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9화
전장에서 두려움은 가장 효과적인 무기이면서 동시에 가장 두려운 적이다. 그렇지 않겠는가? 잘 드는 칼이 내 손에 쥐여 있다면 든든하지만, 적의 손에 들려있다면 두려운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두려움이 짙어지고 있다. 적기로군.]
줄카가 말했다. 군터에게만 들리는 말이었다.
[그게 보이나?]
[아니. 느껴질 뿐이지. 자네도 그렇지 않은가?]
그 말이 옳다. 두려움을 통제하고, 나아가 손에 쥔 도구처럼 다루는 것. 창을 다루는 것만큼은 아니지만 군터가 꽤 자신이 있는 부분이었다. 맨몸뚱이 하나만 믿고 죽음에 도전하던 그 시절부터, 그는 자신과 타인의 두려움을 다루는 데 익숙했다. 익숙해질 수밖에 없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겨야 했고, 이기기 위해서는 쓸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다 써야 했으니까.
전투마다 목숨을 도박판의 판돈처럼 걸어야 했던 그때. 후에 그럴 필요가 없어졌을 때에도 군터는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그는 더 큰 승리를 위해 그가 지닌 모든 재주를 발휘했다. 지금도 마찬가지.
성벽 위로 날아드는 희끄무레한 형체들. 누가 보더라도 귀신이라고 하겠고, 실제로도 틀리지 않지만 실상 별 위력은 없는 눈속임에 불과했다. 성벽 위로 떠오른 영혼들은 군터의 영혼 감옥에서 꺼낸 망령들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본래 그가 거느리고 있던 망령들은 솔롬에서의 일전으로 다 소진했다. 일부는 전투 중에 소멸했고, 일부는 할렌과 하나가 되었다. 그러니 본래라면 그가 부릴 수 있는 망령은 없는 셈이지만, 이곳에서는 사정이 달랐다.
제법 튼튼해 보이는 성. 그 도처에는 원념에 찌든 영혼들이 적지 않았다. 통상적으로 육신을 잃은 영혼은 세상에서 그리 오래 버티지 못하고, 이 주변에 저들을 묶어둘 다를 요소는 존재하지 않는 듯하니 그 영혼들은 모두 근래에 생겨난 것일 터.
뭐, 사실 그런 것이야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군터는 성 주위를 배회하는 영혼들을 손쉽게 그의 통제하에 놓았다. 그리고 그것들을 모두 성벽 위로 보냈다. 상술하듯 얄팍한 눈속임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예측하고, 기대했던 대로 저들은 스스로의 두려움에 잡아먹혔으니.
[뭘 한 거지?]
성벽 위의 소란이 점점 심해지는 것을 확인하며, 군터가 줄카에게 물었다.
군터가 망령의 허상을 보내 적들을 속인 것처럼, 줄카도 무언가를 했다. 군터는 조금 전, 줄카의 존재감이 한순간 기이할 정도로 부풀었던 것을 똑똑히 느꼈다.
[자네가 한 것과 같다. 간단한 속임수지.]
짤막하고 허술한 설명에 군터는 그러려니 하고 넘겼다. 그는 미지의 탐구에 미친 호기심 많은 탐구자가 아니었다. 모든 것을 다 알아야 할 필요는 없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방금 그 수상쩍은 행위가 자신에게 방해가 되지 않는다면 그것만으로도 좋았다.
콱―!
큼지막한 창 한 자루가 성벽에 깊숙이 틀어박혔다. 그리고 연달아 십여 개의 창이 비슷하게 성벽을 파고들었다. 그러나 성벽 위에 있는 이 중 누구도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엇?!”
성벽에 박힌 창을 두 번 밟고 뛰어오른 군터. 가장 먼저 성벽 위로 올라온 그의 바로 앞에 화들짝 놀란 병사 한 명이 서 있었다. 병사가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군터의 손이 병사의 입과 얼굴을 틀어막았다. 손을 감싼 철갑이 사이에 있긴 했으나 거의 밀착하다시피 한 상황에서, 군터는 순간 묘한 생각이 들었다.
