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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1046화 (1,046/1,064)

1046화

신성 그 자체인 황제와 그의 위대한 기수들에 대한 이야기는 말과 글로써만 전해진다. 어디에도 그들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묘사한 그림 같은 것은 없다. 그것들은 교단의 법률로써 금지되어 있다. 그들을 주제로 한 그림이 없는 것은 아니나, 그런 그림에서 그들의 모습은 추상적인 형태로만 묘사되곤 했다. 그렇기에 위대한 존재들은 미지와 신비의 대상으로서 계속해서 남을 수 있었다.

코르베리온은 황도 출신이었지만 단 한 번도 위대한 존재들을 본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그가 그들, 황제와 군주들에 대해 갖는 생각은 평범한 이들과 비슷했다. 대체로 숭배하며, 때때로 이해하지 못하고, 가끔은 의심도 하는.

하지만 지금. 투구로 얼굴을 가린 붉은 눈의 사내 앞에 선 그는 자연스레 직감했다. 자신의 앞에 있는 자가 바로 그 위대한 존재라는 것을.

사람의 형상을 했으나 사람이 아니다. 이 지독한 위화감과 경외감은 살면서 단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는 감각이다.

‘당신은…누구십니까?’

묻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그의 본능이, 육신이 그건 허락되지 않은 행동이라고 알려주는 것 같았다.

머리가 멍해지고, 자신이 왜 이곳에 있는 것인지를 잊었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은 그저 떨어지는 물음에 충실히 답하는 것뿐이리라.

* * *

암비아스라는 지명은 없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지금은 없다. 하지만 예전에는 있었다. 제국의 깃발이 높이 걸리기 전까지는.

자신의 이름을 코르베리온이라고 밝힌 적장은 그 사라진 이름을 입에 담았다. 그게 의미하는 바는 분명하다. 로카리아 칼데른이라는 자가 이름이 사라진 이 땅의 역사를 과거로 돌려놓고자 한다는 것.

“말도 안 되는군요.”

이미 백 년, 아니 백 년이 뭔가. 이백 년도 더 전에 사라진 이름이다. 빛이 바래다 못해 먼지가 수북이 쌓인 이름을 이제와 들춘다? 아무리 명분이 없어도 그렇지, 너무 나간 것이 아닌가 싶었다. 설마하니 그 말도 안 되는 명분에 가담한 자들이 있단 말인가?

“이곳 상황이 얼마나 엉망인지는 알겠군요.”

코르베리온은 살라스의 조소를 못 들은 척 넘기며 말을 이었다. 그의 추측대로 이들은 외지에서 온 이들이었다. 이곳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이들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렇기에 그는 상황 설명부터 시작했다. 아무도 그에게 묻지 않았지만, 굳이 자신을 살려서 데려온 이유가 있을 것 아닌가.

“황제 폐하의 승천 이후, 혼란스러운 정국이 이어졌습니다. 조정에서는 연일 후계에 대한 문제를 논했지만 오랫동안 결론이 나지 않았지요. 그러다 결국 참극이 벌어졌고, 조정은 와해되다시피 했습니다. 아니, 와해되었지요. 대낮에 대신들이 습격을 받는 일이 한 달에 서너 번이나 일어났으니 말입니다.”

제국의 조정이라고 해봐야 이름 있는 자들이 모여 황제의 뜻을 받드는 집단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이 하는 일이라고는 황제의 말을 똑같이 따라서 반복하는 것뿐이었으니, 황제가 부재했을 때의 대처 역시 미흡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개중에 그래도 능력과 뜻이 있어 혼란스러운 정국을 안정시키려는 노력을 한 자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도 곧 좌절했다.

“조정은 각지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했습니다. 군주들께 나서주십사 청하자는 이야기도 나왔습니다만…잘 되지는 않았지요.”

그 말을 하며 코르베리온은 위대한 존재라 확신하는 사내를 조심스럽게 곁눈질했다. 다행스럽게도 투구 속 붉은 두 눈은 그를 향하고 있지 않았다.

“제국의 찬란했던 도읍은 이제 침묵의 도시가 되었습니다. 빠져나갈 자들은 다 빠져나갔지요. 황도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니 인근 지역들도 덩달아 혼란스러워졌습니다. 제국에는 미래가 없다며 비관하는 자들도 갈수록 늘어갔지요. 황자들에게 기대를 거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들의 싸움은 언제 끝날지 기약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가만히 앉아 휩쓸릴 것이냐, 어떻게든 움직일 것이냐의 기로였다. 선택은 제각각이었지만, 그래도 변화는 시작됐다.

