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1화
그리 크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작지도 않은 힘. 군터의 창은 자연스레 그것을 끌어당겼다. 늘 그래왔듯, 꺼져가는 생명을 집어삼키려 했다. 하지만 창이 집어삼킨 그 힘을, 군터가 거부했다.
‘이것은 나와 맞지 않아.’
거인의 힘. 그것은 그 자체로 완전하다. 군터는 자신이 그 힘을 받아들일 수 없음을 알았다. 받아들일 수도, 다룰 수도 없다. 물과 불이 섞일 수 없듯, 이 강성하고 난폭한 힘 역시 그랬다. 거인의 힘은 거인이 아닌 그 누구도 다룰 수 없으리라.
지금만 해도 그랬다. 몸뚱이가 죽어 이미 사그라지기 시작했음에도 거인의 힘은 자신을 둘러싼 죽음을 맹렬히 배척하고 있었다. 절대 섞일 수 없다는 듯이. 이 반항적인 힘을 억지로 삼킨다면 얻는 것은 불편한 속뿐일 터.
‘버리면 그만이다.’
누군가에게 이 힘은 더 없는 보물일 것이다. 신비를 좇는, 신비를 일부라도 아는 이들이라면 누구라도 이 힘을 차지하기 위해 목숨을 내던질 것이다. 가치를 아는 이들에게 있어, 이 힘은 그만한 보물이었다.
그러나 군터에게는 아니었다. 그는 자신에게 반항적인 힘에 미련을 두지 않았다. 그는 맹렬히 저항하는 생명과 힘의 잔재를 단번에, 미련없이 부숴버렸다.
* * *
할 일은 마쳤다. 줄카와 그가 약속한 협력은 여기까지였다. 그러니 여기서 멈춘다고 해도 문제는 없다. 하지만 군터는 굉음과 괴성, 끔찍할 정도로 흉험한 기운이 몰아치는 곳을 향해 말머리를 돌렸다.
아간투스베록에 대한 호승심 내지는 복수심? 그것도 일부는 작용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렇다 해도그것이 주된 이유는 아니었다.
마음이 이끌렸다. 굳이 이유를 대자면 그뿐이었다. 열쇠를 잃은 아간투스베록의 반응을 직접 확인하고 싶은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뭐가 됐든 그를 직접 봐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인의 마음을 헤아린 것일까. 시체마는 쉬지 않고 달렸다. 너덜너덜하게 붙어 있던 살점이 끝내 떨어져 나갈 정도로 힘차게 달렸다.
[하하하하하!]
전장의 소리가 귀에 닿기도 전에 쩌렁쩌렁한 웃음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귀가 아닌 정신과 영혼에 닿는 웃음. 그 안에서 느껴지는 상실감과 분노, 살의는 하늘에서 울리는 천둥소리보다 더 강렬했다.
[좋아! 아주 좋다! 너와 나 둘 중 하나는 이곳에서 잠들 것이다!]
그 소리를 듣고도 한동안 더 말을 달리고서야 드디어 전장의 모습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맞서지 마라! 무조건 피해!”
두 초월자와 용아, 그리고 괴물들이 뒤엉킨 전장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두 초월자. 그 중에서도 아간투스베록이었다.
피와 살점, 그리고 온갖 기괴한 유해를 뒤집어쓰다시피 한 그는 분노와 살육의 화신이 되어 광란하고 있었다.
콰앙!
그는 주변의 모든 것을 휩쓸었다. 눈이 돌아간 괴물들은 그대로 휩쓸려 핏덩이가 되었고, 용아들은 바람이 일때마다 이리저리 몸을 날렸다. 그 광란의 폭풍을 정면에서 받아 치는 이는 줄카가 유일했다. 그들이 충돌할 때마다 주변의 모든 것들이 몸을 떨었다. 하늘에 닿는 기세가 서로 부딪치니 괴물이든 사람이든 영혼과 정신이 그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너를 무너뜨린 것은 너의 오만이다.]
[오만한 것은 네놈이지. 아직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다.]
아간투스베록은 겉으로 보기에도 정상이 아니었다. 굳건한 바위처럼 단단해 보이던, 그리고 실제로도 그렇게 단단했던 외피는 여기저기 갈라져 속살을 드러내고 있었고 힘이 넘치면서도 여유로웠던 몸짓은 한껏 지친 이의 그것처럼 불규칙적으로 흔들렸다.
