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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1045화 (1,045/1,064)

1045화

사내, 코르베리온이 신경질적으로 목덜미를 긁었다. 까닭 모를 불길함이 그의 말과 행동을 제약했다.

아니, 사실은 알 것 같다. 애초에 정체불명의 군세가 갑자기 떡하니 나타난 것만 해도 그렇지 않은가. 대관절 저 인원이 어디서 툭 튀어나왔단 말인가. 아무리 정부가 무너지고, 치안이 개판이 났다고 해도 저 정도 규모의 군대가 움직인다면 모를 수가 없다. 그래. 도적 무리가 아니라 군대다, 그것도 깃발 없는 군대. 소속의 증명이자 군의 정체성이라 할 수 있는 깃발이 없다는 것은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반군인가? 아니면 아바시스 놈들?’

제일 먼저 떠오른 두 가지였지만, 곧 모두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반군이 설칠 시기는 이미 오래전에 지났다. 저마다의 명분을 대며 들고 일어난 놈들 가운데 성공한 놈들은 이미 기반을 잡았고, 실패한 놈들은 땅에 묻혔다. 그렇다고 아바시스? 놈들이 대협곡을 지나 북상중이라는 것은 알지만, 벌써 이곳까지 닿았을 리는 없다. 놈들의 움직임을 전부터 예의주시하고 있었으니 틀림없다. 거기다, 만약 아바시스 놈들이라면 깃발을 들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럼 뭐야.’

심상치 않다. 정말 심상치 않다. 멀리서 보기에도 전혀 흐트러짐이 없다. 그렇다고 굳어있는 것 같지도 않다. 여유? 담담함? 뭐가 됐든, 적(혹은 적으로 추정되는)을 앞에 두고 보이기는 쉽지 않은 모습이다.

‘물러나고 싶은데.’

솔직한 심정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못 본 척하고 물러나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물러나더라도 저들의 정체 정도는 밝혀야 한다. 그래야 적이 아니라고 변명하며 발을 뺄 수 있다. 그런데, 저놈들은 뭐 그리 숨기는 것이 많은지 소속조차 밝히지 않았다. 하기야, 깃발도 들지 않은 놈들 아닌가.

‘그래서 더 불길하단 말이지.’

그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며 망설이자, 그의 뒤편에 있던 사내가 인상을 찡그리며 앞으로 나섰다.

“코르베리온 경. 대체 뭐 하는 겁니까? 기다릴 만큼 기다려줬잖습니까. 놈들은 정체를 밝힐 생각이 없어요. 수상한 놈들입니다.”

“알고 있네.”

“그럼 대체 뭘 망설이십니까?”

말투가 사뭇 도전적이다. 돌아보니 말투뿐만 아니라 눈빛도 그랬다. 코르베리온은 순간 이 애송이 놈을 어떻게 타이를까 고민하다가 굳이 그럴 필요가 없겠다고 생각했다. 이놈을 자신의 옆에 꽂아 넣은 이놈의 숙부가 떠오른 것이다.

그는 이놈이 자신을 감시하고 견제하기를 바랐겠지만, 어림도 없지.

“그리 쉽게 말하지 말게. 아직 적이라 단정 지을 수는 없어. 게다가, 저 군용을 보게. 상대한다면 우리도 상당한 피해를 감수해야 할 게야.”

“그것까지도 다 생각하고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까. 이제 와 망설인다고요?”

애송이가 기가 찬다는 듯, 헛바람까지 내쉬며 고개를 젓는다. 코르베리온은 불쾌하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물론 그는 전혀 불쾌하지 않았다. 애송이는 정확히 그의 의도대로 따라왔다.

이런 눈치 없고 의욕만 앞서는 놈을 다루기는 쉽다. 여기서 살짝만 등을 떠밀어주면…….

“내가 대장이기 때문이지. 난 내 판단에 따른 책임을 져야 해. 멋대로, 마음 편히 떠들어댈 수 있는 자네와는 달라.”

“뭐라고!”

애송이가 발끈했다. 목덜미까지 붉어진 것이 제대로 열이 오른 듯했다.

“아니면, 증명해보겠나?”

애송이도 바보는 아니다. 뭔가 잘못됐다는 것은 느끼고 있을 터. 하지만 여기서 물러나면 비웃음거리가 될 뿐이다. 그것을 알기에, 놈은 씩씩대며 앞으로 나섰다.

“기꺼이!”

