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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1042화 (1,042/1,064)

1042화

군터는 어찌하면 할렌의 혼란을 가라앉힐 수 있을지 알고 있었다. 간단하다. 지금의 할렌을 이루고 있는 잡다한 영혼들을 뜯어내면 된다. 그의 솜씨라면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여럿이 뒤엉켜 난잡해진 것이 문제라면 그 난잡함을 풀어버리면 되지 않겠는가.

하지만 이 방식을 실제로 쓸 수는 없다. 이미 그 난잡함이 할렌의 정체성, 그 자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저기 눌어붙은 지저분한 누더기는 옷가지나 피부 위에 생긴 딱지 같은 것이 아니다. 할렌이라는 존재를 이루는 뼈와 살점이었다. 그것을 억지로 들어낸다면 할렌에게도 영향이 미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하는가. 떼어낼 수 없다면 다스려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남이 해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하여 군터는 할렌에게 영혼을 다루는 법을 알려주었다. 사령술과는 조금 달랐다. 보다 본질적이면서도 간단한 재주였다. 하지만 간단하다 하여도 술법과 마찬가지로 재능이 없다면 발을 담그는 것조차 불가능한 영역이었으나, 군터가 보기에 지금의 할렌에게는 재능이 있었다.

죽음을 경험했으며, 영혼은 여러 영혼이 뒤섞인 군집체. 그야말로 특별한 존재라 할 수 있다. 물론 존재가 특별하다고 해서 자질도 특별하다는 법은 없지만.

“어렵군요.”

다행히 군터의 예상대로, 할렌에게는 재능이 있었다. 군터가 몇 가지 조언을 해주자마자 간단한 시도를 해볼 만큼.

“…….”

할렌의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다. 그의 창백한 볼이 기괴하게 꿈틀거렸다. 이마가 툭 튀어나왔다가 움푹 들어가기도 했다. 할렌은 여전히 새로운 자신을 통제하지 못했다. 그래도 뭘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른 채로 막막하기만 할 때보다는 나았다. 적어도 뭔가를 해볼 수는 있으니까. 부단히 시도하고, 또 시도하다 보면 언젠가는 성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간단하군.]

군터의 ‘수업’은 몇 가지 요령만 알려주는 것이었기에 일행의 발을 늦추는 일은 없었다. 간단하다 못해 성의 없어 보이기까지 하는 그 수업을 본 줄카가 이 정도라면 자신도 할 수 있겠다며 눈을 감고 몇 번인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래. 간단해. 하지만 달라.]

술법과 같다. 단순히 기운을 느끼고, 그것을 약간 움직이는 것 정도는 기감이 발달한 이라면 누구라도 그리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다. 하지만 정말 술법이라 할 만한 이적을 일으키려면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 부족함을 넘어, 진정으로 술법이라 부를 만한 이적을 일으키는 이를 비로소 술사라고 하지 않는가.

술사라고 해도 전문 분야가 아닌 이상 문외한에서 조금 벗어난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이론적으로야 부족함 없이 파고들 수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자질이 받쳐주지 않으니 술법을 구사하지는 못하니까 말이다.

초월자라고 해도 마찬가지. 줄카는 술법보다 더 신비롭고 위력적인 힘을 다루지만 정작 술법에 관해서는 무지한 축에 속했다.

[나는 못 써먹겠군.]

줄카는 딱 한 번 시도해보고 바로 포기했다. 호기심에 건드려봤을 뿐, 진지하게 파고 들어볼 생각은 없었던 듯했다.

[흔치 않은 재주야. 그런 재주는 정말 흔치 않지.]

군터는 그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그는 자신의 ‘재주’가 그리 특별하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줄카는 예전에도 이런 말을 했었다. 군터가 줄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움직이며 그에 대해 알게 된 것은, 그는 하나의 관심사를 가지면 그것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었다. 군터는 그것이 불멸자가 무료함을 달래는 나름의 방식이라고 해석했다.

그렇지 않겠는가? 불멸의 삶 속에서는 새로운 것이 드물고, 흥미로운 것은 더더욱 드물 것이다. 그러니 어떠한 것에 흥미가 생긴다면 그것을 최대한 붙들고 보는 것 아닐까. 맛 좋은 음식을 길게 음미하듯이.

우습지만 웃을 수가 않다. 저 모습이 미래 자신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군터는 칼바람이 불어오는 낭떠러지를 내려다보며 신주의 위치를 가늠해보려 했다. 그러나 느껴지는 것은 바람이 전하는 서늘함. 그리고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것 같은 희미한 죽음의 냄새뿐이었다.

[이곳은 결전지였다.]

다른 땅이 그러하듯, 이곳에도 신이 있었고 신을 섬기는 자들이 있었다. 나라라고 부르기에는 작고 조잡하지만, 하나의 신을 섬기며 이 땅을 살아가던 자들이 있었다.

이 땅에 제국의 군대가 들이닥쳤을 때, 그들은 침략자에 대항하여 하나로 뭉쳤다. 그들의 저항은 제법 거셌다. 투철한 믿음과 그들의 신, 조상으로부터 받은 힘으로 무장한 그들은 강대한 침략자에 용맹하게 맞섰다.

