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터-1043화 (1,043/1,064)

1043화

문을 지나는 것은 간단했다. 희미한 일렁임 속에 발을 들이기만 하면 됐으니.

꿈을 꾸는 것 같은 몽롱함 속에서 맞은편을 바라보았다. 저곳에 가야 한다는 의식을 놓지 않으니, 또 한 걸음을 내디뎠을 때는 이미 그곳에 닿은 뒤였다.

“허억…허억…!”

뒤따라온 병사들이 식은땀을 흘리며 주춤거렸다. 짧은 경험이었으나 그들에게는 만만치 않은 시련이었던 듯했다.

[나쁘지 않군.]

[이런 이야기는 없었던 것 같은데.]

[뻔히 보이는 길도 못 찾아오는 녀석들이라면 억지로 데리고 온다 한들 무슨 쓸모가 있겠나.]

냉소적인 반응. 지금까지의 줄카에게서는 보지 못했던 모습이었다. 칼집에서 막 나온 예리한 칼 한 자루를 보는 듯했다. 아간투스베록을 앞에 두고도 사라지지 않았던 여유가 지금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이제부터는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다. 예측해서도 안 돼. 그 무엇도 장담할 수 없지. 그 노괴는 그런 작자다. 아마 우리가 움직이고 있다는 것도 지금쯤 알아차렸을 거다. 하지만 그자가 어찌 나올지는 모르겠군.]

[초조한가?]

[초조해? 아니. 집중하고 있을 뿐이다.]

흔들림 없는 진심. 실제로 줄카에게 초조함은 없었다. 그러기는커녕, 그는 오히려 즐거움을 억누르고 있었다.

[예전부터 생각했었지. 내 최대의 상대는 황제가 아니면 노괴가 될 거라고.]

[통찰이었나?]

[직감이었지.]

운명이라는 것이 정말 존재할까? 누구에게나 처음부터 걸어가야 할 길이 몇 갈래이건 정해져 있는 것일까. 초월자라 불리며 세상 살아있는 모든 것을 내려다보는 위치에까지 올랐건만, 줄카는 여전히 확신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그는 운명의 존재를 느꼈다. 물론 어쩌면 착각일지도 모른다. 직감했다고 하나, 사실 줄곧 그러한 바람을 알게 모르게 추구해왔던 것일지도.

[하지만 이 순간의 동지가 너 같은 후배일 줄은 몰랐군.]

군터가 웃는 줄카를 일견하고는 앞으로 나아갔다. 썩은 내를 풍기기 시작한 시체마는 초췌해진 병사들과 달리 문을 넘어왔음에도 전혀 변함이 없었다.

* * *

[녀석은 패했다. 그렇게 보는 게 맞는 거겠지.]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도 환야는 계속 말을 이었다.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군. 녀석은 확신이 있었어. 그러니 무리해서 들어간 거겠지. 그런데 패했다면 뭔가 변수가 있었다는 뜻이겠지.]

오랫동안 봐온 사이다. 서로를 미워하는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그들은 서로를 잘 안다. 줄카가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것은 아간투스베록도 알고 있었을 터. 그런데도 자신 있게 덤벼들었다면 믿는 구석이 있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패했다. 그게 의미하는 바는 하나다.

[그 녀석인가?]

[아마도.]

멍하니 창밖에 시선을 두고 있던 키리스트가 그제야 관심을 보였다. 그는 일전에 환야에게 들었던, 어린 초월자를 떠올렸다.

이 시대에 나타날 일은 없을 거라 여겼던 새로운 초월자.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그조차 잠시 관심을 두었다. 이후에는 아무래도 좋으리라 흘려버렸지만.

[결국 그렇게 되는 건가.]

모든 생명은 운명의 실로 연결되어 있다. 그들 하나하나가 세상이 잉태한 씨앗과 같다. 어떤 씨앗은 싹을 틔우고 열매까지 맺지만, 어떤 씨앗은 음습한 땅 속을 벗어나지 못하고 그대로 썩어 양분이 된다.

초월자 역시 마찬가지. 다만 그들은 기껏해야 열매 한두 개 정도를 맺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들은 거목을, 심지어 숲과 산을 만들어낸다. 그것이 큰 존재가 품은 큰 운명이다.

무수한 운명은 서로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주고받는다. 그 얽힘은 너무도 복잡해서 그 누구도 감히 헤아릴 수 없다.

[미리 손을 써야 했을까.]

[아니.]

어쩌면 짐작할 수도 있었을 미래였다. 분명 그때 미리 손을 썼다면 지금의 일이 훨씬 편해졌겠지만, 비단길 대신 가시밭길이 들어섰다고 해도 아쉬울 것은 없다. 두려움 같은 감정은 이미 오래전에 잊어버렸으니.

