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2화
수천 명이 산 채로 땅에 묻혔다. 저항하던 수백 명이 그 자리에서 목이 베였다. 생매장당하리라는 것을 알고도 가만히 앉아만 있을 사람이 누가 있겠냐마는, 이미 기세가 꺾인 데다 무장해제까지 당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저 울부짖고, 애원하고, 기도하는 것 밖에는.
“역사에 남을 죄업이 되겠군.”
처절한 비명이 울려퍼졌던 자리에서, 모페이브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 소리를 들은 살라스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죄업이라.”
“사람을 산 채로, 수천 명이나 묻었으니 말이지요. 일반적으로 이런 일은…이해받기 쉽지 않지요.”
“이해? 그런 게 왜 필요합니까.”
“…….”
모페이브는 아무 말없이 살라스를 바라보았다.
강직하지만 잔정이 제법 있었던 사내. 그런데 지금은 전혀 다른 사람이다. 잔혹해졌다? 아니, 사고방식 자체가 달라졌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자연스레 누군가가 떠올랐지만.
“적이지 않습니까. 게다가, 듣자 하니 편히 죽으면 안 되는 놈들이기도 했고 말입니다.”
조정에 반기를 들고 일어난 세력.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덩치를 불려야 했다. 모두가 그들이 주장한 대의와 명분에 절로 이끌렸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겠지만, 세상사가 어디 그렇게 편리하게 돌아가던가. 아무리 나라에 대한 불만이 큰 사람이라도 막상 기회를 앞두고는 망설이기 마련이다. 하물며 단순히 반군에게 은밀히 협조하는 정도도 아니고, 대놓고 칼을 들고 역적이 되라 하는데 주저하지 않을 이는 드물다.
그렇기에, 로카리아 칼데른은 힘으로써 위엄을 떨치고자 했다. 적당한 명분과 적당한 위협이 있으면 보다 쉽고 빠르게 세를 불릴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그런 그의 생각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그와 그의 추종자들은 고함과 칼로써 세력을 규합했다.
하지만 그것도 한계는 있어, 모두가 그의 위세에 굴복하지는 않았다. 반역자들에게 굴종하지 않겠다는 뚝심을 가진 이들이든, 타락한 제국을 반역자보다는 더 믿는 이들이든, 아니면 또 다른 이들이든, 그런 이들은 로카리아 칼데른의 지배하에 들기를 거부했다. 그러자 로카리아 칼데른은 그들을 향해 가차없이 칼을 휘둘렀다. 처음에는 본보기였을 것이고, 이후에는 후환을 남겨둘 수 없다는 생각에서였을 것이다.
이 성만 해도 그렇다. 본래 이 성은 로카리아 칼데른의 것이 아니었다. 당연히 일개 상인 가문이었던 칼데른의 것도 아니고. 본래 이 성의 주인이었던 자들은 시체의 살점이 다 썩고 뜯길 때까지 첨탑에 걸려 있었다던가? 그래도 그들의 최후는 나름대로 그럴듯한 편이었다. 그들은 그래도 식은 몸뚱이나마 높은 곳에 걸리지 않았나. 그들을 따랐던 이들은 수백, 수천 명씩 쓰레기처럼 서로 뒤엉켜 재가 되거나 들에 버려져 짐승들의 먹이가 되었다.
그리고 이제, 로카리아 칼데른과 그의 추종자들이 또 다시 그 비슷한 꼴이 되었고.
‘결국 그런 거지.’
어떤 이들은 사람 목숨의 값어치를 너무 낮게 보지만, 또 어떤 이들은 정반대로 너무 높게 본다. 애초에 사람의 목숨에 값어치라는 것을 매길 수 있을까? 어떤 놈의 목은 금처럼 값지고, 어떤 놈의 목은 돌처럼 하찮은가?
전장의 한복판에서 별 생각 없이 생명의 불을 꺼 나가다 보면 여러 가지 환상에서 깨어나게 된다. 삶과 죽음, 생명의 무게 같은 것 역시 그 중 하나다. 어느 순간부터, 살라스는 사람의 목숨보다는 사람 그 자체를 더 중시하게 되었다.
아주 간단하다. 아군과 적군이 같지 않고, 지인과 생판 모르는 남이 같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이름도 모르는, 어딘가에서 우연히 스쳐 지나가지라도 않으면 세상에 존재하는지도 몰랐을 타인에게 동족애라는 사치스러운 감정을 품지 않는 것.
발상의 전환이라면 전환이지만, 그런 심경의 변화가 살라스에게는 너무나 쉽고 자연스러웠다. 한순간 가벼운 의구심이 생겼고, 약간의 고민 끝에 그의 관점은 바뀌었다.
