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7화
이 시대에 개인의 위세는 곧 가문의 위세다. 드물게 홀로 일어선 자라고 해도 결국에는 가족을 만들고, 가문을 만들게 되니 개인이 이룬 위세는 자연스럽게 그의 혈족에게 이어지게 된다. 그 위세가 대를 이으며 더 커질 수도, 혹은 작아질 수도 있겠지만 어쨌거나 권세는 그렇게 이어지는 것이다.
크렘보르 가문.
신생 가문으로서는 드물게 번듯한 도시 하나를 손에 쥐었으며, 심지어 주 전체에 큰 영향력을 행사할 정도로 힘 있는 가문이다. 이 정도의 가문은 제국 전역을 통틀어도 흔치 않다. 물론 제국의 중심부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벽지에 자리한 만큼 실질적인 위세를 논한다면 떨어지는 부분이 없지는 않겠으나 어쨌거나 신생 가문이 이 정도의 권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은 분명 놀라운 일이었다. 어느 정도냐면, 판니른의 설레발 떨기 좋아하는 자들은 벌써부터 미래의 총독 가문이라고 떠들어댈 정도였다. 당연히 그런 입 가벼운 자들은 이런저런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그렇게 비판하는 이들조차도 그 말 자체가 틀렸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너무 이르다뿐이지, 사실 그들조차 언젠가는 크렘보르 가문이 판니른의 총독 가문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크렘보르 가문의 성세가 지금처럼 유지된다는 전제하에 말이다.
멕시스 가문이 처음부터 타라냐드의 지배 가문이었겠는가. 그들에게도 시작은 있었다. 어쩌면 지금, 판니른에 또 다른 지배자가 탄생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본래 일개 성에 불과했던 솔롬은 이제 번듯한 도시가 되었으며, 그러고도 모자라 계속해서 덩치를 키우고 있다. 그리고 그 도시는 크렘보르의 사유물이나 마찬가지다.
뿐인가? 판니른의 군대 역시 크렘보르의 영향력 아래에 있다. 도시가 아니라 주의 군대가 한 가문에 의해 움직인다는 것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
예로부터 왕이 휘하의 총애하는 신하에게 권세와 부를 허락하는 경우는 잦아도 군사를 허락하는 경우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그것은 어째서인가? 수하에게 직접 쥐여준 칼끝이 언젠가 주인을 향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정말 그런 일이 벌어지느냐는 중요치 않다. 왕이, 주인이 그럴 수 있다는 의심과 두려움을 느끼는 것 자체가 문제다. 그렇기에 예부터 왕은 신하에게 천금을 허락할지언정 정도 이상의 군사는 좀처럼 허락하지 않았다.
물론 제국은 일반적인 국가와는 달랐다. 제국에는 이미 총독 가문이라는, 타국의 입장에서 보면 왕가라 할 만한 가문들이 이미 몇 있었으니까.
그러나 이미 몇 있다고 해서, 새롭게 하나가 느는 것이 대수롭지 않은 일이 되지는 않는다. 총독 가문은 저마다 유구한 역사를 지닌 제국 최고의 명문가 중 명문가. 이제 갓 일어난 신생 가문을 그들과 비교할 수는 없다. 다만, 이 신생 가문이 그 최고 명문가들이 떠오를 만큼 무서운 기세로 성장해가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기어이 이날이 오는군.’
한편으로는 바랐고, 한편으로는 바라지 않았던 순간. 그 순간을 맞닥뜨린 토어릭은 자신도 모르게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의 의미가 무엇일까. 우습지만 그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안타까움? 후련함? 아니면 다가올 미지를 향한 기대나 두려움?
‘언젠가 이런 날이 오리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온 마음을 다해 섬기리라 다짐했던 주인이 자신과 다른, 아니 전혀 상상하지도 못한 미래를 보고 있음을 알았을 때. 토어릭은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아니. 아니지.’
스스로 결정을 내렸다고, 그때는 그리 생각했었다. 하지만 돌이켜보니 어쩌면 그렇게 결정을 내리도록 등 떠밀어진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서, 그렇게 되었네.”
그의 새로운 주인, 작은 크렘보르가 이야기를 마쳤다.
덤덤하게, 나직한 목소리로 이어진 이야기였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이 도시를, 나아가 판니른 전체를 크게 뒤흔들 만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자네는 놀라지 않는군.”
작은 크렘보르의 시선이 토어릭을 향했다. 그러자 다른 이들의 시선도 덩달아 따라붙었다. 토어릭은 살짝 어깨를 으쓱하며 수긍했다.
“예.”
“짐작하고 있었나?”
“어느 정도는…짐작하고 있었습니다.”
“정작 나는 모르고 있었는데.”
