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1화
천이 조금 넘는 병력으로 성을 점령하기는 힘들다. 하물며 어중간하게 벽을 세운 이름만 성이 아니라 거주민만 해도 수만이 넘는 번듯한 성이라면 사실상 불가능하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점령상태를 계속 유지할 생각이 없다면, 다시 말해 잠시간 점거하는 정도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움직여! 당장!”
주인의 피를 나누어 받은 용아들은 말할 것도 없고, 오랫동안 호흡을 맞춰온 군터의 병사들 또한 하나를 명하면 알아서 서넛을 행할 수 있는 숙련된 군인이었다. 그들은 머리를 잃은 적이 혼란과 두려움에서 깨어나기 전에 그들을 철저하게 압박했다.
성주가 사로잡힌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데야가의 종이 산산이 부서진 것도 크게 작용했다. 장엄하게 울려 퍼지던 종소리가 한순간에 뚝 끊겼을 때, 그들은 이제껏 느껴보지 못한 종류의 두려움과 상실감에 젖어야 했다.
제국민이라면 누구나, 스스로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원신에 대한 신앙심을 가지고 있다. 저 드높은 하늘의 꼭대기에 머물고 있다는 전지전능한 신은 제국의 역사와 함께 한 존재인 만큼 그 영향력은 제국민들의 마음속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물론 제국의 심장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에 따라 그 크기는 저마다 다르지만, 이곳은 황도와 지척이라 할 만큼 가까운 곳이었다.
“말도 안 돼.”
“꿈… 아니, 지독한 악몽 같군.”
무기를 빼앗긴 채 끌려가던 병사들이 저마다 희미하게 중얼거렸다. 비록 조정에 반기를 들었을지언정 그들의 마음에는 제국에 대한 애착과 신에 대한 신앙심이 있었다. 그런 그들의 눈에 신체 여기저기가 훼손된 창백한 피부의 시체가 걸어 다니고, 부서진 성물 조각이 땅을 굴러다니는 광경은 이제껏 그들이 살면서 경험한 그 어떤 악몽보다도 끔찍한 것이었다.
“성문은 철저히 통제하고 있습니다. 다만 주민들은…….”
살라스가 말끝을 흐렸다.
이 성에는 수만이 넘는 주민들이 있다. 그들은 아직까지 두려움에 떨며 집 문을 걸어 잠그고 있었으나, 그들이 언제까지 쥐 죽은 듯 있지는 않을 터였다.
[문제없다. 그 전에 모두 끝낼 테니.]
“예.”
* * *
모페이브는 간만에 땀으로 목욕을 할 정도로 힘을 썼다. 여기서 말하는 힘이란 당연히 육체적인 힘이 아니라 술력이었다.
언젠가부터 이론과 연구 쪽으로 빠지기는 했으나, 본래 그는 땅의 술법에 나름 정통한 술사였다. 땅을 무르게 만드는 것 정도는 그가 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하고 쉬운 일 중 하나였다.
“이 정도면 되겠군요.”
이제는 갈라짐 없는, 그럭저럭 멀쩡하게 들리는 목소리. 그러나 위화감은 갈라지고 가라앉던 전보다 훨씬 심하다. 분명 사람의 말이고 사람의 목소리인데, 전혀 그렇게 느껴지지 않는다.
후덥지근하던 몸이 싸늘하게 식는 것 같은 느낌. 모페이브는 자신을 보고 있지 않은 할렌을 슬쩍곁눈질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할렌의 시선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마치 설명을 요구하는 것 같은 모습에도 모페이브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일단 힘껏 일을 돕기는 했으나, 그는 진정 의문이었다.
그런 그의 의문은 할렌이 아니라 어느새 다가온 살라스가 풀어주었다.
“등 뒤에 적을 두고 움직일 수는 없으니 말입니다.”“지금의 저들이 적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한번의 교전으로 대장이 사로잡히고 성까지 함락당한 적군은 전의를 완전히 상실했다. 저들을 무장해제 시키는 데 아군의 피해가 거의 발생하지 않은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지금은 그렇지. 하지만 날이 밝고 머리가 맑아지면 다른 생각을 품는 놈들이 나올 겁니다.”
“…….”
“무엇을 걱정하는 것인지 모르겠군요.”
정말 모른단 말인가? 모페이브는 조용히 미간을 좁혔다.