그는 그의 손아귀에 붙들린 병사에게서 극심한 혼란과 두려움을 느낄 수 있었다. 어쩌면 농밀한 죽음의 향에 반쯤 실성해버린 것일지도 몰랐다. 병사의 정신은 무너지기라도 할 것처럼 불안하게 흔들렸으며, 이는 육신과 영혼에까지 크게 영향을 미쳤다. 그렇기에 군터는 다른 때였다면 떠올리지 않았을, 못했을 생각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것은 자그마한 호기심이라면 호기심이었다. 어렵지 않고, 해보지 않을 이유가 없었기에 그는 바로 시도했다. 적극적이진 않지만 그럭저럭 갈무리하고 있던 죽음의 기운을 풀어내어, 불안하게 흔들리는 정신 때문에 덩달아 흔들리고 있는 영혼을 붙들었다. 그리고 강제로 그것을, 잡초를 뽑듯 육신에서 뽑아냈다.
[으아아아아악―!]
귀로는 듣지 못하는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 거슬리는 괴성에 슬쩍 눈살을 찌푸린 군터가 조금 더 힘을 쏟았다. 그러자 그에 의해 단단히 붙잡혀 있던 병사의 영혼이 산산이 부서졌다.
[터무니없는 짓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군.]
어느새 뒤따라 올라온 줄카가 감탄하며 말했다. 군터는 실 끊어진 인형처럼 비틀거리는 병사의 몸을 보며 손을 뗐다. 영혼을 잃은 육신은 기능을 멈췄다. 심장은 여전히 뛰고 있지만, 그뿐이다.
[참으로 신기한 재주란 말이지.]
수십, 수백 개의 영혼을 맞이한 병사의 몸이 끓었다. 창백한 피부가 불룩거리는가 싶더니 우드득! 하는, 뼈가 부러지는 것 같은 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
군터는 약간의 흥미를 담아, 점점 기괴하게 변하는 병사를 보았다. 그가 보고 있는 것은 육신의 변화가 아니라 내면의 변화였다. 하나의 육신에 머물기에는 너무 많은 영혼. 그것들은 서로 다투는가 싶더니 곧 서로 복잡하게 뒤엉키고, 합쳐졌다. 서로 다른 눈송이가 녹아 하나의 물웅덩이가 되듯이.
육신과 영혼, 그리고 정신. 생명을 구성하는 세 가지. 무엇하나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 것이 없다. 셋 중 하나라도 부족하다면 온전한 생명이라 할 수 없다. 그런 면에서, 너무 많은 영혼이 억지로 비집고 들어간 병사는 당연히 온전한 생명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기야, 이미 한 번 죽은 존재를 어떻게 멀쩡한 생명이라 하겠는가마는.
* * *
쿵!
‘뭐지?’
쿠웅!
“어이! 이게 무슨 소리야?!”
희미한 환각이라 여겼던 것이 육중한 땅울림으로 변했을 때는 이미 귀가 있는 자들은 모두 그 소리를 들은 후였다.
“형님!”
로카리아 칼데른은 다급히 달려온 사촌 동생, 비벡 칼데른을 보았다. 뭔 짓을 하다 온 것인지 갑옷이 어정쩡하게 몸을 가리고 있었다. 모양새만 봐서는 갑옷을 입은 건지 외투를 걸친 것인지 모를 정도였다. 분명 자는 동안에도 갑옷을 벗지 말라고 명했거늘.
“가서 종을 더 울리라고 전해라!”
“예? 아, 알겠습니다!”
허둥지둥 종탑으로 달려가는 사촌 동생을 보며 혀를 찬 로카리아 칼데른은 굉음이 들려온 북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 * *
“더는 무리입니다!”
꾀죄죄한 법복을 입은 사제가 연거푸 숨을 헐떡이며 외쳤다. 그의 동료인 다른 두 명의 사제도 창백한 얼굴로 반쯤 주저앉아 있었다.
