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0화
군터는 어렵게 발견한 끈을 놓치지 않기 위해 온 신경을 곤두세운 채 이동했다. 처음에는 두 다리로 직접 달려 이동했다. 그러다 중간에 목과 몸뚱이의 살점이 뜯겨 죽은 말을 발견했고, 즉시 그것을 일으켜 세워 올라탔다.
식은 몸뚱이의 말은 살아 있을 때보다 더 잘 달렸다. 비록 속도는 느릴지 몰라도 살아 있을 때와 달리 지치지 않으니 탈것으로서는 살아 있을 때보다 죽은 뒤가 더 뛰어났다.
어쨌거나, 군터는 시체마 덕분에 더 빠르게 끈을 쫓을 수 있었다. 처음 느꼈을 때는 제법 멀다 여겼던 거리가 빠르게 줄어들었다. 그러나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고 느낄 즈음, 갑자기 끈이 사라져버렸다. 말 그대로 갑자기, 깔끔하게.
그 순간에는 군터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멀쩡히 잘 다니던 사람이 한 순간에 장님이 되어버린다면 이러할까. 그는 잘 달리던 시체마를 멈추고 고민했다.
어떻게 된 것인가. 왜 갑자기 끈이 사라진 거지? 설마 아간투스베록이 한 일일까? 하긴, 그는 자신이 끈을 타고 열쇠를 찾으러 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꼬리를 자르듯 열쇠와 연결해둔 끈을 끊어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그렇다 해도 가깝다.’
거의 따라잡았다. 정말 약간의 시간만 더 있었더라면 분명 열쇠를 찾았을 것이다. 애석하게 됐지만, 낙담할 필요는 없다. 분명 열쇠는 이 주변 어딘가에 있다.
‘평범한 것은 아니겠지.’
열쇠라고 표현하기는 하지만 군주가 눈에 불을 켜고 찾으려 드는 물건이다. 결코 평범한 것일 리 없다. 어쩌면 물건이 아니라 전혀 다른, 어쩌면 그 이상의 무언가일지도 모른다.
‘보면 알 수 있을까.’
확신할 수 없다. 그러나 방금까지 아간투스베록과 연결되어 있었으니 빠르게 찾아낸다면 어떤 식으로든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닐지도 모르지만.
한 순간에 길을 잃은 군터는 일단 마지막으로 감지했던 방향을 향해 다시 말을 달렸다. 여기서부터는 감이고 본능이었다. 최대한 감각을 넓게 퍼뜨린 채 무언가 특별하거나 이상한 것이 있는지 살폈다.
그러던 와중. 그는 저 앞에 커다란 덩치의 괴조가 하강하는 것을 목격했다. 처참하게 파괴된, 그래서 조용한 이 주변에서 유일하게 눈에 띄는 광경이었다. 그래서 그쪽으로 다가갔다. 저 괴조를 상대한다면 어떤 식으로 싸워야 할지를 고민하면서.
본래라면 활을 들면 될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한 팔을 쓸 수 없는 상황. 그러니 창을 써야 할 것인데, 하늘을 나는 놈에게 창 한 자루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런데 결과적으로 그런 고민은 쓸모없는 것이었다. 괴조는 그가 가까이 다가가기도 전에 다시 높이 날아올랐고, 꼬리에 불이라도 붙은 것처럼 괴성을 지르며 빠르게 멀어져갔다.
그리고 놈이 떠나간 자리에는 웬 사내 하나만 덩그러니 남았다. 느릿하게 걸음을 옮기는 그를 보며, 군터는 사내의 얼굴이 눈에 익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러나 그가 정확히 누구인지, 어디서 봤는지, 왜 이곳에 있는지 따위는 궁금하지 않았다.
‘찾았다.’
그 사내에게서 아간투스베록과 같은 냄새가 났다. 정확히는 그의 기운이 풍겼다.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지만, 군터는 사내가 열쇠와 어떤 식으로든 관련되어 있으리라 확신했다.
그는 사내의 앞을 가로막았다.
“아…….”
사내가 그를 뒤늦게 발견하고는 나직이 탄식했다. 사내는 그를 알아보았다. 얼굴이 눈에 익다고 생각했던 것은 역시 착각이 아니었다.
“군터.”
자신을 일컫는 한 마디 말에서, 군터는 묘한 느낌을 받았다. 어쩐지 사내는 군터 크렘보르라는 이름을 줄여부른 것이 아니라, 군터 크렘보르 이전의 이름을 말한 것 같았다. 크렘보르라는 이름이 붙기 전의 옛 이름을.
