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1화
[아쉽지는 않은가?]
줄카가 물었다.
[그다지.]
군터는 솔롬을 나선 후로 멀어지는, 그의 것이었던 도시를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아쉬움 같은 것은 조금도 없었다. 후련하기만 했다. 성문을 나서기 전까지는 조금 복잡했던 마음이 초지에 발을 딛자마자 언제 그랬냐는 듯 깔끔하게 가라앉았다.
줄카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기둥을 이용할 거다. 하지만 이곳에 있는 것은 안 돼.]
[어째서지?]
[사람이나 지나다닐 문을 집채만 한 괴물이 억지로 비집고 들어간다면 어찌 되겠나. 당연히 망가지겠지. 이곳의 기둥이 바로 그렇다.]
[보지도 않았잖나.]
[직접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이 있지. 느껴지지 않나?]
군터가 의아해하며 줄카를 바라보자, 줄카가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이 넘실거리는 생기 말이야. 조용하게 정해진 길을 따라 흐르던 강줄기가 모습을 바꿨다. 불규칙적으로 범람하고 있지. 이 땅은 변하고 있어. 점점 더 변하겠지. 어떤 식으로든.]
줄카의 말대로였다. 정신을 조금만 집중하자 주변에 넘실거리는 기운이 느껴졌다. 전체적으로 생기가 가장 짙었지만 여러 가지 기운이 뒤섞인.
생각해보면 그렇다. 기둥, 그러니까 신주(神柱)는 본래 그 땅을 거닐던 신을 봉인해둔 감옥이다. 신을 가두고, 그 힘을 수탈하는 기물(奇物).
그런데 그런 신주에 이상이, 아니 손상이 생겼다. 줄카의 말을 들어보면 그 손상은 점점 커져, 결국 완전히 파괴될 듯싶었다. 그렇다면 이 땅은 어찌 되는 것일까. 줄카가 말하는 변화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긍정적일지, 부정적일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본래의 형태로 돌아가는 것 아닌가.]
[그렇지. 남은 자들이 신경 쓰이지는 않는가? 변화는 갑작스러울 거다. 그 변화가 그들에게 긍정적이지만도 않을 거고.]
[남은 녀석들이 알아서 할 일이다.]
[깔끔하군. 본래 이런 과정을 거치기는 하지만 자네는 그 과정이 유독 깔끔해. 아마 일정 부분은 타고난 것이겠지.]
줄카는 잘 됐다며 껄껄 웃었다. 뭐가 잘 됐다는 것인지, 군터는 궁금하지도 않았다. 그가 쥐고 있던 판니른의 군권은 대리인을 통해 반납했다. 평범한 대리인이라면 이런 중차대한 일을 맡길 수 없었을 테지만, 그 대리인이 평범하지 않았기에 이런 성의 없는 일 처리가 가능했다. 총독도 납득할 것이다.
[한 주의 총독을 그런 식으로 부려먹는 이는 흔치 않지.]
[안 되는 건가?]
[아니. 훌륭해. 네가 누구인지 점점 자각하고 있는 것 같군. 그런 것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지.]
아간투스베록은 패사하고 그의 군대는 무너졌으나 그 여파는 아직 판니른 전역에 드리우고 있었다. 여러 도시가 고립됐고, 성들이 파괴됐다. 얼마나 많은 마을이 쓸려갔는지는 지금으로서는 누구도 알 수 없었다.
나름대로 잘 관리되었던 이 대로는 적어도 한동안은 쓰인 적이 없는지 본래의 모습을 상당 부분 잃은 채였다. 여기서 조금만 더 이대로 시간이 흐른다면 본래 이 길을 알던 이가 아니고서는 찾지도 못할 정도로 희미해지리라.
아간투스베록의 영향력이 판니른에 드리웠던 기간은 짧았지만, 일전에 황자들 간의 전쟁이 발발했을 때보다도 더 깊은 상처를 남겼다. 사람과 사람의 싸움은 잔혹하지만 이성적이다. 그들의 잔혹함은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향한다. 반면, 괴물들의 잔혹함은 그렇지 않다. 그들의 흉포함은 말 그대로 눈이 닿는 모든 곳을 향한다. 아마 판니른이 이번에 얻은 상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짧지 않은 시간과 적지 않은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남은 자들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군터와 줄카 일행에게는 나쁘지 않았다. 덕분에 이목을 끌지 않고 이렇게 조용히 이동할 수 있지 않은가. 간간이 살 곳을 잃은 짐승이나, 혼란스러워하는 괴물들과 맞닥뜨리기도 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이동하고 있음에도 아직 인적을 발견한 적은 없었다.
