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0화
처음 종소리가 울려 퍼졌을 때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흘려보냈던 것들이 주춤하는 것은 알 수 있었지만, 그래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독특한 힘을 지닌 법구라는 것은 분명하나, 그뿐이다. 그는 법구가 아니라 법보의 힘도 지척에서 경험한 바 있었다. 그런 그에게 있어, 조금 특이한 법구 정도는 그리 대단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종소리가 두 번, 세 번 연달아 울렸을 때. 군터는 순간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이건 뭐지?]
군터는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속이 울렁거리고, 가벼운 어지럼증까지 일었다. 마지막으로 이런 느낌을 받아본 적이 대체 언제였던가.
[성물(聖物)이다.]
줄카가 답했다.
[성물?]
모든 사이한 것을 물리치고, 잘못된 것을 올바르게 돌려놓는 힘. 그런 힘을 지닌 물건. 그것을 성물이라 한다.
하지만 사이한 것이란, 잘못된 것이란 무엇인가. 올바른 것은 또 무엇이고? 어떠한 기준이 그것을 정의하는가. 알 수 없지만, 군터는 자신이 그 기준의 바깥에 놓였음을 깨달았다.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본능이, 아니 모든 것이 저 장엄한 울림을 격렬히 거부하고 있었으므로.
쾅!
신경질적으로, 힘껏 발을 굴렀다. 소리 없이 다가온 시체마가 그를 태웠다.
[굴복하던가, 굴복시키던가. 오직 둘 중 하나뿐이다.]
또 한 번 종이 울렸다. 더 가까워졌으니 자연히 그 힘도 더 크게 다가왔지만 이번에는 어지럽지도, 속이 울렁이지도 않았다. 아무 대비 없이 맞닥뜨렸던 조금 전과 달리, 이번에는 군터 역시 마음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칼날처럼 날카롭게, 창끝처럼 예리하게 치켜세운 마음이 그를 밀어내려는 힘과 정면으로 맞붙었다.
[그래. 그럴 줄 알았다.]
줄카가 뒤에서 만족스럽게 웃었다. 당돌한 후배는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이 정도 패기는 보여줘야 한다. 이곳에 있는 것은 황제도 아니고, 그저 종 하나뿐이다.
* * *
쾅-!
군터의 창이 로카리아 칼데른을 짓눌렀다. 그러나 로카리아 칼데른은 짓눌렸을지언정 쓰러지지 않았다. 커다란 바위라도 쪼개버릴 거대한 힘을, 어떻게든 버텨낸 것이다.
“우아악!”
심지어 거기에 그치지 않고 군터를 밀쳐내기까지 했다. 시체마가 비록 살아있는 군마보다 힘이 약하고 무게도 가볍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건장한 군마의 골격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니었다. 거기에 완전무장한 군터까지 더해졌는데도, 로카리아 칼데른은 괴력을 발휘해 그를 밀어냈다. 심지어 뒤틀리고 부러져 너덜너덜해진 팔로 말이다.
근성이라는 간단한 단어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발악. 군터는 뼈가 살가죽을 뚫고 튀어나오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뒤틀렸던 로카리아 칼데른의 팔이 어느새 그럭저럭 멀쩡한 모양새로 변한 것을 확인했다.
로카리아 칼데른. 자칭 성주이면서도 일전을 벌일 때 뒤로 빠져있는 경우가 없다더니, 확실히 믿는 구석이 있는 모양이었다.
데엥-!
또 한 번 종이 울렸다. 군터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그럼으로써 종소리에 실린, 그를 몰아내려는 힘에 저항했다.
“뭐 하는 놈이냐!”
분노에 찬 목소리에 떨림은 없다.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이런 상투적인 말이라니. 어떻게든 몸을 회복할 시간을 벌어보려는 얄팍한 수작. 그런 눈에 훤히 보이는 잔꾀에 굳이 응해줄 필요가 있겠는가. 군터는 곧바로 다시 로카리아 칼데른을 몰아붙였다.
한 번은 막아냈다 해도, 기본적으로 힘의 차이는 확연했다. 어른과 아이, 그 이상의 차이가 둘 사이에는 존재했다. 게다가 팔도 성치 않았으니, 로카리아 칼데른은 순식간에 이리저리 몸을 날리기 바빴다. 그나마도 몇몇 충성스러운 수하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악!”
수하들의 비명이 이어질수록 로카리아 칼데른의 눈이 더 붉게 충혈됐다.
