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0화
형제를 죽이고, 조카를 죽였다. 그들의 피로써 길을 만들고, 드디어 다다랐다. 이제 남은 것은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옥좌에 앉는 것뿐.
그러나, 또 다른 시련이 들이닥쳤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그래. 알겠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붉은 눈의 전령이 몸을 일으켰고, 등을 돌렸다. 일개 전령이 이제 곧 황제가 될 황자의 앞에서 보일 만한 무례는 결코 아니었다. 하지만 자콥 트라소프는 돌아선 전령을 붙들지 않았다. 아직 그는 옥좌에 앉지 못한 황자에 불과했다. 옥좌에 앉는다 해도 달라질 것은 없을 테고.
황제는 이제 없다. 그 뒤를 이을 황제들은, 그 누구라 해도 초대 황제처럼 될 수 없다. 제국 전역을 숨소리 하나로 긴장시킬 수도, 무엇보다 군주들을 통제하지도 못할 것이다. 아니, 군주들이 계속 이 제국에 남아있기는 할까?
‘상관없다.’
군주. 그들은 제국이 지닌 최고 전력이다. 그렇기에 위험하다. 통제하지 못하는 힘은 차라리 없는 편이 낫다. 초월자라는 족속들을 혐오하는 자콥 트라소프가 아니라, 제국의 황자이자 미래의 황제로서 내린 결론이었다.
황제의 죽음으로 그들은 목줄이 풀렸다. 이미 제멋대로 굴고 있고, 특히 황도에 똬리를 튼 가장 위험한 자는 이미 한참 전에 이빨을 드러냈다. 그런 와중에 두 초월자가 제 갈 길을 가겠다고 통보해왔다.
줄카와 군터.
‘생각보다 빠르군.’
처음 봤을 때부터 언젠가 이런 순간이 오리라 예상했었다. 군터, 그자는 스스로 일어선 자였다. 평범한 야인으로 태어나 초월자가 된 사내. 그런 자가 고대에 태어났었다면 하나의 신화가 더 생겼을 테지.
그는 자신과 같은, 피를 물려받았다는 것만으로 평범에서 벗어난 반편이가 아니다. 오직 스스로의 삶만으로 지금의 자신을 이루었다. 그래서 대단하지만, 동시에 부담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그 점을 의식했기에 최대한 신경 써서 대하기는 했으나, 초월자의 변덕스러움이 어떤 식으로 나타날지 몰라 조금은 불안했는데…지금 보니 그럭저럭 잘 풀린 것 같았다.
‘공멸이 최선이겠지만, 아니라도 괜찮지.’
줄카와 군터. 그들은 황도로 간다. 그곳에서 가장 강하고, 가장 오래된 초월자를 상대할 것이다. 그들의 싸움이 어떤 식으로 결론이 날지는 모른다. 지금은 거기까지 생각할 여력이 없다.
“전하!”
밖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다시 들려온다. 줄카의 전령을 맞느라 잠시 미뤄두었던 급한 일들이 쏟아져 들어온다. 자콥 트라소프는 눈앞으로 흘러내린 흰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자세를 바로 했다.
* * *
솔롬의 성주 자리는 물려주었지만, 판니른의 군권은 여전히 군터에게 있었다. 군터는 마음 같아서는 그것도 보리스에게 넘겨주고 싶었지만, 판니른의 군권은 솔롬의 성주자리처럼 그가 임의로 처리할 수가 없었다. 애초에 그가 판니른의 군권을 쥔 것부터 비정상적인 일이었다. 크렘보르 가문은 총독 가문이 아니었다. 현재의 영향력과는 별개로, 엄밀히 따지면 최근에 굴러들어온 돌에 불과했다.
사실, 간단히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긴 하다. 황자에게 정식으로 요청을 하면 된다. 보리스에게 판니른의 군권을 물려주는 것을 허락해달라고 말이다. 그리 한다면, 아마 그는 거절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저런 조건을 달지는 몰라도.
하지만 군터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정치적으로 부담이 된다거나 해서는 당연히 아니었다. 그는 남의 눈치 따위는 살피지 않았다. 그가 그러지 않은 것은 그저 보리스가 그것을 감당할 수 있을까 싶어서였다.
