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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1027화 (1,027/1,064)

1027화

‘이런.’

보리스와 로우렌, 그리고 그보다 더 멀리 떨어져 있는 이들의 심상치 않은 얼굴들을 보고서야 할렌은 뒤늦게 깨달았다. 어느새 조금 흐트러졌던 모양이다. 싸움에, 들끓는 감정에 너무 몰입한 탓이다.

“음.”

얼굴을 더듬었다. 울룩불룩한 것들이 만져졌다. 할렌은 쏟아지는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이고 정신을 집중했다.

곤란하다. 끊임없이 자신이 누구인지 상기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에게는 특히 더 그랬다. 그의 안에는 이제는 그의 일부가 되었으나, 그럼에도 낯설게 느껴지는 여럿이 존재했다. 그가 자신을 여전히 할렌이라고 여기는 것은 그의 주인이 그리 말했기 때문이며, 그 스스로 고집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그는 할렌이 아니었다. 적어도 그 자신과 다른 이들의 기억 속에 있는 할렌은 아니었다.

‘나는 나다. 나는 나야.’

속이 더부룩했다. 뭔가 안에서 단단히 얹힌 것 같은 기분. 손에 닿는 울룩불룩한 것들이 더 거칠게 꿈틀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들어가. 얌전히 있어라.’

실수했다. 드러내지 말아야 했다. 그자와 같은 냄새를 풍기는 것들과 갑작스레 마주한 터라 스스로를 다스리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너희도 나다. 그러니 내 뜻을 따라.’

그가 삼킨, 그리하여 하나가 된 것들이 연신 꿈틀거렸다. 그러나 다시 한 번 강하게 마음을 조이자 곧 그의 뜻대로 잠잠해졌다.

“후우.”

더 이상 손에서 느껴지는 이질감은 없었다. 더부룩하던 속도 편안해졌다. 할렌은 그제야 얼굴에서 손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입을 뗐다. 그런데, 그의 얼굴을 다시 본 이들의 표정이 이상했다. ‘왜?’ 할렌이 의아해하던 때, 저 멀리서 날카로운 무언가가 날아와 그를 찔렀다. 눈에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

할렌이 고개를 꺾었다. 그리고 반사적으로 몸을 날렸다.

“공자! 송구하오나 소관은 여기서 작별을 고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안심하십시오. 남은 길은 무탈할 것입니다. 너희는 끝까지 공자를 모셔라!”

제 할 말만 빠르게 뱉은 할렌이 훌쩍 몸을 날렸다. 두 번 발을 굴러 반쯤 무너진 건물의 지붕에 올라선 그는 날렵하게 건물과 건물을 오가며 일행에게서 멀어져갔다.

* * *

“…보았느냐.”

황망한 눈으로 그 뒷모습을 쫓던 보리스가 로우렌에게 물었다.

“제가 여쭙고 싶군요. 그런데 공자가 그리 여쭈시는 걸 보니 제 눈이 잘못된 것이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아주 잠깐이었다. 울티노가 고개를 들었다가 곧바로 어딘가를 바라보고, 훌쩍 떠나간 것은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그 짧은 순간. 그래서 잘못 본 것인가 싶었지만, 그럴 리 없다는 것을 두 사람 다 알았다.

“대체…….”

대부분의 경우에 똑 부러지고, 간혹 당황하더라도 곧 여유를 갖곤 하는 로우렌조차도 이번만큼은 좀처럼 평정을 찾지 못했다. 보리스는 그의 반응을 이해했다. 그 자신도 당황스럽고, 한편으로는 두려웠지만 그럼에도 자신이 느낀 충격은 로우렌이 느낀 것에 비할 바가 아닐 것이었다.

“공자님.”

나직한 목소리가 상념을 깼다. 가라앉았지만 감정의 동요가 느껴지는 목소리. 그래. 충격을 받은것은 로우렌만이 아니었다. 그라모트 역시, 본 적 없는 얼굴을 한 채 입술을 떨고 있었다. 그 역시 같은 것을 본 것이다. 그 말인 즉, 역시 잘못 본 것이 아니라는 뜻이고.

“지금 같은 상황에, 이런 말씀을 드리기 송구스럽습니다만.”

“이해한다.”

그라모트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는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보리스 자신이라도 할 말은 정해져 있었을 테니까.

“같이 가지.”

“예?”

“나도 확인하고 싶다. 내가 본 것이 뭐였는지.”

사실, 짐작이 가는 바가 없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본능은 그 짐작이 틀리지 않았으리라 연신 속삭이고 있었다. 하지만 보리스는 부디 자신의 짐작이 틀리기를 바랐다.

“많이 움직일 필요는 없다.”

