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8화
“승계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오!”
“장군께서 아직 정정하신데 어찌 그런…….”
토어릭은 불처럼 들고 일어나는 자들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들이 실컷 떠들고 싶은 대로 떠들도록 놔두고서, 어느 정도 열기가 가라앉은 후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다 떠드셨소?”
“토어릭 공. 말씀해보시오. 이 무슨 참람한…….”
“공자의 뜻입니까? 공자께서 공을 시켜 여론을 이끌어보라 하신 겁니까?”
이자들이 딱히 보리스에게 불만이 있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이 도시에 불온분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자들은 크렘보르 가문이 솔롬에 막 자리를 잡던 시절에 모조리 쓸려나갔다. 그러니 지금 떠들어대는 자들은 그저 눈치가 없고, 그런 주제에 욕심만 많은 것에 불과했다. 지닌 바 능력은 변변찮은데, 그래도 어떻게든 권력에 조금이라도 더 다가가고 싶은 의욕만 넘치는 자들.
이해한다. 저런 자들이 어디 한둘이던가.
“그럴 리가.”
“허면.”
“공자께서 아무리 의욕이 넘치신다고 해도, 어찌 감히 그럴 수 있겠소.”
토어릭이 의자 등받이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누구도 그의 태도를 방만하다 지적하지 못했다. 신나게 떠들어대던 몇몇 이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눈치없는 그들도 이제야 분위기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낀 것이다.
“장군께서 직접 말을 꺼내셨소. 승계는 그분의 뜻이오. 물론, 공자의 뜻이기도 하지. 장군의 뜻을, 결국에는 받아들이셨으니까.”
“허!”
“으음.”
“두 분께서 정확히 어떤 이야기를 나누셨는지, 나는 모르오. 다만, 장군의 뜻은 확고한 듯하오. 그대들도 알다시피, 장군께서는 한번 결정하신 것을 무르시는 분이 아니지.”
여기 모인 이들 모두, 크렘보르 가문을 섬긴 것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성주의 성미는 그들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다. 아니, 성미보다는 행동방식이라는 표현이 옳으리라. 그들 중 누구도 성주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니.
“장군께서는 이미 마음을 굳히셨소. 닷새 후요.”
“닷새?!”
“아무리 그래도 그건 너무…….”
“전례가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서두르기까지 한다면 뒷말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아, 그건 괜찮소.”
“예?”
“지금 이곳에 줄카 전하와 멕시스 각하께서 계시지 않소이까. 그분들이 자리해주시기로 하셨소.”
“오오!”
지금까지 성토하던 이들은 물론, 가볍게 입을 놀리지 않았던 자들까지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감탄했다.
군주와 총독이라. 총독만 하더라도 부족함이 없다. 더군다나 총독이라 해도 다 같은 총독이 아니지 않은가. 자이드라 멕시스는 세습 총독이며, 그의 이름값은 지금 황자의 곁에 있는 최고 권신들에 비해도 부족함이 없다. 그런데 군주 줄카까지. 제국의 군주가 공식 석상에 자리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그런데 그런 군주가, 아무리 특별한 행사라 할지라도 일개 가문의 행사에 얼굴을 비춘단 말인가.
토어릭이 희미한 고소를 머금었다.
‘이번 일의 전말에 대해서는 아는 이들이 드물지.’
승계식이 아니라 솔롬을 뒤흔들었던 한밤의 거대한 전쟁에 대해서였다. 세상은 영원히 이어질 것만 같았던 그 끔찍한 밤을 단순한 괴물들의 준동 정도로 알고 있었다. 저주스러운 괴물들의 침공을 그들의 성주와 군주, 그리고 타라냐드의 총독이 함께 이겨냈다고 말이다.
물론 생각이 있는 자들은 의아하게 여겼다. 어째서 타라냐드의 늙은 총독이 이 먼 동쪽 땅에 군대를 이끌고 와 있는 것이며, 영지에 틀어박혀 꼼짝도 안 한다는 군주는 또 왜 이곳에 와 있는 것인지 말이다. 하지만 속으로 의문이야 품을지라도, 감히 그 의문을 밖으로 꺼내놓는 자는 없었다. 이 자리에 있는 이들 또한 그랬다. 어쩌면 그들은 군주와 타라냐드의 총독이 그들의 성주와, 나아가 크렘보르 가문과 밀접한 사이라고 오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오해는 아닌가?’