불확실성과 어려움은 지금의 그에게는 또 다른 즐거움이었다. 굳이 자처할 이유는 없지만, 마다할 이유는 더더욱 없었다.

[녀석들이 함께 움직이고 있을까?]

[그렇겠지.]

[그렇다면 이곳으로 오겠군. 이미 오고 있을지도 모르고.]

[음.]

[손쓸 생각은 없는 모양이군.]

[굳이 그럴 필요는 없지. 어차피 놈이 나를 찾아올 것인데.]

키리스트는 환야의 삐딱한 시선에 낮게 웃으며 몸을 돌렸다. 선선하게 불어오던 바람이 어느새 그쳤다. 아쉬워야 하건만 아쉽지가 않았다. 표정을 잃은 얼굴에 햇살이 드리웠다.

[아바시스가 본격적으로 북상하고 있다. 총독들이 영향력을 상실하고 있어. 각 도시와 성들도 조금씩 다른 마음을 먹기 시작한 모양이고.]

[바람직하군.]

그래야지. 자기 목숨은 자기가 구해야 한다. 다른 누군가에게 제 목숨을 의탁하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다. 백치가 됐던 자들이 현실을 보기 시작하면 얼토당토않은 환상은 자연스레 깨질 것이다. 그런 자들이 늘기 시작하고, 결국 모두가 깨닫는 날이 오면…그때서야 비로소…….

[수호자라는 이름은 역시 우스워.]

[내가 바란 이름은 아니니까.]

제국의 수호자라. 역시 어울리지 않는다.

[그럼 어떤 이름을 바랐나?]

[글쎄.]

이름 같은 것을 바란 적은 없다. 이름이란 것은 다른 이를 위한 것이니까. 하지만 굳이 어울리는 단어를 찾자면.

[해방자가 좋겠군.]

[그 역시 우습다.]

키리스트가 비틀린 미소를 머금었다.

함께 하고 있다고 해서 동지라 할 수는 없다. 서로 바라는 것이 있어 잠시 손을 잡은 것뿐이니.

어둠이 일렁이고, 환야가 멀찍이 떨어진 구석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단단하게 봉인된 두루마리를 집어 들었다.

[놈들도 참 끈질기군. 그렇게나 불안한가.]

[두려움은 의심을 낳지.]

그리고 두려움은 생물의 본성이다. 누구나 누구에게는 약하고, 누구에게는 강하다. 하물며 오랫동안 숨죽이고 있던 놈들이 아닌가. 두려움을 품은 와중에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달려들었다는 점만으로도 칭찬할 만하다.

[애가 타겠군.]

아바시스는 제국의 유일한 대항마라 할 수 있는 강국이었다. 비록 머리가 여럿이라는 태생적인 한계 때문에 덩치에 걸맞지 않게 때때로 소극적이고, 미련한 모습을 보이곤 했지만 그렇다 해도 어쨌든 제국을 위협할 수 있는 유일한 적국이었다. 게다가, 그들의 소극적인 태도는 일정 부분 신중함과 통하기도 했다. 바로 지금처럼.

아바시스는 바보가 아니다. 그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 절호의 기회는 너무 느닷없이, 빠르게 찾아왔다. 그들은 제국을 뒤덮은 전례 없는 혼란에서 인위적인 흔적을 기어이 찾아냈으리라. 그리고 배후에서 이 혼란을 조장하고 있는 초월자의 존재도 짐작했을 터.

그들은 계속해서 이쪽과 접촉하려 시도하고 있었다. 뭘 바라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사실 알고 싶지도 않다.

[확답이라도 받고 싶은 거겠지.]

[정말 그런 거라면 놈들은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군.]

그야말로 두려움의 노예다. 하긴, 패배자와 도망자들이 한데 뭉친 것들이니 그것이 별로 이상하지도 않다. 기껏 밖에서 들여온 칼이 녹슨 칼이라니 아쉽기는 하지만, 뭐 그것도 그것대로 나쁘지 않다.

[자콥 녀석은 어떻게든 혼란을 수습할 거다. 적어도 북방은 온전히 다스리겠지.]

[상관없다. 그 정도면 나쁘지 않아.]

제국은 비정상적으로 넓다. 북방만이라고 해도 어지간한 대국 이상의 크기다. 하지만 북방은 내전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은 지역이었다. 어떻게든 수습한다고 하더라도 한계는 명확하다. 게다가 그 척박한 땅은 전란에 휩쓸리기 전부터 그리 쓸모 있는 땅이라 말하기 힘든 곳이었다. 그런 땅을, 그것도 상처투성이가 된 땅을 손에 쥐고 과연 뭘 할 수 있을까? 아바시스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대협곡의 관문을 넘었다. 그리고 지금도 쉬지 않고 꾸준히 북상하고 있다. 그들은 곧 제국의 남부를 집어삼킬 것이다. 그때가 되면 대세는 굳어졌다 봐도 무방할 터.

