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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1029화 (1,029/1,064)

1029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잠들었다가 깬 느낌이었다. 아니, 깼다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다. 주체할 수 없는 몽롱함이 정신을 누르고 있었으니.

깨어 있는 것인가, 잠들어 있는 것인가. 지금 보이는 것은 허상인가 실재인가. 사실 아무래도 좋았다. 궁금하지도 않았다. 그는 그저 무력하게 숨쉬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그를 구속하던 몽롱함이 조금 옅어졌다.

휘잉―

바람이 불어온다. 조금 전, 어쩌면 계속 불어오던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그는 볼을 스치는 바람을 느꼈다. 몽롱함이 조금 더 가셨다. 그쯤 되자 멍하기만 하던 머리도 약간이지만 맑아졌다.

‘이…….’

목 아래가 아예 감각이 없었다. 머리만 살아 있는 것 같은 느낌. 평범한 사람이라면 꺽꺽 비명이라도 질렀겠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영혼을 다루는 주술을 알고 있었으며, 이미 한번 몸을 바꾸기도 했다. 무지한 이들은 육신이 곧 생명이요 영혼이라 여기곤 하지만, 그는 육신이 영혼을 담는 그릇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기에 몸이 이상하다고 한들 그렇게까지 두려움에 사로잡히지는 않았다.

다만 그것은 그가 좀 더 냉정하게 상황을 가늠할 수 있었다는 뜻이지, 아예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었다.

‘오판했군.’

의식을 잃기 전 마지막 기억을 더듬은 그는 곧 자신이 실수했음을 인정했다. 가늠할 수 없는 것을 가늠하려 했고, 심지어 어느 정도 가늠했다고 오판하기까지 했다. 그 오만과 어리석음의 대가가 바로 지금이다.

‘바람이 느껴져. 밖이군. 하지만 어디지?’

눈을 뜨고 있는 것 같기는 한데 눈에 먼지가 잔뜩 끼기라도 한 것처럼 시야가 온통 뿌옇다. 아무리 눈에 힘을 줘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이대로는 안 돼.’

거인왕은 그의 숙적을 상대하러 갔다. 그가 승리한다면 그는 곧 돌아올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자신은 끝장이다. 그가 돌아오지 않는 경우, 즉 거인왕의 적이 승리하는 경우는 그나마 낫지만 그래도 곤란하기는 마찬가지다. 이곳의 성주는 이미 자신에 대해 인지하고 있을 테니까.

‘어떻게 된 거지? 어딘가에 묶인 건가?’

다른 것은 다 제쳐 두고, 일단 시각부터 되찾아야 한다. 하지만 온통 뿌옇기만 한 시야는 도통 정상으로 돌아올 생각도 하지 않았다.

‘침착. 침착하자.’

답도 안 나오는 몸뚱이는 제쳐 두고 내면에 집중했다. 그는 전생술을 터득했다. 그것은 생명과 영혼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이는 입문조차 할 수 없는 신비로운 힘이었다. 거기에 이론만 습득한 것이 아니라 직접 실행하기까지 했다. 그는 생명의 본질과 그 내면에 대해 깊은 이해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당황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차분하게 스스로를 가라앉혔다. 그리고 자신의 내면을 관조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방금까지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고, 들리지 않던 것들이 들려왔다.

‘이건…….’

역동하는 영혼. 그리고 그에 밀접하게 닿아 있는 생명. 정상적인 생명이라면 하나로 합쳐져 있어야 할 것들이 나뉘어 있는 것이 먼저 보였다. 이 평범하지 않은 구조야말로 전생술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증거였다. 아무리 혼을 옮겼다고는 해도 본래 자리하고 있던 영혼의 역할을 그대로 이어받는 것은 불가능하다. 기껏해야 흉내를 내는 정도가 한계. 어찌 보면 전생술의 한계였지만, 지금은 그 한계가 오히려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하나가 아니기에, 그는 보다 멀리서 차분하게 관찰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알 수 있었다.

두근!

역동하는 생명. 그것이 발하는 강력한 힘. 즉 생명력. 그 생명력이 어딘가로 흘러 나가고 있었다. 강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자연스러운 흐름이었지만, 그 흐름 덕에 생명은 역동할지언정 빛나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는 이 생명이 얼마나 찬란하게 빛났는지 똑똑히 기억했다. 그것은 마치 저 하늘의 태양처럼, 어쩌면 그보다 더 강한 빛을 발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무런 빛도 나지 않았다. 그저 강렬하게 꿈틀거리고 있기만 할 뿐.

