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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1047화 (1,047/1,064)

1047화

암비아스의 로카리아 칼데른.

이미 잊힌 이름까지 주워다 붙이며 거창하게 스스로를 추켜세웠지만, 코르베리온의 말에 따르면 그와 같은 이들은 이 주변에만 해도 몇 있는 듯했다. 나름 진심으로 로카리아 칼데른을 따르고 있는 것 같은 코르베리온이 그렇게 말할 정도였다.

“황도의 코앞에 군벌 행세를 하는 놈들이라.”

살라스가 실소하며 중얼거렸다.

군벌. 제국이 제국이라 불리게 된 이후로는 좀처럼 쓰이지 않는 단어였다. 다른 세상처럼 여겨졌던 외국의 정세를 말하면서나 간간이 쓰였을까.

하지만 이야기를 들어보면 군벌이라는 단어야말로 로카리아 칼데른 같은 자들을 설명하는 데 더없이 적절했다. 다만 황당한 것은, 그들이 황도에서 얼마 떨어지지도 않은 곳에서 그 군벌 행세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공공연하게 제국에 대한 반역을 일삼고 있음에도 그들은 아직 멀쩡히 살아서 숨쉬고 있다. 이게 의미하는 바는 단 하나.

“제국은, 조정은 최소한의 통제력마저 상실했군요.”

모페이브가 말하자 부쩍 초췌해진 코르베리온이 답했다.

“황제에 대한 신심이 그만큼 컸기 때문입니다.”

“음. 일리가 있군. 그럴 수도 있겠소.”

영원불멸하는 황제가 언제까지나 제국을 다스리고, 자신들을 이끌어줄 거라 믿었던 제국의 신민들이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높으신 분들이 황제가 승천했다고 공표했다. 무지렁이 백성들은 승천이라는 말을 이해하는 것조차 힘들었다. 결국 황제가 더는 자신들을 다스리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했을 때, 그들을 지배한 감정은 두려움이었다. 제국의 백성들에게 있어 황제의 존재는 그들이 선택받았다는 자부심과 안도를 느낄 수 있는 이유였으며, 사후의 구원에 대한 약속의 증거였다. 그런데 그것이 한순간에 사라진 것이다. 승천이라는, 이해하기 힘든 고상한 표현을 썼다고 해서 그 상실감이 다 어루만져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존경받는 노장군이 갈 곳 잃고 끓기만 하던 상처에 기름을 부었다. 그는 황제의 승천은 석연치 않으며, 뭔가 음모가 있다고 했다. 설마하니 군부에서 손에 꼽힐 정도로 높은 곳까지 올라간 노장군이 허튼소리를 하겠는가? 무엇보다, 무지렁이 백성들이라고 해도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도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잘못됐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단지 그 생각을 잘 정리할 머리가, 정리한다고 해도 그걸 입 밖에 낼 용기가 부족했던 것일뿐.

황도 조정의 귀족들이 황제 폐하를 암살했다!

누구 하나 대놓고 그리 외치지는 않았지만, 감히 입 밖에 내기 두려운 생각이 스멀스멀 그들의 머릿속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노장군은 작은 불씨를 남겼을 뿐이다. 그러나 그가 남긴 불씨는 곧 사방으로 번져갔다. 만약 민중의 암묵적인, 혹은 전폭적인 지지가 없었더라면 그 불씨가 이토록 거대한 불길로 번질 수 있었겠는가.

“그 똑똑하신 양반들도 미처 몰랐던 거지요.”

황제의 존재감은 그 휘하에게도 감당하기 버거울 정도로 거대했겠지만, 무수한 백성들에게는 그 이상이었다. 신앙 그 자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그들에게는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천상의 신들보다 지상에서 직접 자신들을 이끌어주는 황제가 더욱 거대하고 존귀한 존재였다.

승천이라는 한 마디는, 신앙을 잃고 두려움에 잠긴 백성들에게 하는 설명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아니, 한참이나 부족했다. 그런데 높으신 분들은 그걸 몰랐다. 어쩌면 그들은 백성들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고 여겼을지도 모른다. 백성들이야 자신들이 말하는 대로, 행하는 대로 휘둘리고 따르는 가축 같은 존재라고 여긴 것일지도.

