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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1032화 (1,032/1,064)

1032화

줄카의 요청대로 끈을 끊고 열쇠를 없앴다. 그것이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는 모르나, 아간투스베록에게 적잖은 피해를 줄 수 있으리라는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분노한 아간투스베록의 일격을 마주했을 때. 군터는 뭔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창과 손톱이 부딪쳤는데 튕겨 나가는 것은 창뿐. 거기에 심심하면 터져 나오는 포효는 온몸을 위축시켰다. 변함없는 힘. 변함없는 기세. 아간투스베록은 조금도 약해지지 않았다. 직접 그와 맞부딪치며, 군터는 그렇게 느꼈다.

“아악!”

미처 몸을 피하지 못한 용아가 아간투스베록의 관란에 휩쓸렸다. 갈고리 같은 손톱이 그의 어깨를 찍었고, 붙들린 몸뚱이에 꼬리가 파고들었다. 복부가 완전히 관통 당한 용아는 몇 번 가늘게 몸을 떨다가 축 늘어졌다. 이걸로 벌써 여덟. 군터가 직접 본 것만 여덟 명 째였다. 용아가 아닌 평범한 병사들의 피해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아간투스베록만이 아니라 몰려든 괴물들까지 일부 난동을 피워대니 어느 순간부터는 피해를 가늠하는 것이 무의미해졌다.

피해는 점점 커지고 있다. 그런데 아간투스베록은 여전히 힘이 넘친다. 군터의 시선이 자연스레 줄카 쪽을 향했다.

[열쇠는 사라졌고 연결은 끊겼다. 놈은 더 이상 힘을 보충하지 못해.]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듯한데, 내 착각인가?]

[남은 힘을 쓰고 있을 뿐이다. 오래 가지는 않아.]

줄카는 단언했다. 아간투스베록은 남은 힘을 쓰고 있을 뿐이며, 저 힘이 고갈되는 순간이 이쪽의 승리라고. 하지만 과연, 그때까지 이쪽이 버틸 수 있을까?

‘해보면 알겠지.’

땅에 깊숙이 처박힌 몸을 빼냈다. 전신의 뼈와 근육이 비명을 질렀다. 몸을 다 빼낸 군터가 호흡을 고르며 고개를 들었다. 눈이 그의 통제를 벗어나 파르르 떨렸다. 육신이 정신의 통제를 벗어나려 하고 있었다. 그만큼 몸에 쌓인 충격이 크다는 뜻.

한계는 이미 찾아왔다. 초월자의 그릇으로 부족함이 없다고 느껴온 육신이 이런 꼴이 되리라고는 단 한 번도 상상해본 적이 없건만.

오-오오오!

저 앞에서 줄카와 아간투스베록이 맞붙었다. 용과 거인. 옛 시대에 자취를 감춘 강대한 존재들이 전력으로 부딪치고 있다.

‘부족하군.’

삐걱거리는 몸을 추스르며, 군터는 자조했다.

오만이라 생각지 않았었는데, 지금에 와서 다시 생각하니 오만이었다. 눈이 닿는 것만이 세상의 전부라 여기며 너무 일찍 마음을 놔 버렸다.

“끄응!”

마지막으로 이렇게 용을 썼던 것이 언제였던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창을 지팡이처럼 쓰며 몸을 완전히 세웠다. 두 초월자, 아니 두 군주는 여전히 육박전을 펼치고 있었다. 줄카는 예의 그 강력한 검을 몇 자루나 바꿔 쥐며 응전했지만 그럼에도 아간투스베록의 기세를 꺾을 수는 없었다. 서로 상처를 입고, 입히다 결국 줄카가 튕겨 나갔다. 이제 그의 몸을 지키는 갑옷은 없었다. 그나마 형태를 유지하던 내갑까지도 찢기고, 구멍 뚫려 완전히 기능을 상실했다. 이제 그는 피를 흘렸다. 영롱한 빛이 감도는 거뭇한 자주색 피였다.

구어어어-!

아간투스베록이 비틀거리는 줄카에게 다가가려 할 때. 상처입은 마물 한 마리가 괴성을 내지르며 달려들었다. 마물은 흉악할 정도로 크고 날카로운 뿔을 앞세우며, 아간투스베록을 향해 돌진했다.

[미련하고 약해빠진!]

거목의 몸통처럼 두꺼운 뿔은 아무리 거대해진 아간투스베록이라도 우습게 볼 수 없을 정도로 위협적이었다. 그러나 그는 두꺼운 뿔에 비하면 초라해 보이는 손 하나만으로 마물의 돌진을 멈춰 세웠다. 그의 손이 뿔에 닿은 순간, 마물은 멈췄다. 마물은 기를 쓰고 앞으로 나아가려 했으나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했다.

