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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1053화 (1,053/1,064)

1053화

전령을 맞는 일은 굳이 성주가 직접 할 필요 없는 사소한 일이다. 매일 전령들이 성에 당도하는데, 그때마다 성주가 나서서 그들을 맞이한다면 그 얼마나 번거로운 일이겠는가.

하지만 이번만은 예외였다. 성내의 을씨년스러운 거리와 가라앉은 분위기는 전령들이 성문을 통해 성에 들어서자마자 이상한 기분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고, 그들의 위화감 내지 의심을 거두려면 성주가 직접 얼굴을 보이는 것만큼 확실한 것이 없었다.

성주 앞에 무릎 꿇은 전령들은 성주의 기분이 썩 좋지 않아 보인다는 것을 즉시 알아차렸다. 그에 그들은 더욱 고개를 숙인 채 조심스럽게 보고를 마치고 곧장 황급히 성을 떠났다.

“할렌님께 이런 훌륭한 재주가 있었을 줄은 몰랐습니다.”

모페이브가 농담 섞인 말로 할렌을 칭찬했다. 할렌은 한나절 동안 무뚝뚝한 성주 노릇을 훌륭하게 해냈다. 물론 말은 코르베리온이 다 했고, 그가 한 일이라고 해봐야 입을 꾹 다물고 가만히 앉아있던 것이 전부였지만.

“그러니까 말입니다. 대장한테 그런 재주가 있었는 줄은 미처 몰랐지 뭐요.”

한 병사가 제법 자연스럽게 대화에 끼어들었다. 병사라고는 하지만 정말 병졸은 아니었다. 여기까지 군터를 따라온 병사들 중에 군터를 따른 세월이 10년 안쪽인 이들은 없었다. 특히 지금 말을 꺼낸 병사의 경우는 나이가 할렌보다도 많았다. 얼굴에 자글자글한 주름과 흉터는 그 오랜 세월에 대한 증명이었다.

“…….”

할렌은 가만히 그 병사를 쳐다보았다. 시선을 느낀 병사가 순간 어색하게 웃었으나, 그래도 할렌은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데라즈.”

“왜 부르쇼.”

병사의 이름을 떠올린 순간. 할렌의 얼굴이 변했다. 창백하고 무뚝뚝한 사내의 얼굴도 아니고, 죽어버린 성주의 얼굴도 아니었다. 그의 얼굴이었다. 그가 사용하던 본래의 얼굴.

“…그거, 신기하기는 한데…바로 앞에서 보니까 좀 징그럽구만.”

떨떠름한 표정을 짓는 병사를 보고 있으니 몇몇 기억들이 떠올랐다. 노곤한 몸을 이끌고 시끌시끌한 주점에서 잔을 기울이던 일, 피 칠갑을 하고서 서로 빽빽 고함을 질러대던 일, 적을 향해서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달리던 일 등.

그 기억들은 마치 환상이나, 한 순간의 꿈처럼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하나 물어도 되오? 내내 궁금한 게 있었는데.”

“뭔데.”

자신의 말투가 변했다는 것을, 할렌 스스로는 느끼지 못했다. 그 자그마한 변화를 즉시 알아차린 것은 옆에서 듣고 있던 모페이브 뿐이었다.

“죽었다 살아나면 어떤 기분이오?”

“글쎄.”

할렌이 시선을 거뒀다.

“얼떨떨하지.”

“…….”

“좆같고.”

“그런 것 같았소.”

병사가 씩 웃었다.

“그래도 지금은 괜찮아진 것 같은데. 아니오?”

“…그래. 그런 것 같다.”

표정 없이, 석상처럼 굳어 있던 할렌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 * *

변화는 한 순간에 일어나지 않지만, 변화는 한 순간에 일어난다. 모순적이지만 사실이다. 변화를 위해서는 일정한 시간과, 그 시간 동안 축적되는 이유가 필요하다. 하지만 결국 불을 일으키는 것은 그 땔감에 떨어진 작은 불씨 하나다.

군터는 할렌이 변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그 이유를 궁금해하지는 않았다. 또한 그 변화가 긍정적인 것인지 부정적인 것인지에 대해서도 따지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변한 할렌도 할렌이고, 변하기 전의 할렌도 할렌이었다.

[중심을 찾았군. 제법 빨라.]

줄카가 할렌을 보며 한 마디 했다. 군터 또한 그의 말에 동의했다.

중심을 찾았다. 실로 적절한 표현이다. 어딘가 불안하게 삐걱거리는 것 같았던 할렌이 이제는 제법 생기 있게, 자연스럽게 행동하지 않는가.

