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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1026화 (1,026/1,064)

1026화

누구나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다. 아무리 여러 부분에 열려 있는, 혹은 깨어 있는 자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세상의 온갖 신비를 알고, 그 경계에 걸친 자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평범한 이들이 모르는 비밀스러운 것들을 많이 알고 있지만, 그런 그들조차 모든 것을 아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 그들도 당연히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지금 같은 경우였다.

어찌 짐작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멀쩡한 사람의 형체에서 갑작스레 굵직한 나무 줄기 같은 것이 생겨날 줄. 그것이 가시처럼 그들 중 하나를 찌르고, 꿰뚫어 높이 들어올릴 줄.

“허억!”

누구의 지시도 없었지만 그들은 다급히 거리를 벌렸다. 적을 베고 찔렀던 무기들을 회수할 겨를도 없이.

푸욱! 푸욱!

그런 그들의 뒤를 또 다른 가시들이 쫓았다. 사람 하나의 몸에서, 그 몸 전체보다 더 크고 긴 것들이 튀어나왔다.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지 않지만, 이것은 현실이었으며 당면한 위협이었다.

아무리 방향을 바꾸며 피해도 가시들은 곧장 따라붙었다. 마치 그 하나하나가 살아 있는 뱀 같았다. 한입에 먹이를 삼키려 달려드는 뱀.

“흐아압!”

아슬아슬하게 가시를 피한 한 사내가 그의 앞을 스쳐가는 가시를 도끼로 내리 찍었다. 도끼날은 수월하게 가시를 갈랐다. 쫓아오던 기세에 비해 가시는 생각보다 물렁했다. 뼈 없는 살점 덩어리 같은 느낌이었다.

털썩!

힘 있는 도끼질에 썩둑 잘린 가시의 일부가 땅에 떨어졌다. 잘린 뱀대가리처럼 꿈틀거리던 그것은 곧 축 늘어졌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거뭇하게 변하더니 일부 땅에 스며들었다. 그 모습이 꼭 물기를 잔뜩 먹은 진흙 같았다.

* * *

보리스는 고민했다. 눈 한번 깜빡이는 동안에도 마음이 수십 번은 변하고, 또 변했다.

정체 모를 적들과 싸우고 있는 울티노. 그를 도와야 하는가?

얼핏 생각하면 당연히 도와야 한다. 적과 싸우는 아군을 도와야지, 그럼 뭘 한단 말인가. 울티노는 부친의 수하이며, 지금까지 그를 지켜온 든든한 조력자였다. 그런데…저자가 아직 울티노라고 할 수 있는가?

보리스의 눈에는 더 이상 울티노라는 자가 그가 알던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함께 괴물을 상대해왔던 그가, 지금은 그 어떤 괴물보다도 더 괴물처럼 보였다.

어찌 해야 하는가. 이대로 계속 지켜만 봐야 하나? 아니면…….

‘아니. 아니지.’

보리스가 크게 고개를 저었다. 정신차려야 한다. 대체 뭘 망설이고 있는 것인가.

울티노라는 자. 처음부터 범상치 않은 자라고 생각하지 않았나. 물론 저런 비밀을 가지고 있을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지만, 그래서 너무나 놀랍지만, 그것이 지금 망설임을 이어갈 이유는 되지 못한다.

이제 와서 뭘 사람이네 아니네 따진다는 말인가. 보리스는 부친을 떠올렸다.

부친은, 그는 사람인가? 예전에는 그랬을지 몰라도 지금은 답하기 망설여지는 것이 사실이다. 군주 줄카는 부친을 대등한 동맹으로 대우했다. 초월자에게 인정받은 것이다. 그렇다면 부친 역시 초월자이거나, 그에 준하는 존재라고 봐야 할 터. 그런 이를 사람이라고 할 수 있나? 아니, 애초에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

괴물들이 도시를 파괴하고, 죽은 자들이 일어나 아군이 되었다. 거기에 이 도시를 공격하고 있는 적은 다름아닌 제국의 또 다른 군주다.

“정신들 차려라!”

수하들에게 하는 말이자, 스스로를 일깨우기 위한 말이기도 했다.

“울티노에게 접근하지 마라! 그와 거리를 유지하며 적들을 공격해라!”

지금까지 아군이었다. 그렇다면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가 인간이든 아니든, 사람이든 아니든 상관없다. 그는 부친의 수하이니, 부친이 그의 비밀을 몰랐을 리 없다. 알고 있었기에 자신의 호위로 붙인 것이리라.

‘언질이라도 주셨더라면.’

보리스는 잠깐 부친을 원망했다. 미리 알려주었다면 이런 추태는 없었을 것 아닌가.

“가자!”

잠깐 동안 보인 부끄러운 행동을 만회하려는 듯, 보리스는 패기 있게 외치며 가장 가까운 적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제 막 뒤쫓던 가시를 떨쳐낸 적과 그의 시선이 마주쳤다.

* * *

“으아아악!”

