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5화
군터는 보리스의 그 말이 투정처럼 느껴졌다. 대꾸할 가치도, 이유도 없는.
그는 보리스의 격한 반응을 이해할 수 없었다. 무엇이 문제인가. 할렌을 되살린 것? 할렌의 자식들은 다시 만난 아비 앞에서 넋이 나간 듯했지만, 보리스가 보이는 반응은 그 외의 이유가 있는 듯했다.
“뭐가 문제냐.”
“아버지. 당신에게 있어…죽음은 끝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직접 죽음을 극복하신 적도 있으시니, 저희가 생각하는 죽음과 당신이 생각하시는 죽음이 다른 것은 어쩌면 당연할 겁니다. 하지만…….”
줄카의 시선이 느껴졌다. 대화는 보리스와 나누는데, 신경은 그쪽이 더 쓰였다. 줄카는 그들 부자의 언쟁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다. 원치 않게 구경거리가 된 것 같아 마음 한구석에서 불쾌감이 일었다. 군터는 그런 감정의 변화를 보리스에게 내비치지 않도록 마음을 다스리고자 노력했다.
“이해하지 못한다 하셨지요. 그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아버지. 제가, 저희가 당신을 이해하지 못하듯이 당신도 저희를 이해하지 못하십니다.”
“…….”
“우리는 목숨을 걸고 싸웠습니다. 간밤에 목숨을 잃은 이들이 얼마나 되는지 누구도 모를 겁니다. 그들이 오직 아버지를 위해 싸웠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그들 모두가 크렘보르를 외치며 죽어갔습니다. 그들의 죽음이…아무런 의미도 없었다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게냐.”
“여쭙고 싶은 겁니다. 그들의 죽음이…아무런 의미도 없는 개죽음이었습니까?”
보리스는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 눈빛은 당당하고, 도전적이었다.
* * *
보리스는 그의 부친이 솔롬의 통치자로서, 지배자로서 다소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이는 능력이나 자격 같은 자질의 문제가 아니었다. 어찌 감히 그런 생각을 하겠는가. 지금의 솔롬은 오직 부친의 손으로 이루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는데.
하지만.
부친에게서는 그 어떠한 마음도 느껴지지 않았다. 굳이 애착 같은 것이 아니더라도 좋다. 어떤 것이라도 좋다. 도시를 자신의 돈 주머니처럼 여기는 탐욕도, 치장의 수단처럼 여기는 오만이라도 좋다. 그 어떤 것이든, 이 도시를 어떤 형태로든 마음에 두고 있다는 뜻일 테니까.
그런데 부친에게서는 아무 느낌도 받을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마음이 너무도 깊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것이라 여겼으나, 점점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다.
부친은 아무 생각이 없는 것이었다. 마음에 두지 않으니 자연히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것일 뿐이었던 거다.
믿기 힘들고, 인정하기는 더더욱 힘들었던 그 사실을 어렵게 받아들이고 나서야 보리스는 부친을 일부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솔롬이라는, 이제는 판니른에서 손꼽히는 도시조차 부친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다. 그렇기에 부친은 성주로서 알맞지 않다. 그런데 그는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어째서?
‘나 때문이지.’
모를 수가 없다. 부친의 마음이 비어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부터 자연히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 의미도 없지는 않았다.”
“하하. 그렇습니까?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요.”
부담감과 책임감이 동시에 어깨 위로 올라앉은 것도 그때부터였다. 혹자들의 말처럼, 아직은 후계자에 불과한 자가 벌써부터 주인이라도 된 양 설치기 시작했던 것도 그때부터였고.
“제가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셨지요. 그 말씀대로입니다. 저는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너무 어렵거든요. 노력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이것은 사실, 유치한 반항에 불과했다. 억눌러왔던 무언가를, 더는 참지 못하고 토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혼자 헛웃음을 머금던 보리스가 잠시 망설이다 어렵게 입을 뗐다.
“저는…아버지에게 짐이었습니까?”
순간. 언제나 무심하게 가라앉아 있던 눈이 약간의 이채를 띠었다. 아니, 어쩌면 아닐지도 모른다. 그냥 그렇게 믿고 싶었던 탓에 순간적으로 잘못 본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
곧장 돌아온 답은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았다.