놈과 놈을 따르는 병사들이 앞으로 나아갔다. 애송이는 목청껏 소속을 밝히라 외치더니, 역시나 돌아오는 답이 없자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

“기회는 차고 넘치게 주었다! 이제부터 벌어지는 일에 대해서는 그대들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애송이가 기세를 올리며 뛰쳐나갔다. 기세 만큼 빠른 속도는 아니었다. 병사들이 충분히 따라붙을 수 있도록 조절하고 있는 거다. 그것만 봐도 놈이 충분히 이성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음.”

애송이 놈의 등을 떠밀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아예 죽으라고 내몬 것은 아니다. 물론 죽으면 어쩔 수 없는 거지만, 그래도 이쪽 역시 할 일은 한다.

“준비해라.”

코르베리온이 몸을 숨기고 있는 병사들에게 지시했다. 애송이가 제대로 유인만 해온다면 승산은 충분하다. 물론 쉽지 않을 것이다. 적도 바보가 아닌 이상, 훨씬 적은 머릿수로 돌격해오는 아군을 보면 뭔가 이상하다고 느낄 터였다. 더군다나 기세 좋게 덤벼든 주제에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내빼기 시작한다면, 당연히 유인책이라고 생각하겠지. 결과적으로 아군은 손해만 보게 될 것이다. 그래도 괜찮다. 그 손해가, 물러나기 위한 명분이 되어줄 테니까.

‘어디 한번 잘…….’

그래도 되도록 애송이가 큰 피해 없이 몸을 빼기를 바라며 지켜보는데,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상황이 벌어졌다.

첫 충돌. 애송이는 눈치껏 뒤로 빠졌다. 용감한 수하들에게 따라잡힌 것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콰앙!

십여 기의 기마와 서너 기의 기마가 부딪쳤다. 전자가 아군이었고, 단박에 박살이 난 것도 역시 아군이었다. 코르베리온은 그 이해하기 힘든 광경을 목격하자마자 숨을 멈췄다. 그때까지도 사라지지 않고 있던 불길함이 한층 더 덩치를 키웠다.

“으아아악!”

곧이어 들려온 외마디 비명. 분명 병사들이 내는 온갖 소리와 섞여 희미하기 그지없었을 터인데, 왜 그 한줄기 비명이 귓가에 또렷하게 박혔는지. 그리고 왜 그 비명의 주인을 곧바로 직감했는지.

아아악-!

아군이 갈라졌다. 우악스럽게 길을 열고 나온 십수 기의 기마는 곧장 이쪽을 향해 달렸다. 고작해야 열셋. 아니, 열넷?

코웃음이 나와야 할 터인데, 왜 그러지 않는가. 왜, 몸이 덜덜 떨리는가.

“온다!”

고작해야 열넷. 하지만 코르베리온의 시야와 사고는 터질 듯 가득 찼다. 그의 본능이, 저것에 전력으로 대응해야 한다 외치고 있었다.

* * *

푹-!

도끼와 방패 사이를 깔끔하게 비집고 들어간 창이 갑옷과 살점을 시원하게 관통했다. 찌르고, 관통함과 동시에 회수한 창이 반원을 그리며 한 명의 목과 한 명의 팔을 베었다. 투구를 눌러쓴 머리와 칼을 쥔 손이 한꺼번에 하늘을 날았다.

쾅!

말과 방패가 부딪치고, 방패를 든 병사가 붕 떠서 나가떨어졌다. 보통 이런 방식은 좋지 않다. 대열을 무너뜨리는 데는 효과가 있지만, 아무래도 말에 부담이 가기 때문이다. 중장갑을 걸친 돌격마라고 해도 마찬가지. 그렇기에 군터는 이런 식의 돌격을 선호하지 않았다. 말이 직접 부딪치기 전에 손을 쓰던가, 아니면 우회하여 빈틈을 노리는 것이 그의 방식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기존의 방식을 버렸다. 그가 탄 말이 평범한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체마는 고통을 느끼지 못하며, 상처도 입지 않으니까.

“으아악!”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일부는 썩은 데다, 무엇보다 피가 다 빠져나가 본래보다 한참이나 가벼워지기는 했으나 그렇다 해도 사람이 정면에서 감당하기는 쉽지 않다. 시체마의 육탄 돌격에 길이 훤히 열렸다. 그래도 어떻게든 들러붙으려는 적에게 군터가 그의 기세를 뿌렸다. 농밀한 죽음의 향기가 그들을 스치자 그들의 움직임이 순간 멎거나, 굼떠졌다. 잠시였지만, 그 잠시만으로도 충분했다.

서걱!

군터가 앞으로 나서기 무섭게 옆에서 깔끔한 절삭음이 들렸다. 길쭉한 마상용 검을 늘어뜨린 살라스가 바짝 옆으로 붙어왔다. 서두르진 않았지만, 그렇다 해도 역시 뒤처지지 않는다. 단둘. 그 둘에게만은, 어떤 상황이건 뒤따를 거라는 믿음이 있다.