솔롬의 성주 자리야 문제될 것 없다. 솔롬은 크렘보르의 도시이고, 크렘보르의 새로운 주인이 된 보리스가 성주자리를 이어받는 것은 안에서 보기에도 밖에서 보기에도 당연한 일일 뿐이다. 그러니 누구도 트집잡지 않는다. 하지만, 판니른의 군권은 다르다. 트집을 잡으려면 얼마든지 잡을 수 있다. 군권을 군터가 쥐고 있는 지금도 그랬다. 따지고 들려면 명분은 넘쳐난다. 그들이 그러지 않는 까닭은, 전적으로 군터의 존재감 때문이었다.
그런데 보리스가 그것을 이어받는다면? 아무리 군터가 뒤에 있다는 것을 안다고 해도 다른 생각을 품을 수밖에 없다. 그가 이른 시점에 후계자에게 자리를 넘겨준 것을 두고 머리가 복잡해진 이들이라면 말할 것도 없을 테고.
‘역시 이르다.’
보리스가 더 성장한다면, 언젠가는 감당할 수 있는 때가 올 것이다. 그 시점이 생각보다 빠를 수도 있고, 느릴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알겠습니다.”
군터는 보리스를 불러 그 점에 대해 이야기했고, 보리스는 담담히 수긍했다.
“괜찮겠느냐.”
“탐이 나지 않는다면 거짓이겠지만, 별 수 없지요. 지금은 때가 아니니까 말입니다. 감당할 수 있을 때가 되면, 제 스스로 취하겠습니다.”
“좋다.”
가장 만족스러운 대답이었다. 그 한 마디로 군터는 보리스에 대한 마지막 우려를 버렸다.
“이제 떠나십니까?”
“그래.”
군터는 보리스에게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말하지 않아도, 보리스는 군터가 어디론가 훌쩍 떠나리라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언젠가, 다시 뵐 수 있겠지요.”
“글쎄. 모르겠구나.”
“…….”
잠시 눈을 감은 보리스가 고개를 돌렸다. 선선한 바람이 흘러 들어오는 창밖을 바라보던 그가 입을 뗐다.
“아버지는 참으로 어려운 분이셨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늘 그러셨지요.”
보리스의 기억 속에 있는 아버지, 군터는 어려운 사람이었다. 어느 자식이 부모를 어려워하지 않겠냐마는, 그의 아비는 특히 더 그랬다. 주변 모두가 인정했으니, 혼자만의 착각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버지처럼 되기를 바랐습니다. 하지만 곧 포기하게 되더군요. 나중에 가서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만이라도 있기를 바랐습니다.”
"…….”
“부족한 아들놈 때문에 마지막까지 심려를 끼쳐 송구할 뿐입니다.”
“부족하지 않다.”
“예?”
“부족하지 않다. 오히려 내가 부족했지. 넌 내게 과분한 아이였다.”
“…….”
보리스는 입을 다물었다. 할 말을 고르기 위해 멈춘 것이 아니다.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서 말문이 턱하고 막힌 것이다.
어렸던 시절부터 그랬다. 언젠가부터 유치한 마음이라 여기며 아닌 척했지만, 역시 자신은 이 한 마디를 듣고 싶었다. 세상에서 가장 큰 사람. 나를 가장 사랑하고, 내가 가장 사랑하는 이 사람에게서 인정을 받고 싶었다.
“오래 걸렸군요. 참으로 오래 걸렸습니다. 이마저도 등 떠밀어 듣는 말 같은 느낌도 있기는 합니다만.”
요동치는 감정을 왠지 모르게 숨기고 싶어, 익숙하지도 않은 농담을 섞어가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의 부친은 여전히 표정변화라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한때는 그 얼굴이 그리도 무섭고 불편했는데,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심지어 편안하게까지 느껴졌다. 어렴풋이,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느끼고 있기 때문일까.
“필요 없으실지도 모르겠지만, 무운을 빌겠습니다. 항상.”
“너 역시.”
* * *
[기둥은 여러 가지 기능을 한다.]
여기서 말하는 기둥이란 신주를 의미했다.
[승리의 기념비임과 동시에 그 땅에 작용하는 축복이지.]
물론 그 안에 갇힌 존재에게는 저주일 것이다.
[또한 마음만 먹는다면 그 외에도 여러 가지로 활용할 수 있다.]