나짐을 비롯해 녹초가 된 이들, 굳이 위험을 무릅쓸 필요가 없는 이들은 호위를 대동해 먼저 보내기로 했다. 사방에 어떤 위협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안 그래도 부족한 인원이 나뉘는 것은 그리 좋은 선택이라 볼 수 없었다. 그래서 반대의견도 적잖이 나왔지만 보리스의 의중은 확고했다.

보리스는 그라모트와 로우렌, 그리고 몇몇 친위대 병사만을 대동한 채 울티노가 사라진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가 어디로 갔을지 짐작하십니까?”

“그래.”

짧은 시간 동안이었지만 옆에서 본 바에 따르면 울티노는 자신이 맡은 일에 책임감을 가질 줄 아는 사내 같았다. 그런 자가 아무리 당황스러운 상황에 놓였다고 해도 맡은 일을 팽개치고 훌쩍 움직였을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터. 그리고 그 이유는 지금으로서는 한 가지 외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괴물 놈들이 달려간 곳이겠지.”

다시 깨어난 뒤부터 놀랍도록 예민해진 감각이 알려주고 있다. 저곳. 저 멀리,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 * *

그리 큰 기대를 하고 한 일은 아니었다. 그저 조금이라도 아간투스베록의 주의를 돌릴 수 있다면 그것으로 좋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효과가 좋았다. 과할 정도로 좋았다.

순식간에 수백 마리의 괴물들이 몰려들었다. 마물도 세 마리나 있었다. 그것들은 곧장 아간투스베록을 향해 덤벼들었고, 그의 주의를 확실하게 끄는 데 성공했다.

[하찮은 것들이 감히!]

아간투스베록은 상대의 수에 휘둘리고 있다는 것보다, 하찮은 것들이 자신에게 들러붙는다는 사실 자체에 분노한 듯했다. 그는 상대하고 있던 줄카와 군터를 뒤로하고 자신에게 덤벼드는 마물과 괴물들에게 그의 분노를 유감없이 표출했다.

쾅!

거인의 손에 붙들린 괴물의 머리가 단번에 박살이 났다. 갈고리처럼 뻗은 손이 몸통을 찢고 들어가 속을 긁어냈다.

사납고 야만적인 싸움이었다. 어떠한 형식도 없는 원초적인 싸움에서 그의 분노가 고스란히 묻어났다.

[주제를 알란 말이다!]

그가 사납게 날뛰면 날뛸수록 그의 기세는 더욱 커져만 갔다. 높이 치솟은 기세는 곧 지배력이 되어 분노와 두려움 사이에 갈팡질팡하던 괴물들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그러자 곧 괴물과 괴물의 싸움이 벌어졌다. 다시금 거인의 노예가 된 괴물들과 여전히 거인을 향한 분노를 태우는 괴물들 사이의 싸움이었다.

“빌어먹을! 전하! 합류하겠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용아가 전장에 끼어들었다. 멀찍이 떨어져 초월자들의 싸움이 방해받지 않도록 지키고 있던 그들은 점점 더 많이 몰려드는 괴물들을 더는 통제하지 못했다. 이대로라면 괴물들에게 휩쓸리기만 할 뿐, 제 역할을 할 수 없으리라 판단한 카니악은 곧 어렵지 않게 결정을 내렸다.

“절대 정면에서 맞서지 마라.”

“그렇지 않으면 대장처럼 될 테니까?”

“이 자식이.”

카니악은 수하의 조롱 아닌 조롱에도 굳이 부인하지 않았다. 기습이었다지만, 그는 거인왕의 일격에 거의 전투불능 상태에 이르렀다. 설령 지금 다시, 만전의 상태에서 맞붙는다고 해도 결과가 그리 달라질 것 같지는 않았다. 물론 호락호락하게 당해줄 생각은 없지만, 진정 거인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모습으로 변한 거인왕은…그로서도 상당히 부담스러웠다.

[하찮은 것들이 점점 더 꼬이는군.]

용아의 합류는 아간투스베록의 흥미를 끌지 못했다. 그의 시선에서는 네 발로 뛰는 것들이나 두 발로 뛰는 것들이나 별 다를 바가 없었다. 모두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하찮은 것들에 불과했다.

[정녕 이런 것들로 나를 어찌할 수 있으리라 보는 건가?]

그의 분노 앞에 일부가 다시금 그에게 굴복했지만, 여전히 굴복하지 않은 것들의 수가 더 많았다. 그것들은 굴복한 것들과 싸우고, 일부는 넘어서서 그에게 직접 덤벼들기도 했다. 아간투스베록은 자신을 짓뭉개기라도 하려는 듯, 거대한 몸뚱이 전체를 던져오는 마물을 사납게 노려보았다.

되도 않는 도전을 해오는 것들은 짓밟으면 그만이다. 하지만 짓밟는 와중에 튀는 오물은 어쩔 수 없다. 그런 것은 그저, 불쾌할 뿐이다.

