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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1044화 (1,044/1,064)

1044화

황도 리비암을 중심으로 한 제국의 내지(內地)는 제국 안의 제국이라고 불렸다. 흔히 벽지라고 자조적으로 일컫는, 그곳의 유력자들에게 말이다.

그들은 황도와 그 주변, 제국의 심장이 얼마나 번영했는지 알고 있었다. 일반 백성들이야 난 곳에서 살다 죽는 것이 보통이지만, 돈이 있고 힘이 있는 이들은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 경험해 볼 기회가 있었다. 그리고 그렇기에, 그들은 괴로워했다.

난 곳에서 죽는 자들이 그들을 보며 부러워하듯, 그들은 제국의 심장에서 살아가는 이들을 부러워했다. 세상의 중심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정말이지 질투가 절로 일 만큼 근사한 것이었다. 세상의 주인공이 된 듯한 기분이 아닐까? 태어나면서부터 그 자리에서, 그 삶을 누리는 이들은 결코 이해하지 못할 느낌일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질투하면서도, 정작 그들은 그들의 후줄근한 삶(그들은 그렇게 자조했다)을 부러워하는 이들도 널리고 널렸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사람은 늘 원하지. 원하고 또 원하다가 더는 원하지 못하게 됐다는 것을 알고 눈을 감는 거야. 탐욕 그 자체라 할 만해.]

그렇게 말하지만, 줄카는 사람에 대해 별다른 실망감을 느끼거나 하지 않았다. 기대 자체가 없는 것일까.

[황금의 길이라고 불렸지. 누구도 그렇게 이름 붙이지 않았지만, 누구나 그렇게 불렀다.]

길은 넓었다. 마차 열 대가 나란히 달려도 될 것처럼. 이 말도 안 될 정도로 넓은 길을 대체 누가 만들었을까. 아니, 누가 이런 길을 만들 생각을 했을까.

이것은 효용성의 문제가 아니다. 이건 그저 과시에 지나지 않는다. 넘쳐나는 부를, 힘을 자랑하고 싶었던 이가 택한 수단 중 하나다.

[천년, 그 이상의 영화를 외쳤지. 하지만 결국 천년은커녕, 그 반도 가지 못했군.]

이 길이 얼마나 찬란했을까. 적어도 규모만큼은 화려했으리라.

왜 추측할 수밖에 없느냐면, 그 거대하고 찬란한 황금의 길이 지금은 빛을 잃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황금이었는지, 구리였는지, 그도 아니면 누렇게 물든 흙에 지나지 않았는지 모를 정도로.

길은 여전히 넓었다. 그러나 바닥에 깔린 돌이며 주변 모든 것이 엉망이었다. 지금껏 지나온 길이 다 그랬고, 저 앞에 시야가 닿는 곳까지도 그랬다. 얼핏 보면 일부러 길만 망쳐놓은 것인가 싶을 정도였지만, 그건 아니었다. 엉망이 된 것은 이 대로만이 아니었으므로.

“황금의 길은 황금의 도시로 이어진다. 황금의 도시는 세상 모든 곳에 이어진다.”

모페이브가 중얼거렸다. 젊었을 적 박해를 피해 이리저리 떠돌아다녔다고 해도 황도 주변까지 와본 적은 없었던 그는 소문으로만 들었던 제국의 중심이자 세상의 중심이 이 모양이 된 데에 상당히 충격을 받은 듯했다. 한편으로는, 조금 허무해 보이기도 했다.

“여러 차례 귀족들 간의 다툼이 있었고, 피난 행렬이 끊이지 않았었다고는 들었습니다만.”

여기까지 오는 동안 시체는 보이지 않았다. 부러진 뼛조각은 군데군데 보였지만.

“저 같은 자가 감히 넘어선 분들의 마음을 가늠할 수는 없겠습니다만, 그래도 궁금하기는 하군요. 황금의 도시에 계신 분께서는 무엇을 바라시는 걸까요. 선황에 대한 복수와 제국의 파멸. 타당합니다만, 너무 단순하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여기까지 오는 동안 모페이브는 간간이, 조심스럽게 줄카에게 말을 붙이곤 했다. 그에게 있어 줄카는 경외의 대상임과 동시에 탐구의 대상이었다. 그의 주인인 군터도 ‘넘어선 자’, 즉 초월자라고는 하나 그렇다 해도 수백 년 동안 살아있는 신이라 불리며 섬김받아온 존재가 바로 옆에 있으면 눈길이 갈 수밖에 없다.