“장군. 주변에 눈은 없는 듯합니다.”

정찰을 마친 살라스가 돌아와 보고했다. 매사 신중하고 철저함을 추구하는 그였지만 이번만은 아무것도 확신하지 못했다. 이미 한 번 포로들 가운데 숨어있던 그림자 검사들을 색출해내지 못한 전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말했지 않나. 그 노괴는 기다리고 있을 거다.]

줄카는 확신하는 듯 말했지만 군터는 믿지 않았다. 설령 믿었다 해도 변하는 것은 없을 것이다. 이곳은 적지이고, 적지에서는 매순간 눈에 불을 켜고 최대한 소리를 죽인 채 움직여야 한다. 늘 그래왔으니 이번 역시 예외가 될 수 없다.

[불편하지는 않은가?]

군터가 여전히 신중을 기하자, 줄카는 군터를 설득하는 것을 관두고 화제를 돌렸다.

[불편?]

[이곳은 황제의 땅이다. 이제 황제는 없지만 이곳은 여전한 것 같군. 느껴지지 않나? 이 땅에서 우리는 불청객이다.]

[알 것 같기는 하지만 크게 불편하지는 않소.]

북부에서도 그랬다. 줄카는 그것이 아직 무르익지 않아서라고 했지만, 그런 그조차도 군터가 황도에서까지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을지는 예상치 못한 듯했다.

[놀랍군. 어쩌면 너는 우리보다 더 특별한 존재일지도 모르겠어.]

[특별하다?]

[그래. 너는 우리와 달리 스스로 일어섰지.]

전해지는 이야기, 그러니까 교단의 성직자들이 읊어대는 경전의 내용에 따르면 제국의 군주들은 원신의 사도인 황제에게 선택받은 존재들이라고 했다.

다소 부풀려지고, 일부 꾸며진 부분이 있긴 하나 그것은 분명 사실이었다. 군주들이 초월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황제와 계약을 맺었기 때문이었다.

[황제는 우리가 서로 형제와 같다 했지. 물론 우리 모두 그 불쾌한 농담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사실 아주 근거 없는 헛소리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지금 당신은 당신의 형제와 다투러 가는 셈이로군.]

그 말에 줄카가 드물게 표정까지 구겨가며 불쾌함을 표했다.

[그렇다고 볼 수도 있지. 하지만 다시는 그런 말을 하지 말도록.]

놀리려는 의도는 없었으나 결과적으로 그렇게 된 모양새라, 군터는 더 말하지 않고 말을 달렸다. 지금 그가 타고 있는 말은 이제 살점이 다 사라지고 뼈만 남은 시체마였다. 비록 살아있는 말처럼 빠르게 달리지는 못하나 지치지 않고 계속 달릴 수 있어 군터는 계속해서 시체마를 탔다. 사실 그는 다른 일행의 말들도 다 시체마로 바꾸고 싶었으나 줄카를 비롯하여 원치 않는 이들이 많아 그러지는 않았다.

그들은 밤낮으로 말을 달렸다. 군터와 줄카는 피로를 몰랐으나 그들을 따르는 이들은 그렇지 못했기에 이따금 휴식을 취하며 계속해서 이동했다.

늦은 새벽. 한동안 잠들어 있던 해가 고개를 들기 시작할 무렵. 그들은 야트막한 언덕 위에서 장엄한 광경을 목도했다.

“저건…정말 대단하군요.”

이 말은 모페이브가 아닌 살라스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이었다. 어지간한 일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그였으나 이번만은 눈을 크게 뜨고 입까지 벌린 채 감탄을 금치 못했다.

황도 리비암.

제국의 심장. 신이 축복한 도시. 세상의 중심.

그 모든 거창한 표현이 더 없이 어울리는 장엄한 도시였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는 그랬다. 이렇게 멀리서도 거대하다는 생각이 절로 드는 성벽부터 하늘과 이어진 듯 우뚝 솟은 탑들, 거기에 황도의 하늘에는 이제 막 고개를 들기 시작한 태양보다 더 밝게 느껴지는 은은한 빛무리가 떠올라 있었다. 마치 더없이 위대한 존재가 하늘 위에서 도시를 내려다보는 것만 같았다.

저런 도시를 본다면, 심지어 저런 도시에서 살아간다면 누구나 신실한 신앙인이 될 수밖에 없을 듯했다.

“인간이 어떻게 저런 것을 만들 수 있었을까요.”

