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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1028화 (1,028/1,064)

1028화

쾅!

부수기로 마음먹은 순간 부수고, 죽이기로 마음먹은 순간 죽였다. 원하는 대로 이루었고, 그의 손길이 뜻하지 않게 멈추는 일 따위는 없었다. 이 순간. 그는 마음먹은 모든 것을 이룰 수 있었다.

그는 문득 생각했다. 옛 세상을 지배했던 그의 선조들은 하찮은 것들이 이야기하는 창조자 같은 존재는 아니었을 것이라고.

이 난폭한 피를 보라. 이런 피를 지닌 이들이 어찌 그런 유순한 부류일 수 있었겠는가. 필시 그들은 파괴자였을 것이다. 생겨나는 것이 있으면 사라지는 것도 있는 법. 탄생과 죽음, 창조와 파괴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그러니 거인, 그의 선조들이 지배했던 세상은 파괴의 시대였을 것이다.

[하하하!]

하찮은 것들에 대한 분노는 엉망으로 그의 손에 찢긴 영혼이 늘어갈수록 서서히 식어갔다.

이 힘. 홀로 우뚝 선 느낌. 만족스러운 전능감이 일그러졌던 그의 영혼을 감싸 안았다.

익숙했던 것이다. 당연했던 것이다. 그러나 너무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 길었던 인고의 세월이 지나고 드디어 본래 그랬어야 할 모습으로 돌아온 것이다.

‘뭐지?’

그런데 기쁨은 순간이었고, 그는 곧 의문에 휩싸였다.

시원하게 손을 쓰는 와중에도 영문 모를 답답함이 있었다. 처음에는 전혀 느끼지 못했으나, 발에 치이는 시체가 어느 정도 쌓인 순간부터는 명확히 인지할 수 있었다.

마치 늪 한가운데에 들어선 것 같았다. 물론 그 어떤 깊은 늪이라도 그를 방해할 수는 없었으나, 이 늪은 뭔가 달랐다. 벗어나고자 마음먹었음에도 벗어날 수가 없었다. 힘을 쓰면 쓸수록 더 깊게 가라앉는 것만 같았다.

[무뎌졌군. 지치기라도 한 건가?]

몇 번이고 부수고 찢어 놓은 놈이 지치지도 않고 또 덤벼든다. 그는 흉흉한 기세를 터뜨리며 이 질긴 놈을 다시 한 번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한 번 손을 휘둘러 다섯 갈래로 찢고, 땅을 일으켜 휩쓸어버렸다. 역시 이번에도 뒷맛이 깔끔하지가 않았다. 이번에도 실패라는 뜻이다. 이 질긴 놈은 다시 한 번 몸뚱이를 회복할 것이다. 매번 부술 때마다 놈의 힘이 줄어드는 것이 느껴졌지만, 이런 식으로는 완전히 없애려면 몇 번이나 더 상대해야 할지 모른다. 그 사실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쾅!

힘껏 구른 발에 밟힌 마물의 머리가 흉하게 찌그러졌다. 몇 번 퍼덕거리던 마물은 곧 생기를 잃고 축 늘어졌다. 생명이 사그라진 자리에서 곧 죽음이 피어났다. 그리고 그것은 이번에도 아주 자연스럽게 어디론가 흘러갔다. 그곳에는 역시나, 창을 쥔 음침한 놈이 있었다.

작은 물줄기들이 모두 하나의 강을 향해 흘러가듯, 이곳에서 생겨난 죽음은 모두 놈에게로 향했다.

사실 그리 이상하지는 않다. 이곳은 놈이 마련한 싸움터였다. 준비한 것들도 제법 있을 테니, 이런 수작이야 별로 대수로울 것은 없다. 놈이 다루는 것이 죽음이 아니었다면 아무렇지 않게 무시했을 것이다.

‘저놈부터 손을 썼어야 했나.’

위협적이지는 않다. 그러나 묘한 꺼림칙함이 있다. 생명을 지닌 존재인 이상 죽음에 대한 거부감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건 설령 초월자라고 해도 마찬가지.

‘우습군.’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그는 자조했다.

대체 얼마나 약해진 것인가. 아무리 모멸의 시간이 길었다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까지 초라해지다니!

콰드득!

발을 디딘 땅이 잘게 쪼개졌다. 거대한 육체가 다시 한 번 커지고, 단단해졌다. 그의 숨결은 이제 불꽃처럼 뜨거웠다.

* * *

아간투스베록의 외형이 다시 한 번 변하고, 그의 기세가 하늘을 뚫을 정도로 솟구친 순간. 군터는 보았다.

아무리 보려고 노력해도 보이지 않던 그것은 아주 자연스럽게 그의 눈에 들어왔다. 아간투스베록을 중심으로 거미줄처럼 펼쳐진 무수한 선들. 마치 세상 전체에 무수한 금이 간 것 같은 광경에, 군터는 순간적으로 아찔함까지 느꼈다.

