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6화
죽은 아비가 살아 돌아온다면 어떨까. 자식으로서 기뻐해야 할까? 당연히 그래야 할 것 같지만, 그라모트와 로우렌 형제의 머릿속은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그날. 그곳에서 그들은 아비의 얼굴을 보았다. 점점 흐릿해질 기억을 뒤지거나, 혹은 꿈속에서나 볼 수 있을 거라 여겼던 그 얼굴. 그것은 분명 그들이 기억하는 그 얼굴 그대로였다.
잘못 본 줄 알았다. 정신이 어떻게 되어버렸거나, 아니면 눈이 어떻게 잘못돼서 뭔가 착각을 한 것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들의 아비는 살아있었다. 그것도 모자라 이제껏 그들과 함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사람이라 할 수 없었다. 하긴, 사람이 어찌 죽었다 살아날 수가 있겠는가.
그렇다면 저자는 누구인가. 진정 그들의 아비가 맞는가? 아비의 얼굴을 하고 있다 하여 그를 그들이 기억하던 아비라 할 수 있을 것인가? 껍데기만 뒤집어썼다 해서 본질이 바뀌지는 않는다.
‘…분명해.’
하지만 그들은 알고 있었다.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자연스레 알 수밖에 없었다. 몇 개의 기괴한 얼굴들이 불룩이는 가운데, 점점 살덩이 속으로 모습을 감추는 아비의 얼굴. 그 시선이 그들에게 닿았을 때. 그들은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저것은 그들의 아버지다. 할렌이라 불렸으며, 그들이 식은 몸에 기름을 붓고 태웠던 그 사내였다.
“잊어라.”
사라지기 전. 그는 그들을 보며 말했다.
“나도 잊었으니.”
그 한 마디만을 남기고, 그는 사라졌다.
* * *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느냐.”
“형님과 같은 생각.”
그라모트와 로우렌은 오랜만에 서로를 마주하고 앉았다. 그들 사이에는 한참 동안 아무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그들은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으나,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는 몰랐다.
기쁨은 없다. 곤혹스러움과 슬픔, 그리고 분노만이 서로 바쁘게 자리를 바꿔댈 뿐.
“죽은 자는 그가 기록한 삶에 따라 상벌을 받는다. 그 가운데 신에 대한 헌신이 두드러지는 자는 신이 그를 위해 안배한 자리에 오르니, 그 영광을.”
“영원토록 누리리라.”
교단의 경전에 나오는 구절이지만, 아마 다른 종교들에도 비슷한 말이 있을 터였다. 사람은 무지에 속는 법이며, 세상 어떤 사람도 모르는 것이 사후의 일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을 현혹하는 모든 종교는 죽은 뒤의 이야기를 최대한 그럴듯하게 풀어낸다. 죽음이 끝이 아니며, 그렇기에 신에 대한 헌신으로써 사후를 준비하라고 속삭이는 것이다.
두려우면서도 달콤한 그 말은 강력한 힘을 가질 수밖에 없다. 로우렌은 죽음 뒤에 기다리고 있다는 신의 안배 따위는 믿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성직자들이 하는 말들을 믿지 않는 것이지만, 어쨌거나 그가 종교적 가르침에 심드렁한 것은 사실이었다.
죽음이라.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사실 무척이나 두려웠다. 그렇기 때문에 의식적으로라도 더 생각지 않으려고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언젠가 바라지 않아도 어련히 찾아올 끝을 걱정하느니, 당장 누릴 수 있는 것이나 원 없이 누려보자는 생각이었을지도.
“내가 본 것을 믿어야 할지, 사실 아직도 모르겠다.”
“나도 그렇소.”
일단 그들이 본 것이 정말 그들의 아비가 맞다 치더라도 걸리는 점은 한두 개가 아니었다. 도저히 사람이라고 볼 수 없었던 그 기괴한 모습도 그렇고, 마지막에 남겼던 말도 그렇고.
‘잊으라고?’
처음에는 웃음이 나왔던 것 같은데, 이제는 그마저도 없다. 잊으라고? 부모 자식의 관계가 잊으라 한다고 잊을 수 있는, 그런 보잘것없는 것이었던가?
“하아.”