모페이브가 탄식하듯 감탄하며 말했다. 지금 그의 심정이 곧 군터 휘하 모든 병사들의 심정이었다. 모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반면에 줄카 휘하의 용아들은 이전에도 황도에 와본 적이 있어 그들처럼 감탄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저 도시에서 제국이 일어났지. 물론 그때는 그저 초라한 성에 불과했지만.]

물론 줄카 역시 그 시절을 직접 보지는 못했다. 그가 제국에 합류했을 때, 리비암은 이미 제법 거대한 도시의 모습을 하고 있었으니까.

[가지.]

줄카가 앞장서고, 군터와 일행은 그의 뒤를 따랐다.

장엄한 빛의 도시가 점점 더 가까워졌다. 어느 정도 이동하자 도시가 시야 안에 다 들어오지도 않았다. 끝도 없이 뻗은 것 같은 성벽을 보고 있으니 과연 저것을 일개 도시라 할 수 있는 것인 것 의문이 들었다.

“황도의 문은 닫히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게 무슨.”

되물은 것은 살라스였으나, 답한 것은 그들로부터 적당히 떨어져 있던 한 용아였다.

“문을 닫는 것은 외적을 방비하기 위함. 하지만 제국의 수도에 외적은 존재할 수 없다. 그러니 문을 닫을 필요도 없는 것이지. 그러므로 도시의 문을 열어놓는 것은 자신감의 표출인 거요.”

그 설명을 들은 살라스가 실소했다.

“자신인지 오만인지 모르겠군.”

“자신이었지. 적어도 지금까지는.”

활짝 열린 성문이 큼지막하게 보이기 시작할 즈음부터, 내내 담담하기만 했던 용아들의 눈에 긴장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살라스는 그 변화를 즉시 알아차렸다.

“왜 굳어 있는가.”

살라스가 말을 걸자 용아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지.”

“그래?”

그새 성문이 더 가까워졌다. 성문은 열려 있었으나 지키는 병사들은 있었다. 새벽부터 도시에 들어가려는 이들이 짧게나마 줄을 서 있었는데, 그들 모두 저마다 마차를 중심으로 뭉쳐 있는 것을 보니 대부분 상인 무리인 듯했다.

“느리군.”

그들의 행색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 정도가 됐을 즈음, 돌연 성문 앞이 부산스러워졌다. 느긋하게 출입자들을 검문하던 병사들이 그제야 이쪽을 발견한 듯했다.

“깃발을 들어라!”

제국의 국기도, 귀족 가문의 문장기도 아니었다. 그 어떤 화려함도 기품도 없는, 검은 천에 노란색 실로 수놓은 그림 하나가 전부인 단조로운 깃발.

그러나 그 깃발의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그 단조로운 형태의 문장은 자그마치 교단의 성서에까지 기록된 것이었으니.

“줄카 전하시다!”

군주의 깃발을 알아본 병사의 외침 이후, 곧 청명한 종소리가 울렸다. 오랫동안 황도에 오지 않았던 군주가 행차했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히익!”

성문 앞에 줄을 서 있던 이들이 양옆으로 길게 갈라졌다. 잔뜩 긴장한 채 고개 숙이고 있던 이들이 어느 순간 기겁하며 뒷걸음질쳤다. 줄카와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있던 군터. 그가 탄 뼈 밖에 없는 말을 뒤늦게 본 것이다.

기겁한 것은 병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기다리고 있던 그들은 시체마를 보자마자 벌떡 일어섰다가 태연한 줄카를 보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어쩔 줄 몰라 했다.

군터는 주변의 시선은 무시하고 성문 너머로 보이는 도시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도시의 최외곽 지역일 것인데도 눈에 보이는 광경을 묘사하자면 번화하다, 라는 말 밖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뻥 뚫린 대로와 오밀조밀하게 들어선 건물들. 구역은 물론, 높이까지 맞춘 것인지 눈에 보이는 것만 수백 채가 훨씬 넘는 건물들이 대로 옆으로 줄지어 늘어서 있음에도 조금도 난잡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분명 황제가 죽은 후에 황도에서 여러 차례 피바람이 불었다고 하지 않았던가. 헌데 도시에 그늘이 져 있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전하!”

멀찍이서 일단의 무리가 말을 달려왔다. 나이 지긋한 사제들이었다. 그들은 줄카를 알아봤는지, 즉시 말에서 내리고는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전…!”

급해 보이기만 하던 그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은 것은 그들의 눈길이 줄카의 옆에 있는 군터, 정확히는 그가 탄 시체마에 닿은 것과 동시였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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