그는 그 꿈틀거림에서 고통을 보았다. 저것이 자신의 생명이라는 자각은 그 뒤에 따라왔다.

‘멈춰야 해.’

저 흐름을 멈추거나, 끊어야 한다. 방법은 자연스레 떠올랐다. 이것은 자신의 내면이었다. 저 꿈틀거리는 생명 역시 자신의 것이었다. 그러니 방법은 간단하다.

‘멈춰.’

문을 닫아건다. 허락하지 않은 손님에게 물러나라 외친다. 그러나 그것은 손님이 아니라 강도였다. 물러가라 외쳐도 꿈쩍하지 않고 도리어 성질을 부린다. 생명의 꿈틀거림이 더 격해졌다. 이제 그 고통은 그에게도 전해졌다.

‘사라져라!’

한층 더 날이 선 의지가 강도에게 닿는다. 방금보다 훨씬 더 강경한 대응에 놈도 주춤거렸다. 그러자 그는 기세를 올리며 놈을 밀어붙였다.

‘꺼지란 말이다!’

그의 일갈과 함께 불쾌한 흐름이 끊어졌다. 강도는 물러났으며 고통에 신음하던 생명은 비로소 안정을 찾았다. 사라졌던 빛도 약간이지만 돌아왔다. 그리고.

“허억!”

춥다. 그리고 아프다. 전혀 느껴지지 않던 감각들이 돌아왔다. 아직 온전하지는 않았으나 그것만으로도 막막함이 크게 가셨다.

‘어깨? 어깨를 다쳤나?’

통증은 양 어깨에서 느껴졌다. 어떤 상태인지 살펴보고 싶었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았으며 보이는 것도 없었다. 아직 시력이 돌아오지 않은 것이다. 아무리 눈에 힘을 줘봐도 여전히 온통 뿌옇기만 했다.

그는 애써 차분함을 유지했다. 그의 예상대로, 그리고 기대대로 상황은 점점 더 좋아졌다.

어깨의 통증이 심해졌다. 그리고 그만큼 다른 감각도 서서히 돌아왔다. 특히 시야가 점점 맑아지는 것이 고무적이었다. 여전히 눈뜬 장님이나 다름없었지만 탁한 회색으로만 가득했던 시야에 다양한 색들이 더해졌다. 그는 조금만 더 있으면 온전히 시력을 회복할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한편, 그는 그저 가만히 상황이 좋아지기만을 기다리지는 않았다.

그는 맑아진 정신으로 앞으로의 계획을 구상했다. 어찌해야 하는가. 이곳에서 탈출해야 하는 것만은 명확하다. 하지만 어떻게?

“으…쿨럭!”

뻣뻣한 고개를 천천히 틀었다. 통증이 느껴지는 어깨에 무언가 이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그게 줄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직도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명확하지 않았다.

‘그 놈인가.’

그러나 눈이 제대로 보이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는 것이 있었다. 의식이 끊기기 전 마지막 기억. 거인왕의 명령을 받은 괴조가 자신을 붙들고 날아올랐던 것이 떠올랐다. 아마 지금 느껴지는 한기도, 양 어깨에 느껴지는 통증도 녀석의 탓일 터.

‘어찌 한다.’

괴조는 널리고 널린 일반적인 괴물이 아니었다. 몸이 멀쩡했어도 놈을 어찌할 수 있을 거라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런데 몸 상태도 최악에 가깝고, 무엇보다 이미 붙들려 하늘에 떠 있다. 이게 가장 큰 문제였다. 만약 어설프게 발버둥치다가 추락하기라도 한다면 다리가 부러지는 정도로는 끝나지 않을 것 아닌가.

‘방도를 찾아야 해. 방도를.’

다행히 그가 고민을 거듭하는 와중에도 그의 몸은 착실히 회복됐다. 기운이 없던 몸에 활력이 돌아오고, 흐릿하던 시야도 이제 어느 정도 정상으로 돌아왔다. 덕분에 그는 자신의 처지를 확실히 파악할 수 있었다.

‘이런.’

예상했던 대로라서 다행이라고 할까. 최악의 상황이 현실로 드러났으니 절망적이라고 해야 할까.

그의 짐작대로, 그는 하늘 높이 떠 있었다. 불타오르는 건물들, 점처럼 작게 보이는 사람과 괴물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깨를 붙들고 있는 날카로운 발톱이 보였다. 갈고리 같은 발톱 두 개가 어깨를 파고든 채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발톱이 어깨 근육을 찢어 놓은 탓인지, 몸에 힘이 돌아오는 와중에도 두 팔만큼은 시체의 그것처럼 늘어진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 상태로는 괴조에게서 벗어나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어찌해야 하는가. 어찌해야…….’