뭐가 됐든, 그들은 실수했고 대가를 치렀다. 황제의 승천을 공표했던 조정 대신 중 지금까지 목이 붙어있는 이는 몇 되지 않았다. 눈치 빠르게 일찌감치 가문의 근거지로 돌아간 자들만이 목숨을 건졌고, 미련하게 끝까지 황도에 남아있던 자들은 모두 죽었다. 암살을 당한 자도 있었고, 대낮에 칼을 맞은 자들도 있었으며, 심지어 스스로 탑 위에서 뛰어내린 자도 있었다.

공포와 혼란만이 가득한 황도는 이미 제 기능을 상실했다. 만약 여전히 황궁에서 제 의무를 다하고 있는 제국의 수호자가 아니었다면 황궁마저 온갖 군상들의 피로 물들었으리라.

“수호자께서 여전히 황도에 계시기에, 아무도 감히 황도에 발을 들일 생각은 하지 못하고 있지요. 다만 서로 눈치를 보면서 때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그 때라는 것이 무엇인지, 오긴 하는 것인지는 코르베리온도 알지 못했다. 단지 언제까지 이런 형국이 계속되지는 않으리라 짐작만 할 뿐이었다. 북쪽의 황자들이 싸움을 마무리하고 내려오던가, 아니면 남쪽에서 아바시스 놈들이 기어 올라 오던가. 아니면 또 다른 경우가 있을 수도 있겠고.

‘또 다른 경우…….’

코르베리온은 붉은 눈의 군주와, 음산함이 감도는 덩치 큰 사내를 은밀히 곁눈질했다. 저들의 존재가 이제껏 유지되어 온 위태위태한 균형에 균열을 가져오리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저들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여전히 의문이었다. 황도 주변의 정세에 대해 무지한 것으로 보아 멀리 떨어진 곳에서 온 것은 분명한데…….

‘꼬여도 단단히 꼬였구만.’

정체불명의 병력에 대한 이야기를 접했을 때, 나서지 말고 그냥 잠자코 있을 것을. 왜 굳이 공을 세우겠다고 나서서 이런 꼴을 보는지.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다. 결국 자신이 아니라 누가 나섰더라도 같은 꼴이 되었을 터.

‘칼데른은 끝장이로구나.’

본거지에 상주하는 병력이라고 해도 고작 3천 남짓. 그나마 성벽은 여러 차례 보강을 한 덕에 튼튼하지만, 그래도 무리다. 군주를 상대로 싸움이라니. 그런 것이 가능할 리가 없지 않은가.

본인이 너무 충격적일 만큼 일방적으로 깨져서인지, 코르베리온은 퍽 비관적이었다. 그러나 이는 일반적인 제국 사람의 일반적인 사고방식이었다. 그들에게 있어 군주란 황제보다는 못하지만, 그래도 살아있는 신이나 다름없는 존재였으므로.

그렇기에, 제국을 향해 반기를 들었음에도 감히 황도에는 발을 들이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그곳에 수호자가 버티고 있기에.

‘그래.’

도저히 어쩔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포기할 수밖에 없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복잡했던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코르베리온은 모든 것을 내려놓기로 했다. 주인에 대한 한 가닥 충성심으로, 그가 부디 현명한 결정을 내리기를 기원했다. 그 야심찬 사내가 순순히 무릎을 꿇을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그의 태도도 다른 때와는 다를지도 모른다.

*

“뭐라?”

암비아스의 주인을 자처하는 사내, 로카리아 칼데른은 수하의 보고에 눈살을 찌푸렸다. 순간 자신이 잘못 들었거나, 아니면 이 수하 녀석이 뭔가 잘못 알고 헛소리를 지껄이는 것이 아닌가 의심했지만 다시 물었음에도 돌아오는 답은 같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군대가 이곳으로 오고 있다 합니다. 코르베리온이 놈들의 길잡이 노릇을 하고 있다고 하고요. 놈이 배신한 겁니다!”

코르베리온이 배신? 왜?

로카리아 칼데른은 코르베리온의 충성심을 의심하기 이전에, 그가 배신을 했다면 왜 배신을 했을지에 대해 잠깐 고민했다.

자신이 그에게 섭섭하게 대했던가? 아니. 그런 적 없다. 오히려 그의 능력을 높게 사 나름대로 후하게 대우하지 않았던가. 코르베리온도 불만을 보인 적 없이, 대체로 만족스러워 하는 듯했고.