그는 딱히 선한 사람도, 인정이 많은 사람도 아니었다. 그렇게 되기를 바란 적도 없었다. 오히려 그는 세상의 기준으로 놓고 본다면 선보다는 악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당장 젊은 시절부터 제국의 눈길을 피해 음지를 전전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런 그로서도 이 일에 대해서는 다소 꺼림칙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생매장. 그것도 수천 명을 땅에 묻는 일이다. 누구라도 주저하지 않겠는가.
‘달리…방도가 없기는 하다지만.’
이미 명에 따르지 않았던가. 이제와서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우습다. 모페이브는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쉬고는 군터에게 향했다. 모페이브가 땅을 무르게 만드는 동안 군터는 로카리아 칼데른을 심문하고 있었다.
팔 한쪽이 잘리고, 가슴 한복판에 바람구멍까지 난 로카리아 칼데른은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몰골을 하고 있었다. 호흡은 가늘고, 눈빛도 이따금씩 흐려졌다. 그의 몸에 각인된 술법의 힘은 여전히 작용하고 있었지만 그의 몸은 악화되지만 않을 뿐, 조금도 회복되지 않았다. 군터가 로카리아 칼데른에게 그의 피를 몇 방울 먹인 탓이었다.
평범한 인간은 사용할 수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신비로운 힘. 이 시대에는 그것을 뭉뚱그려 술법이라고 칭한다. 게다가 나름의 방식대로 분류까지 해 놓았다. 오만하게도.
이 시대의 분류에 의거하면 저주는 사령술에 속한다. 이상한 일은 아니다. 대개 사악하다 여겨지는 것들은 거의 사령술에 속해 있으니까.
하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저주와 사령술은 별 관련이 없다. 저주 중에 원령을 매개로 하는 것들이 있다고는 하지만, 원령이 없더라도 얼마든지 저주의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아니, 사실 저주라는 것자체는 마음만 먹는다면 누구나 할 수 있다. 다만 그 저주가 어느 정도의 힘을 발휘하느냐가 문제일 뿐.
피는 가장 대표적이고 효율적인 저주의 매개 중 하나다. 더군다나 그 피가 초월자의 피라면, 단 몇 방울 만으로도 강력한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군터가 바란 것은 로카리아 칼데른 회복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뿐이었다. 그의 의지를 담은 몇 방울의 피는 로카리아 칼데른의 육신에 각인된 술법의 힘을 어렵지 않게 상쇄시켰다. 언제까지고 계속 그리 하지는 못할 테지만, 적어도 며칠은 유지될 터.
“으…….”로카리아 칼데른은 힘없이 늘어져 신음만 흘렸다. 처음에는 독기 가득한 눈으로 군터를 쏘아봤던 그는 이제 제정신을 유지하는 것도 버거워 보였다.
이제야 준비가 되었다 판단한 군터가 로카리아 칼데른과 눈을 맞췄다.
[키리스트와 무슨 관계지?]
제국 조정에 반기를 군벌.
코르베리온을 심문하여 처음 로카리아 칼데른의 이름과, 그의 행적에 대해 들었을 때만 해도 특별히 여기지 않았다. 그저 성가시게 됐지만 이왕 부딪쳤으니 되도록 빨리 정리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불쾌한 종(데야가의 종)소리를 들은 순간,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반군의 수괴에게 무언가가 있음을 직감했다.
데야가의 종은 평범한 법구가 아니다. 비록 법보에는 못 미칠지언정 성물이라 불리는 귀한 물건이었다. 줄카에게 물으니 성물이라 불리는 물건들은 모두 교단에서 소유하고 관리한다고 했다. 그런데 그런 물건이 반군의 손에 들어간 것이다.
물론 그럴 수 있다. 황제가 죽고, 황도에서 대낮에 귀족들이 죽어 나가는 판국에 교단이라고 멀쩡했겠는가. 혼란의 와중에 성물들을 분실했을 수도 있다. 그렇게 분실한 물건들이 반군의 손에 들어갔을 수도 있고.
로카리아 칼데른이 키리스트와 연관이 있을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단지 그럴 가능성이 있고 어렵지 않은 일이니 할 뿐.
“무슨 개소리냐…….”