다행히 줄카는 늙은 술사의 어려운 호기심을 대수롭지 않게 받아넘겼다. 그는 대화에 인색한 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제법 수다스러운 편이었다. 그 수다가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자기 혼자, 자기 좋은 대로 쏟아내는 것이라 그렇지.

[글쎄. 하지만 놈이 무슨 생각이든 이것과 그건 별로 상관없지.]

“예?”

[놈이 이 나라를 무너뜨리려는 것은 맞지만 이 나라가 무너지고 있는 것이 온전히 놈 때문만은 아니라는 거다.]

줄카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갔다. 그의 시선이 널따란 길 주변을 쓸었다. 본래 이곳에 있었던 것들을 떠올리는 것일까. 아니, 어쩌면 그보다도 더 이전일지도 모른다. 그는 이 길이 만들어지기 전부터 이 땅을 누볐을 테니까.

[본래 카라누르는 소국이었다. 국가라고 하기도 뭐한 일개 도시였지. 그 시대에는 그게 일반적이었다. 혼자서는 살아남지 못하는 자들이 마음 맞는 이들과 서로 뭉쳐서 살아갔지. 그렇게 뭉치다 보니 덩치가 커져 마을이 되고 도시가 된 거다.]

아직도 제국 밖에는 그런 형태의 도시 국가들이 적지 않다. 그중에는 자신들을 국가라 칭하지 않는 이들도 제법 있었다.

[그렇게 스스로 뭉쳤고 스스로 살아갔다. 살아남기 위해 궁리해야 했던 시절이지. 하지만 카라누르가 궐기하고부터는 달라졌어. 힘들게 궁리할 필요가 없어졌지.]

카라누르의, 황제의 지배만 받아들이면 안전한 삶이 보장된다. 축복이 깃든 땅이 배부름을 약속한다. 무적의 군대가 외적으로부터 목숨을 지켜준다.

꿈도 꿔보지 못한 삶을 거절할 이유가 있었겠는가. 사람들은 익숙하지 않은 안정을 주뼛대며 받아들였다.

편하게 배가 부르니 살이 찐다. 힘들여 궁리하지 않으니 단순해진다. 그들은 새로운 삶에 너무도 쉽게 적응했다. 그 이전 수백 년, 아니 그 이상 살기 위해 투쟁해왔던 생물로서의 본능은 너무도 쉽게 잊혔다.

[모든 것은 변하지. 카라누르의 통치가 갑작스럽게 다가왔던 것처럼 그 통치의 종말도 이처럼 한순간에 다가온 거야.]

이 커다란 길을, 중간중간 자리한 마을과 도시를 짓밟은 것은 괴물의 앞발이 아니었다. 어쩌면 괴물보다도 더 지독한…….

[혼란을 두려워하는 녀석들도 있지만 반대로 그걸 바라는 녀석들이 있지.]

“무슨 말씀인지 이해했습니다.”

카라누르에는 왕이 없다. 왕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자들은 많지만.

크고 견고한 울타리는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얌전하게 만들었다. 모든 것을.

하지만 이제 울타리가 깨졌으니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튀어나오지 않겠는가. 양도, 돼지도, 늑대나 그보다 더 흉악한 무언가도.

“하지만 아쉽군요. 아마 이런 거대하고 강력한 국가는 다시 없을 겁니다.”

“그건 모를 일이지요.”

내내 침묵하고 있던 살라스가 입을 열었다.

“제국이 서기 전, 이런 국가가 탄생할 거라 예상한 사람이 있었겠습니까.”

“음. 그것도 그렇군요.”

“사람은 보통 자기 발 앞에 뭐가 있는지조차 모릅니다. 바로 앞도 보지 못하는데 어떻게 장황하게 미래를 논하겠습니까.”

“맞군요. 그 말씀이 옳습니다.”

