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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1048화 (1,048/1,064)

1048화

성문이 닫혔다. 이쪽의 접근을 알아차리자마자 움직였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즉각적인 반응.

[감이 좋군.]

물론 적이, 혹은 신원미상의 병력이 가까이 다가왔다면 성문을 닫는 것이 옳다. 하지만 코르베리온의 말에 따르면 저 성내에 있는 병력은 이쪽보다 훨씬 많다. 그렇다면 웅크리는 대신 한 번 나와볼 법도 하다. 그런데 그러지 않고 망설임 없이 성문을 닫았다. 그게 뭘 의미하는가?

겁이 많거나, 신중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뭔가를 눈치챘거나. 뭐가 됐든 ‘감이 좋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성이 제법 단단해 보입니다.”

짧은 시간 동안 성벽의 끄트머리까지 눈으로 훑은 살라스가 짤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둥지만 봐도 알 수 있다. 군벌이라더니 확실히 얼치기는 아니었다. 하기야, 얼치기였다면 감히 황도 인근에서 이렇게 설쳐댈 수 있었겠는가? 더 정확히는, 지금까지 숨이 붙어있을 수 있었겠는가?

“정면 공격은 피하고 싶습니다만.”

비단 공성병기 때문이 아니더라도 공성에는 충분한 준비가 필요하다. 충분히 준비했다고 해도 어려운 것이 공성인데, 하물며 지금처럼 아무런 준비가 안 된 상태라면 말할 것도 없다.

게다가 머릿수도 적다. 공성 측이 수성 측보다 머릿수가 적다니, 이보다 질 나쁜 농담도 찾기 힘들다. 물론 이쪽의 전력은 머릿수로 논할 수 없지만, 어쨌거나 전장에서 머릿수는 대개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성에는 일반 백성들도 많습니다. 성을 점령한다 한들 그들을 다 통제하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코르베리온이 말을 거들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그가 먼저 입을 연 적은 손에 꼽았다. 그는 어떻게든 양측의 무력 충돌을 막고자 했다. 그 마음이 다급한 목소리에서 생생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런 그의 노력이 안타깝게도, 이 자리의 그 누구도 그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정면충돌을 꺼리는 살라스조차도 그랬다.

“먼저 나올 생각은 없어 보이니,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은밀히 성벽을 넘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코르베리온은 그게 그렇게 쉽게 될 것 같냐고 반박하려다, 이들이라면 정말 그런 일을 아무렇지 않게 해낼 것 같다는 생각에 들썩이던 입을 꾹 다물었다.

“칼데른 공은 어리석은 사내가 아닙니다. 그는 일의 경중을 따질 줄 알고, 큰 것을 위해 작은 것을 내어놓을 줄도 압니다. 만약 칼데른 공이 여…러분의 신분을 알게 된다면 분명 현명한 결정을…….”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

군터가 고개를 꺾었다. 그의 시선이 구름 낀 하늘을 향했다.

[확실한 것을 두고 굳이 불확실한 것을 택할 이유가 무엇이냐.]

나른한 것 같으면서도 단호한 울림이 코르베리온의 말문을 막았다. 그래도 코르베리온은 포기하지 않고 언성을 높였다. 누군가 목을 누르고 있는데 억지로 말을 하는 것처럼, 입을 떼는 것 자체가 힘겨웠다.

“제가! 제가 설득하겠습니다! 반드시!”

이들은 황도로 가려 한다. 그리고 그 과정이 조용하기를 바란다. 그런 주제에 공성을 할 생각을 하는 것이 어처구니가 없지만, 이들의 신분은 그 무모함과 과격함마저 그럴듯하게 보이게 한다. 이들이라면 정말 저 튼튼한 성벽을 마른 나뭇가지 부수듯 손쉽게 부숴버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미 자신의 병사들이 그렇게 거짓말처럼 단번에 박살나지 않았던가.

“뭐 그리 필사적인가.”

옆에 있던 살라스가 애원하는 코르베리온의 어깨를 붙들었다. 그리 강하게 잡은 것은 아닌데, 이상하게도 코르베리온은 그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최후의 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다가온다. 갑작스럽냐 아니냐의 차이만 있을 뿐.”

그가 붙들려 있는 사이, 군터와 줄카는 걸음을 저만치 옮겼다. 그들은 코르베리온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처럼 멀어져갔다.

“이번에는 너희에게 그런 순간이 온 거다.”

받아들이라는 그 담담한 말이, 너무나 두렵게 들렸다. 그건 마치, 이제껏 해온 일들에 대한 대가를 받아들이라는 말 같았다.

‘아니. 아니야.’

감정 따위는 없다. 그저 무성의하게 선언하고 있을 뿐이다. 이것이 대가를 치르는 것처럼, 신 앞에서 심판을 받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자신의 마음이 이제야 토로하는 부끄러운 고백이리라.

