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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1025화 (1,025/1,064)

1025화

“네놈들은 누구냐.”

눈앞에 나타난 자들이 아군이 아니며, 이쪽에 호의적이지도 않다는 것은 한눈에 알아보았다. 아군이었다면 크렘보르의 후계자를 알아보고 예를 표했을 것이며, 이쪽에 호의적이거나 하다못해 적이 아니기라도 했다면 자신들의 소속부터 밝혔을 테니까.

이들은 그 중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얼굴을 가린 후드를 벗지도 않았다. 보리스는 이 낯선 자들이 당장 무기를 들고 덤벼든다고 해도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정체는 모르겠지만, 이들은 명백히 적이었다.

그럼에도 부질없는 질문을 한 이유. 그것은 지친 수하들에게 조금이라도 숨 돌릴 틈을 주기 위함이었다. 얄팍한 수작이었으나 적들은 다행히 그의 잔꾀에 어울려주었다.

“우리는 신의 추종자다.”

“신?”

쉽사리 이해되지 않는 말에 보리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조금 더 이 의미 없는 대화를 이어가려 했다. 하지만.

“울티노?”

아무런 지시도 내리지 않았거늘, 아직 자신이 말을 끝내지 않았거늘 앞으로 걸어 나가는 사내. 보보리스는 그를 불렀으나 그, 울티노는 그의 말이 들리지 않는 것처럼 굴었다. 그에게서는 지금까지 한번도 보지 못했던 사나움이 물씬 풍겼다.

여기까지 적잖은 괴물들을 베어 넘기면서도 묘하게 가라앉은 것 같은 분위기를 고수하던 그였다. 마치 잘 훈련된 군마를 보는 듯했다. 그런데 지금의 그는 군마가 아니라 야생마, 아니 눈이 돌아간 맹수를 보는 듯했다. 정제되지 않은 투기와 살기가 뒤엉켜 난잡한 느낌까지 들 정도였다.

* * *

이 낯선 적들이 눈앞에 나타난 순간. 그는 스스로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피부병이라도 걸린 것처럼 온몸을 꽁꽁 싸맨 자들. 외관상 이들의 정체를 추측할 수 있는 단서는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울티노, 아니 할렌은 이 낯선 자들에게서 익숙함을 느꼈다.

단 한번 마주했을 뿐이지만 그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던 자. 지금 그의 주인이 맞서고 있는 대적. 그 증오스러운 거인의 냄새가 이 음침한 자들에게서 풍겼다. 짙지 않고, 적당히 희미한 정도에 불과했지만 할렌은 확신했다.

이것들은 거인의 수하가 분명하다. 어쩌면 그보다 밀접한 관계일지도 모르고. 설마 거인의 혈육인가? 아니, 아무려면 어떤가. 이것들이 거인과 어떤 식으로든 관계가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아―아아!”

기합, 혹은 괴성. 할렌은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괴이한 소리가 나오고 있다는 것도, 자신의 두 눈이 광인들조차 질겁할 정도로 기이하게 번들거리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본능적으로 낯선 적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어리석은.”

놈들은 제 주인을 닮아 오만했다. 단번에 머리를 쪼갤 기세로 달려드는 그에게 반응하는 것은 한 명뿐이었다. 한 명이 나선 이상 그걸로 충분하다고 여기는 것이 분명했다.

앞으로 나선 자가 팔을 쭉 뻗었다. 큼직한 로브의 소매에서 길쭉한 칼날이 불쑥 튀어나왔다. 할렌은 가볍게 몸을 흔드는 것으로 얼굴 한복판을 노리던 검을 피했다. 그리고 동시에 눈높이 즈음까지 세워 들고 있던 칼을 그대로 내리 그었다.

“흡!”

적의 반응은 민첩했다. 자신의 공격이 허망하게 빗나갔다는 것에 조금 당황하는 것 같던 잠시. 그는 훌쩍 뒤로 몸을 날렸다. 그러나 반응이 조금 늦어, 그의 품 넓은 로브가 길게 베이고 말았다.