로카리아 칼데른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침이라도 뱉고 싶은 듯했지만 그럴 기력조차 없어 입만 달싹이나 고개를 떨어뜨렸다.
“소용없다. 네놈이 내게서 얻을 수 있는 건 내 시체뿐이니까.”
모든 것을 잃고 분노만이 남은 로카리아 칼데른은 악에 받쳐 있었다. 그는 그 나름대로 저항의지를 불태운 것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상대가 좋지 않았다.
[상관없다.]
군터가 피까지 흘려가며 로카리아 칼데른을 괴롭힌 것은 그의 입에서 답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기대하지 않았고, 바라지도 않았다.
“그래? 그럼 마음대로 해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단검이 로카리아 칼데른의 심장을 찔렀다. 몇 번 숨을 껄떡이던 그가 곧 생기를 잃고 쓰러지자 늘어진 육신 속에서 영혼이 고개를 들었다. 잔뜩 지치고, 약해진 영혼이었다.
군터는 그 영혼에 손을 뻗었다. 영혼은 도망이라도 치려는 듯 거칠게 흔들렸으나 군터의 손아귀를 벗어나지는 못했다.
붙들린 영혼은 곧 군터의 영혼감옥으로 빨려 들어갔다. 허약해질 대로 허약해진 영혼은 변변한 저항도 하지 못했다.
[정말 편리한 힘이란 말이지.]
어느새 다가온 줄카가 말했다. 군터는 대꾸하지 않고 로카리아 칼데른의 영혼을 살폈다. 얼추 살펴보니 여느 인간의 영혼과 다를 바 없었다.
영혼 감옥에 갇힌 영혼은 그의 소유물이나 마찬가지다. 군터는 영혼을 집중해서 들여다봄으로써 그 영혼의 기억을 읽어낼 수 있었다. 물론 기억 전체를 세세하게 읽지는 못한다. 그가 읽을 수 있는 것은 영혼이 지닌 강렬한 기억 몇 가지 정도였다.
하지만 괜찮다. 만약 로카리아 칼데른이 키리스트와 접점이 있었다면 그 기억은 분명 뚜렷하게 남아있을 테니.
“장군!”
군터가 본격적으로 영혼을 들여다보려 할 때, 밖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제가 생겼습니다! 포로 중 몇 놈이……!”
군터는 다 듣지도 않고 달려나갔다.
* * *
그르르……!
고통과 분노를 머금은 포악한 울음소리가 나직이 흘러나왔다. 그 분노는 수십 개의 꼬챙이에 꿰인 시신을 향했다. 방금까지 그를 분노케 했던 적은 이미 시체가 되었으나, 할렌은 여전히 분노를 가라앉히지 못했다.
조금 전. 포로 중 몇 놈이 기습적으로 탈출을 시도했다. 분명 모조리 압수했을 터인데, 놈들의 손에는 어디서 났는지 모를 검이 들려 있었다.
순식간에 대여섯이 당했다. 할렌이 즉시 반응하지 않았다면 피해는 더 커졌을 것이다. 고작해야 서넛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제압하기가 쉽지 않았다. 탈주자들의 검에 수십 개의 상처를 입고, 감정이 들끓어 인간의 형상을 반쯤 집어 던진 다음에야 승기를 잡을 수 있었다.
“이런.”
군터가 당도한 직후. 가까스로 노기를 가라앉힌 할렌은 그가 제압한 탈주자들이 더는 숨을 쉬지 않는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림자로군.]
군터와 함께 온 줄카가 할렌에게 난도질당하다시피 한 고깃덩어리의 정체를 단번에 알아보았다.
[그림자?]
[알고 있지 않은가.]
그림자 검사단. 물론 알고 있다. 그들이 이곳에 있었는가. 군터는 할렌이 마지막으로 죽인 시신에서 영혼을 수거했다. 로카리아 칼데른의 영혼을 거두었을 때와는 전혀 달랐다. 분명 영혼을 감지할 수 있었으나, 영혼 감옥으로 밀어 넣으려 하자 영혼이 흩어지려 했다. 마치 마른 모래를 손에 쥔 듯했다. 또한, 영혼 자체에서 강렬한 존재감이 느껴졌다. 그 거대한 존재감은 분명 이 작고 약한 영혼이 발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추측이 맞았군. 그렇지?]
군터는 답하지 않았다. 대신 생각했다.
