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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1033화 (1,033/1,064)

1033화

군터는 할렌이 가까이 왔다는 것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초월자들의 기운으로 인해 감각이, 특히 기감이 흐려졌지만 그렇다 해도 할렌은 그와 영혼으로 이어진 권속이었기에 다른 것들보다 더 선명히 느낄 수 있었다. 그렇기에 할렌의 모습이 눈에 보이기도 전부터, 군터는 할렌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는 분명 할렌에게 보리스를 지킬 것을 명했다. 그런데 어째서? 할렌이 그의 명령을 저버렸을 리는 없다. 설령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을 맞닥뜨렸더라도 그 자리에서 싸우다 죽었으면 죽었지, 물러날 할렌이 아니었다.

[와라.]

그러나 아간투스베록이 할렌을 응시했을 때. 달리는 할렌의 몸이 기괴하게 변하기 시작할 때. 군터는 이가로프를 떠올렸다.

할렌과 이가로프는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영혼의 군집체라는 점에서는 같지만 영혼 중 하나가 되어버린 이가로프와는 달리 할렌은 확실하게 자의식과 주도권을 갖고 있다. 군터 자신이 그것을 의도하며 힘을 빌려주었기에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확실한 주도권을 가지고 있다 해도 받아들인 영혼들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는 없다. 받아들인 영혼이 더 많고, 더 강할수록 영향력은 더 커진다. 하물며 그 많고 강한 영혼들이 하나가 된 것처럼 복수만을 염원한다면 그것을 거부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멈춰.]

닿지 않았을 리는 없다. 분명 들렸을 것이다. 단지, 아간투스베록이 조금 더 빨랐을 뿐.

“으아아아!”

할렌이 달렸다. 달리는 와중에 몸이 기괴하게 변형을 일으켰다. 완전히 이성이 날아간 것처럼 보였다.

“…….”

군터는 감각이 희미한 팔에 억지로 힘을 줬다. 순간의 휴식이라도 간절한 몸이 비명을 지르지만,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다. 아간투스베록의 시선은 여전히 할렌을 향해 있었다. 어떻게든 그 시선을 돌려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할렌의 영혼은 다시 한 번 갈기갈기 찢기고 말 테니.

발을 떼려던 순간. 머릿속이 울렸다.

[무리할 필요 없다.]

군터가 할렌에게 그러했듯, 줄카도 군터를 말리려 했다. 그러나 군터는 할렌이 그랬듯, 멈출 수가 없었다.

[위험하다.]

[네가 위험해지는 것보다는 낫지. 아무것도 잃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런 싸움이다. 알고 있을 텐데.]

군터는 조금 전, 유난히 거칠던 용아가 죽었던 것을 떠올렸다. 용아의 대장쯤 되는 녀석인 듯했는데, 그런 녀석이 머리가 박살이 나 죽었음에도 줄카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그가 얼마나 마음의 중심이 잘 잡혀 있는지 확인할 수 있던 순간이었다.

[감당할 만하다.]

여기저기 갈라지고 떨어져 나간 살덩이가 일어섰다. 아간투스베록에게 용감하게 달려들었다가 영혼까지 찢겨버린 마물의 육신이었다. 군터는 그것을 일으켜 세우고 그 위에 올라탔다. 비록 멀쩡했을 때 부리던 기이한 능력들은 사용하지 못할 테지만, 군터는 이 거대한 덩치가 족제비처럼 잽싸게 움직였던 것을 기억했다. 이제는 다 식어버린 몸뚱이지만, 그 몸놀림을 반만 재현할 수 있어도 어지간한 말보다는 나을 터였다.

[아직 다 버리지 못했군.]

즐거움. 아련함. 그리고 희미한 씁쓸함.

군터는 엉거주춤 달리기 시작한 마물을 더욱 재촉했다.

* * *

쿵! 쿵!

머리가 뭉개지고, 앞다리 한쪽이 반쯤 잘려 나간 마물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달려든다. 거기에 죽음의 냄새를 풀풀 풍기기까지 하니, 아간투스베록도 시선을 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왜?

부자연스럽다. 굳이 저 살덩어리를 일으켜 세운 이유가 무엇인가.

본능, 그보다 더 본질적인 울림과 이끌림에 의해 돌아가는 싸움이다. 그렇기에 이 싸움은 더없이 격렬한 와중에 더없이 자연스러웠다. 서로가 서로를 물어뜯고, 상처 입는 과정까지도.

저 애송이 놈은 숨을 돌려야 한다. 먼저 친다면 그것은 이쪽이어야 한다. 그것이 자연스럽다. 그런데 놈은 도리어 제가 먼저 움직였다. 이것은 부자연스러울 뿐 아니라 억지스럽기까지 하다.

저 애송이 놈은 바보가 아니다. 놈이 억지를 부린다면 거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터. 그리고 지금, 떠올릴 수 있는 가능성은 한 가지뿐.