‘언젠가. 그래. 언젠가는 이렇게 될 줄 알았지.’

정확히는, 언젠가 이렇게 될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게 언제였을까? 살려달라 애원하는 촌장과 촌민들을 본보기로 마을째 불태워 처형했을 때? 그들의 죄목은 적과의 협력이었지만, 사실은 불을 놓던 그때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들 역시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을.

그때였을까. 아니면 역시 팔이 잘려 나뒹구는 소년의 배에 창을 꽂았을 때? 어설프게 휘두른, 악에 찬 단검을 튕겨내는 데서 그쳐야 했을까?

‘역시 우리의 차례가 온 겁니다. 주군.’

공들여 지은 성이 무너지리라. 바로 오늘. 이제 곧.

* * *

기이한 광경이었다.

크다고는 못하지만, 그렇다고 작지도 않은 성. 상주 병력만 해도 수천에 달하는 번듯한 성을 고작해야 천이 조금 넘는 병력이 둘러쌌다. 인원이 너무 적어 성을 통째로 둘러쌌음에도 포위한 것 같지가 않았다.

그런데 그 초라한 포위에, 성 전체가 짓눌렸다. 성내 그 누구도 숨을 크게 쉬지 못했다. 형언하기 힘든 묘한 압박감이 성벽 안에 있는 이들의 마음을 짓눌렀다.

그리고 그 압박감은, 성의 주인인 로카리아 칼데른이 가장 크게 느끼고 있었다.

“무장들이 불만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그렇겠지.

“각하. 저들에 대해 알고 계시는 바가 있는 겁니까?”

“아니.”

“허면 어째서.”

“모르기 때문이다.”

“예?”

“이해하지 못했군.”

“소, 송구합니다.”

고개 숙인 수하를 돌아보지 않았다. 본다 한들 화가 풀리지는 않는다. 타박한들 이해하지 못한다. 영리하지 못한 것을 탓하고 싶지는 않지만, 눈치가 없어도 이리 없단 말인가. 정말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건가? 머릿수가 적으니 할만해 보이나? 저 적은 머릿수로 여기까지 와서, 성을 에워싼 저들이 정말 머저리인 줄 아는 건가? 그럴 만한 이유나 자신감이 있어서라는, 자그마한 의심도 품지 않는 것인가.

‘대체 이런 놈들과 어찌 대업을 도모한단 말인가.’

속이 답답해져 밖으로 나섰다. 서늘한 밤공기가 끓는 속을 잠시 달래주나 싶었으나, 곧 서늘함을 가장한 음산함이 등줄기를 쓸었다. 일찍이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오싹함이 그의 마음을 흔들었다.

‘설마, 정말로 그저 두려움에 사로잡힌 것뿐인가?’

무지한 것들이 뭐라고 떠들어대는지 안다. 알지만 무시했다. 무지한 것들을 일일이 설득하는 것만큼 피곤한 일은 없다. 그런 녀석들은 하나하나 붙들기보다는 결과로 이해시켜야 한다. 하지만.

우우-!

상념에 잠겨있던 그가 오싹함에 퍼뜩 고개를 틀었다. 분명 형언하기 힘든 섬뜩한 소리를 들었건만, 주변은 여전히 적막했다.

착각이었던가. 신경 쓰이는 것이 너무 많아 헛것을 들었던 것인가 싶어 어쩐지 땀이 찬 이마를 짚고 돌아서려던 순간.

우우우-!

다시 한번 그, 끔찍할 정도로 오싹한 소리가 들렸다. 이번만큼은 착각이, 잘못 들은 것이 아니라는 것은 곧 알 수 있었다.

“뭐야!”

“이게 무슨 소리야!”

호들갑을 떠는 병사들은 보이지도 않았다. 그의 시선을 끈 것은 저 멀리서 튀어나오는 엉덩이 무거운 술사들이었다. 평소에는 부르지 않으면 얼굴도 잘 비치지 않는 자들이 지금은 꼬랑지에 불이 붙은 망아지처럼 뛰쳐 나왔다. 그 꼴이 다른 때였다면 우스웠을 텐데, 지금은 불안했다.

“무엇인지 알겠나?”

그가 다가가 묻기 전까지, 그들은 그에게 인사 한마디 하지 않았다. 심지어 아예 그가 접근하는 것조차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심지어 그가 직접 말을 걸었는데도 예를 취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탓하지 않았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그들의 눈이, 그들에게 그럴 겨를이 없음을 알려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르겠습니다.”

“모르겠다?”

“무언가, 무언가가 저희의 눈과 귀를 가리고 있습니다.”