아무리 궁리하고 또 궁리해도 마땅한 방도가 떠오르지 않았다. 애써 미뤄두었던 절망감이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잠잠히 날갯짓만 반복하던 괴조가 갑작스레 괴상한 울음을 토했다. 동시에 그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괴조가 방향을 틀면서 자연히 괴조의 발톱에 매달린 그 역시 흔들린 것이다.

‘뭐지?’

그는 당황한 와중에도 괴조의 분위기를 살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괴조 역시 당황한 듯했다. 그는 이 영문을 알 수 없는 변화가 득인지 실인지 따져보았다. 그리고 곧 득이라고 결론 내렸다.

‘통제력이 흔들리고 있는 거다.’

틀림없다.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거인왕의 통제력이 흔들린 것이 분명했다. 분명 이 괴조가 받은 명령은 자신을 붙들고 하늘 높은 곳에서 대기하는 것이었을 터. 그런데 지금까지 충실히 그 명령을 이행하던 괴조가 지금 갑자기 당황해 날뛴다? 거인왕의 통제력에 문제가 생긴 것이 분명하다. 그 외의 이유는 떠오르지 않았다.

‘이제부터가 문제로군.’

상황이 변한 것은 긍정적이었으나, 여전히 문제는 남아 있었다. 당장 그의 어깨를 꽉 쥔 채 제 멋대로 날아다니는 괴조. 거인왕의 통제에서 벗어난 녀석이 당장 그를 놓아버리거나, 한입에 머리를 삼켜 버리기라도 한다면? 당장은 거인왕이 남겨놓은 명령의 영향 때문인지 그를 어찌할 기미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 영향이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몰랐다.

‘음?’

이 난관을 타개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던 그가 문득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 처음에는 터무니없다 생각했지만 그 다음에는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몸, 이 생명이 열쇠라고 했다. 어떤 식으로든 그자와 연결되어 있는 것이야.’

거기에 조금 전까지 그의 생명에 연결되어 있던 것.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그것은 분명 거인왕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 일방적이며 난폭한 수탈은 그 오만한 초월자의 분위기와 유사했다. 어쩌면 거인왕이 괴조에 대한 통제력을 잃은 것은 그 연결이 끊겼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 몸은 거인왕에게 무척이나 중요한 열쇠 그 자체. 그리고 열쇠는 거인왕이 잃어버린 무언가다. 그의 일부라고 할 수도 있으리라. 그렇다고 하면, 이 몸이 거인왕의 힘을 일부라도 지니고 있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정말 그런 것이라면.

‘내가 그 힘을 사용할 수도 있겠지.’

물론 정말 그게 가능하다고 한들 거인왕에 비하면 초라한 수준에 불과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수준이라고 해도, 이 괴조를 잠잠하게 만들고 그를 저 아래 내려놓게끔 유도하는 정도는 가능하지 않을까?

그는 곧바로 시도했다.

* * *

구워어어억―!

날개 한쪽이 소 한 마리보다 더 큰, 그야말로 괴물 새라는 말이 어울리는 괴조가 거북한 울음을 토하며 날아올랐다.

“쿨럭!”

괴조의 거친 날갯짓으로 피어난 먼지구름. 그 속에서 비로소 자유를 되찾은 사내가 마른 기침을 뱉으며 힘겹게 걸어 나왔다.

‘됐다. 됐어.’

마음 같아서는 괴조를 이용해 단번에 이 도시를 벗어나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괴조를 통제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놈을 얌전하게 만들고, 자신을 내려놓게 하는 것까지 한계였다. 정신력이 바닥까지 고갈된 탓에 지금도 머리가 멍했다.

‘괜찮아. 일단 여기서 벗어나기만 하면…….’

힘겹게 이어지던 걸음이 멈췄다. 어느새 그의 앞에 나타난 존재감이 그의 두 다리를 묶어버린 탓이다.

“아…….”

가장 먼저 보인 것은 거무튀튀한 창 한 자루였다. 그 다음은, 자신을 바라보는 무미건조한 눈빛.

“군터.”

어째서인지 픽 웃음이 나왔다. 여기까지 와서 이자를 보게 될 줄이야. 이것이 하늘의 뜻이라면, 농간이 너무 지나친 것 아닌가?

“나를 아는가.”

“알다 마다.”

모를 리가 있겠는가.

어찌 그럴 수가 있겠는가.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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