가시에 꿰뚫려 허공 높이 떠올랐던 사내가 비명을 지르며 자신의 몸에 박힌 가시를 붙들었다. 그리고 있는 힘껏 그것을 잡아 뜯었다. 다행스럽게도 가시는 보이는 것과 달리 그리 단단하지 않았기에, 그가 전력을 다하자 그리 어렵지 않게 뜯어졌다.

쿵!

그를 붙들고 있던 가시를 뜯어내니, 그는 당연히 땅으로 추락했다. 몸에 구멍이 난 채로 땅에 처박힌 그가 고통스럽게 몸부림쳤다. 금방이라도 숨이 끊어질 것처럼 헐떡이던 그는 곧 상처를 손으로 틀어막은 채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쿨럭!”

참기 힘들었던 고통은 호흡을 반복할수록 점점 줄어들었다. 그의 몸속에 흐르는 위대한 피의 힘이었다.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부러지지 않는 굳건한 몸과 정신. 비록 그가 지닌 피는 혈통을 이었다 하기에는 민망할 정도로 옅은 것이었지만 그럼에도 나름의 힘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크으.”

육체적인 상처는 그리 깊지 않았다. 처음 가시에 꿰뚫린 순간에는 끝났다고까지 생각했지만, 그의 몸을 관통했던 가시는 평범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이 몸을 파고들었을 때. 그는 불쾌한 무언가가 스며드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창칼이 살을 파고들 때의 느낌과는 전혀 다른, 형언하기 힘든 감각.

일반적이지 않다 해도 그만큼 큰 가시가 몸통을 관통했다. 그 정도라면 아무리 강건한 신체를 지니고 있다 해도 즉사해도 이상하지 않을 터인데 그는 상처를 부여잡고 있을지언정 멀쩡히 살아 숨쉬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그는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후욱. 후욱.”

몇 번 숨을 헐떡이니 서서히 상처가 아물어가는 것 같았다. 물론 착각이다. 사투를 이어갈 수 있도록 잠시 고통을 잊는 것뿐이다.

힘겹게 걸음을 옮기던 그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그가 찢어발겼던 가시의 일부분, 자그마한 살점처럼 생긴 것이 벌레처럼 꿈틀대고 있었다.

‘끔찍한 것 같으니.’

인상을 와락 구긴 그가 꿈틀대는 살점을 밟아 짓이겼다.

* * *

거인왕의 추종자이자 신도, 혈족인 그들은 이제껏 온갖 괴이하고 위협적인 적들을 상대해왔다. 그러한 적들 가운데는 제국의 그늘에 숨어 있던 음침한 것들도 있었고, 제국 밖의 강대한 존재들도 있었다.

그런 그들의 전투 경험은 단순히 다양하다, 많다 정도로 표현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그야말로 그들 하나하나가 백전노장이라 할 만했다.

그런데 그런 그들조차, 지금 그들의 눈앞에서 날뛰고 있는 괴물은 곤욕스럽기 그지없었다. 가시인지 촉수인지 모를 것들이 시도 때도 없이 튀어나오는 것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그것들이 제각기 살아 있는 것처럼 민첩하고 교활하게 움직여대니 이게 하나를 상대하는 것인지 여럿을 상대하는 것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마치 여러 마리의 뱀을 상대하는 것 같았다. 하나의 몸뚱이에서 솟아난 여러 마리의 뱀들은 저마다 독립적으로 사고하며 저돌적으로, 때로는 교활하게 대가리를 들이밀었다. 그런 와중에 본체는 여전히 강맹하게 날뛰니 그들은 점점 수세에 몰렸다.

그런 상태에서 보리스가 수하들과 함께 들이쳤다. 거인왕의 수하들은 이곳이 자신들의 마지막 전장이 되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크하!”

풍성한 갈기는 어느새 붉게 물들었다. 입과 코에서 흘러나온 피는 딱딱하게 굳었고, 그 위를 뜨끈한 피가 다시 적셨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눈에 더 이상 전의는 없었다. 대신 이렇게 끝날 수는 없다는 독기가 가득 들어차 있었다. 그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적을 노려보았다. 이쪽으로 걸음을 옮기는 와중에도 놈에게서 솟아난 것들은 착실하게 동료들을 몰아치고 있었다.

찔러도, 베도, 태워버려도 그것들은 잠시 늘어질 뿐 곧 다시 솟아났다. 언젠가 들었던 죽지 않는 뱀의 전설이 절로 떠올랐다.

“으아아아아!”

그는 무작정, 온 힘을 다해 달려들었다.

죽어가는 스스로를 느끼면서 가장 먼저 든 감정은 공포였다. 죽음이 아니라, 전혀 생각지도 못한 무력하고 시시한 최후가 두려웠다. 허무라는 괴물이 어느새 코앞에서 그 거대한 아가리를 벌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는 그저 앞으로 달려나갈 수밖에 없었다. 지금 당장 죽더라도 반드시 한칼을 먹여주고 말겠다는 절박한 오기의 발로였다.