로카리아 칼데른은 후자를 택한 자였다. 그의 가문인 칼데른은 대대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 곳이었고, 휘하에 거느린 가솔들도 적지 않았다. 중앙의 영향력이 희미한 벽지에 자리잡았다면 총독까지는 아니더라도, 호족 소리는 듣고도 남을 정도였다. 허나 그렇지 않았기에 그들은 창고에 재물을 쌓을 수는 있을지언정 그들의 영향력을 정도 이상으로 키울 수는 없었다. 황제의 직할령에 총독 자리가 날 리 없고, 역시 황실 관여 사업에서 돈만 많은 일개 가문이 비집어 들어갈 틈이 있을 리 없었다. 그렇기에 칼데른 가문은 ‘역사가 길고 돈이 많은 가문’ 정도에서 멈출 수밖에 없었다.

아쉬움이 없을 리 있겠냐마는, 어쩔 수 없이 순응하고 포기해야 했다. 가문의 기반을 다 포기하고 기회의 땅을 찾아 떠돌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기회가 찾아왔다. 감히 상상도 하지 못했던 기회가.

“시작은 크루닝거였습니다.”

보트먼 크루닝거.

황제에게 녹포를 하사 받은 노장군은 고령으로 인해 반쯤 은퇴했음에도 군은 물론, 군 밖 사람들에게도 존경을 받는 인사였다. 그런 그는 조정에서 황위를 이을 황자에 대한 논의가 한창이던 때 황제의 승천에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음을 주장했으나 아무도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진정 터무니없다 생각해서였는지, 아니면 뒷감당이 두려워서였는지는 모르지만.

어지간히 눈치가 없는 자라도 그 정도면 알았을 것이다. 여기서 더 파고드는 건 위험하다는 것을. 그나마 한때 제국 위장의 두 번째 위계까지 올랐던 명망 높은 노장군이었기에 그런 사고를 치고도 유야무야 묻히는 선에서 끝날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세상 살 날이 그리 많이 남지 않았기 때문인지, 아니면 황제에 대한 충성심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면 조정이 돌아가는 꼴이 너무 마음에 들지 않아서인지, 노장군은 뜻을 꺾지 않았다. 그는 황제의 승천이 승하이며, 그 뒤에는 거대한 음모가 도사리고 있다고 주장했다. 당초의 의혹제기에서 몇 발자국은 더 나아간 주장이었다.

당연히 제국의 조야가 발칵 뒤집어졌다. 노장군의 앞뒤 가리지 않은 발언은 조정에서 적당히 묻고 넘어갈 수 있는 수준을 한참 넘어선 것이었다. 조정은 물론, 교단까지 떠들썩해졌다. 황제가 승천하여 원신의 곁으로 돌아갔다 공표한 것이 다름아닌 교단이었기 때문이다. 노장군은 그런 교단까지 싸잡아 ‘음모의 무리’에 포함시켜버린 셈이었다.

당연히 즉각적인 대응이 따랐다. 노장군은 물론, 그의 가문까지 신성모독 및 대역죄로 묶어 처리할 심산이었다. 만약 노장군이 그를 예상하고 미리 움직이지 않았다면 그와 그의 가문은 제국의 역사에서 사라졌으리라.

그러나 노장군은 단순히 나이만 많이 먹은 순진한 군인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발언이 어떤 파급을 가져올지 정확하게 예측하고 있었다. 그것이 무모하고 위험한, 아니 그 정도로 표현으로도 부족한 말도 안 되는 도전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감행했다. 그가 바보이기 때문에? 아니. 그럴 리가. 바보가 어찌 녹포를 걸치겠는가. 노장군에게는 나름의 계획이 있었다.

그는 혀끝으로 제국을 뒤흔들기 전, 미리 가솔들을 피신케 했다. 뱉은 말에 대가를 치르게 되더라도 늙은 목숨 하나로 끝내고자 한 것이다. 그는 자신이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고, 그 얼마 남지 않은 목숨을 제국을 위해 불사를 수 있다면 더없이 영광스러울 것이라 여겼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다만 그가 예상치 못한 것은, 오로지 충정으로 던진 작은 불씨 하나가 조정을 넘어 제국 전토를 뒤엎을 거대한 불길이 되리라는 것이었다.

죽음을 각오한 노장군의 곁으로 그의 옛 수하들이 모여들었다. 조정에 불만을 품고 있던 이들이, 다른 생각을 조심스럽게 품고 있던 이들이 그에게 힘을 실었다. 당사자가 그것을 원하느냐 원치 않느냐는 중요치 않았다. 미처 반응할 새도 없이 노장군은 폭풍의 중심이 되어있었다.