울티노는 사라졌다. 아니, 죽었다. 아간투스베록을 상대하던 그 전투에서 전사했다. 그렇게 알려졌다. 진실을 아는 이들은 그곳에 있던 몇 안 되는 이들 가운데서도 극히 일부뿐. 그리고 그중에는 입을 가볍게 놀릴 만한 이는 없었다.
울티노는 죽었다. 하지만 할렌은, 그들의 아비는 여전히 이 도시에 있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음습한 어딘가에서 몸을 돌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미 다른 얼굴과 다른 이름을 쓰며 활동 중일지도 모르고.
“아무래도 우리끼리 이러고 있는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는 것 같소.”
“어쩔 셈이냐.”
로우렌이 몸을 일으키자 그라모트도 덩달아 일어섰다. 직감적으로 동생이 심상치 않은 짓을 벌이려 한다는 것을 눈치챈 것이다.
“몰라서 물으시오? 궁리해도 나오지 않는 답을 얻으려면 답을 아는 자에게 가야지.”
“너 설마.”
그라모트의 눈이 큼지막하게 뜨였다. 그러자 로우렌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뭘 그리 놀라는 척을 하시오. 어차피 형님도 같은 생각이었잖소. 단지 배짱이 없었을 뿐. 늘 하는 생각인데, 정말로 그 덩치가 아깝소.”
* * *
“…….”
군터는 자신을 찾아온 할렌의 두 아들을 내려다보았다. 장남 그라모트는 눈을 깔고 있었고, 차남 로우렌은 고개를 빳빳이 든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안색이 창백하고, 어깨가 조금씩 떨리고는 있었지만, 어쨌거나 그와 당당히 시선을 마주했다.
이 자리에 오기까지 적잖은 고민을 했을 터. 그 끝에 세운 각오이니 쉽게 꺾일 정도로 약하지는 않으리라.
“아버지는 어디 계십니까?”
“잊으라고 하지 않았던가.”
로우렌이 입술을 깨물었다. 한 마디를 뱉기 위해 심호흡을 몇 번이나 거듭했다. 군터는 의도적으로 기세를 돋구어 그를 위압했다. 할렌의 차남. 기질 자체는 약하지 않으나 몸이 따라주지 않는 녀석이니 이 정도만 해도 제대로 서 있기도 버거울 터. 그런데도 녀석은 기를 쓰고 버텼다.
“잊으라 하면 잊어야 합니까? 사람의 마음이 그렇게 간단한 것이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게 안 되니 문제지요.”
느릿하고 힘겹지만 할 말은 다 한다.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어떻게든 말을 이어가는 모습이 역시 할렌의 아들다웠다.
“녀석이 원치 않으니, 나도 해줄 말은 없다.”
“아버지도 그렇고 성주님도 그렇고, 참 쉽군요. 뭐든지 마음먹은 대로. 다른 것은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이.”
칙칙한 두 두 눈에 불길이 일었다. 비록 그 말은 목구멍을 통해 나온 것이지만, 군터는 그 한 마디에서 불같은 분노를 느꼈다.
로우렌의 옆에서 잠자코 있던 그라모트가 순간 몸을 움찔했다. 동생의 무례한 언사에 저도 모르게 반응한 것이리라.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말을 하지 않고, 똑바로 눈을 마주하지도 않지만 그 역시 동생과 비슷한 마음이라는 것이다.
“할렌의 삶은 이미 한 번 끝났다.”
“알고 있습니다. 성주님께서 하신 일이겠지요.”
길게 말하고 싶지 않았다. 사실, 왜 이 녀석과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어야 하는지부터가 의문이었다. 그가 접견 요청을 받아들인 것은 오직 할렌 때문이었다. 이 녀석들이 할렌의 자식이기 때문에.
할렌은 녀석들을 잊으려 노력하고 있다. 그래야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지금의 할렌은 과거의 그가 아니다. 죽음을 겪는다는 것은, 거대한 강물에 몸을 담갔다가 나온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모든 것이 변한다. 나 자신도, 나를 둘러싼 세상도.
모든 것을 잊고 모든 것을 새롭게 받아들여야 한다. 그 과정에서 마지막까지 괴로움을 안기는 것은 역시 혈육의 정이다. 내가 세상에 남긴, 나의 씨앗. 그것에 대한 미련은 좀처럼 쉬이 떨쳐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의 할렌은 너희가 알던 할렌이 아니다.”