“나를 아는가.”
“알다 마다.”
“나는 너를 모른다.”
얼굴은 어디서 본 듯하나 이름은 모른다. 분명 한 번은 만난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기억할 가치가 없다고 여겨 기억하지 않았을 터.
“아니.”
사내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의 감정이 동요하는 듯했다. 분노? 슬픔?
“너는 나를 알아야 한다. 배신자여.”
배신자?
군터는 순간 이놈이 무슨 말을 하는가 싶었다. 배신이라니? 순간 기억을 더듬었으나 떠오르는 바가 없었다. 그는 이제껏 배신을 당했으면 당했지, 누군가를 배신한 적은 없었다.
“헛소리를 하는군. 정신이 나가버린 건가?”
* * *
“헛소리를 하는군. 정신이 나가버린 건가?”
헛소리? 헛소리라고?
웃을 수 있다면 울고 싶고, 울 수 있다면 울고 싶었다. 그러나 둘 다 할 수 없었다. 몸은 통제를 벗어나 부르르 떨리고, 감정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격렬하게 요동쳤다. 그 격렬한 소용돌이 속에서 그는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이 자다. 이 자 때문에 모든 것이 꼬였다. 자신, 어머니, 그리고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아버지의 운명까지. 코누디스 일가의 비극은 이 자에게서 시작되었다.
“헛소리…라고.”
본래 복수심 같은 것은 없었다. 어쩌면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결코 크지는 않았다. 그가 이 땅에 온 것은 복수를 위해서가 아니라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그래. 사명이다. 그의 어머니가 그에게 부여한 사명. 잃은 것을 되찾는 것. 뒤틀린 운명을 바로잡는 것.
그것은 그의 생을 관통하는 중심이자 정체성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 사명을 부정당했다. 모든 것을 앗아간 자가 태연히 그것을 헛소리로 치부했다. 그의 삶, 그 전체를.
몸이 움직였다. 그것은 그의 의지가 아니었다. 그는 그저 이끌릴 뿐이었다.
‘그 자를 찾아. 네 운명을 되찾아라.’
어머니가 남긴 마지막 말. 그때는 몇 번이고 들었던 말을 마지막까지 반복하시는구나, 하고 넘겼었다.
그런데 지금 와서 떠올려보니 그 말은, 어쩌면 자신이 아닌 이 자에게 하려던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것은 저주가 아니었을까? 자신의 피로 이 자의 옷깃이라도 더럽히라는 저주 말이다.
뚝―
꿰뚫린 목에서 흘러내린 핏물이 땅에 닿았다. 그는 자신의 운명의 찬탈자를 올려다보았다.
하늘과 나란한 곳에서, 여전히 무심한 눈길이 떨어져 내렸다.
* * *
열쇠이거나, 그게 아니라면 최소한 열쇠와 관련이 있다. 그래서 이 미치광이 놈이 혼자 몸을 떨 때도 놈을 어찌 다뤄야 할지 고민했다.
그러나 놈이 갑자기 눈을 뒤집고 덤벼드는 순간. 군터는 놈이 열쇠라는 것을 확신했다.
‘어찌 한다.’
놈이 첫 발을 떼고, 다시 또 한 발을 떼는 동안 군터는 몇 번이나 고민을 거듭했다. 죽여야 하는가? 죽이면 어찌 되지? 열쇠가 사라지나? 설마 아간투스베록에게 돌아가는 것은 아니겠지? 아닐 것이다. 그런 거라면 아간투스베록이 왜 이놈을 살려뒀겠는가?
푸욱―
몇 번이고 거듭했지만, 그럼에도 고민은 길지 않았다. 고민을 끝낸 군터는 창을 내질렀고, 정확하게 뻗은 창 끝은 놈의 목젖을 갈랐다.
“크륵…….”
달려들던 몸뚱이가 가로막히기라도 한 것처럼 멈추고, 반쯤 뒤집혔던 눈에 다채로운 빛이 돌았다.
익숙했다. 죽어가는 자들이 대부분 보이는 반응이었다. 종국에는 허망함으로 향하는 감정의 여정. 누구도 자신의 최후가 이런 식일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테니,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어쩌면 이 놈에게도 타당한 명분이 있었을 것이다. 자신에게 배신자니 뭐니 떠들어대고, 분노할 만한 이유가. 놈의 삶에서는, 그 세상속에서는 놈이 중심이고 주인공이었을 테니까.