“아니요. 알고 계셨을 겁니다. 어떤 식으로든.”
“음?”
“그분께서는 단 한 번도 뜻을 숨기신 적이 없습니다. 단지 그분을 보는 이들이 그 뜻을 헤아리지 못했을 뿐.”
“…그런가.”
* * *
보리스는 어딘가 묘한 얼굴을 한 토어릭에게서 눈을 뗐다.
토어릭. 이 도시에서 손에 꼽힐 정도로 능력도, 영향력도 있는 사내다. 그를 끌어들이기 위해 적잖은 노력을 했지만, 아직도 그를 다 알지는 못했다. 사실, 토어릭만이 아니라 부친을 따랐던 이름 있는 신하들은 대부분 그랬다. 그들은 어딘가…크든 작든 이상한 면이 하나씩은 꼭 있었다. 보리스는 그것이 성공을 거둔 이들 특유의 자신감이라고 여겼다. 실제로 그들은 모두 부친과 함께 현재의 크렘보르를 이룩한 주역이었다. 그들은 역사에 함께 했다는 자부심과 앞으로도 그 역사를 이어가고 싶다는 열망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은 그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 단지 따르는 이들이 바라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스스로 그것을 원했다.
“성주 위(位)를 잇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장군께서는 아직도 한창이시니까요. 여러 말들이 나올 겁니다.”
“그렇겠지.”
당대의 권력자가 몸이 멀쩡한데 후계자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것은 좀처럼 없는 일이다. 아니, 좀처럼 없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없다. 적어도 그가 알기로는 그랬다.
“장군께서 충성을 시험하는 거라고 여기는 이들도 적잖이 나올 겁니다. 장군의 공표가 있고 나면 그들이 가장 시끄럽게 떠들어댈 테지요. 무시하거나, 아니면 아예 입을 막아버리는 것도 방법이기는 합니다만…….”
“그래서는 안 되겠지.”
자신이 없어서가 아니다. 그런 방식으로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억누르려면 확실하게 억눌러야 한다. 그러지 못할 것이라면 처음부터 방법을 달리하는 편이 옳다.
물론 어떤 식으로든 위엄은 보여야겠지. 하지만 속이야 어떻든, 나름의 방식으로 충성심을 표하는 자들을 힘으로 누를 수는 없다. 갓 자리를 이어받은 후계자로서 모양새가 영 좋지 않으니까.
“또한, 성주 위는 어떻게든 이어받는다 해도 판니른의 군권은 포기하셔야 할 겁니다. 적어도 지금 당장은.”
“음.”
아쉽지 않다면 거짓이겠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애초에 총독이 지녀야 할 군권이다. 그것을 부친의 실력과 이름값으로 가져온 것이니, 그것을 계속 쥐고 있기에는 명분이 부족하다. 억지를 부리려면 부릴 수도 있겠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 억지로 군권을 유지한다 한들 군심(軍心)을 얻지 못한다면 불덩이를 손에 쥐고 있는 셈이니.
“공자님.”
자리가 파한 후에도 토어릭은 자리를 지켰다. 그가 할 말이 무엇인지, 보리스는 짐작하고 있었다.
“장군께서는…….”
“나도 모르겠네.”
“…그렇습니까.”
“여쭐 만한 상황이 아니었네. 여쭈었다 해도 제대로 답을 해주셨을지도 모르겠고.”
“알기 힘든 분이기는 하지요.”
“자네는 어떤가?”
“예?”
“어찌하실 것 같냐는 말이네.”
“…….”
그 물음에, 토어릭은 또 한 번 묘한 얼굴을 했다. 잠시 말이 없던 그가 툭 한마디를 던졌다.
“떠나실 것 같습니다.”
“뭐?”
“그저 느낌이기는 하지만, 왠지 그러실 것 같군요.”
느낌일 뿐이라. 그게 아님은 그들 모두 알았다. 단지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 느낌 운운하며 모르는 척할 뿐.
서로의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니, 절로 느는 것은 씁쓸함 뿐이었다.
* * *
아는 이들 사이에서는 승계식이라 불렸다.
“진심인가?”
승계식에 대해 들었을 때, 가장 격하게 반응한 이는 자이드라 멕시스였다. 군터와 자이드라 멕시스는 여러 면에서 달랐지만, 특히 통치와 권력 같은 부분에 있어서는 정반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군터는 권력자로서의 삶에 조금도 미련이 없었지만, 자이드라 멕시스는 그렇지 않았다.
“어째서지?”