[혈육인가? 아니면 아끼는 부하라도 되나?]

아, 사람의 마음이라! 초월자에 거의 다다른 놈이 품기에는 너무 보잘것없는 약점이 아니던가. 우습고, 애석하다.

후욱-!

깊은 심호흡에 대지의 기운이 딸려왔다. 대지는 만물의 근원. 오랜 세월 이 세상을 지배한 거인들 역시 결국은 대지의 소생. 거인들은 대지에서 끊임없는 생명과 힘을 얻었다. 그 피를 이은 아간투스베록 역시 그러했다. 대지와 맞닿아 있는 한, 그는 끊임없이 살아났다.

대지의 숨결을 한 번 받아들임으로써 고통을 덜고 새살을 얻는다. 힘이 돌아온다. 만족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으나,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리라.

쿵!

마음먹은 순간 몸은 움직인다. 그의 걸음은 단순한 걸음이 아니다. 너른 대지가 그의 뜻에 맞추어 힘을 빌려주니, 그의 한 걸음은 도움받지 못하는 열 걸음보다 앞선다. 비록 요사스러운 정령들이 훼방을 놓지만, 위대한 혈통과 대지의 결속을 끊지는 못한다.

[물러나라!]

날파리처럼 들러붙는 정령들을 일갈하여 밀어냈다. 잠시뿐이라는 것을 안다. 그가 대지로부터 힘을 얻듯, 저것들 역시 이 땅에서 힘을 얻는다. 아니, 저것들과 이 땅은 하나라고 해도 좋을 정도다. 그렇기에 놈들을 밀어내기는 쉬워도 떨쳐내기는 어려우며, 몰아칠 수는 있어도 없애기는 힘들다.

“으아아아-!”

괴성을 지르며 달려드는 놈. 처음 보는 놈 같은데 어딘가 익숙하다. 잔뜩 화가 나 있는 것으로 보아 기억할 가치 없는 적수였던 모양이다. 그런 놈들은 수두룩하기에 특별할 것은 없다. 하지만.

우득! 우드득!

신체 변이가 평범한 수준을 넘어섰다. 이미 변한 부위가 또 다시 변하는 것은 예사에, 신체 구조자체가 본래의 신체와는 연관성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기괴하게 변하기도 했다.

저 비정상적이고 비효율적인 신체 변이가 의미하는 바는 분명하다. 놈이 의도한 바가 아니라는 뜻이다. 필시 놈에게서 느껴지는 혼잡함과 조잡함에서 비롯된 것일 터.

특이한 놈이다. 지긋지긋하게 들러붙던 그 놈도 그렇고, 영혼의 군집체라니. 쉬이 볼 수 없는 것을 한 전장에서 둘이나 보게 될 줄이야. 어쩌면 애송이 놈이 부리는 죽음과 관련이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실로 흥미로운 힘이다. 이 싸움을 끝내고 나면 천천히 알아볼 만한 가치가 있다. 지저분한 이종의 힘과는 달리 어떻게 써먹을 방도가 있을지도 모른다.

쿵!

걸음을 빨리하다 한 순간 도약을 위해 힘을 주었다. 거리가 제법 있지만 이 정도라면 한 번의 도약으로 좁힐 만하다. 단번에 살점을 찢고, 영혼을 손에 쥐리라. 군집체라 한들 중심이 없으면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하니, 단번에 중심을 잡아채면 될 일이다. 그 후에 뒤따라오는 애송이를 맞이한다. 보아하니 저 특이한 놈을 꽤 신경 쓰는 듯하니 놈을 단번에 처리한다면 감정의 동요를 이끌 수 있을 터. 그러면…….

그러면.

그러면…뭐지?

허공을 격하고 날아가는 중. 문득 떠올렸다.

생각이 너무 많지 않은가? 어째서 이리 생각을 많이 하지? 분명 아까만 해도 모든 것을 잊은 채 싸움에만 전념하지 않았던가. 그럼으로써, 이 땅의 모든 것에 맞서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런데 어째서 지금은 이렇게나 생각이 많지? 왜 생각을 하고 있는가. 아니, 왜 생각에 빠져드는가?

아간투스베록은 문득 깨달았다.

방금까지 그는 그의 사고(思考)를 앞섰다. 하지만 지금, 그는 그의 사고에 따라잡혔다. 어쩌면 뒤쳐졌을지도 모른다. 그는 그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그렇게나 약해진 것이다.

콰직!

내뻗은 손이 가시처럼 튀어나오고 구멍처럼 움푹 파인, 상대의 손 비슷한 것을 그대로 갈랐다. 두터운 팔 전체를 통째로 가르고도 모자라 몸통까지 파고들었다. 그러나, 처음 의도한 바를 이루지는 못했다. 그의 손은 상대의 몸을 찢지도, 영혼을 쥐지도 못했다. 살점에 파묻힌 손끝에서 심장의 거센 박동이 느껴졌다.