반면, 그에 맞서는 줄카 역시 멀쩡하지는 않았다. 오래된 유물처럼 고풍스러운 외관의 갑옷은 반파되어 흉물스럽게 변했고, 그 안에 받쳐입은 내갑까지도 여기저기 상해 있었다. 군주의 무장(武裝)이니 평범한 물건은 아닐 것인데도 저런 꼴이라니. 잠깐 자리를 비운 동안 격전이 이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왔나.]
아직 주변의 괴물들과 용아, 그보다 멀리 떨어져 있던 병사들조차 군터의 접근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때. 줄카의 의성이 군터의 머릿속에 울렸다. 동시에 아간투스베록의 고개도 돌아갔다.
[발칙한 애송이. 끝내 저질러버렸군.]
들끓는 용암 같은 분노가 느껴졌다. 손도 댈 수 없을 만큼 뜨겁지만 사방으로 번지는 불꽃처럼 사납지는 않다. 군터는 그것이 의외였으나,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를 힐끗 노려본 아간투스베록은 곧 다시 줄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분노가 향하는 첫 번째 상대는 늘 정해져 있었다.
[이제 됐나? 원하는 것을 다 이루었으니 이제 만족스러운가?]
[다는 아니지.]
[그래. 마지막 하나가 남았겠군.]
거인이 웃었다. 그 웃음이 진해질수록 그의 전의와 살의도 덩달아 진해졌다.
[그래.]
줄카가 손을 뻗었다. 허공이 갈라지고, 또 하나의 길쭉한 것이 그의 손에 잡혀 빠져나왔다. 그것은 무기라고 하기에는 초라하고 둔탁해 보였으나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막대한 기운을 품고 있었다.
쿵!
거인이 먼저 땅을 박찼다. 그가 한 걸음씩 크게 내딛을 때마다 그의 발이 닿은 땅이 움푹 꺼졌다. 처음에는 눈으로도 쫓을 수 있었으나 네 걸음 째부터는 거대한 몸 전체가 흐릿해졌고, 여섯 걸음 째부터는 그마저도 볼 수 없었다.
쿵! 쿵!
여덟. 아니, 아홉 걸음.
거인은 목표에 닿았다. 줄카의 손에 들려 있던, 꼬챙이 같이 길쭉하던 것이 익숙한 거검의 형태로 변함과 동시였다.
콰직!
거인의 주먹이 찔러오던 검면을 후려쳤다. 검의 궤적이 틀어졌고, 거인은 조금 더 앞으로 움직였다. 저돌적인 돌진. 그대로 부딪친다면 줄카의 작은 몸은 그대로 으스러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의 다리가 줄카의 가슴을 찍기 직전. 거침없이 나아가던 거대한 몸이 그대로 굳기라도 한 것처럼 멈췄다.
[크아아아!]
거인, 아간투스베록이 거칠게 포효했다. 그러자 굳었던 그의 몸이 다시 움직였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줄카가 훌쩍 거리를 벌린 뒤였다.
쾅!
그런 줄카를 아간투스베록이 놓치지 않겠다는 듯 곧장 따라붙었다. 똑바로 달려나가는 그의 앞에서 한 차례 허공이 일렁였으나 잠시 속도가 줄었을 뿐, 방금처럼 몸 전체가 멈추지는 않았다.
[후.]
한숨. 군터에게는 분명 그렇게 들었다.
줄카의 기세가 일변했다. 방금까지 사냥감을 대하는 사냥꾼의 그것처럼 날이 서 있으면서도 냉정함이 느껴지던 그의 기세가 걷잡을 수 없이 부풀어 오르는 듯했다.
[힘을 과신하는군. 이제는 같은 조건이 되었는데 말이야.]
하늘을 가리켰던 검이 다가오는 아간투스베록의 움직임에 맞춰 떨어져 내렸다. 담백하고 깔끔한 내리치기. 단순한 동작 하나일 뿐인데, 아간투스베록의 흉험한 기세가 그 궤적을 따라 시원하게 갈라졌다.
콰직!
내뻗은 주먹이 그 궤적에 들어섰고, 갈라졌다. 주먹과 팔뚝에 그어진 선에서 피가 튀었다. 그러고도 기어이 앞으로 내민 주먹은 줄카를 강타했다.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들린 듯했다. 줄카의 몸이 뒤로 튕겼다. 이번에는 자의로 물러난 것이 아니었다. 아간투스베록이 다시 그 뒤를 쫓았다.
서걱-!
또 다시 허공에 선이 새겨졌다. 하나. 둘. 아니, 그보다 많다.