그의 휘하에 쓸만한 놈들은 드물었다. 일을 맡겨놓고 지켜보고 있자면 절로 한숨이 나오는 놈들이 태반이었다. 진정으로 믿고 쓸만한 녀석들은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인재란 그렇게나 드문 것이지만, 그보다도 더 드문 것이 충성스러운 수하다. 목숨까지 바쳐 주인을 섬기는 녀석들. 로카리아 칼데른도 그런 얼마 되지 않는 충성스러운 수하들에게는 아낌없이 베풀었다. 재물과 권세, 그가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피하십시오! 어서!”
황금보다도 더 귀한 녀석들이 죽어 나가고 있다.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인가. 대체 왜? 신벌인가? 진정 그런 것인가?
대엥-!
그러나 종이 또 한 번 울렸을 때, 아주 잠깐이지만 주춤하는 적을 보며 로카리아 칼데른은 그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것은 벌이 아니다. 시련이다. 신께서는 오히려 나의 뒤에 계시며, 저것은 신의 위대한 의지에 반하는 악마가 분명하다. 만약 저 강대한 악마를 물리칠 수 있다면, 신의 시련을 극복해낼 수 있다면 잃은 것보다 더 큰 상을 얻으리라.
“우읍!”
로카리아 칼데른은 혀를 씹었다. 핏물이 입안을 적시고, 멍해진 머리를 고통이 깨우면서 동시에 양팔의 감각도 돌아왔다.
“종을 울려라!”
복잡했던 머리가 한순간에 맑아졌다.
그래. 이것이 신께서 부여하신 시련이라면, 당당히 도전하여 이겨내면 그만이다. 신은 그의 종에게 못 이겨낼 시련을 던지지 않는다. 그렇지 않은가? 이겨내지 못하는 시련은 벌일 뿐이다.
“물러서지 말고 맞서라!”
“주군…?”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수하들을 무시한 채, 로카리아 칼데른은 달렸다. 고통에 신음하던 몸이 지금은 불 같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이겨내리라.’
어둡던 하늘이 드디어 개었는가. 달과 별의 가느다란 빛이 시야를 밝혔다. 로카리아 칼데른은 그의 시련을 향해 몸을 던졌다.
* * *
적 수괴의 기세가 일변했다는 것은 덤벼드는 적들을 쓸어 담으면서도 충분히 알아차릴 수 있었다. 공포에 젖었던 자가 갑자기 용기백배하여 덤벼드는데, 그 기세가 제법 훌륭했다.
그러나 싸움은 기세만으로 되지 않는다. 물론 기세는 중요하지만, 그것도 동등한 적을 상대할 때나 통하는 것이다.
적 수괴, 로카리아 칼데른이 몸을 날렸을 때 군터는 이미 그 다음을 보고 있었다. 그것은 선지자가 미래를 내다보는 것과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최대로 높이 떠오른 돌이 이후에는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자연스레 알듯이, 군터 또한 로카리아 칼데른의 모든 것을 읽고 예측할 수 있었으며 반응할 수도 있었다.
턱!
칼이 뻗어오기 전에 칼을 쥔 손목을 잡고.
쾅!
그대로 휘둘러 땅에 내리꽂았다.
“커헉!”
로카리아 칼데른은 고통이 머리에서부터 척추를 타고 내려간 다음에야 참았던 숨을 토했다. 그리고 그 숨이 다 빠져나가기도 전에, 훨씬 더 끔찍한 고통이 그의 비명을 멈췄다.
서걱!
칼을 쥔 팔이 잘려 나갔다. 고통은 비명을 자아내지만, 너무 큰 고통은 오히려 비명을 멎게 한다. 지금 이 순간이 바로 그랬다. 로카리아 칼데른이 고통에 몸부림치려 하자, 그의 팔을 앗아간 길쭉한 창날이 이번에는 그의 가슴 한복판에 파고들었다. 그의 가슴을 꿰뚫은 창 끝은 땅에 깊숙이 파고들었고, 그를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었다.
단순히 고통 때문만은 아니었다. 로카리아 칼데른의 몸에 각인된 힘은 그에게 왕성한 생명력, 특히 재생력을 부여했으므로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아무리 큰 상처를 입더라도 얼마간은 거동할 수 있었다. 설령 지금처럼 팔이 잘리고 가슴이 뚫린 채 땅에 박힌 상황이 되더라도 말이다.
그런데 지금 그는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상처를 치유하고 고통을 멈춰줘야 할 생기가 돌처럼 굳어 꿈쩍도 하지 않았다.