[우리는 폴츠로 갈 거다.]
판니른의 동남부. 렌과의 사이에 위치한 폴츠는 판니른과 마찬가지로 중앙 정부에서 동떨어진, 제국의 벽지에 속하는 지방이었다. 산이 많은 지형 특성상 내세울 것이라고는 약재와 모피 정도뿐인, 어떤 면에서는 판니른보다도 존재감이 흐릿한 지역.
[그곳의 신주는 당신이 세운 건가?]
[아니. 하지만 상관없다. 어차피 누가 세웠든 방식은 크게 다르지 않아. 그러니 문을 여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지.]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아마 그곳의 기둥이 영향을 받았으리라는 거다. 일전에는 렌에서 그랬었고 이번에는 판니른에서 그랬지. 인접한 지역의 기둥들이 흔들리고 망가졌으니 자연히 폴츠의 것도 무사하지는 못할 거다. 손을 쓰기가 더 쉬울 거야.]
[저쪽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을까?]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움직이지는 않을 거야.]
[어째서?]
[노괴와 음침한 그림자 녀석이 손을 잡았으나 그것은 단순한 협력관계일 뿐이다. 둘은 달라. 생각하는 것도 다르고 행동하는 방식도 다르지. 지금까지는 그림자 녀석이 노괴의 뜻대로 움직여줬지만 앞으로도 그러리라는 보장은 없어. 앞으로는 다를 거다.]
[어떻게 그리 확신하지?]
[놈들이 나를 알듯 나도 놈들을 아니까.]
줄카는 단언했다. 그는 정말 확신하고 있었다.
[노괴는 그저 이 나라가 처참히 무너지기만을 바라지. 처음 궐기했을 때, 그 이전으로 돌아가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라면 아무래도 좋을 거야. 이 나라를 통째로 아바시스 놈들에게 넘겨준다고 해도 상관하지 않겠지. 하지만 그림자 녀석은 달라.]
[환야라고 했던가.]
[그래. 음침한 녀석이지. 놈이 노괴와 손을 잡은 이유는 얼추 짐작이 가. 아마 자유를 대가로 계약을 맺은 거겠지. 놈의 언약비를 노괴가 쥐고 있거나 그게 아니라도 정보 정도는 알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노괴는 우리 중 가장 오래된 자이고 리비암에 줄곧 머물렀으니까.]
언약비. 그것은 군주들에게 있어 가장 가치 있는 보물일 것이다. 황제가 그들의 목에 채운 목줄. 그것을 풀 수만 있다면 그들은 무엇이든지 하리라. 아간투스베록이 무리를 해가며 이 땅에 발을 들였던 것도 모두 그것을 위함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정말 그 노괴가 언약비를 쥐고 있다고 해도 그놈을 노예처럼 부리지는 못해. 그건 황제도 하지 못했던 일이니까.]
[그자는 키리스트와 생각이 다르리라 보는군.]
[적어도 내가 알기로는 그렇다. 적어도 사방에 분별없이 불을 질러대는 꼴을 좋다고 방관하거나 손을 거들 녀석은 아니지. 아바시스 녀석들이 전력으로 밀고 들어오고 있다면 이쪽까지 굳이 손을 쓰려 하지는 않을 것이야. 그리고 아마 노괴는 나를 막지 않을 거다.]
자신 있게 말을 이어지던 말이 끄트머리에 가서는 약간 힘을 잃었다.
[무슨 뜻이지?]
[그 노괴는 제정신이 아니지만 어리석지는 않아. 어떤 면에서는 현명하기도 하지. 그자라면 내가 자신을 노리고 있음을 알고 있을 터. 어쩌면 내가 오기를 바라고 있을지도 몰라.]
[이해하기 힘들군.]
[지금 이 세상에 그자를 이해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을 거다.]
* * *
폴츠로 향하는 길은 대체로 평안했다. 간간이 마주치는 짐승이나 괴물들이야 군터와 줄카 일행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평범한 인간의 무리였다면 재앙과 같았을 싸움은 그들 일행에게는 적절한 몸풀이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크르르……!”
할렌이 짐승처럼 나직한 울음을 흘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살짝 튀어나온 그의 입 아래에는 맹수처럼 날카로운 이빨이 지저분하게 튀어나와 있었다. 그 흉측한 이빨들은 그의 숨소리가 고르게 가라앉는 만큼 조금씩 크기가 줄어들다가 결국 평범한 사람의 이빨처럼 변했다.
“아직 힘드십니까.”