[이놈!]

비대한 몸뚱이가 갈라졌다. 한데 뭉쳐 있던 양옆으로 넓게 퍼졌다. 그것은 흡사 밀집해 있던 군대가 치고 들어온 적을 맞아 날개를 펴는 것 같았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의도였다.

퍼진 살점, 아니 뼈의 끝에서 날카로운 가시가 수도 없이 생겨났다. 그 하나하나에서 형언하기 힘든 악의가 묻어났다.

[감히!]

수백 개, 어쩌면 그 이상의 가시가 그의 가죽을 두들겼다. 수백 마리의 벌레가 살점을 파고들기 위해 주둥이를 들이대는 듯했다. 그 악의는 끔찍했으나, 그 각각의 힘은 거인의 가죽을 뚫기에는 너무나 보잘것없었다.

쾅!

주먹질 한번에 살점의 날개에 크게 구멍이 뚫렸다. 그의 두 다리는 여전히 대지에 닿아 있었다. 모든 거인의 어머니는 여전히 그녀의 자손에게 힘과 생명을 선물해주었다.

[이런 얕은 수작이라니!]

내뻗은 손이 살점을 쥔다. 그 안에서 악의를 발하는 영혼들도 함께 쥐었다. 그것들이 내지르는 분노에 찬 비명이 똑똑히 들렸다. 위협과 저주를 위해 내지른 비명이었겠으나, 그것들이 지금 그에게는 승리의 찬가처럼 들렸다.

쉽지 않은 싸움이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승리는 분명하다. 단 한 순간도 의심하지 않았다.

갸아아악-!

쫙 펴진 네 개의 손가락이 네 개의 영혼을 찢었다. 중심은 어디에 있지? 분명 이것들을 뭉치게 하는 놈이 있을 터.

[어디냐.]

다시 뒤덮으려 드는 살덩이를 향해 꼬리를 휘둘렀다. 그러나 바로 그 다음 순간 그는 더 이상 꼬리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푸욱!

머리위에서부터 드리우던 그늘이 사라졌다. 동시에 후끈한 고통이 찾아왔다. 뒤쪽. 등이다. 하지만 어떻게?

통증을 잇는 이질감. 더러운 기운이 파고든다. 거대한 존재가 으르렁대는 듯했다. 그는 이 고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이놈!]

등에 달린 것을 붙들고 그대로 부러뜨렸다. 찢어지는 비명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순간 머리가 멍해져 균형을 잃고 주춤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콰앙!

굉음과 함께 상당한 압력이 전신을 두들겼다. 이를 악물고 버티고, 이어 온 힘을 다해 밀어냈다. 수십, 수백의 영혼이 내뿜는 단말마가 그의 영혼에 얼룩처럼 묻었다.

쒜엑-!

정신없는 와중. 그가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은 기적이라고 밖에 할 수 없었다. 어쩌면 그조차도 간과했던 그의 본능이, 거인의 감각이 각성한 것일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그는 다시 등 뒤를 노리는 매서운 기척을 감지했다. 이 일격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직감이 그의 정신을 지배했다.

피해야 한다. 하다 못해 몸을 틀어 막기라도 해야 한다.

그가 본능의 경고를 따라 반응하려던 그때.

* * *

그저 휘둘릴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그와 하나가 된 많은 이들이 그것을 원했기에.

모든 것이 희미한 와중이었기에 어떻게 여기까지 이르렀는지는 알 수 없었다. 원하던 바를 이루지 못했음은 알 수 있었다. 여기까지가 한계라는 것도.

‘이제 어쩔 셈이지?’

적은 앞에 있다. 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힘을 보태주지. 친구.]

잔뜩 지친 무언가가 그에게 다가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그것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에게 스며들었다.

[이제는 그저 맡길 수밖에 없군. 부디.]

갑작스레 커져버리고, 이제는 텅 빈 그릇에 새로운 무언가가 담겼다. 그를 친구라 칭한 낯선 존재와 그 외의 이들.

그들이 그에게 바라는 바는 분명했다. 그가 바라는 바와 같았다.

푸우우-

모든 것을 토했다. 그것이 얼마나 의미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의 적이 크게 노하는 것만큼은 느낄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 할렌은 만족했다.

* * *

덜컥!

아간투스베록의 몸이 굳었다. 그는 가슴을 뚫고 나온 창 날을 내려다보다, 그것을 뽑아내려는 듯 손을 가져갔다. 그러나 그 손은 창날에 닿지 않았다. 느릿하게 가슴깨까지 다다른 손은 툭 튀어나온 창날처럼 검게 변해 있었다.

우우웅-!

은은한 빛무리가 우두커니 선 아간투스베록의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이전과 달리, 그는 잠잠했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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