두 발자국을 떼었을 때. 바로 앞의 땅이 흔들리더니 굵직한 가시가 튀어나왔다. 그는 반사적으로 허리를 틀며 검을 내리그었다. 날카로운 절삭음과 함께 가시의 첨단이 잘려 나갔다. 이번에도 역시 피는 튀지 않았다. 그는 위태로운 호흡을 가다듬으며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자 이번에는 좌우에서 두 개의 가시가 동시에 떨어져 내렸다.

‘늦어.’

세상이 멈춘 것 같은 순간. 그는 두 개의 가시를 모두 막아낼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하나를 막고, 다른 하나는 빗겨낸다.

그는 판단과 동시에 그대로 행했다. 우측에서 떨어지는 가시에 검을 휘둘렀고, 좌측에서 찔러오는 가시에 왼쪽 어깨를 내주었다. 왼쪽 어깨에서 번지는,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후끈한 고통이 그를 보다 예리하게 각성시켰다.

‘이제 곧!’

살점을 내준 대가로 두 걸음을 줄였다. 멀지 않았다. 여섯? 다섯 걸음? 그의 핏발 선 두 눈이 끊임없이 상대와의 거리를 가늠했다.

확신이 들었다. 닿을 수 있다는 확신. 이대로 허무하게 스러지지 않으리라는 확신.

그렇기에 조금 느슨해졌던 것일까. 아니면.

푸욱!

처음부터 착각하고 있었던 것일까.

“끅-!”

두 개의 가시가 날아들었다. 움직이는 것을 보았지만, 이번에는 미처 반응할 수 없었다. 움직였다 싶은 순간 그것들은 이미 그의 양 팔을 구속하고 있었다. 전혀 따라갈 수 없었다. 눈도, 사고도.

‘이놈…처음부터.’

전력이 아니었던가.

푸욱!

또 다른 두 개의 가시가 그의 두 다리를 꿰뚫었다. 지금까지의 것들과는 달리 바늘처럼 가는 놈들이었다. 이번에는 아예 움직이는 줄도 몰랐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지독한 놈이군.”

눈이 마주쳤다. 여전히, 뭐가 그렇게 화가 나는지 불덩이처럼 이글거리는 두 눈. 그것이 그가 마지막으로 본 것이었다.

푸확!

* * *

붉은 갈기의 사내가 사지가 찢겨 죽었다. 그 후의 싸움은 잔혹할 만큼 일방적이었다. 보리스와 그의 수하들이 거들지 않았더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크륵…….”

마지막 하나 남았던 적의 눈에서 빛이 사라졌다. 숨막힐 듯 들끓던 공기가 그제야 가라앉았다.

“울티노.”

싸움이 끝났음에도 몇몇 이들은 눈치를 보거나, 심지어 무기를 쥔 손에서 힘을 빼지 않았다. 그 묘한 분위기를 보리스가 읽지 못할 리 없었다. 사실 그도 그런 이들 중 하나였다. 그는 긴장을 유지한 채 등을 보이고 있는 울티노에게 다가갔다.

사방으로 뻗어가 넘실거리던 가시들이 울티노의 몸 속으로 사라졌다. 대부분의 가시가 어지간한 나무만큼 굵직하고 길었다. 그런 것들이 열 개가 넘는데, 한 사람의 몸속으로 소리 없이 스며들었다. 술법이라 한들 저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울티노.”

“…공자.”

두 번째 부름에 울티노가 답하자, 보리스는 그제야 몸에서 힘을 뺐다. 피아식별을 한다는 건 이성이 존재한다는 뜻. 스스로 답했듯이, 그는 여전히 울티노였다.

“대단하군.”

보리스는 울티노를 추궁하지 않았다. 그럴 이유가 있겠는가. 다소 충격적인 것을 보기는 했지만, 따지고 보면 울티노는 적을 상대로 크게 활약했을 뿐이었다. 보리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울티노에게 다가갔다.

“…….”

그러나 울티노가 그를 향해 돌아섰을 때. 보리스는 흠칫하며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아.”

“왜 그러십니까.”

보리스는 그답지 않게 침묵했다. 순간적으로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

“보셨다시피, 드러내기 힘든 재주입니다.”

울티노는 자신의 몸에서 솟아났던 가시들 때문인 줄 알았는지 어색한 말씨로 방금 일을 둘러댔다. 만약 그가 조금만 더 세심했더라면 보리스의 시선이 자신의 얼굴에 박혀 움직이지 않고 있음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렇군.”

보리스가 힘겹게 입을 뗐다. 그의 두 눈에 연신 기이하게 꿈틀거리는 울티노의 얼굴이 담겼다.

푸르스름하게 물든 볼에서 눈 하나가 깜빡였고, 움푹 들어간 이마에서는 자그마한 입이 달싹였다.

“대체…….”

불편한 적막을 깬 것은 뒤에서 들려온 로우렌의 날 선 목소리였다.

“당신은 뭔가.”

울티노의 시선이 로우렌에게 향했다. 목 언저리에서 나타난 눈알 두 개까지 더해, 일곱 개의 눈알이 일제히 돌아가는 모습은 그 자체로 섬뜩하기 그지없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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