데야가의 종을 연달아 울린 대가였다. 강력한 힘을 지닌 이 성스러운 종은 한 번 울릴 때마다 종을 울린 자에게서 적잖은 기력을 앗아갔다. 여기까지만 놓고 보면 그리 대단치 않다고 여길 수도 있지만, 성스러운 힘을 지닌 물건답게 종을 울리는 사람이 반드시 성직자여야만 한다는 까다로운 조건이 존재했다.
“으음…….”
비벡 칼데른은 난처하기 그지없었다. 숫제 애원하다시피 하는 사제들에게 당신들이 죽든 말든 상관없으니 종을 울리라고 윽박지르기에는 그의 신앙심이 발목을 잡았다. 생산적인 일과는 거리가 먼 사제들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그의 사촌 형과 달리, 그는 사제들을 최대한 존중하려고 노력했다. 그의 사촌 형은 전혀 동의하지 않지만, 비벡 칼데른은 신을 믿는 자는 성직자들에게도 최대한 친절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나중에 신의 앞에 서서 심판을 받을 때, 신의 곁에 있을 성직자들이 좋은 말 한마디라도 보태주지 않겠는가.
“뭐, 그럼…그쪽 어린 사제들이 하면 되겠군.”
“말도 안 됩니다! 이 아이들은 아직 정식으로 서임조차 받지 못한…….”
“종을 치는 데 정식이면 어떻고 수습이면 어떤가!”
안타깝게도 비벡 칼데른의 신앙심은 한 번 인내심을 발휘하는 데서 바닥을 드러냈다. 그가 짜증내며 윽박지르자 사제들은 주춤하더니 불안하게 눈을 굴렸다. 그러다 역시 위축되어있는 어린 사제들에게 눈짓을 보냈다.
‘진작 그럴 것이지.’
엉거주춤하며 나선 어린 사제들이 거대한 종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곧, 장엄하고도 성스러운 울림이 퍼져나갔다. 가까이에서 그 울림을 접한 비벡 칼데른은 두려움, 짜증을 포함한 모든 부정적인 감정들이 씻은 듯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죽이는군.’
성스러운 기적 앞에서 이런 감상을 품는 것이 다소 불경스럽다고 스스로 생각하면서도, 그는 이 불경스러운 표현 외에는 다른 소감을 떠올리지 못했다. 하지만 뭐, 어떤가. 무지는 죄가 아니다. 신께서는 똑똑하고 많이 아는 자라고 해서 편애하지 않으신다. 무지한 자는 무지한 방식으로 신을 섬기고 찬양하면 그뿐이니, 지금의 이 상스러운 찬미에 대해서도 신께서는 이해하시리라.
쿠웅―!
비벡 칼데른이 눈까지 감고 영적인 충만함에 심취하던 그때. 또 하나의 거대한 울림이 그의 마음을, 아니 귀를 찔렀다.
‘뭐지?’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린 그의 눈이 즉시 휘둥그레졌다. 어두운데다, 너무 멀어서 제대로 볼 수는 없었으나 뭔가 거대한 것이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아아악―!”
그리고 그것이 움직일 때마다, 처절한 비명이 잇따랐다.
* * *
로카리아 칼데른이 눈살을 찌푸렸다.
‘저건 또 뭐냐.’
그것은 성벽 위에서 뚝 떨어져 내렸다. 사람의 형체를 하고 있었고, 그리 크지 않았다. 그래서 처음에는, 믿기 힘들지만 어떤 멍청한 녀석이 발을 헛디뎌 성벽 위에서 추락한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성벽 위에서 떨어진 것이, 아무런 충격도 없다는 듯 벌떡 일어나 움직이자 그는 그런 생각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악―!”
떨어진 것에 가까이 다가간 병사 둘이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질렀다. 로카리아 칼데른은 방금까지만 해도 사람의 형체를 하고 있던 그것이 한순간 괴이하고 끔찍한 무언가로 변하더니 주변을 난장판으로 만들기 시작하는 것을 보며 안 그래도 굳어있던 얼굴이 석상처럼 변했다.
쾅!