술사들의 기감은 술법을 익히는 데 필요한 재능임과 동시에 그 자체로 하나의 이능이다. 감각이 떨어지는 대다수의 이들은 느끼지 못하는 것들을 느낀다는 것은 맹인들만이 가득한 세상에서 홀로 눈을 뜨는 것과 다름없다. 이는 그들이 오만한(그들 자신은 인정하지 않지만) 이유이기도 했다. 그들이 보기에, 술사가 아닌 다른 이들은 모두 맹인이나 다름없었으니까.

헌데 지금. 그들은 그들이 얕잡아보던 이들과 다를 바 없게 되었다. 한순간에 눈이 멀고, 귀가 먹어버린 것이다. 본래 있던 것이 사라진 것이니 그들이 느끼는 혼란과 두려움은 더욱 컸다.

“성주님. 대비하셔야 합니다.”

“대비하다니? 무엇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분명…….”

얼빠진 소리에 화를 내려던 로카리아 칼데른이 무언가를 느끼고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어둑한 성벽 위. 희미한 횃불의 불빛 너머로 흐릿한 무언가가 불어오고 있었다. 바람인가? 하지만 바람에 형체가 있을 수 있나? 그렇다면, 그것을 바람이라 부를 수 있는가?

로카리아 칼데른이 다급히 일갈했다.

“종을 울려라! 어서!”

“옛!”

이곳, 크라바 성은 본래 다른 이름으로 존재했던 성을 그가 점거하고 증축한 것이었다. 그는 이곳을 그의 검점이자 칼데른의 거점으로 삼을 요량이었기에 성을 증축하고 보완하는 데 막대한 재화를 쏟아부었다. 성 중앙의 첨탑 위에 달아놓은 청동 종은 그 결실 중 하나였다.

데야가의 종.

교단의 옛 이름 높은 추기경의 이름을 붙인 종은 법구지만 이름값으로만 따지면 법보에 준하는 보물이었다. 법구가 법보에 준하는 취급을 받는 이유는 단 하나. 이 법구의 성능이 다른 법구들과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뛰어나기 때문이다.

데야가의 종에는 오직 하나의 기능밖에 없었다.

데엥-!

데야가의 종이 발하는 울림은 모든 삿된 것들을 몰아낸다. 삿된 것들이란 물론 성서에 적힌 사악한 것들을 의미한다.

데엥-!

저 성벽 위에 일렁이는 것들이 그런 사악한 것들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두려움에 울린 종소리가 두 번째로 울려 퍼졌을 때, 틈을 타고 흘러들어오는 물처럼 성벽 위로 들어오던 무언가는 분명 주춤했다.

“성직자들을 불러모아라!”

종이 효과가 있다. 그렇다면 성직자들 역시 힘을 쓸 수 있을 터. 크라바 성에는 이런저런 이유로 모여든 성직자들이 적지 않았다. 평소 로카리아 칼데른은 그들로 하여금 칼데른이 이 땅의 정당한 지배자임을 설파하게 했다. 말 많고, 불만은 더더욱 많은 그 작자들의 쓸모는 그 정도가 전부라고 생각했으니까. 괜히 그들을 끌어모았다고 후회도 여러 번 했었다.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그들이 이곳에 있다는 것이 그렇게 다행스러울 수가 없었다.

“서둘러!”

성주의 다급한 외침에 경황없이 눈만 굴리던 이들이 허겁지겁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대단하군.]

줄카가 감탄했다. 언제나 그랬듯, 이번에도 진심이었다. 그는 이 재능있는 후배에게 매번 감탄을 거듭했다. 이 과묵한 후배가 영혼을 다루는 재주가 뛰어나다는 것을 알지만, 지금 같은 모습을 보여줄 때면 알면서도 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낮지 않은 성벽 위로 흘러 들어가는 영혼의 범람. 그것은 실제 영혼이 아니라 영혼들이 풍기는 기운, 혹은 기척에 불과했다. 살아있는 사람으로 치자면 입으로 바람을 부는 것에 비유할 수 있으리라. 단지 그 바람이 불어오는지 아닌지 헷갈리는 미풍이 아니라 옷깃을 여미게 만드는 삭풍이라는 것이 차이였다.

그렇기에 성벽 너머의 이들은 당황하고 두려워한다. 위협적이며 거대한 무언가가 닥쳐온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기만술. 일반적인 전장이 아니라 신비의 영역에서 펼치는 고도의 기만술이다. 줄카는 이런 것이 가능하리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기감과 영감이 작용하는 신비의 영역에서 모든 것은 직관적이고 진실 되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다. 설마 이런 식의 기만이 가능할 줄이야.

[가지.]

어렵지 않게 적을 흔들어놓은 후배가 짤막하게 말하곤 몸을 날렸다. 줄카도 기다렸다는 듯 그 뒤를 따랐다.

(다음 화에서 계속)

군터

월산홍 장편 소설

(주)조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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