토어릭도 자세한 사정에 대해 알지는 못했다. 멕시스야 크렘보르 가문과 동맹이라지만, 군주에 대해서는 그도 아는 바가 없었다.
“어쨌거나, 다들 이해했으리라 생각하오.”
군주의 이름값은 모든 불만과 의혹을 잠재우는 힘이 있었다. 이 순간이 지나면 저들은 또 다른 의혹을 품게 될 테지만, 저들은 결코 그 의혹을 해소할 수 없으리라.
* * *
언젠가부터, 군터는 이날만을 기다려왔다. 오랫동안 거추장스럽게 여겼던 짐을 마침내 내려놓는 날.
사실 정말 오랫동안 그랬는가 묻는다면, 확답할 수는 없었다. 어쩌면 아닐지도 모른다. 그저 그렇게 느끼는 것뿐일지도.
그러나 그가 이날을 기다려왔던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이 순간이 지나고, 짐을 내려놓은 뒤에 정말로 후련해질지도 모르면서. 그저 막연하게.
[당신에게도 미련이 있었겠지.]
널찍한, 그러나 화려하지도 않은 방에는 오직 군터와 줄카만이 있었다. 군터는 창가를 보고 서 있었고, 줄카는 가죽이 깔린 원목 의자에 걸터앉아 있었다.
[물론. 나 역시 평범한 사람이었던 시절이 있으니까.]
평범한 사람이라. 용을 벤 자가 평범한 사람일 리가 있나. 물론, 줄카가 말한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의 기준에서일 터였다. 감정을 지닌 채, 세파에 흔들리는.
[어떻게 털어냈나.]
[털어내지 못했다. 조금씩 잊고 잃었을 뿐이지.]
[그 뒤로는 어땠지? 자유로웠나?]
군터와 줄카의 소통은 전보다 훨씬 거침없었다. 강적에 맞서 사선을 함께 넘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군터가 새로운 자신을 받아들일 준비를 서서히 마쳐가면서, 줄카를 대하는 태도가 자연스러워졌기 때문이었다. 지금처럼 거리낌 없이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 그 증거였다.
[아니. 그럴 리가.]
순간 줄카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던 군터는 뒤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잊고 말았다. 세상에 더없이 높고, 누구보다 자유로울 것 같은 이 자는 한때 목에 목줄이 걸린 채 치욕스러운 종노릇을 해야 했다. 군터는 자신이 그의 처지였다면 어땠을까 잠시 상상해보았다가 곧 머리를 비웠다. 아마 그랬다면, 그는 줄카보다는 아간투스베록에 더 가깝게 되었으리라.
[그대의 미련은 이 나라인가? 아직 다 잊지도 잃지도 못한 것인가?]
[글쎄.]
줄카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자체로 답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군터는 몸을 돌려 줄카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굳이 시선을 마주치지 않아도 기색을 살피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는 그였다. 그런데도 굳이 몸을 움직인 것은 습관적인 행동이었다. 사람을 많이 벗어났다 하나, 그의 몸과 정신은 여전히 사람에 가까웠다.
[동류라 하고 싶지만 나와 자네는, 아니 우리와 자네는 달라.]
줄카는 군터와 시선을 마주하지 않았다. 그는 처음 이 방에 들어와 앉았을 때처럼 반쯤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젖히고 있었다.
[뭉뚱그려 초월자라고 하지만 그 명칭 자체도 우스운 면이 많지. 초월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대체 무엇을 뛰어넘었단 말이지? 사람을 넘어서면 그것이 곧 초월인가? 늙지 않고 죽지 않게 되면 그것이 초월일까? 사실 우리도 저들과 별반 다르지 않아. 묶여있다는 점에서 말이야. 녀석은 그것을 알고 있었지. 그래. 그럴 거야. 그렇다면 우리 중에 진정한 초월자는 그 녀석 하나뿐일지도 모르겠군.]
군터는 줄카가 말하는 ‘그 녀석’이 쿠엘단을 뜻함을 알았다. 줄카는 줄곧, 쿠엘단에 대해 이야기할 때만은 어딘가 아련한 감정을 보였다. 그리고 약간의 질시도.