그러나 이 거대한 세상 속에서는, 그런 작은 세상이 무수히 많이 뒤엉켜 있다. 그 복잡한 뒤엉킴 속에서는 한 세상의 주인공조차 존재감 없는 단역 나부랭이에 불과하다. 그것을 모르는, 혹은 잊어버린 자들이 대개 마지막에 이런 얼굴을 보이곤 한다.
분노. 불신. 허망함.
하지만 그런 처절한 하소연조차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그럴 이유도, 여유도 없다.
[아아아―]
눈에 빛이 사라지고, 식어가는 육신에서 영혼이 흘러나왔다. 처음부터 특이한 놈이라는 것을 한 눈에 알아보았다. 처음에는 열쇠라서, 혹은 열쇠와 연관되어 있는 놈이라서 그런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냥 이놈 자체가 특별한 것이었다.
영혼과 육신이 따로 논다. 더 정확히는, 영혼이 육신의 생명을 집어삼키고 있는 듯했다.
‘흥미롭군.’
군터는 울부짖는 영혼을 그의 영혼 감옥에 가두었다. 본래 안에 있던 것들이 다 빠져나가 휑해진 감옥에 새로운 수감자가 들어섰다.
‘그리고 이건.…….’
평범한 영혼이 아니었다. 영혼 같은, 아직 그도 이해한 부분보다 이해하지 못한 부분이 많은 미지와 신비의 집합체에게 ‘평범’운운하는 것이 우습기는 하지만 어쨌거나 새롭게 손에 얻은 이 영혼은 이제껏 그가 봐왔던 다른 영혼들과 확연히 달랐다. 이전의 영혼들이 사납고 거친 들개 같았다면 이 영혼은 훈련된 개 같았다. 거칠지 않고 잘 다듬어진, 일종의 인위적인 느낌까지 드는 이질적인 영혼.
술사이면서도 술사다운 기질은 전혀 없다시피 했던 군터였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그도 이 영혼을 한번 진득하니 연구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당장은 그럴 수가 없었다. 군터는 이 특별한, 혹은 이상한 영혼을 그의 감옥에 가두고 다시 바깥 세상으로 눈길을 돌렸다.
‘이걸로 된 건가? 아니면.’
영혼이 떠난 육신은 아직 완전히 식지 않았다. 창에 찔린 목에서는 여전히 핏물이 쉬지 않고 흘러나오고 있었다.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이미 죽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육신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눈에 빛이 사라지고, 몸뚱이는 식어가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다 사그라지지 않은 생기가 육신에 머물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강력한 생기다. 아니, 정말 강력한 것인가? 그보다는 차라리 질기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 어쨌거나 군터는 아직 죽지 않은 몸뚱이에서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거인의 잔향을 감지했다.
‘어찌 한다.’
이 질긴 몸뚱이를 죽이고자 한다면, 사실 간단한 방법이 있다. 목을 자르거나 심장을 찌르면 된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할까? 그것으로 열쇠라는 것을 없애거나…기능하지 못하도록 만들 수 있는 것인가?
‘보면 알겠지.’
고민은 짧았다. 군터는 굳이 어렵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열쇠는 눈앞에 있다. 설령 예기치 못한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충분히 수습할 수 있으리라.
창을 뽑은 군터가 그대로 휘둘러 흐느적거리는 목을 갈랐다. 그리고 머리를 잃은 몸뚱이가 기울기도 전에 재차 창을 내질러 심장을 찔렀다. 잠잠히 버티던 생기가 크게 흔들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 거센 출렁임은 군터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강렬했다. 그러나.
[썩어라.]
그의 영혼에서 흘러나온 죽음이 창을 타고 뻗어 나갔다. 그리고 곧, 거세게 몸부림치는 생기를 집어삼켰다.
머리 잃은 몸뚱이가 색을 잃기 시작했다. 하얀 종이에 떨어진 한 방울 검은 잉크가 종이를 물들이듯, 피를 쏟고 머리를 잃은 와중에도 혈색이 돌던 몸뚱이가 거뭇하게 변했다. 그리고 이어, 쪼그라들었다.
[으아아아아아아―!]
썩어 무너지는 시신을 군터가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러던 그때. 저 멀리서 분노에 찬 포효가 들려왔다. 동시에 온갖 괴물들이 토한 것임이 분명한 괴성이 뒤따랐다.
‘됐군.’
군터가 창을 뽑았다. 마른 가지처럼 변한 시신이 창이 뽑혀 나가자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마지막까지 꿈틀거리던 마지막 생명이, 그 힘이 창을 타고 흘러 들어왔다. 생소하고, 심지어 거북하게까지 느껴지는 힘. 거인의 힘이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