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터-1034화 (1,034/1,064)

1034화

끝났다.

“…….”

군터는 ‘으득’거리며 조금씩 회복되는 팔에서 눈을 떼고 걸음을 옮겼다.

사방에 널브러진 살덩이들. 저마다 꿈틀거리는 그것들에게서 미세한 생기가 느껴졌다. 꺼지기 직전의 불꽃처럼 희미하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눈길이 갔다.

[무모했다.]

지저분하게 널브러진 자잘한 것들과 달리, 그럭저럭 사람의 형체를 유지하고 있던 큼지막한 덩어리가 꿈틀거렸다. 몇 차례 꿈틀거린 그것은 사지를 만들었고, 머리를 만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진흙으로 대충 빚은 것처럼 밋밋한 몸뚱이. 그 와중에 그나마 얼굴만이 뚜렷했다.

“송구…합니다.”

짤막한 한 마디를 뱉는 동안에도 몇 번이나 얼굴이 변했다. 형태를 유지하는 것은 열린 입뿐이었다.

“시간이 더 필요한 것 같구나.”

너무 짧은 시간 동안 너무 많은 영혼을 받아들였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확실히 무리였다. 탈이 나는 것이 당연했다. 오히려 그런 상황에서도 할렌이 어떻게든 주도권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 대견할 지경이었다.

“저는.”

“말할 필요 없다. 다스리는 데에만 집중해라.”

할렌이 바라보던 곳. 군터의 시선도 그곳으로 향했다.

아간투스베록. 그는 여전히 쓰러지지 않고 있었다. 그가 아직 숨쉬고 있다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살아있다. 저 정령들도 그것을 알고 있기에 그의 곁을 떠나지 못하는 것이리라.

* * *

끝까지 버티던 것들이 이제야 비로소 흩어진다. 곳곳에서 열기를 토하던 용아들의 시신이 이제야 식기 시작한다. 육신은 이미 죽었으나 전의를 잃지 않던 영(靈)이 이제야 안식을 취하는 거다. 참으로 뜨겁고도 지극한 마음이 아닌가. 헛헛하던 줄카의 마음 한구석에서 묘한 감정이 일었다.

진흙투성이가 된 땅을 밟을 때마다 발자국이 깊숙이 새겨졌다. 줄카는 죽은 듯 조용한 숙적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그들의 기준으로 열 다섯 걸음. 그 정도까지 다가갔을 때, 아간투스베록의 고개가 들렸다. 그의 두 눈은 한창 불덩이를 쏟아내는 화산과 같이 강렬하고 뜨거웠다. 죽음과 어깨동무를 한 상태에서도 저런 열기라니. 그러나 놀랍지는 않았다. 그저 더없이 어울린다는 생각뿐이었다.

[나를 비웃으려는가.]

[그럴 리가.]

줄카가 고개를 저었다. 여기까지 와서도 오만함을 드러내는 상대에 대해 진절머리를 치는 것 같기도 했고, 굳이 몸짓으로까지 강하게 부정하는 것 같기도 했다.

[너를 비웃는 것은 나를 비웃는 것과 같다.]

아간투스베록의 고개가 다시 떨어지고 어깨가 들썩였다.

[구차하게 끌 필요 없지. 어차피 피차 미련은 없지 않나.]

[그래. 미련 따위는 없다.]

삶에 집착하던 시절은 옛적에 지났다. 사느냐 죽느냐는 중요치 않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사느냐,어떻게 죽느냐일 뿐.

[오판했다.]

[오만했던 게지.]

[그래. 그랬을지도.]

거인이 세상을 누비던 때가 대체 언제인가. 지금은 그저 불청객, 아니 그보다 더 취급이 안 좋은 침략자일 뿐이다. 당장 정령들부터 기회가 생기니 득달같이 달려들지 않았나.

침략자 주제에 환영받으리라 여겼다. 오판이었다. 알고 있었음에도 무시했으니 오만이었다. 어쩌면 거기서부터 이미 이 싸움의 승패는 정해졌던 것일지도 모른다.

[의외로 후련하군.]

언제나 활활 타오르던 불꽃이 지금은 차분하게 식었다. 그러나 식었다 해서 꺼진 것은 아니다. 아직은.