* * *
[내가 목소리로 말을 하지 않는 이유를 아나?]
엄밀히 말하면 줄카만이 아니라 이제껏 군터가 만난 모든 초월자가 그랬다. 그들은 멀쩡히 육성을 낼 수 있으면서도 굳이 머릿속을 울리는 기이한 방식의 소통을 고집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더 편하기 때문이지. 그것은 곧 육성을 이용한 소통이 그만큼 불편하다는 뜻이고.]
언젠가 헤이모라에서 가볍게 이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물론 그때도 지금처럼 줄카가 일방적으로 대화를 주도했었다. 군터에 비하면 까마득할 정도로 오래 산 이 나이 많은 초월자는 가르침을 주는 데 있어 상당히 헤펐다.
[이런 방식에는 거짓이 없지. 서로의 마음이 닿으니 진실할 수밖에. 반면 목을 거쳐 내는 말은 얼마든지 거짓이 섞일 수 있다. 그런 것을 재주라고 여기기까지 하니 사람의 말은 그 자체로 위험한 무기라 할 수 있지 않겠나.]
사람이 무기를 드는 이유가 무엇일까. 둘 중 하나일 것이다. 나를 지키기 위해서. 혹은 다른 이를 위협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 두 가지 이유는 사실 다르지 않다. 결국 약하기 때문이다. 무기를 들지 않고서는 남을 위협할 수도, 스스로를 지킬 수도 없을 만큼 약하기 때문에. 그렇기에 굳이 거추장스러운 무기를 드는 것이다.
결국 유약함이다. 유약함을 가리기 위해 무기를 들지만, 어디까지나 잠시 가리는 것일 뿐. 근본적인 극복과는 무관하다. 무기를 드는 자들도 그것을 이성적으로든 본능적으로든 알고 있다. 하지만 알면서도 거추장스럽기만 한 무기를 놓지는 못한다. 그들은 그 무기가 주는 얄팍한 위안에 어느새 중독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어리석지만, 그들을 비난할 수는 없다. 그들은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택한 것일 뿐이니까. 그들의 세상은 작고 약하다. 그들은 눈앞에 놓인 것 밖에 보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것 밖에 이해하지 못한다.
[아무리 가르쳐도 그들은 이해하지 못해. 평생 땅 위를 달렸고, 앞으로 그럴 짐승들이 하늘을 나는 새의 감각을 어찌 이해할 수 있겠나. 저들은 우리를 이해하지 못해. 우리 또한 저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나는 아니오.”
[아직은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곧 그렇게 될 거야. 잊게 될 테니까. 망각이 꼭 기억에만 작용하리라 생각지 말게. 사실 망각의 힘은 기억보다는 마음에 더 강하게 작용하지. 기억하기에 이해한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곧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거야.]
군터는 반박하지 못했다. 사실 그도 줄카의 말이 틀리지 않음을 알고, 아니 직감하고 있었다.
[혈육에 대한 애착이나 미련은 마지막까지 우리를 붙드는 강력한 힘이지.]
붙들린다는 것. 그건 곧 자유롭지 못함을 의미한다. 즉, 짐이다.
[자네는 특별해. 어쩌면 그 녀석만큼이나 특별할지도 몰라. 분명 어설픈 면모가 있는데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내가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뛰어나거든.]
할렌에 대한 이야기였다. 줄카는 군터가 할렌을 되살린 것에 대해 큰 관심을 드러냈다. 어쩌면 그는 이번 싸움에서 죽어간 수하들을 되살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군터가 그에 대해 묻자, 줄카는 즉시 부정했다.
[그럴 마음은 없네. 설령 그럴 마음이 있다고 해도 어차피 불가능할 것이야.]
그러면서 줄카는 용아의 영혼은 특별, 아니 특수하다고 했다. 그들은 저마다 줄카의, 용의 피를 받아들였다. 그 피는 그들의 영혼을 변질시켰고, 일반적인 생물들에게 적용되는 법칙을 일정 부분 벗어나게 만들었다.
[그들은 이미 내게 흘러 들어왔다. 그들은 이제 존재하지 않아. 내 일부가 되었을 뿐.]
군터는 줄카를 보았다. 약간의 씁쓸함? 허무함? 흐릿한 감정의 조각이 헛것처럼 잠시 그를 맴돌다 사라졌다.