전투가 끝나고 벌써 엿새. 자이드라 멕시스는 여전히 솔롬에 머물고 있었다. 명목상으로는 전후 처리를 돕기 위함이었으나, 실제로는 역시 아직 솔롬에 머무르고 있는 줄카에게 ‘피’에 대한 지식을 얻기 위함이었다. 용의 피를 받아들이며 그토록 갈망하던 젊음을 되찾았지만, 동시에 벗어날 수 없는 제약을 스스로 짊어진 그였다.
영원한 것은 무엇도 없다. 이성을 마비시킬 정도의 기쁨도 그렇다. 기쁨이 가시고 나니 이제 슬슬 다른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덕분에 요 며칠 동안 머리가 복잡하던 자이드라 멕시스였다. 그러던 차에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접하니, 그 자신도 모르게 감정적으로 목소리를 높이고 말았다.
“자네가 일군 가업이 아닌가.”
“할 만큼은 했다.”
할 만큼은 했다고? 자이드라 멕시스는 흔들림 없는 군터의 눈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욕심 없는 자의 눈이다. 아니, 저 시체 같은 눈에는 욕심뿐만 아니라 그 무엇도 비치지 않는다. 어찌 저럴 수가 있지? 초월자가 되어 감정이 다 날아가기라도 한 건가? 하지만 그가 알기로 군터 크렘보르가 초월자에 이른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나와는 다른 것인가.’
군터 크렘보르. 이 자는 초월자다. 군주들과 어깨를 견줄 수 있는 진정한 초월자. 반면, 자신은 어렵사리 용의 피를 얻어 젊음을 되찾았으나 초월자라 할 수는 없다. 사람은 넘어섰지만, 줄카에게 부림을 받는 용아들과 다를 바 없는 존재에 불과하다.
그래서일까? 이렇게 차이가 나는 이유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군. 허나 자네 역시 그렇겠지.”
왜 나와 다르냐고 소리라도 칠 것인가. 이해할 수 없는 거에 대해 화를 내는 것만큼 우스운 짓도 없을 것이다. 자이드라 멕시스는 그러려니 받아들였다. 그리고 군터 크렘보르가 이 이야기를 자신에게 직접 하는 이유에 대해 생각했다.
“거창하게 벌일 생각은 없는 모양이군.”
이 도시에 오래 머물 생각은 없다. 줄카에게서 들을 이야기만 다 듣고 나면 속히 타라냐드로 돌아갈 계획이었다. 아마도 길어야 닷새. 그런데 군터 크렘보르가 직접 찾아와, 아직은 비밀스럽게 유지해야 할 이야기를 먼저 건네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미 충분히 오랫동안 기다렸으니까.”
현 가주가 멀쩡히 살아 있는데 후계자에게 자리를 넘긴다. 그 자체만으로도 화제가 될 법한데, 한창 위세를 떨치는 권력가가 아닌가. 그야말로 세상의 이목을 끌어당길 터. 하물며, 내전이 막 끝나고 외세와의 일전을 앞둔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이런 대사건이라.
그나마 이런 비슷한 상황에서는 쓸데없는 혼란을 막기 위해 힘 있는 이들을 증인으로 세우는 경우가 많다. 힘 있는 자들의 인정을 받음으로써 잡스러운 것들의 개입을 사전에 차단하는 것이다.
그리고 때마침 지금, 이 도시에는 군주와 총독이 와 있다. 증인으로 써먹기에 이보다 적합한 인선이 있을까.
“흐음.”
거기까지 생각을 끝낸 자이드라 멕시스는 뻣뻣하고 거뭇해진 수염을 쓸어 만졌다.
“나쁘지 않군. 그나저나 너무 서두르는 것이 아닌가? 만약 전하와 내가 자리한다고 해도, 말들은 나올 수밖에 없을 게야.”
“녀석이 감당할 일이다.”
고저없는 딱딱한 목소리가 어쩐지 퉁명스럽게 들렸다. 나는 할 만큼 했다는 건가. 이쪽에게 긍정의 답변을 강요하는 것 같은 눈빛에서는 약간의 피로와 짜증이 느껴지는 듯했다.
“그래. 어려운 일도 아니니.”
이것도 빚이라면 빚이겠지만, 심경이 편치 않은 것 같은 초월자에게 굳이 그에 대해 생색을 내고 싶지는 않았다. 그가 그 공포스러운 거인왕을 상대하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했다.
‘작은 크렘보르라.’
어차피 크렘보르와는 동맹이다. 엄밀히 말하면 군터 크렘보르와의 동맹이었지만, 작은 크렘보르도 백치는 아닐 것이니 멕시스와의 관계를 유지하고자 할 터. 그렇다면 그의 시작부터 함께하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생색은 그때 내도 될 것이고.
“그래. 가주 자리까지 물려주고 나면, 이제 자네는 어쩔 셈인가?”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