[이제 끝이 보이는군.]

[뭐가 그렇게 불안한가.]

마음을 드러낸 대화에서 거짓과 숨김은 있을 수 없다. 키리스트는 환야의 마음속에 자리한 두려움을 느끼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예측할 수가 없으니까.]

[누군가를 예측한다는 것자체가 오만이 아니겠나. 다른 이를 손바닥 위에 올려 두고 봐야 직성이 풀린다는 것이니.]

[난 단지 약속이 지켜지기를 바랄 뿐이야.]

[내가 자네를 속여야 할 이유가 있나?]

환야는 침묵했다.

다른 이였다면 이런 걱정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키리스트는 다르다. 환야는 지금,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 이 노괴를 잘 안다고 자신했다. 그렇기에 불안한 것이다. 이 노괴는 미치광이다. 그의 광기는 통제도, 예측도 할 수 없는 불확실성 그 자체다. 그 어떤 악의 없이 악의 가득한 행동을 할 수 있는 이가 바로 그였다.

그의 앞에 서는 매 순간. 환야는 키리스트의 칼끝이 자신을 향하지 않을까 주의해야 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이 친구야. 내가 언제 자네에게 섭섭하게 군 적이 있던가.]

[아니.]

[그렇지. 그런데 자네는 어째서 내게 섭섭하게 구는가. 내가 자네에게 무슨 잘못을 했기에?]

[우리의 관계는 일방적이니까.]

저주스러운 언약을 담은 비석. 그것을, 혹은 그것의 실마리를 키리스트가 쥐고 있는 한 그들의 관계는 처음부터 동등하지 않았다.

[조급함이로군. 선물을 앞에 둔 아이와 같아. 그래.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지.]

졸지에 성급한 아이 취급을 받은 환야는 대꾸하지 않은 채 바람 한 점 없는데도 부드럽게 휘날리는 긴 머리카락을 눈에 담았다.

황궁에 유폐된 미치광이.

키리스트라는, 원치 않게 붙여진 이름 외에 달리 알려진 바가 없다시피 한 이 광자(狂者)는 미지라는 말이 더없이 어울리는 존재였다. 그들 중에서 가장 오래되었으며, 어쩌면 황제보다도 더 오래된 존재. 또한 그는 황제의 앞에서 서슴없이 증오와 난폭함을 드러내는 유일한 존재이기도 했다. 황제는 모든 것을 억압하고 지배했으나, 오직 그의 방종만은 웃으며 넘기곤 했다. 그 태도에서 가늠하기 힘든 악의를 느끼곤 했으나, 누구도 그들의 기이하고 특별한 관계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았다. 위험한 비밀에 딱히 흥미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그들은 서로에게 무관심했다.

[믿으라고는 하지 않겠네. 하지만 의심하지도 말게.]

키리스트의 광기는 황제가 사라진 후 잠잠해졌다. 그러나 잠잠해졌을 뿐, 사라진 것은 아니다. 사실, 광기라는 표현은 적절치 않을지도 모른다.

그는 그 어떤 이들과도 달랐다. ‘그들’ 사이에서도 그랬다. 단순히 가장 오래되고, 어쩌면 가장 강력한 존재이기 때문은 아니었다. 우습지만, 환야는 그에게서 불완전함을 느꼈다. 묘한 비틀림. 어딘가 잘못된 것 같다는 직감.

[마지막으로 한 가지 일만 더 해주게. 우리의 거래는 그걸로 끝이야.]

키리스트가 손을 뻗자 자그맣고 길쭉한 무언가가 그의 손에 들렸다. 표면에 기이한 문양이 새겨진 짐승의 뼛조각. 그것을 본 환야의 눈이 가라앉았다.

[알아보았겠지.]

[그래.]

키리스트가 그것을 환야에게 건넸다.

[아직 일을 마치지 않았는데.]

[내 호의일세. 내가 자네에게 섭섭하게 대하지 않았으니 자네 역시 내게 그리해줄 테지. 아닌가?]

역시, 한결 같을 정도로 예측불허인 상대다. 환야는 받아든 뼛조각을 어둠 속에 묻었다. 그리고 그대로 몸을 돌려 사라졌다.

키리스트는 희미해지는 기척에 눈길을 주다 다시 창밖으로 몸을 돌렸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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