그러나 군터는 그런 충격 속에서도 이것이 그가 보려고 했던 그것임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세상을 뒤덮다시피 한 거미줄은 너무도 방대하고 오밀조밀했다. 그 무수한 선들 가운데 어떤 것이 줄카가 말하던 끈인지 어찌 알겠는가.

그러나 거인의 입에서 형태 없는 불길이 흘러나왔을 때. 군터는 줄카가 말하던 끈이 무엇인지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다른 무수한 선들보다 조금 더 가늘지만, 그런데도 역동하는 힘이 느껴지는 단 하나의 선. 아간투스베록이 불을 토하니 그 선이 팽팽하게 당겨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찾았다.]

[좋아.]

줄카의 반응은 의외로 담담했다. 군터는 줄카의 반응을 통해 그가 처음부터 끈의 발견을 확신했다는 것을 있었다.

[가라. 열쇠를 찾아.]

군터가 움직였다. 숙련된 암살자가 떠오를 정도로 소리 없는 움직임이었으나, 그렇게 몇 발자국 떼기도 전에 거대한 형체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쿵!

땅이 흔들리고 먼지구름이 깔렸다. 서늘함이 정신과 영혼까지 번졌다.

[드디어 찾았나?]

군터와 거인의 눈이 마주쳤다.

‘눈치채고 있었나.’

아간투스베록은 바보가 아니다. 수백 년, 어쩌면 그 이상을 살아왔을 초월자가 바보일 리 없다. 아무리 이런저런 열망으로 눈이 뒤집혔다고 해도 그런 와중에 차가운 이성을 유지하고 있었을 터. 이쪽이 뭔가 꿍꿍이가 있다는 것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으리라.

[그래. 이제 어쩔 셈이지?]

처음에는 줄카를 향했고, 그 다음에는 반기를 든 마물들에게 향했던 농밀한 적의가 이제는 군터를 향했다.

[도망쳐라. 할 수 있다면 말이야.]

거인이 손을 뻗었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으나 군터는 하늘이 내려앉는 듯한 압박감을 느꼈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저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만 같은.

‘사술 같군.’

물론 실은 그렇지 않다. 하늘은 여전히 저 높이 자리하고 있고, 뻗어오는 손은 발 한 번만 굴러도 피할 수 있다. 다가오는 저 손은 아무 의미도 없다.

중요한 것은 기세다. 저 포악한 기운이 감각을 교란시켜 판단력을 흐리고 있다. 홀로 서 있을 뿐인데 그 기세가 군대 전체가 발하는 군기와 맞먹을 정도다.

단순한 기세를 이렇게까지 키울 수 있는가. 짧은 순간, 군터는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초월자의, 수백 년이 넘게 살아온 괴물의 진정한 실력이리라.

부웅-!

감탄을 넘어 일종의 경의마저 느끼며, 군터가 창을 휘둘렀다. 창 끝에 걸린 예기가 그를 옥죄어오던 거인의 기세를 갈랐다.

[역시!]

이 정도는 당연히 할 줄 알았다는 듯, 아간투스베록이 반쯤 뻗은 팔을 앞으로 쭉 내밀며 번개처럼 달려들었다. 집 한 채, 아니 그보다 거대한 바위가 날아오는 것 같았다. 군터는 저기에 정면으로 부딪치면 좋은 꼴은 못 보리라는 것을 알았다.

쿵!

안다. 알지만, 그래도 피하지 않았다. 그에게 흥미와 투지를 드러내는 상대에게 한 번 정도는 제대로 응수해보고 싶었다. 활활 타오르는 불꽃에 닿으면 다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영롱함에 취해 손을 뻗는 자들이 있지 않은가. 지금의 군터가 그와 비슷했다.

온 정신과 힘을 모아 한점에 담았다. 소리 없이 뻗어 나가는 창 끝이 거인의 주먹과 부딪쳤다.

푹-

파고들었다. 창의 첨단에 가득 담긴 죽음의 기운은 거인의 강철 같은 피부마저 뚫고 들어갔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거대한 힘의 물결이 창과 창을 쥔 군터를 덮쳤다.

창은 부러지지 않았다. 하지만.

우득!

팔이 뒤틀렸다. 어깨가 틀어졌다. 군터의 본능이 지금 몸을 빼야 한다고 연신 소리쳤다.

“흡!”

그러나 군터는 도리어 힘을 주고 버텼다. 한때는 친구처럼 익숙했으나 어느 순간부터인가 사이가 멀어진, 고통이라는 녀석이 온 몸을 집어삼켰다. 눈매와 입술이 경련을 일으켰다. 군터가 창을 회수했다. 동시에 전신을 틀었다. 의도한 바에 상대의 괴력까지 더해지니 그저 몸을 반 바퀴 틀었을 뿐인데 그 순간 작은 소용돌이가 이는 듯했다.

쾅!

회수한 창을 늘어뜨려 잡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창대에 또 다른 주먹이 박혔다. 군터의 몸이 떠올랐다. 이번에는 군터도 그 힘에 거스르지 않았다. 새처럼 날아오른 그가 한참이나 떨어진 곳에 부드럽게 착지했다. 그러자 머릿속에 울리는 한 마디.