[그래.]

줄카는 마지막을 준비했다. 그가 가지고 있던 용골(龍骨)은 이미 모두 꺼냈다. 조금 전에는 잠시나마 뼈에 깃든 용의 혼을 깨우기까지 했다. 명백한 무리였다. 정령들의 시선이 이따금씩 이쪽으로 향하는 것이 느껴졌다. 조금만 더 틈을 보였다가는 이쪽도 물어뜯을 기세였다.

콱!

손에 쥔 뼛조각이 검으로 변한다. 이처럼 초월자의 의지는 세상에 직접 간섭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전능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쾅!

한 순간 아간투스베록의 모습이 사라졌다. 변함없이 강하고, 빠르다. 거침없이 저돌적인 것까지도, 마직까지 그 다웠다.

부러질지언정 휘지는 않을 것 같았던 거검이 뱀처럼 휘었다. 줄카는 뻗어오는 거친 힘을 빗겨내며 채찍처럼 변한 검으로 지나쳐가는 아간투스베록의 옆구리를 베었다. 이제까지와는 달리, 이번에는 칼날이 손쉽게 깊숙이 파고들었다.

피가 길쭉하게 튀었다. 아간투스베록은 쩍 갈라진 옆구리에는 시선도 주지 않았다. 그는 가만히 서 있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 미친놈. 녀석이 부럽군.]

불꽃이 사그라졌다. 한때는 세상 전체를 태울 것처럼 거세게 일었던 불이었다.

* * *

분노할 대상을 잃은 괴물들이 일제히 날뛰었다. 하나뿐이었던 적이 사라지니 그들은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닥치는 대로 들이받고, 물어뜯고, 할퀴었다. 덕분에 몇 안 남은 용아와 병사들은 그리 어렵지 않게 그들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었다.

지긋지긋한, 끔찍한 악몽 같았던 싸움이 끝났다. 그런데 어째서 전혀 기쁘지가 않을까. 보리스는 엉망이 된 전장과, 그 한복판에서 이 모든 난리가 자신들과는 상관없다는 듯 여유로운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아니, 두 사람이 아니다. 저들이 한 일을 보았는데, 저들을 어찌 사람이라 하겠는가.

결국 이 싸움은 저 둘과 쓰러진 하나로 인해 시작됐고, 저들로 인해 끝났다.

갑자기 모든 것이 허무하게만 느껴졌다. 모든 것이.

죽을 둥 살 둥 여기까지 왔다. 이 하룻밤 사이에 무수한 병사들이, 백성들이 죽었다. 이 도시에 밴 피냄새가 다 가시려면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러야 할까.

팔과 다리를 잃고서도 숨이 끊기는 그 순간까지 성벽을 사수한 병사들이 있다. 그들의 그 처절한 죽음을 숭고하다고 이야기했다. 그러한 죽음을 독려하기까지 했다. 한 점 의심도 없었다. 그렇게 배웠고, 그렇게 행해왔으니까. 그런데 지금, 그 철저했던 믿음이 바닥에서부터 흔들렸다.

대체 무엇을 위해서 그리했는가. 그저 휩쓸렸을 뿐. 처음부터 이 싸움에 우리의 자리는 없었다.

‘그대들의 죽음으로써 우리의 도시가, 우리의 가족이 산다.’ 그런 거짓말들을 수 없이 해대며 그들을 괴물들에게 내몰았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그 스스로도 거짓된 믿음에 한 몸을 던졌다는 것일까.

“…공자님.”

“따라오지 않아도 된다.”

“그 무슨 말씀을.”

로우렌 등이 굳은 얼굴을 하고서 바짝 따라붙었다. 보리스는 고집을 피우는 수하들을 더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럴 여유가 없었다.

‘대체.’

그리 멀지 않다. 그런데 왜 이리 유난히도 멀게 느껴지는지.

‘아니. 아니지.’

생각해보면 늘 그랬다. 언젠가부터. 항상.

