고, 다양할 수 있으므로.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아는가?]

[뻔하지. 왜 내 등을 찌를 마음이 들지 않는지 궁금한 것 아닌가.]

그런 면에서 마음을 읽히는 것 정도야 대수롭지도 않은 일이었다.

[내가 자네의 적이 아니라는 것을 자네 스스로 알기 때문이지. 적이 아니니 굳이 해할 마음이 들지 않는 것이야.]

키리스트의 헛소리가 이어지고 있음에도 줄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설마 그의 말을 긍정하는 것일까?

어색한 침묵이 이어지는 동안, 그들은 키리스트가 준비해놓은 ‘자리’에 도착했다.

자그마한 후원. 크지 않은 탁자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세 개의 의자가, 탁자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차와 다과가 놓여 있었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자리에 앉고, 잔을 들었다.

우스운 광경이었다. 생에 다시 없을 일전을 각오하고, 기대하며 왔건만 기다리는 것은 적의로 가득 찬 창칼이 아니라 뜨끈한 차와 달콤한 다과였다.

[이럴 줄 예상했나?]

[반쯤은. 당신은 늘 종잡을 수 없었지. 이건 그녀의 생각인가?]

[맞췄네. 하지만 내 생각이기도 해.]

군터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그는 이 이상한 자리도, 두 군주의 대화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이곳에서의 일은 어지간하면 줄카에게 맡기기로 했으니 잠자코 따랐으나, 의미 없는 한담의 들러리를 설 생각은 없었다.

[나에 대해 알고 있나?]

군터와 키리스트의 시선이 마주쳤다.

[알려진 만큼은.]

[모른다는 뜻이군.]

키리스트가 독이 없다는 것을 확인시켜주듯 먼저 차를 홀짝였다. 그와 동시에 머릿속이 울렸다.

[나는 저주를 받았네.]

줄카가 끼어들었다.

[축복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축복이면서 저주지.]

내용물이 반쯤 줄어든 잔이 다시 탁자 위에 놓였다.

* * *

그것은 오래된 이야기였다. 제국이 우뚝 서기는커녕, 나라로서 본격적으로 이름을 떨치기도 더 전의 이야기.

한 나라가 있었다. 널리고 널린 도시 국가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영토라고 해도 도시 하나와 인근의 땅이 전부인 자그마한 나라였다.

그곳에는 왕이 있었고, 왕비가 있었으며, 아름다운 공주가 있었다. 그리고 그 공주를 사랑하는 청년 기사도 있었다. 젊은 나이에도 실력이 출중하여 주변 국가들에까지 이름이 널리 알려진 기사였다.

기사는 공주를 사랑했고, 공주 역시 기사를 마음에 두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어질 수 없었다. 왕이 공주를 타국의 젊은 왕에게 시집 보내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기사와 공주가 예정된 이별을 기다리며 마음을 태워가던 그때, 먼 곳에서부터 전란의 불길이 일었다. 카라누르라는, 이름도 생소한 작은 국가가 일으킨 전쟁이었다.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만 해도 모두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역사 속에서 늘 그래왔듯, 야심만만한 지배자의 욕심이 현실의 벽 앞에 무너지리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카라누르는 꺾이지 않았다. 본래 작았던 그들의 군대는 전쟁을 거듭하며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반대로 더욱 커져만 갔다. 처음에는 이름을 들어보지 못한 국가들이 무너졌고, 그 후에는 이름을 들어본 곳들이 무너졌으며, 또 그 후에는 이웃 국가들이 무너졌다.

결국에는 그들의 나라도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맞설 것인가, 굴복할 것인가.

왕은 맞서기로 결심했다. 그와 같은 마음이었던 왕들이 힘을 하나로 모았다. 기사 역시 전장으로 나섰다.

그리고 맞서 싸웠다. 일찍이 본 적 없는 거대한 군대를 상대로. 스스로를 신의 사도라 떠들어대는 미치광이를 상대로.

처절한 사투였다. 한쪽에게만.

연합군은 패했다. 부끄러울 정도의 참패였다. 기사는 가장 앞에서, 가장 오랫동안 싸웠으나 결국 달아날 수밖에 없었다. 죽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속절없이 무너지는 아군 군세를 보며, 기사는 절대 상대를 이길 수 없을 것을 직감했다.

그는 홀로 퇴로를 열었다. 따라붙는 적들을 모조리 참살하고 얼마 전 떠나왔던 도시로 돌아갔다. 그는 그저,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공주를 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보다 앞서 도시로 돌아온 이들이 있었다. 그보다 먼저 도주했던 자들. 그중에는 왕도 있었다.

왕은 도망쳐온 기사를 의심했다. 적에게 사로잡힌 그가 어찌 돌아왔는지를 물었다. 기사는 싸워 길을 열었다고 했으나, 그건 왕이 바란 답이 아니었다. 왕은 이미 답을 스스로 들고 있었다.

배신자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기사는 캄캄한 감옥에 갇혔다.