모페이브가 철저하게 파괴된 제국의 심장을 보며 허무함과 일말의 안타까움을 느꼈다면, 살라스는 이 모든 것을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는 천년의 영화니, 황금의 도시와 길이니 하는 것들이 모두 공허하게만 들렸다. 군터를 따른 후는 말할 것도 없고, 그 이전부터도 그는 매 순간을 치열하게 살아왔다. 그런 그에게 이곳에 닥친 환란은…뭐랄까, 갑자기 사라진 닭장 문을 비집고 튀어나오는 닭들의 소란 같았다. 어찌해야 할지도 모르면서 일단 그저 우르르 몰려가고 난리를 쳐대는 소란스러움.

그저 우스꽝스러울 뿐이다. 이런 태도가 너무 차가운 걸까. 그럴지도 모르지만, 그게 지금 그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이 길에 대한 그의 감상은 널찍하니 이동하기 좋다 정도에서 끝이었다. 그는 이미 잿더미를 뒤집어쓴 지 오래인 제국의 영화 따위보다는 그의 옆에서 시체처럼 조용히 있는 동료에게 더 신경이 쓰였다.

“할렌. 괜찮은가.”

판니른을 나선 후로 그를 아는 모두는 그를 할렌이라 부르고 있었다. 원래부터 그가 할렌인 것을 알고 있었는데도 그 이름을 다시 말하는 것이 어찌나 어색하던지. 다시 그 이름을 들은 친위대 병사들의 눈이 휘둥그레졌을 때 그들에게 설명을 늘어놓는 것보다 처음 그 이름을 다시 입에 담는 것이 더 힘들었다.

“괜찮습니다.”

가라앉아있지만 부자연스럽지 않고 평온하다. 그러나 안심할 수는 없다. 지금 녀석은 자신에 대한 확신조차 없다. 영혼이 누더기가 되다시피 했고, 그것을 온갖 영혼들로 기운 상태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살라스는 내심 한숨을 쉬었다.

오랫동안 함께 해온 동료들. 정확히 말하며 그가 동료라고 여겼던 녀석들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일부는 죽었고, 일부는 솔롬에 남았다. 그들의 선택을 탓하지는 않는다. 몸이 마음을 따라주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슬픈 일인지 그는 알지 못하니까. 이 요정의 팔을 얻은 후로, 그의 세월은 멈췄다. 아니, 멈춘 것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흐르더라도 멈춰있다 착각할 만큼 무척이나 더디게 흐르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그런 면에서, 할렌은 여러모로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장군처럼 죽음을 겪었지 않은가. 이 녀석은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갈까. 모르긴 몰라도 자신만큼, 어쩌면 그 이상으로 기이하고 특별한 삶이지 않을까. 이제는 자신의 원래 몸보다 더 익숙하게 느껴지는 손을 괜히 한 번 쥐었다 폈다 한 살라스가 표정 없는 할렌을 다시 눈에 담았다. 그는 이 녀석에게 묘한 동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혼란스러울 때는 한 가지만 명심해라.”

“…….”

“장군만 따르면 된다. 그분의 말씀, 그분의 행동. 그것만 보고 따라가면 돼.”

이런 말 자체가 낯간지럽다. 전투를 앞두고 병사들의 사기를 다잡을 때도 말을 많이 하는 편은 아니다. 그가 보고 배운 스승은 말보다는 행동으로 이끄는 자였기 때문이다. 살라스 역시 그 가르침에 충실하고자 노력했고.

이 어색한 말이 도움이 되었을까. 모르겠다. 할렌은 여전히 표정이 없었다. 여러 의미로 점점 장군을 닮아가는 것 같았다. 그게 낯설지만, 그래도 나쁘게 보이지는 않는다. 지금의 할렌이 이전과는 다른 녀석이라 해도, 이전의 모습을 어느 정도라도 지니고 있다면 녀석은 알아서 길을 찾을 것이다. 그가 기억하는 할렌은 그런 녀석이었다.

* * *

“정지! 어이, 거기! 멈춰라!”