살라스는 언제나 그랬듯, 이번에도 그 믿음에 부응했다. 반면에, 할렌은 조금 거리를 두고 있었다.

콰앙!

거대하고 길쭉한 살점 덩어리로 변한 한쪽 팔을 채찍처럼 휘두르며 눈에 보이는 모든 적을 부수고 짓뭉갰다. 그 움직임에는 거칠고 파괴적인 욕구만이 가득했다. 한동안 잠잠하다 싶었더니, 전투가 시작되자 억눌렸던 광기가 끓어 넘쳤다. 그래도 흉측하게 변한 것이 한쪽 팔뿐이라는 데서, 뭉개지고 부서지는 것이 적뿐이라는 데서 그나마 할렌이 이성과 통제력을 완전히 잃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둬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살라스가 말을 하기도 전에 군터는 움직이고 있었다. 할렌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는다. 불안하게나마 스스로를 통제하고 있음을 확인했으니 마음대로 하게 두어도 괜찮으리라.

“제게 맡겨주십시오.”

군터의 시선이 코르베리온에게 닿자 살라스가 기다렸다는 듯 나섰다.

여기까지 와서 전공에 의미는 없다. 공을 세운들 무엇으로 보답받을 것인가. 깃발 없는 군대는 말이 군대일 뿐, 실상 떠돌이나 마찬가지다. 목적을 찾아 떠도는 떠돌이. 그 무리에 속한 자신을 군인이라 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럼에도, 살라스는 그 자신을 군인으로 여겼다. 언제까지고 그럴 것이다. 어린 시절 택한 길은 그의 삶 그 자체가 되었다. 말을 달리고, 적을 베며, 공을 세우는 것은 이제 숨을 쉬는 것과 같다.

“…….”

군터가 코르베리온에게서 시선을 뗐다. 무언의 허락을 얻은 살라스가 슬쩍 웃으며 말을 달렸다.

* * *

“커헉!”

코르베리온은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이지?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아, 그래. 패했다. 그것도 처참하게 패했다. 하지만 그럴 수 있다. 강한 적을 상대한다면 패할 수 있고, 때로는 그 패배가 받아들이기 힘들 정도로 클 수도 있다. 물론 직접 경험해본 적은 없다. 이 불안한 시대가 뜬금없이 펼쳐지기 전까지 제국은 무척이나 평화로웠으니까.

“소속은?

수하들을 열 명도 넘게 베고 도망치는 그의 뒷덜미를 낚아챈 자. 한 자루 칼처럼 날이 선 사내의 물음이 코르베리온의 정신을 일깨웠다.

“칼데른 각하를 섬기고 있소.”

“칼데른?”

“로카리아 칼데른. 암비아스의 정당한 주인이시지. 모르시오?”

마지막에 한 마디를 덧붙인 것은 어떻게든 여유를 찾기 위한 노력이자 상대를 떠보기 위한 수단이었다. 적어도 이 근방에서 로카리아 칼데른을 모르는 이는 없다. 그러나 상대의 반응은 너무 건조했다. 그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거나, 들어봤더라도 깊이 생각한 적은 없다는 뜻이다. 즉, 이들은 먼 곳에서 온 자들일 것이다. 마땅히 알아야 할 것도 모를 정도로 먼 곳에서.

‘대체 정체가 뭐지?’

황당할 정도로 처참한 패배에 정신이 나갈 지경이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이들의 전투력은 그야말로 상식 밖이었다. 코르베리온은 이런 것이 가능하리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이건, 이건 그야말로…….

“말을 아껴라.”

그를 사로잡은 사내는 그를 데리고 어딘가로 향했다. 코르베리온은 잠시 후에야 그가 했던 ‘말을 아끼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했다.

쿵!

사내는 가볍게 그를 밀었을 뿐이었다. 균형을 잡고 서려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었다. 그런데 코르베리온은 무릎을 꿇었다. 왜인지는 그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그냥, 그래야 할 것만 같았다.

둘이 있었다. 둘 다 덩치가 상당히 컸다. 평소 같았으면 외형부터 시작해 분위기까지 살폈겠으나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암비아스에 주인이 있었던가.]

누군가 말했다. 의아해하는, 재미있어하는 감정이 머릿속을 때렸다. 일방적으로 쏟아붓는 감정의 메아리에 속이 매스껍고 정신이 뒤틀리는 듯했다. 코르베리온의 안색이 대번에 창백해졌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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