충정으로 생의 마지막을 내던졌던 노장군은 한순간에 반란의 수괴 비슷한 것이 되었다. 그 과정에서 석연치 않은 구석이 적잖이 있었지만 누구도 그것을 신경 쓰지 못했다. 따르는 무리를 거느리고 황도에서 남쪽으로 엿새 거리에 있는 성 하나를 점거했을 때, 조정은 제국의 심장에 칼 하나가 들어섰음을 뒤늦게 실감했다.

제국의 심장에서 행세하는 자들이 호락호락한 자들일까. 그럴 리 없다. 단지 일이 그 지경까지 흐르는 동안 그들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던 것은 모든 일이 너무 순식간에 일어났으며, 분열된 조정에서 중심이 될 만한 자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조정의 중신이라고 해봐야 결국 황제의 결정에 따르는 거수기에 불과했으니 주도적으로 판을 이끈 경험이 없었던 것이다. 거기에 황제의 승천이라는 상상도 못한 대사 직후였으니 대신들 모두 머릿속이 복잡했던 것도 이유라면 이유였다.

이런저런 까닭으로, 노장군의 의도치 않은 거병은 황도에 거대한 바람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 바람은 거목의 잎사귀를 잠시 간질였을 뿐, 거목의 뿌리를 흔들지는 못했다. 노장군과 그의 추종 세력은 곧 진압당했고, 노장군은 전투 한 번 일어나지 않은 성벽 위에서 끝까지 그를 따르겠노라 했었던 수하의 손에 등을 찔려 죽었다.

그러나 노장군은 그렇게 허무하게 죽었어도, 그가 남긴 말들은 여전히 남아 많은 이들의 머리와 가슴을 울렸다.

황제는 승천하지 않았다. 그 뒤에는 음모가 도사리고 있다.

명확한 근거조차 없는 음모론일 뿐이다. 다만 그 대상이 대상인 만큼, 그리고 그 음모론을 재기한 사람이 명망 높은 노장군인 만큼 여러 가지 생각이 들게 했다. 그렇게, 어쩌면 헛소리라고 치부할 수 있었을 그 음모론은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불어넣어주었다.

그런 와중에 조정은 계속해서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들에게 중요한 건 두 번째 황제가 누가 되느냐였다. 황도에 틀어박혀 같은 말만 반복하며 시간을 보내는 동안 바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그들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황도와 황궁만이 세상의 전부였기에.

“우습지 않습니까. 저들끼리 빈 황위의 주인을 논하고 있는데, 정작 황자들은 알아서 자기 자리를 다퉜지요. 결국, 그 오만한 자들의 논의라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소용도 없었던 겁니다.”

내내 위축되어 있던 코르베리온이 이때만큼은 냉소하며 제 목소리를 냈다. 그만큼 그의 마음 속에 조정이니 조정 대신이니 하는 자들에 대한 반감이 쌓여 있었다는 의미였다.

[태울 것이 없다면 불씨는 곧장 사그라지는 법이지.]

줄카가 한 마디를 남기고 걸음을 옮겼다. 이후로 이어질 화제에 대해서는 관심 없다는 투였다. 군터는 그런 그를 힐끗 보았다가 다시 코르베리온에게 눈길을 돌렸다.

사실 그도 이런 주제에는 그리 관심이 없었다. 다만 주변 정세에 대해서는 알아 둘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 보아하니 이 주변에는 로카리아 칼데른이라는 자가 행세하는 모양이지만…….

[네 주인에 대해 말해라.]

코르베리온은 머릿속을 울리는 소리에 흠칫했다. 익숙하지 않은 경험 때문이 아니라, 그 울림에 깃든 의지를 읽었기 때문이다. 주인에 대해 말하라는 울림 안에는 은은한 살의가 깔려 있었다.

“칼데른을 치려 하십니까?”

그의 물음에 살라스가 대꾸했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 우리는 이미 칼을 맞대지 않았나.”

코르베리온이 입을 다물었다.

그렇다. 그들은 이미 피를 보았다. 족히 수백이 죽었고, 어쩌면 더 죽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목적은 모르겠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행적이 밝혀지기를 원치 않는 듯했다.

‘당신께서 스스로를 밝히시기만 한다면…….’

멀어지는 붉은 눈의 사내를 보며 이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코르베리온은 끝내 입을 열지 못했다. 위대한 존재, 군주임이 틀림없는 저 사내가 과연 그의 뜻대로 따라줄지도 의문이었을 뿐더러 코르베리온도 제 주인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그의 주인은 이미 제국에 칼을 든 자다. 그런 그가 과연 군주가 상대라 한들 납작 엎드릴까? 게다가 이미 수백이 죽었다. 그것도 그냥 수백이 아니라 무장병 수백이다.

‘빌어먹을.’

꼬여도 단단히 꼬였구만. 코르베리온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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