일부러 거칠게 내는 목소리. 나름대로는 위협하려고 노력하지만 그런 어수룩한 노력에 어깨가 움츠러들 만한 이는 여기 한 명도 없었다.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저기 거친 목소리를 억지로 짜내고 있는 자는 상상도 못할 격전을 헤치고 온 역전의 용사들인 것이다.

군터의 시선이 떠들어대고 있는 자의 뒤편을 훑었다. 불타고 무너진 건물들 틈으로 조금씩 튀어나온 무기들이 보였다. 부주의한 것은 아니다. 설마 이 정도 거리에서 그걸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으리라고 누가 생각하겠는가.

얼추 천 삼백. 아니, 오백. 이쪽보다 인원은 많지만 그렇다고 승리를 장담할 수 있는 머릿수는 아니다. 지형을 선점했으니 우위를 점했다고는 볼 수 있겠지만.

“떠밀린 것 같습니다.”

군터는 반사적으로 의성(意聲)을 사용하려다 눈살을 찌푸리며 멈췄다. 목소리를 내는 것이 점점 거추장스럽다. 더 편리한 수단을 두고 굳이 불편한 것을 고집해야 하는 이유를 어느새 그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도 군터는 억지로 입을 열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여기까지 오면서 그럴듯한 무리를 한 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빠져나갈 자들은 다 빠져나갔다고 해도 이곳의 땅은 그리 나쁘지 않습니다. 주인이 없다 해도 주인을 자처하는 자들은 생기기 마련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여기까지 오는 동안 아무것도 보지 못했으니…여럿이 난립해 있는 것이 아니라 소수가 확실히 힘을 쥐고 있다는 뜻이겠지요.”

모페이브는 훌륭한 군인도, 전략가도 아니었으나 눈치가 있고 머리를 쓸 줄 아는 자였다. 그의 추측은 군터에게도 그럴듯하게 들렸다. 나름 잘 가다듬은 기세를 풍기고 있는 눈앞의 군사들을 보니 그런 생각은 더 굳어졌다.

[어찌할까.]

줄카가 물었다. 길이 막혔으나 그는 그리 기분이 나쁘지 않아 보였다.

[당신은 어떻지.]

[후배의 뜻에 따르지. 네가 어찌할지 궁금하군.]

[시험인가?]

[믿음이 부족하군. 아직도 나를 모르나.]

오래 살았고, 누구보다 높은 자리에 있었지만 줄카는 생각이 많은 자는 아니었다. 오히려 단순한 축에 속했다. 단지 그 많지 않은 생각이 쉬이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깊을 뿐.

줄카의 답을 들은 군터는 다시 전방에 집중했다.

뭐하는 놈들일까. 아마 이 지역의 유력한 가문의 사병일 확률이 높다. 혼란이 벌어지고, 힘이 있던 놈들이 그 힘을 더욱 키우며 영향력을 키운 것이겠지. 아마 놈들은 자신들의 존재를 꽤 전부터 알아차렸을 것이다. 어찌 대응해야 할지 고민도 했겠지. 그러다 더는 모른 척 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움직인 것이겠고.

칠까? 번거롭지 않으려면 그게 낫다. 하지만 황도까지는 아직 거리가 좀 있다. 여기서 소란을 피우면 소식이 전해질 것이고, 어쩌면 이런저런 방해와 맞닥뜨리게 될지도 모른다.

이런저런 가능성을 따져보았으나, 생각은 길지 않았다.

“길을 터라.”

“길? 무슨 길을 말하나!”

나직한 군터의 목소리는 멀리 떨어진 사내의 귀에 또렷하게 박혔다. 그에 답하기 위해 사내는 목이 터져라 소리쳤다. 그때까지도 사내는 그것이 이상하다고 생각도 하지 못했다.

“리비암로 가는 길.”

“황도? 황도로 가는가?! 그대들은 누구인가! 어디서 왔지?!”

“길을 터라.”

벽에다 대고 이야기하는 것 같군. 혀를 찬 사내가 좋지 않은 느낌에 미간을 구겼다. 아니길 바랐지만, 충돌을 피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다시 말한다! 그대들은 누구인가! 소속을 밝혀라!”

그 순간 음산한 바람이 불어왔다. 사내의 목덜미에 소름이 돋아났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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