그는 절망했다. 그가 바란 것은 그저 마지막으로 공주의 얼굴을 보는 것이었다. 바라는 것을 이룬 후에, 그는 마지막까지 왕을 위해 싸울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럴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목숨 바쳐 섬기리라 마음먹었던 왕이 그를 버렸다.

얼마 후. 카라누르의 군대가 도시에 들이닥쳤다.

그리 견고하지 않은 성벽은 하루도 버티지 못했다. 땅과 하늘이 울부짖는 것 같은 굉음이 연달아 들려오더니 성벽이 무너졌다는 소리가 들렸다. 감옥을 지키던 간수들마저 다 사라지고, 적막한 감옥 속에서 기사는 최후를 기다렸다.

그러나 잠시 후. 기다리던 최후 대신 전혀 다른 것이 그를 찾아왔다.

[여기 있었군.]

두 개의 별이 눈 대신 반짝였다. 입에서는 말 대신 천둥이 치는 듯했다.

그것은 신의 사도가 아니었다. 신 그 자체였다.

마땅히 무릎 꿇어야 할 것 같은 상대의 앞에서, 기사는 냉담함을 유지했다. 그의 마음은 이미 다 타고 재만 남아, 그 어떠한 경이로움 앞에서도 동하지 않았다.

“왕이 일개 죄수를 찾으셨군.”

[쓸만한 전사가 필요하다. 나를 섬겨라.]

“그대의 전사들은 이미 강하오.”

[필사적으로 삶을 찾지 않았던가. 그런데 얼마나 지났다고 이 꼴인가.]

“살아야 할 이유가 사라졌으니까.”

[진정 그런가?]

불타오르는 두 개의 별을 보며, 기사는 깨달았다.

그랬다. 그에게는 아직 살아야 할 한 가지 이유가 남아있었다.

공주. 공주를 살릴 수 있다면. 아니, 그녀와 함께 할 수 있다면. 그렇다면 무엇이든 하리라.

[소원을 들어주지. 대신 영원한 충성을 맹세하라.]

“…그리 하겠소.”

이미 한 번 깨진 맹세였다. 새로운 주인에게 다시 충성을 약속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모든 것을 잃은 그에게 단 하나 남은 것은 사랑뿐이었기에.

[좋아.]

신과 같은 자, 훗날의 황제는 약속을 지켰다. 다만 기사가 몰랐던 것은, 그가 새로운 충성을 맹세하던 그 시점에 공주의 몸은 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황제는 약속을 지켰다. 단, 그의 방식대로.

그날. 기사는 죽고 황제의 검으로서 다시 태어났다. 초월자로서 거듭난 그는 기사이면서 공주였다. 두 개의 영혼이 깃든 하나의 육신. 기사는 그가 소원한 대로 공주와 함께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는 기뻐했고, 슬퍼했다.

그는 이제 기사가 아니었고, 공주도 아니었다. 그는, 더는 자신이 누구인지 정의하지 못했다.

* * *

[자네가 보기에는 어떤가. 나의 분노는 정당한가?]

[글쎄.]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이제 줄카가 그를 미치광이라 부르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하나의 몸에 두 개의 영혼? 언뜻 할렌과 비슷한 것도 같지만 그렇지 않았다. 할렌은 끊임없이 안정과 평온을 위해 노력했지만 이자는 스스로를 광기에 내던졌다. 분노 때문일까? 아니면 슬픔?

[당신이 황제를 죽였소?]

군터가 잠시 생각에 잠긴 사이, 줄카가 대뜸 그리 물었다.

[아니.]

키리스트가 고개를 저었다.

[난 단지 살짝 등을 밀어줬을 뿐이야. 내가 아니었더라도 결국 놈은 그리 되었을 걸세.]

[이 나라를 찢어놓는 것도?]

[그래.]

키리스트가 비어버린 잔을 내려놓았다.

[이미 퍼진 불씨에 작은 바람을 불어넣었을 뿐이야. 내가 아니더라도 이 나라는 무너졌겠지.]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소?]

[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뭔가?]

줄카도 잔을 비웠다. 두 개의 빈 잔. 반듯하게 놓인 다과는 처음 그 모습 그대로였다.

[난 우리가 이룩한 것들이 허무하게 무너지기를 원치 않소.]

[안타깝군. 하지만 어쩔 수 없네.]

[나야말로 안타깝소. 황제는 이미 없는데 여전히 그의 그림자에서 조금도 벗어나지를 못하는군.]

내내 평온하던 키리스트의 얼굴이 비틀렸다. 주름이 잡히고, 힘줄이 여기저기 튀어 올랐다. 그러나 아주 잠깐이었다. 한순간 비틀렸던 얼굴은 다음 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평온하게 바뀌었다.

[나를 자극할 필요 없네. 나는 마음을 바꾸지 않아. 그리고 이미 늦었네. 이제는 돌이킬 수 없어.]

탁자가 사라졌다. 주변에 보이던 모든 것이 사라졌다. 그들은 어느새 거대한 석재 원탁 앞에 서 있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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