하지만 결국, 그들은 패하여 몰락했다. 그리고 바로 이 땅에서, 그들은 마지막 싸움을 벌였다.

[왜 이곳이었지?]

군터가 물었다.

이곳은 전투를 벌이기에 적합하지 않다. 들어가기도 쉽지 않지만 나오기도 쉽지 않은 지형. 적을 여기까지 적을 몰아넣었다면 그냥 포위하고 기다리면 끝이다. 아니면 적당한 바람이 불어오기를 기다렸다가 불을 놓던가. 이곳에서 마지막을 맞이한 이 땅의 옛 주인들이 그것을 몰랐을 리 없으니, 어쩔 수 없이 이곳까지 물러난 것일까?

[신주는 과거 그들의 제단이었다.]

제단이라. 설마 그들은 불리해진 전세를 신의 기적으로 타파하고자 한 것일까.

[그곳에서는 산 제물을 바쳤지. 짐승이 주였지만 때로는 사람도 제물로 쓰였다.]

마지막 결전을 앞두고, 그들은 수백이 훌쩍 넘는 사람을 그들의 신에게 제물로 바쳤다. 그리고 최후에는, 그들 스스로까지도 신의 제물이 되었다.

[무언가 느껴지나? 그렇다면 그건 놈들이 남긴 원념일 거다. 마지막 싸움은 상당히 치열했거든.]

낭떠러지 아래. 좁은 사잇길로 얼마간 이동하던 중. 어느 순간 주변 풍경이 바뀌었다. 색이 바랜 암벽이 좌우로 길게 이어지는 것은 같았으나 거기에 무언가가 겹쳐 보였다. 바람 같기도 하고, 피 같기도 했으며, 어떠한 움직임 같기도 했다. 집중해서 보면 볼수록 더 많은 것들이 겹쳐 보였다.

환영은 신주에 가까워질수록 더 짙어졌고, 어느 시점부터는 실제와 환상을 구분하는 것이 무의미해졌다.

[저것이다.]

분명 아직 길은 좁았다. 서너 사람이 나란히 서면 여유가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줄카가 가리킨 지점에서부터는 환영의 농도가 더욱 짙었다. 아니, 그때부터 그것은 환영이 아니었다. 현실에 겹친 또 다른 현실이었다. 그곳에 한 걸음 들어섰을 때, 군터는 자신이 경계를 넘어섰음을 자연스레 자각했다.

경계를 넘어서자 보이지 않던 것이 보였다. 널찍한 터였다. 한때는 제법 웅장한 구조물이 있었을 것 같은 그곳에 남은 것은 먼지 쌓인 잔해와 큼직하다 못해 장엄하게까지 느껴지는 가시밭뿐이었다.

가시밭을 이루는 가시는 모두 비현실적으로 컸다. 뾰족한 가시 하나하나가 어지간한 나무 한 그루만 했고, 그 무수한 가시에는 말라비틀어진 시체들이 하나 이상씩 꿰여 있었다.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묶여있기는 하지만 너무 가까이 다가가면 덤벼들 수도 있으니.]

군터는 줄카가 무엇을 경고하는지 곧바로 알아들었다. 섬뜩한 가시밭 아래. 희미하게 맥동하는 존재감을 느낄 수 있었다. 이곳에 묶인 옛 신이 틀림없었다. 아간투스베록에게 봉인되었던 요정왕과 달리, 이 옛 신은 일정 범위 내에서는 어느 정도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모양이었다.

[역시.]

인상을 찌푸린 줄카가 가볍게 손을 휘둘렀다. 그의 손이 반쯤 허공을 갈랐을 때, 아무것도 없던 손에는 어느새 길쭉한 검 한 자루가 쥐여 있었다. 그 검은 가시밭에 다가가 툭 튀어나온 가시 하나를 베었다.

툭!

가시에 꿰여 있던 말라비틀어진 시체는 땅에 닿자마자 빗물처럼 땅속으로 스며들었고, 잘린 가시는 지렁이처럼 꿈틀대며 무성한 가시밭 쪽으로 기어갔다.

[조금 느슨해졌군.]

그가 검을 놓았다. 던지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의 손을 떠난 검은 자그마한 불씨로 변했고, 그 불씨는 한 마리 나비처럼 허공을 이리저리 노닐다가 가시밭 바깥쪽에 떨어져 내렸다.

화르륵!한 점 불씨는 순식간에 가시밭을 뒤덮었다. 그러나 가시들은 맹렬하게 타오르는 불 속에서 조금도 타거나 그을리지 않았다. 그저 조금씩 꿈틀대며 안쪽으로 물러날 뿐.

군터는 저 아래에 묶여있는 옛 신의 고통과 분노를 느꼈다. 그것은 움츠러들면서도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약간의 기회만 주어진다면 분명 그것은 단박에 족쇄를 깨고 뛰쳐 나오리라.