“직접 보고 확인하겠습니다.”
“그럴 수 없다.”
“…….”
단호한 대꾸에 로우렌이 이를 악물었다. 그때, 지금까지 침묵을 고수하던 그라모트가 나섰다.
“그것은 명령입니까?”
“뜻대로 들어라.”
“알겠습니다. 허면, 저희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철부지들의 무례를 탓하지 않으심에 감사드립니다.”
말을 마친 그라모트가 로우렌을 끌고 나갔다. 로우렌은 아직 할 말이 꽤 남은 듯했으나 형의 손을 뿌리치지는 않았다.
“…….”
그들이 물러나고, 군터는 생각했다.
접견은 그리 길지 않았다. 누군가를 설득해야 하거나, 원하는 것을 얻어내야 하는 자리도 아니었다. 그저 하는 말을 듣고, 적당히 거절하기만 하면 되는 간단한 자리였다. 그런데 그런 간단했던 시간이 상당히 어렵게 느껴졌다.
녀석들이 아무 말도 못 하도록 찍어누르려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었다. 실제로 로우렌을 기세로 적당히 압박하기도 했었고. 하지만.
‘정말, 얼마 남지 않았군.’
어째서인지는 알고 있다. 마치 점점 덩치가 커져가는 아이가 더는 몸에 맞지 않게 된 옷을 억지로 입고 있는 것과 같다.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몸에 걸치고 있으니 답답할 수밖에.
답은 하나뿐이다. 몸을 옥죄는 옷을 벗으면 된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지금 당장은 안 된다. 아니. 정말 그런가? 군터는 그날. 자신을 똑바로 마주한 채 분을 삭이던 보리스의 얼굴을 떠올렸다. 거기에 금방 자신을 추궁하던 할렌의 허약한 아들놈의 모습이 더해졌다.
오랫동안 끌어온 고민. 결심은 예술가의 영감처럼 갑자기 찾아왔다.
“보리스를 불러라.”
“예.”
문밖을 지키던 병사의 걸음 소리가 빠르게 멀어졌다.
* * *
“이 자리. 탐이 나느냐?”
“…….”
갑작스레 불려온 보리스는 부친의 느닷없는 물음에 순간 답을 망설였다. 물론 이 뜬금없는 물음에 저의 따위는 없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세상은 믿지 않을 테지만, 그의 부친은 솔직한 사람이다. 솔직함만으로 따지면 그와 견줄 수 있는 이는 세상에 몇 되지 않으리라. 그의 부친은 차라리 입을 다물면 다물지, 거짓이나 말장난을 입에 담지는 않는다.
“예.”
“너를 위해서 맡아둔 자리다. 나는 그저, 네가 준비를 마칠 때까지 지키고 있었을 뿐.”
“허면, 당장 제가 내어달라고 말씀드린다면 내어주시렵니까?”
“그래.”
“…….”
다시 입을 다문 보리스의 표정이 기묘하게 변했다. 조금씩 다양하게 변한 끝에는 허탈함만이 존재했다.
“그 자리가, 아버지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습니까?”
“짐작했으리라 생각한다만.”
“짐작하는 것과 직접 확인하는 것은 다르지요. 하!”
침묵이 길어졌다. 보리스는 몇 번이고 무슨 말을 하려다가 도로 속으로 삼켰다. 입술을 깨물던 그가 다시 입을 연 것은 꽤나 시간이 흐른 뒤였으나, 군터는 같은 자세로 가만히 그를 기다려주었다.
“자리를 넘기시면, 그 뒤에는? 아버지는 무엇을 하시렵니까.”
“그것은 내 일이다.”
“예. 그렇겠지요. 괜한 것을 여쭈었군요.”
* * *
한마디만 하면 되는데, 그게 왜 이리 어려울까. 꽤 오랫동안 바라온 순간인데, 이 한마디만 하면 그 바람이 이루어지는데.
망설임의 이유를 모르겠다. 하지만 모른다고 해서 망설이지는 않으리라.
“주십시오.”
“그러마.”
어렵게 뱉은 말에, 답은 싱거울 정도로 간단하게 돌아왔다.
부친의 얼굴에 처음으로 감정이 돌았다. 목석같은 얼굴에 잠깐 스친 바람의 이름은, 후련함이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