‘배신이라기보다는…….’

뭔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적일 가능성이 농후한 이방인 세력의 길잡이 노릇을 하는 것이 정당화되지는 않지만.

“다른 녀석들은?”

“확인한 것은 코르베리온 뿐이었다고 합니다. 다른 녀석들은 보이지 않았다고…….”

당한 건가? 코르베리온만 살려서 길잡이로 쓰고 있는 것이고? 아무래도 그게 가능성이 가장 크다. 로카리아 칼데른은 긴장으로 뻣뻣해진 뒷목을 어루만졌다.

코르베리온에게 쥐여 보낸 병력이 상당했다. 그 병력을 모두 잃은 것이라면…….

“성문을 걸어 잠그도록. 이 시간 이후로는 아무도 드나들지 못하게.”

“옛!”

“그리고 밖에 나가 있는 녀석들 모두에게, 지금 즉시 돌아오라 전해.”

“알겠습니다.”

적이라고 봐야 한다. 그렇다면 어디서 온 놈들이란 말인가.

‘예감이 안 좋은데.’

로카리아 칼데른은 자신이 행운아라고 생각했다. 그의 생각에, 사람은 제아무리 능력이 출중하더라도 그 능력 하나만 가지고는 어느 정도 수준 이상으로는 오르지 못한다. 정말 높은 곳에 오르기 위해서는 능력에 더해 운이 필요하다. 그 운은 사람일 수도 있고, 물건일 수도 있으며, 그 외 다른 무언가일 수도 있다.

로칼리아 칼데른은 자신이 운을 거머쥐었다고 여겼다. 그가 거머쥔 것은 시기라는 이름의 운이었다.

제국 역사에, 황제가 제국을 일으켰던 태동기 이후로 다시 없을 혼란과 격동의 시기. 세상물정 모르는, 정확히는 세상을 너무 우습게 보았던 오만한 조정 대귀족들이 스스로 불구덩이로 걸어 들어가 준 것은 정말이지 고개라도 숙여주고 싶을 만큼 고마운 일이었다.

그들의 오만한 오판 덕에 로카리아 칼데른은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다시 없을 기회가 찾아왔다고 직감한 그는 부친과 가문의 중역들을 이런저런 방법으로 설득해 가문의 모든 역량을 동원해 사람과 물자를 긁어모았다. 지금에 와서 다시 생각해봐도 절묘하고 신속한 판단이었다. 그 자신이 한 일임에도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싶을 정도였다. 그때 당시의 그는, 무언가 계시라도 받은 것처럼 확신에 차 있었다.

‘어쩌면, 어쩌면 정말 신께서 나와 함께하시는 걸지도.’

황제도 처음부터 황제는 아니었다. 왕자라고는 하지만 요즘 시대에 비유하면 고작해야 성주의 아들 정도 됐던 그가 제국의 황제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신이 그와 함께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황제는 이제 없다. 신의 대행자가 사라졌다. 그렇다면 응당 그 자리를 다른 누군가가 대신해야 하지 않겠나. 로카리아 칼데른은 그게 자신이 될 수도 있으리라 생각했다. 처음에는 감히 꿈도 꾸지 못했지만, 점점 더 사람과 물자가 자신의 이름 아래 모이는 것을 보고 있자니 자연스레 더 큰 것을 갈망하게 되었다.

“성주님!”

상념에 잠겨있던 중. 밖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을 때. 그는 직감했다.

‘왔구나.’

왜인지는 모른다. 말 그대로 직감이었다.

“…….”

수하의 말을 건성으로 넘기며 성벽 위에 올라오니, 과연 일단의 병력이 눈에 들어왔다. 천, 아니 이천인가? 얼추 그 정도 되어 보이는 병력. 깃발을 들지 않은.

두근!

안 그래도 불안하게 뛰던 가슴이 이제는 흥분한 고수가 두들겨대는 북처럼 미친 듯 울렸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뻐근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성문을 모두 닫아.”

“예?”

반문이 날아온다. 진심이냐고 묻는 듯했다. 고작해야 저 정도 병력을 상대로 웅크릴 것이냐고 되묻는 것이다.

“나는 명했다.”

로카리아 칼데른을 씹어 뱉듯, 다소 조급함을 드러내며 다시 명했다. 그제야 반문이 없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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