“상당하군.”

“뛰어난 전사다.”

자기 일 아니라는 듯 지켜보던 이들이 감탄하며 한 마디 씩 던졌다. 그 품평하는 것 같은 어조가 할렌의 심기를 긁었다. 안 그래도 불길하게 동요하고 있던 그의 마음이 더 크게 흔들렸다.

“나서지 마라. 놈은 내 상대다.”

할렌의 눈빛이 한 순간에도 수십 번 변하는 와중. 뒤로 몸을 날렸던 자가 너덜너덜해진

로브를 벗어 던졌다.

“괜찮겠나?”

“자신과 과신은 구분해야 할 것이야.”

로브로 감췄던 모습이 드러났다.

감탄이 나올 만큼 탄탄한 체구. 그러나 마치 여인처럼 길게 머리를 기른 자였다. 아니, 자세히 보니 그것은 일반적인 머리카락이 아니었다. 흡사 짐승의 갈기 같이 풍성한 털들이 머리카락과 구분하기 힘들게 나 있었다.

“흥! 너희는 너희가 해야 할 일을 하도록. 나는 내 일을 할 테니.”

짐승인지 사람인지 모를 자가 투쟁심으로 가득한 눈을 빛내며 할렌을 응시했다.

“너, 훌륭한 전사여. 너는 내 상대로 부족함이 없다. 나는…….“

뭐라고 하려 했을까. 구구절절한 자기 소개? 아니면 옛 이야기 속 영웅들의 흉내라도 내려던 걸까?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 그가 첫 한 마디를 뱉을 때부터, 인내심의 마지막 끈은 할렌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고 있었다.

“크…….”

더는 참지 않는다. 왜 참는다는 말인가? 증오스러운 적이 눈앞에 있다. 찢어발기면 그만 아니겠나.

크아아아아―!

위태롭던 이성이 끝내 점멸했다.

* * *

느닷없이 터져 나온 포효에 당황한 것은 낯선 적들만이 아니었다. 울티노가 멋대로 나섰을 때부터 보리스와 일행은 뭔가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것을 직감하고 있었다.

‘아는 놈들인가?’

울티노는 놈들이 처음 나타났을 때부터 이상한 반응을 보였다. 감정이 상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만약 그가 놈들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면, 그리고 놈들과 전에 얽힌 일이 있었다면 그의 반응이 아주 이해 못할 바는 아니었다. 물론 그렇다 해도 감정적으로 행동한 것은 지적해야 할 부분이겠지만.

크아아아아―!

그런데 그가 느닷없이 끔찍한 포효를 토했을 때. 보리스의 머릿속에 가득하던 모든 생각은 싹 날아가버렸다.

‘대체.’

대다수는 귀를 찌르는 소리를 들었을 뿐이었지만, 보리스는 그 흉측한 소리 안에 자리한 본질을 느꼈다. 더없이 사납고 흉측한, 평범한 사람에게는 절대 있을 수 없는 무언가. 그것의 일부, 어쩌면 그림자에 불과한 것을 감지한 순간. 가슴에 거대한 쇳덩이가 떨어져 내리는 듯했다.

‘대체.’

흔들리는 보리스의 시선이, 다시 한 번 적들을 향해 달려드는 울티노의 뒷모습에 닿았다.

* * *

“심상치 않은 놈이다!”

“그래. 사냥해야 한다.”

보리스가 그랬듯, 그들 역시 방금 그 끔찍한 포효 안에 자리한 본질을 어느 정도 감지했다. 그들은 저 사람 껍데기를 쓴 것이 사람 이상의, 알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리고 더는 저 정체를 알 수 없는 적을 상대로 사치스러운 여유를 부릴 수 없다는 것도 알았다.

짐승 같은 갈기를 지닌 사내 역시 눈빛을 달리 했다. 전사의 싸움 운운할 때가 아니다. 그들에게는 그들의 목숨을 다 바치더라도 완수해야만 할 임무가 있었기에.