[이런 봉인은 사실 완전할 수 없다. 아무리 철저하게 한다고 해도 이런 것들을 가둬두려면 이래저래 위험부담이 크지.]

[그런 것 같군.]

외부의 영향을 받았다지만 이곳의 봉인은 일전에 보았던 요정왕의 봉인과 비교하면 확실히 흐트러져 있었다.

[이해가 안 되는군.]

봉인의 구조는 이해했다. 그러나 왜 이런 봉인을 고집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군터는 신주의 존재와 그것의 비밀을 알게 된 순간부터 그런 의문을 품었다.

신을 가두고 그 힘을 갈취하여 땅에 기운을 불어넣는다. 제국의 풍요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하지만, 위험부담이 너무 크지 않은가.

신주는, 옛 신을 가둔 봉인은 은밀하기는 하나 견고하지 않다. 특히 외부의 영향에 취약하다. 초월자가 직접 나설 필요도 없다. 모르긴 몰라도 솜씨 좋은 술사 몇만 있어도 봉인을 흐트러뜨리기에는 충분할 터였다. 군터가 보기에 신주가 이제껏 멀쩡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존재 자체가 철저히 비밀스럽게 감춰진 덕이었다.

하지만 이 비밀이 언제까지 유지될 수 있을까. 황제가 진정 불멸의 제국을 꿈꿨다면 이런 위태로운 방식이 아니라, 조금 더 안정적인 방식을 고려할 수도 있었을 터.

줄카는 그런 군터의 의문을 이해한다는 듯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대지는 신을 필요로 한다. 신을 잃은 땅은 생기를 잃는다. 그러다 완전히 숨이 끊기기 전에 다시 한번 신을 빚어내지.]

줄카가 다시 한번 검을 뽑았고, 던졌다. 기세가 줄어가던 불길이 처음보다 더 강렬하게 타올랐다. 가시들이 더 빠르게 후퇴했다.

[신을 없앤다면 언젠가 새로운 신이 태어난다. 그 신은 죽어가는 잃은 땅에 다시 생기를 불어넣는다더군.]

그 말을 들은 군터는 강을 떠올렸다. 어둡고 조용한, 아득하면서도 아늑한, 죽음을 맞이한 영혼들이 흘러 들어가는 거대한 강.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 그곳에서 잠들고 흘러간다. 그 거대한 흐름이 어디로 향하는지는 모르지만, 어렴풋이 짐작할 수는 있다.

[순환이군.]

[그럴듯한 표현이군. 순환이라.]

가시밭을 제어하는 데는 두 개의 불씨면 충분했다. 줄카는 더는 손을 뻗지 않았다. 그는 멍하니 시선을 내렸다. 이 아래 잠들어있는, 한때의 적수를 바라보는 듯했다.

[사람 이상의 존재가 됐다고 한들 결국 이 세상에 발붙이고 살아가는 생명일 뿐이지. 전능한 것 같은 능력에도 한계는 있다. 철저하게 통제할 수 없다면 차라리 눈이 닿는 곳에 두고 관리하는 편이 낫다고 판단한 거지.]

[황제가?]

[우리가.]

아간투스베록은 제국의 군주로서 그가 이룩한 모든 것을 부정했다. 그러나 줄카는 달랐다. 그는 부정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자랑스러워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문을 쓰려면 조금 더 안정시켜야 한다.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그쪽은 어떤가.]

군터는 솔롬을 떠나기 전에 살라스를 불러들였다. 살라스는 최대한 서둘러 오고 있을 테지만 거리가 거리인 만큼 아직 합류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쪽도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다.]

[그러길 바란다.]

군터의 장담이 무색하지 않게, 살라스는 그로부터 나흘 후에 도착했다. 신주로부터 제법 떨어진, 끄트머리가 잘려나간 것 같은 봉우리에서 기다리고 있으니 살라스와 이백여 명의 병사들이 초췌한 몰골을 하고서 나타났다. 그나마 살라스는 행색만 그렇고 얼굴은 평소와 같았으나 뒤따르는 병사들은 꼴이 말이 아니었다. 얼마나 길을 재촉했는지 그들의 얼굴만 보아도 짐작이 갔다.

“장군.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니. 제때 맞춰 왔다.]

머릿속에서 울리는 말에 살라스가 순간 흠칫 몸을 떨었다. 하지만 곧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별 문제는 없었느냐.]

“황자의 명이 있었습니다. 덕분에 모든 일이 순조로웠지요.”

물론 황자의 허락이 있었으니 감히 제지할 자가 누가 있었을까마는, 사실 그쪽에서도 내심 반겼을 것이다. 지휘부만 빠져나가는 셈이 아닌가. 그러니 판니른의 병력을 고스란히 그쪽에 넘겨주고 왔다고 봐도 무방하다.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병력이 잔뜩 생기는데 그 누가 못마땅해하겠는가.

[가자.]

“예.”군터는 살라스와 병사들을 데리고 신주로 향했다. 그곳에서는 이미 줄카가 준비를 거의 마쳐두고 있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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