콰직!

멈춰선 마물의 머리 위에 벼락이 떨어졌다. 따귀를 치듯 내리친 손에 마물의 머리가 으스러졌다. 생명의 불꽃이 사그라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단념해라. 모두 무의미할 뿐이니.]

패하고 쇠락한 것들이 복수하겠답시고 달려드는 꼴이라니. 처음에는 화가 났고, 이후로는 조금 재미있기도 했지만 이제는 그저 지긋지긋하기만 했다. 보이는 대로 다 쳐죽였건만 어느새 또 이렇게 꼬였단 말인가. 얼마나 더 꼬일 것인가.

챙!

아간투스베록이 보지도 않고 몸을 틀었다. 그의 감각과 동일하게 반응한 꼬리가 뾰족하게 다가온 죽음을 쳐냈다.

[너!]

그의 눈에 혀를 차며 물러나는 애송이가 보였다.

[그래. 그랬지.]

저 애송이. 이 초라한 도시의 주인. 놈이 그의 군대를 망가뜨렸고, 열쇠를 부쉈다. 어느 것 하나 용서할 수 없지만, 이상하게도 화는 나지 않는다. 그저 적의와 살의만이 들끓을 뿐.

그가 놈을 향해 움직인 것은 본능이었다. 사실, 한참 전부터 그를 움직이는 것은 본능뿐이었다.

* * *

[지금이다.]

머리가 부숴져 무너져 내리던 마물이 다시금 몸을 일으켰다. 으스러진 머리에서 뭉개진 살덩이들이 꿈틀거렸다. 희미해진 마물의 영혼 대신 음습하고 기괴한 영혼이 마물의 육신에 깃들었다.

이가로프였다. 정확히는 이가로프가 섞인 혼잡한 영혼이었다. 아간투스베록에게 덤벼들기 전. 군터는 그 기괴한 영혼의 희미한 부름을 들었다.

이가로프는 이제 정상적으로 소통하지 못했다. 원령과 사람, 괴물과 마물의 영혼이 수 없이 뒤섞인 영혼은 이제 정상적인 영혼이라 볼 수 없었다. 제대로 사고조차 할 수 없는 그것을 움직이는 것은 그들의 유일한 공통점. 거인왕을 향한 적의와 복수심이었다.

[으아아아아-!]

아간투스베록은 다시 한 번 자신을 막아서는 지긋지긋한 적에게 분노를 내뿜었다. 땅이 뒤집히며 머리 없는 마물의 몸이 가라앉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아간투스베록의 주변에 널브러져 있던 시신들이, 떨어져 나간 살점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으아아아!”

비명인지 기합인지 모를 우렁찬 소리. 아간투스베록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그는 길쭉한 돌, 혹은 바위의 파편을 무기처럼 쥐고 휘둘렀다. 머리 위쪽에서 날아들던 카니악의 철퇴와 그것이 부딪쳤을 때, 비명을 지르며 나가 떨어진 것은 카니악이었다.

‘무기를 들었다?’

군터가 눈을 좁혔다. 어쩐지 집채 만하던 아간투스베록의 몸집이 조금 줄어든 것 같았다. 아니, 확실했다. 확실히 크기가 줄었다. 혹, 드디어 힘이 빠지기 시작한 것일까.

확신할 수는 없다. 아간투스베록의 기세는 여전히 사나웠다. 스멀스멀 그에게 다가가던 시체와 살점들이 비명을 질렀다. 정확히는, 거기에 깃들었던 영혼들이 비명을 지르며 고통에 몸부림쳤다. 어중간한 존재는 분노한 거인왕에게 다가가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다가갔다. 제 몸뚱이가 타들어가는데도 뛰어드는 부나방처럼.

의미 없고 허무한 발악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무의미하고 허무한 마지막이, 다른 존재들에게는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진 듯했다.

웅-!

익숙하지 않은 울림. 영감을 타고 전해지는 존재감.

그들은 한참 전부터 곳곳에 존재했다. 그들이 이곳을 바라보고 있음을 항상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을 신경 쓴 적은 단 한 순간도 없었다. 그들이 이 싸움과 관계없는 외부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실제로도 그들은 외부자였다. 지금까지는.

우웅-!

커져가는 울림. 이제는 모두가 그 울림을 듣고, 느꼈다. 그 순간 그들은 움직임을 멈췄다. 언제까지고 살육을 이어갈 것 같던 아간투스베록마저도 그랬다.

[사라져라. 잡스러운 것들.]