챙!

전력으로 찌른 검이 허무하게 튕겨 나갔다. 가볍게 후려친 듯한데 손은 물론, 팔 전체가 저릿했다. 방금 전보다 더 빠르고, 더 강해졌다. 믿기 힘들고, 받아들이기는 더 힘들지만 힘의 차이는 분명했다.

“정면은 내가!”

그들은 위대한 혈통을 섬기는 신자이면서 동시에 빼어난 전사였으며, 뛰어난 사냥꾼이었다. 그들은 때로는 전장의 군인으로서, 때로는 수색자이자 사냥꾼으로서 그들의 주인을 섬겼다.

온갖 상황에서 온갖 적을 상대해왔다. 이런 난적을 상대한 경험 역시 여럿. 그렇기에 그들은 기민하게 움직였다.

‘이성을 잃은 것인가.’

번들거리는 두 눈은 미치광이의 그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속단은 금물이다. 직접 확인해보기 전까지는 무엇도 넘겨 짚어서는 안 된다.

‘일단…흔들어볼까.’

동료들이 자리를 잡은 것을 확인한 그가 마른 한숨을 내쉬며 상대에 모든 신경을 집중했다. 한눈에 보기에 균형이 흐트러져 있다. 몸이 앞으로 쏠려 있으며, 손에 쥔 검 또한 바람을 맞은 잎처럼 불규칙하게 흔들리고 있다.

“핫!”

선수를 취했다. 먼저 덤벼들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던 것인지, 상대의 광포한 눈빛이 일순간 흔들렸다. 그러나 곧, 언제 그랬냐는 듯 정면으로 몸을 던졌다. 마주 달려드는 모양새가 된 그들. 충돌은 순식간이었다.

‘빌어먹을!’

먼저 움직인 것은 이쪽. 그러나 선공은 그의 것이 아니었다. 그가 한 호흡만에 검을 뻗으려 할 때. 불과 반 호흡도 안 되는 짧은 순간에 저쪽의 검이 먼저 찌르고 들어왔다. 그는 어정쩡하게 멈춰선 검을 곧추 세우고 어느새 눈앞까지 다가온 상대의 검을 막아낼 수밖에 없었다.

카가각―

불똥이 튀며 칼날이 깎여 나갔다. 후끈한 열기가 눈앞에서 튀었다. 최대한 흘렸음에도 미처 다 감당하지 못한 힘의 여파로 몸의 균형이 깨졌다. 억지로 버티려고 하면 어떻게든 버틸 수 있을 것도 같았으나, 그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짓누르는 힘에 저항하는 대신, 그 힘이 미는 대로 밀려주었다.

‘가차 없군!’

단번에 생겨난 틈. 상대는 그 빈틈을 우악스럽게 밀고 들어왔다. 여러 개의 검광이 번뜩였고, 그는 이를 악물며 그것들을 최대한 쳐냈다. 검과 검이 부딪칠 때마다 온 몸이 쪼그라드는 것 같은 충격과 고통이 밀려왔다. 거기에 중간중간 날카롭게 주먹질과 발길질까지 들어오니, 어느 순간부터 그는 모든 공격을 받아내는 것은 포기한 채 급소만 지키기에 급급했다.

퍽―!

쭉 뻗은 발길질이 가슴 한복판을 때렸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그가 뒤로 크게 날아갔다. 스스로 반응한 것이 아니었다. 그럴 틈도 없이 무지막지한 힘에 밀려 나가 떨어진 것뿐이었다.

“커헉!”

뜨끈한 피가 목구멍을 타고 올라와 입밖으로 새어 나왔다. 뱉고 싶었지만 이룰 수 없는 바람이었다. 벌써 코앞까지 들이닥친 적이 있는데, 어떻게 그런 여유를 부리겠는가.

‘단단히 밉보인 모양이군.’