모페이브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그러자 할렌은 두어 번 숨을 내쉰 후 천천히 답했다.
“…쉽지 않군요.”
이 한마디만 해도 그랬다. 호흡을 조절하며 정신을 가다듬지 않았다면 조금 전처럼 으르렁대는 소리가 대신 튀어나갈 뻔했다. 이성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았다. 정확히는 ‘할렌’이라는 사내의 정체성을 온전히 지키기가 쉽지 않았다.
지금의 그는 많은 생명과 영혼의 군집체였다. 아무리 할렌으로서 중심을 잡았다고는 해도 그 많은 생명과 영혼의 영향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의식하지도 못하는 사이 그들에게 영향을 받았고, 영 낯선 행동을 거리낌 없이 행했다. 특히 전투가 벌어지기라도 하면 제정신을 유지하기가 너무나 힘들었다. 의식이 시도 때도 없이 점멸하는 것 같았다. 정신을 차려보면 이미 적의 목덜미를 찢어발기고 있었다. 딱히 감정적으로 흔들린 것도 아닌데 그러했다.
“방법이 없는 겁니까? 이대로는…….”
지금의 자신을 ‘할렌’이라 칭할 수 있는가. 할렌은 그마저도 의문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흔들리고 변하는데, 어찌 자신을 할렌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글쎄요.”
할렌의 심정을 얼추 이해했지만, 모페이브로서도 딱히 답을 줄 수가 없었다. 그가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최대한 자주 스스로를 다잡으라는 뻔한 이야기뿐이었다. 그는 답답한 기색의 할렌에게서 조심스럽게 멀어졌다. 그리고 그의 주인을 찾아갔다.
“장군.”
모든 것을 내놓고 길을 떠난 주인을, 모페이브는 여전히 장군이라 불렀다. 언젠가 그의 주인이 거느린 병사 하나 없는 처지가 된다 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할렌 공이 많이 혼란스러워하고 있습니다.”
모페이브에게는 선택권이 있었다. 가주가 바뀌고, 성주가 바뀐다 해도 그의 지위에는 변화가 없었다. 주인에게도, 작은 주인에게도 이야기를 들었다. 솔롬에 남는다면 안락하고 존중받는 삶을 계속 이어갈 수 있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해봤을 때는 그대로 솔롬에 남는 것이 옳았다.
그러나 모페이브는 그의 주인을 따라나섰다. 주인에 대한 충성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미지의 세계에 발을 들인다는 흥분 때문이었다.
초월자. 신이라 해도 무방한 존재. 그런 존재들의 다툼. 제국의 비사. 평범한 사람들은 알 수도 없고, 개입할 수는 더더욱 없는 그 모든 것들이 점점 노쇠해지는 술사의 마음 한구석을 자극했다.
가지지 못한 지식만이 신비가 아니다. 알지 못하는 영역 그 자체가 신비다. 그리고 술사란 본디 신비의 탐구자. 모페이브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풍족한 식사. 안락한 잠자리. 마주치는 이들의 존중. 그 모든 것들은 물론 즐겁고 좋은 것이지만, 그것만으로 삶을 채울 수는 없다. 누군가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할지 몰라도, 모페이브에게는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주인을 따라나섰다. 볼 수도, 짐작할 수도 없었던 세계를 직접 두 눈에 담고자 했다.
그렇게 따라나선 길에, 그의 주 업무는 주인의 시중이 아니라 할렌의 상태를 살피고 보고하는 것이었다.
이제는 인간이라 할 수 없게 된 할렌은 수시로 흔들렸다. 이전에도 그런 적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거인왕과의 전투 이후로는 그 빈도와 정도가 더 심해졌다. 특히 전투라도 벌어지면 거의 발작을 일으켰다. 뻔한 이야기로 넘어가는 것도 한두 번이지, 이제는 그것도 한계였다. 다음번에 할렌이 다시 그를 붙들고 묻는다면 그때는 무슨 말을 해줘야 하겠는가.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지.”
“제 생각도 같습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답이 없는 문제였다. 할렌이 혼란을 거듭하고 있는 이유는 그 자신이 이제는 ‘할렌’이 아닌데 억지로 ‘할렌’이기를 고집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할렌은 그를 이루고 있는 다른 것들의 존재를 느끼지만, 그럼에도 자신이 과거의 ‘할렌’이라 믿고 있었다. 혹은 그렇게 믿고 싶어하거나.
“이대로는 안 됩니다.”
잠깐 생각에 잠겼던 군터가 몸을 일으켰다.
“알겠다.”
몸을 일으킨 그가 할렌에게로 향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