줄카의 검이 아간투스베록의 왼쪽 어깨를 베었다. 그에 질세라 두 개의 발톱이 피를 뿌렸다.
쿵!
아간투스베록과 줄카가 추락했다. 그들의 공방은 땅에 닿는 그 순간까지도 이어졌다. 두려움을 잊은, 혹은 미처 피하지 못하고 주변에서 어물쩍거리던 괴물들이 그들이 땅에 닿음과 동시에 고기조각이 되어 널브러졌다.
[아직 한참 모라자다!]
아간투스베록이 포효하며 발을 구르니 땅이 일어났다. 그 광경이 흡사 흙과 돌로 된 뱀이 대가리를 드는 것 같았다.
[마찬가지다.]
그에 줄카도 크게 한 발 내딛었다. 그러자 허공에서 열 개의 균열이 일더니 수십 개의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일부는 길쭉하고 일부는 돌조각처럼 작았으며, 또 일부는 적당히 길고 뭉툭했다.
푹! 푸푹!
균열에서 떨어져 나와 땅에 틀어박힌 그것들에서 희끄무레한 무언가가 흘러나왔다. 얼핏 보기에는 유령 같았으나 실제로는 전혀 달랐다. 군터는 그것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것들은 유령과는 비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하고 거대한 무언가였다.
[허깨비들 주제에 감히!]
아간투스베록이 일갈하며 팔을 휘둘렀다. 줄카의 일격에 크게 상했던 왼쪽 팔이었는데, 어느새 피가 멎고 상처도 흐릿해져 있었다.
바람이 일었다. 일갈을 맞은 희끄무레한 존재들이 움찔하며 멈췄다. 그들에게 전의는 없었고, 적의는 더더욱 없었다. 그들에게 이지는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초조한가.]
[허튼소리.]
줄카가 앞으로 나아갔다. 그가 쥐고 있던 거검에 균열이 일더니 곧 마른 잎사귀처럼 부스러졌다. 그는 부스러진 검을 버리고 아래로 손을 뻗었다. 마침 그의 발치에 있던, 금방 그가 소환한 수십 개의 무언가 중 하나를 쥐었다. 자그마한 돌멩이 같았던 그것은 줄카의 손에서 큼직한 검으로 거듭났다.
[끝을 보자. 네가 늘 원했던 것이 아닌가.]
[나만 원했던 것처럼 말하는군. 네놈 역시 마찬가지 아니었나.]
[그래. 맞아.]
두 초월자가 동시에 웃었다.
더 이상 그들 사이에 흉험한 기운은 흐르지 않았다. 비와 번개를 다 쏟아내고 조용해진 하늘처럼, 그들 사이에는 고요함만이 흘렀다.
‘서둘러라.’
군터는 시체마를 재촉했다.
할 일을 마치고도 이곳에 온 이유. 영문을 알 수 없었던 이끌림.
쿵!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이성을 놓고, 인내를 잊고, 자신이 부서져도 상관없다는 듯 거침없이 맞부딪치는 저 둘을 보니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무인의 호승심? 닮았지만 다르다. 그보다 더 오래되고 큰 무언가다. 마음 이전에, 본능 이전에 더 본질적인 무언가.
“하압!”
더 이상 다가갈 수 없을 정도로 내달린 시체마 위에서 뛰어올랐다. 두 손으로 창을 쥐고, 등을 보이고 있는 아간투스베록을 향해 찔렀다.
[감히!]
언제 등을 보였냐는 듯 돌아서서 자신을 맞이하는 아간투스베록을 보며, 군터는 눈을 빛냈다. 죽음을 머금은 창이 아간투스베록의 가슴 한복판을 찔렀고,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꼬리가 그의 옆구리를 꿰뚫었다.
* * *
‘이건…….’
연신 들려오는 굉음. 그보다 앞서 밀려오는 불길함.
보리스는 자꾸만 그의 발을 붙드는 두려움을 몇 번이나 뿌리친 후에야 비로소 보았다.
죄인들이 최후에 도착한다는 지옥. 그 지옥이 있다면 이렇지 않을까.
온통 거뭇한 핏빛. 사방에 널브러진 무수한 시체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보이는 것이라곤 오직 저 멀리서 맞붙고 있는 초월자들. 이 세상에 있을 리 없는, 있어서는 안 될 것 같은 자들과.
그들을 향해 다가가고 있는 한 사내의 뒷모습뿐.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