“허…허억…!”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고통 때문이 아니었다. 무언가가 숨구멍을 틀어막은 것 같았다.
[로카리아 칼데른.]
군터는 그의 창에 꿰여 꿈틀거리는 상대가 이곳의 주인, 자칭 성주 로카리아 칼데른이라는 확신에 가까운 추측이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추측은 추측일 뿐. 군터는 그 추측을 확신으로 만들기 위해 굳이 한 마디를 던졌고, 그에 반응하는 상대의 모습에서 원하는 답을 얻었다.
적 수괴, 로카리아 칼데른을 사로잡았다. 비록 언제 숨이 끊겨도 이상하지 않은 몰골이기는 했지만, 군터는 그가 창을 뽑기만 한다면 로카리아 칼데른이 문제없이 일어설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 항복을 종용하는 것은 손쉬운 일이었다. 당연히 해야만 하는 일이기도 하고.
하지만.
쾅!
성문이 굉음을 내며 활짝 열리고, 말을 탄 일단의 병력이 쏟아져 들어왔다. 군터보다 조금 늦게 성벽을 넘은 용아 중 몇이 성문을 지키던 적병을 처리하고 성문의 걸쇠 중 몇 개를 풀자, 기다렸다는 듯 살라스와 병사들이 밀고 들어온 것이다.
“장군!”
어둑하고, 난잡한 와중에도 살라스는 곧장 군터를 찾아왔다. 그 와중에 그의 검이 피로 흥건하게 젖은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이놈이군요.”
살라스가 창에 꿰인 채 간신히 숨만 붙어있는 로카리아 칼데른을 보며 말했다.
“생각보다 쉽게 풀렸군요.”
[성문을 점거해라. 누구도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예.”
고작 천이 조금 넘는 인원이 성 하나를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성문을 얼마간 점거하는 정도라면 그리 어렵지 않다. 특히 지금 같이 어둠과 혼란, 공포가 함께한다면 더더욱.
[이 녀석을 지키고 있도록.]
살라스에게 성문의 점거를 명한 군터가 할렌에게는 로카리아 칼데른을 맡겼다. 할렌은 가슴을 관통한 창이 빠져나가자 다시 몸부림치기 시작한 로카리아 칼데른의 가슴팍을 거칠게 짓밟았다. 그저 발 하나만 올렸을 뿐인데 로카리아 칼데른은 커다란 바위에 깔리기라도 한 것처럼 단번에 움직임을 멈췄다.
대엥-!
로카리아 칼데른을 할렌에게 맡긴 군터는 계속해서 그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드는 주범에게 향했다. 시체마를 타고 가파른 계단을 평지처럼 오르며, 그는 곧 높은 탑의 꼭대기에 다다랐다. 그곳에는 녹초가 된 사제들 여럿이 쓰러지다시피 널브러져 있었다.
“누, 누구…….”
군터는 사제들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시체마에서 내리고 종을 향해 다가갔다.
* * *
이 생소한 느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분노? 혐오? 아니면 두려움? 뭐가 됐든, 잠잠한 종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자연스레 거부감이 들었다. 이 물건이 가까이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이런 기분이 드니, 군터는 확실히 이것이 자신과 양립할 수 없는 물건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화가 나지 않나?]
어느새 따라온 줄카가 물었다. 물음이었으나 한편으로는 부추김 같기도 했다.
[우리의 본질에 대한 모독이지. 어떻게 할 텐가.]
군터는 말로 답하지 않았다. 그는 커다란 종을 향해 창 대신 주먹을 휘둘렀다. 강철로 된 건틀릿이, 거기에 실린 막대한 힘이 그대로 부딪치니 커다란 종은 굉음과 함께 터져 나갔다. 그러자 군터를 자극하던 거부감과 불쾌감이 깔끔하게 사라졌다.
“감히 성물을…! 이, 이건 신성 모독……!”
두 번째로 휘두른 것은 주먹이 아니라 창이었다. 길쭉한 선이 끊김없이 허공을 가르니, 머리를 잃은 사제들이 일제히 바닥에 몸을 뉘었다.
[이건 내 결정이오.]
[물론 그렇겠지.]
군터가 못마땅한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물었다.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나?]
[아니. 단지 믿었을 뿐이네. 우리가 다르지 않다는 것을.]
군터는 대꾸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조용해진 탑의 정상에서, 그는 아직 소란이 가시지 않은 성내를 굽어보았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