군터 크렘보르의 아들로 산다는 것. 모르는 이들은 그것을 축복받은 삶이라 말할 것이다. 물론 전혀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정확히 들어맞는 것 또한 아니다. 군터 크렘보르의, 그의 후계자로서의 삶에는 밖에서는 볼 수 없는 그늘이 존재한다. 세상의 기대에 대한 부응도 그렇지만, 종종 찾아오는 초라함과 자괴감이 특히 문제였다.

자식은 부모의 등을 바라보며 큰다고 하던가.

적당히 넓은 등은 지향해야 할 목표가 되고, 세상의 풍파를 가려주는 안락한 그늘이 된다. 하지만 그 정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면, 그 등이 시야를 다 가리고도 남을 정도로 거대하다면, 그것은 더 이상 목표도 바람막이도 될 수 없다.

어느 정도 머리가 굵어지고 난 후, 처음 그런 감정을 느꼈을 때. 보리스는 자책했다. 자신의 나약함을 탓하며 더욱 강해질 것을 다짐했다. 그러나 아무리 마음을 다잡아도, 아무리 노력해도 거대한 벽 같은 부친의 뒷모습은 여전히 견디기 힘든 압박감으로 다가왔다.

남 몰래 자책하고, 또 자책하던 어느 순간. 결국 보리스는 받아들였다. 자신은 결코 부친을 뛰어넘지 못할 것이며, 같은 수준에 이르지도 못할 것이라는 것을. 부친과 같은 방식으로는 부친에 근접할 수조차 없다. 그러니 방법을 바꾼다. 그의 부친이 창칼로써 이름을 날리고 문의 기틀을 다졌다면, 자신은 그와 다른 방식으로 대업을 이루겠다.

어쩌면 회피요 도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보리스가 택한 삶의 방식이었다. 보리는 자신이 견딜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 견뎠고, 노력할 수 있는 만큼 노력했다. 보리스는 자신이 단 한 순간도 나태하거나 소홀하지 않았노라고 자신했다. 그것이야말로 그가 지닌 몇 안 되는 자부심 중 하나였다. 스스로에게 당당해질 수 있도록 그를 지탱하는 정신적 기둥이기도 했다.

‘아버지.’

하지만 스스로에게는 당당해졌을지언정, 부친에게까지 그러지는 못했다. 살갑지 않은 부자관계는 당연히 이유가 아니다. 사실 비단 그만의 문제도 아니었다. 누구라도 부친의 앞에서는 긴장하고, 움츠러들기 일쑤였으니.

‘아버지.’

그 눈길은 예나 지금이나 이쪽을 향하지 않는다. 보리스는 계속 걸음을 옮겼다. 그의 시선이 이제는 제법 가까워진, 기괴한 형상을 하고 있는 울티노의 뒷모습에 향했다.

‘이제 놀랍지도 않아.’

그것은 무의식적으로 그에게서 멀리 돌아가려 하는 스스로에게 건네는 최면과도 같았다. 온갖 괴물들과 싸웠다. 이쯤 되면 평범한 군인인 줄 알았던 아군이 사실은 본모습을 감춘 괴물이라고 해도 그리 놀랄 것도 없지 않은가. 어쨌거나 저 사내는 얼마 전까지 함께 등을 맞대고 싸운 동료였다.

“후우.”

아무렇지 않은 척, 대범하게 지나치고자 했다. 하여 일부러 그의 얼굴은 쳐다보지도 않고 지나쳤다.

“음?”

그런데, 뒤쪽에서 바짝 따라오던 이들의 발걸음 소리가 뚝 멈췄다. 따라오지 않아도 된다 말하였으나 고집을 부리며 따라붙은 녀석들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보리스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보았다.

창백해진 얼굴의 그라모트와 로우렌. 그런 그들의 시선이 못 박힌 듯 박혀 있는 곳. 그곳에는.

“아…….”

덩치 좋은 사내 두엇을 붙여 놓은 것 같이 거대해진 체구의 사내. 그의 몸 곳곳에서 무언가가 꿈틀대고 있었다. 그 중에는 쭉 뻗은 팔 같은 것도 있었고, 눈 같은 것도 있었으며, 얼굴 같은 것도 있었다. 그것들은 때때로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희미해지기도 했고, 반대로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뚜렷해지기도 했다.