그것은 점점 더 커졌다. 두 다리로 달리던 그것은 곧 짐승처럼 네 발로 달리는가 싶더니 몸에서 길쭉한 것들을 뿜어내 사방을 휩쓸었다. 채찍 같기도 하고, 꼬리 같기도 한 그것에 맞은 이들은 말에 치이기라도 한 것처럼 붕 떠서 나가떨어졌다.
“병사들은 물러나라!”
혼란과 두려움에 물든 병사들이 대적할 수 있는 괴물이 아님을 한눈에 알아봤다. 수십 명 정도 죽고 다치면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게 무슨 의미인가. 로카리아 칼데른은 멀찍이 나가떨어진 병사 한 명이 놓친 도끼 한 자루를 칼 대신 쥐고 내달렸다.
“비켜라!”
“이건 또 어디서 튀어나온 괴물이야!”
따로 명령을 내리지 않았으나 그와 비슷한 생각을 했을, 혹은 성주가 나서니 반사적으로 몸이 움직였을 충직한 수하들이 각기 다른 방향에서 괴물을 향해 덤벼들고 있었다.
부웅!
채찍처럼 날아든 길쭉한 무언가가 어느새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로카리아 칼데른은 황급히 몸을 돌려 피하는 한편 도끼를 내리찍었다. 도끼날은 둔탁한 소리를 내며 나무처럼 딱딱한 무언가를 단숨에 절단했다.
“후읍!”
그는 땅까지 파고든 도끼를 회수하며 재차 몸을 날렸다. 용감하게 나선 그의 수하 중 불운하거나 실력이 달린 몇 명은 안타깝게도 앞선 병사들처럼 외마디 비명과 함께 나가떨어지는 중이었다. 로카리아 칼데른은 그들에게까지 눈길을 주지는 않았다. 그의 시선은 이제 한층 더 가까워진, 끔찍한 괴물에게 못 박혀 움직이지 않았다.
기괴하다고밖에 할 수 없는 외형이었다. 보이는 모든 곳이 끓는 물처럼 불룩거리고 있었고, 방금 베어낸 것처럼 길쭉한 무언가 외에도 온갖 것들이 몸뚱이에서 튀어나오고 있었다. 그것은 지렁이 같기도, 뱀 같기도, 혹은 길쭉한 주둥이 같기도 했다.
다리는 넷. 몸뚱이는 앞쪽으로 쏠려 있으며 눈은 보이지 않았다. 코나 귀 같은 부위도 역시.
이게 생물인가? 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놈인가. 무엇보다, 쓰러뜨리려면 어디를 노려야 하지? 로카리아 칼데른은 괴물이 움찔거림과 동시에 도끼를 냅다 집어던졌다. 노린 곳은 머리 전면부 중앙.
콰직!
도끼는 정확히 노린 곳에 박혔다. 괴물이 주춤했다. 고통은 느끼는 것일까. 로카리아 칼데른이 땅을 박차며 검을 뽑아 들었다. 단번에 괴물의 머리를 쪼개버릴 작정이었다. 온 힘을 다해 던진 도끼도 날이 반쯤 박히고 끝난 것을 보면 머리를 포함한 괴물의 몸뚱이는 일반적인 생물의 살점보다 훨씬 튼튼한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그의 검이라면 문제없이 가를 수 있을 터였다. 그의 검은 같은 무게의 금보다도 훨씬 더 비싼 몸이었고, 이미 수차례 쇠조차 절단한 적이 있는 명검이었으니까.
히히힝―!
그런데 그의 몸이 반쯤 떠올랐을 때, 하늘에서 서늘한 말 울음소리가 들렸다.
“……!”
퍼뜩 고개를 든 로카리아 칼데른의 눈에, 푸르스름하게 일렁이는 불덩이가 보였다. 그 불 속에 자리한 것은 한 마리 말과, 그 위에 타고 있는 창을 든 전사. 그리고…….
콰앙―!
숨통이 끊어지는 듯한 거대한 힘. 견디려 했으나 견딜 수 없었다. 팔이 뒤틀리고, 부러졌다. 연이어 세상이 기울고 정신이 혼미해졌다.
데엥―!
그 순간. 장엄한 종소리가 또 한 번 울려 퍼졌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