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9화
권력자가 주최하는 공적인 행사는 대개 시민들이 운집할 수 있는 장소에서 이뤄지곤 한다. 힘 있는 자들은 대부분 자신의 힘을 과시하고, 인정받으려 하는 습성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늘 그렇듯, 예외도 있다. 그 대부분에서 벗어난, 굳이 누군가에게 인정받지 않아도 되는 자들. 진정으로 힘 있는 자들.
크렘보르 가문 역시 그러한 반열에 이르렀다. 세간의 인식은 다를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이번 행사를 통해 스스로 그리 여기고 있음을 드러냈다.
전례를 찾기 힘든 승계식은 솔롬의 광장 대신 신전에서 치러졌다. 족히 사백 명은 수용할 수 있는 신전에 입장한 인원은 고작 칠십 남짓에 불과했다.
가장 앞자리에 자리한 이는 둘. 군주 줄카와 타라냐드 총독 자이드라 멕시스였다. 그들은 이, 어떤 면에서는 역사적이라 할 수 있는 순간의 가장 중요한 증인으로서 참석했다. 그 둘의 존재 때문에, 어쩌면 소란스러울 수도 있었던 이 자리가 고요할 수 있었다.
“신께서 크렘보르 가문에 부여하신 신성한 책무. 보리스 크렘보르는 크렘보르 가문의 정당한 후계자로서…….”
식의 진행을 맡은 주교는 지금 자신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것이 분명했다. 분명 입으로는 끝없이 중얼대고 있는데, 그 와중에 눈이 바람에 치인 들풀처럼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심지어 안색은 병자처럼 창백했으며, 눈 밑에는 그늘이 드리웠다.
군터는 식이 시작된 후로 단 한 번도 자신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주교에게서 시선을 뗐다. 굳이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그는 등 뒤에 자리하고 있는 수십 명의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어떤 면에서는 눈으로 보는 것보다 더 명확하게.
그들의 숨소리와 몸짓. 군터는 그 작은 신호를 통해 그들의 마음 상태를 읽을 수 있었다. 두려워하는 자들. 흥분하는 자들. 그저 긴장하고 있을 뿐인 자들.
저들에게는 이 순간이 새 시대의 개막과 같을 터였다. 새로운 권력자의 탄생은 그 아래에 자리한 모든 것을 뒤흔들기 마련이니, 모두가 눈에 불을 켜고 권력에 조금이라도 더 다가가려 발버둥을 칠 것이다.
저들의 그런 안달이 난 모습이 군터에게는 익숙하지도, 그렇다고 낯설지도 않았다. 언젠가부터 그의 주변에서 저런 가벼운 자들은 찾아보기 어렵게 됐지만, 그것이 그의 주변 사람이 모두 초탈해졌기 때문은 아니었다. 지금 흔들리고 있는 저들만 해도 그렇지 않던가. 오늘이 오기 전에도 그들은 솔롬의 신하였고, 크렘보르의 신하였다. 저들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권력을 향한 갈망이 자리하고 있었다. 단지 한 자루 칼 같은 주인 아래에서 감히 그런 모습을 보일 수 없어 드러나지 않도록 열심히 갈무리했던 것일 뿐.
이제 저들은 새로운 주인을 맞이하며 새로운 모습을 준비하고 있다. 그런 저들을 어찌 다스릴지는 전적으로 보리스에게 달려있다. 오늘 이후, 가문과 솔롬의 통치는 그의 몫이다.
[이제 네 몫이다.]
보리스가 미세하게 움찔거렸다.
[동생과 사이좋게 지내라.]
* * *
식이 끝났다.
탈진할 것처럼 축 늘어진 주교가 전대 성주와 현 성주에게 짤막하게 인사를 나누고 그의 처소로 돌아간 후. 군터는 그를 기다리고 있던 줄카, 자이드라와 함께 자리를 떠났다. 그러니 자연스레 보리스의 주변으로 인파가 몰렸다. 군터가 있을 때는 조심스럽게 그의 눈치를 살피던 이들이 군터가 사라지자 눈치 볼 것 없다는 듯 부리나케 보리스에게 조금이라도 다가오려 어깨를 들이밀었다.
“감축드립니다, 성주님!”
“감축드립니다!”
보리스는 자신을 둘러싼 인파를 조용히 둘러보았다. 어미 새를 바라보는 새끼 새의 눈이 이러할까. 그들의 꼴이 적잖이 우스웠다. 그러나 웃음은 나오지 않았다. 어찌 저들을 비웃을 수 있겠는가. 이 자리를 잇기를 고대해왔던 자신은, 그럴 자격이 없다.
“축하해. 오라버니. 꿈을 이뤘네.”
실비아가 인파 사이로 걸어왔다. 그의 하나뿐인 형제 역시 당연히 승계식에 참석했다. 주교의 앞에 서기 전, 마지막으로 보았던 동생의 얼굴에 복잡한 감정이 서려 있음을 확인했던 그였다. 그 복잡한 감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적어도 지금 축하를 건네는 실비아의 표정에 거짓은 없어 보였다.