[주제를 알아라.]

영락하기 전에도 미치지 못했던 것들이다. 그런 놈들이 이제 와서 뭐라도 할 수 있을 줄 아는 것인가? 이런 꼴이 됐다고 해서 얕보이는 것인가? 아간투스베록은 이 모멸감을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노기등등한 그의 의지가 땅에 닿았다. 그가 팔을 드니 땅이 일어났다. 그가 팔을 휘두르니 일어난 땅이 몸을 던져오는 마물을 덮쳤다.

쾅!

단순한 토사(土沙)가 아니다. 그것은 거인의 의지 그 자체. 강철조차 단번에 우그러뜨릴 수 있는 거대한 힘의 발현이었다.

집채 만한 마물이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흙더미에 휩쓸렸다. 뒤이어 달려오던 괴물들도 여지없었다. 거세게 일어난 땅이 휩쓴 자리에는 적막만이 남았다.

아간투스베록은 자신이 만들어낸 파괴를 흡족하게 바라보았다. 최소한의 이성이 있는 것들이라면 더는 자신에게 덤벼들지 못하리라.

콰득!

그런데 그때. 왼쪽 발목 즈음에서 따끔한 고통이 느껴졌다. 내려다보니 그림자 속에 숨어 대가리만 내민 마물 한 마리가 그의 발목을 물고 늘어지고 있었다.

[그래.]

비록 지금은 보잘것없어졌지만, 그래도 한때는 나름 행세를 하고 다니던 것들이다. 저마다 쓸 만한 재주가 하나쯤은 있을 법하다. 이놈 역시 그렇다.

콰직!

끝까지 놓지 않고 버티던 마물의 대가리가 납작하게 으깨졌다. 그 와중에도 이빨 몇 개는 여전히 그의 가죽을 뚫고 살을 파고든 채 덜렁거리며 남았다. 그 하나하나에서 지독한 원념이 느껴졌다. 끝까지 떨어져 나가지 않고 버티는 이빨들은 그 하나하나가 저주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물론 저주라고 해도 고작해야 피륙에 파고드는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나 자신이 상처를 입었다는 사실 자체. 그것만으로 아간투스베록은 참기 힘든 분노에 사로잡혔다.

[바라는 대로 어울려주마.]

아간투스베록은 더는 가만히 서서 기다리지 않았다. 그가 먼저 괴물들의 틈바구니로 뛰어들었다.

쾅!

작은 산 하나가 통째로 떨어지면 이러할까. 훌쩍 뛰어오른 아간투스베록이 두 개의 머리를 가진 괴물의 몸뚱이 위에 내려앉자 괴물은 형체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으스러졌고 그 밑의 땅은 움푹 파였다.

콰각―!

짐승의 발톱처럼 날카로워진 손가락에 닿는 모든 것들이 갈려 나갔다. 피, 살점, 뼈, 모든 것이 너무도 간단하게 갈리고 튀었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자욱한 피안개가 일었다. 그런데 아간투스베록은 잠시도 멈추지 않았으니, 자연히 자욱한 피안개가 서서히 주변을 뒤덮어갔다.

이 순간. 거인왕이라는 이명은 그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차라리 세상의 종말, 혹은 죽음의 화신 같은 이름이 더 어울릴 것 같았다.

[보이나?]

군터는 아간투스베록의 살육과 파괴를 그저 지켜만 보았다. 힘을 보전하고 숨을 돌리려는 것도 있었지만, 지금 당장은 저 파괴자의 난동에 끼어들 마음이 들지 않았다.

[놈은 무리하고 있다.]

군터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저런 짓을 여유롭게 해대는 거라면, 이 싸움의 승산에 대해 다시 생각해봐야 했을 테니.

[그런데 놈은 그것을 모르고 있어.]

[확실한가?]

[그래. 해방감에 취한 거다.]

이미 자유로워졌다는 착각. 너무 오랫동안 억눌려 있었기에, 너무 오랫동안 참아야 했기에 자유에 대한 갈망은 비대해질 대로 비대해졌다. 오만함이 곧 정체성이나 마찬가지인 아간투스베록이었기에 그러한 갈망은 더더욱 그를 미치게 만들었다.

마를 대로 마른 입에 물이 쏟아진다. 급하게 마시면 얹힐 것을 알고 있지만, 심해질 대로 심해진 갈증은 그런 생각을 하기 힘들게 한다.

[그렇다면 결국 자멸하겠군.]

[그때까지 버틸 수 있다면 그렇겠지.]

하지만 저들은 버틸 수 없을 것이라고. 줄카는 그리 단언했다.

[하지만 그건 중요치 않다. 네가 해야 할 일은 기억하겠지.]

[물론.]

[놈이 흐트러질 대로 흐트러졌으니 곧 드러날 거다. 놓치지 마라.]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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