[이제 알겠나?]

[그래.]

저 앞에, 아간투스베록에게 다가가는 줄카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의 표정이 보이는 듯했다. 아마 웃고 있지 않을까? 비웃음이 아니라, 못 말리는 고집쟁이가 쓴맛을 본 데 대한 실소 정도?

[그럼 이제 가라. 서둘러.]

[그러지.]

틀어진 어깨를 우악스럽게 껴 맞췄다. 하지만 뒤틀리고, 뼈가 일부 깨지기까지 한 팔만큼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경험상 오래지 않아 회복되리라 짐작은 하지만, 당장은 외팔이 신세를 피할 수 없을 터.

군터가 창을 왼 손으로 바꿔 쥐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훌쩍 몸을 날렸다.

* * *

[어쩔 셈이냐.]

[글쎄.]

줄카의 시선이 아간투스베록의 왼쪽 주먹으로 향했다. 손가락 두어 개가 일부 거뭇하게 색이 변해 있었다. 조금 전 군터의 창과 충돌했던 바로 그 부위다.

[열쇠를 없앨 수 있을 것 같나? 그릇은 그릇일 뿐이야.]

그래. 그릇은 그릇일 뿐이다. 그릇을 부순다고 해서 내용물을 없앨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너는 아무것도 몰라.]

[그건 피차 마찬가지 아닌가. 우리는 아무것도 몰라. 그 녀석이라면 뭔가 알았을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아니야.]

그 녀석, 쿠엘단이라면 뭔가 알고 있었으리라. 황제가 아무리 꽁꽁 숨겨뒀다 해도 황제가 사라진 이후라면 그 녀석은 어떻게든 열쇠를 찾아 자유로워질 수 있었을 터.

하지만 녀석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자유를 찾는 대신, 마치 기다렸다는 듯 이 세상에서 사라져버렸다. 어찌 보면 녀석은 마지막까지도 녀석다웠다.

[어떨 것 같나?]

아간투스베록이 몸뚱이 반이 뭉개진 상태에서도 그의 발을 붙들던 마물을 신경질적으로 짓밟았다. 놈의 분노가, 약간의 초조함이 느껴졌다. 놈도 아는 것이다. 떨쳐낼 수 없으리라는 것을.

“덩치 나리. 금방 다시 보게 되니 반갑소.”

붉은 눈의 용아, 카니악이 양손에 찌그러진 철퇴와 어디서 났는지 모를 커다란 도끼 하나를 쥔 채 아간투스베록을 향해 비아냥거렸다.

“아까는 너무 추한 꼴을 보여드렸지. 하지만 이번에는 다를 거요.”

아간투스베록의 시선이 움직였다. 본래라면 거들떠도 보지 않을 잡놈이지만, 코앞에서 입을 함부로 놀리는 꼴이 상당히 거슬렸다.

마음이 인 순간 몸이 움직였다. 그러나 그의 주먹은 원했던 곳에 닿지 못했다. 성긴 그물이 그를 옭아맨 탓이었다. 물론 일반적인 그물은 아니었다. 그물을 구성하는 줄 하나하나가 쇠사슬만큼이나 튼튼하며, 그 안에는 주술적인 힘이 흘렀다. 아간투스베록은 이게 무엇인지 잘 알았다. 지금 시대에는 찾아보기 힘들지만, 예전에는 이런 것이 적잖이 쓰였다.

[제법 준비했군.]

그물을 쥐고 있는, 역시나 붉은 눈을 한 것들이 그의 시선이 스칠 때마다 움찔 몸을 떨었다. 그러나 정작 그의 앞에 서 있는 놈은 여전히 입을 가볍게 놀렸다.

“홀로 당신에 맞설 바보는 아니라서. 우리 위대하신 덩치 나리께서는 물론 이해해 주시겠지?”

[네 영혼은 내 친히 찢어주마.]

선언함과 동시에 기합을 터뜨렸다. 그러자 그를 바짝 옭아매던 그물이 터질 듯 부풀었고, 그 짧은 순간 아간투스베록은 몸의 자유를 되찾았다.

“정신 똑바로 차려! 눈 깜짝할 사이에 당한다!”

거인의 기세는 그 자체로 살아 있는 것들을 위압한다. 어지간한 전사는 그 앞에 제대로 서 있는 것조차 힘겨워하나, 그것은 용아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그들의 몸에도, 영혼에도 그와 대등한 지배자의 피가 흐르기에.

“저는 여전히 모르겠습니다.”

[이 땅은 녀석의 것이다. 이곳에서는 녀석이 나보다 낫다.]

“그렇다면, 오래 걸리지 않기만을 바라야겠군요.”

그물을 반쯤 찢어내고 있는 아간투스베록을 보며, 카니악은 혀를 내둘렀다. 그러나 질색하는 표정과 반대로, 그의 두 다리는 착실히 저 괴물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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