“그래. 고맙다.”
“그리 즐겁지만은 않을 거야. 해야 할 일이 많을 테니까.”
“물론 그렇겠지.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
“잘 해낼 수 있으리라 믿어.”
“그럴 수 있기를 바라지만, 혼자서는 무리다. 나는 아버지가 아니니까. 많은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겠지. 네 도움 역시 기대하고 있다.”
“…….”
“부담을 느끼라고 한 말은 아니다. 난 네게 간섭하지 않아. 그럴 자격이 없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마지막 당부는 너에 대한 것이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당부가 아니더라도…….”
어느새 주변은 조용해졌다. 크렘보르의 혈육들 간에 오가는 대화에 감히 끼어들 만큼 간이 큰 자는 이곳에 없었다. 게다가 그게 아니더라도, 지금 이 대화는 그들에게도 꽤 흥미로웠다. 그간 그들 남매 사이에 있었던 조용한 분쟁은 굳건하다 여겼던 후계 구도에 잡음까지 일으켰었다.
“과한 욕심이었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 보니, 네게는 미안한 마음뿐이야.”
“뜻밖이네. 이런 자리에서 이런 말이라니. 원하던 것을 손에 넣어서 너그러워진 건가?”
“그럴지도. 다급함이 사라지면 여유가 생기는 법이지.”
보리스는 다소 날이 선 동생의 말도 덤덤하게 받아넘겼다. 그러자 가시가 돋쳐 있던 실비아의 목소리도 조금은 부드러워졌다.
“좋아. 그렇다면 나도 고민해볼게.”
“아직 화가 다 안 풀린 거냐?”
“아니. 나도 내가 철부지처럼 굴었었다는 것 정도는 알아.”
카인. 아니, 레오니스 코누디스에 대한 이야기는 그녀도 들었다. 솔롬을 위기로 몰아넣었던 것은 거인왕이지만, 그 거인왕을 불러온 것은 바로 그자였다. 코누디스의 망령. 그가 어떻게 카인의 행세를 했는지, 심지어 카인이라는 사람이 본래 존재하기는 했는지조차 의문이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가 잠시나마 그녀의 막하에 있었다는 것이었다. 실비아는 자신이 이 도시에 엄습했던 재앙의 초래에 일조했음을 자각하고 있었다. 부친 군터는 물론, 오라비 보리스까지 그녀에게 자책하지 말라고, 네 탓이 아니라고 말해주었으나 그녀는 그 말들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엉망이 된 도시가, 널브러진 시신들이, 가족을 잃고 울부짖는 백성들의 목소리가 모두 자신을 향한 것만 같았다.
물론 그녀도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카인, 레오니스 코누디스는 그녀와 만나기 전에도 이미 솔롬의 관직에 있었다. 그녀가 그를 중용했든, 하지 않았든, 결국 그는 똑같이 일을 벌였을 것이다.
하지만 머리로 이해했다 해서 마음까지 편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부서지고 불탄 시 외곽을 돌아보며, 그녀는 자신이 품었던 불만이 배부른 투정이었다고 생각했다. 삶에서 겪는 그 어떤 일도 죽음 앞에서는 아무 의미도 없는 것만 같았다. 처참하게 무너진 집과 거리 곳곳에 널브러진 시신들. 사람의 것이든 괴물의 것이든, 차갑게 식은 몸뚱이들 가운데 사지가 멀쩡한 것이 드물었다.
물론 실비아는 아기자기하고 예쁜 것들에 둘러싸여 자란, 흔하디흔한 귀족 가문의 영애가 아니었다. 그녀는 마치 군인처럼 피에도, 죽음에도 나름대로 익숙했다. 심지어 직접 칼을 들고 적의 목을 친 경험도 있었다. 하지만 외지에서 낯선 적들의 죽음을 보는 것과 집 앞마당에서 가문의 군사와 백성들이 처참한 몰골로 차갑게 식은 꼴을 보는 것은 전혀 다른 경험이었다.
차갑게 식는 느낌이었다. 머리도, 영혼도.
“사사로운 일로 성주님의 심사를 어지럽히는 없을 겁니다.”
그녀는 짧은 말로써 솔롬의 새로운 성주를, 가문의 새로운 가주를 인정하고 대우했다. 보리스의 눈에 만족과 기쁨이 떠올랐다. 조금 전 쏟아지던 축하의 인사들을 들을 때와는 사뭇 다른 반응이었다.
“고맙다. 성주로서도, 오라비로서도 실망시키지 않도록 하마.”
* * *
널찍한 방 안에는 세 사람만이 있었다.
“가시렵니까.”
이삼십 대의 젊은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의 외관을 한 자이드라 멕시스가 말문을 열었다. 세월을 거슬러 오른 그의 붉은 두 눈이 제 주인을 향했다.