로카리아 칼데른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의 영혼을 더 면밀히 살펴본다면 조금 더 정보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 또한 별로 중요치는 않을 것이다.
반면 이 영혼에게서 얻은 단서는 제법 큼지막했다. 이것은 명백히 키리스트가 개입한 흔적이었다. 키리스트는 세상사에 관심 없는 척 황도에 머물면서도 수하들을 보내 이곳에 손을 대고 있었다. 그것이 감시였는지, 은밀한 조력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이곳에 그의 눈이 닿아 있었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지켜보고 있었던 거군.]
그렇게 밖에 생각할 수 없다. 그는 지켜보고 있었다. 이곳을, 이곳을 지나게 될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르지.]
말은 추측하듯 하지만 확신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군터는 나머지 영혼들도 거둔 후에 무릎 꿇고 있는 수천의 포로들을 보았다. 그들은 예기치 못한 소란과, 그 소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목격한 기괴함에 당황하고 두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마무리해라.]
“예.”
살라스와, 어느새 온전한 사람의 형상으로 돌아온 할렌 등이 흩어졌다. 그들은 각기 병사들을 지휘해 포로들을 큼지막하게 파인 땅으로 몰아넣었다.
“아, 안 돼!”“무슨 짓거리야! 우리는 다 항복했잖아! 방금 그 놈들처럼 저항하지도 않았다고!”
모든 생명의 감각이 최고조에 이르는 순간. 그건 바로 자신의 죽음을 직감했을 때다. 어떤 이유에서건 잠잠히 통제를 따르던 포로들이 커다란 구덩이를 보자마자 발악하듯 목소리를 높이고 발버둥쳤다.
“이 미친 새끼들!”
개중 가장 먼저 달려든 포로가 있었다. 그가 몇 걸음을 떼기도 전에 살라스가 그를 가로막았다.
“너희의 신에게 보내주려는 거다.”
“찢어 죽일 놈들! 원신께서 네놈들을……!”
그가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살라스의 칼이 그의 목젖을 베었다. 그가 높게 분수처럼 솟구치는 자신의 피를 맞으며 뒤로 넘어갔다.
살라스가 한 발자국 물러나자 그의 발 앞에 몇 방울의 핏물이 떨어져 내렸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하지.”
그의 건조한 시선이 포로들을 훑었다. 폭발할 듯 달아올랐던 포로들이 그의 눈길을 받자마자 몸을 떨며 울부짖었다.
“사, 살려주십시오!”
“뭐든지 하겠습니다! 제, 제발…!”
공허한 애원이 쏟아졌다. 살라스는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실행력이 뛰어났던, 혹은 죽음이 너무나 두려웠던 포로 서넛이 할렌에게 으깨지는 것을 보고 재차 병사들에게 명했다.
“모두 밀어 넣어라!”
“옛!”
곧이어 통곡과 애원, 절망 섞인 악다구니가 성을 울렸다.
* * *
무수한 백성들을 학살하고, 약탈했던 자들이다. 그러니 그들이 고통스러운 최후를 맞이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렇게 합리화를 했지만, 그래도 수천 명이 내지르던 비명을 쉬이 머릿속에서 지울 수는 없었다. 그들이 묻힌 땅을 고른 것이 자신이었음에도.
모페이브는 그의 주인을 보았다.
언제나처럼, 그의 주인은 흔들림이 없었다. 그의 뒤편에 선 두 사람, 살라스와 할렌 역시 그러했다. 여기서 흔들리고 있는 것은 오직 자신뿐인 듯했다.
“장군.”마음을 다잡은 모페이브가 주인에게 다가갔다.
“성의 주민들은 어찌하실 요량인지요.”
[걸리는 모양이군.]
“…예. 솔직히, 그렇습니다. 칼을 쥔 자들이야 그렇다 치지만, 주민들은…….”
흔들리는 마음을 굳이 감추지 않았다. 감춘다 한들 감춰지지도 않을뿐더러, 감출 이유도 없었다. 약하다고 여겨질지도 모르지만, 그럼 또 어떤가.
[놔두겠다.]
그 말이 머릿속에 울린 순간, 모페이브는 마음을 짓누르던 바위가 사라진 것을 느꼈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모페이브는 그 말뜻을 짐작하면서도 모르는 척 고개 숙였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