아간투스베록이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그러나 울림은 그치기는커녕, 오히려 점점 더 커지기만 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아직은 어둑한 허공에 점점이 빛무리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정령.

불청객의 흉험한 기세에 물러났던 그들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어떤 이들의 눈에는 그들의 출현이 신령스럽게 비쳤지만, 군터의 눈에 비친 그들은 피와 죽음의 냄새를 맡고 몰려든 새떼와 다르지 않았다.

* * *

우웅-!

정령에 대해 아는 이는 극히 드물다. 제대로 아는 이는 더욱 드물 것이고, 자세히 아는 이는 그보다도 더 드물 것이다. 군터도 그들의 존재를 스스로 느끼기 전까지는 정령에 대해 아는 것이 전무하다시피 했다. 기껏해야 옛 이야기, 혹은 지어낸 이야기 속에 간간이 등장하는 신령스러운 존재라는 것 정도가 전부였다.

그러나 지금. 정령들이 스스로 존재감을 드러내며 아간투스베록을 억압하는 광경을 보며 그들이 어떤 존재인지 알 수 있었다.

힘. 그리고 의지. 영혼들에게서 느껴지는 전부였다. 원령 같은 영체와는 달랐다. 정령들은 하나같이 연결되어 있었다. 땅과 하늘, 물과 바람, 심지어 그들끼리도.

아간투스베록의 위협에도 그들이 물러났을지언정 완전히 도망치지 않은 이유를 이제 알 것 같았다. 도망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도망칠 수 없었던 거다. 그들은 이 땅에 묶여 있는, 아니 이 땅과 하나인 존재들이기에.

우우웅-!

그들은 아간투스베록을 공격하거나 하지 않았다. 그저 주변에 몰려들어 존재감을 발할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많은 것이 움직였다.

거대한 흐름이 일었다. 죽은 듯 잠들어있던 거대한 존재가 몸을 일으키는 것 같았다. 그 존재는 반쯤 몸을 일으키더니 여전히 흉포함을 드러내고 있는 거인을 내려다보았다. 그 모습이 거대한 존재가 보기에는 마땅찮았던 것인지, 힘을 일으켜 그를 내리눌렀다.

그 과정을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억압. 눈을 뜬 세상이 오만한 거인을 억압했다.

[가만히 있어! 숨 죽여라! 이전과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거인이 반발했다. 그가 뜨거운 숨을 토할 때마다 빛을 발하던 정령들이 우수수 사라졌다. 바람에 가득하던 온기가, 피와 살점으로 목욕하고도 생기를 잃지 않던 땅이 메마르고 갈라졌다. 그래도 정령들은, 그들이 깨운 세상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들은 더 이상 거인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콰앙!

줄카가 달려들었다. 석검과 거검이 부딪쳤다. 서로 튕긴 두 자루 검은 각기 상대의 몸을 베었다. 줄카가 피 흘리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거인은 비틀거렸을 뿐, 물러나지도 무릎 꿇지도 않았다.

“던져!”

사슬이 거인을 옭맸다. 거인이 힘을 주니 사슬에 깃든 주술의 힘이 사라지고 사슬이 깨졌다. 달려들던 용아 서넛이 목이 잘리고, 팔이 뜯겨진 채로 나뒹굴었다.

“으아아!”

주인의 피, 부하들의 희생을 발판 삼아 뛰어오른 카니악이 철퇴를 휘둘렀다. 찌그러지고 부서진 철퇴가 거인의 어깨를 후려쳤다. 본래는 뒤통수를 노렸다. 빗나간 것은 아니었다. 마지막 순간에 감각이 흐려진 탓이었다.

콱!

어둠이 찾아왔다. 양쪽 옆머리를 누르는 괴력에, 카니악은 자신이 붙들렸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콰직!

머리가 사라진 용아의 대장. 두 번째 대장이 주저앉았다.

오-오오오!

거인은 이제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로 울부짖었다. 요동치는 그의 감정은 힘의 소용돌이가 되어 주변을 휩쓸었다. 더 많은 정령과 더 많은 생명들이 쓰러지거나, 주저앉거나, 물러났다. 그들의 의지가 아니었다. 강한 바람에 밀려나듯, 그저 힘에 떠밀린 것이었다.

쿵!

거인이 한 차례 크게 휘청거렸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확연히 작아진 손으로 땅을 짚었다. 그리고 어디론가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 또 다른 적이 모습을 드러냈다. 다른 놈들이 그랬던 것처럼, 놈 역시 뚜렷한 적의를 발하고 있었다.

[그래.]

거인은 자신도 모르게 읊조렸다.

[와라.]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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