[그래야지. 볼 일은 다 봤으니까.]
그 말에 자이드라 멕시스의 시선이 다른 쪽으로 향했다.
“자네 역시?”
“그래.”
“흐음. 전하. 저 역시 전하를 따르고 싶습니다만. 상황이 여의치가 않군요.”
따르고 싶다는 말이야 진심이든 아니든 상관없다. 다만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길게 끈 전쟁이 드디어 끝났건만 새로운 전쟁이 기다렸다는 듯 곧장 터졌으니까. 게다가 이번 전쟁은 황좌를 두고 벌였던 것보다 더 위험했다. 적은 제국의 내란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즉, 철저히 준비하고 일으킨 전쟁이라는 뜻이다. 반면에 제국은 긴 내란으로 막대한 국력의 소모가 있었다. 게다가, 줄카는 군주 키리스트가 황도에서 아바시스에 내통하고 있을 거라 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아마도 사실이겠지만), 황도는 이미 적에게 넘어갔다고 봐야 했다. 아바시스에게 넘어간 것은 아니라 해도, 키리스트가 버티고 있는 한 황도는 이미 적지라고 봐야 했다.
“황자가 이미 군을 소집했습니다.”
[빠르군. 과감하고.]
길었던 전쟁은 당사자들의 피만 말린 것이 아니다. 휩쓸린 백성들은 물론이고, 당사자들의 밑에서 직간접적으로 얽혔던 귀족들 역시 물심양면으로 적잖이 시달려야 했다. 이제야 그 보상을 수 있게 됐는데, 보상은커녕 또 다시 소집령이라니. 불만이 생길 수밖에 없다.
“명분이 확실하니까요. 자고로 외세의 위협은 언제나 내부를 단결시키는 법이지요.”
“글쎄.”
자이드라 멕시스의 말은 정론처럼 들렸으나, 군터는 사실 그 부분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외세의 위협이 내부를 단결시킨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부의 구성원이 공통된 소속감을 가져야 한다. 이를테면 같은 깃발 아래 어깨를 나란히 하는 병사들처럼 말이다.
하지만 제국이라. 군터는 단 한 번도 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느낀 적이 없었다. 그것이 비단 그의 출신 때문일까? 글쎄. 그럴 수도 있지만, 군터는 제국에 자신과 같은 이들이 적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특히 제국의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곳일수록 더더욱.
줄카 역시 그와 같은 생각인 듯했다.
[길어봐야 이백 년. 짧으면 수십 년 정도 전까지만 해도 침략자와 피침략자의 관계였을 뿐이다. 제국이라 한들 억지로 묶어놓은 이름에 불과해. 상황이 자콥 녀석의 뜻대로 순탄하게 굴러가지는 않을 거다.]
“그럴지도 모르지요. 어쨌거나 황자는 이미 명령을 내렸습니다. 아직 황제가 되지는 않았으나, 이 제국의 주인이 그라는 사실은 이미 모두가 알고 있지요. 더군다나 최근의 승전으로 그 기세가 높으니, 속에야 다소 불만이 있더라도 드러내지는 못하겠지요.”
자이드라 멕시스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이미 소집령이 내렸으니 따르지 않을 수는 없다며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그가 떠난 뒤.
[욕심 있는 놈들의 시대가 될 거다.]
“…….”
[자콥 녀석의 통제력은 전국을 덮지 않아. 지금은 물론이고 아바시스와의 전쟁에서 어찌어찌 승리한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때가 되면 눈치만 보던 녀석들이 움직이기 시작하겠지. 저 녀석만 해도 생각이 많아.]
“하인이 된 줄 아는 노예일 뿐.”
똑같이 누군가를 위해 일한다 해도 노동에 대한 대가를 받을 뿐, 자유의지를 가지고 사는 하인과 주인의 뜻대로 숨 쉬어야 하는 노예는 다르다. 자이드라 멕시스는 그것을 알지 못한다. 정확히는, 자신이 하인이라고 착각하고 있다.
[노예라. 난 그렇게 여기지 않는데.]
“그럼 뿌리와 가지 정도로 하지.”
아무리 열성적으로 뻗어 나간들, 결국 가지는 가지다. 가지가 아무리 거대하다 해도 결국 뿌리에 묶인 존재일 뿐이다. 가지가 아무리 자라난들 절대 뿌리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어떤 이들은 자이드라 멕시스가 젊어진 것을 보고 그가 용의 축복을 받았다고 떠들어댔다. 하기야, 다 죽어가던 노인이 하루아침에 젊음을 되찾았으니 마냥 좋아 보일 것이다. 거기에 강건한 몸까지 손에 넣었으니 더더욱 그럴 테지.
하지만 그것이 정녕 축복일까? 온전했던 하나의 생명이 불완전한 무언가로 전락해버렸을 뿐인데.
[좋을 대로 생각하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으니. 지금 중요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지.]
줄카의 눈빛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준비는 됐나?]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