그렇기에 그는 감상에 젖은 것 같은 모페이브의 모습에 별로 공감이 가지 않았다. 조금은 우습기도 했고, 안타깝기도 했다. 어쩌면 저 유능한 집사이자 술사가 나이를 먹어 감수성이 풍부해진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 * *
로카리아 칼데른을 치고, 그의 추종자들을 몰살시키는 데는 한나절이면 충분했다. 암약하고 있던 그림자 검사들도 모두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은 분명했다.
“짧으면 이틀. 어쩌면 그보다 짧을 수도 있겠습니다. 길면…….”
로카리아 칼데른은 황도 일대의 대규모 반란군 수괴 중 하나였다. 그 말인 즉 그와 비슷한 세를 가진 반란군이 여럿 있다는 뜻이다. 그들은 조정의 토벌군보다도 서로를 더 의심하고 경계했다. 조정에 반기를 든 반란군이지만, 우습게도 그들에게 있어 조정보다 더 위협적인 것은 깃발이 다른 ‘동지’들이었다. 그들은 서로의 경쟁자였으며, 잠재적인 적이었다.
코르베리온과 몇몇 협조적인 포로들에 의하면 로카리아 칼데른은 그의 경쟁자들에게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 경쟁자들 역시 마찬가지였을 터.
“…길어봐야 사흘 정도가 아니겠습니까.”
[병사들은?]
“문제없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군터가 이번에는 눈에 띄게 초췌해진 사내에게 눈길을 돌렸다.
코르베리온.
로카리아 칼데른의 수하 무장이었던 그는 지금 반쯤 정신이 나가 있었다. 그는 자신의 주군이 차가운 고깃덩어리가 되어버린 것도, 대다수의 동지들이 수천 병사들과 함께 산 채로 땅에 묻혀버린 것도, 그에게는 아직 이 모든 것이 끔찍한 악몽일 뿐인 듯했다. 언젠가는 꿈에서 깨겠지만, 군터는 그때까지 기다려줄 생각이 없었다.
[밖에서 도는 병력이 있다고 하던데.]
고개를 숙인 채 눈도 마주치지 않고 있던 코르베리온이 몸을 떨었다. 뭔가 다른 생각을 한 듯했지만, 역시 군터는 신경 쓰지 않았다.
로카리아 칼데른의 세력은 황도 부근에 난립한 반란군 중 규모로 따졌을 때 무난히 한 손에 꼽혔다. 칼데른의 깃발을 세운 성만 해도 넷이었고, 거느린 병력은 만이 훌쩍 넘었다. 만약 군터 일행이 코르베리온의 협력을 얻지 못했다면 일이 이렇게 순조롭게 진행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점은 코르베리온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고개를 들지 못하는 것은 두려움도 있지만, 그보다는 죄책감 때문이었다. 주군과 동료들에 대한 죄책감. 이 끔찍한 재앙을 불러왔다는 자책 때문에.
하지만 그는 동시에, 자신이 아니었더라도 결국 비극은 피할 수 없었으리라 확신했다. 비겁한 자기 위안이었지만, 그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기에 죄책감에 고개를 떨궜을지언정 목은 세우고 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습니다.”
코르베리온이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칼데른이 보유한 네 개의 성은 서로 긴밀하게 연락을 주고받았다. 언제 어디서 어떤 적이 들이닥칠지 모르니 당연한 일이었다. 매일 파발이 오가고, 성과 성 사이의 길목에는 언제든 병력이 머물고 움직일 수 있는 주둔지가 존재했다.
[사흘.]
“예?”
[사흘 간은 시끄러운 일이 생기지 않았으면 한다.]
“…….”
그게 무슨 뜻인지는 코르베리온도 단번에 알아들었다. 곧 세 성에서 보낸 전령이 당도할 터. 그들을 맞이하고, 적어도 사흘 동안은 밖에서 이상을 느끼지 못하도록 만들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제아무리 로카리아 칼데른의 곁에서 그가 일을 처리하는 것을 봐왔다고 해도, 그가 로카리아 칼데른의 일을 대신 처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봐야 했다.
[무엇을 걱정하는지 안다.]
“예?”
코르베리온이 멍청하게 눈을 깜빡이자 할렌이 앞으로 나섰다. 특색 없어 보이는 무뚝뚝한 얼굴이 한 걸음을 내딛자 이리저리 꿈틀대더니, 두 걸음을 내디뎠을 때는 전혀 다른 얼굴로 변해 있었다.
“허…허억!”