가장 먼저 눈에 띄었기에 가장 먼저 죽여야 할 대상으로 찍힌 모양이다. 덕분에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 상황에, 그는 내심 웃었다.

‘좋아.’

적은 맹렬하며, 감정적이다. 앞뒤 가리지 않고 쏟아내는 적의. 이 정도면 거의 광전사라고 해도 좋을 정도다.

‘이 정도면 할 만하다.’

정교함 없는 힘은 강할지라도 위협적이지 않다. 공략법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고대부터 숱한 강한 존재들이 그보다 못한 것들에게 밀려왔던 것이다.

‘다시 간다.’

그는 동료들에게 신호를 주었다. 다시 한 번 상대가 밀고 들어오는 순간, 그들은 움직일 것이다.

쿵!

한번의 도약으로 거리를 좁혔다. 오직 다리 하나로 그 모든 힘과 무게를 지탱하며 육중하게 땅을 짓누른다. 그는 직감적으로 이 다음 순간, 저 시퍼런 칼날이 목을 향해 날아들 것을 예측했다.

‘온다.’

그의 예상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칼날이 번뜩였음을 인지한 순간. 이미 검 끝은 거리를 반절 이상 좁혀오고 있었다.

지금이었다. 운명의 저울에 승리와 목숨을 올려놓아야 할 때.

크허엉!

비록 미미하다 할 정도의 옅은 피였으나 그 역시 고귀한 핏줄이었다. 그는 그 사실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고, 그 자부심에 걸맞은 힘도 지니고 있었다.

그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제법 길게 자라난 어금니가 아랫니들과 부딪치며 듣기 싫은 소리를 냈다. 몇몇 단단하지 못한 이에는 금이 가기도 했다.

부웅!

그야말로 전력. 세상을 잊고, 자신조차 잊은 채 온전히 눈앞의 상대에게만 집중했다. 덕분에 그의 검은 먼저 움직이지는 못했으나 늦지 않게 상대를 맞이할 수 있었다.

챙강―

검과 검이 부딪쳤고, 하나가 부러졌다. 애석하게도 그의 검이었다. 마지막 순간에 두 검은 대등했으나, 이전까지의 충돌에서 입은 크고 작은 상처가 여럿이었던 탓이다.

중간에서 뚝 부러진 칼날이 위로 튀었다. 맞부딪치며 멈칫했던 검이 다시 움직임을 이어갔다. 그의 눈이 점점 다가오는 검을 쫓았다.

서걱―

그는 뒷걸음질 쳤고, 그와 동시에 베였다. 목과 가슴의 중간. 뼈가 잘리지는 않았지만 드러나기는 할 정도로 깊은 상처. 그는 피를 토했고,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그리고.

쾅!

철퇴가 적의 등을.

퍼억!

도끼가 적의 팔을.

푸욱!

창이 적의 다리를 찔렀다.

뒤로 넘어가는 그의 눈에 그 모습이 보였다. 자신을 쓰러뜨리고도 만족하지 못한 채 흉흉하게 재차 달려들려던 적이 움찔하는 모습. 그를 둘러싸다시피 한 동료들.

위태로운 상황 속에서 구상하던 그림이 깔끔하게 완성됐다. 그래. 그런데…….

‘어째서.’

어째서 가슴이 아직도 이리도 세차게 뛰는가. 타 들어가는 고통 떄문에? 아니. 그는 이 감정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이것은 불안감이다.

그는 직감했다.

무언가 잘못됐다는 것을.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쿵!

그는 쓰러졌고.

푸욱―!

무언가가 꿰뚫리는 소리가 들렸다. 당황하는 목소리가 이어졌고.

콰앙!

땅이 흔들렸다.

“커헉!”

쓰러져 있던 그의 뿌연 시야에, 저 높이 솟구치는 무언가가 들렸다. 고통스러운 비명은 그곳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무언가, 길쭉하게 뻗은 것의 끝에서.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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