보리스가 본 것은, 그라모트와 로우렌 등이 본 것은 후자 중 하나였다. 유난히 뚜렷하게 보이는 몇 개의 얼굴들. 그중에서도 얼굴이 자리잡고 있어야 할, 큼지막한 머리의 한가운데에서 두어 개의 다른 얼굴들과 자리 다툼을 하듯 기괴하게 꿈틀대는 얼굴 하나.

그것은 그들이 절대 잊을 수 없는 얼굴이었다.

어찌 잊겠는가. 두 사람의 아버지였고, 한 사람의 은인이었다.

“아…아.”

눈과 코가 꿈틀거렸다. 그 얼굴은 울퉁불퉁한 살속으로 숨으려는 듯 연신 비틀리고 뭉그러지다가 곧 모습을 감췄다.

“아버지?”

그라모트와 로우렌이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반면 보리스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달렸다. 가슴이 답답했다. 터질 듯 뛰는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아버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보리스는 고함을 질렀다. 이제까지 단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다. 부친에게, 그것도 감정을 담아 언성을 높인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런 것은 생각도 나지 않았다. 참기 힘든 의구심과, 어떤 불덩이 같은 무언가를 토해내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대체…대체 이건!”

목청껏 외쳤기 때문일까. 소리치는 목소리에 담긴 감정을 느꼈기 때문일까. 그제야 부친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부친과 대화를 나누는 듯했던 군주 줄카의 시선 역시도.

“뭐가 말이냐.”

“숨기지 마십시오. 저는 이제 어리지도, 어리석지도 않습니다.”

“숨긴 적 없다. 널 무시한 적도 없고.”

“그럼 어째서…….”

“이해하지 못할 테니까.”

“예?”

잔뜩 날이 서 있던 목소리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조금의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메마른 시선에는 아무것도 담겨있지 않았다. 그저 텅 비어 있었다. 보리스는 그 공허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그것이 어쩐지 섬뜩했고, 두려웠다.

* * *

결과에는 원인이 있듯, 행동에는 이유가 있다. 그 이유는 때때로 타자(他者)에게 이해 받기도, 이해 받지 못하기도 한다. 당연한 일이다. 만약 모두가 타자를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다면, 어찌 그들은 서로 다른 존재라고 하겠는가.

그러나 비록 그렇게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고 해도, 사람들은 서로를 일정 부분이나마 이해할 수 있다. 모욕당한 자가 분노하는 것을 이해하고, 자식을 얻은 부모가 기뻐하는 것을 이해하듯, 공감할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에 대해 이해한다. 그들이 같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똑같이 눈 두 개, 입 하나 달린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의 영혼과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너는 이해하지 못한다.”

어느 순간 기쁨이 더 이상 기쁨이 아니게 되고, 슬픔이 더 이상 슬픔이 아니게 되었을 때. 군터는 언젠가 이런 순간이 오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할렌의 자식들이 저기 굳어 있는 이유. 그것은 그가 할렌을 사람이 아닌 모습으로 되살렸기 때문인가? 아니면 그저 죽은 아비가 살아있기 때문인가? 몇 가지 이유를 추측할 수 있지만, 그들의 심정이 어떨지는 모르겠다. 사실, 관심이 가지 않는다. 그들에게 공감하려고 해도, 그들을 이해하려 해도 잘 되지 않는다.

“우습군요.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 겁니까? 저자는 할렌님입니까? 이 싸움은 이제 끝난 겁니까? 어째서 이곳에 계신 겁니까? 왜 이곳에서…….”

보리스는 할 말도, 궁금한 것도 많아 보였다. 참으려고 노력하는데, 그럼에도 다 참지 못해 감정의 찌꺼기들을 뱉어내고 있었다.

“우리는…뭘 한 겁니까? 아버지.”

주변은 온통 검고 붉었다. 역겹고 섬뜩한 피가 만연한 이곳에서, 오직 보리스만이 그 오싹함에 몸을 떨었다. 그는 이 공간의 일부인 것처럼, 주인인 것처럼 자연스럽고 당당하게 선 아비를 바라보며 물었다.

“당신에게 저는, 저희는 뭡니까?”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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