실제로 아간투스베록이 그렇게 했다. 그는 신주의 힘을 이용해 단번에 판니른에 당도했다. 그러나 그 힘을 쓸 수 있고, 견딜 수 있는 존재는 그리 많지 않다. 그가 그의 군대를 데려오지 못한 이유다. 줄카는 만약 아간투스베록이 자신의 군대를 데려왔더라면 좀 더 골치 아팠을 거라고 말했다. 그 점에 있어서는 군터도 의심하지 않았다.
[다만 그런 식으로 문을 여는 데는 여러 가지 제약이 따르지. 단적으로, 기둥끼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지만 리비암에는 닿지 않는다. 왜인지 알겠나?]
줄카의 물음에 군터가 답했다.
[그곳에는 기둥이 없어서?]
[아니. 그곳에도 기둥은 있다. 최초의 기둥이지. 이곳에 있는 것을 포함해 다른 것들은 모두 그 모방품에 지나지 않아.]
최초의 기둥이라.
군터는 까마득한 시절에 처음 세워졌을 신주를 상상했다. 다른 것들이 모두 그 모방품이라 했으니, 당연히 그 신주에도 무언가가 봉인되어 있을 터였다.
[최초라는 점을 제외하면 사실 그리 특별하지는 않아. 어쨌거나 문이 리비암에 닿지 않는 이유는 간단해. 그 문은 우리가 아니라 황제가 직접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번거롭게 됐다고 생각이 들 법도 하지만, 사실 아쉽지는 않았다. 그들은 애초부터 문을 이용할 생각은 없었기 때문이다. 당연하지 않은가? 적진 한복판에 병력도 없이 무작정 들어간다? 아간투스베록이나 할 일이다. 그 오만한 거인왕은 제 오만함에 대한 대가를 치렀다.
[군대를 데려갈 거다. 물론 많지는 않아.]
줄카는 마음만 먹는다면 그의 영지에 있는 군대를 동원할 수 있다. 능히 일국을 도모할 수 있는 군대였다. 하지만 그 만한 머릿수가 움직인다면 적도 당연히 눈치채고 방비할 터. 그렇기에 그는 적의 눈을 피할 수 있을 만큼 적절한 선에서 정예병만을 동원할 작정이었다.
[자네의 재주가 요긴하게 쓰일 거다. 기대하겠네.]
특별히 사령술을 신경 써서 연마한 적은 없지만, 그럼에도 사령술사로서 군터의 역량은 견줄 이를 찾아보기 힘들 만큼 뛰어났다. 한번에 수백, 그 이상의 시체를 일으켜 세울 수 있는 사령술사는 이제껏 존재하지 않았다. 물론 아닐 수도 있지만, 적어도 줄카는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수백 년을 살아온 그가 그렇다 했으니 적어도 근래에는 없었던 것이 분명하다.
예기치 못한 순간에 달려드는, 두려움도 고통도 모르는 수백의 시체. 그것은 그 자체로 전황을 흔들 수 있는 변수다. 하지만 문제가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시체가 없다면 소용없는 일이야.]
이제껏 군터가 시체를 일으켜 써먹었던 것은 모두 한창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전장 한복판에서였다. 죽은 지 얼마 안 되어 영혼과 몸뚱이가 완전히 분리되지 않은, 말하자면 싱싱한 시체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하지만 황도에서도 그럴 수 있을까?
[그건 걱정 마라.]
그런 군터의 의문에 대해 줄카는 단언했다.
[충분할 것이야. 암. 차고 넘치지.]
줄카가 너무나 자신 있게 말했기에, 군터는 더 묻지 않았다.
[자네 수하들의 활약도 기대하고 있다.]
아간투스베록과의 싸움은 그리 길지 않았으나 무엇보다도 치열했다. 그 치열함 속에서 사그라진 것은 생명만이 아니었다. 군터는 그의 영혼 감옥 속에 있던 영혼 중 반 이상을 잃었다. 그들을 소유물처럼 여긴 적은 없었으나, 전력을 크게 상실한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마냥 잃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짧은 시간 동안 꽤 수습한 것 같군.]
줄카의 시선이 군터의 뒤편, 묵묵히 따라오는 한 사내에게 닿았다. 체구부터 외모까지, 별다른 특색 없는 사내. 그러나 그에게서는 생명으로서 마땅히 느껴져야 할 활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숨쉬고 움직이기만 할 뿐이었다. 일정 수준 이상의 기감을 지닌 이라면 그에게서 형언하기 힘든 위화감을 느낄 수 있으리라.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