“결국 다 떨쳐버리게 될 거라고 했지. 하지만 정작 당신조차 아직 다 털어내지는 못한 듯하오.”
[그럴지도. 하지만 나조차 내가 무슨 얼굴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군.]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 줄카의 표정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줄곧 같았다. 군터는 역한 냄새를 들고 온 바람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당신의 숙적을 처리했지. 이제 만족하시오?”
[만족? 그런 것을 바라고 한 싸움이 아니야. 놈은 내 적이었지만 결국 놈도 노괴의 뜻대로 움직인 것에 불과해.]
“당신의 진정한 적은 황도의 그 노괴란 말인가?”
[그자 역시 거인 녀석과 같아. 우리가 이룩한 것을 부정하고, 뒤엎으려 하지.]
“그렇다 한들, 상관있나? 당신 역시 이 제국에 애착은 없잖소.”
[물론 그렇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 나라는 우리의 창조물이다. 좋든 싫든 우리가 이 나라를 세우기 위해 노력했던 것은 부인할 수 없어. 그것을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없앤다 한들 무엇이 변하겠나?]
군터는 줄카가 진심이라는 것은 알았으나,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고 무엇을 원하는지는 몰랐다. 알고 싶지도 없었다.
“그래서, 그와 대적할 셈인가?”
[그래. 하지만 단지 그때문만은 아니야. 그 노괴는 전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거든. 거인 놈보다는 덜하지만 영 불쾌한 작자야.]
“당신과 사이가 좋은 자가 있기는 했소?”
[있었지. 룬차이. 쿠엘단 그 녀석과도 나쁘지 않았고.]
공교롭게도 모두 이제는 없는 이들이었다.
[쉽지는 않을 거야. 아마 이번보다 더 힘들겠지. 함께 하겠나?]
“내가 왜. 당신의 적일 뿐이다.”
[네 적이기도 해. 결국 그자는 이 나라를 혼란에 빠드릴 거거든. 지금도 평온하지는 않지만 앞으로는 지금보다도 훨씬 혼란스러워질 거야. 그 혼란은 이 땅까지도 집어삼키겠지.]
이 도시도. 네 자식들도.
군터는 대답 대신 긴 한숨을 뱉었다.
* * *
줄카의 예언은 적중했다. 서부 전선에서 황자 자콥 트라소프의 승전 소식이 전해졌다. 국지전인 전투에서의 승리가 아닌, 길고 길었던 황좌의 전쟁에 종지부를 찍는 승전 소식이었다.
무샤라트 트라소프의 목이 잘렸다. 몇 번이고 거듭한 패배에도 불구하고 용케 몸을 빼며 끝까지 항전하던 황손은 그를 따르던 귀족 무리의 손에 최후를 맞이했다. 황손의 수급은 그를 배반한 귀족들의 손에 들려 황자 자콥 트라소프의 앞에 놓였다.
황자는 마지막까지 그를 괴롭히던 조카의 죽음에 웃지 않았다. 그는 배반자들에게 상 대신 칼을 내렸고, 적이었던 조카의 장례식까지 열어주었다. 그리고 그는 그 자리에서, 길었던 내전의 종식을 선언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나흘 뒤. 대협곡을 통해 아바시스의 군대가 제국에 들이닥쳤다.
[이 나라에 대한 아바시스 놈들의 원한은 상당히 깊지. 그곳에도 머리를 쓸 줄 아는 놈들이 있을 테니 아마 눈치챘을 것이야.]
황제가 없다. 군주들 역시 제 역할을 하지 않는다. 거기에 내전을 막 끝낸 터라 힘까지 빠져 있다.
제국으로부터 생존하기 위해 뭉친 자들. 국가를 설립한 후로도 줄곧 언제 다시 쳐들어올지 모르는 제국 때문에 숨죽이고 경계해야 했을 터.
그 오랜 세월 동안 축적된 불안과 분노.
[잔뜩 고인 기름에 불씨 하나 던졌을 뿐이겠지.]
대단한 일은 벌이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제국은 하나의 국가가로서 존재하기에는 너무나 거대했다. 그 부자연스러운 것을 억지로 지탱하던 다리가 몇 개 무너졌으니, 이제 자연스럽게 무너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단지 그뿐이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