코르베리온은 심약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심약한 자가 어찌 피를 보는 무부가 될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 얼굴의 주인이 바로 간밤에 싸늘한 시체로 변한 자신의 주군이라면, 또한 그 죽음에 적잖은 죄책감마저 느끼고 있다면 그 얼굴을 마주보는 순간 기겁하는 것도 그리 우스운 일은 아닐 것이다.
“살고자 하지 않았나.”
얼굴은 똑같았고, 심지어 목소리마저 흡사했다. 약간 가라앉은 느낌이 있긴 했으나, 그것도 이상하다고 여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이미 반을 이루었는데 이제 와서 나머지 반을 포기할 참인가.”
고저 없는 목소리는 코르베리온의 내심을 정확히 읽고, 긁었다. 코르베리온은 참기 힘든 부끄러움을 느꼈으나, 동시에 자신의 목적을 다시 한 번 상기했다.
“…제가 최선을 다한다 해도, 성내에 간밤의 소란을 모르는 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어찌…….”
[그 점은 걱정할 필요 없다.]
즉답에 코르베리온은 더 말하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 * *
간밤에 죽음이 몰아쳤던 거리는 해가 뜬 지금도 을씨년스러웠다. 거리를 오가는 것은 살아 움직이는 시체와 병사 몇몇 뿐이었다. 이따금씩 조심스레 집 문을 열고 밖을 살핀 이들은 악취를 풍기며 걸어 다니는 시체를 보고 기겁하여 다시 문을 걸어 잠갔다.
어둠이 가시지 않았을 때야 그렇다 치더라도, 날이 밝았음에도 누구 하나 문밖으로 나서지 않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비록 거리 곳곳에 움직이는 시체들이 있다 한들, 그것들이 성내 모든 거리에 있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그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 두려움은 그들의 마음 속에서 스스로 자라난 것이기도, 아니기도 했다.
사람이 몸에서 체취를 풍기듯, 영혼 역시 체취를 풍긴다. 물론, 영혼은 몸이 없지만 말이다.
영혼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특색 없는 유령부터 원령이나 망령, 그리고 그 외에도 여럿.
죽은 자가 어떤 자인지에 따라, 사인에 따라, 주변 환경에 따라 육신을 벗어난 영혼은 그 형태와 성질을 달리 한다. 그리고 그에 따라 영혼이 풍기는 냄새 역시 달라진다.
사람의 체취는 그저 코를 간질일 뿐이다. 그러나 영혼의 체취는 보다 본질적인 부분에 영향을 미친다. 예컨대 감정 같은 것.
본래 수천이 훌쩍 넘는 원념이 성벽 안팎으로 넘실거렸다. 거기에 수천이 넘는 생명이 땅에 묻히면서 새로운 영혼들이 몸을 잃고 성내를 떠돌았다. 그리고 그 영혼들에 군터의 손길이 닿았다. 음산함을 머금은 영혼들의 체취가 성 전체를 뒤덮으니, 그 영향은 성내의 모든 산 자들에게 미쳤다.
가뜩이나 잠을 설치고 어둠이 가실 때까지 긴장을 늦추지 않느라 피로가 컸다. 거기에 극심한 두려움까지 더해지니, 그들의 몸과 마음은 이미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졌다. 그런 그들의 마음에 사기를 머금은 영혼들이 영향을 미치니, 그들이 느끼는 피로와 두려움은 배가 되었다.
“장군의 뜻대로 되었습니다.”
죽은 자의 성.
사람 냄새라고는 조금도 나지 않는 성내를 내려다보며, 모페이브가 중얼거렸다.
“의심하셨습니까?”
살라스가 되물었다.
“아니요. 단지 의아할 뿐입니다.”
“어떤 부분이?”
“조금의 오차도 없이 의도한 대로 움직이지 않습니까. 저들도 다 나름의 생각대로 움직이는 사람일 것인데, 지금의 모습은 뭐랄까…인형 같지 않습니까. 등 뒤에 달린 실이 이끄는 대로 움직일 뿐인.”
살라스가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뗐다.
“작은 것은 큰 것에 휘둘리는 법 아니겠습니까.”
“그도 그렇군요.”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는 듯 시선을 던지던 모페이브가 나직이 되뇌었다.
“그도 그래요.”
* * *
굳게 닫혀 있던 성문이 언제 그랬냐는 듯 활짝 열렸다. 그리고 얼마 후. 십여 기 가량의 기마가 성내로 들어섰다. 그들은 성 곳곳에 남은 전투의 흔적을 보고 흠칫 몸을 떨었으나, 떨떠름한 얼굴을 하고서도 끝내 말머리를 돌리지는 않았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