[예전에는 황제만이 나를 묶어놓는 굴레라 여겼지. 하지만 아니었어. 지금에서야 알겠군. 자유롭냐고 물었나? 아니. 전혀 그렇지 않아. 나는 여전히 답답함을 느낀다. 그리고 그것은 아마도 내가 내 사명에 저항하고 있기 때문이겠지.]
[사명?]
[힘 있는 존재들은 저마다 땅과 하늘에 묶여있다. 우리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이 세상의 모든 존재가 그러했지. 그러나 우리는 그 질서를 파괴했다. 그들을 쓰러뜨렸고, 그들을 인위적으로 묶어놓았어. 그들의 힘을 갈취해 땅을 비옥하게 했고 그를 통해 부국을 이루었지.]
신주가 그것이었다. 본래 그 땅에 존재했던 신을 봉인하고 그들의 힘을 갈취하는 수단. 더없이 잔혹하며, 효율적인 통치의 장치. 이제는 군터도 그것에 대해 알고 있었다. 제국의 주라고 하는 것이 어떤 방식으로 나뉜 것인지도.
[모든 땅에는 신이 필요하다. 새싹이 잎을 틔우려면 비와 햇빛이 필요하지. 그들이 바로 그런 존재다. 그러나 어찌 매일 비가 내리고 매일 해가 쬐겠나. 때때로 삭풍이 불어오기도 하고 가뭄이 들기도 하는 것이지. 그것이 자연스러움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았지.]
줄카는 황제와 자신들을 구분 짓지 않았다. 아간투스베록이 그것을 오욕의 세월이라며 부정한 데 반해, 줄카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목줄을 차고 한 일이든, 스스로 내켜서 한 일이든 어찌 됐건 모두 자신이 한 일이라 여기는 것이다. 아간투스베록은 그것을 비굴함이고, 굴종이라 비웃었었다.
[우리는 자연스러운 존재가 아니야. 힘을 지녔음에도 자유를 갈망하지. 우리의 존재 자체가 이 세상에게는 껄끄러움일지도 몰라.]
도도하게 흘러내리는 강 한가운데에 큼지막한 바위 하나가 자리하고 있는 셈이다. 아래로 내려가야 할 물길이 그 바위에 가로막혀 길을 찾지 못하니, 마치 백지에 찍힌 검은 점 하나와 같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순응해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아.]
그러나 그것이 부자연스러움인가? 그렇게 볼 수도 있다. 아닐 수도 있고.
어쩌면 오랫동안 부딪치는 물방울에 조금씩 깎이고 부서질지도 모른다. 아니면 백 년이고 천년이고 눈치 없이 그 자리를 계속 지키고 있을지도 모르고.
[녀석은 선택했고 실행했지. 나 역시 그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당장은 그럴 수가 없군.]
[어째서?]
[아직도 다 못 잃은 내 미련이 나를 붙들고 있으니까.]
움직이지 않는 줄카의 시선이 남쪽으로 향했다.
[너 역시 그러하겠지?]
[그래.]
넘겨줄 것은 다 넘겨주리라.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라 매정하게 돌아서기에는 묽어지지 않는 피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자잘하게 불어오는 바람이야 어련히 알아서 잘 맞으라고 하면 그만이나, 모든 것을 무너뜨릴 수 있는 폭풍은 피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것이 아비로서 줄 수 있는 마지막 도움이리라.
[쉽지 않을 것이야. 노괴는 덩치 놈과 달라. 게다가 하나도 아니지. 놈의 곁에는 그림자가 붙어있어.]
[알고 있다.]
쉬울 리가 있겠는가. 줄카의 말에 따르면, 황도에 웅크리고 있는 노괴는 황제조차 경계하여 곁에 두었던 괴물이었다. 그런 자가 오랜 세월 원한의 칼을 갈고 닦았다면 그 위험성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을 터.
그러나 두려움은 없다. 당연히 망설임도 없다. 해야 할 일이기에 하는 것이다. 힘에 부쳐 실패한다면 애석하겠지만, 설령 그렇다 한들 어찌하겠는가.
“후우.”
짧게 뱉으니, 식은 숨결이 창밖으로 흘러나갔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